00X-MAS’ 12 우리 딸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연극에서 베들레헴의
별이라는 애매한 역을 맡았다. 첫 리허설이 끝나자 딸은 금색 반짝이를 붙여 환히 빛나는 별 옷을 입고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연극에서 네가
하는 일이 뭐니?” 내가 물었다. “그냥 서서 반짝이기만 하면 돼요.” 딸은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영 잊혀지질 않았다. 딸이 연극에서 맡은
역할이 내 삶의 한 장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 때 빛나려고 서성이던 시절이 있었다.
언젠가 우리 집에서 여자들의 모임이 있어 차를 대접했다. 그들이 차 마시는 일에 갖은 공을 드리는 것을 잘
아는지라 나는 레이스 달린 냅킨, 꽃 장식, 은제품, 고급 빵 따위로 며칠씩 야단법석을 떨었다. 한 손님이 “오늘은 정말 전에 없이 실력을
발휘하셨네요”라고 말했다. 칭찬으로 했을 그 말이 돌연 진리가 되어 나를 때렸다. 나는 모든 사람보다 더 잘하고 더 빛나려고 애썼다. 내 동기는
따뜻한 대접과 우정이 아니라 스타(Star)의 인정욕구였다. 모임이 끝난 후 나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스타가 되려는 내 욕구를 애써
내려 놓았다.
화려한 스타는 칭찬받을 만한 일을 줄줄이 성취하려 전력분투한다. 이 화려한 스타라는 에고(ego)의 가면을 쓰면,
가장 환히 빛나는 사람이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개념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진정한 스타의 과제는 자기 ‘내면의 빛, 하나님의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란한 행위로 스스로 빛과 온기를 만들어 내려고 끊임없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
- 수 몽크 키드 / 『기다림』에서
0091. “동방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 왔도다”(찬116
①)젊은 옥스포드 학자 로버츠(P. W. Roberts)의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헌 책 한 권이 선물로 놓여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Marco Polo, 1254-1324, Travels)이었다. 13세기의 유럽 미개인들에게는 동양의
중국 등의 선진국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베니스 태생의 무역상인 폴로는 실크 로드(Silk Road)를 따라 계속 여행 중 옛
『바사』(Persia, 오늘날의 이란) 제국을 지나면서 동방박사 세 사람의 무덤과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이 이야기가 로버츠씨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동방박사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무덤에서 출발하여 베들레헴까지 여행을 계획, 옛 바벨론 제국(이락), 옛 앗수르
제국(시리아)을 거쳐 드디어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동방박사들의 행로를 따라 여행을 마친 그는 ‘In Search of the Birth of
Jesus - the Real Journey of the Magi’ (1995) 라는 책을 출간하였다(그는 캐나다로 이주하여 현재 토론토에 살고
있다).
0092.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 (1) 마태복음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2:11).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의 3중 직책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었다(구약성경에서 ‘사사’들은 이 기름부음이 없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 동방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 세가지는 이 직책 - 황금(왕), 유향(선지자), 몰약(제사장) - 을 상징한다.
주님이 탄생 시에 받으신 세 종류의 예물은 주님이 세상 떠나실 때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모두 주고 가신 선물이다:
1) 황금
(재물, 왕, 뜰, 길) - “우리는 다 왕 같은 제사장”(벧전2:9-12)이지만 세상, 재물, 황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뜰에 들어갈 때 다 태워
죽여야하는 값진 짐승일 수도 있다. 우리의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지 못할 때에는 그 재물은 재난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시라.
2) 유향 (재능, 선지자, 성소, 진리) - 재물은 없으나 재능가진 자의 재능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지 못할 때에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라. 성소에서 배우고 세상에서 전해야 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우리의 모든 재능이 동원되어야하는 원리이다. 얼마나 많은
재능자들이 ‘자기실현’, ‘자기구현’에 자기재능을 낭비함으로 자기우상숭배로 인생을 마치는가를 생각해보시라.
3) 몰약 (목숨, 제사장,
지성소, 생명) - 재물, 재능이 없는 자도 이것들보다 더 귀한 목숨은 갖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대제사장이시면서
동시에 스스로 자원하여 제물이 되셨다.
009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마1:21)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의 제일가는 목적 중 하나는 자기백성들의 죄문제 해결을 통한 구원이다. 정치, 경제,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도덕, 윤리문제 해결하기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1960대에 길거리의 만병통치약 파는 약장사 같은 만병통치약 ‘복지’로 전하는 목사들도 있다. ‘모든 문제가 다 끝났다’라는
등의 난폭한 설교들... 교회사의 가장 흔한 갈라디아서 2:20절 이단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구약을 인용해가면서 왜 예수가 그리스도인지를 설명하지는 않고 무슨 ‘혁명구호’외치듯 외치면 기적이 일어날 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독한 미신이다. 신복음주의의 트레이드 마크인 대형집회와 구호에 크게 오염되어 입력이 크게 잘못되어있는 것 같다.
0094. “<첫>(맏)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마1:25,
KJV)
모든 성경, 천주교 Latin Vulgate 성경에도 나오는 이 한 단어 “첫”(Firstborn)은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타이틀로 일곱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천주교 교리의 하나인 마리아의 ‘평생동정녀설’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최근에 성경에서
제거시킨 단어다. 이 단어 하나가 천주교 신학을 뿌리채 흔들기 때문이다. “첫(맏)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첫 아들을 낳은 후에는
동침했다는 뜻이며, 첫 아들은 둘째, 셋째 자녀들도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에서 첫
열매라는 개념은 나중에 열릴 열매를 암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함의가 없이는 ‘첫’열매의 ‘첫(맏)’이라는 단어는 무의미 해진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활을 동반하는 것이다(골2:12/3:1/살전4:16).
“...낳으메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1:25) NIV등 현대역 성경들은 창조주 예수님을 인간 요셉의 아들로 만들어 ‘뉴에이지’ 예수로 변개시켜 놓았다. 즉, 요셉이
예수님의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he gave him the name Jesus”).
0095. 1948년 / 신복음주의의 시작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영향하에 1948년을 기해 오켕가(H. J. Ockenga)목사의 주도하에‘신복음주의’(Neo/New
Evangelicalism)가 미국 남가주 파사데나(Pasadena)의 화려한 시청극장에서 시작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입힌 피해는 너무나
크다. 사단은 우선 성경용어들을 제거시키고 심리학, 철학, 인본주의자들의 세상적 일상용어로 바꿈으로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신복음주의의
대부 맥거번 박사에 의해 ‘영혼구원’(Soul Winning)은 ‘교회성장’(Church Growth)이란 용어로 둔갑하였다. ‘회개와 구원’은
‘드러냄, 치유와 회복’이란 심리학적 용어로 바뀌면서 기독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자 인간 최고의 재난인 “죄 가운데서 죽는 것”(요8:24)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무시하였다.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라는 주제의 핵심인 ‘회개와 구원’은 유치한 주제로 밀려나
‘회개와 구원’을 외치면 성숙되지 못하고 좀 모자란 설교자로 취급당하게까지 되었다. 마9:13의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to
repentance)도 성경 본문에서 제거되었다. 주제가 밀려나니 21세기 교회안에서 미신을 섬기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믿음을
사장시키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로 유지되어야할 믿음은 인간들의 야망에 초점을 두고 겉치레로 거창하고 화려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시적인 미신적 구호들로 가득 찬 피조물들의 행위종교(religion)로 향하게 만들었다. 죄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다시 종교의 사슬에 묶여버렸다.
현실적인 죄와 싸우는 전투적 삶은 사라지고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초점을 모은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라는 말씀을 “내가 행복하니 너희도 행복할지어다”로 읽고있다. 교회강단에서
기타들고 부르는 노래를 잘 들어보시라: “나는 기뻐요 나는 행복해요” 하나님 경배가 아니고 자기가 경배대상인 자아(自我)예배다. 이래저래해서
“예수믿고 청와대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세상에서 성공”, 하나님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을 통한 자기실현으로 자기만족이다.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고난을 다루고있는 히브리서를 인용한 설교제목이 ‘행복비타민’이라니...? (목사의 복장이 ‘행복비타민’을 따라주는 술집 ‘바텐더’복장을
하고 있으니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고있는 것 같아 혐오스럽다. 생선은 대가리부터 썩는다더니...). 하나님께가 아니라 사람에게 신경쓰느라 정신이
없다. 신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천국복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간들의 모든 필요에 따라 초점을 맞추느라 현대교인들을 완전히
스포일(spoil)시켜놓아 교인들은 이미 영적성장을 멈춘 탁아소의 유아들이 된 것도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이 종교적 실용주의,
신복음주의는 기독신앙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아 사람만 많이 모인다든지 효과적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진리로 여겨지게까지 되었다. 결과만 얻을
수 있다면 무조건 좋은 일로 추앙, 지도자등을 평가하면서 고뇌하는 소수의 진실된 종들의 목을 죄인다. 그러나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의인(義人)의 수는 ‘좁은 길’에 있어 그 수는 지극히 적을 뿐 아니라 우리도 지금 좁은 길의 선상을 걸어가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한다.
최근의 뉴욕타임즈에 의하면 전 미국 성인의 10%가 넘는 숫자가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무서운 숫자이다. 캐나다도
뒤따르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본인 죄(罪, sin)문제를 다루지 않으니 죄의 결과인 범죄(crime)문제가 경찰,
국가로 넘어갔다. 국민의 세금으로 교도소를 세우고 또 세워도 모자랄 정도로 범죄자들이 차고 넘친다는 기사이다. 교도소를 증축하느라고
주(州)예산이 부족하여 초등학교들을 폐교하는 지경에 이른 캐나다 서부의 실정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평생의 외침이 ‘회개와
구원’에 관한 선포임은 너무나 자명하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 직분들은 갖고 있으나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를
맺고 있는 교인은 실제로 2-30%가 안된다고 보면 지나친 편견일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religion)로
오해하고있다. 세미나 중 식사시간에 어느 목사님이 “선교사님은 후합니다”라고 하신다. 무슨 말씀인가 물으니 자기 생각으로는 교인들 10%도
거듭나지 못한걸로 본다고 한다. 교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직분이 문제가 아니다. 창피한 것은 이 세상 살 동안 다 당하고, 구원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여러 분야에서 노심초사 사역하시는 종들의 사역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고 무궁무진하여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6.25사변 후, 길거리에 앉아 점치는 점쟁이 할머니로부터 “자네는 예수믿을 팔자라네,
예수한테나 가게나!”라는 점괘를 받고 목사가 되신 분도 있으니... 인간이란 다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같은 존재이며 필자 자신도 누추하고 허물많은
사람이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이 늘 더 급한 사람이자 문제아다. 온전한 영적 거듭남와 혼적치유의 구분이 사라지고 있으니 종교통합이
더러운 홍수처럼 밀려온다. 혼적치유가 채워지자 더 이상 주님을 찾지 않은 9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눅17:11-19)는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 거듭남의 기회를 혼적치유가 가로채어 영적 길을 방해하는 것도 ‘마귀의 궤계’(엡6:10-20) 목록에 들어있어 어느 종교 안에서나
사단이 자유자재로 크리스천을 속인다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명이 치유, 회복받았으나 실제로 주님으로부터‘구원’의 확답을 받은 자는
사마리아인 한 명 뿐이었다(19절).
완벽주의는 죄(罪)의 음흉함과 회개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성령운동?(성령이
무슨 운동기구인가? 성부운동, 성자운동도 있단 말인가?)은 ‘나서기’좋아하는 자들이 자기 교만에 속아 ‘마귀의 궤계’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다. YWAM(예수전도단)은 이 단체를 세계적인 조직으로 키우기 위해 로마교황청과 협상, 1987년 New Orleans에서 있은
‘Charismatic Congress’(은사주의자들 대회)때 이미 1,000명이 넘는 카톨릭 스텝들을 ‘YWAM workers’(‘O
Timothy’, 15 Nov. 1987)사역자로 받아들였으며 로마카톨릭 교구전도를 극찬한 Loren Cunningham (LC asks
every denomination to help fulfill the Great Commission, and praised a Catholic
Church plan to evangelize parish by parish - Charisma, Aug. 1990)이나 20명이 넘는
로마카톨릭 성자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인정한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 (책의 내용은 ‘배도하는 그리스도인’이다)을 쓰신 분은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표현대로 ‘적응, 타협의 명수’들로 둔갑하였고,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한국교회는 로마화(化)의 재난에 처해있다(이 주제는 계속 다룰
생각이다).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십자가 밝히 보여주소서
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
(찬 531 /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④)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