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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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슬슬 이제 우리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늘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다간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할 때면 나도 정말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라, 그렇다고 당당한 모습도 아닌(당연히 그럴 수 없고) 마음 깊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과 마음을 따라 온 것에 대한 즐거움으로 그냥 그렇게 잘 서있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보았습니다. 지난 호부터 시작된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앞으로 계속하여 심도있게 밴쿠버 그리스도인 여러분과 나누기 원합니다.

1. 한민족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한민족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 궁금한 사안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호에서 나눈 ‘통일의 본질’을 기억하신다면 한민족을 향하신, 통일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당부분 엿보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원래 하나였던 것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 원래 한민족이었던 남과 북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 ‘통일의 본질’과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은 더 이상 의문표를 달아야 할 사안이 아닌 것이죠. 하나님의 관점으로 한반도 통일을 바라보아야 하고, 통일은 반드시 됩니다.

2. 통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직도 장벽이 저렇게 있고 남과 북이 냉랭하게 맞서고 있는데 통일이 시작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곧 다시 오마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을 따라 지금 살고 있는데, 통일이 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으실겁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완전한 통일을 이루셨던 하나님께서 사탄이 깨어버린 분리(분열)를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통일’을 이루셨고, ‘통일’을 이루신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통일됨’은 이미 이루어졌고, 세상에서 그 ‘통일’을 이뤄나가고 계십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이요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남과 북은 어떠합니까? 남북도 이미 통일이 시작되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급작스레 일어난 북한에서의 아사자(餓死者)발생은 탈북민을 만들어내고 탈북민은 국내에만 2만 4천 400여명, 해외에 있는 디아스포라 탈북민들은 최소 10만에서 30만 명까지 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문제로 탈출했다고 생각했던 관점에서 하나님은 눈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이루어지는 통일코리아의 미래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탈북민들은 지금 남한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은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를 이미 살고 있는, 통일을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로 더 이상 탈북민이 아닌 ‘통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3. ‘탈북민’도 ‘탈남민’도 아닌 우리는 ‘통일인’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탈북민’이라는 호칭이 별로 듣기 좋지 않다는 평가가 있어 ‘새터민’이라는 호칭도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그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우리가 ‘새터민’이면 한국사람들은 ‘헌터민’이냐고 해서 우리를 웃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해외에 오래전에 이민 가신 어떤 분은 당신은 ‘탈남민’이라고 하시면서 탈북민인 우리의 처지에 깊이 동감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우리 모두 ‘통일인’으로 살기 위해 아브라함처럼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 부름 받은 원래의 자리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Plus








깊이 생각해야 할 일들



음악의 구성, 내용은 대화와 같이, 서로 묻고 대답하는 형태로 되어있다. 음악에서 주고 받는, 대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음악의 예술적 행위를 통한, 감동과 연주내용에 대한 감탄과 경탄에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을 얼마만큼 감동시키고, 마음에 얼마나 인상 깊이 만족시키는 가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행위는 완벽할 수 없고, 사람들의 만족을 완전히 채울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음악은 예술적인 연주만으로 그 책임을 다할 수 없다. 교회 음악의 예술적 행위 안에는, 우리 주님 만이 사람들의 희망과 빈 마음을 채울 수 있고 언제나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생각이나 생활과 감정의 부분들을 민감하게 하시고 다시 조이고 바르게 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음악 연주 안에는 항상 주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교회음악 연주와 연주자는 가장 큰 목적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임을 확신해야 한다. 교회음악인이 자신을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물들지 않도록 하는 일은 교회음악 연주를 통하여 회중과 성도들에게 감동의 물결이 전달 되고 감격하며 떨림이 있고 신앙의 신선한 충격을 줄 때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전달되는 것으로 착각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께로 향한 성도의 삶의 목적이며 신앙 성장에 큰 도움을 준다.

교회음악으로 인한 감동과 감정의 충격은 세상에서의 감격, 감동, 충격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야고보서 1장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아멘.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6 장 사랑스러운 톰보이들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더 깨
달았다. Email을 보내왔다.

목사님, 두 번 째 참석하는 치유학교, 너무 좋습니다 !!
저는 오랫동안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나의 십자가다’라고 생각하고 십자가를 성실하게, 또 제대로 지고 산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지워주지 않은 십자가를 제 스스로가 저의 상처 때문에 땀을 흘리며 지고 있었다는 것을. 쯧쯧... 이런 무식한... 이제 그 십자가를 날마다 내려놓는 중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가끔은 그 십자가를 잊지 못하고 다시 짊어지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만... 제게 치유학교가 없었더라면 제 삶이 또 제 아이들의 삶이 어떤 길로 흘러가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

그런데 지난 주 강의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저도 여러 사람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저만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늘 생각했는데...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자세히 생각이 나니까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고, 큰 빚을 진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했고 이제는 직접 사과할 수 있는 용기도 주셨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빠른 시일 내에 사과 작업을 시작하려 합니다.

많이 성숙해진 여성의 모습이 나온다. 상처를 많이 입은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나는 피해자야!’라는 강한 확신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상처를 주었고 그래서 그 사람이 지금도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없고 느낌도 없다. 그래서 그 사람 주위의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상처를 입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서 이루는 가정은 예수를 믿는 가정일지라도 천국의 분위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보는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삶의 여러 상황을 남편의 관점에서, 자녀들의 관점에서, 직장 동료의 관점에서, 상사의 관점에서, 목회자의 관점에서 보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만져 주는 시림이 되어가는 것이다. 메일이 계속된다.

목사님 내외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해지는 저를 발견합니다. 마음 한 쪽에서 분노를 삭이면서 어쩔 수 없이 꾹 참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 사람의 행동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살피게 되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흥분이나 분노도 많이 줄어드는 거 같아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무시당했다거나 하는 상황에서도 예전처럼 울거나 슬퍼하거나 화내거나 하지 않으니까요. 목사님, 제가 너무 너무 대견하지요 ?? 제가 봐도 그래요 ㅋㅋㅋ ....

이제부터 해결해야 할 관계들이 아주 많다. 앞으로도 상처받고 눈물을 흘리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부모님과의 관계, 자매들 사이의 관계도 아직 많이 어렵다. 자녀들을 기르면서 어린 시절의 아픔들도 자주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자매와 그 가정에서 꾸준히 일하시는 것이 보인다.

내가 자매에게 여러 번 강조해 주었다. “자매님의 치유를 계속 진행시키면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예요. 자매님이 지금까지 경험한 치유의 은혜를 주위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나누어주는 것이예요.”

내적 치유는 매우 아주 큰 떡 시루를 연상시킨다. 한 층이 드러나서 그것을 해결하면 바로 그 다음 층이 솟아오른다. 아무리 치유를 계속해도 그 다음, 그 다음 층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몇 층이나 남아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우리를 좌절하게도 하고 흥분하게도 한다. 그러나 그 다음 그 다음 층을 주님과 함께 해결해 나가면서 경험하는 기쁨과 보람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늙은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히 수도를 다녀올 일이 있었다. 그래서 볼료자라는 형제에게 수요일 성경공부를 인도하도록 준비시켜 놓고 출발했다. 돌아와 보니 교회의 분위기가 왠지 썰렁해져 있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연세 드신 몇 분이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이런 분위기가 가시질 않아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너무도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수요일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볼료자가 자신들과 같은 늙은이들은 다 죽어야 교회가 산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로 인해 나이든 사람들은 굳이 교회에 다니면서 젊은 사람들이 죽어주길 바라는 처지가 될 바엔 그냥 집에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안 나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늙은이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 바엔 젊은 사람들끼리 잘 하면 될 것 아니냐며 섭섭함을 토했다.

교회 개척은 과부들 몇 사람으로 시작했지만 그 들 중엔 세상에서 유력한 사람들도 있었다. 볼료자는 유난히 장유유서의 전통이 강한 그 지역에서 나이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는 몇 사람이 교회를 좌지우지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편 개척초기에 열심이던 연세드신 분들은 청년세대가 부흥하게 되어 젊은 리더들이 세워지자 선교사까지도 젊으니 서로 짝짜꿍이 되어 자신들에게는 소원한 것 같아 서운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늙은이가 다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나는 볼료자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내용은 이렇다.

볼료자가 예수를 믿은 지 육개월 쯤 되었을 때 현지인 의식개혁을 위해 한국의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초청프로그램이 있었다. 볼료자는 교회의 젊은이 한 사람과 함께 한국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 훈련을 마치고 어느 목사님 댁에 묵게 되었는데 그 목사님은 “여러분이 죽어야 선교지의 교회가 삽니다”라며 몇 번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한국에서 들었던 그 말씀을 성도들에게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라고.

나는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볼료자에게 어르신들은 자신들이 다 죽어야 교회가 산다고 하니 교회 다니며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죽길 바랄 바엔 집에서 죽는 것이 나으니 교회를 안가겠다는데 한국에서 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성도들에게 전달했느냐고 물었다. 볼료자가 궁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나는 그냥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 보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제 나의 할 일은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죽는 것인지를 본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몇 주 동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 안에서 내가 죽고 산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시간이 흐르자 이해가 되었는지 모두가 숙연해졌다. 진정 죽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것 같았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가 되고 그렇게 소원하는 바이지만 나 자신이나 그들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내가 펄펄 살아있지 않는가!

얼마 전 미국에서 선교강의를 하러 왔던 한 선교사가 이런 말을 했다. 가장 무섭고 끔찍한 일 중의 하나가 죽다가 덜 죽은 일이라며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완전히 죽어야 한다며 이런 일화를 들려 주었다.

그 자신이 시골에 살 때 명절에 닭을 잡다가 놓쳐 닭이 모가지가 꺽인 채로 피를 흘리며 온 마당을 뛰어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흔들거리는 머리와 부릅뜬 눈으로 뛰어 다니는 그 모습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이었다고 한다. 죽으려면 완전히 죽어야 하는데 덜 죽어서 혐오스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아닌가?

이 사건 이후에 교회는 안정이 되었고 신실한 젊은 사람들이 세워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개척초기부터 열심으로 섬기던 교장출신의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자 교회의 결정에 사사건건 불만을 토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다른 교회를 개척하겠다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그 분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일부 성도들은 난감한 입장이었다. 신앙적으로 판단하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오래 인간적인 관계로 얽혀 있던 지역교회에서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상황이 벌어지자 곤욕스러운 입장이었다. 그래서 결국 얼마의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 새로운 모임을 시작했다. 나는 선교지에서 처음으로 교회의 분립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었다.

죽어야 할 우리가 죽지 않아 지금도 하나님과 그 분의 일을 거스르고 있지는 않는지?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20 >









00X-MAS’ 12 우리 딸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연극에서 베들레헴의 별이라는 애매한 역을 맡았다. 첫 리허설이 끝나자 딸은 금색 반짝이를 붙여 환히 빛나는 별 옷을 입고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연극에서 네가 하는 일이 뭐니?” 내가 물었다. “그냥 서서 반짝이기만 하면 돼요.” 딸은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영 잊혀지질 않았다. 딸이 연극에서 맡은 역할이 내 삶의 한 장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 때 빛나려고 서성이던 시절이 있었다.

언젠가 우리 집에서 여자들의 모임이 있어 차를 대접했다. 그들이 차 마시는 일에 갖은 공을 드리는 것을 잘 아는지라 나는 레이스 달린 냅킨, 꽃 장식, 은제품, 고급 빵 따위로 며칠씩 야단법석을 떨었다. 한 손님이 “오늘은 정말 전에 없이 실력을 발휘하셨네요”라고 말했다. 칭찬으로 했을 그 말이 돌연 진리가 되어 나를 때렸다. 나는 모든 사람보다 더 잘하고 더 빛나려고 애썼다. 내 동기는 따뜻한 대접과 우정이 아니라 스타(Star)의 인정욕구였다. 모임이 끝난 후 나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스타가 되려는 내 욕구를 애써 내려 놓았다.

화려한 스타는 칭찬받을 만한 일을 줄줄이 성취하려 전력분투한다. 이 화려한 스타라는 에고(ego)의 가면을 쓰면, 가장 환히 빛나는 사람이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개념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진정한 스타의 과제는 자기 ‘내면의 빛, 하나님의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란한 행위로 스스로 빛과 온기를 만들어 내려고 끊임없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
- 수 몽크 키드 / 『기다림』에서


0091. “동방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 왔도다”(찬116 ①)젊은 옥스포드 학자 로버츠(P. W. Roberts)의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헌 책 한 권이 선물로 놓여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Marco Polo, 1254-1324, Travels)이었다. 13세기의 유럽 미개인들에게는 동양의 중국 등의 선진국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베니스 태생의 무역상인 폴로는 실크 로드(Silk Road)를 따라 계속 여행 중 옛 『바사』(Persia, 오늘날의 이란) 제국을 지나면서 동방박사 세 사람의 무덤과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이 이야기가 로버츠씨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동방박사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무덤에서 출발하여 베들레헴까지 여행을 계획, 옛 바벨론 제국(이락), 옛 앗수르 제국(시리아)을 거쳐 드디어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동방박사들의 행로를 따라 여행을 마친 그는 ‘In Search of the Birth of Jesus - the Real Journey of the Magi’ (1995) 라는 책을 출간하였다(그는 캐나다로 이주하여 현재 토론토에 살고 있다).

0092.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 (1) 마태복음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2:11).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의 3중 직책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었다(구약성경에서 ‘사사’들은 이 기름부음이 없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 동방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 세가지는 이 직책 - 황금(왕), 유향(선지자), 몰약(제사장) - 을 상징한다.
주님이 탄생 시에 받으신 세 종류의 예물은 주님이 세상 떠나실 때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모두 주고 가신 선물이다:
1) 황금 (재물, 왕, 뜰, 길) - “우리는 다 왕 같은 제사장”(벧전2:9-12)이지만 세상, 재물, 황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뜰에 들어갈 때 다 태워 죽여야하는 값진 짐승일 수도 있다. 우리의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지 못할 때에는 그 재물은 재난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시라.
2) 유향 (재능, 선지자, 성소, 진리) - 재물은 없으나 재능가진 자의 재능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지 못할 때에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라. 성소에서 배우고 세상에서 전해야 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우리의 모든 재능이 동원되어야하는 원리이다. 얼마나 많은 재능자들이 ‘자기실현’, ‘자기구현’에 자기재능을 낭비함으로 자기우상숭배로 인생을 마치는가를 생각해보시라.
3) 몰약 (목숨, 제사장, 지성소, 생명) - 재물, 재능이 없는 자도 이것들보다 더 귀한 목숨은 갖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대제사장이시면서 동시에 스스로 자원하여 제물이 되셨다.

009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마1:21)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의 제일가는 목적 중 하나는 자기백성들의 죄문제 해결을 통한 구원이다. 정치, 경제,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도덕, 윤리문제 해결하기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1960대에 길거리의 만병통치약 파는 약장사 같은 만병통치약 ‘복지’로 전하는 목사들도 있다. ‘모든 문제가 다 끝났다’라는 등의 난폭한 설교들... 교회사의 가장 흔한 갈라디아서 2:20절 이단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구약을 인용해가면서 왜 예수가 그리스도인지를 설명하지는 않고 무슨 ‘혁명구호’외치듯 외치면 기적이 일어날 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독한 미신이다. 신복음주의의 트레이드 마크인 대형집회와 구호에 크게 오염되어 입력이 크게 잘못되어있는 것 같다.

0094. “<첫>(맏)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마1:25, KJV)
모든 성경, 천주교 Latin Vulgate 성경에도 나오는 이 한 단어 “첫”(Firstborn)은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타이틀로 일곱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천주교 교리의 하나인 마리아의 ‘평생동정녀설’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최근에 성경에서 제거시킨 단어다. 이 단어 하나가 천주교 신학을 뿌리채 흔들기 때문이다. “첫(맏)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첫 아들을 낳은 후에는 동침했다는 뜻이며, 첫 아들은 둘째, 셋째 자녀들도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에서 첫 열매라는 개념은 나중에 열릴 열매를 암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함의가 없이는 ‘첫’열매의 ‘첫(맏)’이라는 단어는 무의미 해진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활을 동반하는 것이다(골2:12/3:1/살전4:16).
“...낳으메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1:25) NIV등 현대역 성경들은 창조주 예수님을 인간 요셉의 아들로 만들어 ‘뉴에이지’ 예수로 변개시켜 놓았다. 즉, 요셉이 예수님의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he gave him the name Jesus”).

0095. 1948년 / 신복음주의의 시작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영향하에 1948년을 기해 오켕가(H. J. Ockenga)목사의 주도하에‘신복음주의’(Neo/New Evangelicalism)가 미국 남가주 파사데나(Pasadena)의 화려한 시청극장에서 시작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입힌 피해는 너무나 크다. 사단은 우선 성경용어들을 제거시키고 심리학, 철학, 인본주의자들의 세상적 일상용어로 바꿈으로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신복음주의의 대부 맥거번 박사에 의해 ‘영혼구원’(Soul Winning)은 ‘교회성장’(Church Growth)이란 용어로 둔갑하였다. ‘회개와 구원’은 ‘드러냄, 치유와 회복’이란 심리학적 용어로 바뀌면서 기독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자 인간 최고의 재난인 “죄 가운데서 죽는 것”(요8:24)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무시하였다.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라는 주제의 핵심인 ‘회개와 구원’은 유치한 주제로 밀려나 ‘회개와 구원’을 외치면 성숙되지 못하고 좀 모자란 설교자로 취급당하게까지 되었다. 마9:13의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to repentance)도 성경 본문에서 제거되었다. 주제가 밀려나니 21세기 교회안에서 미신을 섬기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믿음을 사장시키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로 유지되어야할 믿음은 인간들의 야망에 초점을 두고 겉치레로 거창하고 화려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시적인 미신적 구호들로 가득 찬 피조물들의 행위종교(religion)로 향하게 만들었다. 죄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다시 종교의 사슬에 묶여버렸다.

현실적인 죄와 싸우는 전투적 삶은 사라지고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초점을 모은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라는 말씀을 “내가 행복하니 너희도 행복할지어다”로 읽고있다. 교회강단에서 기타들고 부르는 노래를 잘 들어보시라: “나는 기뻐요 나는 행복해요” 하나님 경배가 아니고 자기가 경배대상인 자아(自我)예배다. 이래저래해서 “예수믿고 청와대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세상에서 성공”, 하나님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을 통한 자기실현으로 자기만족이다.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고난을 다루고있는 히브리서를 인용한 설교제목이 ‘행복비타민’이라니...? (목사의 복장이 ‘행복비타민’을 따라주는 술집 ‘바텐더’복장을 하고 있으니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고있는 것 같아 혐오스럽다. 생선은 대가리부터 썩는다더니...). 하나님께가 아니라 사람에게 신경쓰느라 정신이 없다. 신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천국복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간들의 모든 필요에 따라 초점을 맞추느라 현대교인들을 완전히 스포일(spoil)시켜놓아 교인들은 이미 영적성장을 멈춘 탁아소의 유아들이 된 것도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이 종교적 실용주의, 신복음주의는 기독신앙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아 사람만 많이 모인다든지 효과적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진리로 여겨지게까지 되었다. 결과만 얻을 수 있다면 무조건 좋은 일로 추앙, 지도자등을 평가하면서 고뇌하는 소수의 진실된 종들의 목을 죄인다. 그러나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의인(義人)의 수는 ‘좁은 길’에 있어 그 수는 지극히 적을 뿐 아니라 우리도 지금 좁은 길의 선상을 걸어가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한다.

최근의 뉴욕타임즈에 의하면 전 미국 성인의 10%가 넘는 숫자가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무서운 숫자이다. 캐나다도 뒤따르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본인 죄(罪, sin)문제를 다루지 않으니 죄의 결과인 범죄(crime)문제가 경찰, 국가로 넘어갔다. 국민의 세금으로 교도소를 세우고 또 세워도 모자랄 정도로 범죄자들이 차고 넘친다는 기사이다. 교도소를 증축하느라고 주(州)예산이 부족하여 초등학교들을 폐교하는 지경에 이른 캐나다 서부의 실정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평생의 외침이 ‘회개와 구원’에 관한 선포임은 너무나 자명하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 직분들은 갖고 있으나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를 맺고 있는 교인은 실제로 2-30%가 안된다고 보면 지나친 편견일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religion)로 오해하고있다. 세미나 중 식사시간에 어느 목사님이 “선교사님은 후합니다”라고 하신다. 무슨 말씀인가 물으니 자기 생각으로는 교인들 10%도 거듭나지 못한걸로 본다고 한다. 교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직분이 문제가 아니다. 창피한 것은 이 세상 살 동안 다 당하고, 구원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여러 분야에서 노심초사 사역하시는 종들의 사역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고 무궁무진하여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6.25사변 후, 길거리에 앉아 점치는 점쟁이 할머니로부터 “자네는 예수믿을 팔자라네, 예수한테나 가게나!”라는 점괘를 받고 목사가 되신 분도 있으니... 인간이란 다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같은 존재이며 필자 자신도 누추하고 허물많은 사람이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이 늘 더 급한 사람이자 문제아다. 온전한 영적 거듭남와 혼적치유의 구분이 사라지고 있으니 종교통합이 더러운 홍수처럼 밀려온다. 혼적치유가 채워지자 더 이상 주님을 찾지 않은 9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눅17:11-19)는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 거듭남의 기회를 혼적치유가 가로채어 영적 길을 방해하는 것도 ‘마귀의 궤계’(엡6:10-20) 목록에 들어있어 어느 종교 안에서나 사단이 자유자재로 크리스천을 속인다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명이 치유, 회복받았으나 실제로 주님으로부터‘구원’의 확답을 받은 자는 사마리아인 한 명 뿐이었다(19절).

완벽주의는 죄(罪)의 음흉함과 회개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성령운동?(성령이 무슨 운동기구인가? 성부운동, 성자운동도 있단 말인가?)은 ‘나서기’좋아하는 자들이 자기 교만에 속아 ‘마귀의 궤계’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다. YWAM(예수전도단)은 이 단체를 세계적인 조직으로 키우기 위해 로마교황청과 협상, 1987년 New Orleans에서 있은 ‘Charismatic Congress’(은사주의자들 대회)때 이미 1,000명이 넘는 카톨릭 스텝들을 ‘YWAM workers’(‘O Timothy’, 15 Nov. 1987)사역자로 받아들였으며 로마카톨릭 교구전도를 극찬한 Loren Cunningham (LC asks every denomination to help fulfill the Great Commission, and praised a Catholic Church plan to evangelize parish by parish - Charisma, Aug. 1990)이나 20명이 넘는 로마카톨릭 성자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인정한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 (책의 내용은 ‘배도하는 그리스도인’이다)을 쓰신 분은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표현대로 ‘적응, 타협의 명수’들로 둔갑하였고,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한국교회는 로마화(化)의 재난에 처해있다(이 주제는 계속 다룰 생각이다).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십자가 밝히 보여주소서
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
(찬 531 /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④)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 4색 밴쿠버 목양일기










4인 4색 목양 일기를 시작하면서 컬럼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 하던 때가 있었는데 벌써 두 번째 컬럼을 쓰게 됩니다. 이번에는 목회 초년생으로서 많이 고민했던 것 한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에 누군가 목사를 ‘목적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씁쓸한 웃음을 진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만이 가지는 이 무거운 짐을 그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짧은 목회였지만,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성도들의 삶의 문제들이 제 문제로 투영되는 부분입니다. 부 교역자로서 사역을 할 때에는 알지 못했었는데, 담임 목사가 되고 나서 절실히 느끼게 된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물질적인 문제나 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 내 문제처럼 다가와서 같이 안타까워하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많아질수록 점점 그런 일들이 가중되어 졌습니다.

이런 일들로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늦은 밤 기도 중에 영혼으로 밀려오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순간 절실히 경험되어진 깨달음이 일어났습니다. “목회는 짐을 지는 것이다(마16:24).”
그 순간 밴쿠버에서 오랫동안 목회하는 선배 목회자들에 대해서 그렇게들 목회하고 계셨구나 하는 측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때 나지막한 음성이 마음을 또 깨웠습니다. 목사의 믿음은 그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렀더군요. 그동안 성도들이 당면한 답답한 현실에 있어서 내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있거나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큰 역사를 일으키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과정도 믿음입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을 둘러싼 앗수르 왕 산헤립으로부터 항복하라는 편지 한 통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는 이 위기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그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 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진 짐을 맡긴 것입니다(왕하19:14-19).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연말입니다. 매년 이 때쯤이면, 목회자들의 가슴앓이가 시작이 됩니다. 성도들의 삶의 변동에 따라서 그들이 풀어 놓는 문제들을 오늘도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히스기야 스타일의 해결 방식을 배우고 나서는 그때부터 평안이 생기고 어느 정도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무거운 짐을 진분들이 계시다면, 올해는 히스기야 스타일로 마무리 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목사란 이렇게 “목회에 생명 걸고 사는 사람”입니다.

[라일주 목사 / 로고스교회 / 778-898-1558]
 
 
 
 
 

재미있는 사도행전



영적 ‘에너지 블랙홀’이 되라!



전 세계는 제한된 양의 ‘에너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중국과 인도는 에너지 소비량이 급속히 늘어 이들을 “에너지 블랙홀”이라 일컫는다. 에너지(energy)란 말은 그리스어로 일을 의미하는 에너곤(energon)에서 유래된, 에네르기아(energia)가 어원이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세상의 무슨 일이든 에너지가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다. ‘영적 에너지’가 있어야 영적인 일을 할 수 있다. ‘영적 에너지’가 무엇인가? ‘성령충만’이다. 성령은 성도의 필수 에너지다. 초대교회 일꾼의 기준 1호가 무엇이었는가? ‘성령충만’이었다(행6:3).

성령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역에 많은 열매가 나타났다(행6:8). 동시에 이를 시기하는 자들 또한 나타났다(행6:9). 그들은 스데반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꼼수를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매수하고 충동질(행6:11-12)했다.
그리고 스데반을 공회 앞에 세우고 급기야 돌로 쳐서 ‘즉시처형’(Immediately executed) 해 버렸다(행7:58-60).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당당했다(행6:15). 용기있게 유대인의 죄악도 적날하게 고발했다(행7:51-53). 전혀 굽힘이 없었다. 죽음 앞에서도 진심어린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행7:60). 성령충만은 이기는 힘이다. 그리고 성령충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의 근원’이다.

성경은 말한다.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엡5:18). 이것은 권유하는 말이 아닌, 명령이었다.

성령충만은 철저한 자기 점검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교만한 마음이 없는 가를 점검하라!(잠16:18,벧전5:5)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를 살피라!(시66:18, 롬3:23) 마지막으로 세속적 쾌락에 물든 몸과 마음이 없는가를 점검하라!(마6:24-33)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성경은 엄히 경고하고 있다(딤전5:6).

현대 과학자들은 화석 연료, 석유 45.7년, 석탄 119년, 천연가스는 62.8년분 정도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에너지의 고갈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다. 영적에너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영적 에너지의 고갈은 영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적 에너지의 충만한 확보는 성령충만한 삶과 직결된다.

세상은 절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당해낼 방법이 없다. 저들은 우리의 머리 위에서 늘 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힘도 능도 아닌 오직 성령으로 만이 가능한 일이다. 스가랴 4장은 6절은 이렇게 말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아브라함 이야기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창 19:1-22 (하)



지난 주에 이어 소돔의 심판과 롯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소돔성롯의 집을 에워싸고 동성애를 요구한 사람들을 통해 소돔성의 모든 죄악이 드러났고,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천사들은 소돔성을 멸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롯에게 그의 가족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말합니다. 이에 롯은 자신의 두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가서 같이 성 밖으로 피하자고 말합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19:14). 여기서 ‘농담’이란 ‘므차헤크’ (mṣaḥēq) 로 ‘이삭’ (yiṣḥāq)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즉, 그들은 롯이 말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도 안 되는 ‘웃긴 것’ 정도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지체하는 롯심판의 시간은 다가왔고 천사들은 롯을 재촉하지만, 롯은 자꾸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19:16). 롯은 일찌기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으로 왔고 아브라함과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과 함께 이집트로 갔다가 풍성한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을 체험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적 축복으로 말미암아 짐승들을 먹일 풀이 부족하여 목자들끼리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그는 가나안을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 땅이 비옥하고 물이 넉넉한 소돔으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롯은 소돔성에서 살면서 그 성의 죄악이 얼마나 패역한지를 보았고 그 죄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입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그 죄악된 곳을 떠나 가나안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동안 그가 이를 악물고 모았던 물질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힘으로 물질을 모으며 살았던 삶의 결과는 그 동안 애착을 갖고 모았던 모든 물질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위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의 위기는 앞에서 물질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는 심판이 임박했을 때, 지체하고 머뭇거렸던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하나님은 자신을 떠나 물질을 택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즉시 순종하기 보다는 머뭇거리고 지체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19:16). 그리고 산으로 도망을 가라고 명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19:17).

자기 주장을 펴는 롯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롯은 다시 한 번 주의 사자들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18). 이것은 영어로 보면 더 이해가 빠릅니다; “Oh, no, my Lords.”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도 롯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약해질 때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고, 롯은 불순종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롯은 도중에 죽을 수도 있으니 산이 아닌 작은 성읍에 머물게 해달라고 합니다 (19:19-20).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더 자비를 베푸셔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고 롯이 피할 동안 소돔에 대한 심판을 잠시 늦춰 주셨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자기 생각대로 움직였던 롯에게는 더 끔찍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불행은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롯의 모습은 세상과 물질을 택한 결과가 물거품이요 헛수고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 건강,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려워도 믿음과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기 바랍니다.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떼의 새들이 겨울 아침 공기의 저항에 따라 열을 바꾸며 날아가고 있습니다. 과학도 기하학도 모르는 새들이 바람의 저항을 가장 적게 받도록 대열을 이루어 서로의 힘을 도우며, 길고 힘든 여행에 지치지 않도록 선두를 바꾸어가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본능과 예지에 감탄합니다. 학창시절 그렇게 이해가 어렵던 과학이나 기하학도 결국 자연의 존재 원리나 생명의 이치를 해석하면서 발달한 학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학문이 제 아무리 놀랍도록 발전하여 날마다 신기술로 거듭나고 있다고 해도 지으신 모든 만물에 투영된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 앞에서는 실로 초등학문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우주의 법칙은 얼마나 광대하면서도 섬세한지, 거세게 이는 바람의 입김에 불려 빠르게 밀려와 바위에 부딪혀 와장창 박살이 나는 물결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알고 순종합니다. 저 물결이 만약 제 기분 내키는대로 한없이 밀려 들어온다면 인간들은 날마다 불안에 떨어야 했을 것입니다.

마야의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로 끝이 났다며 종말에 대한 흉흉한 분위기에서 시작했던 2012년 한해가 테러와 지진과 태풍과 각종 인재의 피로 얼룩진 채 저물어 가는 이 때 한국은 대통령 선거로 또 한번 크게 들썩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권력은 저 새들처럼 서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자리를 이양하며 서로 힘을 북돋아 국제 정세의 저항을 이겨낼 수 있도록 국력을 키우며 함께 가지 못하고 왜 그렇게 여러 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는지, 이렇게 심각하게 분열된 국론으로 다가오는 2013년의 국제 정치 경제 기후등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며 대처해 나갈지 정말 기도가 됩니다.
어떤 공동체든 사랑과 협력을 통해서만 세워질 수 있음을 저 새들에게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인류에게 선하게 나타나시도록, 그리고 온 세계의 복음화가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흩어져 있는 주님의 종들에게 영성을 더하셔서 교회가 다른 지식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교회들이 힘을 합하여 한 목소리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행을 홍보하는 광고 메일에서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설문조사에 응해 여행에 대한 평을 남겨놓은 것을 보게 되는데, 무척 흥미로운 사실은 같은 여행에서 같은 서비스를 받고 나서도 어떤 사람은 혹평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좋았다고 평하는 점입니다. 여행의 내용과 질을 결정하는 것은 여행지의 환경이나 조건보다는 그 여행을 받아들이는 각 사람의 마음 가짐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를 쌓은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도 감사로 반응하고 평소에 불만을 쌓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속에서 끓고 있는 불만이 넘쳐 흐르기 마련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논하고 해석하며 하나님의 처사가 자신의 판단에 못미치는 양 깊이 좌절하고 있던 욥에게, 인간은 당신이 지으신 우주의 비밀과 그 광대한 오묘를 깨달아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작고 나약하고 소심하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벌레만도 못한 인생이 하나님의 영화로운 광채를 입고 이 땅에서 선한 기회들을 누리며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묘하고 영광스럽게 다가옵니니다. 오직 죄밖에 질 줄 모르는, 죄 보따리 같던 인생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입어, 가는 곳이 변했고, 말과 생각이 변했고 취향과 걸치는 옷이 변했고 신분이 변한 사실이 너무도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로서 누리는 매일의 사치와 복락은 대통령도 부럽지 않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나는 잊었어도 하나님은 절대 내 기도를 잊지 않으시고 모두 응답하신 것을 보며 놀라곤 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셔서 어리석음으로 구한 것을 지혜로 응답하시고, 하나 밖에 볼 줄 모르는 무지로 구했지만 두루 온전하고 성숙하게 하시고, 성마르게 보채는 기도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역사하시고, 내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능히 넘치도록 채우시며,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따르시는 하나님의 발자국이 너무나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노래한, 작사가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벅차 오르는 심정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끝도 없이 넘실대는 바닷물이 펜촉에서 사라지고 작은 글씨로 저토록 광대한 하늘을 다 채우려면 영원의 세월에도 절대 끝나지 않을 일이라 해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그보다 크고 오묘하며 영원하다는 고백이 얼마나 아름답고 공감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나의 남은 삶은 늙어가는 우울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향해가는 기대와 기쁨이고, 영원으로 떠나는 행복한 여행을 준비하는 즐거움입니다.

이생의 여행을 마치고 생에 대한 나의 평가는 내가 걸어온 시간과 소중한 관계들에 대한 감사와 존중의 의미로서 오직 행복했노라고, 그분의 이름 때문에 내 인생 너무나 영화롭고 따스했노라는 뜻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도 이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z”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9 >





0088. 이스라엘과 크리스챤의 택함의 비밀

하나님의 이정표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때를 알려주는 시계와 같다. 3000여 년 전 다윗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122:6)
이스라엘의 택함, 크리스챤의 택함의 비밀은 같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거울이 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시고 특권과 사명을 주신 것은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었고” 또 “목이 곧은 백성”들이었다(신7-9장/출32장). 이스라엘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의도적인 사랑에 기초한 택하심을 오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쌓아놓은 무슨 공로에 의거하여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원리이다. 우리의 미덕이나 적합성도 아닌 하나님의 순전한 긍휼과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더 악하고 강팍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출애굽의 구원은 넓은 의미에서 영적구원의 한 전형으로 묘사하고 있다(시74:2/107:2/사43:1/렘31:11). 창세기 3:15의 은혜로운 선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택하시고 이루시는 모든 자비로운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 고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 사명이 아니고 특권이라고만 믿는 것은 사단의 유혹이다.’ 자기사랑, 지독한 에고(ego), 이기심으로부터의 구출,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것들로부터의 ‘출애굽’이 요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죄, 자아(自我)속에 있는 세상, 자기의(自己義), 사망’으로부터의 출애굽을 도와서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0089. “그리스도 네 마음에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시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왜 교회가 무기력한가?”라는 주제가 제기되었다. 대답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단체로 죽을 프로그램들로 광분하고 있다. 아무도 구원 못 할 것들로 분주하다. 이미 교회가 아니다. 교회도 크고 사람도 많은데 복음 전하는 교회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강(江)과 바다가 오염되었다고 다들 걱정들 하지만 이 지구 상에서 제일 오염된 지역이 있다면 그 곳은 “십자가의 도(道)”가 전해지지 않는 교회강단보다 더 오염된 지역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듣고있던 젊은 목사님이 상심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지켜야할 율법의 총체로서 들려주신 사랑의 율법이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또는 내가 해야하는 무엇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 이루신 무엇이다. 그 무엇이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이루신 의(義)이다.” 나를 통해 하신 일, 내가 이루어 놓은 무엇 등등은 복음의 결과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이 아니다. 100세에 낳은 “독생자 이삭”(히11:17)을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산(山)에서 바치라고 하신다. 전 성경을 통틀어 아브라함만큼 하나님의 심적 번민 속에 들어간 자가 있을 것인가? 아브라함이 출발한 순간부터 아들은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 죽어 있었다. 사흘 길은 주님이 무덤에 계셨던 시간이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위해 이 복잡한 내 마음의 세상에, 흠없고 티 없으신 아기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하는 계절이다.

0090. 기독교 최초의 교회사 사도행전

우리의 기독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본 교회사라기 보다는 땅에 속한 세상권세 중심의 로마카톨릭종교사다. 천국복음의 본질에 기준을 두고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회사가 아니라 혼합된 ‘에큐메니즘’종교사다. ‘기독교인’이란 용어 또한 “위로부터”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적개념이 결여되어 있고, 땅에 속한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통해 생겨난 제도적 용어로 전락해 버렸다. 기독교회사에서 이 말보다 더 오해를 받아온 단어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신학자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가 가장 짧다”라고 썼다.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세상 지성인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권중심의 교회사를 보고 ‘기독교는 크게 나누어 로마카톨릭교, 동방정교, 프로테스탄트 등으로 나뉜다’는 식으로 썼다. 이는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무지한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어떠한 교단에 속하였든지 간에 기독교 안에는 기독교인만이 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이기 전에 우리는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의 시작은 예수의 복음에서 시작된다. 기독교 최초의 교회사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가 보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카톨릭교인’이나 ‘정통파’로 부름을 받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바울의 전도를 받은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라고 하였다.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벌써 1세기 때부터 사도들이 전해준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유브라데 강(江) 유역, 아르메니아 등의 소(小)아시아 지방에는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한 폴리시안(Paulicians)이란 별명이 붙은 무리들이 일어났다. 침례교회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몬타니스트(Montanists, AD 150년경)파는 소아시아 지방과 아프리카 지역에 퍼져있었던 무리들이었다. 로마카톨릭교의 사제 맥브린(R. McBrien)은 그의 저서 “로마카톨릭주의”에서 이 몬타니스트들을 로마교회보다 더 거룩하였던 집단으로 간주, “정결한 이단”(최상급 표현사용, Purist heresy)이라 썼다. 감리교의 요한 웨슬리를 위시하여 많은 교회사가들은 면밀한 검토를 통해 몬타니스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로 간주하고 있다. 이어서 터툴리안(Tertullians, 2-5세기경)파가 따른다. AD 251년 칼타고 공회에서 파문선고를 받은 당시 로마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었던 노바티안을 따랐던 노바티안(Novatians)파들은 소아시아 지방, 이태리, 북 아프리카 지역에 퍼져 5세기까지 계속 재침례파의 하나로 흡수된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으로부터 “흠을 찾을 수 없는 성도들”이란 별명을 얻은 도나티스트(Donatists)들은 북아프리카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무리들이었다.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이 천지만물 모두 변하나
변찮는 주여 함께하소서

(찬 531 /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②)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1)






사랑하는 밴쿠버 그리스도인 여러분, 이곳 한국은 가장 추운 1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추위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후끈 달게 하는 12월 19일 대선을 앞에 두고 있어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향후 5년, 더 나아가서 통일코리아의 길들을 여는데 있어 과연 하나님께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실지 사뭇 긴장케 되는 시간들의 연속입니다. 밴쿠버의 겨울은 그리 춥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한반도의 계절에 봄이 올 수 있도록 함께 응원하고 기도하며 마음을 모아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1. 무엇이 통일인가?
분단국가에 사는 자국민이 쉽게 떠올리는 ‘통일’에 대한 정의는 당연히 남과 북의 하나됨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통일’은 좀 더 본질적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참 통일의 진가를 알고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내고 우리 인생을 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2장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16절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0절의 말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요, 우리가 예배시간마다 올려드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앞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던 완벽한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됨과 통일! 그것을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통해 분리시키고 나누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분리를 십자가 위에서 한방에 깨뜨리시고 하나님과 다시 하나(통일)가 되게 하셨고, 지금도 그 뜻은 성취되어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통일’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이요, 그 분의 사역방식이며 늘 삼위일체로 지금도 인류를 위해 일하시고 그 하나됨 안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통일은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는 것이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2. 남과 북의 통일하나님의 뜻이 원래(본질)의 것을 회복하시기 위한 여정인 것처럼 남과 북의 나뉨 역시 원래 하나였던 이 민족이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분열된 것을 원래의 자리, 하나됨의 자리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통일’을 이루실 것이고 그 ‘통일’의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한민족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고 내 조국 한반도를 위해 기도하며 각 교회의 몫,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몫을 찾아 ‘통일’에 기여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영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분단시대를 살고 있고 이는 ‘통일시대’에 걸맞게 살아야 할 충분한 당위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통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길이요, 우리 모두는 그 위대한 부르심에 초대받았기에 이제 각자의 자리를 찾아야만 합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Plus







교회음악의 목적



교회에서의 음악은 그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맞도록 준비하고 연주되어야 한다. 교회음악의 목적은 예배이다. 그리고 그 목적에 맞도록 준비하고 연주되어야 한다.

교회음악이 점점 콘서트(연주회)로, 자기 발표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드리며 감사하며 주님을 향한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함께 한다는 가면을 쓰고 사람을 향하고 연주하는 자신들이 만족하며 즐거워하는 모습들이 보여질 때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 빨리, 깨닫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향하여 드리는 그런 음악의 자리로, 그래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

예배와 찬양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감사와 찬양 기도와 봉헌을 드리는 것이다. 특히 찬양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것으로 그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 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혹 요사이에는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축복하며 하나님은 빠진, 저 멀리 한쪽 구석에 모시는 것 같은(?) 그런 내용의 노래들을 많이 듣게 된다. 물론 이런 노래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 주심을 알게 되기는 하지만 노래의 중심이 우리가 되어서 서로 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외면되는 것이 아닌지 염려가 된다.

예배와 찬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찬양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장 10절)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6 장 사랑스러운 톰보이들




거의 모든 톰보이들은 자신이 아주 여성스러운 사람으로 굳게 믿고 살아간다. 주위 사람 모두가 “저거 왕 톰보이네...” 라고 말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고, 귀엽게 보인다. 그러나 그 착각을 깨닫게 해 주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모임에 아주 여성스러운 여성 두어 사람을 끼어 넣으면 된다. 그러면 톰보이들은 “아... 저 여자들 참 다르네요... 근데 왜 저렇게 살아야 하지요??” 진지하게 묻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성스러운 여성들은 그 다음 모임부터 나타나질 않는다. 톰보이들이 자신들과 너무 다르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톰보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치유를 받아야 한다. 본인은 치유 받지 않아도 잘 살아가는 것처럼 믿고 있지만 자녀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치유를 받아야 한다. 딸들을 위해서 더욱 그렇고, 자신의 노년을 위해서 더더욱 그렇다. 항상 자기 마음대로 자식들의 삶을 좌우하려는 자세 때문에 자식들이 (특히 며느리, 사위가) 넌더리를 내며 관계를 멀리해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나의 사촌 누님 한 분이 그렇다. 큰 교회 권사이고 여선교회 대표 회장도 역임한 참으로 씩씩한 일꾼인데 (물론 지금은 은퇴했지만) 자녀들과의 관계가 아주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는데 엄마를 돌아보는 자식이 없다. 그동안 너무 자신의 마음대로 자식들의 삶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보기에 너무 안쓰럽다.

그런데 이 치유가 그렇게 쉽지도 않고 빨리 되지도 않는다. 첫째 이유는 대부분의 톰보이들이 자신이 톰보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치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즉,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때에 틀이 잡힌 성품을 치유해서 복구하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치유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깊이 깨달으며 겸손하게 자신의 약점을 인정해야 하고 모든 망가진 관계들을 하나 하나 회복해가는 어려운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야만 한다.

“저도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네요”
전 집사는 딸이 넷인 집의 둘째 딸이다. 첫째는 맏이라고 귀염받고 셋째는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그 사이에 끼어서 없어도 되는 것 같은 천덕꾸러기로 자라났다. 자기 소유가 없는 삶이었고, 식구들이 모이면 모든 일을 도맡아하는 어머니의 하녀다.
아주 남성적으로 자라났다. 예수 믿기 전에는 직장 동료들과 술도 잘 마셨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어디서나 사람들이 그녀를 참 좋아했다. 그런데 자매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를 못하다. 부부 사이에 깊은 대화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도 그 아버지에게 받은 많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었기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내에게 할 말 못할 말을 쏟아내며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치유 학교를 참석하면서 자신의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비록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지만 전 집사의 삶에 새로운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고 웃음이 회복되고 얼굴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강의 중에 이렇게 물었다. “전집사가 치유 세미나를 통해서 받은 가장 귀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일초도 지체함이 없이 바로 대답이 나온다
“제가 참으로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거요. 저에게는 여태껏 아무도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거든요...”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더 깨달았다. Email을 보내왔다. <계속>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43)



양자가 되어 주오



선교지 교회를 개척하면서 찬송가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 초신자들을 위해 수도에 있는 알렉산드더 전도사를 초청했다. 음악엔 재주가 없는 나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피아노를 전공한 알렉산드더가 와서 2주일 동안 성도들에게 간단한 음악이론과 찬송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성도들 중엔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젊은이들도 있으니 피아노를 구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그 당시 많은 러시아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무거운 피아노는 애물단지가 되어 미화 300불이면 동독제 명품을 살 수 있었다. 성도들에게 수소문하자 성도 한 분 사람이 친척집에서 피아노를 판다고 했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는데 좌우 대문에 윗 쪽엔 빛 바라낸 명패와 금색 별들이 붙어있었다. 나는 안내하는 성도에게 저 것들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노동영웅들이 사는 거리라고 설명해 주었다. 몇 집을 지나 멈춰 선 집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데 밖으로 난 창문들은 이상하리 만큼 푸르고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이 먼지 투성인 비포장길가에 유리창을 저렇게 관리할 정도라면 보통사람들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칠 십세 정도 되신 분이 반가이 문을 열어 주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집안 구석 구석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실로 안내된 나는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피아노를 구입하러 왔다고 했다. 그러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손녀가 치던 피아노는 얼마 전에 이미 팔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할아버지가 이것 저것을 묻다가 성씨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정가라고 했다. 그 분은 다시 본이 어디냐고 물었다. 동래 정가라고 하자 본인은 진양 정씨인데 원래 동래와 진양은 형제간이라며 부부는 친척이 왔다면 반가워 했다. 카라칼팍스탄 고려인들 중에는 전씨가 많은데 정씨가 드물다며 내 나이를 물었다. 내 나이가 자신의 막내 아들 나이와 같다는 것이다. 온화하고 친절하신 할머니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고 계셨다. 한참 정감있는 이야기가 오가는데 갑자기 어르신이 나를 자신의 양자로 삼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왜 그런 마음이 드셨는지 물었다. 내가 자신의 죽은 막내아들과 닮았다는 것이다. 사 남매 두었는데 막내 아들은 결혼한 지 삼 년 만에 딸 하나를 두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내가 죽은 아들과 닮았으니 양아들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뭇 진지한 분위기였다.

나는 두 분에 대한 아는 바가 없고, 두 분도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내심 이 분들에게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이곳으로 왔는지를 설명하며 전도할 생각을 했다. 내게 들려준 두 분의 이야기는 어릴 적에 원동에서 강제 이주되어 카라칼팍스탄에 정착하면서 남달리 근면하고 성실하게 논 농사를 지었고 자신이 이끄는 브리가다가 쏘련 전체의 수확량에 1위를 기록하면서 노동영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공산 이념 처럼 나누어 가지며 혼자만 배불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자 우리를 안내했던 성도는 어르신이 공화국 전체 고려인을 대표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되길 원하시면 아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내가 믿는 창조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을 소개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온 목사요 선교사라고 소개를 했다. 놀랍게도 노인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수십 년 동안 논에 씨를 뿌리고, 벼가 자라고 익는 것을 보면서 햇빛과 우로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어떻게 식물들이 자라날 수 있는가라는 생각하며 하나님을 찾았다고 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이 신은 없다라는 소리를 할 때면 자신은 속으로 웃었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도 지금까지 자신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 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들을 때 두 분은 감격하여 울고 있었다. 나는 믿은 자의 받은 성령에 대해서도 증거했다. 그 때 두 분은 온 몸에 진동이 와서 떨면서 겨우 울음과 격정을 참고 있었다.
그 날 두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와 아들 사이가 되었다. 내겐 ‘정 니꼴라이, 류보브’라는 새로운 부모님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 두 분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예배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모든 고려인 성도들은 그 분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믿음과 행실로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 이 분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다.
세월이 지나고 심방을 가서 양어머님과 담소를 나누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두 분이 나이가 들어 교회로 새벽기도를 다닐 수 없어서 새벽 다섯 시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지 오래 되었다고 했다. 새벽마다 찬송을 하고 성경을 석장 씩을 교독하고 각자 방에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자신에겐 매일 매일 기적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원래 눈에 문제가 있어 글자는 읽을 수가 없는데 성경만 펼치면 너무도 또렷하게 글자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기도할 때면 자신의 눈에 흰구름 같은 것이 방안에 내려 앉아 있는데 눈을 감아도, 떠도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구름을 처음으로 보던 날 구름의 일부가 자신의 코 속으로 들어가면서 향기가 진동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사십 년 가까이 심한 축농증으로 냄새를 못 맡았는데 그 후로부터 아침 공기의 신선함과 함께 흙 냄새가 느껴지면서 냄새를 다시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대체 그 빛나는 흰구름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8 >







0085. 프랑스의 두 마을 이야기(2): 바닷가 마을 『세뜨』
유대국가 건국사에 가장 영웅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유대인 4,515명을 태운 『엑소더스47』이 떠난 항구

지금은 인구증가로 제법 큰 타운이 되었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인 70여년 전의 마을 이야기 - 필자가 가진 엑소더스 47에 대한 자료가 상세하지도 않고 또 그나마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도 않아 지지난 호 <16>에 사진만 게재하고 간단히 설명하였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계신 분이 이스라엘 독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간한 『약속의 땅의 여명』(Dawn of the Promised Land, The Creation of Israel, 210pp.)이란 책을 보니 『엑소더스47』에 승선하셨던 분의 이야기도 기술되어 있어 반가웠다. 아버지께서 다시 정확하게 글을 쓰라고 하시는구나 생각하고 헌책을 구입하였다.

산골마을『샴봉』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남불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몽쁠리에’(Montpellier)에 도착하였으나 아무래도 대도시는 숙박비가 비쌀 것 같아 이름없는 시골에서 이틀정도 더 지내기로 하였다. 초행길이라 아무 계획이나 지도도 없이 기차가 처음 선 시골역에 내렸다. 조금 걸으니 바닷가 갯벌내음이 코에 와 닿는다.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필자에게는 가슴에 시원한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특징없어 보이는 시골 어항이었으나 골목길로 들어가 조그만 여인숙에 숙소를 정하고 오는 길에 보았던 바닷가에 늘어선 수수한 어촌식당에서 오랜만에 싱싱한 해산물 식사한끼 잘 먹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무엇을 먹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으나 싼값에 맛있게 잘 먹었다. 유럽을 떠나 북미에 온지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유대인 관계서적을 읽다가 이 작은 항구 세뜨(Sete)에서 ‘엑소더스47’배가 출항했다는 역사를 읽고 크게 놀랐다. 나는 몰랐으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셨고, 역사적 현장으로 인도하셨음을 알고 찬송하게 되었다.

1947년 7월 중순 ‘세뜨’항을 떠난 ‘엑소더스’호는 미국 ‘미시시피’강(江)을 오르내리던 증기선으로 120명의 부유한 고객들을 태우고 다녔던 유람선을 개조한 배였다. 유대인 난민 4,515명을 태우고 이스라엘로 일주간 항해예정으로 이 항구를 떠났다. 바다위에서 첫날밤에 두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좋은 징조라고 다들 기뻐하였다. 나흘 째 되는 날, 세 번째 아기가 태어났다. 그러나 죽음의 수용소를 벗어났던 산모는 조국 이스라엘로 가는 배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미 부모들을 독일의 수용소 가스실에서 잃은 고아들만 600명이 넘게 타고 있었던 이 배에 아기고아를 남기고 그녀는 이스라엘의 건국국기가 될 국기에 싸여 바다에 수장되었다. 모두가 다시 불안하고 슬퍼졌다. 온 세상이 박대하였던 세상의 고아 유대인들, 온 세기를 두고 괴롭힘을 당해왔던 세기의 고아 이스라엘. 그러나 저들을 택하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고아의 아버지가 되셨다. 삼사일이 지나자 영국구축함 두 대가 미행하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많은 난민들로 인해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발을 뻗고 잘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일주간의 항해로 모두가 지쳐있었고 극도의 긴장 속에 빠졌다.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태운 이 엑소더스(출애굽)호는 구약의 애굽으로부터의 ‘출애굽’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출애굽’(‘출’전세계)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의 ‘하이파’(Haifa)항이 가까워지자 상륙거부령과 배는 하이파 항에서 압류되고 난민들은 다시 영국 구축함 3대에 분승되었다. 이 와중에 최루탄 발사등으로 3명이 죽고 30여명이 부상당한 불상사 속에서 선원 몇 명이 탈출, 이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게 된다. 유대인들은 떠나온 프랑스로 다시 옮겨졌다. 마르세유(Marseille)근처의 다른 소항구(Port-de-Bouc)였다. 프랑스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고집, 하선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단식투쟁 등으로 배는 다시 대서양으로 나가 북상, 바닷가 마을 세뜨 어항을 떠난지 근 2개월 후인 1947년 9월 8일, 패전독일의 영국관할 지역인 함부르크가 가까운 ‘리벡’(Luebeck)항 근처인 포펜도르프(Poppendorf)라는 마을에 감금 수용되었다.

독일 땅에는 다시 발을 딛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하선시키느라 항구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 소식은 전파를 타고 온 세계로 퍼져나갔다. 유대인들이 도착하여 재수용된 수용소는 바로 나치가 유대인 감금에 사용하였던 수용소였다. 영국정부의 비 인도적 처사에 온세계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뉴욕, 미국의 수도 워싱턴과 프랑스 빠리의 영국대사관 앞에서의 대대적 시위로 영국정부는 크게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강제로 독일에 억류되었던 이들은 거의 대부분 1년 내로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옮겨졌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다시 전세계의 여론을 크게 흔드심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에 담대함과 용기를 심어주고 계셨다. “우리의 선조의 조국땅을 찾아가는 것이 불법이라니?”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대학살이 시작된 1938년부터 이스라엘의 건국 전 해인 1947년까지 10년 사이에 이미 600,000이 넘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도우셨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전후로 101,000명이, 그리고 1949년에는 239,000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子民)을 순산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 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 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사66:8-10)





































0087. 역사를 왜곡하는 괴물들(Berlin/AP-Daily World, 05 Oct. 2012)    

지난 달에 캐나다 일간지에서 오려두었던 ‘기뻐하지 않는 자’의 뉴스 한 토막. 남부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법원은 “유대인 대학살”, “가스실” 등등이 사실이 아니라고 TV인터뷰를 통해 주장한 영국 카톨릭교의 주교 윌리암슨(Richard Williamson, 72세)의 발언을 범죄행위로 규정, 형벌을 결정하였다. 전후 독일에서는 “유대인 대학살” 부인, ‘친(親)나치’행위는 중대한 사상범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0088. “공회도, 신조도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

불의한 것은 진리를 산출할 수가 없다. 공회라는 것은 이단근절의 핑계로 하나님의 성도들을 말살하는데 앞장섰고, 교리제정 구실로 이단교리들을 만들어 놓고 거룩한(?) 공회로 가장하였던 저들은 세상을 흑암으로 몰아넣는 암흑시대를 몰고 왔다. 그러나 공회(公會)안에도, 신조(信條)안에도 없었던 생명은 바울이 그토록 강조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비로소 발견된다.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하는 것은 공회(councils)도, 신조(creeds)도 아닌 그리스도(Christ)이다. 진리는 인간들이 진리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도 이미 진리로서 부족함이 없이 존재해 왔으며,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손색없는 진리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공회의 결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미비한 복음이 아니다. 제자, 사도들은 공회가 제정한 신조없이도 예수의 이름 하나만 가지고도 세상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찬 531 /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①)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 4색 밴쿠버 목양일기










아빠와 아들


연말입니다. 할 일도 많고 마음이 분주합니다. 올 한 해를 뒤돌아 보면서 혹시 미루고 있던 일들이 있다면 잘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기에도 좋은 시간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사랑의 신발박스” 8개를 만들어 보냈습니다. 교인이 적다 보니 저희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모두 하나씩을 맡았습니다. 상자 당 20불 가량의 물건을 구입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물건을 사러 간 곳이 우연히도 한국 분이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아이들이 좋은 일을 한다고 가격도 좀 내려 주시고 물건도 더 주셨습니다. 주인 분의 이런 친절은 아이들에게 어려운 이를 도울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보람을 더해 주는 경험이 되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좋은 것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얼마 전부터 제가 가지게 된 고민은,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대물림 할 수 있을까 입니다. 자녀 유학 문제로 잠시 저희 교회를 방문 하셨던 성도 분께 친교 기도를 부탁했는데, 내가 가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우리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경험되고 유전 되었으면 좋겠다고 구하셨습니다. 저도 100% 동감합니다. 아이들이 틴에이저가 되면서 어릴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자기 생각과 주장이 생기면서 스스로 판단을 합니다. 더 이상 강압적으로 내 마음대로 다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에 딸 하나와 아들 둘을 주셨습니다. 모두 틴에이저입니다. 형제가 없이 자란 저에게 아들 형제를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 가졌던 소망은 친구 같은 아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친구도 아니고 아버지 노릇도 잘 하는지 의문입니다. 친구처럼 함께 놀아 주지도 못하고, 과거에 아버지들이 가졌던 권위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12월의 마지막 날에 가족이 모여서 새 해에 바라는 소망들을 적어 보았습니다. 각자 열 가지씩 적은 후에 발표 했는데, 그 때 저를 놀라게 한 것이 큰 아들의 소망 가운데 하나가 아빠와 친해지기였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저도 아들과 친해지기를 썼었습니다. 올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부자가 서로 얼마나 친해졌는지를 따져 볼 날도 며칠이 남지 않았군요!

언제부턴가 아들이 듣는 한국 노래가 귀에 익숙하게 들립니다. 알고 보니 저희 시대에 유행했던 노래들이 지금 아들 세대에서도 다시 유행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한 편으로 반가웠습니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생겼으니까요. 더 나가서 아빠 시대의 문화 컨텐츠가 얼마나 우월하면 30년 세월이 지나서도 먹히는지에 대한 자부심도 가졌습니다.
그런데…이런…다시 신앙의 문제로 돌아와서, 저는 아들과 얼마만큼의 신앙을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아들에게 자랑할 만한 믿음의 컨텐츠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 자녀는 없고 다만 문제 부모만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사는 지를 보면서, 배우면서 아이들이 자랍니다. 그래서 존경 받는 부모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인 저도 어려움을 느낍니다. 얼마 전에 밴쿠버에 청년과 Youth를 섬기기 위한 “Young 2080”이란 단체가 생겼습니다. 한국에 본부를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청년 사역에 헌신한 단체의 밴쿠버 지부입니다. 제가 이 단체를 후원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작은 교회는 큰 교회처럼 교회 학교를 운영하기가 힘듭니다. 목회자 자녀 조차도 커리큘럼화 된 교회학교 교육을 받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힘이 부족하면 연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작은 교회가 힘을 모아 “Young 2080” 같은 단체를 후원하면, 그곳에서 연구되고 개발된 컨텐츠를 가져다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자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아빠와 아들은 먹는 것을 공유하면서 티격태격하지만 따뜻한 정을 보여줍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해서는 무엇을 공유해야 할까요?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1:5)

[오세규 목사 / 밴쿠버오늘교회 / 778-887-8648]







재미있는 사도행전



일반삼토 일목삼착(一飯三吐 一沐三捉)



좋은 조직은 목표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목표가 아주 구체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목표와 계획이 있어도 그 조직과 목표를 이끌어갈 좋은 ‘인재’가 없다면 그 조직은 이미 죽은 조직이다. 인재란 말의 한자어는 사람 인(人)에 재능 재(材)이다. 말 그대로다. 인재는 재능있는 사람을 말한다. 사전적인 의미를 보아도 ‘인재’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학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2012년 8월23일 한국경제 신문 기사 내용이다. ‘삼성전자, 전 세계에서 불러 모은 박사급 인재 4500명’, 이들이 만들어낸 성적표, 한국의 1년 예산 326조 1,000억원, 삼성 2012년 총 매출 270조 8천억원이었다. 이것은 삼성이 전 세계의 숨은 인재를 찾기 위해 인재 스카우트 전담팀 IRO(International Recruit Office)을 가동한 결과물이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가? 좋은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종을 대왕이라 부른다. 그가 이룬 수 많은 업적들 때문이다. 이것이 세종 혼자 한 일인가? 정치-황희, 맹사성. 국방 -이종무, 최윤덕. 과학-이순지, 장영일 이란 걸출한 인재들이 그와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양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로 평가 받는 중국 주나라의 주공의 이야기다. ‘주공’은 뛰어난 인재가 오면 밥을 먹는 중에도 먹던 음식을 세 번 뱉고, 머리를 감다가도 머리채를 세 번 잡고 만났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주공의 ‘일반삼토 일목삼착(一飯三吐 一沐三捉)’의 일화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아주 좋은 지도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재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리고 교회의 인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았다. 이들이 제시한 교회인재의 자격은 두 가지였다. 내적인 조건으로 ‘성령과 지혜의 충만’, 외적인 조건으로 ‘칭찬’ 받는 사람 즉 ‘증명된 사람’ 이어야 했다(행6:3).

초대교회는 인재등용에 성공한 조직이었다. 일곱 명의 인재(행6:5) 등용으로 얻어낸 결과물을 보라!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해 갔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된 것이다.
둘째,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셋째, 세상이 항복하게 되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니라.”(행6:7).

사람은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다. 어떤 사람을 찾는가? 하나님이 쓰실 준비된 좋은 그릇(딤후2:20-22)을 찾고 계신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7 >









0083. 프랑스의 두 마을 이야기(1): 산골 마을 ‘샴봉’
제2차세계대전시 유대인 3,500여명을 숨겨 돌봐준 『위그노』마을
로마교황청이 프랑스의 왕권을 동원하여 거의 한 계절 동안 계속 된 성 바돌로메 대학살로 인해 남불(南佛)로 피신하여 살았던 위그노(Huguenot)와, 역시 로마교회의 끊임없는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피신하였던 보드와(Vaudois/Waldensian)들의 유적들을 찾아나섰다. 22년 전의 일로 아무에게도 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글로 쓰고 있다. 지역들이 너무 광범위하여 두 곳을 먼저 보기로 하고 프랑스의 남동부 지역의 세벤느(Cevennes) 산악지대에 위치한 구릉지대(les Plateau)에 가까운 인구 3천 여명의 마을 『샴봉』(Le Chambon-sur-Lignon)에 도착하였다. 상세한 프랑스 지도가 아니면 표기가 되어있지 않는 산골로써 주민 거의가 위그노들의 후손들로서 매년 9월 첫 주가 되면 전세계에서 위그노들의 후손들이 이곳 산골로 모여 천주교회의 박해를 피해 산 속에서 숨어 살면서 믿음의 주(主)를 찬송하였던 저들의 선진들의 믿음을 기리고 있었다. 산골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니 눈물 겨웠다. 워낙 먹지 못하고 쫓겨다닌 위그노들의 지도자 - 목사, 장로, 집사 - 들의 평균수명이 47세를 넘지 못한 때였다. 노예선으로 끌려가 바다에 수장된 성도들의 명단 수백 명이 색바랜 종이 위에 기록되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발발 하루를 앞두고, 이곳 교회로 부임한 프랑스 개혁교단 소속의 트로큼(A. Trocme)목사 부부. 그는 이곳 저곳 농경지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있었던 성도들의 구역성경공부 지도를 위해 13개의 구역과 지도자들을 세웠다. ‘히틀러의 교황’ 『비오』12세의 로마교황청을 통해 나치는 프랑스의 우방으로 선전되고 있었고 친 나치 포스터들이 온 프랑스에 나붙고, 일부 ‘레지스땅’들의 반격 외에는 나치는 총성 한 방 울리지 않고 빠리 개선문 아래로 진군하였다. 로마교황청의 ‘20세기 십자군 나치’를 통한 전유럽천주교화의 계획이었다. 나치의 진군으로 프랑스도 이제는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나라가 되지 못하였다. 스위스로, 미국으로, 남미로 멀리 떠난 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 나라안에서 ‘도피성’을 찾아야만 하였다. 천주교회에 의해 대량 학살당하고 『빠리』거주가 불법으로 선언되었던 위그노들. 유대인들은 저들과 같은 운명을 이미 경험하였던 위그노들의 산골마을로 한 두 명씩 찾아들기 시작하였고 『샴봉』의 산골사람들은 그들에게 은둔처를 제공하였다. 이 소문이 유대인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이제는 유대인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이 마을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전교생이 14명에 불과하였던 산골초등학교의 유대인들이 들어오면서 학생 수가 220명을 넘게 되어 증축이 불가피 하였다. 트로큼 목사의 지도 아래 동네사람들이 증축한 학교교실은 전시에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충당하여 여름캠프장 숙소같이 조그만 건물들이었다.

트로큼 목사는 깊은 번뇌 속에서 기도에 몰입하였다. ‘산상수훈’을 읽었고 ‘누가 네 이웃이냐?’라는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였다.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누구나 유대인들과 같은 운명을 각오해야만 하였다. ‘구약들’(舊約, Old Testament, 산골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구약들’로 불렀다)은 매일매일 『샴봉』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트로큼 목사의 마음은 확정되고 확정되었다.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저희들에게 보내주시는데 어떻게 저희들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13명의 성경공부 구역장들과의 연락망도 조직되었다. 스위스나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는 유대인들은 교인들이 비밀 루트를 통해 스위스나 스페인 국경까지 인도하였다. 그리고 단 한 푼의 금전도 요구하지 않았다. 로마카톨릭교회를 통해 조국 프랑스를 나치에 매도한 ‘빼땅’(Petain)정권의 새 수도 ‘비쉬’(Vichy)는 이 마을에서 불과 140키로 떨어진 서북편에 있었다. 비록 산골이기는 하였지만 나치의 비밀경찰(Gestapo) 주둔지역과 너무나 가까웠다. 예기치않은 나치의 순찰이 오기 전날에는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트로큼 목사에게 꼭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내일” 그리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전 유대인들은 깊은 숲속으로 피신하였고 비밀경찰이 철수하면 『샴봉』마을 성도들은 교회로 모여 하나님의 돌보심을, 온 감격으로 찬송하였다. 이 찬송소리를 신호로 숨었던 유대인들은 다시 숲을 빠져나왔다. 필자가 들어가본 숲은 나무는 크지 않았으나 대낮에도 햇빛이 차단될 정도로 빽빽한 숲이었다. 후에 트로큼 목사와 마을 지도자 2명 포함 모두 3명의 지도자들이 나치 비밀경찰에 구속되어 수용소에 갇혔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독일의 패전을 앞두고 죄수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재수용되기 일주일 전, 이들 3명은 수용소의 서류처리 미비로 기적적으로 석방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1940-44년 사이에 트로큼 목사의 지도 아래 이 마을에서 목숨을 건진 유대인들의 수는 무려 3,500명이 넘었다. 이 마을을 거쳐 이스라엘로 돌아간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자신들의 은인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게되었고 1979년에는 이 곳 마을 중심거리의 담벽에 기념헌판을 부착, 저들을 구해준 샴봉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시하였다. 시편 말씀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시편 112:6)는 히브리어와 프랑스어로 기록하였다.


이곳에서 태어난 유대인 ‘소바지’(Sauvade)씨는 영화제작자가 되어 이 마을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영화 ‘Weapons of the Spirit’을 제작함으로써 거의 반세기 만에 이 이야기가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이곳에 조사단을 보냈다. 그러나 주민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트로큼 목사 내외를 도와 구약백성들을 숨겨주었던 젊은 베텍스(Bettex)목사도 이제는 팔순(당시 78세)을 바라보고 있었고 『샴봉』부읍(邑)장 등 주민 40여명은 이스라엘 정부 초청으로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 유대인 대학살 추모기념관)에 새겨진 ‘『샴봉』마을 기념헌판식’에 참석하였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들 구출에 생명을 걸었던 이들에게 『의(義)의 메달』을 수여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정부는 “우리가 당신들의 선행을 폭력(?)으로 노출시키고자 한 행동을 정중히 사과합니다”라는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영화제작자로 성장한 ‘소바지’씨의 가족을 숨겨준 마리 브로뜨 할머니 집을 방문, 한나절 대화를 나누었다. 이 할머니의 친아들은 어린시절에 시도 때도 없이 어머니로부터 회초리를 맞았던 이야기를 필자에게 들려주었다. 혹시나 어린 아들이 ‘너희집에 유대인이 있지?’하고 누가 물으면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며, ‘있다’고 대답하면 이렇게 호되게 맞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실제로 어머니로부터 회초리를 여러 번 맞았다고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그는 장성하여 그 지역의 중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0084. ‘교리를 부패하게 만드는 유전들’
유전은 교리(敎理)를 부패케 한다. 인간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선에 올려 놓고 외경(外經)을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였던 가장 사단적인 『트렌트』공회(1545-63). 그 후 “미혹케하는 영과 마귀의 교리를 좇아”(딤전4:1) 로마카톨릭교회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리”(계2:14,15)들을 제정한 이 “사단의 회”(계2:9)가 어째서 거룩한(?) 기독공회란 말인가? 이러한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행2:42)을 벗어나 “지내쳐”(요이1:9),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벗어났다. 진정한 교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확정한 것들로서 우리에게 온전한 교리로 주어졌다. 사도들은 후에 올 공회들에 앞서서 교회의 생명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기록한 자들이었다. 딤후3:16,17 말씀은 우리를 “온전케”하시는 교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 어느 교단 할 것 없이 기독교 신학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아시아의 일곱교회를 심판하듯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아래 있다. 그러나 천주교 신학에서는 성경은 ‘교회의 책’이 된다. 즉, 로마교황 아래 예속된 책으로 교황의 권위 아래 종속된 책에 불과하다. ‘성경과 유전’을 언급할 때 성경은 늘 소문자(scripture)이고 유전은 대문자(Tradition)로 기록된다. 로마교황청의 ‘유럽 공동체’(EC)는 2006년 8월을 기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두 단어 기술을 그리스도는 ‘소문자’(christ)로 쓰기로 결정, 강제로 시행되고있으며 교회는 천주교의 전통대로 그대로 대문자(Church)를 고수하고 있다. 이제 세계종교통합을 주도, 모든 종교 안에 ‘메시아’(그리스도)의 존재를 인정할 채비를 마쳤다.


바람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기뻐하라 나라들 예수 구원하신다
구원하는 소리를 산과 들에 전하라
우리들의 승전가 예수 구원하신다
(찬송가 252 / 기쁜 소리 들리니 ④)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교회음악Plus











교회음악이란


음악이 교회 안에 있다고 다 교회음악은 아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교회에서 사용한다고 하나, 교회음악인 것처럼 위장하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음악들도 있다.

세상의 음악은 서양 음악, 동양음악, 전통음악, 클라식(고전음악), 째즈음악, 불루스, 탱코, 디스코, 락, 헤비메탈, 국악등으로 분류하거나, 시대적인 것, 민족적인 것, 요새는 대부분이 춤 없는 노래, 춤추며 노래하는 곡으로 나누인다. 사람에 따라, 자신이 선호 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기준으로 분류한다.

교회에도 음악이 여러 가지 있다. 합창찬양곡, 찬송곡, 복음성가, 복음송, 워쉽송, 크리스찬 락, 크리스찬 헤비 메탈, 토착화를 위한 민족음악(국악) 등으로 분류하고 나눈다. 교회에서의 음악도 세상의 음악과 별 다른 것이 없음이 현실이다.

그러나 교회음악은 구원 받은 자들이 부르는 노래, 음악이어야 한다. 세상적이면서 구원받은 사람처럼 행세하며 부르는 노래가 되어서는 안된다. 구원의 확신 속에서 부르는 노래, 음악이 교회음악이어야 한다.

교회음악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과 기능을 따라 예배음악(찬송, 찬양, 구원에 대한 감사 음악), 교육음악(성경의 내용을, 기독교인의 올바른 삶의 방법을 가르치는 음악), 전도/선교 음악(전도, 선교를 목적으로 구원으로 인도하는 음악), 친교음악(서로 교제하고 친교하는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음악)으로 기준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음악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의 기능과 목적에 맞게 선택되고 사용되어야 한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사망에서 생명으로 (6)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전 세계를 들썩하게 했던 50여개국에서의 정권교체와 새로운 대통령들의 취임식이 있어 그 어느 해보다도 주목되어지고 흥분되었던 2012년도 이제 한달을 남겨두고 있는데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한민국의 12월 19일 대선, 밴쿠버에 사시는 한인그리스도인 여러분들도 당연히 기도해주시고 응원해주실줄 믿습니다. 11월 마지막 주 칼럼으로 개인적인 저의 간증은 마무리하고 12월부터는 본격적인 ‘통일담론’에 대한 나눔들을 하려고 합니다.

지난 호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한국에 온지 3년쯤 되었을 때 DTS훈련과 중보기도학교 훈련을 마치면서 제게 새로운 인생이 열렸습니다. DTS 훈련 중에 저는 강원도라는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약 두달 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강원도 지역을 돌며 기도하고 예배하게 되었는데 2005년 1월 1일 정선이라는 지역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나님, 올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을 올려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과 함께 제 눈앞에 강원도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제단’이 보였고 그곳을 내려다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세상의 헛되고 헛된 신을 숭배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산을 밟고 예배하는데 왜 나를 위해서는 예배하는 사람이 이렇게 없느냐?” ‘천제단’은 단군을 우상화하여 숭배하는 곳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고 느껴지는 하나님의 외로움에 저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여름에 와서 하나님 만족하실 때까지, 하나님 마음 시원해지실 때까지 예배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고 하나님께 응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이 훗날 저의 인생을 ‘중보기도자’로서의 삶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있는 첫 사역일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 하나로 정말 혼자 올라가서 예배하려고 주님과 개인적으로 했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학교에서 구체화시켜주셨고 결국 ‘한반도의 회복, 부흥의 시작’이라는 기도회가 탄생되었고, 40일간 쉬지 않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첫 사역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부흥의 불씨’팀이 중보기도학교에서 결성되고 태백지역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40일동안 24시간 산에 텐트를 치고 서로 교대해가며 예배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한민국에서 한다하는 무당들이 와서 기를 받는 ‘천제단’안과 밖에서의 영적전쟁을 통해 저는 제대로 영적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대한민국의 8대 영역을 올려드리고 기도함으로 한국에 온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국의 모든 구석들을 들여다보면서 문제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 했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설립하게 되고 끊임없이 중보기도와 예배를 통해 한반도의 회복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통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눈을 뜨게 되었고, 태백산 기도회가 지난 3년 뒤인 2008년에는 통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NK100일 중보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을 위한 100일 기도를 2008년과 2009년에, 이후 3년간은 남한과 북한을 함께 올려드리며 New Korea, 통일코리아의 시즌을 맞이하고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들과 방향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북한을 바라보고 통일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NKB(New Korea Builders)라는 새로운 공동체로 통일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순종’이 첫 시작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북한과 통일이야기,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나누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5 장 점점 씩씩해져가는 여성들 (Tomboys), 작아져가는 남성들


운전대를 잡아야만 하는 누나
톰보이 강의를 들은 선교사 지망생 박 집사가 눈을 반짝이면서 말한다. “목사님, 오늘 강의 중에 우리 누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저희 누님이 바로 ‘왕 톰보이’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누님에 대한 의문 또 누님과 매형 사이의 여러 의문도 풀렸습니다. 저희 누님은 늘 운전대를 자신이 잡아야 합니다. 만일 어쩌다 매형이 운전을 하는 때는 너무나 차 안이 시끄럽지요. 누님이 말로 운전을 다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물었다. “집사님은 누님과 사이가 어땠습니까?” 씩 웃으며 대답한다. “예, 그냥 알아서 피해가면서 살아왔지요. 부딪치면 늘 대형 사고가 나니까요... 하하!!”

박 집사는 겉으로 보아도 아주 부드러운 성품의 사람이다. 자라면서 누나의 강한 성품 때문에 많이 치었다. 모든 일에서 피해나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박 집사도 톰보이 아내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약점을 보완해줄 씩씩한 성품의 아내를 만난 것이다. 그 아내도 함께 세미나에 참석했기에 나눔의 시간을 통해서 몇 가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집에서 무언가 망가지면 남편을 부르는 게 아니라 아내가 직접 연장을 들고 나온다. 전구가 끊어져도 아내가 전구를 찾아 들고 나온다. 초등학교 6학년 딸과 4학년 아들이 있는데 딸이 벌써 엄마를 그대로 닮아서 연장을 챙긴다. 세미나 중에 우리가 강의실 조명의 조절을 부탁했더니 부인이 사다리를 들고 나온다. “남편에게 부탁하시지 왜 이 무거운 사다리를 직접 가져왔어요?” 라고 물었다. “우리 남편에게 부탁해서 제때에 되는 일이 없으니까요” 강의실에 폭소가 터진다. 박 집사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아내 맘에 들게 하지 못합니까?” “저 사람은 제가 하는 일은 무엇 하나 만족하는 게 없답니다. 다 다시 한답니다.” 다시 폭소가 터진다.

자기가 해 주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면서 남편은 이제 아내의 부탁을 들어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결과가 이미 뻔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그 일을 아내가 다시 할 것이니까... 그래서 이제 아내도 그런 일은 남편에게 부탁조차 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아내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헌신한 이 착한 남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던 것이다. 세미나를 통해서 부부가 서로의 많은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내가 부드러운 남편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남편을 멋지게 사용하고 계신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신의 마음에는 너무나 부족하게만 보였던 남편인데... 그 가정에 아름다운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남편을 빼앗긴 톰보이딸만 넷인 집의 막내다. 할머니가 몹시 아들을 기다렸기에 이 딸도 뱃속에서부터 완전 톰보이가 되었다. 막내라고 부모님이 워낙 예뻐하고 언니들의 보호가 있었기에 자라면서 큰 아픔은 없었지만 이미 톰보이로 변한 성품은 그대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여자로서 공과 대학을 들어갔고 학교에서 아주 부드럽게 보이는 남학생을 만나서 (친구의 애인을 뺏어서) 뜨겁게 연애를 하고나서 친구들의 시샘 속에서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 남편에게 상처가 아주 많았다. 어려움 속에서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강한 아버지가 부드러운 아들이 마음에 들지 못한다고 말로, 또 정신적으로 아들에게 오랫동안 많은 상처를 준 것이다. 그렇게 상처 많은 두 젊은이가 정신적인 준비 없이 결혼을 한 것이다. 처음부터 삐그덕 거렸고 세월이 가면서 점점 어려움이 심해지면서 결국 남편이 이 강한 아내를 떠나버렸다. 자기를 무조건 섬겨주는 속셈있는 여자에게 끌려간 것이다.

내가 이 자매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아주 많이‘남자’였다. 그러면서 또한 매우 심각한 정신적인 혼란 속에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본인 속에서 끊임없이 부딪치고 있기에 남자들과도 여자들과도 대화가 제대로 되지를 않았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자유롭게 살던 남편이 이런 아내를 만나서 얼마나 어려웠고 또 눌리며 살았을까...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런 상황에서 부드러운 유혹의 손길이 닥쳐왔을 때 못 이기는 척하고 그 유혹을 받아들였을 상황이 상상이 된다. 처음에 이 자매와 대화를 할 때는 나도 매우 긴장이 되곤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나와 상담을 하면서도 “목사님, 참 못됐다...”는 식으로 말을 함부로 했다. 한국 여성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조차 안 되어 있던 것이다. 아들 하나를 데리고 유학생 엄마로 이국땅에 와 살면서 많이 울었다. 빈 집에 들어가면서 서러워서 울고, 안타까워서 울고, 외로워서 울었다. 도무지 마음을 추스르지를 못했다. 그런데 치유 학교에 다니면서 마음이 만져지기 시작했고 여태 몰랐던 ‘마음의 원리’를 깨달아가게 되었다. 자신이 상처 많은 톰보이인 것을 알게 되었고 남편도 아주 상처를 많이 입은 부드러운 어린아이인 것을 보게 되었다. 겸손하게 “치유의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하며 주님의 말씀을 붙잡기 시작했다. 아픔을 준 남편과 시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불쌍한 마음으로 용서하면서 생각과 삶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타를 열심히 치면서 늘 아들과 찬양을 불렀다. 그러다가 교회 주일 예배 찬양 팀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 년쯤 지나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나도 더 이상 긴장하지 않는 순한 양이 되었다. “너무 예뻐졌네...” 라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랑스러운 여인이 되어간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교리문답ㆍ구속사적 설교 회복 절실






강단의 변화가 교회 개혁의 시작


이단, 신비주의, 번영신학, 신앙과 삶의 분리, 윤리 문제 등 한국 교회는 올바른 신앙 정립의 부재로 발생하는 복합적인 문제들로 영적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한국설교학회(회장 정창균 교수 / 합신대)가 최근 개최한 제16차 정기학술대회에 발제자로 참석한 설교학자들은 교리문답 설교를 비롯해 구속사적 설교 등 강단의 변화에서부터 교회 개혁이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성환 교수(웨신대)는 잃어버린 신앙 유산인 교리문답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성도들이 각종 이단의 사설에 현혹되고, 예언이나 환상, 신비체험 등과 같은 신비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목회자들이 성경을 왜곡해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라며 “성도들이 이단과 신비주의에 맞서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우게 하려면 교리문답 설교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목회자들 가운데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교리 연구는 지적인 것을 추구할 뿐, 영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 신학 지식을 많이 습득할 수 있지만 신앙과 삶의 괴리 현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다양한 논쟁을 불러와 다투거나 자신이 속한 특정 교파만 옳다며 편파적인 성향을 갖는다는 것, 교리 연구가 때로는 말씀의 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교리 연구는 비록 지적인 면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신자가 살아가고자 하는 열심과 성숙을 보일 수 있다”며 지적 노력 없이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없다고 역설했다. 즉, 올바른 교리 연구를 통해 자신의 신학(신앙)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에 신학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신앙적 반성이 각자의 삶에 반영돼 보다 성경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교리문답 설교는 자칫 성도에게 지루함, 딱딱함, 심지어 교리의 주입과 강요함으로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교리문답 설교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야 한다. 박 교수는 어떤 교리문답이나 신경, 그리고 신앙고백서를 설교를 통해 가르치고자 할 때, 각각의 구조나 특성을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미 52주에 걸쳐 설교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그렇다고 52주에 맞춰 모두 가르칠 필요는 없다. 129개의 질문과 답으로도 구성돼 있어 129 주일에 나눠 가르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교리문답서들이나 신앙고백, 신조들도 마찬가지다.

박 교수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목회자가 판단할 수 있지만 단순하고, 쉽고, 빠른 것을 원하는 세대에 맞춘다면 몇 개의 항목을 엮어 가르치기보다는 한 주에 한 항목씩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속적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어렵다면 교회력에 따라 교리문답을 재배치해 설교할 수 있고, 교리문답서들의 내용 가운데 사회의 이슈들에 해답을 줄 수 있는 교리문답 항목을 엮어 시리즈 설교를 구성할 수도 있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 잃어버린 신앙유산인 교리문답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며 “교리문답 설교 운동이 일어날 때 한국 교회의 힘과 능력이 회복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조상현 목사(제자삼는교회)는 구속사적 설교를 통해 윤리 행위를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목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가는 구속의 역사라고 하는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특정 본문을 해석하는 구속사적 설교가 ‘여기와 지금’의 청중에게 소홀하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며 “하나님의 구속사는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이들로 구성되는 신앙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조 목사는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윤리 행위를 촉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구속사만 드러낸다면 구속의 사건을 경험했던 성경 인물들의 반응과 삶의 모습은 철저히 배제될 수 있고,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의 성도들이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속사는 하나님의 활동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속사 자체가 윤리적 행위를 촉구하는 설교의 정당성을 지지해준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구속사적 설교는 단순히 구속사를 드러내려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 내용이 청중의 삶과 구체적으로 관련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조 목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통해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일으키고자 하셨고, 또 요구하시며 기대하셨던 변화가 무엇인지 살펴서 오늘의 청중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구속사건이 재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구속사적 설교가 반드시 윤리적 행위를 촉구하는 설교이어야 함은 성경 자체가 입증해주고 있다”며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통해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셨다”고 덧붙였다. 결국 구속사적 설교는 성도 개인이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공동체적인 윤리 행위까지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 목사는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과 성도 개인의 만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속사를 실현해 가는 현장인 신앙 공동체를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교는 개인의 변화와 함께 신앙 공동체를 세워가도록 하는 이중적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구속사적 설교의 메시지는 단순히 성도 개개인의 구원과 윤리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차원을 넘어 신앙 공동체 전체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 공동체 전체의 윤리적 성숙과 헌신으로 이끌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교회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igoodnews.net]
 
 
 
 
 

재미있는 사도행전



시민권 있습니까?



세계 역사상 가장 높은 가치를 지녔던 시민권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로마 시민권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전, 전 유럽 사람들의 꿈은 ‘로마 시민권’을 손에 쥐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글과 함께 실린 사진이 당시 청동으로 만든 로마시민권이다.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로마시민권의 매력에 한번 빠져보자!

무료 식량 배급, 죽을죄를 지어도 재판 없이 처벌 불가(행22:25),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의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행22:29), 어디 이것뿐인가? 로마시 안에 살면 수세식 화장실, 초호화 목욕탕 이용, 콜로세움(라틴어:거대한 건축물)에서 벌어지는 검투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무료 관람 등의 권한이 주어졌다. 세상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는, 공휴일이 자그마치 135일이었다. 로마시민권을 가지면 일 년의 반을 먹고 놀수 있었다는 얘기다.

사도행전 22장22절을 보면 로마 시민권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천부장이 사도바울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시민권을 얻었노라”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 돈 장난까지 쳤다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이렇게 대단한 로마 시민권을 “나는 나면서부터라”.

바울이 의심스럽다. 그는 진짜 로마 시민권자 이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이 간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가서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자! “나는 매를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강도의 위험, 자지 못하고, 굶고, 추위에 떨었습니다.(고후11:23-27). 이것이 로마 시민권자의 삶인가? 그는 왜 이렇게 산 것인가?

바울은 말한다. 자신의 분명한 소속이 어딘가를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멋있다. 정말 멋있다. 자신을 두고 “나를 본받으라.(빌3:17)고 할만 하다. 그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멋진 삶을 산 것이다. 마치 다니엘이 “바벨론에 있으나, 바벨론에 속하지 않는” 길을 택했던 것 처럼(다니엘1:8).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의 ‘갈매기의 꿈’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단지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나는 다른 갈매기와 달랐다. 그에게는 남다른 꿈과 이상이 있었다. 조나단의 이런 행동이 그를 다른 갈매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결국 무리로부터 추방당하게 만든다. 우리의 수준을 높이자! 우리는 절대 땅을 향해 목 뼈가 굳어버린 돼지가 아니다. 우린 엄연히 차원 높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잊지말자! 확실히 붙들자! 이것 하나를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4인 4색 밴쿠버 목양일기

 
 
저는 서비스업(業)에 종사하는 목사입니다
밴쿠버에서 사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어떤 집사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공항 라이드를 부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이민목회는 섬기는 목회라고 배우고 들었던 바, 망설임 없이 한국을 방문하시는 집사님을 공항까지 라이드 해 드렸습니다. 이것도 나름 목회의 연장이라는 목사의 마음으로 기분 좋게 집사님을 내려드리려는 순간, 집사님이 제 손에 봉투를 건네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목사님! 공항라이드 하시는 분께 물었더니 보통 70불 정도 받는다고 하시네요. 70불 넣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렇게 우울하던지요.
흔히들 이민목회는 섬김의 목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성도를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는 일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사역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소위 ‘목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순 서비스맨이 되기는 싫은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개척교회 목사로 개척교회(소형교회)가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성도들과 밀접한 영적 관계 속에서 목양할 수 있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섬김과 헌신의 본을 실천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그런 환경이 개척교회 목회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목회를 해보니 성도들은 교회를 통해 여러가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각종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을 통한 다양한 교제, 그리고 체계화된 교회학교 시스템까지 개척교회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서비스들입니다. 물론,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삶의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그런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할 수 있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숙고해야 할 부분은 우리 모두 교회를 통해 서비스를 받는 일에만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조금 많이 나가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저는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친절한 목양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퀵 서비스맨이 되어야만 한다는 심각한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자각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회를 해야 하는데, 자꾸 사람들(성도들)을 경외하게 되는 목회로 방향성을 잡아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하는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배를 의미하는 영단어 중 하나가 서비스(service)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각종 서비스를 받고 누리는 곳이 아니라, 서비스를 행하고 드려야 하는 곳’이어야 맞지 않겠습니까? 목사나 성도 모두가 하나님께 서비스하는 예배자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목사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한 사람의 예배자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일에는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께 온전한 서비스를 드릴 수 있도록 양육하며, 훈계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서비스를 드리는 곳이지, 서비스를 받는 곳이 아닙니다.’ 때문에 저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목사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이왕 서비스맨이 될 바엔 하나님 앞에 가장 최고의, 그리고 가장 최선의 것으로 서비스하고 싶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제게 두둑히 건네주실 팁(상급)을 기대하며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찌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대상 16:29)
[문경돈 목사 / 나무십자가한인교회 / 778-772-4738]

아브라함 이야기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창 18:17-21 (하)



기도의 소명을 깨달은 아브라함
1아브라함은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도 복을 받아야 할 천하만민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담대하게 섰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12장에서 처음 부르심을 받은 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먼저 직접적으로 간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기도다운 기도를 할 수 있는 신앙으로 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기도할 수 있는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한 아브라함 (25절)
25절은 19절의 말씀을 근거로 한 기도입니다. 비록 19절이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은 아니지만 아브라함도 곁에 있었기 때문에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만 번 기도 응답을 받은 죠지 뭘러는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기 전에 성경을 먼저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에 부합되는 말씀을 찾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고 그 결과는 2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때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서 기도하기 쉽기 때문에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겸손하게 기도한 아브라함 (27절)아브라함은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티끌’이란 ‘아파르’ (ʿāp̱ār)와 ‘에페르’ (ʾēp̱er)의 복합어로서 ‘dust’와 ‘ash’를 의미합니다. 즉, 먼지에서 시작하여 재로 끝나는 자신의 실존을 파악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그를 겸손히 기도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시 10:17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라고 나옵니다. 눅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가 나오는데,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자기를 내세우는 기도를 하였지만, 13절에 보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14절). 세리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임을 알았기에 비록 구체적인 간구도 못하고 통회만하였지만 그의 간구는 상달되었고, 하나님은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한 아브라함 (32절)
아브라함은 24절에 오십 명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시겠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워낙 타락한 성이라 오십 명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28절에서는 45명으로, 29절에서는 40명으로, 30절에서는 30명으로, 31절에서는 20명으로 그리고 32절에서는 10명으로 줄여서 기도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기도하되 철저하게 기도했으며, 지속적으로 기도했으며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귀찮아 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적인 불신과 완고함, 그리고 고집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제거되어 영적으로 회복될 뿐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겸손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새벽 빛이 움트기 전, 짙은 어둠에 잠긴 도시를 울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인생이 너무 짧고 덧없다는 탄식처럼 쓸쓸하게 마음에 울립니다. 인생은 결국 혼자서 가는 여행이라고, 눈물겹도록 외롭고 허무한 여정이라 울부짖는 듯, 심난한 여운을 남기고 떠난 기적소리에 허물어지기 시작한 잠을 털고 일어나, 곁에 잠든 남편의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덮어 꼭꼭 여며줍니다. 자랑도 인기도 찬란한 이력도 어두운 허공에 차가운 망령처럼 떠있는 이 시간, 이런 작은 사랑의 동작이 내 마음에 온기를 지펴줍니다. 빛과 소리와 인파 속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또렷한 소리로 방안을 울리고 있는 시계의 초침소리가 본향을 향한 소망이 있는 우리에겐 생의 수명이 떠나가는 아쉬움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다가가는 설레임 임을 주지 시키며 헐거워진 생의 믿음을 하나하나 단추 채웁니다.

생계를 위해 성 매매를 하는 박카스 할머니들에 대한 기사 속의, 내 어머니의 뒷모습과 닮은 짤닥막한 노파의 사진 때문에 내내 마음이 저리고 아픕니다. 생에 대한 경륜이 짧고 눈 앞의 것 밖엔 생각할 줄 모르는 젊은 때는 미련하여 방탕하다가도, 늙어가면서 지난 날의 어리석음을 회한하며 삶을 맑게 정리하게 되는 순리마저 어지럽혀졌음이, 돈으로, 탐욕으로, 화려한 색으로, 선정적인 리듬으로 혼미한 가운데, 인간 정신이 망해가는 세대에 지혜를 주어야 할, 이생의 면류관 같은 존재들이 사회의 무관심의 사각지대에 버려져, 생계와 병든 육체를 치료할 약 값을 벌기 위해 들개처럼 떠돌고 있음에 마음에 애통이 일어납니다.
심판 날에 이 성보다 소돔과 고모라가 견디기 쉬울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탄식이 한국 땅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대의 신전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쇼핑몰을 걸을 때마다 실로 이곳이 매몬의 신전이 아닐까 생각이 들곤 합니다.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의 동상처럼 눈매가 관능적인 모델들의 화보아래서 사람들은 돈을 갈망하며 예배하고, 돈을 많이 벌길 소망하고, 물질을 우러러보며 돈의 가치를 절대화합니다. 돈을 경배하는 정신에 취해 매몬의 신전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동자에 만화의 그림처럼 달러의 표지가 씌운 듯 느껴집니다. 한국도 북미처럼, 전세가 월세로 넘어가고, 중산층이 사라지고, 은행 빚을 얻어 산 부동산의 이자를 갚느라 가계가 빈궁해지고, 높은 실업률과 어디나 불황이라는 흉흉한 소식에 눌린 사람들에게 재물은 점점 더 큰 위력을 과시하며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억압하고, 성경의 표현처럼 돈을 사랑하는 정신이 사회 안의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무섭게 번져가고 있습니다.

매몬의 금우상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음란문화가 성행하고 사람들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양심도 버리고 오래된 신의마저도 저버리며 인간 신체 안의 장기까지 내다 팝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생존 이상의 의미와 소명이 있습니다. 진실하고 바르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야 할 존귀가 깃들어 있는 존재로서 잘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귀는 거룩함에서 나오며 거룩함이 인간을 영화롭게 합니다.
인간이 본래 거룩한 존재라는 뉴에이지의 정신은 철저히 사단의 거짓말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죄에 물든 인간의 마음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피가 마음에 뿌려져 양심의 악을 깨닫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만 거룩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사를 위해 집을 보러 다니면서 잘 수리되어있고 잘 손질이 되어있는 집을 찾아 그만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이치를 생각하면서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인 나의 영혼을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하게 가꿔야만 하는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생에서 사람이 추구할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은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죄를 회개하고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을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말 한마디 생각 한 줄기가 성령께서 기뻐하시며, 성령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박카스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내 기도 노트에 스크랩하면서 오늘도 매몬의 사각지대에 버려진 많은 노인들과 병약한 사람들, 가난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죄악에 빠져들어가지 않도록 돕기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작은 희생을 바치고 있는 선한 사람들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물질과 권력과 교리의 싸움을 그치고 이 선한 사업에 앞장 설 수 있기를, 그리고 내 인생도 이 일을 위해 드려져 쓰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광란의 밤이 남긴 도시의 쓰레기를 쓸어내시던 이른 새벽 청소부 아저씨들의 건강한 비질처럼, 오늘 드린 나의 간절한 기도가 물질 만능주의와 이기심의 악취가 풍기는 세상의 모든 죄악과 몰염치를 싹싹 쓸어버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함에 이르는 회개를 담대히 전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함은 감미롭고 즐겁고 황홀할 정도로 평화롭고 고요한 본질을 가진 것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것은 영혼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결 밝음 평화 그리고 환희를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영혼을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들이나 정원처럼 만들었다. 그것에는 유쾌함, 괴롭지 않은 모든 즐거움, 달콤한 고요함에서 얻는 즐거움, 그리고 부드럽게 생기를 더해주는 태양빛이 있다…” -조나단 에즈워드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교역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재단 생겼다



교역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재단 생겼다


Joseph Chung Scholarship



교역자(목회자 및 선교사)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장학재단이 생겼다.

에미나타 그룹(회장 정문현 장로)은 지난 9월 예기치 않은 사고로 하나님 품에 안긴 아들 고 조셉 정 형제(1980~2012)의 이름으로 매년 약 $60,000 정도를 출연, 20여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에미나타 그룹은 그 동안 Trinity Western University, Regent College, Pepperdine University, Briercrest University 등에 장학금을 제공해 왔는데 그 범위를 넓혀 올해부터는 그의 이름으로 도움이 필요한 지역 목회자와 선교사 자녀들을 돕고자하는 것이라며 비록 조셉 형제는 장애로 인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없었지만 본 장학금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 장학금은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네 번까지 받을 수 있으며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지역내 목회자와 선교사 자녀들이 그 대상으로, 학업 성적도 선발요인이긴하나 미래의 꿈과 이웃 섬김의 계획을 중요시하게 된다고 밝혔다.

고 조셉 정 형제는 생전에 여러 장애로 인해 고통을 당하였지만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늘 많은 이들을 돕기 좋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하고 있는 교역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번 장학금 지급은 고인의 뜻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학금 지원 신청서는 다음 웹사이트에서 다운 받을 수 있으며 기타 자세한 사항은 광고를 참조하거나 아래 문의처로 연락하면 된다.
http://jubileechapel.org/_chboard//bbs/board.php?bo_table=m1_6&wr_id=91818

 
 
 

국민의 행복 점수 61점



한국교회, 치유자로 나서야


한국기독교언론포럼, 국민 행복을 위한 심포지엄 열어




최근 대선후보들이 내놓는 말들이 있다. 바로 행복, 힐링 그리고 변화다. 그만큼 우리사회 많은 이들이 행복을 찾길 원하고, 치료 받길 원하며 부패한 세상이 변화되길 바란다는 반증이다.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사장: 손인웅 목사)은 '국민의 행복과 힐링을 위한 우리 사회의 프레임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지난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제2회 열린토론마당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날 심포지엄은 지난 10월 17일 부터 22일까지 (주)글로벌리서치가 조사한 '국민의 행복/힐링 관련 전국민 여론조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이날 발제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부분의 학자들로 각 분야에서 바라보는 행복에 대해 전문가의 시각으로 주장에 나섰다.

발제에는 서울대 이정전 명예교수가 '새로운 시대에 국민이 바라는 행복', 숭실대 김선욱 교수가 '국민 행복이 정치 프레임은 무엇인가?', 감신대 이원규 교수가 '병든 사회, 상처입은 영혼, 치유하는 교회'를 주제로 각각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이날 손인웅 목사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안고 시작한 기독교언론포럼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는데서 해답을 찾아가려고 한다”며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쉽게 오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찾아야 한다. 하지만 물질적 문명에서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곤란하다. 기독교가 이런 부분에서 신앙적으로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발제자들은 국민들이 행복해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비판과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대안들로 시간을 채워갔다.

서울대 이정전 명예교수는 “소득수준이 높다고 해서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먹혀들어간다. 그 이유는 빈부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앞으로 높은 소득수준만으로 행복하지 못한 시대가 올 것인데, 그런 사회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대비책에 대해 그는 “이 부분에 있어 우리는 두 가지 돌파구를 생각해 볼 수 있다”며 소득재분배를 좀 더 확대하고, 낙수효과를 저해하는 요인을 과감하게 제거하며, 계층 간 이동의 사다리를 대폭 확충할 것과 시장의 공정성을 높이고 사회정의를 확고하게 세울 것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정치적 시각으로 행복을 바라본 숭실대 김선욱 교수는 “대한민국 헌법에서 경제민주화를 언급한 부분은 결국 경제가 국민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대전제의 표현”이라며 “정치는 국민들에게 삶의 다양한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치는 하루 이틀에 걸쳐 형성될 수 없는 바람직한 문화가 이 땅에서 정착되기 위해 사회적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가치들을 발견하고 구현해야 한다”며 “그렇지 못할 경우 물질만능주의, 극단적 이기주의, 무한 경쟁사회 속에서 남을 짓누르고 승리하는 기쁨에 도취해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종교사회학자 감신대 이원규 교수는 “경제적 지표는 한국이 과거보다 훨씬 부유해졌고,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국민들의 느끼는 행복감과 삶의 만족도가 낮은 이유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상처받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 근원은 우리 사회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도덕성과 공동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런 부분에서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줘야하는데 한국 교회의 몸집이 커지고 부유해지며 힘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영성과 도덕성을 잃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한국 교회가 먼저 영성과 도덕성을 회복해 사회도 함께 회복시키는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의 모습“이라고 강조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5)



주님의 자녀에서 주님의 제자로



저물어가는 2012년의 끝자락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디아스포라 코리안으로 사시는 밴쿠버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화해자의 삶으로 담대하게 서시는 새로운 기름부으심과 삶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태국에 머물렀던 3개월이라는 시간 속에 만난 주님과의 첫 대면,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시작된 저의 신앙생활은 사역자로 사는 지금까지도 삶의 중심이 되어, 가는 곳마다 풀어내게 하십니다. 내 조국, 내 민족이라고 찾아 떠난 길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하여 정착하게 된 대한민국에서의 초기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태국에서 만난 하나님과의 첫 사귐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죄인에서 구속해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고 왔지만 저는 아기와 같은 수준에서, 또한 율법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살고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일날 아무리 눈물 흘리며 회개를 하더라도 다시 주일이 되면 회개하기를 반복하고 그런 삶이 잘못된 것을 알았지만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 주님께 항변하는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나 좀 어떻게 해보라고.... 또한 돈이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것은 사실이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겠노라고 다짐했고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인생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는 저의 인생을 한걸음씩 이끌어 가기 시작하셨고 일반대학교에 지원했던 저는 탈락의 쓴 맛을 보게 되고 전혀 계획에 없던 신학교로 인도되었습니다.

신학교로 들어가기 전, 나름 인생의 기로에 섰다고 비장한 각오로 찾았던 기도원에서 주님은 잠언 20장 24절의 말씀으로 저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이 말씀을 받고 저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 주님,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었군요. 내 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었군요. 내 길을 내가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께 있는 것이군요! 이제부터 알아서 인도해주십시오.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당신만을 의지합니다.”

이런 고백과 함께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신학교의 문을 들어서게 되고 같은 해 가을 강력한 부르심으로 신학교 한 학기를 마친 뒤 곧바로 제주도에 있는 열방대학(예수전도단)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훈련과정에서 태국에서의 만남과는 또 다른 차원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고민했던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과 나는 소통할 수 있는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주님의 자녀라는 몰랐던 진리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면서 내 인생의 전환점이 이 시기에 새롭게 형성되었습니다. 즉 ‘주님을 만나는 것 보다 더 큰 비전은 있을 수 없으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자체가 제게 비전’이 되는 영원토록 간직해야 할 소중한 가치를 얻은 것입니다. DTS훈련과정을 통해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날마다 깊어지게 되었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삶은 매일매일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어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가게 된 중보기도학교는 제게 있어서 교육의 장을 뛰어넘는 실제 현장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