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1 >






0051. 예루살렘이냐? 로마냐?

예루살렘은 4복음서에 70번, 전 성경에 982번(구약 831 / 신약 151) 언급되어있다. 로마는 어떠한가? 구약과 4복음서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모두 9번 언급되어 있다(독자는 사단의 수 ‘9’라는 숫자를 마음에 새겨두시길...).

* ‘이스라엘’은 신구약에 2574번(‘히브리’인 /‘유대’인은 포함하지 않은 수) 나오며 이탈리아는 신약에 겨우 5번 언급되어있을 뿐이다.

 

어느 로마카톨릭 사제가 ‘기독교의 근본이요 요람인 로마카톨릭(천주교)...’ 운운했다. 기독교의 요람은 로마카톨릭교가 아니고 유대교이다. 구약의 그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신약의 초대교인들, 첫 순교자 스데반, 첫 선교사 바울, 주님의 12제자들, 요셉과 마리아 등, 이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성경은 거의가 유대인들의 손을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천주교가 초대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도 유대인이었다. 베드로는 천주교를 알지도 못한 자였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행3:6)라고 했는데 이제는 금은보화가 너무 많은 집단이 되었다). 육신으로는 유대인으로 오신 우리 주님과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한4:22)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초대교회 때에는 이방인들이 예수믿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놀라는 장면을 보게 된다. 말세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믿는 것을 보고 이제 이방인들이 놀라워한다. 첫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AD 33년 아시아의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지, 유럽의 로마가 아니었다. 로마는 AD 54년이 되기까지는 기독교 공동체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AD 150년이 되어서야 첫 교회감독을 가졌다. 330년 5월, 콘스탄틴이 수도를, 로마를 모방한 일곱언덕의 도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그의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노플, 즉 “새 로마”(Nova Roma)를 건설하고, 그 곳에 첫 에큐메니칼 교회가 그 본부를 설립하였을 때에만 해도 로마종교는 교회건물이라 할 만한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첫 1,000년 동안에 있었던 8번의 에큐메니칼 공회 중 단 한번의 공회도 로마의 감독에 의해 소집되었거나, 또는 로마교황에 의해 관장되어 열린 적이 없었으며, 감히 어느 로마의 감독도 자신을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아직도 국가교회의 무대는 유럽이 아닌 아시아였다. AD 1054년 수위권 다툼으로 동방교회, 서방교회로 갈라진 후 AD 1059년에 가서야 서양사는 처음으로 ‘로마카톨릭교회’라는 모순적인 용어를 기록하였다. ‘카톨릭’(catholic)이란 말은 고대 점성술의 “하늘 제신(諸神)들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보편적, 우주적인(universal) 교회라고 하나 『로마』는 지역적(local, regional)인 한 도시로서, ‘로마카톨릭’이란 말은 두 단어가 서로 모순된다. 그 외에도 사원(寺院, cathedral), 성당(shrine), 혹은 성골함, 교황(papa), 교부(敎父), 신부(神父), 수녀 등의 용어들은 모두 이교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0052.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선민, 이 유서깊은 민족을 칭하는데 쓰이는 세 가지 이름 - 히브리인,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 - 들의 유래는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백성으로 “거룩한 백성” 또 “택하심을 받은 백성”으로 칭함을 받은 민족이다. AD 70년 예루살렘성이 함락되고 온 세계로 흩어짐을 당하게 된 그 날부터 이 민족은 온 세상으로부터 경멸함을 받아왔다. 천주교에 의해 그들에게 뒤집어 씌어진 죄명은 ‘그리스도를 죽인 자’(Christ-Killer)들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길고도 오랫동안 정죄받아온 죄명이다.


 

0053. 『오리겐』의 유대인 말살 정책

어느 날 프러시아의 왕이 궁정목사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물었다. 궁정목사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폐하,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은 백성들이었다(사43.21).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란 죄명을 씌운 로마교회는 알렉산드리아의 흉악한 이리(행20.29) 오리겐의 유대인 말살정책, 개종, 추방, 멸종의 3단계 이론을 로마카톨릭교회의 교의(敎義)로 삼아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사단은 종교개혁과 함께 제외되었던 천주교의 ‘외경’을 성경의 정경으로 만들기 위해 기독교회사의 최초의 이단들 중 하나인 오리겐을 ‘기독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둔갑시켜놓았으며, 이미 배도의 문턱에 들어선 오늘날의 신학계는 천주교 성경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여호와’를 ‘야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오리겐의 비유법 해석은 어거스틴을 거쳐 오는 동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송두리째 제거시켰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논증을 들고 나섰으나, 교회는 교회이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구약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0054. “그럴 수 없느니라”

이스라엘은 교회와 별도의 운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넘어졌으나 최종적이 아님을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힘써 강론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11:1-5). 주님께서는 육신으로는 유대인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또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요4:22)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를 확정하셨다.

0055. 도스또예프스키가 기술한 로마카톨릭주의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중심부는 로마카톨릭신앙이 자리잡은 곳이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프랑스에 거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한때 영국의회 하원의원을 지낸 거물급 인사로서 케임브리지 대학의 근대사(近代史) 교수를 역임한 역사가 악톤(Lord Acton, 1832-1902) 교수는 철저한 로마카톨릭교도였다. 그러나 그는 학문의 자율성을 부르짖고 로마교황 비오 9세와 대결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크레이튼 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권과 결탁, 왕권을 뒤흔들었던 로마교황청이 누려온 세상권력을 두고 ‘모든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며,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으며, 종교재판 등 로마교황청이 저질러온 종교적인 살인행위에 대해서는 ‘로마 교황들은 대규모적인 살인자들일 뿐이니라, 살인을 로마교회의 정당한 체제로, 구원의 조건으로 설정하였다’고 논평하였다.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워낙 많은 어려움을 당했던 프랑스 역사는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민중의식이 깨어나고 천주교의 본질을 깨닫게 됨으로써 프랑스인들은 천주교 신앙보다는 차라리 무신론을 택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는 피난처가 되었다. 러시아의 대문호(大文豪) 도스또예프스키(F. Dostoyevsky, 1821-81)는 그의 작품 『악령』(惡靈)에서 “로마카톨릭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니라고 당신은 믿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설명에 의하면, 로마는 마귀의 세 번째 유혹에 빠진 그리스도를 선전한 것입니다. 지상왕국 없이는 그리스도도 자신의 지위를 보전할 수 없다는 사상을 선전한 로마카톨릭교회는 이 선전으로 반(反)기독교 사상을 보급시켰고, 나아가서는 유럽 전체를 멸망시킨 셈이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오늘 날 고민하고 있는 것은 단지 로마카톨릭교회의 죄(罪)인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가 더러운 로마의 신(神)을 배척하고도 새로운 신을 찾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고 당신은 명백히 시사해 주었습니다... 프랑스가 마침내 로마의 신을 심연 속에 던져버리고, 스스로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무신론(無神論)속으로 뛰어든 것은 무신론이 로마카톨릭교 보다는 훨씬 건전했기 때문입니다”라고 기술했으며,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家)의 형제들』 등등 그의 여러 작품에서 로마카톨릭교회와 예수회의 비행에 대해 장황하게 다루고 있다.

생명의 말씀인 나의 주여
목말라 주님을 찾나이다
해변서 무리를 먹임같이
갈급한 내 심령 채우소서
(찬송가 284 / 주예수 해변서②)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이단 전단지를 본보에 임의로 삽입, 미혹되는 이 없기를


 

이단 전단지를 본보에 임의로 삽입, 미혹되는 이 없기를





지난 주 발행 신문 안에서 밴쿠버제칠일안식일교회에서 열리는 집회 “Amazing Discovery 놀라운 발견”이란 제목의 전단지를 발견한 분들은 즉시 폐기하기 바란다.

한 애독자의 제보에 의하면, 지난 10월 5일 랭리 소재 한아름 마트에서 가져온 신문 안에 이 전단지가 끼워져 있었다며 마트에 비치한 신문에 임의로 삽입한 것 같다고 사진과 함께 알려 왔다. 전단지에는 명확한 주최자는 없고 단지 장소가 밴쿠버제칠일안식일교회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성경예언으로 미래의 희망을”이란 제목을 언급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DA)는 미국에서 창립된 기독교 근본주의 성격의 교파로 28가지 기본교리 중 하나님, 창조, 죄, 구원에 관한 교리는 보편적인 기독교 교파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재림 후 천년기설(전 천년설), 제칠일 안식일, 그리스도의 하늘성소 봉사, 재림 전 심판, 건강기별, 영혼멸절 등의 교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만의 독특한 교리로 한국 주요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결의되어 있다.

수 년 전에는 밴쿠버 내에서 활동하는 이단세력 중의 하나가 모 마켓 앞에서 본보의 이름을 도용하여 전단지를 돌리다 적발된 경우도 있었음을 감안할 때, 정통 복음주의를 지향하는 본보의 이름을 이용하여 선량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침투하고자 하는 이단세력들의 간교함에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제보해 주신 애독자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미혹되어 곁길로 들어서는 이가 없기를 기도한다.



“한인 디아스포라 네트워크 만들자”


 

“한인 디아스포라 네트워크 만들자”


지난 5월 ‘북미주 전국 한인교회 실태조사’를 통해 미국과 캐나다 한인교회의 1세대 목회자, 2세대 목회자, 성도들의 실질적 요구를 조사했던 이민신학연구소 오상철 박사가 전 세계 한인 디아스포라 네트워크 형성을 제안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힘을 모으면 세계 기독교 부흥운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오 박사는 “세계에는 178개국에 750만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살아가고 있다”며 “‘디아스포라’라는 타이틀을 사용하는 연구소들과 세미나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지만, 이들을 묶어줄 수 있는 틀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디아스포라들이 조금씩 모여서 외치는 소리는 작지만 그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함께 소리를 내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 한인 디아스포라 네트워크를 위한 구체적 계획도 제시됐다. 2014년 대한민국을 필두로 2016년 북미주, 2018 년 싱가포르, 2020년 영국, 2022년 브라질, 2024년 케냐, 2026년 호주 등 2년에 한 번 권역별 집회를 실시해 함께 같은 고민을 하자는 것이다.

2014년 계획된 집회에서는 디아스포라 신학정립, 디아스포라 리더십 제시, 디아스포라로서의 비전 등이 제시되며, 각 지역별 현안에 관련된 내용들도 다뤄질 예정이다.

오 박사는 “1974년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1976년 엑스폴로, 1985년 민족 복음화 집회를 이은 전 세계 제4차 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며 “디아스포라 네트워크를 통해 네트워크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으로 통하는 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9일 공개된 미국 이민신학연구소(소장 오상철 박사)와 내셔널서베이위원회(조직위원장 박희민 박사)가 북미 한인교회 4000여곳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다.
 
 
지난해 1월부터 올해 3월 말까지 한인교회 담임목사, 원로목사, 부목사, 전도사, 선교사, 신학생 등 4109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로 보고서에 따르면 한인교회는 소형교회가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민 1세 목회자가 맡고 있는 교회의 주일예배 평균 출석인원은 50명 이하인 곳이 전체의 42.4%에 달한 반면, 3000명 이상은 1.9%에 불과했다. 이민 2세 목회자의 교회도 예배 참석인원이 200명 이하인 곳이 79.3%를 차지했다.

한인교회의 교단은 한국교회와 마찬가지로 장로교가 가장 많았다. 1세 목회자 교회의 58.3%가 장로교 소속이었으며 침례교(9.4%)와 감리교(6.9%)가 뒤를 이었다.

1세 목회자의 절반 이상(57.8%)이 “교인 수가 증가했다”고 밝혔다. 교인이 많이 감소했다는 응답도 11.7%로 적지 않았지만 이민신학연구소는 “2010년 이후 이민자 수가 급격히 줄고 있음에도 여전히 한인교회가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해석했다.

한인 평신도들은 한인교회를 가장 큰 정신적 지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민자의 정신적 지주 항목에서 한인교회는 교포 미디어, 한국학교, 한인회, 한류문화 등을 압도했다.

한인교회가 이민사회에 기여하는 점으로는 ‘한인 커뮤니티 형성’이 1순위로 꼽혔으며 ‘2세 교육’ ‘한인 정체성 유지’ ‘한국문화의 소개’ 등이 뒤를 이었다. 현재의 한인교회에 대한 평신도들의 만족도가 높아 “교회를 옮길 생각이 없다”고 답한 비율이 91%에 달했다.

신학적 노선 측면에서 1세 목회자의 절반 이상(54.9%)은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답했다. 동성애자 목사 안수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라는 답변이 압도적으로(88.2%) 많았다.

1세와 2세 목회자 사이엔 언어와 문화적 간극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세 목회자들은 1세 목사들에게 본받을 점으로 헌신·인내·지도력 등을 꼽았지만 ‘한국문화에만 초점을 맞추는 자세’ ‘민족 우월주의’ ‘강한 명령조’ 등은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한인 2세 교회의 다민족화 현상에 대해선 평신도의 73.6%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오상철 이민신학연구소장은 “108주년이라는 오랜 이민역사에도 불구하고 한인교회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너무 미약했다”며 “한인교회의 실태를 파악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이번 조사를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오 소장은 “선교적 교회가 한인교회의 미래”라고 강조하면서 다민족·다국적 선교학교 설립, 타문화 선교훈련 실시 등을 주문했다.


 

“결혼 전 성관계 가능하다” 학복협 조사 발표



기독대학생 75% 이상, “결혼 전 성관계 가능하다”


학복협, ‘2012 한국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대한 조사연구’ 발표


기독대학생 가운데 75% 이상이 사랑하거나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면 ‘결혼 전 성관계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원복음화협의회는 지난 10일 소망교회에서 ‘제6회 캠퍼스 사역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2012 한국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대한 조사연구’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연구에서는 대학생 1,359명에게 혼전 성관계에 대한 태도를 물었다. 기독대학생 22.8%만이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답했다. 2009년에 비해 30%이상 감소한 수치로, 비기독대학생과 비교했을 때 혼전 순결에 대한 의식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는 성관계 경험 유무 비교에서도 확인됐다. 기독대학생 가운데 15.8%가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2006년 11.5%, 2009년 13.6%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 견해도 크게 증가했다. 동성애에 대해 기독대학생 44.1%가 ‘긍정’이라고 답해 비기독대학생(47.6%)과 비슷한 수치를 보여줬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대학생 1,359명 가운데 기독교는 17.2%로 천주교(7.3%)와 불교(8.8%)보다 높게 나타났으며, 무종교는 66.7%에 달했다.

이에 대해 조성돈 교수는 “캠퍼스 사역자들은 일반적으로 대학생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이 5% 정도일 것으로 예상했다”며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기독교인 비율이 17.2%로 나타난 것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캠퍼스에 그리스도인이 의외로 많다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또 “무종교인이 66.7%에 달하는 것은 대학생들이 종교에 관심이 없다는 반증”이라며 “그럼에도 기독교 비율이 높게 나온 것은 ‘가족종교에 대한 충성도’와 관련이 깊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학교 이전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비율이 65.1%에 이른 것을 볼 때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부모의 종교생활을 많이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이번 조사에서 비기독대학생에게 ‘이전에 교회를 다닌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86.3%가 그런 경험이 없다고 답했다”며 “부모가 자녀를 데리고 교회에 가는 경우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교회를 경험할 기회조차 없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조 교수는 “최근 기독교인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하면서 왜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었을 때, 61.6%가 ‘기득권층 옹호, 교회세습, 비리연루 등 이미지 실추 때문’이라고 답했다”며 “기독교의 교리만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적인 포교활동 때문이라는 의견도 38.8%로 높게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압도적으로 이런 문제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이라며 “한국 교회가 이렇게 비취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심각한 반성을 해야 한다. 결국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부흥의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조사연구는 학복협에서 3년마다 실시하는 것으로 대학원생까지 포함시켜 대학생뿐만 아니라 청년 세대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igoodnews.net]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3 장 사랑과 결혼


돕는 배필 vs. 바라는 배필

이 세상 사람들은 배우자를 구할 때에 내가 바라는 사람, 나에게 도움을 주고 나의 욕구를 채워줄 사람을 구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남편을 “돕는 배필”이 되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8)

오늘날 여성들에게 돕는 배필이 되라고 하면, 믿는 사람들이라도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불신의 표현이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온 세상이 너무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돕는 배필이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신 “돕는 배필 (helper/ help meet)” 의 의미를 살펴보자. 현대 사회에서 helper 라는 단어는 별로 기분 좋은 단어가 아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존재이고 싼 값에 고용할 수 있는 하급 노동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된 “돕는 자” 또는 “도움”이라는 의미는 그렇지가 않다. 이 단어는 아주 많은 경우에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시편 27:9)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시편 30:10)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시편 54:4)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히 13:6)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는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도우려고 보내신 자, 즉 하나님의 ‘천사’라는 말이다. 남자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 우리 삶에 참 많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는 일이다. 온 세상 남자가 다 달려들어도 할 수 없는 일을 여자는 가볍게 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르게 설계하시고 만드셨다는 말이다. 나아가서 이 말씀은 약간 확대해서 남편과 아내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제 모든 사람이 결혼한다는 전제 하에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자.

 돕는 배필의 의미를 깨닫고 돕는 배필이 되기를 결심한 사람

이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고 풍요로워진다. 배우자의 부족함은 바로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고 배우자가 실수할 때에는 거기엔 내 몫의 책임이 있는 것을 인정하는 삶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으며 ‘무조건’ 격려하고 세워준다. 전도서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가정이 되어간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거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장 9-12절)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축복의 모양과 색깔이 다를 뿐입니다



예림이네는 도시 외곽지역에 형성된 빈민촌에 살고 있었다. 그 곳에 사는 대다수 주민은 아랄해가 마르고 항구도시인 ‘무이낙’이 폐허가 되자 ‘누쿠스’외곽으로 이주해 온 환경피난민들이었다. 한 겨울 내 눈에 비친 그곳의 상황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 겨울 영하 15도 넘는 혹한에 반 팔 옷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에 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몰라 마음이 멍이 들고 있었다. 하루 종일 동네아이들은 골목 옆 마른 웅덩이에서 폐타이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예림이의 오빠와 동생도 아이들에게 불려 나가 어울려 놀기도 했다. 타이어를 굴려 웅덩이에서 나오게 하면 이기는 게임인데 아무도 그만한 체격이나 힘을 가진 아이들이 없었다. 얼굴엔 마른버짐을 하고 얼굴과 손발이 튼 채 훌쩍거리는 코 밑으로는 영락없이 이차선 고속도로가 나 있는 아이들. 내 눈에 비쳐진 풍경은 마치 아득한 60년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예림이네 앞마당에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동네에 유일한 나무인 것 같았다. 거기에 그네가 달려 있었다. 그 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고향의 봄을 배웠다고 한다. 윤선생의 큰 아들은 한국에서 태어났고, 둘째는 싱가폴에서 났고, 그리고 그리고 막내는 영국에서 태어났다. 이 아이들에게 이제 기억에 남은 마음의 고향은 사막 끝 버드나무 그네가 걸린 이곳이 된 것이다. 내 마음은 하루 종일 북풍에 날리며 몰려다니는 비닐 봉지 만큼이나 스산하고 어지러웠다.

아내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곳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며 사역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가득 찬 것이 분명했다. 나도 인생의 험한 것을 조금은 경험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기막힌 상황, 특히 그 곳의 아이들과 윤선생의 세 자녀들의 현실 목도하자 하나님이 정말 공평하신 분인가라는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부요한 서울의 하나님, 그래도 살만한 수도 타슈켄트의 하나님, 그리고 버림받은 것 같은 소금 땅 누쿠스 빈민가의 하나님. 과연 어떻게 하나님이 공평하시단 말인가?’ 혼돈과 분노가 내 심연을 휘젓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예림이 아빠가 쉬는 방으로 들어왔다. 하루 동안 돌아본 도시와 이 곳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정목사님, 과연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입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나는 순간 부끄러운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당황했다. ‘아니 어떻게 내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하듯 이런 질문을 던진단 말인가?’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명색이 신학까지 한 목사로서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라고 할 수는 없는지라 ‘공평하시겠지요!’라고 대답했다. 나의 고민을 다 헤아리기라도 한다는 표정으로 그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정 목사님,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풍요한 서울의 하나님, 그래도 살만한 타슈켄트의 하나님, 이곳 오지 누쿠스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축복의 모양과 색깔이 다를 뿐입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저희 자녀들의 모습을 서울의 풍요로운 관점으로 본다면 가장 불쌍한 아이들로 비춰지겠지요. 그러나 저희는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에게 서울에서는 볼 수도 배울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것들을 친히 가르치시고 경험하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곳에서 삶이 우리 아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의 모양과 색깔입니다.”
축복의 모양과 색깔이 다를 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속의 있던 혼돈과 근심을 흩어지고 빛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그렇다! 안전과 풍요, 더 나은 삶이란 틀 안에서 생각한다면 이곳에서 선교사의 자녀들은 희생당하는 불쌍한 인생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 분께 순종하는 자리가, 십자가를 지는 삶이 주님께 가장 아름다운 것 아닌가! 주님께 복된 것이라면 우리 가정에게도 복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내 마음은 정리되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림이 아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선배들이 땅 끝으로 가는 후배들 가정에 가르쳐 준 것이 하나 있는데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한 부부관계라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도 어린 아이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면서 걱정과 고민을 많이 했지만 이 말이 절대 옳다고 믿고 그렇게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으시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이 땅으로 와서 저와 함께 이 땅 카라칼팍스탄을 섬겨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세 아이들에게도 한국말을 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누쿠스에서 삼 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이른 아침 떠나려던 계획은 사람이 그리웠던 예림이네의 청으로 점심까지 먹고 나니 오후를 넘기고 말았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우리 두 부부는 서로를 쳐다보지 않은 채 앞을 향하고 있었다. 몇 시간을 달려 아무다리아강이 굽어 보이는 사막 언덕에 이르자 갑자기 아내는 차를 좀 세우라고 했다. 차에서 내린 아내는 서쪽으로 막 넘어가는 해와 사막을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물끄러미 쳐다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차 안에 잠들어 있어 나도 밖으로 나가 아내와 함께 나란히 옆에 섰다. 바람이 살을 에는 것 같았다. 아내는 내게 물었다. “여보, 당신을 이번 선교지 방문을 통해 무슨 말씀을 들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냥 아내의 얼굴을 힐끗 쳐다 보았다. “여보, 이곳으로 와야겠지요. 이곳으로 우리를 부르시네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눈을 감았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필객의 붓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아침에 집을 나서니 이슬에 젖은 나무와 풀과 흙 냄새가 향긋합니다. 단풍이 절정을 이룬 가을 아침의 정취에 살아가는 행복으로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차창으로 지나가는 이 풍성한 운치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나의 어휘가 너무도 짧아 감탄만 뱉어냅니다. 내 인생 결산의 때에도 이 계절처럼 아름답고 기품 있게 무르익을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가을의 정취에 맞게 그림처럼 예쁜 카페에서 향 좋은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나오면서 지금 나의 주변을 영상으로 찍어본다면 너무도 아름다울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아름다운 영상의 평면 위를 움직여 다니는 나를 객석의 자리에서 바라본다면 내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온통 아기자기한 운치와 행복한 그림일 것입니다.
자질구레한 생각들에 갇혀 이런 아름다운 객관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참 억울한 손실입니다.

얼마 전 어느 작은 음악회에서 귀에 묻어온 음악이 요즘 계속 되살아납니다.
“나는 고독의 친구, 방랑의 친구..”
대학시절 카페나 버스에서 자주 들었지만 한번도 가사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노래였는데, 수 일 동안 머리 속에 거듭 되뇌어지는 이 노랫말의 전체 가사가 궁금해 인터넷에서 찾아 읽어보니 허무가 주제입니다. 이런 노래들의 영향력 아래 당시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허무에 깊이 공감했고 술 문화가 여학생들에게까지 보편화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독백하는 존재, 혹은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존재라고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실로 우리의 머리 속에는 생각이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고 우리는 늘 이 생각 저 생각 사이를 떠돌며 마음으로 정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생각은 독한 술처럼 시간도 잊게 만들고 지금 곁의 따스한 햇살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단풍도 노을도 보지 못하도록 눈을 충혈시킵니다.

생각은 참 중요했습니다.
떠오르는 대로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 동안 생각의 자유가 있다고 믿으며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다 받아 들였지만 실상은 온갖 염려와 분노와 편견과 판단과 짜증과 자기 연민과 우울과 낙심과 불안에 종 노릇하고 있었던 것을 간과해왔습니다. 생각의 자유가 아니라 생각을 거부할 자유가 우리에게 더 값진 자유입니다. 밤새 나를 아프게 하고 독한 시기와 다툼으로 충동질하여 나를 허물고 쓰러뜨리는 생각들을 차단하고 거부하여 마음의 평화를 지켜야 마땅했습니다.

뉴 에이저(new ager)들은 생각을 비우고 현재의 의식으로 깨어있기 위해 명상을 하며 잡념을 떨치고 무상에 이르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샘솟는 물을 막는 것처럼 죽어 의식이 사라지기 전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생각을 비우려는 헛된 노력으로 진을 뺄 일이 아니라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라고 합니다. 빈 컵에 담긴 공기를 빼기 위해서 단순히 컵에 물을 채우는 이치와 같습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는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비우고 또 비워내도 도저히 비워낼 수 없게 바로 차오르는 잡다한 상념들을 예수님의 말씀을 가득 채움으로 비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허무나 방황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이 친구가 되어야 우리의 인생은 영광으로 존귀로 인도함 받습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삼는다는 것이 인간미를 버리는 것 같고 수도원의 삶처럼 너무 뻔하고 지루하고 고리타분할 것 같지만 실상은 햇살의 눈부심. 나무와 식물과 하늘의 오묘에 눈뜨고 온 세상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 보는 감성이 살아나게 되면서 하루하루 삶이 아름다운 여행이 됩니다. 퇴폐나 술이 인간미를 더해주는 것이 아니라 거룩과 사랑과 신뢰 속에 진정한 인간미가 무르익습니다.

얼마 전 내가 가끔 거래하던 여행사가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고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사람만 건너면 거의 다 아는 사이가 되는 밴쿠버처럼 작은 도시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사업을 했던 사람이 이런 몰염치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긴 시간 동안 불안과 절망과 탐욕과 이기심과 대화를 나눴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 켠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는 동정도 일어납니다.

구미의 가스 폭발로 한국의 한 도시가 재난 지역으로 선포됐습니다. 한국 땅이 정치며 경제며 문화 예술이며 교회까지 성한 곳이 없이 어둠의 세력의 집중 포화를 맞고 있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연회의 술에 취해 흥청거리고 있음이 너무 답답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불안이 팽배된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에 지레 겁을 먹고 염치를 버리는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생각은 결국 행동으로 습관으로 삶으로 나타나, 사랑에 대한 생각이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주고 미움에 대한 생각이 먼저 나를 미움으로 파괴시킵니다. 어디에 있든 상황보다 생을 대하는 마음 가짐이 삶을 이룹니다.
상황을 따라 마음에 잔꾀를 쓰며 얄팍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평온하고 안정된 상황에서도 크게 요동하고 흔들리지만, 마음에 진실과 지혜를 쌓은 사람들은 모두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깊고 아름답게 처세합니다.

다윗의 시편은 마음에 떠도는 생각을 그대로 기도로 올려드린 고백들입니다. 퇴폐와 향락과 허무와 방랑이 아닌 지존자의 말씀을 친구 삼을 때, 천 명이 왼쪽에서 만 명이 오른쪽에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재앙이 닥쳐도 그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어려울수록, 바깥의 바람이 거셀수록, 무모하게 과열되고 있는 열기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생각의 두께와 깊이를 더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나의 노래를 바꿉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터키 이야기



6. 신약 성경과 터키



4) 갑바도기아 (Cappadocia)
아나톨리아의 중앙 동쪽 지역을 갑바도기아라고 불렀으며, 서쪽으로는 갈라디아(앙카라)와 루가오니아(코냐)로,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북쪽으로는 본도, 남쪽으로는 길리기아에 둘러싸여 있다. 이 지역은 타우로스 산맥의 북쪽 고원지대로서 오랜 옛날 이 지방의 가장 높은 에르지에스산(3,914m)의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시간이 지나면서 비바람의 풍화작용 등으로 깎여나가 이런 특이한 모양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약 250년 동안 이곳으로 은둔하였다. 그들은 이곳의 자연을 이용하여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기도처, 동굴교회, 주택, 학교 등을 만들어 생활하였으며 그 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뒤 교회가 타락해가자 초대교회의 신앙을 따르던 수도사들이 이곳에 와서 수도원을 건설, 경건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이슬람의 침략으로 또 다시 기독교인들은 이곳을 찾았고 비잔틴 시대에는 성화파 신앙인들의 은둔처가 되기도 했다.

◎ 괴레메 (Göreme)
괴레메는 갑바도기아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역 중 하나로서, 아랍회교도들의 공격을 받던 기독교인들에 의해 괴레메가 생겼다. 아랍군대의 침입으로 데린쿠유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쫓겨와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너희는 볼 수 없다”는 뜻인 “괴레미(Göremi)”라고 불리던 것이 후대에 괴레메로 변했다고 한다. 4세기에 카이세리(Kayseri)에 살던 성 바실은 그리스와 이집트를 여행해 보고 이집트의 사막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들의 생활이 가장 거룩한 생활방식이라 믿게 되었으며, 갑바도기아 지역이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 사막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 생각하여 이곳으로 은둔자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의 은둔생활은 여러 해를 거치는 동안에 수도원이 되었다.

◎ 괴레메 지역의 교회들

엘마(사과) 교회1050년 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교회는 그 주변에 자라고 있는 사과나무 때문에 “사과가 있는 교회”라고 불린다. 이 교회는 중앙에 4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십자가 모양을 취하고 있어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을 따르고 있다. 교회의 벽화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주된 내용으로 하며 대천사들과 성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나사로의 승천, 최후의 만찬, 십자가 처형, 천사 등을 그린 벽화의 일부가 남아있음).

카란륵(암흑) 교회암흑 교회는 11세기에 수도원 형태로 지어진 것으로 당시 비잔틴 미술의 최고 걸작품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네 명의 후원자들이 벽화에 그려져 있다. 교회 내에는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조그마한 창문이 하나 있으며, 이 때문에 벽화가 수세기 동안 잘 보존되었다. 11세기 비잔틴 미술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열란르(뱀이 있는) 교회
뱀 교회는 11세기에 바위를 파서 지었으며 낮은 천정과 긴 본당으로 이루어졌다. 교회에 들어가면 그리스도와 이 교회를 세운 사람의 초상을 볼 수 있다. 다른 편 벽화에는 성 바실, 성 도마와 성 오노우프리우스가 그려져 있고, 왼쪽 천장에는 성 데오도르가 뱀과 싸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콘스탄틴 대제와 그의 어머니가 손으로 십자가를 바치고 서있는 그림도 있다.

토칼르(혁대 고리가 있는) 교회야외 박물관 입구 바깥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이 교회는 갑바도기아에서 가장 크고 프레스코 벽화가 가장 잘 보존된 교회이다. 교회의 이름이 토칼르(Tokalı - 혁대 고리가 있는)라고 알려진 것은 아마도 이 교회의 천장 아치에 그려져 있는 혁대 고리 모양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 교회는 두 차례에 걸쳐 나누어 그려졌다. 벽의 물감을 근거로 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구 교회의 벽화는 920년대에 그려진 것이고 신교회는 그보다 약 30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벽화의 내용은 예수의 일대기를 묘사한 것으로 ‘수태고지’부터 시작해서 ‘승천’까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차르클르(샌들이 있는) 교회이 교회는 식당과 숙소를 함께 갖춘 종합 수도원 시설이다. 본당 입구 바닥에 찍혀있는 샌들 자국 때문에 이 교회의 이름은 “샌들이 있는 교회”가 되었다. 벽화의 내용은 예수의 일대기 중에 13장면과 성인들의 모습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성 바라바라 교회
이 교회는 내부 구조나 벽화에 있어 아주 단순한 모습으로 지어졌으나 내용상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당시 소아시아 반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황토를 재료로 바탕색 없이 바위 위에 직접 그린 여러 가지 상징적인 무늬를 그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십자가와 포도송이, 물고기, 새의 무늬가 있다.

성 바바라 교회
이 교회는 11세기에 바위를 파서 만든 것으로 두 개의 기둥이 천정을 바치고 있으며, 벽화에는 성 게오르게와 성 데오도르가 그려져 있다.

방패 교회압질라로 가는 도로 오른쪽으로 있는 이 교회는 11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갑바도기아에서 바위를 파서 만든 교회 중 가장 크다. 이 교회는 서쪽으로 긴 현관을 통해서 들어간다. 오래 전에는 천정에 방패들이 매달려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단지 천정에 매달려 있던 흔적들만 볼 수 있다. 본당 동쪽 끝은 현관과 연결되는데 여기에는 네 개의 아치 형태의 기둥이 있다. 본당 뒤로는 올라가는 회랑이 있다. 이 교회는 그 규모와 장관의 벽화로 갑바도기아 지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교회이다.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35)




땅끝에서 주님을 맞으리


결혼해서 그때까지 늘 사역지 결정은 나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아내는 묵묵히 순종, 그냥 따라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번엔 상황이 달랐다. 아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자신을 향한 부르심과 사명을 분명히 확신하고 받아들이도록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최전방의 개척사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의 입에서 “그렇게 고민만 하지 말고 한 번 가보기라도 해요!”하는 것이다. 감사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카라칼팍스탄으로 우리 가정을 부르셨다면 분명히 그 땅을 밟을 때 아내에게도 말씀하실 것 때문이었다.

정탐여행을 준비했다. 목적지인 누쿠스까지는 두 개의 사막을 건너야 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챙긴 것은 20리터 짜리 스페어 기름통 두 개였다. 그 당시 물류상태가 좋지 않아 어디든지 주유소가 보이면 차에 기름을 넣고 스페어 통에 가득 채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1996년 12월 18일 사역지 정탐을 출발했다. 첫 날은 사마르칸트에서 사역하는 동기목사의 집에서 묶었다. 교회개척이 시작되어 부흥되자 교회당을 완공하여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본당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제 내가 네게 내 양떼를 맡길 것이다.” 너무도 감사했다. 분명히 하나님이 그 땅을 향하여 우리를 보내신다고 다시 확인하여 주신 것이다.

동기목사는 오지로 사역지 정탐을 가는 우리 가정을 위해 축복하며 정성껏 대접을 해 주었다. 이른 아침을 출발해 하루 종일 끝없이 펼쳐진 광야와 사막을 달렸다. 간간히 흩어진 낙타들이 보이고, 척박하기만 한 광야에 메마른 잡목들에서 입을 뜯는 양떼들이 애처로워 보였다. 해가 저물어갈 즈음에 아무다리야 강에 도착했다. 저 강을 건너면 우르겐치겠지! 그런데 갑자기 국경검문소가 나오더니 총을 든 군인들이 다가와 여권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여권에서 살펴보다가 투르크메니탄 비자가 어디있냐라고 묻는다. 갑자기 웬 투르크메니스탄!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이미 해는 저물었는데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지도를 보면 찾아가는 초행길에 겨울의 짧은 해까지 떨어지니 도로의 이정표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 것이다. 세월과 사막의 갖은 풍상을 다 겪은 빛 바랜 이정표들은 매번 우리를 멈춰 세웠다. 차에서 내려서 확인하지 않고는 그냥 보고 지나 칠 수가 없는 것이다. 차의 기름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숙박할 우르겐치까지 제대로 찾아 갈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다. 빛이라고는 없는 사막을 달리다가 마침내 강 건너편에서 도시의 불빛을 발견한 것이다. 그 옛날 실크로드의 대상들이 이 크질쿰 사막을 건너다 오아시스인 히바의 미나렛에서 비취는 불빛을 보았을 때의 내어 쉬던 안도의 숨과 소망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도시로 진입하는 다리 근처에 키오스들이 늘어서 있었다. 길가엔 사내들이 삼삼오오 모여 불을 피우며 기름통을 들고 휘발유를 팔고 있었다. 터문이없는 가격을 제시하는 그들과 흥정을 끝에 기름을 넣고 길가에 선 채로 아이들과 간단한 요기를 했다. 다시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엔진이 헐떡 거리며 차는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아뿔사! 속은 것이다. 저질 휘발유에 디젤을 섞은 모양이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나는 온 근육과 신경이 다 얼어 붙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이 근심스레 나를 쳐다 보았다.

화가 나서 뚜껑이 열릴 지경이었으나 다 소용없는 일. 나는 주님께 기도를 했다. “강을 건너 저 도시로 들어가게만 해주세요. 들어가서 이 기름을 다 쏟아버리더라도 저기까지 가긴 가야 합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헐떡이던 엔진이 조금 진정되더니 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이 선교사님은 한 밤에 도착한 우리를 보자 할렐루야를 외치며 눈물로 아내와 아이들을 꼬옥 껴 앉아 주었다. 한 밤 중 차려낸 식탁에서 함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기도 중에 이 막막한 땅에 여자 혼자 몸으로 사역을 하는 그 외로움이 절절히 느껴져 참으려 해도 떠진 샘처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선교사님은 외로움에 치질 즈음이면 가끔씩 200키로 떨어진 누쿠스에 살고 있는 동료 사역자인 예림이네로 버스를 타고 다녀온다고 했다. 그렇게 한국말을 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날아간다고.

그 예림이네가 사는 목적지인 누쿠스를 향해 다시 출발했다. 조금이라도 습기가 있는 곳이면 마치 눈이 온 것 처럼 흰 소금들이 엉겨 붙어있었다. 서쪽으로 향하자 온 땅에 눈이 날리듯 소금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염호인 아랄해가 마르면서 만들어진 소금이 바람을 타고 날라오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도착한 목적인 누쿠스는 사막 가운데 세워져 아랄해의 몰락과 함께 도시전체가 생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빛 바랜 회색 도시였다. 겨울이라 더 음산해 보였던 것 같다. 그곳에 가장 먼저 들어와 문서사역을 준비하고 있는 예림이네 가정이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장소에 차를 세우고 둘러보았으나 나오기로 한 예림 아빠는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건너 편에서 현지인 한 사람이 옅은 미소를 띠며 도로를 건너오고 있었다. 콧수염을 기르고 검은 양털모자를 쓴 카작 사람이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 사람에게 나는 생각없이 소련말로 인사를 했다. 예림이네가 보낸 현지인 조력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향해 한국말로 “정 목사님, 저 아무개입니다.”라고 한다. 완전히 현지화가 되어 분간할 수 가 없었다.

시내 나온 김에 시장을 보고 집으로 가자고 해서 시장구경부터 했다. 그리고 작은 중심지를 돌아 보았다. 내 마음에 비친 이 도시의 첫인상은 영양실조였다. 추위에 온몸을 가린 사람들의 얼굴엔 생기와 소망의 그림자는 보이질 않았다. 나는 예림이네로 향하는 그 시간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린 아이 셋을 데리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어떤 은혜에 매여, 무슨 부르심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34)



 

건너와 우리를 도와 주세요!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하레즘주 우르겐치시에서 이은희 선교사라는 분이 타쉬켄트를 방문했다. 그곳은 수도에서 1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이선교사님은 독신으로 고려인이 중심이 된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었다. 그 교회는 헤레즘주에 개척된 유일한 개신교회였다. 세례교육을 마쳤으나 인근에 집례할 목사가 없어 멀리 수도까지 올라와 나와 동사하는 이 목사님에게 집례를 요청한 것이다. 같이 가자는 제안에 나는 언어학교를 핑계 삼아 동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 주일 뒤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이 목사님은 크게 흥분되어 있었다. 기도회 모임에서 선교여행 중 있었던 일을 소개했다. 자신이 하레즘에서 가장 오지인 카라칼팍스탄자치구로 들어가다 끄질쿰 사막에서 대낮에 선 채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목사님은 전통적인 장로교목사이고 신앙색깔도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부분이 강한 분이었다. 나는 “저렇게 흥분한 것을 보니 환상을 보긴 본 모양이네!”라고 생각하다가 불연 듯 더욱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제가 차를 타고 가다가 사막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광야에 샘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고, 꽃이 피고 초목이 가득해 지는 환상을 보았어요. 그 곳에 생물들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니 그곳으로 주님이 저희 가정을 부르시는 것이 확실해요. 아직 그곳은 교회가 없어요. 정목사님이 교회를 맡아 주시면 저희 가정은 당장 누쿠스로 내려가서 개척사역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니 이 목사님, 겨우 예배당 짓고 교육관도 완공해서 지도자 세우는 일에 전념을 해야 할 때인데 가긴 어디를 간단 말입니까? 그리고 갓 시작한 신학교의 교무처장 일은 어떻게 하고요?”
“정 목사님 우리 두 가정이 한 교회에서 동사하며 섬기는 일이 아름답지만 카라칼팍스탄에는 아직 교회가 없어요. 이런 사정으로 볼 때 한 교회에 목사 가정이 둘 씩이나 있는 것은 영적으로 과소비라고 봐요. 저희 가정이 내려 가서 개척을 시작할 테니 정 목사님은 후방, 수도에서 저희 가정을 지원해 주세요!”

워낙 강한 확신을 가지고 가겠다라고 하지만 정작 가야 할 사람은 나, 우리 가정이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불러내어 사명의 땅으로 나아가라고 하시는 말씀하고 계셨다.

다음 날 언어학교를 마치고 교회로 갔다. 사택의 문을 열어 주는 사모님의 얼굴에 아직 흥분이 가라 앉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때까지도 두 부부가 심각한 논의를 계속한 모양이었다. 후배인 나를 동생처럼 생각하던 사모님은 “아니, 여기 있는 200명 교인들은 하나님이 맡긴 양떼가 아닙니까? 겨우 3년 밖에 안된 교회이고, 교회 지도자를 세우는 할 일도 태산인데 어딜 가자는 것인지 이해가 안됩니다. 정 목사님에게 맡기고 가자는데, 정목사님은 아직 언어연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교회의 짐을 어떻게 다 지운단 말입니까? 가면 혼자 갑니까?”라며 완강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셨다. 그 후로도 두 부부가 간다, 못 간다 몇 일 동안 심각한 의견대립을 겪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네이고 있었다. ‘제가 죄인입니다. 그곳은 이목사님 가정이 갈 곳이 아니라 저희 가정이 갈 곳입니다. 그 곳은 파송되기 전부터 주님이 제게 보여주시고 가라고 명하신 곳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환경오염이 워낙 심한 지역이라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갈 만한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고엽제 사건 이후로 저도 순종할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수도에서 교회개척과 언어연수 중에서도 거실에 걸어놓은 우즈베키스탄 지도에서 애써 카라칼팍스탄을 외면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고엽제가 든 면실유로 사경을 헤매는 경험을 하고서는 더욱 지도에서 조차 그 땅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 즈음, 톰 다니엘 선교사님과 시작한 제자훈련을 마무리하는 소박한 수료식이 있었다. 마지막 마침 기도를 하기 전 톰 다니엘 선교사님은 이선교사님과 나를 향해 이렇게 말씀 했다.

“몇 달 전 카라칼팍스탄 누쿠스에 갓 주님을 영접한 성도 몇 분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수도에는 40여 선교사 가정이 있다고 들었는데 왜 카라칼팍스탄에는 선교사를 보내주시지 않느냐며 선교사 가정을 찾아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지난 주일 그 분들이 다시 저희 교회를 방문해 한국에서 온 선교사를 자신들에게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갔습니다. 그 먼 길을 와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하는데 마땅히 갈 사람이 없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라며 그 파란 눈으로 우리 두 목사를 번갈아 쳐다 보시는 것이었다. 차마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한 체 나는 겨우 울음을 참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지도를 다시 살펴 보았다. 그렇게 보지 않으려고 외면했던 그 곳으로 끝까지 몰아가시는 주님의 인도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겨우 고엽제 사건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은 아내에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그 곳으로 가자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번민에 번민. 몇 일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잠을 설치며 한 숨만 쉬고 다녔다.

그런 내가 측은했는지 아내가 느닷없이 “여보, 그렇게 고민만 하지 말고 한 번 가보기라도 합시다!”라는 것이다. 나는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0 >













0046.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

지난 20년동안 36판이나 거듭한 장기 베스트셀러 ‘이단들의 왕국’을 집필한 마틴(Walter Martin)박사는 이단에 대한 정의를 내렸고, 맥도웰(Josh McDowell)도 이단들의 특성 11가지를 언급하였으나, 이 저자들은 자신들이 내린 이단들의 범주에 완전하게 해당될 뿐 아니라, 11가지의 모든 특성을 다 가지고 있는, ‘대 바벨론의 비밀’, 천주교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저들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바벨론의 비밀은 전 성경의 구석구석에 밝혀져 있다. 계시록에 언급된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계17.18)에 대하여 로마카톨릭교회의 주석가들도 별 수 없이 저들의 교부(敎父)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해석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두 번째 바벨론 로마, 서방의 바벨론 로마’로 언급하였고, 제롬(Jerome, c. 342~420)은 ‘로마는 계시록에서 바벨론으로 지칭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사가(史家)이자 변증학자였던 이태리의 바로니우스(C. Baronius, 1538~1607)추기경은 ‘계시록 안에서 로마가 바벨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라고 말하였다. 프랑스의 예수회 학자 벨라르민(R. Bellarmine, 1542~1621)추기경은 ‘사도요한은 계시록에서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다’라고 썼으며, 루이14세로 하여금 낭뜨칙령을 번복(飜覆)케함으로써, 프랑스 기독교들의 신앙의 자유를 박탈한 장본인이었던 보쉬에(J. - B. Bossuet, 1629~1704)주교는 ‘그 특징이 너무 분명하여 바벨론에서 로마를 발견해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모든 교부들은 계시록의 바벨론이 로마임을 가르쳤다’고 시인(是認)하였다. 뉴먼(John H. Newman, 1801~90)추기경은 1840년 로마교회(敎會)에 가담하기 전에 로마를 ‘심판으로 멸망하는 도시’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공포로 가득한 계시록의 궁벽한 땅’을 분명히 지적하는 것이었다. 또 예수회학자 헌터(S.J. Hunter)는 그의 저서 『교의신학개요』에서, ‘계시록에서 바벨론이 로마를 의미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였다. 루터의 개혁 이후 개혁자들은 ‘로마의 특성은 바벨론으로, 교황의 권위는 적(反)그리스도’로 평가하였다. 1970년, 로마교황 바오로6세의 추천문까지 실어 출판한 영문(英文)판 천주교성경의 계시록 14 - 18장의 바벨론에 대한 관주설명은 모두가 로마임을 저들 스스로가 시인하고 있다.


27년이 넘는 재임기간동안 로마교황이 만난 정치인-(여왕), 대통령, 수상, 총리, 주지사, 국회의원 등등-들의 숫자는 1600명이 넘는다. 『요한 바오르』2세의 장례식에 참석한 미국의 현직, 전직 대통령 3(왼쪽으로부터 부시 대통령 내외, 부시 전대통령, 클린턴 전대통령, 곤돌레사 국무장관, CIA국장-이들 중 당신이 속한 교단의 총회장의 장례식에 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것이가?)

0047. 이단은 이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교황권 조직이 거짓된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9~12)

로마교황권제도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하여는 과거 14년 동안 예수회 사제였던 휀스브뢰흐(G.P. Von Hoensbroech)가 『사회문명에 미친 교황권제도』라는 책의 서문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교황권제도는...인류역사상 가장 탁월한, 가장 치명적이며,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기만의 조직이다. 교황권제도 - 저 거대한 기만의 조직...교황권지상주의는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제도로서, 오만하고 냉담한, 넓지만 은밀히 짜여지고, 고도로 마무리 된 조직이다.’ 또 그의 다른 저술, 『교황권지상주의, 그 독과 해독제』에서는 ‘교황권지상주의는 종교의 탈을 쓴 세속정치조직으로서, 그 자체는 범(汎)세계적인 세속권력을 추구해 오고 있다...교황권은 그리스도로부터 그 존속근거를 찾고 있는 신성한 기관이라고 자칭하고 있지만..그 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이 뱉아내고 있는 무수한 허위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0048. 『『아담 스미스』,『크레이톤』,『토마스 홉스』

영국의 사회철학자이며 정치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90)는 그의 명저(名著) ‘국부론’(國富論, Wealth of Nations)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교황청 세력을 두고 다음과 같은 소신을 피력하였다: ‘로마교회는 국가정부의 권위와 안전에 대적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복지에 대적하는, 인류가 산출한 가장 가공할 만한 조직체이다.’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역사학자로 5권의 방대한 『교황사』를 펴낸 후, 영국교회감독을 지낸 크레이톤(Mandell Creighton, 1843~1901)은 더 단호하다: ‘로마교회는 전혀 교회가 아니다. 조직에 있어서 하나의 국가다. 그것도 가장 사악한 형태의 국가 전제독재국이다.’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거의가 통치와 지배에 관한 것이고, 전 신약성경을 일관하여 흐르고 있는 겸허와 봉사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18:36)고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기독교가 아니라, 늘 로마제국주의의 영광인 세상권력을 추구해 온 로마교회를 향하여, 영국의 정치(政治)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패망한 로마제국의 유령이며, 그 무덤 위에 왕관을 쓴 채로 앉아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로마교황청 주관으로 이태리의 아씨씨에서 3번째로 모인 12개 종교대표들. 『요한 바오르』 2세의 왼쪽 첫 번째는 한국의 성균관 대표이다. (New York Times, 25 Jan 2002).


0049. 『클리포드』,『스펄전』

이 바벨론의 세력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클리포드(W.K.Clifford, 1845~79)교수는 자녀를 가진 부모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충언하였다: ‘우리를 압도하는 한 역사적인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니, 당신의 자녀들을 천주교사제로부터 피신시켜라.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신의 자녀들을 인류의 적으로 만들 것이다.’ 설교자의 왕자로 알려졌던 스펄전(C.H. Spurgeon, 1834~92)목사는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수 6:26)는 말씀을 인용, 로마카톨릭교의 사악(邪惡)한 제도를 건설하고 돋우려고 시도(試圖)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카톨릭교를 재건하려고 애쓴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시대에 로마카롤릭교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0050.『스펄전』목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안들

‘우리는 로마교회의 죄악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사려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를 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교회가 저지른 암흑상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보다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한다.’
‘로마교회에게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악마는 거위깃털 펜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성령의 축복으로 쓰여진 저술이 마귀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는 또 장래의 사역자들에게 행한 강의에서 ‘로마카톨릭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임을 분명히 하였다.

<북미에서 자란 영어권 세대들이 읽어야 할 책 두 권을 추천한다.
1) 천주교인이면서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인 John Cornwell이 쓴 ‘Hitler’s Pope’ (10년 이상 뉴욕타임즈의 장기 베스트셀러임)
2) 미국 동부 Drew 대학 교수인 Paul L. Williams의 ‘The Vatican Exposed’ - Money, Murder and the Mafia, 2003.
나폴레옹은 로마교황을 감옥에 구금하기도 했으며 20세기에 들어서자 죽었던 로마교황권은 로마카톨릭교회의 아들들인 무쏠리니, 히틀러, 프랑코(스페인)등의 지원을 얻고 다시 살아났다. 특히 로마교황청과 파시스트 무쏠리니, 나치의 히틀러 사이에 조인된 정교조약내용도 부록으로 담고 있다. 평생을 천주교 예수회 사제들과 대화하며 교우관계를 맺어온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신학 분석을 위해서도 필요한 책들이며 Indigo / Chapters 등 일반서점에서 주문가능하다.>


주예수 해변서 떡을 떼사
무리를 먹이어 주심같이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풍족히 나누어 주옵소서
(찬송가 284 / 주예수 해변서①)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필객의 붓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



잔디와 꽃과 나무들이 잘 손질된 공원을 걸으며 나무와 풀들이 갓 토해낸 알싸한 아침 공기를 들이키니 이런 저런 풍설을 타고 날아와 탄가루 처럼 쌓여있던 폐 속의 근심이 씻겨 나가고 마음이 깊은 안도의 숨을 뱉어냅니다.
자연은 그대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실제 음성이나 활자는 없지만 나의 영혼을 깊이 어루만져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온 세상 만물을 드셨다고 하시니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고 호수는 그냥 호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반영한 창조의 언어들일 것입니다.
공원을 걸으며 어느덧 나의 영혼은 시편 23편을 읽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토록 잘 조경된 공원의 풍경을 본다면 자신의 시를 그대로 묘사한 듯한 모습에 놀랄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국으로 진학할 유학생들을 위한 진학 세미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입시 자료들을 분석하며 영리하게 확률과 통계의 숫자들을 헤쳐가야 한다는 식의 강의를 들으면서, 당사자가 아닌 나의 뱃속에서도 “빠른 경주자가 선착할 것이고, 유력자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고, 지혜자가 식물을 얻을 것이고, 명철자 만이 재물을 얻을 것이며, 자격증을 많이 딴 기능자만이 생이 주는 은총을 입을 것”이라는 안달이 일었습니다.
자칫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될 수 있는 말을 들으면서, 남들보다 쉬운 길로 가는 요령들이 교육이라는 이름 앞에 선행되어도 되나, 크게 배운다는 뜻으로 세워진 대학의 문턱을 저런 식으로 넘은 아이들에게 배움의 의미가 시작부터 하찮아지는 것은 아닐까, 늘 이리저리 변하고 흔들리는 기준에 맞추느라 늘 요동하고 안달하면서, 인내와 성실과 신뢰라는 좋은 과정을 쌓지 않고 너무나 얕은 동기와 하찮은 이유들에 약삭빠르게 움직여 다니느라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주변의 관계들이나 결혼, 그 많은 불화와 재정적인 위기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자녀들을 길러내고 그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어 부모로서의 자격을 통째로 흔들 때, 또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노년이 되어 가야 할 길에서 어떻게 버티어갈 것인가 나의 실패와 좌절과 시행착오의 시간들에 비추어 염려가 되었습니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은 독수리 같은 야성의 힘을 요구하는데 이렇게 일찍부터 독수리 같은 야성의 본능이 거세되어 겁에 질린 닭처럼 안일에 길들여져 얕고 쉽고 편한 길을 선호한다면, 요행히 대학을 들어간다고 해도 당장 대학 이후의 현실은 심각한 청년 실업이며 그럼으로 생존의 경쟁은 더 치열하고 치사해질 텐데 무슨 지혜와 힘으로 이런 난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착잡했습니다.
더구나,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대학을 향한 사회, 문화, 역사적인 관성 탓인지, 이런 사실이 비밀에 붙여지지 않고 이미 다 공개됐음에도 멈칫하거나 주저함 없이, 오히려 그 무모한 달림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쪽은 타고 있는데 한쪽은 생 밀가루 풀인 뒤집지 않은 전병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다는 피곤과 절망이 전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부유하여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입에서 조차 힘들다는 말이 더 이상 엄살이 아닙니다. 결국 자신-을 쓰러뜨릴 도미노인 줄 모르고 투기의 붐을 타고 부동산으로 재물을 쌓았던 사람들이 결국 그 때 얻었던 것들을 다 잃을 때까지, 판교 신도시의 경우와 같은 금융권의 횡포와 어처구니 없는 장난질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 잔인한 금융 시스템의 덫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곤한 모습을 보시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려울수록, 바깥의 바람이 거셀수록 자신의 삶에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대로 끝나가고 망해가는 세상임은 분명하지만 그 날과 시가 내일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천 년 후가 될지 모를 뿐더러, 우리가 이 생에서 맺은 열매를 따라 생명의 부활로 혹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갈 것이기에,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불법이 성할수록 삶이 진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일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제 앞으로의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예수님의 사람다운 사랑과 거룩한 삶의 깊이를 더해가야 할 엄중한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아무리 정확하게 분석한 확률과 통계일지라도 틀릴 수 있고, 전문가의 예언도 빗나갈 수 있고, 어떤 거대한 성도 무너질 수 있는 것이지만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린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드넓게 펼쳐진 잔디의 엽록색이 주변의 만물을 싱그럽게 합니다.
이 색과 어우러지면 하늘은 더 하늘답고, 꽃들도 제 색깔로 더 아름답고, 나무도 훨씬 운치가 있고 나무와 꽃도 훨씬 깊고 짙은 향기를 뿜어냅니다. 이전에는 빛깔과 향기로 드러나는 꽃이 좋았는데 이제는 아름다운 배경이 되는 초록이 좋습니다. 사람도 돋보이고 잘나 보이는 자리에 선 이들보다, 주위의 사람들을 소박하게 받쳐주는 자리에 선 이들에게 호감이 갑니다.
사랑을 색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런 초록 색을 쓸 것입니다.
사랑을 배경으로 하면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라’는 그 신실한 약속이 그리고 영원까지 보장된 미래에 대한 행복한 속삭임이 공원을 걷는 내내 영혼을 즐겁게 합니다.
무슨 은혜로 이런 엄청난 허구가 나에게 이토록 놀라운 실제가 되었는지 신기해 올려다 본 하늘이 나를 향해 익살스럽게 미소 짓고 있습니다.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예수님의 마음 치유





사랑의 3단계 에로스 (Eros) (감정적, 육신적 사랑/ 나 중심의 사랑 )
필레오 (Phileo) (친구와의 사랑/ 진실된 우정/ 인정하고 인정받는 사랑)
아가페 (Agape) (조건 없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사랑(아가페)을 먹고 살아야만 한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아가페)이심이라.”(요1 4: 8) 그런데 우리 모두가 진실된 사랑에 굶주려 있다. 우리 주위에는 육신적인 사랑, 자기 중심적인 Eros 사랑만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수준 낮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랑”의 의미가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의미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 사랑에 대해서 약간의 분석을 해보면서 우리가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삶을 살아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이유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우리말이나 영어에는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오직 “사랑” 이라는 단어 하나 밖에 없지만 헬라 말에는 사랑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각각을 다른 단어로 표현해 놓았다. 성경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거의 대부분이 아가페, 즉 하나님의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인데 우리가 사용하는 사랑은 육신적인 에로스 사랑을 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같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우리는 성경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헬라 말에 의하면 사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제일 초보적인 단계는 에로스 사랑이다. 감정적이고 육신적인 것이며 세상적이고 나 중심의 사랑이다. 어린 아이가 초콜렛이나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사랑이고, 이성의 겉모습만을 보고 빠져 들어가는 감성적인 사랑이며 나의 육체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이기적인 사랑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고 맛있는 것을 주는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딱딱한 음식이나 입에 쓴 약을 주는 사람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른들도 이 사랑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가 다가온다. “우리가 어떻게 에로스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배우며 연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답은 성경, 특히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결혼을 통해서 배우고 연습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설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아담을 창조하신 다음에 가장 중요하게 이루신 일이 무엇인가를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창조하셔서 아담에게 데려오신 일이다. 아담과 이브 두 사람이 하나 되게 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참으로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창 2:20-23)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혼자서는 결코 온전하지 못하기에 이브를 “돕는 배필”로 만드셔서 아담을 보완하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둘이 한 몸으로 연합되어야만 하나님과 온전하게 교제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깨달으며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사탄은 이 비밀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의 가정을 파괴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죄에 떨어짐으로써 아가페 사랑의 능력이 망가져버렸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아가페 사랑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사랑이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사랑이 되었다. 여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이 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실제 우리의 삶에서는 거의 전혀라고 할 만큼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바로 필레오 사랑이다. 친구와의 사랑이고 진실된 우정이며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받는 사랑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처지에 상관없이, 서로를 인격적으로 인정하는 사랑이다. 필레오 사랑이 체질화되고 습관화되면 우리는 그 다음 단계인 아가페 사랑을 훨씬 쉽게 배우고 연습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의 유교적인 전통과 관습은 이 필레오 사랑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군사부 일체 (왕과 선생과 아버지는 같다), 장유유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존중하라) 같은 삼강오륜의 계명들은 수 백 년 동안 우리 사회를 아주 딱딱한 수직적인 구조로 만들어 놓았다. 지연, 학연이 온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선후배 사이가 군대 계급 사회처럼 엮여져 있다. 또한 수십 년간의 일제 시대와 이어지는 군사 독재가 그 수직성을 더욱 강화시켜 놓았다. 그 결과로 우리 민족의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과 인격적인 대화의 능력이 심각하게 망가져버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고, 더 나아가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 18:3) 수평적인 사회를 의미하는 말씀이고 필레오 사랑, 아가페 사랑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입은 옷이나 사회에서의 직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전심으로 필레오 사랑을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아가페 사랑의 의미를 깨달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필레오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인격적인 대화”이다.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고 상대방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대화이다. 서로를 귀중한 사람으로 인정하면서 마음을 나누는 대화이고, 지성을 채워주며 자극하는 대화이고, 의지를 세워주는 대화이다.

질 문 ——————————————————————————————————
 당신의 이성 관계 / 부부 관계를 ‘어떤 사랑’이 주관하고 있나요?
 대인 관계에서 에로스와 필레오와 아가페 중 어느 것이 당신을 움직이나요?
 나의 속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 ) 사랑에 의해 움직이고 때때로 ( ) 사랑에 의
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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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지는 결혼, 늦어지는 결혼
깨어지는 가정이 전염병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혼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이 아주 두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고, 젊은이들의 결혼 시점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져 간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너무나 힘든 사회가 되었다. 사회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어기고 깊이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사회적인 여건의 변화가 가장 심각한 것이리라. 돈 없이 출발하는 젊은 부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삶을 개척해가기가 너무 어려운 사회가 되어버렸다. “제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 는 옛말이 무색한 사회가 되었다. 온 힘을 다해서 살아보려 애쓰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어린 미혼모들을 보면서, 싱글 맘과 아빠들을 보면서, 부부가 헤어져 사는 기러기 가족들을 보면서,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기가 어렵다.
이렇게 주변 상황이 어렵게 되면서 마음의 깊은 상처가 더 크게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삶의 자세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를 하나님의 존귀한 인격체로 대하기보다 상대방의 상품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필객의 붓





나의 새 이름



어제까지 여름이었던 거리에 가을의 운치가 가득합니다. 곱게 물든 단풍이 칙칙하고 무겁던 마음을 단번에 알록달록한 소망으로 물들이고 시장을 보러 가는 길이 근사한 여행이 됩니다. 밤 사이에 멋지게 변신을 한 거리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입김이 느껴집니다. 인간의 재능과 물자와 시간으로 이 일을 해내려 했다면 너무나 번거롭고 대대적일 작업이, 너무도 조용히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모습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실과 위대한 솜씨를 봅니다. 이래서 옛 사람들이 나무를 신성시 했나 봅니다. 이대로 얕은 생각들로 찰싹거리는 삶에서 벗어나 온통 나무에 둘러 쌓여 이 아름다운 깊이에 침몰해 버리고 싶습니다.

지난 주에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이름들을 읽다가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을 참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을 처음 읽을 때 아름다운 교훈과 심오한 말들이 적혀있을 것이라 기대했다가 사람들에 관한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기록 되어 있음에, 지극히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다는 책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닌가 무척 실망스러웠었는데, 그 이름들 안에 담긴 놀라운 구원의 섭리들에 눈 뜨면서, 진리는 뭔가 심오한 듯 하지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자신도 결국 뭔지 모르겠더라 하는 텅 빈 공론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인생 여정 안에 체화되는 것임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임마누엘의 은총임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름은 무엇을 남기고 갈 것 인가,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생명 책에 기록된 나의 이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실까, 늘 눈으로 대충 훑으며 빨리 지나쳐 버리던 말씀이 던지는 너무나도 엄중한 도전을 이번엔 피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 땅에 왔음은, 나의 이름에 대한 중요한 소명이 있음입니다. 서수영이란 이름은 세 글자의 활자로 고정된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남기고 있는 기억들이며 움직이는 이미지이며 살아있는 이야기들로 나의 역사로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이름들에 둘러 쌓여 살아갑니다. 주변의 아는 사람들뿐 아니라, 인터넷 세상에 열거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의 환영 아래서, 그 이름들이 누리는 영화와 명성에 침을 삼키며 부러워하고 비참한 추락에 혀를 차기도 하면서, 실상을 확인할 수도 없는 이야기의 허구 속에서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인식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드라마를 실제 뉴스인양 올려놓은 기사들까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 관한 대단한 뉴스가 떠있어 놀라 클릭해 들어가니 어느 드라마 이야기여서, 이제는 드라마가 실재라는 의식의 선을 침범해 들어오고 있는데도 괜찮을 정도로, 드라마의 천국 백성답게 이토록 드라마에 잠겨 살아가고 있는가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인터넷에서 저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분의 신앙이 내 것인양 끄덕거리며, 자만심에 충만하여 행함도 없는 판단만 키우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이런 앎은 실상은 짙은 어둠이며 차라리 알지 않음만 못한 앎이라, 안다는 착각이 삶의 진실을 흐려놓고 주변에 더 큰 혼란과 번거로움만 주는 위험한 것이며 이불 속에서 핑계만 키우는 무기력함 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다른 이름들처럼 내 삶은 환영이 아닙니다. 내 가장 가까운 가족들조차 나의 시간과 공간에 등장하지 않는 동안은 환영 속의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 삶만은 나에게 실재이며 24시간을 꽉 채우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그래서 너무나 큰 부르심이며 우주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라는 의식을 지우시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일컬을 수 없고 절대 카피할 수 없는 나만의 삶을 이룰 소명이 있다고 나를 흔드십니다.

내 기억의 문간에 놓인 방명록에도 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내 삶이 아름답게 수정될수록 그 이름도 점점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 이름들의 의미는 그 사람이 남긴 행위나 말보다도 그 이름을 해석하는 나의 기억에 달려있음을 알겠습니다. 좋은 기억으로 남겨진 이름들뿐 아니라,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던 이름들 때문에 나는 더 자라났고 더 노력하게 됐고 지혜와 사랑을 연습할 수 있었기에 고마운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내가 수정되어가는 과정에서 미처 정리가 되지 않은, 아프고 추한 자리에 떨어져 뒹구는 몇 개의 이름들을 위해서도 좋은 자리를 비워 놓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은혜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나의 이름도 새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새 이름에 합당한 삶을 위하여 날마다 마음의 뜰에서 허접한 생각들과 게으름과 낮은 자존감의 독한 잡초들을 걷어내고 싱싱한 진리들을 옮겨 심을 것입니다.
로키산 자락에서 짙은 향기로 나를 매료시켰던 이름 모를 들꽃처럼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익명의 자리이며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을 평범하고 가난한 자리이지만 유명한 자 못지 않은 고명한 정신을 가지고, 내 이름으로 오늘이라는 현실을 아름답게 살아낼 것입니다.

앞으로 나의 이름이 일컬어질 때, 나의 이름을 보고 듣는 사람들이 마음이 따뜻해지며 좋은 기억으로 웃음 지을 수 있도록 오늘도 성실로 영혼의 풀을 맬 것입니다.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9 >





0040. 『루시퍼』와 갈보리

전 성경을 통하여 단 한번 언급된 루시퍼 (사14:12)와 갈보리 (눅23.33, Calvaria-Lat.)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타이틀인 ‘계명성’과 천주교와 프리메이슨들의 성골숭배(聖骨崇拜) 사상의 대상인 ‘해골’로 대체 시켜놓은 현대판 성경들. 흠정역성경(AV/KJV)-컴퓨터 학자들에 의해『프레쉬-킨케이드』영어등급시급표(Flesch-Kincaid Grade Level Indicators)를 사용한 연구결과, 흠정역성경(AV/KJV)이 다른 모든 현대역본성경들보다 훨씬 읽기가 쉬운 것으로 드러났다. 많은 아이들이 힘든 성경을 들고 쉽다고 속고 있는 것이다. 흠정역성경에는 고어(古語, archaic words)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판 성경들은 흠정역 성경보다 더 어려운 고어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밴스(L.M. Vance)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NIV가 사용하고 있는 고어는 모두 281개이며 그 중 61개는 흠정역의 고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흠정역에도 없는 어려운 새로운 고어를 220개나 사용하고 있다.
현대에 부합하는 ‘신(New-)기독교’를 주장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영향하에 20세기에는 온갖 종류의 신(New-)성경들이 쏟아져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해온 자들의 악한 열매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혼란 중에 있다. 평생을 피땀으로 일으켜온 농장, 생명처럼 아까운 가축들을 불태우고 허탈감에 빠진 상심한 농민들, 작년에만도 50명이 넘는 영국 농민들이 자살을 하였다. 나라에 광우병을 몰고 온 주범들이 성경번역자들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영국의 1904, 1995년의 재앙은 정확하게 ‘새로운’(New), 그러나 조잡한 성경의 출간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성서공회나 신학교에서 가르친다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가 하고 생각하실 것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성서신학(신구약, 본문비평), 역사신학, 조직신학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어 있는가하는 문제는 ‘천주교회’가 성경에 무엇으로 언급되어 있는 가를 바로 알기 전에는 그 해답을 얻기가 시간이 걸리는 일이며, 천주교의 교리, 천주교회법, 제2바티칸 공회의 목적 등을 알기 전에는 성경의 어디가 변개되어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게 되어있다. 조직신학을 철저하게 했다는 교계지도자들이 미국/캐나다성서공회가 발간하고 있는 현대판 성서(CEV)에 ‘은혜’라는 단어가 단 한번도 나오지를 않는데도 놀라지도 않을뿐더러 이에 대해 유구무언이다.
NIV 성경 가지고도 구원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악을 쓰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구원만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 아니며(딤후3.16,17), ‘배도자들이 만든 성경’을 쥐고 구원은 커녕, 어떻게 배도자가 안된다고 장담할 수가 있는지? 더군다나 7만개가 넘는 중요단어를 삭제하고, 360 여군데가 넘는 곳에서 교리변경을 해놓은 성경을 쥐고서 어떻게 바른 신앙을 기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NIV성경의 판권자인 호주인 머독은 천주교인이요, 130여개의 신문과 20세기 폭스사, 음란한 TV쇼를 만드는 Fox 방송의 경영주이다. 이 거짓된 NIV성경을 구입할 때마다 동성연애 지지서적과 음란 비디오를 만드는 자의 기업에 돈을 보태주고 있는 것과 같다.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라’는 예수회의 구호에 매수당하여 고의로 성경을 변개, 악을 조장하는 불신학자들도 있다. 신학교가 Bible Teachers가 아닌 Bible Critics들로 차 있으며, 가공할 파괴자들은 실제로 경건을 가장하고 우리네 성서공회, 신학교에 비밀리에 잠입, ‘성서비평/본문비평’이란 미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있는 ‘본문비평 테러분자들’(textual terrorists)임을 잊지 말자.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변개가 나라의 재앙과 직결되어있는가를 보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진저”(마13:43). - (* 흠정역 성경에는 두 종류가 있으며 Oxford 계열이 아닌 ‘Cambridge 1769 Text’가 더 정확함.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으나 웹사이트 www.BibleForToday.org (BFT@BibleForToday.org)에 들어가시면 『The Defined King James Bible』 10여 종류를 구입할 수 있음.)
0041.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서 3)
유럽 도시들의 그랑 쁠라스 (Grand Place, 시청광장)로 불리는 지역은 주위의 건물들과 광장의 하나하나씩 박아 심은 돌(cobblestone)들로 아름답다. 광장에 설 때 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500여년 전에 또는 오랜 기간을 두고 수많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천주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선고받고 화형당한 곳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많은 좋은 책들도 불태움을 당했으며 그 연기가 1년 내내 하늘을 흐리게 만들었던 지역이다. 신앙으로 인하여 화형당하는 성도들을 어린시절부터 직접 보고 자란 세대가 커서 번역한 성경이나 주석들은 오늘 날 헤리 포터 류의 조잡한 책들을 보고 자란 세대가 만든 성경이나 주석과 비교한다면 바로 생명과 사망의 차이이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유다서 3)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다. 믿음의 도는 성도들(saints)에게 주어졌지 학자들(scholars)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사단은 복음의 본질을 파괴, 복음의 종교화 작업을 위해 늘 학자들을 동원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즉 악의 병기로 쓰임받는 학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청교도들이나 종교 개혁자들의 책이나 주석들을 많이 접하기를 권하는 이유는 현대인들의 책은 본문설정부터가 잘못 되어있고, 핵심이 될만한 것들을 일부러 애써 피해가면서 애매모호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요한계시록 17-18장에 와서는 그 비겁함이 절정에 달한다.
0042. 『존 낙스』『오스월드 챔버스』『아담 스미스』
영국 웨일즈를 떠나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Edinburgh)모임도 마치고 존 낙스 생가와 오스월드 챔버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무명의 신학교로 옮겨가기 전에 다녔던 에딘버러 대학도 구경했다. 구도(Old town)중심가로 들어가니 아담 스미스(Adam Smith)동상이 서 있다. 로마교황청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하였던 그는 필자를 내려다 보면서 ‘이렇게 급하고 어지러운 세상인데 지금 무얼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아 속으로 ‘알겠습니다’하고 동상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0043. 1948년에 일어난 6대 사건
성경의 3대 예언 - ①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②이스라엘의 건국 ③그리스도의 재림 - 중 두 번째 예언은 2000여년 동안 나라없이 유리하던 유대인들이 옛땅 고토에 돌아와 나라를 세움으로써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동시에 세상은 ‘더’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다. 문명의 토대가 흔들리는 대사건들, 쓰나미 등등의 천재지변들, 난리와 난리의 소문 등등... 하나님께서 직접 종말론 강의를 하고 계신 시대가 되었다. 울면서 태어나고 평생을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다가 죽을 때는 실망하면서 죽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죽음과 세금(tax)’뿐이라는 말도 있다. 죽음으로 인해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된 인생이나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확실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변하는 세상에서도 변치 않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16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신학자였던 빠스깔(Blaise Pascal, 1623~62)이 ‘우주의 중심은 태양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언급한 진리를 우리는 힘을 기울여 들어야 한다.
1948년에 일어난 6대 사건은 -
1) 이스라엘의 건국
2) 컴퓨터 시대(Computer Era)의 시작
3) WCC(New Age Movement) 출범
4) 국제연합(UN / New World Order) 결성
5) 구주공동체 (EC-European Community / 『바티칸』의 유럽) 결성
6) 신(新, New-) 복음주의의 시작
등이며 이 역사배후의 실세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살다간 아담 스미스 같은 선진들의 도움말들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0044. 약대와 하루살이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20세기 말엽의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될 배도(살후 2:1-8)는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분하지 못하여, 사단이 수천 년을 해온 수법(手法) “대화로 풀어보자”는 등의 소리에 속아 천주교와의 일치운동에 빠진, 하나님보다 더 선한 체하며 감상적이고도 낭만적(?)인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양들을 이끌고 이리의 소굴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 절정을 이룰 것이다. 저들의 미소 뒤에 숨겨진 칼을 보지 못하는 소경된 지도자들은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표현대로 “적응, 타협의 명수”로 둔갑하였고,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한국교회는 로마화(化), 즉 바벨론화의 재난에 처해있다. 오늘날 기독교를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다면, 기독교란 아파트에 가만히 들어온 침입자(사단의 에큐메니즘 세력)에 의해 아파트가 붕괴되려는 직전에 놓여있는데도 그 아파트에 들어 살고 있는 주민(교단 및 개교회들)들은 자기방 하나 꾸미기에 여념이 없어, 이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는 그림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결을 원치 않는다. 타(他)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검은색을 검다고 힘주어 말할 때, 사단의 세력은 부정적인자, 종교적 완고주의자로 몰아 부친다. 그리고는 검은색을 희다고 거짓된 주장을 하는 진정한 완고주의자가 때로는 논쟁에 승리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언제나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며, 비열한 인신공격은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로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단지 인류를 기만해오고 있는, ‘한 몸에 두 혼’(종교와 정치)을 공유한 바벨론 조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가 주장하는 그 엄청난, 가공할 교리들과 그 끔찍한 과거의 역사 앞에 어찌해서 벙어리가 되었는가? 사단의 최대 보루(堡壘)인 천주교에 무지, 그 결과로 하루살이 이단들은 걸러내고 오히려 이단들의 어미, 초대형이단(Super-Cult) 천주교(약대)는 삼키는 일치운동에 깊숙히 빠져있다. 또 입을 열어야 할 종들이 이 모양 저 핑계로 입을 다물고 있어, 요한 12:42~43의 말씀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는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지도자가 죽어도 흩어지지 않는 이단을 경계하라. 하나님의 교회를 더 철저히 파괴하는 자들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요직을 잡고 있는 이러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먼저 교회 안을 급히 돌아다 볼 때가 아닌가?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가지고, 단순하고도 순전한 복음을 요란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스스로 지혜롭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점검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없이 멀리 떠나와, 이제는 바벨론 종교를 답습, 저들의 행위와 같다보니 저들이 변한 것으로 착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변한 것은 천주교가 아니라 기독교이다. 천주교와 일치운동에 빠져있는 자칭 기독교 지도자들과,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믿고 있는 천주교도들은 성경과 로마카톨릭주의 이 모두를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자처하면서, 우리 주님이 빛과 어두움을, 생명과 사망을 갈라놓은 것처럼, 옛 선지자들의 기개를 가지고 참과 거짓을 갈라놓지 않는다면, 양(羊)들은 여전히 방황하게 될 것이다.
0045. ‘로마카톨릭교회는 마귀의 최대의 걸작품이다’
로마카톨릭교회는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 바벨론 종교의 심벌인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꼭대기에 세계통치를 꿈꾸었던 시이저(가이사)의 재를 담은 청동지구본을 올려놓았다.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로 자처, 지상의 세속통치권을 주장해온 로마제국의 후예들은 그 재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세속권세를 추구해왔다. 천주교 사제 플레쳐(Philip Fletcher)는 그가 편집하는 천주교 기관지에서, ‘만일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면, 그는 적(反) 그리스도임이 틀림없다’라고 말했다. 일명, 이그나티우스 사제로 불렸던 스펜서 (Hon.G.A.Spencer)경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면, 그것은 마귀의 걸작품이다. 그 중간이란 있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로이드 존스(D.M.Lloyd Jones, 1899~1981) 박사는 그의 시리즈 설교 “마귀의 궤계”(엡6:11) 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로마카톨릭교회는 마귀의 최대의 걸작품이다. ... 로마카톨릭교회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로마교회(천주교)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semper eadem). 어떻게 변할 수가 있는겠는가? 만약 로마교회가 변한다면 스스로 과거에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로마교회는 같은 모습으로 남는다...만약 하나의 거대한 세계적인 교회가 있다면, 로마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를 흡수하고 무지한 그들을 삼켜버릴 것이다’.
그는 1969년 영국복음주의협회에서 행한 메시지에서 고전14: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라는 말씀을 인용, 경고의 나팔을 울려야 할 것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또, 한 기고문에선 ‘단순히 예수께 나오세요,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라고 설교하는 기독교는, 로마(종교)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복음주의 전도캠페인을 벌리는 사람들이, 『당신은 천주교인이세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세요』라고 한다면, 그 전도자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옥스포드 대학 출신인 고전어(古典語)학자이자 영국왕실의 헨리 8세의 주치의로서, 완미한 로마카톨릭교도로 말년에는 로마교회 사제로 서품(敍品)을 받았던 리나크러(Thomas Linacre, 1460~1524)는 생전에 처음으로 신약성경을 읽다가 견디지 못해 책을 던지면서, ‘이 성경이 사실이 아니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첫 눈에 로마교회의 조직이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회의 개념과는 상반되는 것임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의 로욜라 심리연구소 창설자로서, 세계천주교심리학자 및 정신병학자모임의 국제위원회 부회장이라는 요직을 겸하고 있었던 전 예수회 사제 신학자 파드로사(Luis Padrosa)는 기독교 신학자들과의 신학논쟁 준비를 하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다가 거듭난 후 로마교회를 떠났다. 1950년대 전 유럽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후에 복음주의교회 목사가 된 그는 여러 책을 집필하였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기독교는 기독교이다. 천주교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찬송가147 / 주 달려 죽은 십자가 ④)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필객의 붓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



잔디와 꽃과 나무들이 잘 손질된 공원을 걸으며 나무와 풀들이 갓 토해낸 알싸한 아침 공기를 들이키니 이런 저런 풍설을 타고 날아와 탄가루 처럼 쌓여있던 폐 속의 근심이 씻겨 나가고 마음이 깊은 안도의 숨을 뱉어냅니다.
자연은 그대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실제 음성이나 활자는 없지만 나의 영혼을 깊이 어루만져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온 세상 만물을 드셨다고 하시니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고 호수는 그냥 호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반영한 창조의 언어들일 것입니다.
공원을 걸으며 어느덧 나의 영혼은 시편 23편을 읽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토록 잘 조경된 공원의 풍경을 본다면 자신의 시를 그대로 묘사한 듯한 모습에 놀랄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국으로 진학할 유학생들을 위한 진학 세미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입시 자료들을 분석하며 영리하게 확률과 통계의 숫자들을 헤쳐가야 한다는 식의 강의를 들으면서, 당사자가 아닌 나의 뱃속에서도 “빠른 경주자가 선착할 것이고, 유력자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고, 지혜자가 식물을 얻을 것이고, 명철자 만이 재물을 얻을 것이며, 자격증을 많이 딴 기능자만이 생이 주는 은총을 입을 것”이라는 안달이 일었습니다.
자칫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될 수 있는 말을 들으면서, 남들보다 쉬운 길로 가는 요령들이 교육이라는 이름 앞에 선행되어도 되나, 크게 배운다는 뜻으로 세워진 대학의 문턱을 저런 식으로 넘은 아이들에게 배움의 의미가 시작부터 하찮아지는 것은 아닐까, 늘 이리저리 변하고 흔들리는 기준에 맞추느라 늘 요동하고 안달하면서, 인내와 성실과 신뢰라는 좋은 과정을 쌓지 않고 너무나 얕은 동기와 하찮은 이유들에 약삭빠르게 움직여 다니느라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주변의 관계들이나 결혼, 그 많은 불화와 재정적인 위기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자녀들을 길러내고 그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어 부모로서의 자격을 통째로 흔들 때, 또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노년이 되어 가야 할 길에서 어떻게 버티어갈 것인가 나의 실패와 좌절과 시행착오의 시간들에 비추어 염려가 되었습니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은 독수리 같은 야성의 힘을 요구하는데 이렇게 일찍부터 독수리 같은 야성의 본능이 거세되어 겁에 질린 닭처럼 안일에 길들여져 얕고 쉽고 편한 길을 선호한다면, 요행히 대학을 들어간다고 해도 당장 대학 이후의 현실은 심각한 청년 실업이며 그럼으로 생존의 경쟁은 더 치열하고 치사해질 텐데 무슨 지혜와 힘으로 이런 난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착잡했습니다.
더구나,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대학을 향한 사회, 문화, 역사적인 관성 탓인지, 이런 사실이 비밀에 붙여지지 않고 이미 다 공개됐음에도 멈칫하거나 주저함 없이, 오히려 그 무모한 달림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쪽은 타고 있는데 한쪽은 생 밀가루 풀인 뒤집지 않은 전병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다는 피곤과 절망이 전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부유하여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입에서 조차 힘들다는 말이 더 이상 엄살이 아닙니다. 결국 자신-을 쓰러뜨릴 도미노인 줄 모르고 투기의 붐을 타고 부동산으로 재물을 쌓았던 사람들이 결국 그 때 얻었던 것들을 다 잃을 때까지, 판교 신도시의 경우와 같은 금융권의 횡포와 어처구니 없는 장난질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 잔인한 금융 시스템의 덫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곤한 모습을 보시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려울수록, 바깥의 바람이 거셀수록 자신의 삶에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대로 끝나가고 망해가는 세상임은 분명하지만 그 날과 시가 내일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천 년 후가 될지 모를 뿐더러, 우리가 이 생에서 맺은 열매를 따라 생명의 부활로 혹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갈 것이기에,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불법이 성할수록 삶이 진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일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제 앞으로의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예수님의 사람다운 사랑과 거룩한 삶의 깊이를 더해가야 할 엄중한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아무리 정확하게 분석한 확률과 통계일지라도 틀릴 수 있고, 전문가의 예언도 빗나갈 수 있고, 어떤 거대한 성도 무너질 수 있는 것이지만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린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드넓게 펼쳐진 잔디의 엽록색이 주변의 만물을 싱그럽게 합니다.
이 색과 어우러지면 하늘은 더 하늘답고, 꽃들도 제 색깔로 더 아름답고, 나무도 훨씬 운치가 있고 나무와 꽃도 훨씬 깊고 짙은 향기를 뿜어냅니다. 이전에는 빛깔과 향기로 드러나는 꽃이 좋았는데 이제는 아름다운 배경이 되는 초록이 좋습니다. 사람도 돋보이고 잘나 보이는 자리에 선 이들보다, 주위의 사람들을 소박하게 받쳐주는 자리에 선 이들에게 호감이 갑니다.
사랑을 색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런 초록 색을 쓸 것입니다.
사랑을 배경으로 하면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라’는 그 신실한 약속이 그리고 영원까지 보장된 미래에 대한 행복한 속삭임이 공원을 걷는 내내 영혼을 즐겁게 합니다.
무슨 은혜로 이런 엄청난 허구가 나에게 이토록 놀라운 실제가 되었는지 신기해 올려다 본 하늘이 나를 향해 익살스럽게 미소 짓고 있습니다.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재미있는 사도행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초대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흥이었다(행2:41).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초대교회 부흥의 핵심 요소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칭찬 받는 교회’이었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는 집사 선출 할 때조차도, 칭찬 받는 자가 아니면 집사로 선출하지 않을 정도였다(행6:3).

초대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사랑’이 그 핵심이었다(행2:43-46). 이들은 사유재산을 팔아 교회 공동체를 위해 내어 놓을 정도로 서로 사랑했다(행2:45). 좀 과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도마뱀 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오래된 집을 허물고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 지붕을 부수고 벽을 허물고 있었다. 그런데 벽속에 도마뱀 한 마리가 꼬리에 못이 박힌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작업 인부들은 이 광경이 하도 신기해서 집 주인에게 물었다. “언제 이 벽에 못을 박았습니까? ” 집 주인은 4년 정도 되었다고 말했다.

인부들은 공사를 멈추고, 못에 박힌 도마뱀을 관찰했다. 잠시 후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입에 가득히 물고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 있던 먹이를 못에 박힌 도마뱀 입에 넣어주는 것이었다.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아주 명백하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과 직결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47절을 보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칭찬을 받음으로, 하나님께서 구원 받는 자를 날마다 더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행2:47).

내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평가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말씀 한 구절이면 충분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고 말씀 하셨다.

세상은 사랑에 굶주려 있다. 사랑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 사랑받지 못해 알코올, 마약, 도박, 심지어 자살의 문까지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다(고후2:15).

사랑의 향기를 세상을 향해 마구 뿌려야 한다. 그래야 나도 살고, 교회도 살고, 생명도 살릴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꽃이 아니다. 돈도 아니다.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재미있는 사도행전



두나미스’(δουναμις)



‘두란노닷컴’에서 전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다. 이 조사를 통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전도에 대한 인식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많은 질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질문 하나가 있었다. “전도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이었다. 결과는 이랬다. ‘전도하는 것이 부끄럽고, 용기가 나지 않는다’라고 응답한 사람이 33%, ‘바빠서 전도할 시간이 나지 않는다’ 19%,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 모르겠다.’가 14%로 나타났다. 이 조사는 166명의 두란노닷컴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다.

우리는 전도의 중요성을 안다. 그리고 성도라면 전도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전도는 늘 부담스럽고, 힘든 일일까? 그것은 전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내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두려움의 문제를 한방에 날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 간단히 해결된다.

성령이 충만해 지면 ‘권능’을 받게 된다(행1:8). 권능이 무엇인가? 권능은 ‘두나미스’(δουναμις) 즉, 다이너마이트의 원조가 되는 헬라어로 보통 “능력(miraculous), 권능(Power), 활력, 세력, 힘, 권세” 를 뜻한다. 성령에 충만해 지면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강력한 힘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야구 경기 중, 타자가 장타를 날리기 위해서는 타석에 섰을 때, 몸에 힘을 빼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전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전도는 나의 힘을 빼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사도행전 1장 4절을 보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한 발짝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너의 힘을 빼라는 말이다.

2년 전, 밴쿠버에 처음 와서 청년부를 맡았다. 청년 전도를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며, 기도했다. 성령님께서 대학 캠퍼스를 보게 하셨다. 그리고 구체적인 전도의 방법에 대한 지혜도 주셨다. 나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밴쿠버의 대표적인 대학 캠퍼스를 파고들었다. 한국인 학생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전도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은 학업에 대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이들에게 많은 위로와 용기가 필요했다. 이때부터 학기말시험 기간이 되면, 김밥과 음료를 준비해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우리교회 청년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많은 청년들도 와서 김밥과 음료를 받아 갔다.

교회로 청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0명에서 시작한 청년이 지난 주, 모임에 50에 가까운 청년들이 모였다.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행1:15,2:13). 부담이 사라진다. 전도의 방법이 보인다. 열매가 있다(행2:41).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다. 포기하지 말자, 지금도 세상은 1초에 4.1명이 태어나고, 1.7명이 사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아브라함 이야기





언약의 표징 - 할례 / 창 17:9-14, 23-27


할례- 하나님의 명령오늘 본문에서 10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명령대로 아브라함은 99세 때, 이스마엘이 13세 때 그 포피를 베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17:24-25).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의 ‘포피’를 차돌로 베어내는 의식을 말합니다. 즉, 할례는 무엇인가를 잘라버리는 의식입니다.


할례- 불신과의 단절
할례는 무엇인가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단절 (discontinuity)”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포피’를 뜻하는 히브리어 ‘바사르’가 ‘남자의 생식기’뿐 아니라 ‘살, 육신, 혈육, 혈기’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 단어이기 때문에 이것을 확대해서 적용한다면, ‘육적인 것,’ ‘불신의 죄악’을 제거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물론 그의 집의 모든 사람들이 불신의 죄에서 벗어나 구별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육체’에 차돌을 대어 포피들을 잘라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할례- 하나님 앞에 지켜져야 할 언약그런데 하나님은 10절에서 할례가 “내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0절의 ‘내 언약’이란 단어만을 놓고 본다면, 마치 할례가 2절에 나오는 ‘내 언약’ 과 같은 의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10절의 ‘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루어 주시겠다고 주신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이 지켜야될 언약을 가리킵니다. 또한 ‘할례’ 그 자체가 언약이 아니라, ‘할례를 행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언약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고, 언약과 함께 하며, 자손 대대로 말씀에 사로잡혀 살기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야 하는데, 변화받기 위해서는 먼저 불신의 죄악이 ‘단절’ 되어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례- 언약의 표징
11절에 보면,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할례란 불신과의 단절이고, 지켜야 할 언약이고, 그 자체가 하나의 구별된 표시가 됩니다. 몸에 언약의 표시를 함으로, 그 표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고 꼭 지키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 언약의 표징은 우선적으로 세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확대하면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모든 것 즉, 주일성수, 기도, 전도, 십일조가 바로 언약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할례- 언약의 성취를 위한 준비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는 언약의 성취인 이삭의 출생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상태가 아닌, 믿음의 상태에서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은 원하셨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이 불신의 죄악 가운데 잉태하고 출생한 아들이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될 이삭은 결코 불신의 죄악 가운데 잉태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삭의 출생을 준비시키기 위해, 아브라함과 그의 집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불신의 죄악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할례를 통해서, 범죄의 도구였던 아브라함의 ‘육체’를 정결케 하셔서 불신의 흔적을 없애시고 아브라함의 후사를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사랑의 역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례- 모든 남자 신앙인의 의무
10절에 보면, “너희 중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나님께서 남자들만이 할 수 있는 할례를 언약의 표시로 삼은 이유는 남자에게 헤드십 (Headship)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11:3에,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한 창 2:20절에 보면,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할례- 모든 남자 신앙인의 의무.......... 또한 창2:20절에 보면,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능력이 더 많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종합하면 하나님께서 여자에게는 능력을 주셨고, 남자에게는 헤드십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여자의 머리로서, 가정의 대표자로서 언약의 표시를 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할례- 집에서 난 자가 받아야 할 의무12절에 보면, “너희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에서 난 자”란 특히 어린 아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를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습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들도 주일이 되면 부모와 함께 교회에 와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남녀노소 다함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에서 난 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자녀들에게도 언약의 표시가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잠언 22:6을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나와 있다. 어린아이들도 언약의 분명한 표시가 나타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할례- 불신과의 단절
할례는 무엇인가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단절 (discontinuity)”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포피’를 뜻하는 히브리어 ‘바사르’가 ‘남자의 생식기’뿐 아니라 ‘살, 육신, 혈육, 혈기’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 단어이기 때문에 이것을 확대해서 적용한다면, ‘육적인 것,’ ‘불신의 죄악’을 제거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물론 그의 집의 모든 사람들이 불신의 죄에서 벗어나 구별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육체’에 차돌을 대어 포피들을 잘라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할례- 돈으로 산 자들도 받아야 할 의무12절에 보면,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돈으로 산 자들”이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도 언약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후 6:14에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나와 있습니다. 만약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믿음에 있지 않다면 저들도 언약의 표시가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례- 신속하게 행해야 할 의무12절에 보면,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팔일 째’가 의학적으로 가장 아픔을 덜 느끼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신속하게 언약의 표시가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고백은 우리의 삶 속에서 더디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바로 그 말씀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할례- 마음에 행해야 할 의무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말씀대로 할례를 행했지만, 갈수록 형식적으로 할례를 행할 뿐 그 정신은 점점 희석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롬 2:25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모세도 신 10:16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도 렘 4:4에서, “...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 가죽을 벤다는 것은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즉, 할례가 외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내적이고 영적인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할례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대한 표시이고,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불신을 제거하고 신앙고백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자신은 물론 가정과 직장에서도 나타나야 하는데 특히 우리의 생각이 바꾸어지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잘라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재확인하고 제거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