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일 목요일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3)
주님의 이름으로 밴쿠버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샬롬을 전합니다. 때로는 사뭇 그리워지는 누군가가 또는 어떤 추억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가슴 아픈 추억을 떠올리면 다시 아파지고, 기분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다시 입가에 미소가 번지곤 합니다. 현재의 시간을 훗날 돌아보았을 때 미소 짓게 하고, 그때 그 결정 정말 잘했어! 라고 스스로에게 뿌듯해지는 시간들로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알차고 의미 있는 시간들로 순간순간을 보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통일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호까지 통일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 더 나아가서 우리 모두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짚어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인데 그냥 돌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셨던 당부를 이루며 살다 가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아버지를 잃은, 고아같이 방황하며 아버지를 모르고 사는 영적고아들에게 찾아가 아버지가 살아계심을,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 계시고 그 분과 함께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을 알리는 것이 아닐까요?
즉 우리의 최종목적은 그 어떤 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을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실제로 그 한사람을 구하기 위해 살아야 하고 우리의 인생을 바쳐야 합니다. 통일의 시작도 과정도 끝도 ‘한 사람’을 얻고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2. 통일을 이뤄감에 있어 버려야 할 것
언젠가 잘 아는 한 대표님께서 강의 중에 북한 또는 통일을 생각할 때 우리가 잡아먹어야 할 개 두 마리가 있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내용인즉 ‘편견’과 ‘선입견’이라고 하셔서 얼마나 웃었는지. 하지만 웃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뼈있는 말씀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우리 한반도는 다른 나라와는 달라서 냉전 60여년을 지속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북에서는 미국과 남조선괴뢰도당이라고 가르치며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념 아래 주민들을 똘똘 뭉치게 했고 남한에서는 반공교육을 깊이 있게 하여 북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괴물같이 생긴 것처럼 교육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증오의 대상으로 우리는 교육받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적인 교육아래 노예화되어 변질된 우리의 의식구조를 뜯어고치고 될 수 있다면 다 버려야 함은 많은 분들이 동의하고 계십니다. 아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영혼, 생각 속에 깊이 뿌리박았던 북한에 대한 잘못된 또는 허황된 생각들은 다 지우시고 버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하나님의 관점’으로 북한을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를 바라보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내 지식과 앎에 기인하여 판단하는 가치관과는 전혀 반대의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실까 라는 마음으로 출발해야 하며 그리고 그 기준을 성경의 말씀에 준하여 기도하고 예배하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마음을 따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세를 낮추어 들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세상이 하는 소리를 내가 좋아하는 쪽의 소리만 들을 것이 아니라 좌^우의 소리를 다 들으며 무엇 때문에 서로 대립하고 있는지 문제를 발견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는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하나님의 시각을 길러내야 합니다.
통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Plus





찬양대원의 헌신과 봉사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찬송을 부름으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며 하나님이 살아 계심과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사람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히 11:6)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값 없이 받았다. 그 은혜를 깨달으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우리가 표현하는 헌신이나 봉사라는 말 보다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며 드리는 것이다.

헌신이나 봉사라는 의미를 때로는 내가 중심이 되어서 무엇인가를 베푸는 것처럼 표현되거나 이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교회에 또는 주님께 무엇인가 나의 시간을 내고 나의 힘을 써서 베푸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말을 하며 행동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빨리 나에게 주신 은사가 은혜가 무엇인지를 찾고 깨달아서 그저 하나님께 감사로 드리며 일을 찾고 감당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이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많은 일군들이 더욱 힘을 합하여야 한다. 특히 찬양하는 일에 힘을 모으고 예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눅 17:10)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21 >





0096. 구원은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명백한 진실에 직면하기를 꺼리는 현대인들은 구원받아야된다는 사실에 무지할 뿐 아니라 알아도 무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죄(罪) 아래’ 갇혀있다는 증거다. 인간은 누구나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구원은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것이 전혀 아니다. 인간의 고안품목인 모든 종교적 부류의 잡동사니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력구원을 추구해왔으며 자기들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도달하고자 하는 종교에 묶여있는 인간의 참혹한 상태를 보여준다.
유대인들의 신앙은 종교적 노력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종교적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대적하였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가식을 벗기기 위해 주어졌는데도 완고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구원의 수단으로 삼아 다시 자신들을 노예의 상태로 머물기를 고집,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갈4:24,25 / 2:4).

0097.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재난
기독교회내에서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타락이며 아직도 구원의 담 바깥에서 방황하고 있는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는 인간들의 가장 일반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예의 땅 애굽(죄)에서 불러냄을 받았으나 이스라엘의 마음에서는 애굽이 나오지를 않았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성별되어(롬1:1)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적기원(롬15:16)을 깨닫게 되고, “그 아들의 복음”(롬1:9)에 몰두 “내 복음”(롬2:16)으로 구가하게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과대평가로 가장하여, 빌립보서3장의 완전수 7가지 자랑 중 하나인 “율법의 의(義)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로 자아를 내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해왔던 자였다. 율법에는 성공한 것 같았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철저히 실패한 자였다.

0098. 기독교는 그리스도 시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지성과 우리의 머리에 가득 차 있는 신학적 지식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연인의 모든 선한 의지 조차도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악(惡)으로서의 죄가 되어 조금도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도 아니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동원한 유쾌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적 가능성의 것이 전혀 아님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은 교회안에서도 여전히 공허하고 무의미한 종교적 활동이란 죄에 몰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죄로 알게 된 선(善)과 악(惡)인지라 악도 악이지만 인간들이 내세우는 선(善)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여전히 ‘죄(罪) 아래’ 갇혀있게 된다.

0099. 예수-‘하나님은 구원하신다’
구원의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독자는 ‘아버지 하나님’에 특별히 유의하시기 바란다). 신(新, Neo-)복음주의는 ‘아버지’(구약)신앙을 잃어버렸다. 은사주의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까지도 잊어버리고 ‘성령운동’이니 ‘지금은 성령시대’니 하는 무지몽매한 구호들을 들고나섰다. 지식을 무시한 채로 자신의 그릇된 열정만 의지하는 무익함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심한 해악을 뿌려왔다.
기독신앙 구원의 근본은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의지해야한다. 인간이 자신의 공적을 내세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타협될 수 있는 진리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진리를 배우기 전까지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의미를 다 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적인 공적과 자랑이 철저하게 거부되고 배제되는 ‘아버지 하나님의 의’(義)의 깊이와 심오함의 사랑 앞에 떨어보기 전까지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찬410)라는 찬송과 그 ‘가혹한 자비’의 은혜와, 삼위일체의‘아들’을 거부함으로써 유대인들이 받아온 고난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0100. 삼위일체 -“하나의 위(位)는 언제까지나 3위(三位)이며, 3위는 언제까지나 하나이다.” 구원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하나님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성경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부피는 아버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who)’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4복음서는 아들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what)’을 다 이루셨는지를 들려준다. 사도행전은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how)’ 오늘 이 시간까지 역사하고 계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정시켜주고 있으심을 들려준다. 이제 로마서에서 요한 계시록까지는 ‘누구, 무엇을, 어떻게’의 성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고 계심을 들려준다. 바울서신은 특히 “시작, 중간, 끝”이 모두가 성삼위 하나님이 함께 일치되심을 알려주고 있다. 분리될 수 없는 성삼위 하나님의 신앙이 ‘신복음주의’, ‘오순절은사운동’을 통해 분리되고 나누어졌다. 이단들이 진리를 비(非)진리로 만드는 과정은 이미 균형이 완전하게 잡혀있는 교리에서 진리를 분리시켜 조각내어 나눔으로써 시작된다. 그리하여 균형을 잃고 한 쪽으로 기울어져 치우쳐진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대항하며 오염, 왜곡시킨다. ‘오직 예수’(신복음주의), ‘3박자 구원’(성령운동?) 등의 아버지 하나님이 사라진 치우친 신앙으로 인해, 한 때 ‘동방예의지국’으로 알려졌던 한국은 ‘율법’(구약신앙)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취급함으로써 “아버지가 없는 나라”, 즉 호주제가 무너진 나라로 둔갑하여 세계제일의『뉴에이지』(New Age) 첨단국가가 되었다. 영어의 ‘가정’(family)이란 단어는 ‘아버지’(father)로부터 유래된 단어이다. 구약이 신약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이 구약을 제어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구약 없이는 신약의 온전한 이해가 불가할 뿐 아니라 구약이 없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기초가 없이 곧 무너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도올’인가 ‘도살’인가하는 어떤 불신자가 ‘구약폐기처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는데, 한국교회의 어른이라는 분이 그 분의 무지한 박식함을 추켜주며 같이 찍은 사진을 보았다.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 매춘행위가 극(極)에 달하는 현상으로 밖에는 보여지지 않는 슬픈 현실이다.

0101. 무화과나무(율법, 自己義) 아래에서의 ‘출애굽’
무화과의 때가 아닌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혀 불합리하게까지 들린다(막11:12-25).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막11:9)를 들으시고 갈보리로 가시기 전이다.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상징이다(렘8:13/24:1-10/호9:10/미4:4/7:1). 예수님이 시장하셨는가? 이 단어는 ‘눈먼’ 예루살렘 성에 대한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과 열망의 배고픔-“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이었다(눅13:6-9 / 19:41-44 참조).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었던『나다나엘』은 유대교의 가르침에 충실한, 간사가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다(요1:47). 창세기3장의 무화과 나무로 만든 옷을 치우신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의 출애굽을 위해 불러내셨다. 예수께서는 그 전에 성전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막10:32). 잎만 무성하고 속은 비어있는 유대교의 교만, 허상, 화려함을 먼저 찬찬히 들여다 보셨다. 성숙없는 신복음주의의 ‘교회성장’을 이미 보신 것이었다.

0102. “나는 포도나무요”의 포도원(은혜, 하나님의 義)땅으로 다시 심겨진 이스라엘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11:13)는 말씀의 “때”는 시간적인 의미나 절기가 아니다. 영적 기갈을 보시고 유대교의 본산『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신 때는 “이미 날이 저문 때”였다. AD 70년 예루살렘 성 함락으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훼파하신 때는 “…그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후 40년이 채 못되어 일어났다. 이스라엘의 중심인『예루살렘』성의 유대교의 뿌리인 성전을 뒤엎으신 이야기다. 무화과 나무 이야기를 전반부(막11:12-14), 후반부(막11:20-25)로 나누면 예수님의 준엄한 꾸짖음은 그 중앙(막11:15-19)에 들어있다. 이스라엘패망의 근본 원인은 로마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로 불릴 정도로 유대교의 성전의 부패되어 있었던 유대교의 성전신앙에 있었다. 율법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한계의 끝에 도달해있었다. 율법의 자기의로 은혜의 하나님의 의(義)를 대적함으로써 그들의 성전중심 신앙이란 실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예배신앙이었다. 하나님 사랑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을 믿음으로써 철저하게 실패의 길로 들어섰다. 스스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하나님께서 거저주시고자 하신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게 만들었다. 자아(自我)의지라는 가공할 악(惡)의 세력에 압도당하였다. 그리고……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기를 요구하면서……자신만만하게도 “…그의 피(His, KJV)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라고 고함치고 있었다. 유대교의 실패는 ‘삼위일체’신앙이 뿌리를 내릴 수 없을 정도이심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뿌리까지 저주를 내리셨고, 이스라엘은 그 무화과의 땅 이스라엘에서 뽑힘을 당한 후 2,000여 년을 유리하였던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이스라엘의 영광’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 북미에서 자라는 자녀들을 위해 가정과 각 교회는 지금 Indigo-Chapters 등의 서점에서 특별 판매 중인 책-The Holocaust Chronicle-A History in Words and Pictures, 768pp, 2009 Legacy Publishing, $19.99-의 구입을 권한다. 4,000매가 넘는 역사적인 사진들을 담고 있다 / www.holocaustchronicle.org).

0103.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라
20세기의 중동에 이스라엘이 다시 건국되리라는 가능성은 성경학자들까지도 실현불가능한 꿈으로 보았다. 『시온주의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건국을 두고 영국의 제의를 깊이 숙고하고 있었다. 즉, 남아프리카의 포르투갈의 식민지국인『앙골라』(Angola)를 새로운『시온』의 땅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헤르츨』박사의 갑작스런 서거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는 사단의 집요함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성경의 첫 약속인 구세주(그리스도)의 약속을 제거하기 위해 로마교황청은 창세기 1-3장을 ‘신화 또는 설화’등으로 취급해왔으며『칼 바르트』, 프린스톤 신학교의『메츠거』(Bruce Metzger)등은 이 로마교황청 신학에 합류하였다. 그는 로마교황청 신학자들과 공동으로 성경번역작업으로 출간한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의 구세주 예언장인 시편 2편에서 “아들에게 입맞추라”(Kiss the Son, Ps.2:12)를 “발(교황의 발)에 입맞추라”로 변개시켜놓은 구절에 동의한 자이다. 메츠거 교수는 로마교황청을 비밀리에 방문, 교황을 만나고 돌아온 후 세상을 떠났다.

십자가의 강단을 진정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곳으로 세우소서: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십시오.
2) 나 자신의 성취, 경험이 아니라 홀로 세상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역을 부각시키십시오.
3) 나 자신, 나의 결정에 초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3:8)함에 두십시오.

이것만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유감없이 증거하는 것이며,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서신서’로 들어가면서 ‘그리스도 예수’로 바뀌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찬 511 / 내 구주 예수를 ①)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 4색 밴쿠버 목양일기








잘 썩은 거름이 좋은 거름입니다


201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삶의 비전과 포부를 지니며 출발하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개인적인 비전과 소망을 꿈꾸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허왕된 꿈으로 매 년 반복되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연말이 되면 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로 푸념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대학교수 62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30%가 2013년, 새해 희망의 사자성어로 ‘제구포신(除舊布新)’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제구포신은 공자가 쓴 역사서 ‘춘추’의 주석서인 ‘춘추좌전’에 나오는 말로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펼쳐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막연한 옛것의 부정은 아닙니다. 제구포신의 진정한 의미는 ‘낡은 것은 버리고 새것은 받아 들이되 낡은 것의 가치도 다시 생각하고 새것의 폐단도 미리 보는 것’입니다.

10여년 전, 전북 정읍에서 전도사로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농촌에 위치한 교회인지라, 농사가 생업이신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루는 비닐하우스 농사를 하시는 집사님 댁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마나 심한 악취가 코를 찌르는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코를 막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이 하우스에 거름을 뿌리신 것이었습니다. 코를 막았던 제 모습이 얼마나 송구하던지요. 그 모습을 지켜 보시던 담임목사님의 말씀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전도사님! 잘 썩어 악취가 심할 수록 좋은 거름입니다”.

2012년 저는 개인적으로 기쁨의 시간도 있었지만,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해를 맞이하며 다시 한 해를 가만히 돌아보니, 그 아픔과 고통의 시간들이 새해를 맞는 저의 영혼과 마음에 기름지고 좋은 거름으로 뿌려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엔 제 인생의 악취와도 같았던 일들이 지금은 좋은 거름이 되어 나를 더욱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2012년 너무 아팠던 일들과 고통스럽던 순간들은 2013년, 우리를 더욱 건강하게 성장시키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거름주기 작업이셨습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것 만큼 새해에는 더 성숙한 모습으로 기쁨과 행복의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모두 새해에는 ‘제구포신’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크리스천신문 애독자 여러분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경험하시는 한 해가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문경돈 목사/나무십자가한인교회/778-772-4738]
 
 
 
 
 

아브라함 이야기



롯의 엄청난 불행들 / 창 19:23-37 (상)



심판을 지연하신 하나님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택하고, 가나안 대신에 죄악의 도시인 소돔을 택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지체하였던 롯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롯과 그의 가족들이 무사히 피할 때까지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 그래서 23절에 보면,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 해가 돋았고, 그제서야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24절). 하나님께서는 한밤중에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계획이었지만, 롯과 그의 가족이 안전하게 소알 성으로 피할 동안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지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시자 소돔성은 하루 아침에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25절을 보면, “그 성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이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한 순간에 모두 다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고, 신앙에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일을 당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습니다. 마 25장에 보면,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들 중에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은 기름과 함께 등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등불이 꺼져갈 즈음 신랑이 오자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은 준비한 기름으로 등을 밝혀 잔치에 들어갔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 갔다가 그만 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 25:23). 하나님의 심판은 예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20-22절의 말씀만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롯의 간청을 들으셔서 심판을 지연하신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9절은 하나님께서 롯의 간청을 들으신 이유가 바로 아브라함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여기서 “생각하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이즈코르’ (yizkōr)로 “기억하셨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창 8:1에 나오는데, 바로 “하나님이 노아와…을 기억하사” 입니다. 그런데 창 8:1에서는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시고 노아를 구원하셨지만, 창 19장에서는,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롯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롯은 그의 공로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의 행위, 착한 일이 아닌 예수님의 중보, 구속하심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롯의 가정에 뿌려진 불행의 씨앗하나님보다는 물질과 세상을, 가나안보다는 소돔을, 그리고 순종보다는 불순종과 지체함을 보였던 롯은 이제까지 자신이 모았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허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의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 속에 사는 동안 롯과 그의 가정에는 롯이 깨닫지 못한 엄청난 불행의 씨앗들이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롯이 당했던 불행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른 새벽 눅눅한 어둠 속에 눈을 뜨면 인생이 물빠진 그림처럼, 간이 안된 음식처럼, 소리없는 음악처럼 너무나 싱겁고 밋밋합니다. 낮동안 우리가 얼마나 과장된 감정과 부풀려진 말들과 인위적인 분위기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의 호흡이 이어진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뜻과 은혜가 있음을 고백하며 말씀의 빛 아래 서니, 허무로 식어있던 창백한 마음에 화색이 돌고 오늘도 살아있음이 무척 행복합니다. 내가 잠들어 멈춰있는 동안도 시간은 흘러 온 세상을 새 해로 움직여 놓았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 모두에게 2013의 새로운 땅으로 나아갈 것을 지시하심으로 그 어느 누구도 거부하거나 단 일초도 미루지 못하고 그 땅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말씀 안에 담긴 약속의 등불을 들어 새로 시작하는 한 해를 비추어보니 새로운 소망이 열리고 좋은 일이 충만할 것 같은 기대가 생기고 마음에 아름다운 빛이 가득해집니다. 올해에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구원을 받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어렵다는 말들 속에 새해를 맞습니다. 사람들은 안전한 땅을 찾고 있습니다. 이 땅의 이민자들도 불황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국제, 정치, 경제에 관한 일 이전에 영적인 일입니다. 국제 자본을 움직여 사람들의 생계를 압박하는 짐승의 세력을 피하여 안전할 수 있는 곳은어디에도 없으며 이젠 어느 누구도 그 어려움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으로 돌아가는가 밴쿠버에 남는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신앙의 땅을 기경하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하고 중대한 일입니다. 우리 마음의 땅을 자아가 다스리는 허무와 공허의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왕되셔서 소명과 헌신의 열매맺는 땅으로 바꾸어 주시도록 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키질하시는 때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인본주의가 너무 깊이 들어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함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목적이 되었고, 상업자본주의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소비자 의식이 교회에 깊이 들어왔고, 세속의 가치가 교회 안에도 아주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중에, 사람들은 고객 만족을 주는 교회를 찾아 몰리고 있으며, 목사님의 설교를 입맛에 맞는 음식 대하듯 말하며, 듣는 귀가 높아져 웬만한 설교는 이미 다 아는 얘기라며 귀를 닫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에 수술의 칼을 들지 않고, 오직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며 마음에 위안을 주고 고통이 완화된 느낌을 주는 마취제 같은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일주일동안 자신이 주인이 되어 또 다시 미워하고 막말을 하고 죄를 합리화하면서 사망의 쏘는 표적이 되어 고통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인간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대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인간 스스로 왕이 되려함으로 인해 인류 역사의 모든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땅은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않으면 어디를 가나 한이고 절망이고 어려움이고 죄가 만연하게 역사하는 지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마음의 왕위를 돌려드려야 합니다.
인간은 인본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 그 영광을 위해 살아야 행복할 수 있고 안식할 수 있도록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땅이 결혼한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더이상 죄와 사망의 법 아래 버려진 자, 아무 것도 경작할 수 없는 메마른 황무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결혼함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는 이전의 삶에서 떠나 왕의 나라와 의에 합당한 삶으로 변화해갑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축복은 마음의 땅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2013 년은 모두에게 힘써 여호와를 아는 땅, 하나님의 풍성한 역사를 보는 축복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선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땅이요, 은혜가 역동적으로 임하는 땅이 되길 바랍니다. 진짜 보배를 발견하여 모든 것을 다 팔아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수확된다면 좋겠습니다.

나의 인생 믿음이 있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결말이 아름답기에 방황과 혼란으로 우왕좌왕 하던 시간까지도 아름다운 과정으로 승화되고 숱한 의문과 낙심과 절망 또한 감탄으로 마무리 될 것입니다.
지금은 내 남은 생애 중 가장 젊은 시간이고 가장 생생하게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시간입니다.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우주를 운행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이며 사랑이며, 내가 지금 이 시간 여기에 살아가고 있음이 엄청난 은혜이며 너무나 엄연한 목적이 있음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로 너무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는 은혜로운 여정입니다.
늘 이 아름다운 약속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 있기에 우리 인생은 뻔한 결말이 될 수 없고 마지막까지 새로운 도달이며 아름다운 미지로의 여행입니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며 시작한 이 한해가 오히려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를 보는 해가 될 것을 굳게 믿습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