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5일 토요일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32)



 

32. 우리는 한국인 할례센터로 가요!?



요르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즈베키스탄으로 유학을 온 무하마드, 파키스탄에서 망고 장사를 위해 러시아말을 배우러 온 아지즈, 한국에서 발레 이론을 배우기 위해 온 은정이. 이런 20살 젊은 학생 사이에 끼여 나의 러시아어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우즈벡인. 힘든 것은 알파벳이 라틴어와 상이하여 헛갈리기도 했지만 발음이 심각한 문제였다.

두음법칙에 익숙한 내가 러시아의 R발음, 그것도 강음 R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경을 써서 발음하지 않으면 ‘로씨아’가 아니라 ‘노시아’가 나온다. 그럴 때면 선생님은 그런 이름을 가진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내게 물었다. 자기는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경상도 사람으로 ‘어’와 ‘으’도 구별하여 발음하기 어려운 장애 아니 장애를 겪었던 나로선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 ‘즈드라쓰부이찌에’(안녕하세요)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인사 때 마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자음이 연거푸 나온 뒤에 그 공포의 R 발음이 또 나온다. 나는 집에 돌아와 병아리가 물을 마시고 하늘을 쳐다보듯, 입에다 물을 넣고 목을 뒤로 졎혀 후음 연습을 하고, 폐에서 바람을 조절해 가며 혀 끝을 굴리는 연습을 했다. 결국 구개와 혀 사이에서 혀 끝이 자유로이 놀면서 ‘R’ 발음을 완성했을 때 천하를 얻은 기쁨이었다.

중급 러시아어가 시작될 때 아내도 아이들을 맡기고 초급러시아를 듣기 시작했다. 내가 전적으로 러시아에 집중하자 러시아 말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외워야 할 단어의 격변화, 문장, 외워둔 문장들을 머리에 가득 채운 채 아내와 함께 언어학교에 가려고 계단을 내려와서는 차의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출발 몇 분이 지나서야 아내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다시 돌아갔다. 기가 막힌 아내는 다시 집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아내는 처음에는 웃고 넘겼지만 이런 일이 다음 이틀 동안 계속되자 “아내는 당신을 믿고 어떻게 살겠냐?”라며 한 숨을 쉬었다.

선교현장에서는 언어문제로 야기되는 웃지 못할 사건들이 많이 있었다. 선배 선교사가 러시아어로 원고를 준비하여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 강의를 준비하려면 너무도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한 선교사는 강의 내용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성도들에게 받아 적으라고 했다. 쓰는 것은 고사하고 키득거리는 성도들을 보자 의아해 하면서도 너무도 확신에 차서 계속 “쓰세요”라고 했단다. 앉아 있던 성도들의 얼굴은 더욱 난감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참다 못한 한 남자 성도가 “목사님, 삐쉬찌에가 아니라 삐시찌에 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삐쉬찌에는 공책에다 오줌을 누란 말이고, 삐시찌에가 받아 적으라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선교사들에겐 거의 트라우마가 생기게 된다.

신학교 동기목사 한 가정이 92년 구쏘련이 열리자마자 언어 연수도 제대로 할 기회도 없이 지방 거점도시로 들어가 교회개척사역을 시작했다. 사모님은 아이 키우랴 개척하랴 러시아말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 교회에서는 잃어버린 자기 말을 찾고자 하는 고려인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마침 새로운 교재가 나와 한국교육원에서 책을 수령하러 수도 타슈켄트로 가게 되었다. 목사님이 수도에 볼 일이 있어 나간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교회 여성도들에게 퍼졌고, 서울 구경 겸 장보러 가려는 성도들이 예배당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기만 해도 차도 귀하고 수도로 가려면 차비 또한 만만찮았다. 내친 김에 동기목사는 교회의 승합차에 성도들은 가득 태워 타슈켄트 구경도 하고 서울 남대문 시장 같은 ‘이빠드롬’이라는 큰 재래식 시장도 들러 쇼핑도 하기로 한 것이다.

출발한 승합차에서 함께 찬송도 하고 돌아가며 한 가지씩 은혜 받은 간증을 하며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잠시 휴게소에 들러 볼 일을 보고 다시 분위기를 잡으려 하는데 한 성도가 “사모님, 타슈켄트 도착하면 먼저 어디로 가나요?” 사모는 확신에 차서 “카레이스끼 아브라제니에 쩬뜨르로 먼저 가서 볼 일을 보고, 그 다음에 시장에 갈 거예요!” “아니, 사모님 어디를 간다고요?” “카레이스끼 아브라제니에 쩬뜨르요!” 순간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열 명의 여자성도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우리는 그런 곳이 있다는 말도 아직 못 들어 봤는데! 그리고 우리는 그럴 필요도 없는데!” 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다시 목사에게 물었다. “목사님 우리가 먼저 어디를 간다고요?”

동기 목사는 모른 척 능청을 떨며 “까레이스끼 아브라제니에 쩬뜨르!” 동기목사는 이 일이 어떻게 되나 거울로 뒤를 힐긋 힐긋 지켜 보고 있었다. 뒷자리에 타고 있던 할머니와 연세 지긋한 부인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참다 못한 목사는 사모에게 “여보,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지?”라고 물었다. “까레이스끼 아브라제니에 쩬트르!” “음, 거긴 나도 갈 필요 없어. 여자들은 더 더욱 그렇고!” “먼저 거기로 간다고 했잖아요!”. 까레이스끼 아브라제니 쩬트르는 한국인 할례센터라는 뜻이야! 우리가 왜 그런 데를 가? 교육원은 아브라즈바니에 쩬트르지!
바로 뒤 앉아서 한국말을 좀 알아듣는 부인이 선교사부부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다른 9명에게 “아브라제니에(할례) 센터가 아니라 아브라조바니예(교육)!”라고 하자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 바탕 요절복통을 했다.

그러던 이 가정도 우즈베키스탄에서 추방을 받아 다시 아제르바이잔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거기서는 다시 아제리어를 배우면서 무슨 에피소드를 만들고 있는 걸까?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美 기독여성, 73% “교회생활 만족”



81% “하나님과 난 가까운 관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여성은 교회의 중추다. 남성보다 많이 교회에 나가며 교회의 온갖 사역을 도맡아 하기 때문이다. 27일 미국 기독교 전문 조사기구 바나그룹에 따르면 미 여성 크리스천들은 대체로 교회에서의 역할과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을 삶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바나그룹은 미국 전역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성인 여성 603명을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의 다수는 교회생활이 행복하다고 밝혔다. 73%가 교회에서 재능과 잠재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교회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답한 사람도 59%나 됐다.

지위에 대한 불만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16%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회에서 기회가 제한된다고 답했고, 20%는 충분히 쓰임 받고 있지 못한 것 같다고 밝혔다. 바나그룹 측은 “불만을 가진 이들의 비중이 작아 보이지만 미국에서 여성 기독교인이 약 7000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수백만명이 교회에서 낙담하고 있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여성 크리스천 대다수는 자신의 신앙 수준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나님과 본인의 관계가 가깝다고 자평한 사람이 81%에 달했고, 자신의 신앙이 성숙하다고 답한 이도 73%나 됐다. 또 응답자의 절반 이상(52%)은 매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단한다고 답했다.

이처럼 여성 기독교인 대부분은 자신을 ‘영적인 인간’으로 규정했지만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는 ‘그리스도인’보다는 ‘엄마’가 우선인 것으로 조사됐다.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로 ‘어머니’(62%)가 첫손 꼽혔고 ‘그리스도인’(13%)과 ‘아내’(11%)가 뒤를 이었다. 인생 목표에 대한 질문에도 ‘자녀를 잘 키우는 것’(36%)이 ‘영적인 성장’(26%)을 앞서는 등 여성 크리스천의 가족 중심적 성향이 두드러졌다.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7>




“어지러운 세상 중에…”



0032. 칼 바르트 신학의 악(惡)한 열매인 스위스개혁교회의 70%가 강제로 문을 닫게 되는 배도의 현장

에큐메니칼 운동 50주년. 80년도 초에 전 스위스 개혁교회의 주일학교를 폐지시킨 후 18 년, 젊은 층이 없는 교회로 변형, 300~500명을 수용하는 교회의 주일출석은 25~40명 정도, 드디어 70% ‘폐교회’조치가 내려진 공고와 그 골자는 아래와 같다.
1) 가까운 이웃 교회들끼리 통합, 70%를 ‘폐교회’조치함. 이곳 로잔의 경우 18교회 중 12교회가 문을 닫게 됨.
2) 모든 교역자는 일괄사표를 제출, 1993년 3월에 재임명 받으며 일부는 해고조치됨 (목사는 국가 공무원임).
3) 전 세계 그리스도의 교회의 ‘주의 만찬’이 천주교의 ‘미사’로 바뀌는 현상. 목사 왈, “어떠한 신조나 믿음(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떡과 잔에 참여하시기를...”로 바뀌면서 PK와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음. - 온 세계 ‘교단소속’ 교역자들에게 임할 재앙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스위스 개혁교회를 텅 비게 만든 스위스 개혁교회 목사『칼 바르트』(Karl Bart, 1886 ~ 1968)신학은 인본주의 철학으로 유럽 교회들을 공동묘지로 조성했을 뿐 아니라 WCC신학(종교다원주의)의 토대를 제공하였으며, 북미에서는 신(Neo-)복음주의를 태동시킴으로써 북미와 세계 기독교 신학교 및 교회들을 초토화시켰다.
칼 바르트는 성령님의 보증을 혐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실성, 확신, 보증’을 거부함으로써 로마카톨릭교회의 트렌트공회의 교회법 (아래 0033 ‘짐승 위에 탄 여자’참조)에 동조함. ‘만인구원론자’칼 바르트의 신학은 제수이트(Jesuit, 예수회) 출신인 로마교황 요한 23세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을 받았으며, 곧이어 제2바티칸 공회(1962~65)가 개최되었다. (『루터』,『쯔빙글리』,『깔뱅』,『틴데일』등등의 개혁자들을 칭찬한 로마교황이 있었던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철학자, 신학자들의 하나님’으로 바꾸어놓고 불트만, 몰트만, 쿨만 등등의 학자숭상죄(Scholaralatry)에 빠져있는 유행병환자들도 많거니와 자칭 복음주의자들이라는 보수작업이 필요한 보수주의 신학자들도 많다.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를 로마교황청에 넘겨준 로버트 슐러 목사가 바로 ‘개혁교회’ 목사가 아닌가!

0033. “짐승 위에 탄 여자”
(로마 카톨릭 교회와 종말, Dave Hunt 지음/정태윤 역, 420pp - 이미 서점가에서는 품절된 책. 계시록 17,18장 중심으로 천주교의 뿌리로부터 인류의 종말까지 전반을 상세히 다룬 책. 역자에게 소량의 책이 보관되어 있어 필요한 분은 Pay to KOO, $40 수표 동봉하여 아래 빅토리아 주소로 신청가능하며 책은 미국에서 직송됨. 영문판(A Woman Rides the Beast), DVD, 스페인어판 구입은 www.chick.com을 통해 구입가능함)

물론 카톨릭 교회도 구원을 설교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 설교는 성경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설교이고 복음주의자들이 믿고 있는 구원과는 정반대의 설교이다. 그들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복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이다. 카톨릭 신자들 중에서 구원의 확신을 갖고 죽으면 곧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는 없다. 그런 확신을 말한다는 것은 곧 로마로부터 자동적인 파문과 저주를 초래하는 말이 된다:

만약 누구든지......속죄를 얻기 위해서......주저함이 없이 확신을 가지고......용서를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let him be anathema! - Council of Trent, Six. ⅩⅥ. 13).
만약 누구든지......신자(信者) 견인(堅忍)(즉 성경이 약속한 대로 자신이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확신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Council of Trent, Six. ⅩⅥ. 16).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미 이루어버린 것이 결코 아니며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단순한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는 절대 요지부동이다. 그들은 구원이란 행위와 의식과 교회에서 지정하는 고난을 일생 동안 수행하며, 심지어는 연옥에까지 가서도 계속해야만 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지 칭의의 은혜를 받은 후에 회개한 자들에게는 죄책이 면해졌으며 영원한 형벌의 빚이 탕감되었다고 말하며, 하늘 문들이 열리기 전에 이 세상에서나 연옥에서 갚아야 할 벌들이 다 소멸되었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트렌트 공회는 물론 “회개한 죄인”이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이 말은 성서적인 것으로 들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미혹을 당한다. 그들의 말은 복음주의자들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트렌트 공회는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회개한 죄인”은 이 땅에서나 혹은 연옥에서 혹은 양쪽에서 다 죄의 깨끗함(to be purged)을 받기 위해서 여전히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리야말로 십자가 위에서 죄인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충분성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저주한 거짓 복음이다(갈 1:8).

0034. 예수님을 ‘프리메이슨’ 두목으로 만들어 놓은 NIV 성경


마귀, 우상에게는 ‘경배하다’(worship)란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예수님께는 이 단어를 고의적으로 모두 제거한 성경이 ‘New’가 붙은 영어성경들이다. ‘NIV’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숫제 프리메이슨 두목이 되어있다. 신약에 다섯 번 인용된 예수님을 지칭한 ‘모퉁이의 머릿돌’을 모두 ‘관석’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관석’이란 단어는 프리메이슨 조직의 계급용어로 이 조직의 최고위 지위인 33급 멤버의 심볼로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의 맨위의 뚜껑을 닫는 돌을 의미한다(미화 1불짜리 지폐 뒷면의 그림참조).



루시퍼(사14.12), 갈보리(눅23.33)등을 삭제하고, 단 한번 언급된 개혁(Reformation)이란 단어를 제거, 종교개혁 자체를 부인하면서 어떠한 종류의 사본에도 없는 ‘New Order’란 단어로 대신한 NIV 성경(히9:10). 이호와이레(창22.14), 여호와닛시(출17.15), 여호와살롬(삿6.24)을 제거하고, 골리앗을 엘하난이 죽였다고 거짓말하며(삼하21.19), 구약에 33번 언급된 지옥(hell)이란 단어를 100%제거, 신약에서는 48% 제거한 NIV성경. ‘독생자’예수를 외아들 (독자, 피조물, 뉴에이지 예수 - 요1:18/3:16/3:18/요일4:9등)로 둔갑시켜, 예수님을 프리메이슨 두목으로 만들어 놓았으며(마21:42, 막12:10, 눅20:17, 행4:11, 밷전2:7), 사단, 마귀, 우상, 짐승에게는 경배(worship)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예수님을 경배하는 구절에 와서는 고의적으로 경배란 단어를 제거시킨 NIV성경 및 ‘New’성경들. 이러한 성경을 ‘선호도가 가장 높은 NIV성경’운운하는 교계신문의 무지함과 한심함. 배도를 합리화하기 위한 가공할 음모들이 성경의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는데도 눈이 가려져 보지를 못하고 있다. 또 알고서도 바꿀 생가조차도 안하는 지도자들은 더더욱 무섭다. 독한 사람들이다. “모두 설교는 하나 실천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All preach, no practice) 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이니 “개혁신앙”이니 하는 말이 입에 붙었다. 하나님께 영광도 안되고, 아무리 ‘개혁신앙’을 부르짖어도 개혁이 불가능한 것은 개혁자들이 생명을 내어놓고 건네준 생명의 말씀, 즉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인 하나님의 말씀, 바른 성경을 버렸기 때문이다.

0035. 성경코너가 사라진 책방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좋은 성경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신학교 등지에 내려진 ‘애굽의 재앙들’로 인해 ‘말씀의 기갈’시대를 이미 경험하고 있다. 세상 끝에 되어질 일들을 자상하게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시는 주님(마24장), 그 때를 ‘아들도 모르고’(마24:36)라고 거짓말하고 있는 현대판 성경들. 말씀에 더하고(+), 빼고(-), 변개 조작하는 일들이 성서공회의 거짓 서기관들에 의해 자유자재로 행해지고 있는 현실. 루터, 틴데일, 쯔빙글리, 깔뱅(Olivetan), 흠정역(AV/KJV) 등 개혁자들의 성경에는 없는 ‘아들도 모르고’는 누가 더했고(+), 그리고 내(my) 아버지만 아시나니’의 ‘내’는 또 누가 제거(-)하였는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을 격하시키고 인간 예수, 뉴에이지 예수로 둔갑시키고 있는 음모가 온 현대판 성경에 깔려있다(마가 13:32에는 ‘아들도 모르고’가 있어야 되는 이유).

0036.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1995- ) 성경

미국, 캐나다 성서공회 간행 표준성경인 CEV 성경에는 grace, -ly(200), gospel(95), judgment(285), justification / justify(14), redeem / redemption(60), repent / -ance(69), righteous / -ness(510), salvation(150), sanctification / sanctify(71), tribulation(22) 등 신학적으로 중요한 50여개의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괄호안은 영문판 흠정역 AV/KJV성경에 나오는 횟수). 적그리스도(Antichrist)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적(들, the Enemy of Christ / an enemy of Christ / many of Christ’s enemies / the enemies of Christ)으로 둔갑시켜놓고 잠적해 버렸다. 영어권에서 사역하는 교역자들에게 제일 화급한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올바른 성경을 찾아 쥐어주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죽으신 구주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찬 147 주 달려 죽은 십자가②)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6>




“어지러운 세상 중에…”



0027. 『베니 힌』과 로마교황 (1997년 가을)

베니 힌 (Benny Hinn)은 1989년에 로마교황을 만난 것을 기적이라 생각하고 카톨릭교회를 극찬하였다 (“Something is happening in the Catholic Church today that’s really of God” - Calvary Contender, Dec.1,1988).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이 사람이 얼마나 그럴 듯한 거짓말을 많이 하는지 살펴보자. 베니 힌은 자신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경우를 보면, 이 세상과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욕심이 모두 다 사라졌다. 다시 말해 세상적 욕망이 모두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주장은 1991년 11월 24일자 『플로리다 매거진』에 발표된 베니 힌의 사치 행각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다. “이 사람은 최근에 독일제 벤츠를 팔고 영국제 최고급 차인 재규어(Jaguar)를 샀으며, 초호화 주택에 살고 있다. 그는 양복은 반드시 맞춰 입으며, 이태리제 고급 구두를 신고, 그의 팔목과 손가락에는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그는 다이아몬드 롤렉스 시계, 다이아몬드 반지, 금팔찌만을 찬다. 그는 재규어를 몰고 그의 아내는 캐딜락을 몰고 다닌다. 그는 골프장이 내다보이는 저택에 앉아 있고 수영장 청소부는 수영장을 청소하며 가정부는 아이에게 우유를 주고 있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검소한 생활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줄로 알고 있다.” 이러한 자가 서울의 올림픽 스타디움을 휩쓸고 갔다는 기사(신앙계, 1996년 11월호). 한국교회를 부러운 눈으로 보는 이곳 유럽의 기도의 사람들이 한국을 두고 “미혹의 땅, 현혹(속임)의 땅”(Land of Delusion, Land of Deception)이라고 달갑지 않게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0028. 『프리메이슨』들인 뉴에이지 목사들『로버트 슐러』와 『노만 빈센트 필』

금년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부속기관인 Institution for Successful Church Leadership 과정에는 80여명의 gay, lesbian 목사들과 지도자들이 참석하였으며 Bill Hybels, John Maxwell, Rick Warren 등이 강사로 참가하였다(Calvary Contender, June 15, 1997). 1984년에 Phil Donahue Program에 주 강사로 초빙되었던 배도자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목사의 설교에 대한 Phil Donahue와의 대화내용:
 Peale : “It’s not necessary to be born again. You have your way to God; I have mine. I found eternal peace in Shinto shrine(神道寺院)...... I have been to Shinto shrine.
 Phil Donahue : “But you’re a Christian minister; you’re supposed to tell me that Christ is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aren’t you?
 Peale : “Christ is one of the ways. God is everywhere”(1997년 겨울 / 요트yacht에다가 자가용, 비행기까지 구입, 잘되는 나를 구가하는 신세대 뉴에이지 목사 조엘 오스틴을 경계하시길...).

0029. 기독교 문화창달? 육체에 호소하는 문화 (1997년 겨울)

어떤 교파의 세력이 확장되면, 그 안에 “스스로 생긴” 자만심 같은 것이 반드시 생겨난다. 이것은 명예를 훼손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고 진리이다. 개혁을 이룬 전도자들이 지하실이나 감옥 등에서 벗어나 유럽에서 가장 크고 급성장하는 교회의 강단에 설 때 그들은 마침내 승리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학교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며,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자만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새로이 시작된 평안한 삶은 그들 안에 미묘한 변화를 불러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들은 곧 자신들의 삶에서 좀 더 고상한 것만을 찾으려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개혁초기에 지하실에서 설교하기 위해 양초 하나만 있어도 만족해 하던 목사는 25년이 지난 후 깨끗하고 잘 정돈된 건물 안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성도들의 수가 늘고 공간이 부족해지면서 교회건물들은 단순한 기능에서 벗어나 우아한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해간다. 실내장식 등을 멋있게 달고, 교회당 천정은 점점 높아지며, 의자도 좀 안락해진다. 창문들은 로마카톨릭교회의 유물인 ‘채색유리’(stained glass)로 장식되고, 목사들은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 계속 짓는 건물들은 더욱 커지고 비싼 석조물들을 사용해서 더 좋아진다. 그리고 목사들과 성도들은 그 건물의 우아함을 찬미한다. 이렇게 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동행하는 문화를 갖게 된다. 이것은 이런 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배도(apostasy)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성직자가 되어 버리며, 그들의 분리된 삶과 성경교육은 그들을 새로운 바리새파 사람들로 만들어 버린다. 문화라는 것은 육체에 호소하는 것이다. 일단 육체가 원하는 것을 허락하면 배도가 시작된다. 하나님께 선별되기 위해 세상과 분리되도록 ‘불러냄을 받은’ 교회가 세상에 대한 지나친 관심사로 세상으로 이동하게 하는 문화가 배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세상문화(기독교문화라는 것은 존재치않음. 전성경을 통틀어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음)의 기본적인 특징은 죄성으로 오염된 인간의 마음바닥에 깔려있는 불안, 즉 세상과 분리되고 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한 때 옛 자아(自我)이 누렸던 명성에 대한 욕망을 모색, 유명해짐으로써 안전을 느끼기 위해 다시 화려한 행동에 매달리는 ‘자기(自己)실현’이다. 미국의 경우 CCM 가수들의 생활은 ‘음란죄, 마약과다복용, 자살’로 끝나는 것이 거이 공식화 되어있다. 무대병(舞臺病 - 무대에 서지 않으면 못 견디는 고질병)에 걸린자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배도로 끌고 가지 않도록 아무리 경계해도 부족한 세상을 우리가 살고있다. 기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앞에 자신을 세움으로써 깊이 생각하게 하나 노래는 생각을 멈추게하고 세상앞에 자신을 높이고 세움으로써 안전확보를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오해가 없기를...)

0030. 신중립주의 (New Neutralism,‘신복음주의’의 다른 명칭, John E. Ashbrook 지음, 250pp)
(독자의 편의를 위해 ‘새생명말씀사’ 604-936-0691에 주문 의뢰해 놓았으니 구입, 일독을 권함. 대단히 중요한 책자임. 영문판은 아래 빅토리아 주소로 문의바람)

복음화/복음전파란 미명하에 자신들의 위상과 자기과시를 늘어놓는 것은 ‘신(新)복음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해 온 행적들이다. 복음주의와 ‘신(新, Neo-)복음주의’를 분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치명적인 어두움이 한국과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권태에 젖은 교계신문잡지들은 큰 것을 추구하는 교역자들을 선동, 미국교회가 계속 부흥발전한다고 교역자들에게 헛바람을 집어 넣는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라지고 교회는 유명(?) 지도자들의 활동무대로 변한다. 한가지 기억할 것은 “하늘나라에 관하여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기있는 설교자라면 그는 인기있는 배우보다 더 크나큰 위협에 직면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88)어느 날 밤 그의 일기장에 “나는 어떤 설교자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인지를 의심하게 된다”라고 기록하였다. (1997년 겨울)

0031. 식수(食水)의 근원지를 접수하고 있는 UN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집무실 배치가 잘못되어 그의 집권시에 미국에 잦은 자연재앙이 일어났다고 하여 뉴에이지의 기(氣)사상을 따라 백악관 집무실의 모든 집기들을 재배치했다(TIME, Feb.24, 1997). 미국과 UN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 집권 시 바티칸국과 국교수립 이후, 부시정권을 거쳐 이제는 US시대가 끝나고 UN시대로 돌입, 즉 UN산하의 New Age Movement(NAM) 및 New World Order(NWO)하의 세상을 살고 있다. 로마교황청과 프리메이슨의 합작품인 뉴욕의 18에이커 땅 위에 세워진 UN (Joseph S, Rossi, American Catholics and the Formation of the United Nations, Univ. Press. of America, 1993 / ISBN 0-8191-8980-4)산하의 NAM & NWO 하에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엄청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곧이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의 세금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미국 ‘국립공원’들 - Olympic National Park(WA), Redwood National Park(CA), Yosemite National Park(CA), Yellowstone National Park(WY), Grand Canyon National Park(AZ), The Statue of Liberty(NY), Mesa Verde National Park(CO), Independence Hall(PA), Great Smoky Mountain National Park(TN), Everglades National Park(FL)등 - 이 “biosphere reserves”란 47개의 특정지역과 67의 공원과 역사적인 기념비 등과 함께 NWO 이름하에 UN 관할통제구역으로 이전되었다(The McAlvany Intelligence Advisor, Oct. 1997 - UN에 의해 문화제, 또는 특별지역으로 지정되는 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 즉 빼앗기는 것이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찬 147 주 달려 죽은 십자가①)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예수님의 마음 치유




말 못해서 맺힌 한매우 쾌활해 보이는 박 선생이 세미나 중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매우 아픈 상처와 현재의 삶에서 일어나는 반응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7남매의 여섯째로 태어났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서 재미있게 웃고 즐기는 시간이 되면 형들의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형들이 “쪼그만게 (어딜 끼어들어)...” 하면서 눌러 버렸다. 큰 형과는 15 년이나 차이가 있기에 그냥 몇 십년을 그렇게 눌려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욕구는 눌리면 더욱 강해지는 법. 성장하면서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그에게 마이크만 돌아가면 그날은 박 군의 날이다. 결사적으로 마이크를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어려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 한(恨)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과거의 사연을 모르는 아내가 무어라고 한마디만 하면 그날은 팽팽한 긴장의 하루가 되는 것이다.

가정 예배 때에도 자주 문제가 일어난다. 학생들을 초청해서 저녁을 나누고 예배를 시작하려는 순간 주위를 많이 의식하는 조심스러운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여보 오늘은 늦은 시간이니 찬송을 조용히 부릅시다.” 또는 “오늘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 1절과 4절만 부릅시다.” 아내의 말이 틀리지 않는 것을 알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그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끓어오른다. 그런데 세미나를 통해서 자신이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아내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 순간에 어려서 형들로부터 들어온 “쪼그만게...” 하는 소리가 그에게 울려왔고 쌓인 분노가 요동한 것이다. 박 선생이 웃으면서 말한다. “이제는 아내가 그렇게 말해도 화를 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 12 장 너무나 다르게 “설계 (Design)” 되어진 남자와 여자


우리 삶에서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가장 민감한 요인은 남녀 간의 문제이고 부부 사이의 관계다. 밖에서 아무리 인정을 받는 남편이나 아내라도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상대로부터 날카로운 비난과 꾸짖음의 말을 듣는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된다. 죽어가기 시작한다. 반대로 밖에서 참으로 비천한 대접을 받는 사람이라도 집에 들어서는 순간 사랑의 영접을 받으면 그 사람은 왕이 부럽지 않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조상인 아담과 이브도 그랬던 것이다. 아담은 자신의 행복의 기준을 아내인 이브에게 두었기에 아내가 주는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 받아먹었다. 그 결과 실패한 인생, 불행한 인생이 된 것이고, 우리 모두가 그 죄에 눌린 삶이 되게 한 것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는 은혜를 제외하고는 이 오묘하고도 민감한 남녀의 차이를 잘 알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만큼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없다고 감히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아주 다르게 만드셨다. 남자는 흙으로 만드시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 21-22)

그리고 남자에게 없는 귀한 장기 세 개를 여자에게 주셨다. 바로 자궁과 난소와 유방이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아기를 잉태하고 양육하고 출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작업을 위해서 이 세 장기에서 여러 종류의 홀몬을 생산하게 하셨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달라도 아주 다르다. 서로 외계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다르다. 금성에서 온 남자, 화성에서 온 여자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 차이들이 인간의 삶에 엄청난 기쁨과 슬픔을 함께 가져왔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요, 그 차이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쁨과 행복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그 차이는 없어지지 않는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지금 모국의 한 가수의 노래가 전 세계의 유행이 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인터넷이 떠들썩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 노래와 춤을 패러디해서 만든 영상이 유명해졌습니다. 이제 세상은 세계가 인정하면 무조건 옳고 좋은 것이라는 것을 생각 없이 긍정하는 수준에 이른 모양입니다. 대체 그 노래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 춤이 뭘 의미하는지를 생각했다면,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한국이 엔터테인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아시아 사람들은 내가 한국 사람임을 밝히면 바로 한국 드라마와 K pop 이야기를 하며 엄지 손을 들어 보입니다.
순박하고 온순한 눈빛을 가진 그 사람들은 나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부추겨 격려하고자 하는 말이겠지만, 과연 그것들이 그들의 세계관과 그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하면 심난해 눈을 피하게 됩니다.

이혼률 1위, 자살률 1위, 음란한 나라로 손꼽히고 있는 우리 나라의 영화와 드라마와 음악들이 세계의 사람들을 육신과 안목의 정욕, 쾌락과 폭력과 자살과 허무와 fairy tale 의 허상 속에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뒷 얘기는 책임 안지는 식의 메시지를 흘려 보내고 있음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요즘 인터넷 세상에서는 최고의 형용사가 섹시입니다. 그 사회의 가치를 말해주는 시대적 형용사가 정직이나 성실이나 지적인 것도 지혜로운 것도 착한 것도 바른 것도 아닌 섹시라는 것은 오직 육체의 쾌락만 추구하며 동물적이고 말초적인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의 탈이나 양심까지도 벗어 던지겠다는 뜻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 아찔해집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가장 깊이 영향을 받는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섹시하게 화장을 하고 섹시하게 옷을 입고 섹시한 표정을 흉내 내며, 생각 없이 지절거리고 속살거리는 그들의 말을 따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 가는 세상에 호통을 쳐주어야 할 어른들조차 어떻게든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이고 어려 보이고 섹시해 보이기 위해 시간과 돈과 정력을 바치고 있습니다.

육체를 야릇하게 흥분시키는 비트와 몸놀림의 음악에 취해, 사람들은 성욕의 때를 만난 광야의 들 암나귀들처럼 욕정에 불타 헐떡거리며 죄를 짓기에 너무도 담대합니다. 요즘의 음악들을 들으면 소돔과 고모라의 음악들이 이러했을까 싶고, 걷잡을 수 없이 음란해지고 성에 대한 탐닉이 더욱 노골화 되어가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시는 심판이 이미 시작된 것 같아 너무도 두렵습니다.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포르노를 만들고, 친부모가 자녀를 성폭행 하고, 성직자로부터 심지어 초등학생 들까지 친구를 성폭행 한다는 뉴스를 들을 때, 몇몇의 패륜들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혀를 찰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물이 그러하다면 우리와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도 그 물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가 옳다 하니 사람들은 합리화가 빨라 ‘다 그러는데..’ 하면서 담대하게 그 길을 가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두렵고도 엄연한 사실은 죄의 약속은 파멸이고 죽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성은 씻을 수 없는 수치심과 고통을 남깁니다. 배우자의 외도나 부모의 불륜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아이들을 상담하면서 음란이 얼마나 무서운 힘으로 가정을 쓰러뜨리고 사람들의 건전한 꿈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어두운 비밀로 옭아매고 있는지를 눈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한번 짐승적 충동에 붙잡히면 다시는 이생에서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이 망가져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진실도 없고 우정도 없고 신의도 없고 정조도 믿음도 없이,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스승이며 선지자이고 자기의 길을 동조하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그것이 옳은 말인지 바른 길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이 아닌 것에 말을 섞고 길이 아닌 곳으로 가고 있는 이 때, 우리가 돌이켜 회개 하지 않으면 우리가 당할 심판은 너무나 크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 심판은 먼 훗날의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삶에 임하는 황폐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진리 안에서 깨어나 그동안 나의 죄와 미련이 파괴하고 쓰러뜨린 것을 돌아보면 너무나 원통한 마음이 들고 죄의 권세가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것인지 치가 떨립니다. 지금 모국의 경제가 국제 금융의 잔인한 이빨에 속을 다 파 먹히고 빈 껍데기만 남아, 하우스 푸어들이 늘어가고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난한 가계들이 그 위험한 대출을 받고 있고,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중소기업들이 심하게 자금의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껏 잘못 살아왔던 시간의 쓰고 아픈 열매를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것처럼 오늘이 내일의 역사를 이룹니다. 오늘 내가 심는 말과 행동, 작은 결정들을 내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오늘을 온전한 것으로 잘 심어야 합니다.
교회인 우리는 오직 거룩한 삶을 사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성령님께 속한 사람들로 서야 합니다. 망해가는 세상에 진정한 소망을 주는 말은 ‘괜찮다’ ‘잘 될 거다’ 라는 긍정의 메시지가 아니라 장차 올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바르고 날카롭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예장 통합, 교회 성장 멈췄다


 

10년만에 첫 감소 . . . 한국교회 위축 신호탄인가?







예장 통합총회 전체교인수가 인터넷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감소했다.

통합 제97회 총회 통계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12월 31일 기준 전체교인수가 285만2,125명으로 나타나 2010년 285만2,311명보다 186명 감소했다. 비율로 보면 0.01% 감소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난 2002년 인터넷 통계작성이 시작된 이후 해마다 5만 명에서 10만 명이 증가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예장 통합총회 한 관계자는 “교세가 줄어든 것은 인터넷 교세통계 작성 이후 처음”이라며 “이전에는 수기로 보고했기 때문에 등락이 있었어도 부정확했다”고 말했다. 이어 “각 교회가 인터넷에 접속해 교세를 직접 입력하는 방식으로 통계가 작성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통계 자료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유치부와 유년부, 초등부, 소년부는 2006~7년을 기점으로 해서 3천 명~ 5천 명씩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중고등부의 경우도 감소세가 두드러진다. 2009년 19만5,275명에서 2010년 18만8,304명으로 약 3% 줄었고, 올해는 18만308명으로 나타나 지난해에 비해 약 4%, 8천여 명 교회를 빠져나간 것으로 나타났다.

눈에 띄는 점은 영아부 통계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으며, 유아부도 다른 연령대에 비해 크게 줄지 않았다. 맞벌이 가구가 늘어나면서 사회적인 양육부담이 증가했고, 교회가 영유아 시설 등을 통해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미래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유치부에서부터 중고등부까지 모든 교회학교 계층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은 향후 교회 성장에 대한 장기적인 침체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젊은층의 이탈은 직분자수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신앙연수가 높은 고령에 해당하는 장로수는 2만6,999명에서 2만7,487명으로 1,81%, 권사수는 13만1,628명에서 13만7,017명으로 4.09% 증가했다. 하지만 교회의 중책에 해당하는 안수집사수는 6만3,479명에서 6만1,295명으로 3.84% 감소했고, 서리집사수도 60만8,366명에서 60만8,069명으로 0.05% 감소했다.

반면 교회수는 8,162개에서 8,305개로 1.75%, 목사수도 1만5,751명에서 1만6,257명으로 3.21%, 세례교인수도 169만5,952명에서 171만7790명으로 1.29% 증가했다.

통합총회는 그동안 교회부흥성장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만사운동, 300만성도운동 등을 추진하며 지속적으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한 정책을 시행해 왔다. 이 때문에 교단의 성장세가 멈춘 것에 대한 충격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성’금기시하지 말고 교육해야”



청소년 왜곡된 성 인식, 어떻게 해야 할까?




왜곡된 성 가치관, 올바른 성교육으로 바로잡아야
아동권리교육, 생생 프로그램 등 교회 도입 가능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을 비롯한 성범죄 사건이 줄을 이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최근 검거된 성범죄자들은 지속적으로 음란물을 즐겨왔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터넷상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음란물과 유해정보가 성범죄를 부추기는 원인 중의 하나로 지목돼, 대대적인 음란물 유통 단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성인만 음란물에 노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최근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스마트기기의 급격한 보급과 더불어 음란물이 청소년들에게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중고등학생뿐만 아니라 초등학생까지 음란물에 노출돼 성에 대한 가치관을 왜곡시키고 있다.

# 초등학생까지 음란물에 노출
실제로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청소년 유해환경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ㆍ고등학교 남학생 54.5%가 온라인을 통해 음란물을 경험했으며, 음란물을 처음 경험한 연령도 초등학생 및 중학교 1학년으로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지난해 행정안전부가 청소년 1만225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 성인물 이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음란물을 경험한 청소년 5.0%가 ‘성추행, 성폭력의 충동을 느꼈다’고 답했다. 음란물 이용 후 ‘음란채팅’(4.9%), ‘야한 문자나 사진 전송’(4.7%), ‘몰래카메라 촬영’(1.9%) 등 부적절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이현숙 상임대표는 “아이들이 성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인터넷, 음란물, 대중매체 등을 통해 왜곡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청소년들의 올바른 성 인식을 위한 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피성연구소 이은비 소장도 이 대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 소장은 “요즘 성범죄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 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성교육을 받아야 한다. 학교나 유치원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교회가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단체나 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성교육 프로그램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지난해부터 아동 성범죄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기독교NGO 굿네이버스(회장:이일하)는 전국 46개 지부에서 아동의 연령에 맞춘 ‘아동권리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교육 내용은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성학대 예방 인형극 △아동 힘키우기 서비스(CES, Child Empowering Service)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놀면서 배우는 권리(CRA, Child Rights Awareness) △참여 활동을 통한 아동학대예방교육(PAPCM, Participatory Activity for the Preve ntion of Child Maltreatment) 등으로 나뉜다.

굿네이버스는 “이 교육은 아동뿐만 아니라 아동을 둘러싼 가정 및 학교(부모, 교사 등)를 동시에 교육하면서 아동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높여 아동권리를 옹호하고 학대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궁극적으로 아동이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낙태반대운동연합(회장:김현철, 이하 낙반연) 역시 최근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강서구, 관악구, 노원구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생(소중한 생명)생(건강한 생각) 토요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생생 토요일 프로그램 임신 체험활동.


생생 토요일 프로그램은 △생명 시작점과 전생애주기의 이해(태아기에서 노년기까지) △같지만 다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사춘기, 데이트 △유해환경 이해와 그로 인한 문제들, 그러면 우리는? 등의 4주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낙반연은 “이 프로그램은 사춘기에 접어드는 청소년들이 건강한 성가치관을 정립하고 예기치 못한 임신과 낙태를 예방하여 건강한 이성관과 결혼관을 갖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낙반연은 또 “지역 사회의 대학생과 함께 사춘기에 접어드는 10대 초반의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에게 생명과 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며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을 상품화하는 유해 대중매체를 인식하고 바른 성 가치관을 정립하도록 돕는 체험학습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개교회에서 성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한 단계다.

이에 대해 이은비 소장은 “성을 금기시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올바른 성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성서적 입장에서의 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며 “성경을 기독교 성교육의 기초로 삼고 어릴 때부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어 사회생활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찬송에 담긴 이야기, 그 속에 우리의 간증이 있다




숨겨진 찬송이야기 / 김남수 지음 / 아가페북스





예배에서 빠져선 안 될 중요한 요소 중 하나, 바로 찬송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찬송을 듣고, 부르며 위안을 얻기도 하고 회개의 방법으로 삼기도 한다. 비록 한국 교회가 찬송가 문제로 떠들썩하긴 하지만 찬송이 사람들에게 주는 감동은 그 모든 문제를 덮을 수 있을 만큼 크다.

찬송의 가사는 기도라는 이야기가 있다. 성경학자들은 구약의 시편을 다윗 왕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편의 많은 말씀들은 찬송으로 만들어져 불리고 있다. 찬송 안에 많은 이야기들이 담긴 것이다. 그 중의 한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자.

마틴 목사 부부와 아홉 살 난 아들은 뉴욕의 한 성경학교를 방문했다. 어느 주일 저녁 마틴 목사는 뉴욕에서 조금 떨어진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런데 부인 시빌라가 갑자기 아파 설교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말씀을 전하러 가기 힘들 것 같아 수화기를 들었을 때 옆에서 어린 아들은 말한다.

“아빠, 아빠가 오늘 밤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뜻이라면 아빠가 안 계시는 동안 하나님께서 엄마를 지켜주실 거예요.”

그 말에 감동받은 마틴 목사는 어린 아들의 믿음을 대견하게 생각하며 교회를 향해 떠났다. 병상에 누워있던 마틴 부인도 은혜를 받은 것을 마찬가지.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실 거라는 생각을 하자 아픔도 나아지는 듯 했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찰나 하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지키리라.”

설교를 마치고 돌아온 마틴 목사에게 마틴 부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시 한 편을 건넸다. ‘하나님께서 널 지켜주시리, 매일매일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분이 널 지켜주시리, 하나님께서 널 지켜주시리’ 아들이 건넨 한 마디에 부부는 힘을 얻었고, 마틴 부인은 떠오른 영감을 글로 옮긴 것이다. 마틴 목사는 쓸데없이 걱정한 일을 회개하고 오르간 앞에 앉아 즉흥적으로 연주하며 아내가 지은 시를 노래했다. 세 식구가 함께 지은 찬송이 태어난 것. 그 찬송은 바로 ‘너 근심 걱정 말아라’다.

이 책의 저자 침례신학대학교 김남수 교수는 “찬송은 가사와 음악이 결합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며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기 위해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을 주셨다”고 주장했다. 찬송으로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게 하셨다는 것. 또 “우리는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찬양할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됐다”고 덧붙였다.

이 책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들이 만들어진 계기, 그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리고 그 찬송이 만들어진 상황을 생각하며 더 깊은 묵상에 빠질 수 있도록 돕는다.

김 교수는 “이 책은 호흡이 있는 날까지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려는 목회자, 최선의 찬양을 최고의 하나님께 드리려는 찬양대원,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이가 찬송의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깊은 감동을 얻길 원하는 마음에서 쓰여졌다”며 “찬송 이야기를 읽고 듣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그 분을 높여드리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기초가 부실한 리더십은 무너진다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을 위한 ‘목회자 리더십론’ 조성종 지음 / kmc

 
 

목회자들의 최대 관심사, ‘리더십’. 더 구체적으로는 성경적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크다. 하지만 리더십에 대한 개념이 쉽게 정리되거나 형성되지 않는 것이 현실. 기초가 부실한 리더십은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만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한다.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을 위한 목회자 리더십론’은 이런 목회자들을 위한 책이다. 저자 조성종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단편적인 리더십의 형태만을 가지고는 제대로 된 목회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고 말한다. “리더십이 발휘되기까지 그 기본이 되는 많은 이론적인 토대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많은 목회자들이 이론에만 강한 목회자 혹은 이론적 이해가 없는 제왕적 카리스마를 리더십으로 착각하는 오류에 빠지기도 했다.

필자는 20년 전 상계경신교회를 개척해 어느 교회보다 건강한 교회로 성장시켜 온 목회자. “그동안 개척한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리더십의 목회 실천적인 면을 경험했고, 학교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전방향적인 목회자 리더십의 필요성을 깨달았다”는 조 목사는 목회 경험만큼 많은 기간을 대학 강단에서 리더십을 강의했다. 경민대학교와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20여 년 동안 리더십을 강의하면서 성경적인 리더십의 이론 뿐 아니라 성경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한 사회과학적인 리더십의 주변 분야의 이론을 정리했다.

이번에 발간된 책은 개정판. 초판 당시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목회자료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던 책이다. 이 책에서는 최근의 경영학, 조직학, 행정학, 교육학 등에서 연구된 리더십 이론을 신학적 틀에 맞게 재조명해 목회자 리더십을 규명했다.

전체 4부로 꾸며졌고, 1부 ‘리더십의 일반적 이해’에서는 현재까지 발전해 온 리더십의 이론과 그 이론의 발전 과정과 현대 리더십의 이론을 포괄적으로 정리했다. 2부 ‘리더십과 사회과학’에서는 팔로어십과 멘토링, 임파워먼트의 리더십과 함께 적용되는 주제들과 서번트 리더십이 발휘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서비스와 서비스 리더십이 소개된다. 3부 ‘목회자 리더십의 이해’에서는 모세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성경 속의 리더십을 살펴보았고, 4부 ‘목회자 리더십과 실천적 목회’에서는 목회자 리더십이 발휘되는 실천적 목회 현장 속에서의 목회자 리더십을 살펴보면서, 리더십에 대한 이론과 실제적 적용을 조화시켰다.

사도행전 이야기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자들




1999년 1월 19일 큰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아이는 병원에서 낳지 말라고 한 아이다. 기형 확률이 너무 높다는 이유였다. 90% 이상이었다. 의사도 간호사도 부모, 형제도 모두가 임신중절을 촉구했다. 기형인 아이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이기에 출산을 강행했다. 아이는 병원 검사결과를 비웃고,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고민, 고민 끝에 아이의 이름을 ‘준(俊)’이라 지었다. 뛰어난 인물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멋진 일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이름이다.
‘누가’는 부모의 큰 기대 속에서 태어난 것 같다. 그의 이름의 의미가 “빛을 비추는 자”인 것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누가는 수리아 지방의 안디옥(터키 남부 시리아 접경) 출신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만나 바울과 함께 동행하기 시작했다. 바울과 누가의 만남은 좋은 끌과 돌의 만남이었다. 누가는 이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으로 만들어져 갔다

누가는 바울의 지병(바울의 가시)을 담당하는 의사의 일과, 선교의 통역자로서 일을 시작했다. 로마제국 전역에 복음을 전하며, 각종 풍토병과 계절병에 직면한 바울과 그의 일행을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딤후4:11). 특히 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통해, 신약성경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권의 대작을 탄생 시켰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전승에 의하면 누가는 주후 93년, 그리스에 있는 한 올리브 나무에 매달려 순교 하면서까지 자신의 이름값을 해냈다.

하나님의 자녀는 두 개의 이름을 소유한 자들이다. 하나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붙여준 ‘성도’란 이름이다(고전1:21). 성도는 누구인가?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구별된 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첫째, 깨끗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요일 3:2-3).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목적과 이유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롬14:8). 이 두 가지의 원칙이 지켜지는 삶을 살 때, 이름값하고 사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정성헌 션교사의 선교칼럼



그래 이 놈. 너만 봤니!  (1)


임대한 아파트에서 시작된 교회는 얼마 되지 않아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자랐다. 공간도 좁지만 소음으로 이웃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어서 시급히 예배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교회 개척지와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작정기도회를 하러 새벽기도를 다녔다. 수도 동쪽 외곽지역 아파트 밀집지역에 교회가 없어 그 곳에 교회를 개척할 마음으로 새벽기도 후 땅밟기 기도를 했다. 그 곳에는 교회부지로 구입할 만한 일반 주택이 거의 없었다. 주택지 가가호호를 탐문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한 집이 있다라는 주위 사람의 연락을 받았다. 땅도 넓고 집도 쓸만해서 마음에 들었다. 한 날 그 집과 동네에 땅 밟기 기도를 마치고 집 현관에 들어서는데 한 쪽 다리가 이상해서 봤더니 구두 축이 빠져 달아나고 없었다. 어렵게 발견한 집이라 온 통 정신이 그 집에 팔려 있었다.
한 날 연락을 하고 주인을 만났는데 우즈벡 중년 여인이었다. 집을 보려고 안으로 들어가자 집안 거실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이상해서 물었더니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서 자신과 전처의 아들에게 이 집이 상속되었는데 소유권이 자신과 그 아들에게 반 반씩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팔길 원하지만 전 남편의 아들이 동의해야 하니 사고 싶으면 찾아서 의향을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연락처와 주소를 받아 카작스탄 국경 마을로 갔다. 마침 집안에 결혼 잔치가 벌어져서 나와 아나똘리는 귀빈으로 대접을 받았다. 집안 분위기를 살펴 집 주인을 찾았다. 삼촌이라는 사람이 그 조카는 고향인 우즈베키스탄 남단 ‘수르한다리아’ 주, 아프가니스탄과 타직스탄 국경도시인 ‘데나우’에 살고 있다고 했다. 타슈켄트에서 멀고 먼 오지였다. 집을 사려고 하니 주소와 연락처를 달라고 했더니 데나우에 가면 자동차 정비소가 두 개 있는데 첫 번째 만나는 정비소에 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대면 바로 알려 줄 것이라고 했다. 아나똘리는 주소와 전화번호도 없이 서울에 김서방 찾듯 가냐고 회의적이었지만 나는 절박했다. 그래서 아직 한 번도 우즈베키스탄의 남쪽 지역을 가 본적이 없으니 이 번 기회에 정탐 겸 세상구경을 하자며 아나똘리를 부추겨 동행을 했다.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 때엔 변변한 지도 한 장 구하기도 어려웠다. 묻고 또 물어 가야 했다. ‘조금 더 가다 좌회전 하시오.’ 조금 더 가는 것이 결국 90키로미터 였다. 이른 새벽 두 시에 출발한 우리는 거의 쉼 없이 달려 오후 4시 경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12월 초인데도 아직 감이 달려있고, 석류가 매달려있는 진풍경이었다. 인도양에서 부는 바람이 아프카니스탄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오면서 높새바람 현상으로 그 곳은 겨울인데도 온도는 가을 같았다.

첫 번 째 만나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이름을 대고 물었다. “인구 3만인 ‘데나우’시에 자동차 정비가 한 두 개냐?”라는 것이다. 난감해져서 이곳 저곳 정비소를 헤매고 다녔다. 아나똘리는 뭔가 이상하고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다 한 우즈벡인이 고려인이 하는 정비소가 있으니 그 곳에 가서 물어보라는 것이다. 아니, 이 국경도시에도 고려인이 산단 말인가? 찾아 갔더니 정말 번듯한 정비공장의 사장이 고려인이었다. 우리를 소개하고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이 사람은 나를 멋적은 표정으로 여러 번 살펴 보더니 안으로 들어가자 소리도 없이 밖에다 세워 놓고는 몇 마디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서먹해서 공장마당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이 먼 길을 와서 그 냥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허탈하기만 했다. 아나똘리는 빨리 포기하고 눈이 내리기 전 돌아가자는 것이다. 산 밑에는 비가 내리면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고갯길은 눈 천지일 텐데 어떻게 가자는 것인지? 차를 몰고 올라선 고갯길은 고도가 높아지자 내리는 눈으로 몇 미터 앞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헤드라이트 앞으로 달려드는 눈으로 피곤해서 계속 교대로 운전을 해야 했다. 민가가 나오자 나는 아나똘리에게 이 상태로는 위험해서 더 이상 못 가니 자고 날이 좋아지면 가자고 제안했다. 대답은 안된다는 것이다. “눈에 빠져 죽어도 이 구덩이에는 못 들어 간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저기 들어가면 이가 옮아요. 집으로 가서 아내에 무슨 면박을 받으려고 저기서 자요!”라는 것이다.
산맥을 두 개나 넘는 눈길 운전은 거의 밤 스키를 타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오르막 내리막에 차가 미끄러질 때져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며 ‘데나우’에서 만난 그 고려인이 괘씸했다. ‘그 멀리서 동족을 만났으면 재워라도 주어야지! 뻔히 눈 오는 그 험한 길을 그냥 돌려 보내는 인사가 어디 있나? 몰인정한 사람 같으니라고!’ 몇 마디 하자 아나똘리는 같은 고려인이라고 “사람마다 다르지요!” 라고 한다.
폭설로 가게 문이 닫혀 있어 가져간 빵과 물, 운전할 때 피곤하면 먹으라고 아나똘이의 아내 나타샤가 준비해 준 당근으로 버티며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 열을 받은 나와 아나똘리는 바로 카작스탄 국경으로 다시 달려 갔다. 그 집사람들은 우리를 다시 만나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집주인이 어디 있다고 엉뚱한 소리를 해서 그 먼 길을 헤매게 하며 고생하게 하냐?”며 아나똘리가 흥분을 해서 소리를 높였다.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그 집 할머니가 우리를 불러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그 집의 한 쪽 주인인 자신의 손자는 마약 중독자로 금치산자가 되어 있어 재산권 행사를 할 수 없는데 친적들이 부끄러워 사실대로 말을 못하고 손님들에 큰 실례를 했으니 용서하라는 것이다. 그 먼 길을 다녀오느라고 애를 쓰게 했으니 죄송하다면 차를 부어 주며 우즈벡 전통을 따라 축복기도를 해 주었다.
몇 일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데나우’에서 잠시 만났던 사람인데 자신을 기억하겠냐는 것이다. 기억을 하고말고요!  타슈켄트에 와서 호텔에 있는데 속히 나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아이티”에 다녀왔습니다



“아이티”에 다녀왔습니다





물질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여전히 정신이 빈궁한 아이들, 귀에 음악을 꽂고 기계의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살아가며 인간적인 교감을 잃고 자신의 모습과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아이들,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문화의 위력 앞에 문신이며 피어싱이며 노출이 심한 옷차림, 우리 세대에 악으로 눈총을 받던 것이 버젓이 유행이 되고 악하고 음란한 문화를 세련됨으로, 미련한 생각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넘어 이대로 놔두면 안되겠다는 위협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껍데기적인 것들과 허황된 형상들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띄워주고 싶다는 열망이 있던 차에 아이티 선교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과 캐나다가 여행 자제 지역으로 분류해놓은 나라, 아이티 여행을 준비하면서 참 많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전염병에 대한 위험이나 불안한 치안과 흉흉한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는 걱정들과 떠나기 전날까지 예방 접종이 없이는 못 들어가며 아이티를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입국이 제한된다는 허황된 소식과 싸워야 했습니다.
우리를 초대하신 현지 선교사님께서 워낙 일을 평온하게 진행해 가시기에 쓸데 없는 걱정으로 번거로움을 드리고 싶지 않아 내가 감당할 부분들을 조용히 기도로 싸우면서 내심 두렵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그곳에서 보고 듣게 될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곳에서 보고 들을 엄청난 사실 앞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가슴에 울렁증이 일고 천진하게 나를 믿고 따르는 아이들 앞에서 내 마음의 깊이와 사랑의 함량이 금새 바닥을 드러내면 어쩌나 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포르토 프랭스의 공항에 도착하니 날씨가 후끈하고 피부에 닿는 햇살이 맵습니다. 무법천지의 나라답게 눈 앞에서 불법이 상식처럼 행해지고 있습니다. 구호품은 대부분 중간에서 분실되고 비행기에서 직접 짐으로 가져온 가방도 하나 둘 씩은 없어진다고 하는데 다행히 우리 짐은 박스 몇 개가 뜯어져 있었던 것 말고는 잃어버린 짐은 없었습니다.

2년 전 지진으로 황폐해진 땅을 복구하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물과 양식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세계의 사람들이 이 땅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을 하니 감동이 느껴집니다. 거리의 사람들 하나 하나 얼굴을 살펴서 엄청난 재난을 겪은 저들의 눈빛에 담긴 것이 무엇일까 읽게 됩니다. 도시 전체가 폐허 더미 같고 수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겉돌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가난과 처참한 과거와 쓰레기 더미가 이리로 흘러 들어오는 것처럼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상했던 악취는 없었습니다. 너무나 뜨거운 볕에 모든 것이 다 말라 비틀어져 냄새는 거의 안 났습니다.

숙소
숙소는 수출 자유 공단 안에 LA의 한국인 사업가가 세우신 건물에 머물렀는데 유엔군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어 안전했습니다. 아이티는 수도와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사람들이 도로 위로 흐르는 구정물에 몸을 닦고 뭔가를 씻는 모습도 간혹 보이고 밤에는 자체 발전을 한 몇몇의 집 외에는 완전한 어둠입니다. 그러나 공단 안에는 자체 발전기로 전기와 수도 시설이 되어있어 에어컨도 시원하게 나오고 화장실이나 샤워 시설도 잘 갖춰져 있고 침대마다 모기장이 쳐져 있습니다.

레오간 까사인 학교
가장 지진 피해가 많았던 레오간이란 곳에 선교사님께서 세우신 난민촌과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학교에 와야 하루 한끼 먹는다는 아이들의 눈빛에 간절함인지 체념인지 모를 난감한 깊이가 있습니다. 하루 한끼 먹는 천사처럼 맑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들의 허기를 달래줄 수 있다면 뭐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속으로 무척 안쓰러웠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반응을 곁눈질해 보니 아이들을 보는 눈빛에 깊이가 있고 눈동자가 젖어있습니다. 누구 하나 더럽다고 인상을 쓰거나 하지 않고 해맑게 웃으며 아이들을 껴안아주는 모습과,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착하고 진실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무척 대견하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콩 물을 끼얹은 밥을 쏟고 울어버리는 아이의 밥을 손으로 주어 담으며 아이들의 얼굴에 참회의 기색이 서렸습니다. 음료수 내기 축구 경기에 지고도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아이들은 이기고 싶은 마음보다 사랑하고 캐어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가난이 아이들 안에 잠자고 있던 사랑을 깨웠고 그들의 연약함이 아이들 안에 돌보는 마음을 깨웠습니다. 생각에 사랑 한 방울을 섞으면 마음은 온통 사랑으로 물들고 생각에 미움 한 방울을 섞으면 마음은 온통 증오의 도가니가 됩니다. 마음에 미련 한 방울이 떨어지면 생각이 온통 미련해지고 생각에 작은 지혜가 들어가면 마음은 총명으로 반짝입니다.

시내 땅 밟기와 십 만 명의 묘지티브이에서 여러 번 보았던 대통령 궁과 포르토 프랭스 대성당과 지진이 일어났던 여러 지역을 돌면서 기도 한 후 십만 명이 한 구덩이에 묻힌 곳에서 선교사님의 권유로 성찬식을 하고 유언장을 썼습니다. 세계의 언론이 보도한 바, 삼 십 만 명의 시체들이 길거리에 뒹굴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중, 사람들은 여진에 대한 공포로 몇 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잠을 잤다는 아비규환의 상황과 사람들의 눈물도 애통도 국가적인 절망도 지금은 모두 땅속에 묻혀 고요하기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며 현재의 삶을 바로 잡았습니다.

카리브해의 바닷가는 아름다웠습니다. 신비스럽도록 아름다운 바다 물결이 쓰레기 더미 저 너머에 넘실대고 있고 사람들은 이 바다와 아무 상관 없는 듯 살아갑니다. 리조트로 개발되어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이웃 나라 도미니카와는 달리 국제 자본주의가 외면한 이 땅에 대한 말 할 수 없는 긍휼과 애착이 생깁니다.

고아원 방문
처음에는 인형처럼 텅 빈 감정으로 그냥만 지켜보던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기도하는 시간에는 아이티의 아이들의 앞날을 하나님께 부탁 드리면서 북미의 아이들이 마음을 다해 오래도록 기도했습니다.

아이티 교회 주일 예배 사역과 공연 예술 캠프주일에는 현지의 장관들이나 유력자들이 출석한다는, 그 땅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온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열창하는 찬양과 심령의 가난과 간절함으로 드리는 무척 감동스러운 예배에 참석하여 우리 아이들도 워십댄스와 드라마를 했습니다. 청소년 아이들이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드라마 하는 모습을 보고 현지인들이 무척 은혜를 받았고 그 나라의 대통령 변호사가 친히 전화를 해서 아이들의 사역에 감동을 받았다고 감사를 전해왔습니다. 두 번째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과 오후에 현지 교회의 아이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고 공연 캠프가 끝난 후에는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노방전도를 하고 금요일 오후에는 그 교회에서 다 함께 공연을 했습니다.


니꼬 형제현재 총리가 된 전 외무부 장관의 비서로서 현지인 변호사이며 한국의 성균관 대학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어 한국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니꼬 형제에게서 지진 당시의 상황과 생과 사의 기구한 엇갈림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차베스가 아이티의 지진이 인공 지진이라고 했다는 말도 들었지만 누구의 소행이든,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참 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마음에 계속 되던 질문, 그 땅의 사람들 하나하나 이름을 알게 되고, 땀이 축축한 손을 잡으면서 더 강렬해졌던 질문 “왜?”에 대한 대답을 그 형제의 입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는 나사로의 부활에 대해 나누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소망이 완전히 죽게 하셨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만 일으킬 수 있음을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때 이 땅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는 부활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지진이 재앙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에겐 더 큰 은혜에 대한 약속이라 하는 말에 무조건 수긍하고 싶고 그대로 되도록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감사패
아이티의 사람들은 다른 어느 빈국의 사람들보다 가난해도 염치가 있었습니다. 알량한 도움을 가지고 들어와 거들먹거리는 외국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우리를 경계하던 사람들이, 땀에 흠뻑 젖어 헐떡거리면서도 뜨겁고 먼지가 흩날리는 길거리에서 찬양하고 드라마하며 복음을 전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감동하여 눈빛에서 경계심이 풀리고 진정으로 우리 아이들을 알고 싶어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 땅을 떠나온 이후 현지 교회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감사패를 보내왔습니다. 어려운 지역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선교사님의 사역에 누만 끼치지 않고 와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선교사님께서는 이제껏 들어왔던 팀들 중에 넘버 1 팀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셔서 모두에게 무척 격려가 되었습니다.

아이티에 오기 전 올란도 플로리다에서 최고의 휴가를 즐기고 온 한 아이의 플로리다는 너무 재미있었지만 밤이 되면 공허했고 일주일이 지나니 이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매일 밤 뿌듯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잠들고 돌아갈 시간이 되니 너무나 아쉽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역시 의미로 사는 존재임을 확인했습니다. 아이티의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흙먼지를 쓰고 다니던 아이들이 뉴욕에 도착해서 비단 길처럼 부드러운 길을 달리면서도, 타임스퀘어의 현란한 밤 도시를 걸으면서도 아이들은 아이티를 이야기하며 그리워했습니다. 오직 물질에만 반응하며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들만 가치 있게 여기는 것 같던 아이들을 움직이는 가치도 역시 사랑이며 헌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아이티에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처럼 소망하고 갈망하며 꿈을 꾸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만났습니다. 여행이 끝나기만 기다리며 다시는 안 가겠다고 할 줄 알았던 아이들이 너무 아쉬워하며 내년에도 꼭 다시 오겠다고 하는 말에 무척 놀랐고 힘든 대가를 치르고 이 땅에 왔던 보람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아브라함 이야기


 

하갈의 체험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 창 16:7-16



하나님의 약속이 지연되고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 대신 그럴듯해 보이는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하갈을 통해 후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처음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평화롭던 가정에 원망과 다툼이 생기더니 결국 임신한 하갈은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집트로 도망가는 하갈사래의 학대를 피해 사막 (광야)으로 도망친 하갈은 수르 (Shur)로 가는 길 옆에 있는 샘 (우물)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수르’ (Shur)는 시내 (Sinai)산 북서쪽에 있는 이집트 바로 옆 광야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지금 하갈이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가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즉, 하갈은 자신이 원래 나왔던 이집트로 도망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갈을 만난 하나님의 천사이집트로 가던 하갈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는 그녀에게 질문을 합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8절 상). 처음 보는 낯선 이가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자신의 여주인의 이름과 신분을 말할 때, 하갈은 크게 놀랬고 이 낯선 사람이 신적인 존재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하갈에게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봅니다. 이미 하갈의 이름은 물론 그녀의 신분까지 알고 있던 천사가 정말 몰라서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갈로 하여금 지금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던 가인 (창 4:9)과는 달리 그녀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8절 하). 그러자 그 천사는 하갈에게 명령을 합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9절). 이것은 하갈이 여전히 사래의 종이기 때문에 돌아가라는 냉혹하고 확고한 명령입니다. 특히 여기에 쓰인 ‘복종하라’는 말은 히브리어 동사 ‘아나’ (ʿānā)의 ‘히트파엘’ (Hitpael)형으로 그 뜻은 ‘시달리다’ 혹은 ‘비하하다’ 입니다. 이것은 하갈이 다시 사래에게로 돌아가 자신을 낮추고 사래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와 임신한 아이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갈에게 약속을 준 하나님의 천사
하갈에게 다시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 명령한 천사는 이번에는 그녀에게 약속을 줍니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0절). 이것은 아브람에게 하셨던 약속들 (창 12:2; 13:16; 15:5)과 똑같은 것으로 하갈의 자손이 아브람의 약속에 포함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그 천사는 하갈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이스마엘이라고 이름 지으라고 말합니다: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1절). 여기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직역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고통과 압제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당하는 하갈에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하갈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초점은 여전히 아브람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12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한 예언오늘 본문 16:10-11절의 말씀만을 보면, 이 구절들은 단순히 이스마엘에 대한 약속이요, 축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12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저주의 말씀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이것은 이스마엘의 거만하고 반항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말씀이지 축복의 말씀도 아니요 저주의 말씀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마엘의 미래에 대해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즉, 비록 인간적인 대안의 결과로 하갈을 통해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이 태어나지만,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육신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롬 9:8).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을 하갈에게 알려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이 모든 것이 하갈을 통해 아브람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듣고 다시 한 번 믿음에 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갈이 체험한 하나님
이집트로 도망가던 길에 자신을 만나 주시고 구해주신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3절). 즉, 하갈은 하나님을 ‘엘 로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보시는 하나님’ 혹은 ‘보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갈은 하나님을 만났던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부릅니다: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4절). ‘브에르 라헤이 로이’는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 (The well of the living who sees me) 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갈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보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구원의 하나님으로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하갈의 체험 역시 12절의 말씀과 같이 아브람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해답이 15절에 나옵니다.

이스마엘이라 이름 지은 아브함
도망갔던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사래에게로 돌아와 모든 굴욕을 참아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낳습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그런데 아브람은 그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천사가 알려준대로 ‘이스마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이것은 다시 돌아온 하갈이 그 동안 광야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아브람에게 이야기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브람은 이스마엘이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될 것이지만, 그는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육신의 자녀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갈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도 보고 계시며 보살피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인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대안을 택한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지연되자 급한 마음에 인간적인 대안을 택했고, 그로 인해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아브람은 이것을 단순한 여자들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갈의 체험을 통해서, 이스마엘에 대해서, 약속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깊이 깨닫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처럼 다른 사람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기울여, 깊은 깨달음과 각성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