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9일 금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33 >


 

0152. “얻을-, 주신-, 받은-”구원 (히브리서)

구원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구원<얻을>후사”(히1:14)라는 말씀에서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져주시는 것을 <얻을> 위치에 있는 것이다.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뜻이다. “볼 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히2:13)는 말씀에서도 우리를 자녀로 삼기위하여 구원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얻은 이들을 “부름<받은> 이들”(히9:15)로 묘사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히4:16)이며 이 “복”(히6:14)을 <받은> 자들은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의 근원은 우리의 자아(自我)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 사이에는 중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으며 “예수의 피를 힘입어…”만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해결책이며 이는 ‘히브리서’의 대 주제이다.

0153. 구제불능의 괴물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인간은 구제불능에다 요란하기 그지없는 괴물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 중 인간보다 요란하고 요상한 괴물이 또 있을 것인가?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괴물 중에 괴물이다. 한없이 배은망덕하기까지한데다 자기자신은 그래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괴물이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또예프스키(F. Dostoyevsky, 1821-81)의 인간정의다: “사람이 만약 멍청하지 않다면 지독히 배은망덕한 존재이다. 나는 사람이 배은망덕한 짐승이라고 하는 것이 최고의 정의라고 믿는다”. 밀톤(John Milton, 1608-74)은 “비열한 배은망덕”이라고 기술한다. 셰익스피어(W. Shakespeare, 1564-1616)은 “불어라 불어라 너 겨울바람아 그래도 너는 사람의 배은망덕만큼 쌀쌀하지는 않구나”(“As You Like It” 중에서)라고 노래한다.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Cicero, 106BC-43BC)는 인간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한 뒤에 내린 결론으로 “인간은 구제불능이다”라고 단언하였다. 프랑스의 수학자, 변증가였던 빠스깔(B. Pascal, 1623-62)은 가슴아픈 역설, 곧 하나님의 형상이면서도 동시에 죄로 인하여 철저하게 부패해진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인간이야말로 얼마나 괴물인가! 얼마나 희한하고 얼마나 기괴하며 얼마나 무질서하고 얼마나 모순되며 얼마나 비정상적인가! 만물의 재판관이자 연약한 지렁이요 진리의 보고이자 불확실과 오류의 시궁창이요 우주의 영광이자 쓰레기다!”

청교도 전도자 얼라인(Joseph Alleine, 1634-68)은 “오! 비참한 인간이여 죄가 너를 얼마나 괴물로 만들었는가! 하나님은 너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건만 죄는 너를 악마나 다름없게 만들었도다”라고 탄식하였다. 신학자이자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였던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45)는 인간의 죄가 일으킨 타락이 야만에 이르렀음을 예리하게 지적,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사람만이 참사람이다”라고 기술하였다. 죄와 연합된 인간의 사악함을 보고 경험하면서도 죄의 엄격한 실재성을 보지 못하는 인간지혜의 어리석음, 십자가는 이 근본적인 문제, 즉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죄인들의 죄책을 들어내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5:21).

자기주장의 추한 본성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자는 불쌍하기 그지없는 비참한 자로서 부끄러움을 자초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죽으심으로 이기신 십자가이다.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구원하시기위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율법의 저주 아래 노출되셔야만 하였다. 그리고 죄인인 육신의 모양을 하고 오셔서 죽으심으로 그 육체를 벗어버리셨다. “다 이루었다”고 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다. 십자가는 구원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최대의 승리사건이다. 부활은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승리의 선포보다 중요한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단순히 빈무덤이 아니라 ‘열려진’ 무덤을 선포하고 있다.

누구나 어두움의 시간이 되면 누워잔다. ‘죽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광명한 아침이 되면 모두 부시시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부활하는 연습이다. 루터는 봄에 돋아나는 새순을 보고 부활을 노래하였고, 기독교인이자 한 때 미항공우주국(NASA)의 책임자였던 브라운(Wernher von Braun, 1912-77)박사는 “과학은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증명하였다. 고로 영혼불멸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0154. 로마교황청의 죄(3)

이 세력은 늘 하나님의 백성을 살육해온 기독교 말살작전에 동원된 사단의 병기였다. 기독교는 유기적 조직체(organism)이지, 사회적 조직체(organization)가 아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인간의 몸(body)에다 비유하셨으며, 우리 몸은 기관(器官)이지 조직적 단체가 아니다. 기독교가 정치사회 조직의 탈을 쓸 때는 살인자의 손에 주어진 무기가 된다. 로마카톨릭종교는 그들의 종교적 율법을 무서운 무기로 만들었고, 1,70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기독교인을 처형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700여 년 동안 스페인의 종교재판에 의해 처형된 사람의 수는 6천 8백만에 달한다. “하나님의 개들”(Domini Cane)로 알려졌던 도미니칸 파의 종교재판의 악랄한 고문에서 살아남은 자는 전무하였다. 3일간의 고문 후에는 반드시 죽이는 것이 “트레스 디아스”(Tres Dias)이다. 16세기 예수회의 문헌에도 언급되어있는 ‘3일’이다. 스페인 군대를 앞세운 로마카톨릭선교사들은 마야, 잉카 문명을 초토화시켰다. 그들은 마야 문명을 훼파한 자리에서 모은 돌로 로마카톨릭성당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평화회담을 미끼로 잉카 문명의 무장비 인디안 들을 산에서 불러내어 5천여명을 살육하고 스페인 군대는 인디안들의 금패물을 모두 탈취하였다. 이 기습에서 스페인 군은 한 명도 죽지 않았고, 그때 탈취한 금패물들은 오늘날 스페인, 로마교황청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유럽을 돌며 전시회까지 가졌다.

로마교황청에 의해 고용된 어용 사가(史家)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잉카』 문명의 신비”운운이라고 기록, 이 지적(知的)기만은 아이들의 역사교과서에도 버젓이 나타나고 있다. 잉카의 마지막 지도자 아타왈파(Atawallpa)를 강제로 천주교 영세를 받게 한 후 곧 그 자리에서 처형함으로써 잉카문명은 스페인의 천주교침략자들에 의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1656년 브라질 중부지대로 들어간 예수회 선교사『안토니오 비이라』(Antonio Vieiray)의 일기-“우리들의…원래 목적은 인디안들을 사로잡아 그 지방의 풍부한 자원인 그들의 금맥을 찾아내어 ‘홍금(紅金, Red Gold)’을 가져오는 것이었다”-는 천주교회의 행위와 인디언들의 노예화, 식민지의 시조가 되었음을 들려주고 있다.

0155. 로마교황청의 죄(4)

러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가(史家) 『로이 메드베데브』(Roy Medvedev)교수는 그의 저서 ‘역사가 심판하게 하라’(‘Let History Judge’, Columbia Univ., 1989)에서, 1610년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이 오늘의 파라과이 국에 세우고, 150여년 동안『구아라니』인디안의 자유를 착취하고 군대식 통치를 한 구아라니 공화국(Guarani Republic)을 사회공산주의의 시초의 하나로 보고 있으며, 제수이트들은 이 공화국을 두고 ‘기독공산공화국’(Christian Communist Republic)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16-17세기 일본에 들어간 로마교황청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행실은 일본인의 눈에도 스페인 카톨릭 왕실의 정치세력 앞잡이로 판단되어 모두 처형되었다고 역사가 토인비는 그의『역사의 연구』에 기록하였다.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지구의 1/4을 손아귀에 넣었고, 아시아의 로마카톨릭국으로 알려진 필리핀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는 기독교인 학살로 악명높은 “흡혈귀(메리)”여왕의 남편이다. 스페인 국왕의 정식칭호는 “카톨릭 폐하!”라고 부를 만큼 로마카톨릭교는 무력적인 칼의 포교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아르마다』(Armada)는 영국정벌에 나섰으나 하나님께서 혹독한 태풍으로 저들을 흩으심으로 크게 대패, 또는 도주하였다. 『아르마다』난파선에서 발견된『말타』십자가는 로마교황청의 침략야욕이 실행된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어김없이 발견되는 십자가이다. 실로 “온갖 가증한 것의 어미”(계17-18장) 로마교황청이 5대양 6대주에서 저질러온 모든 죄악들을 다 나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럽이나 빈부의 차가 극도로 심한 중남미의 그 사치스런 로마카톨릭 성당은 면죄부판매나 노동력 착취 등의 피를 짜내어 건축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바론 드 뽀나』는 “로마카톨릭교회는 피 속에서 태어나, 피 속에서 뒹굴었고, 피 속에서 마셨고, 이 종교의 참 역사는 피로 쓰여져있다”고 기록하였고, 사가(史家)『렉키』(W.E.H. Lecky, 1838-1903)는 “인류역사이래로『로마』교회만큼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한 집단이 또 있을 것인가?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해 살해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완전한 파악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기독교회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7:13-14)는 분부의 말씀을 따라 살아온 성도들의 피의 역사의 기록이다. 인간의 눈에 실패자로 보였던 옛 선지자들처럼, 이들의 형상은 세상사람의 눈에는 정상이 아니었다. 유대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인 천하영광을 거절하시고, 빌라도의 세상권력 앞에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18:36)고 선언하신 주님의 기독교는 보혈의 십자가를 금은 보석의 십자가로 둔갑시키고 천하영광과 호흡을 같이 해 온 교권의 로마카톨릭교회와는 다른 것이었다. 거짓된 것이 구체화 되어가고 세상이 이를 옳게 여길 때, 우리는 거짓 선지자『발람』도 참된 예언을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민22-24장). 황량한 산골처녀같은『예루살렘』에 비하면『로마』는 종교, 전통, 위용을 자랑하는 얼마나 세련된 대 도시의 음녀인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로마』는 처음부터 살인자로, 우리 주님을 처형한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직적으로 죽여온 전통적인 도시이다. 그 후 온 유럽 및 식민지의 피(血)로 살쪄온『로마』, 이 세상에서『로마』보다 더 절묘한 우상의 소굴은 없다.

전능하신 주 성령
성결하게 하시고
나의 맘을 괴롭힌
죄를 멸해 줍소서

(찬 176 / 영화로신 주 성령 ②)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북한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은? (3)



통일운동을 하시는 분들 중에 북한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 안 해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북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생각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라구요. 아닙니다. 우리는 지극히 상대의 입장이 아닌 ‘주관적’으로 사고하고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하는데 익숙해져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엄청 잘해주는 것 같지만 돌아오는 답은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과 함께 동거동락 하셨습니다. 북한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 간접적으로 탈북민들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고 또 북한에 계시는 주민들도 어떻게 생각할지 늘 염두에 두고 기도하고 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오대원 목사님의 책 ‘두려움의 집에서 사랑의 집으로’(예수전도단)에 나오는 방법을 소개하고 나누기 원하는데요, 이는 ‘북한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을 더 잘 알기 위함입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연애할 때와 결혼하여 같이 살 때 상대를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는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잘 경험하신 것처럼, 사람에 대한 생각도 접촉점과 만남이 없다면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을 알려면 그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신 분들은 바로 해외에 계시는 디아스포라 코리안 여러분들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얼마나 좋은 기회가 눈앞에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 해외에 계시는 디아스포라 코리안 여러분들은 반드시 북한으로 들어가셔야 하고 단기로 시작하여 장기로 북한을 돕고 세우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셔야 합니다.

북한안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주민들과 만날 것인가?
우리 입장이 되어야 하셨기에 인간으로 오셨던 예수님! 오대원 목사님께서 쓰신 책의 내용에 우리 안으로 오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안으로 들어갈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 소개해주십니다. 아래의 내용은 책에 나오는 ‘안으로 들어가기’ 소주제 내용 중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당신께서 구원하러 오신 사람들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동반자로 선택하신 평범한 어부들과 똑 같은 음식을 드셨으며, 그들과 함께 주무시고,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갈릴리의 언덕을 걸어 다니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우셨으며, 그들과 함께 웃으셨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나누신 대화들을 그들과도 함께 나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개인적인 시간 외에는 삶의 어떤 부분도 그 동료들에게 감추지 않고 내놓으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가장 깊은 의미로서의 친구라고 부르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아멘. 그는 정열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온전히 사랑하셨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아멘”

오늘 우리가 이 책에 소개되어진 정확히 말하면 성경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해 배우는 것은 북한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을 알고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그들 밑으로 들어가려는 마음의 준비와 낮아짐의 자세임을 깨닫습니다. 할렐루야!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아브라함 이야기



계속되는 아브라함의 순종 / 창 22:7-10 (상)



오늘 본문의 말씀은 드디어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산을 오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두 가지 응답
7절을 보면, 산을 오르다가 이삭이 갑자기 아버지를 부릅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러자 아브라함은 대답을 합니다: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여기서 “내가 여기 있노라”라는 아브라함의 대답은 22장에서 세 번 나옵니다 (1, 7, 11절). 두 번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고 한 번은 이삭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긴장과 갈등 속의 아브라함그런데 이 응답은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위치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피조물의 위치에서 응답을 한 것입니다. 피조물의 위치는 순종해야 하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들인 이삭이 아버지를 불렀을 때, 아브라함은 피조물의 위치가 아닌 아버지의 위치, 즉 보호자의 위치에서 응답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긴장이 있습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을 해야 하지만, 아버지의 위치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민하고 번민했던 것입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이 때때로 어려운 것은 우리가 천국시민으로서 천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세상 속에서도 생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주일 성수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주일에 근무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믿지 않는 가족들 때문에 주일 성수를 하지 못할 때도 있기 때문에 갈등과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기도, 헌신, 헌금 생활과 같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긴장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의 위치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위치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위치를 잊지 않았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긴장 속에 있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을 했는가를 살펴봄으로 믿음으로 승리하는 비결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바라본 아브라함 (8절)
아브라함은 아버지로서의 위치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위치를 먼저 생각했고, 그 결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 초점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8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삼일 동안의 여행을 하면서도, 그리고 산에 도착하여 산을 오르면서도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았고, 이삭의 질문을 받은 후에도 이삭이나 아버지로서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았고 두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정말 원하셨던 것은 바로 이러한 온전한 마음이지 인신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미가 6:6-8을 보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다른 것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에 계속…>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소싯적 증후군



소싯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반적 우리의 언어습관에서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소위 잘 나갔던 시절을 말할 때 ‘소싯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는 합니다.

이민사회에 와서 보니 ‘소싯적’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참 많이 계십니다. 아마도 이민사회에서 본인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가 한국에서 만큼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때문에 늘 ‘소싯적’을 잊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본인을 어필하기 위해 늘 과거의 일을 끄집어 내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저는 이것을 ‘소싯적 증후군’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소싯적 증후군’은 과거지향적 사고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자녀교육 등을 위해 새로운 삶의 여정을 택하여 이민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지만 우리말이 통하지 않고, 한국적 사고가 통하지 않는 낯선 이민사회에서 명확한 사회적 자리매김을 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의 나름대로 차지하고, 누리고 있었던 것들(직위, 급여, 문화 등)에 대한 향수가 그 정도를 넘어 본인의 현재를 정의하고, 스스로 자존적 만족을 누리는 잣대로 사용되고 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주어진 현실이 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이랬었는데...’라는 소싯적 증후군은 늘 우리의 비전과 사명이 차지하고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더우기 신앙의 사람들이라면, 어찌하다보니 우연히 캐나다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부르심의 소명’ 정도는 가지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저도 처음 이민교회에서 사역하기 시작할 때, ‘소싯적 증후군’에 빠져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소위 대형교회에서 수 년을 사역했던 경험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성도들에게서 보여진 ‘내가 한국에서 어디 근무했을 때...’라는 과거지향적이고, 과시적인 언어 습관이 제게도 동일하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목사님들 앞에서 저를 드러내고 싶을 때, 늘 제게도 ‘한국에서 사역할 때...’라는 말이 앞서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제 자신을 보니, ‘소싯적’에 제 발목을 스스로 묶고는 정작 중요한 현실의 비전과 사명에 소홀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더군요.

소싯적 증후군은 우리의 이민생활을 황폐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현재가 과거를 통해 주어진 결과물이라면, 미래는 현재를 통해 주어지는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싯적 증후군에서 벗어나, 바로 지금 그리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3-14)

[문경돈 목사 / 나무십자가한인교회 / 778-772-4738]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7 장 내적 치유과정의 주제들



“목사님, 기적이 일어났어요. 우리 부부가 어제 이야기하느라고 잠을 못 잤어요”



미국의 남부 대 도시에서 닷새 동안 아홉 번의 집회를 마감하는 밤에 그 집회를 주관한 사모가 이렇게 말하면서 서운해 한다. “이제 목사님 내외가 떠나시면 이 도시가 텅 빈 것 같을텐데 어떡하지요...” 그 말을 들으면서 우리 마음에도 아려오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돌아와서도 그 사모를 많이 생각했다.
매우 어려운 목회 환경이었다. 식당 사업을 열심히 하던 중에 부부가 뜨겁게 주님을 만났고 온갖 놀라운 체험을 겪으며 목회자가 되었다. 주님의 은혜로 교회도 훌륭하게 지었는데 몇 년 사이에 모든 일이 엉켜버린 느낌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부부 사이에 대화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남편이 아내와 대화를 거부했다. 네 명의 아이들 때문에라도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런 아내의 대화 요청에 남편은 늘 묵묵부답이다. 아내에게 스트레스가 쌓여 심각한 위장병이 생길 정도였다.
그 사모가 우리 치유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멀리서 긴급하게 전화를 해왔다. “목사님, 다음 주에 오실 수 있어요? 더 이상 이 남편과 못살겠어요...” 상황의 긴급함을 깨닫고 무리해서 3주 후에 찾아갔고 닷새 동안 아침 저녁으로 세미나를 인도했다. 사흘이 지난 아침에 사모가 만면에 웃음을 띄고 달려온다. “목사님, 기적이 일어났어요. 우리 부부가 어제 이야기하느라고 잠을 못 잤어요. 하나님은 살아 계세요~~” 굳게 닫혀있던 남편의 마음이 열린 것이다. 그날부터 밤 집회가 끝나고 두 부부와 두 시간씩 추가 만남을 가졌다. 빠르게 회복이 되어갔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사랑이 흐른다.

사모에게 특히 상처가 많았다. 어머니 태중에 이 셋째 딸이 생겼는데 그 사실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입덧을 시작한 엄마의 슬픔이 극심했다. 딸만 둘인 엄마는 이 아이가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딸이 나왔고 그 딸을 아들처럼 길렀다. 어려서부터 남자 옷을 입혔고 태권도를 가르쳤다. 그리고 온갖 막일을 하며 세 딸을 길렀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서는 밤마다 입을 틀어막고 통곡하다가 쓰러져 자곤 하는 삶을 살았다. 이 딸은 자신이 엄마의 보호자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어느 누구든 엄마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있으면 눈에 불을 켜고 덤비곤 했다.
이 딸은 엄마와 말을 하고 싶어서 늘 밤늦게 들어오는 엄마를 기다렸다. 그러나 엄마는 너무 피곤했다. 엄마의 다리를 주무르며 무언가 한두 마디라도 해보려 하면 엄마는 벌써 잠에 떨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이 사모는 여자로서의 삶, 또 어린 아이로서의 삶을 전혀 살아보지 못한 체로 아내가 되고 아이를 계속해서 낳았다. 그리고 그녀의 속사람은 아주 강한 남자였다. 그 종합적인 결과로 매우 혼란된 삶을 살아 왔고 마음이 너무 많이 뒤틀리고 상해 있었다. 자신의 말로 “이제는 제가 만신창이가 되었어요” 라고 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멋지고 능력있는 여인이다. 담대하고, 씩씩하고, 100 명 정도는 혼자서 해 먹이는 사람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려운 일의 뒷수습을 다 하고, 지역 사회의 모임도 잘 이끌고 나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200점짜리 사역자고 아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과 가정은 병이 들어 있었다. 사 남매의 어머니이지만 자녀들을 어떻게 길러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바쁘게 일만 하면서 자기 방식으로 길렀더니 아이들도 모두 병이 들어버렸다. 목회 길로 들어서서도 아이들의 아픔과 고통은 나아지질 않고 있었다. 또 그 중간에 아들 하나를 어려서 잃기도 했는데 그 아픔도 치유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믿음을 건축하다 - 2.믿음의 역사



교회가 건축이 진행되면서 몇 번 경찰이 불시에 현장에 들이닥쳤다. 외국인인 내가 건축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올 때는 현장에 있지 않거나, 마주쳐도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현장 인부들과 똑같이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소위 ‘빈자들을 위한 겨울 날씨’, 따뜻한 겨울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이상 기후라고 말했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개입하여 일하고 계심을 믿었다. 공사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순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천장과 지붕을 덮으면 내부 공사는 어느 정도 날씨와 상관없이 진행할 수 있는 상황까지 진척되었다. 그러나 큰 공사중의 하나인 천장 단열공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엔 겨울이면 영하 25도까지 떨어지고, 여름이면 영상 50도를 오르내리는 전형적인 사막기후였다. 그래서 단열공사는 벽 위에 여러 개 트러스트를 올리고, 판자를 깔고 그 위에 엮은 갈대를 올려 그 위에 짚을 섞은 흙 반죽을 올린다. 거의 그 두께가 45-60센티미터나 된다. 이 작업은 가장 고달픈 작업이었다. 아무리 따뜻한 겨울이라 하지만 바람이 부는 지붕으로 흙 반죽을 올려 다지는 일은 가혹하리 만큼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시린 손을 호호 불면서도 형제들은 힘을 다해 헌신해 주었다.

그러나 공사는 지붕재료롤 찾지 못해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건축 시작부터 지붕을 덮을 함석재료를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다급해진 볼료자가 이 도시 저 도시를 뛰어다녔지만 번번히 헛걸음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참다 못한 내가 나서서 함께 다른 몇 도시를 찾아 다니다가 300키로 떨어진 도시에서 지붕재료를 보았다는 사람을 만났다. 볼료자와 나는 이른 아침 차를 몰고 나셨다. 길을 나서는데 갑자기 날씨가 춥고 바람이 거셌다. 도시를 벗어나자 거칠 것 없고 광야에 북쪽으로부터 시커먼 검은 구름이 떠있고 점점 바람은 거세졌다. 눈보라가 몰려오고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급해지면서 불안했다. 지붕을 제때 덮지 못하면 천장에 단열재로 올려 놓은 그 많은 흙이 눈비에 맞아 흘러내리기 시작하여 공사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 때문이었다. 지붕을 덮을 때까지 만이라도 눈비가 내리 않아야 했다. 지금까지는 은혜로, 용케도 겨울 공사를 잘 진행해 왔는데 마지막 시점에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같은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인도로 지붕재료를 가진 집에 도착하였다. 대접하는 차는 안중에도 없이 허겁지겁 흥정을 하고 값을 치르고는 화물차를 구해 실었다. 오후, 돌아는 사막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도시 위의 시커먼 먹구름이 계속 내려 오는 것을 보면서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입은 말라가는데 외마디 기도소리가 절로 나왔다.
“주님, 눈이 내리지 않고, 하루, 이틀만 주시면 지붕 얻으면 급한 불을 끄는데. 저 구름들 좀 걷어주세요.”
그러나 무심하게도 달리는 차에는 서서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참담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했다는 확신이 이제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 올 것이라는 예견을 했어야 하고, 또한 피해야 했었다는 후회와 무모했다는 정죄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볼료자와 트럭운전사를 재촉해 속력을 더 냈다.

눈을 감고 한참을 기도하다가 눈을 뜨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막 끝 우리 도시 위에 머물던 검은 구름이 남쪽으로 내려가더니 하늘이 조금씩 열리더니 강한 태양 빛이 비치고 있었다.
“볼료자, 저것 좀 봐요. 먹구름이 남쪽 투르크메니스탄 쪽으로 내려가고 있어요. 누쿠스에는 해가 비치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눈시울이 붉어지기 지기 시작했다. 공사현장에 가까이 오자 하늘이 활짝 개이고 있었다. 교회에 도착하자 급히 차에서 내려 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놀랍게도 많은 성도들이 벽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집에 있던 성도들이 먹구름이 뜨고, 눈이 내리려 하자 지붕단열공사 중인 교회로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는 공사를 하던 형제들과 함께 온 성도들이 눈보라가 물러 가도록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날 30키로 미터 떨어진 투르크메니스탄 북경지역에는 30센터 미터 가까운 폭설이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건축현장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마치 출애굽을 앞 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고센’ 땅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이심과 같이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던 것이다. 온 성도들은 주님의 역사를 기뻐했다.

교회의 리더쉽 중 한 분인 ‘안나 키프로브나’가 나에게 말했다.
“목사님이 안 계시는 동안 김 선생님이 전화를 해서 목사님을 찾으셨어요. 전화 통화 중에 무슨 교회가 겨울에 성도들에게 눈 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시키며, 겨울 공사를 강행하지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겨울에 눈비가 내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자연의 섭리를 거슬리면서 까지 무모하게 공사를 진행하느냐고요. 그리고는 안나 할머니, 지금 나가 하늘을 보세요. 눈이 오나 안 오나! 그래서 제가 집집마다 전화해서 성도들 다 모아서 현장에서 벽을 붙들고 기도했어요. 믿음으로 순종한 일에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해달라고요.”
김 선생님은 평신도 사역자로 우리 지역에 있는 대학에 영어를 가르치시던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었다. 설명을 마친 안나 할머니는 전화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김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눈이 왔나요, 안 왔나요? 선생님, 믿음 좀 가지세요.”

이틀 만에 지붕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비가 내렸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필객의 붓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이 땅에 주소를 두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매달 처리할 일을 날짜 별로 꼼꼼히 챙겨야만 하는데 내가 감각하고 있는 속도보다 한 달이 훨씬 더 빠르게 다가와 깜짝 놀라곤 합니다. 특히 이사를 하고 나서 인터넷, 전화 연결, 주소 바꾸는 일들까지 바로 바로 일처리가 안되어 한달 이상을 마비 상태로 지내면서 이 땅에서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름에 있을 단기 선교 여행 비행 티켙을 예약하는 문제로 인터넷과 몇 일을 씨름하며 여러 곳을 경유하는 비행 일정을 겨우 예약을 마치고는 조정이 필요해 바로 전화를 했는데, 나의 다급한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기계가 정한 속도에 맞춰, 친절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강압적으로 지시하는 기계의 음성이 하라는대로 몇 개의 번호를 누르며 확인 절차를 마치고,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음악(?)을 들으며 마냥 기다리다가 겨우 통화가 된 직원에게서 “기계가 처리한 일이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아예 위약금을 물고 계약을 파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한다”는 나의 모든 질문에 똑 같은 말만 기계적인 톤으로 반복하는 답을 듣고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어 어이없는 숨만 허푸허푸 뱉어내다가 전화를 끊습니다.

사람이 처리를 한다면 간단히 이름만 바꾸면 될 일을 만만치 않은 추가 비용을 내면서까지 그 복잡한 절차를 다시 하라는 상식 밖의 판결에 굴복하며 원통한 마음이 듭니다. 사람의 사정보다 원칙이나 법이 우선인 고지식한 이 나라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당할때마다 마음이 어려워지고 다소 참을성없고 막무가내인 경우도 있지만 말이 통하고 인정이 통하는 한국이 그리워집니다. 앞으로는 모든 것을 기계를 상대하며 할 판인데 인간이 창조한 기계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더 굴욕을 당하게 될지 한심한 마음이 들고, 사람으로서의 교감을 묵살하고 너무나 삭막하고 건조하게 일처리를 하는 북미의 기계적인 시스템에 정이 떨어집니다.

집 안에서 전화로 씨름을 하는동안 차 청소를 하겠다고 바깥으로 나간 아이들의 소리가 햇살에 섞여 들리길래 발코니로 나서니 햇솜처럼 포근한 햇살이 만물 위에 나른하게 내려 앉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고난주간이지만 봄 햇살이 너무도 화창해서 죽음보다는 생명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온 땅의 모든 만물들이 새롭고 영광스러운 생명을 입습니다.
온 우주뿐 아니라 우주의 우주를 통치하시는 광대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주의 먼지로도 보이지 않을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하나 뿐인 아들을 죽이셨다는, 도무지 믿기 힘든 사실이 믿어지는 은혜가 오늘도 산자의 땅에서 아둥바둥 살아가는 나를 강하게 붙들어줍니다.
뜰 한켠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자전거를 타며 손을 흔들던 아이들이 이제는 건장한 모습들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내 눈에는 살이 포동포동하고 동심이 충만한 아이들로만 보이고, 뱃속 어딘가에서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휘몰아칩니다. 이렇게 사랑하고 돌보면서 순박하게 살아 가는 일이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서 꽃이 활짝 열리는 것 같은 이 기쁨과 감격은 휴양지에서 느끼는 붕뜨고 끝이 허전한 것과는 달리 너무나 익숙하고 정감이 넘치는, 내가 발딛고 선 현실을 너무도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는 죽음의 뉴스들이 들려옵니다. 스촨성에서 오리가 떼죽음을 당하고 게와 새우와 생선과 고래들이 바다나 호수에서 떼죽음을 당하고 상하이 강에서 돼지의 사체들이 건져 올려지는 등의 뉴스를 들으며 바다 생물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는 계시록의 말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단을 숭배하는 자들이 인간의 식량을 없애려고 혈안이 되어있다는 말도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대규모의 시위가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아직도 유럽의 인간정신이 살아있음에 반가운 마음이 들고 죽음의 더미속에서 생명의 외침을 들은 것만큼이나 감동이 됩니다. 전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어수선하고 세계 인류의 안보가 핵 전쟁의 위협 앞에 놓인 위급한 때에, 뜬금없이 세계의 정상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려고 난리를 치는 상황을 보며 소돔땅의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온 인류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의식하며 흐르고 있는 너무나도 엄연한 사실앞에서도, 이 시대에 복음이 어느 스포츠 스타가 골 하나 넣고 어느 연예인이 무슨 옷을 입었다고 열광하는 무리들에게 조롱 받고 외면당하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한다는 사도 바울의 참담한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 잘 알겠습니다.

햇살 속에 웃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느끼며, 자녀는 부모에게 너무나 오묘한 존재임을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바로 이런 존재라는 사실이 너무나 엄청나서 믿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기에 천 만 번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 고귀한 사랑과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온 세상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나의 주변에서나마 그 사랑의 죽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일에 나의 매일의 삶을 바치고 싶다는 열정을 빚어 내 영혼의 성소에 더운 떡을 올립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교회음악 Plus







찬양대의 교회생활은



찬양대의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성도들과 관계를 원만히 가지며, 신앙적으로도 덕을 세우며 개개인이 특별하지는 않아도 지도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찬양대 안에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여 모든 일을 함께 나누며 감당해야 한다.

찬양대의 교회 안에서의 위치는 분명 교회 안에서의 회중의 일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찬양대는 특권의식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 특히 전도회 등에서 다른 회원들과 나누어야 할 때 친교나 봉사 할 때는 무엇인가 다르게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찬양대는 교회 안에서 독립단체가 아니다. 누구보다 더 겸손한 자세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교회 내에서 임해야 한다.

찬양대는 세상의 모임과 구별 되어야 한다. 혹 세상에서 다하지 못한 일과 충족되지 못한 일들을 슬며시 교회에서 찬양대를 통하여 채우려고 하는 일들을 보게 되는데 이런 일들은 철저하게 세상사람들로부터 구별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성도들과 하모니를 이루고 교회의 직분자들과 지도자들과 목회자들과의 하모니를 이루어야 한다. 찬양대는 주님을 사랑하며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성도와 이웃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므로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고 교회에 덕을 세워 모든 성도성도부터 사랑 받고 함께하며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한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