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교역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재단 생겼다



교역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재단 생겼다


Joseph Chung Scholarship



교역자(목회자 및 선교사)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장학재단이 생겼다.

에미나타 그룹(회장 정문현 장로)은 지난 9월 예기치 않은 사고로 하나님 품에 안긴 아들 고 조셉 정 형제(1980~2012)의 이름으로 매년 약 $60,000 정도를 출연, 20여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에미나타 그룹은 그 동안 Trinity Western University, Regent College, Pepperdine University, Briercrest University 등에 장학금을 제공해 왔는데 그 범위를 넓혀 올해부터는 그의 이름으로 도움이 필요한 지역 목회자와 선교사 자녀들을 돕고자하는 것이라며 비록 조셉 형제는 장애로 인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없었지만 본 장학금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 장학금은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네 번까지 받을 수 있으며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지역내 목회자와 선교사 자녀들이 그 대상으로, 학업 성적도 선발요인이긴하나 미래의 꿈과 이웃 섬김의 계획을 중요시하게 된다고 밝혔다.

고 조셉 정 형제는 생전에 여러 장애로 인해 고통을 당하였지만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늘 많은 이들을 돕기 좋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하고 있는 교역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번 장학금 지급은 고인의 뜻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학금 지원 신청서는 다음 웹사이트에서 다운 받을 수 있으며 기타 자세한 사항은 광고를 참조하거나 아래 문의처로 연락하면 된다.
http://jubileechapel.org/_chboard//bbs/board.php?bo_table=m1_6&wr_id=91818

 
 
 

국민의 행복 점수 61점



한국교회, 치유자로 나서야


한국기독교언론포럼, 국민 행복을 위한 심포지엄 열어




최근 대선후보들이 내놓는 말들이 있다. 바로 행복, 힐링 그리고 변화다. 그만큼 우리사회 많은 이들이 행복을 찾길 원하고, 치료 받길 원하며 부패한 세상이 변화되길 바란다는 반증이다.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사장: 손인웅 목사)은 '국민의 행복과 힐링을 위한 우리 사회의 프레임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지난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제2회 열린토론마당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날 심포지엄은 지난 10월 17일 부터 22일까지 (주)글로벌리서치가 조사한 '국민의 행복/힐링 관련 전국민 여론조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이날 발제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부분의 학자들로 각 분야에서 바라보는 행복에 대해 전문가의 시각으로 주장에 나섰다.

발제에는 서울대 이정전 명예교수가 '새로운 시대에 국민이 바라는 행복', 숭실대 김선욱 교수가 '국민 행복이 정치 프레임은 무엇인가?', 감신대 이원규 교수가 '병든 사회, 상처입은 영혼, 치유하는 교회'를 주제로 각각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이날 손인웅 목사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안고 시작한 기독교언론포럼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는데서 해답을 찾아가려고 한다”며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쉽게 오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찾아야 한다. 하지만 물질적 문명에서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곤란하다. 기독교가 이런 부분에서 신앙적으로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발제자들은 국민들이 행복해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비판과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대안들로 시간을 채워갔다.

서울대 이정전 명예교수는 “소득수준이 높다고 해서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먹혀들어간다. 그 이유는 빈부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앞으로 높은 소득수준만으로 행복하지 못한 시대가 올 것인데, 그런 사회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대비책에 대해 그는 “이 부분에 있어 우리는 두 가지 돌파구를 생각해 볼 수 있다”며 소득재분배를 좀 더 확대하고, 낙수효과를 저해하는 요인을 과감하게 제거하며, 계층 간 이동의 사다리를 대폭 확충할 것과 시장의 공정성을 높이고 사회정의를 확고하게 세울 것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정치적 시각으로 행복을 바라본 숭실대 김선욱 교수는 “대한민국 헌법에서 경제민주화를 언급한 부분은 결국 경제가 국민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대전제의 표현”이라며 “정치는 국민들에게 삶의 다양한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치는 하루 이틀에 걸쳐 형성될 수 없는 바람직한 문화가 이 땅에서 정착되기 위해 사회적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가치들을 발견하고 구현해야 한다”며 “그렇지 못할 경우 물질만능주의, 극단적 이기주의, 무한 경쟁사회 속에서 남을 짓누르고 승리하는 기쁨에 도취해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종교사회학자 감신대 이원규 교수는 “경제적 지표는 한국이 과거보다 훨씬 부유해졌고,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국민들의 느끼는 행복감과 삶의 만족도가 낮은 이유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상처받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 근원은 우리 사회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도덕성과 공동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런 부분에서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줘야하는데 한국 교회의 몸집이 커지고 부유해지며 힘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영성과 도덕성을 잃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한국 교회가 먼저 영성과 도덕성을 회복해 사회도 함께 회복시키는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의 모습“이라고 강조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5)



주님의 자녀에서 주님의 제자로



저물어가는 2012년의 끝자락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디아스포라 코리안으로 사시는 밴쿠버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화해자의 삶으로 담대하게 서시는 새로운 기름부으심과 삶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태국에 머물렀던 3개월이라는 시간 속에 만난 주님과의 첫 대면,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시작된 저의 신앙생활은 사역자로 사는 지금까지도 삶의 중심이 되어, 가는 곳마다 풀어내게 하십니다. 내 조국, 내 민족이라고 찾아 떠난 길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하여 정착하게 된 대한민국에서의 초기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태국에서 만난 하나님과의 첫 사귐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죄인에서 구속해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고 왔지만 저는 아기와 같은 수준에서, 또한 율법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살고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일날 아무리 눈물 흘리며 회개를 하더라도 다시 주일이 되면 회개하기를 반복하고 그런 삶이 잘못된 것을 알았지만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 주님께 항변하는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나 좀 어떻게 해보라고.... 또한 돈이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것은 사실이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겠노라고 다짐했고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인생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는 저의 인생을 한걸음씩 이끌어 가기 시작하셨고 일반대학교에 지원했던 저는 탈락의 쓴 맛을 보게 되고 전혀 계획에 없던 신학교로 인도되었습니다.

신학교로 들어가기 전, 나름 인생의 기로에 섰다고 비장한 각오로 찾았던 기도원에서 주님은 잠언 20장 24절의 말씀으로 저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이 말씀을 받고 저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 주님,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었군요. 내 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었군요. 내 길을 내가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께 있는 것이군요! 이제부터 알아서 인도해주십시오.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당신만을 의지합니다.”

이런 고백과 함께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신학교의 문을 들어서게 되고 같은 해 가을 강력한 부르심으로 신학교 한 학기를 마친 뒤 곧바로 제주도에 있는 열방대학(예수전도단)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훈련과정에서 태국에서의 만남과는 또 다른 차원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고민했던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과 나는 소통할 수 있는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주님의 자녀라는 몰랐던 진리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면서 내 인생의 전환점이 이 시기에 새롭게 형성되었습니다. 즉 ‘주님을 만나는 것 보다 더 큰 비전은 있을 수 없으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자체가 제게 비전’이 되는 영원토록 간직해야 할 소중한 가치를 얻은 것입니다. DTS훈련과정을 통해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날마다 깊어지게 되었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삶은 매일매일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어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가게 된 중보기도학교는 제게 있어서 교육의 장을 뛰어넘는 실제 현장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Plus






찬양은 주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초점을 맞추게 한다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
146부터 150편 까지는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시들은 시작과 끝을 ‘하나님을 찬양하라’로 되어있다.
이 시들은 우리에게
어디에서, 왜,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찬양은 우리의 마음의 문제들을 접어 두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두게 하며,
우리의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가까이 하도록 한다.

찬양은 각자의 경건생활과 함께 협력하는 예배로 인도한다.
찬양으로 모두가 함께하여 주를 바라보게 하며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한다.

찬양은 하나님의 인품을 알게 하고 감사하게 하며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게 하는 동기가 된다.

찬양은 우리의 눈의 방향과 높이를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도록 한다.

찬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바른 초점을 맞추게 한다.

찬양을 통해
세상으로 향하였던 우리의 시각이,
흐트러졌던, 구부러졌던 우리의 삶과 눈이,
바르고 또렷하게 하늘을 향하여
주님께만 맞추고 사는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시 146편 1-2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아멘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5 장 점점 씩씩해져가는 여성들 (Tomboys), 작아져가는 남성들


2. 톰보이 없는 세상, 재미없는 세상

앞에 말한 중국 여성들의 모습을 염두에 두면서 당신 주위를 살펴보라. 별안간에 많은 것들이 깨달아지리라.
“아 ~~ 우리 엄마가, 할머니가 그렇게 아들을 원해서 이렇게 됐구나......”
“아 ~~ 우리 장모님이 그렇게 아들을 원해서 ........”
“아 ~~ 그래서 우리 누나들이 그렇게 억세졌구나...”
“아 ~~ 그래서 우리 남동생이 여자같이 되었고 그렇게 씩씩한 아내를 만났구나.....”
“아 ~~ 그래서 우리 아빠가 엄마에게 꼼짝을 못하는구나.....”
“아 ~~ 그래서 내 여동생이 그렇게 극성이구나.....”
“아 ~~ 그래서 내가 아내에게 꼼짝을 못하는구나.....”
“아 ~~ 그래서 우리 딸이 그렇게 극성이구나.....”

톰보이는 생활력이 강하다. “함경도 또순이”나 “자갈치 아지매”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된다. 이들은 여자들보다는 남자들과 잘 어울려 지낸다. 회사에서도 남성 사원들, 상사들과 코드를 맞추어서 일을 잘 해낸다. 모든 조직에서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고 교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장님, (교회에서는 목사님,)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일 제가 해 놓을게요.” 라고 선선히 말하는 여성들이 거의 모두 여기에 속한다.

선교지에 가보면 톰보이의 비율이 몇 배로 높아진다. 편안한 조국을 떠나는 담대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데는 톰보이의 씩씩함이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리라. 독신으로 외진 곳에서 몇 년씩 혼자서 사역을 하기도 하고, 남편들을 리드하며 사역을 개척해 나가고 혼자서 교회 건물도 멋지게 짓고 있는 모습을 본다.

톰보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사람들

이들은 우리 민족을 일으켜 세운 어머니들이고 산업화를 함께 이룬 역군들이다. 톰보이가 끼지 않으면 목회도 안되고, 사업도 안되고, 사는 재미가 너무 없어진다. 남자와 여성스러운 여자들과의 다리가 되는 귀중한 사람들이다. 나의 매우 여성스러워 보이는 아내도 톰보이고 두 딸도 그렇다. 오늘도 사회에서 드러나게 활동하는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이 톰보이인 것을 본다. 연예인, 사업가, 직장의 중간 관리자, 정치가, 운동선수, 치어 리더, 수많은 리포터와 아나운서, 교회 찬양 인도자, 앞에 나서서 일을 추진하는 지도자, 선교사 ...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모두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 같은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이 심각한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영적 지도자들일수록 이 비밀을 꼭 알아야 한다. 톰보이들의 장점들을 활용할 뿐 아니라 그녀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도와줌으로써 참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아루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톰보이들은 자신이 여성이면서도 여성적인 것을 우습게 생각한다. 여성적인 말과 몸짓을 하며 살아가는 여성을 보면 “닭살이 돋아요”. 한다. 보통의 여성이 좋아하는 작은 아름다움보다는 무언가 목표나 프로젝트를 이루어 내면서 보람을 찾으려 한다. 식탁 위에 꽃을 꽂는 것 같은 일은 그들과는 별 상관이 없다. “꽃이요? 저는 그저 식탁이나 책상 위가 깨끗하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좋아요.”

톰보이들의 그런 씩씩한 모습 뒤에는 복잡한 마음이 있다. 자신이 남성이 되지 못한 것 때문에 남성에 대한 동경과 반감이 교차하고 있고 그것이 남성들에 대한 경쟁심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남자 동료들에게 뒤떨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직장 상사에게는 더 바랄 것이 없는 귀한 부하가 된다. 여성의 섬세한 면이 있으면서 일에 대한 야심이 있고 상사에게 인정을 받겠다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매우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그 같은 마음 자세가 직장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정생활에서도, 자식들을 기르는 방법에서도, 모든 대인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특히나 남편에게 결코 지려고 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것은 ‘지는 것’이라고 새겨져 있기에 어디에서든 목소리가 높다. 소리로 상대방을 눌러버리는 것이다. 부드러운 남편과 자녀들의 마음이 많이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닫혀 버린다. 대화 없는 기계적인 삶이 되어간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41)


 

다시 돌아 갈 수 만 있다면



파송예배를 드린 후 두 달 정도 성도들과 얼굴을 익히고 선교지로 복귀했다. 기다리던 성도들은 우리 가족을, 특히 수술을 마치고 회복되어 돌아온 아내와 아이들을 기쁨으로 맞아 주었다. 교회가 활기를 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넘어야 할 태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역은 비자가 반이라는 말이 있다. 남의 나라에 살려면 비자가 있어야 한다. 비자카드만 있으면 안되는지!
우리 가정은 교회 개척과 함께 교회를 국가에 등록하여 카라칼팍스탄 정부로 부터 일년 종교비자로 받았었다. 돌아올 때 비자가 두 달 남짓 남아 있어 연장을 신청했다. 예상한 비자 수령일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어 담당자를 찾아갔다. 담당직원은 더 이상 자신들은 비자 발급 권한이 없어 우즈베키스탄 중앙정부에 비자발급 승인이 나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 무렵 우즈베키스탄은 자치공화국인 카라칼팍스탄의 자치권과 외교권을 몰수하고 영사권한을 완전히 중앙정부에 복속시킨 시점이었다. 얼마 뒤 다시 담당자를 찾아 갔을 때에 수도로 가서 우즈베키스탄 외무부에 직접 문의하라고 했다. 나는 양육하던 볼료자를 수도로 올려 보냈다. 몇 일 뒤 들려온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새로운 종교법이 지난 해부터 발효되어 외국인에게는 더 이상 종교비자를 줄 수 없게 되었는데 자치정부가 이 법령을 모르고 나에게 종교비자를 발급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중앙정부가 알게 되면서 지방정부의 종교성과 외무부, 내무부 외국인 등록부서에 문책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다음 날 내무부 외국인 담당자가 나를 불렀다. 그 나라는 비자만으로 거주할 수 없고 다시 내무부에 외국인 등록을 해야 하기에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의 정책변화를 모르고 지난 해에 비자와 외국인 등록증을 주었으나 연장신청을 계속 진행하면 자신들의 입장이 너무 곤란해 진다는 것이다. 다음에 들어 올 수 있도록 협조할 테니 비자만료 전에 나가달라고 심각하게 부탁을 했다. 자신들의 입장을 위한 립서비스라는 것을 알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 사택 앞에는 경찰 두 사람이 지키고 서 있었다.

수도에서 돌아 온 볼료자는 모슬렘이 대세인 종교성에서 외무부에 항의한 상황이어서 비자연장의 길이 없으니 일단 한국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온 가족이 짐을 채 풀기도 전에 추방이라니 당황스럽고 막막하기만 했다. 성도들은 누가 돌보고, 파송교회에는 또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하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지라 성도들과 파송교회에 이 사실을 알렸다.

성도들 중 유력한 몇 분은 자신들이 힘있는 관계들을 통해 해결할 테니 좀 기다라고 했지만 지방정부 관료들과의 관계성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결국 다시 짐을 꾸려 성도들을 격려하고, 풀뿌리 같은 지도자에게 가르칠 것을 준비시켜 놓고 수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저녁 10시 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는 새벽 2시 30분으로 연기되었다. 공항에서 다시 사택으로 돌아오자 어린 아이들은 곤한 잠을 잤다. 출발시간이 되어 아이들을 깨우자 일어나 아무 소리없이 자기 가방을 메고 눈을 부비며 신을 신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이 드신 성도들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들을 끓어 안고 울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멀뚱히 옆 눈길로 제 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3월 중순 사막의 밤 기운에 뼈 속까지 한기가 느껴졌다. 희미한 불빛 아래 난방도 없는 대합실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데 창문 너머 거칠 것 없는 사막 끝에 나지막이 뜬 별들만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검색대를 지나 성도들이 멀어진 어두운 복도를 지날 때 나는 저들을 주님께 맡기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돌아오게만 해주시고,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게만 해 주신다면 저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라고 굳게 다짐했다.

파송된 지 석 달이 못되어 다시 파송교회로 돌아갔다.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의 얼굴을 어떻게 대면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담임목사님은 “그 민족에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우리 교회 성도들의 기도가 더 필요한 것 같으니 정선교사는 낙심치 말고 기회있는 대로 예배와 각종 모임에서 사역을 알리고 기도를 모아주세요”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 후 나는 담임목사님의 배려로 자주 설교를 했고 선교기도회로 모인 곳은 다 초청을 받아 사역을 소개하고 기도요청을 했다. 달이 가고 세월이 가도 비자가 나오지 않자 인사로 건네는 “언제 가세요?”라는 말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그 많은 성도들이…….,

송곳 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아내는 교회의 허락을 받아 시골의 부모님과 생활하게 하고 나는 이 곳 저 곳에서 집회를 인도하며 기도하러 다니고 있었다. 대사관에 여행비자를 신청해 보았으나 블랙리스트에 올라 거부되었다.
‘정말 다시 입국할 수 있는 것인가?’ 조바심이 나면서 혹시나 내가 부족하거나, 죄 때문에 아닌가 자신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심한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8월 초 친구목사와 함께 철야기도를 하러 기도원으로 향했다. 더운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찬송을 하고 있었다. 나는 덩치가 커다란 청년 뒤에 자신을 숨기듯 풀이 죽어 앉아 있었다. 정말 은혜의 사각지대였다. 한 참 설교를 하시던 분이 갑자기 내 쪽을 향해 “저기 큰 청년 뒤에 앉은 코발드색 남방 입은 분, 일어나 보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 청년이 몸을 틀어 비켜나고 설교자는 나를 주목하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젊은 분, 목사님이시죠? 음, 선교사님이시네! 왜 지금에 처한 일이 자신의 죄나 부족함이라고만 생각하고 정죄합니까? 잘 될 땐 내가 잘 해서, 안될 땐 내가 못해서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하나님께서 선교사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심정을 부어주시려고 행하시는 일이니 큰 감사로 승리하십시오. 여러분들, 저 선교사님과 가정, 사역을 위해 함께 기도하십시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4인 4색 밴쿠버 목양일기






글을 쓴다는 것은 발가벗겨지는 일입니다. 그 사람의 지성과 인성 그리고 영성의 수준이 사람들에게 공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마음에 4인 4색에 동참하는 것을 매우 주저했지만 밴쿠버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교민들에게 “작은 글 한편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하는 심정으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밴쿠버에서 지난 13년간 사역을 하면서 많은 한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모두 다양한 타향살이 눈물어린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고 나면 저도 답답해서 자연스럽게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과 제 자신에게서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아브라함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인생을 정리해야 할 시기인 75세에 일평생 다져놓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결단하게 만들었을까? 아브라함은 인생에 있어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나이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식 없음에 대한 자신의 처지를 매우 가슴 저리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알지도 못하는 신의 약속을 믿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얻고자 했던 자식은 오래 동안 얻지를 못하고 대신 아주 특별한 신앙 훈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증후군입니다. 원하는 것은 늦어지고 대신 신앙 훈련은 깊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신앙은 이런 식의 계속되는 기다림 속에서 중요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밴쿠버에서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에게서 아브라함의 모습을 봅니다. 학위와 부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각종 삶의 이유들을 비전으로 보고 달려 왔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기보다는 각자 아주 특별한 신앙 훈련을 시키십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손은 그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도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 훈련을 위해서 아무도 의지 할 수 없는 곳,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그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 초청장의 이름이 ‘큰 민족(많은 자손)’이란 이름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그와 같은 초청장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각자 다양한 초청장의 이름으로 밴쿠버에 오게 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들은 그것을 비전으로 삼고 쫓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으로 신앙 훈련을 시키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의 경우, 학위를 취득하고자 밴쿠버에 왔지만 오히려 혹독한 신앙 훈련을 받았습니다. 유학 생활 중, 좀 과장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아파트에 살았지만 한동안 와이프 얼굴 보기가 힘든 때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일 년 넘게 예배드릴 장소를 얻지 못해서 눈물 짖던 날이 많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렌트에 대한 거부를 당했습니다. 대략 70-80번 정도 안 된다는 말을 들으니 그때부터는 그런 반응에 대해서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오래 동안 공들였던 캐네디언 교회에서 렌트해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 버나비 마운틴에 올라 멍하니 긴 시간 광역 밴쿠버 시내를 내려다보기만 했습니다. 어느 순간 눈물이 나오기 시작을 하는데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울다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기에 저렇게 많은 땅과 건물이 있는데, 저를 위한 곳은 단 한군데도 없군요.” 계속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때, 마음에 들려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의 방패야,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야.”

이 말씀은 창세기 15:1절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신앙의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길어지면서 그가 얻게 된 축복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입니다.

저도 그때야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목회하는 목사에게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교회 건물이나 넉넉한 물질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역하다가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대체적으로 시험은 좋은 일 하다가 생깁니다. 우리의 인생에 방패 되시고 지극히 큰 상급이신 하나님을 잊을 때 생기는 현상들입니다.

저는 여기 밴쿠버에서 아브라함 증후군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 이곳에서 하나님의 초청장을 받아들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 모두가 이 음성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우리 인생의 상급으로 하나님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이민의 삶을 살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한들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면 아직 다 가진 것입니다.

[라일주 목사/로고스교회/778-898-1558]
 
 
 
 
 

아브라함 이야기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창 18:17-21 (상)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이 온전히 회복되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영적인 회복 후의 축복
17-19절은 아브라함이 아닌 천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사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나와 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 보면 ‘나’를 의미하는 ‘아니’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내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가 하려는 것을 숨기겠느냐?’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시려는 것을 다 알려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영적으로 온전히 회복된 사람들을 당신의 동역자로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18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택하신 목적을 다시 한 번 밝히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즉,하나님께서는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큰 민족으로, 강대한 나라로 만드시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강대한 나라는 군사적이나 혹은 경제적으로 강대한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나라라고 알려주십니다. 19절에 보면,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즉, 여호와의 도를 지켜서 하나님의 의 (righteousness)와 공도 (justice)를 행하는 민족을 만드시고, 그러한 신앙공동체를 통해서 결국 세상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20-21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첫째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온전히 회복시키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나오는 “부르짖음”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행한 악행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의 부르짖음인데, 놀라운 것은 그 부르짖음이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부르짖을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헛수고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신앙인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를 헛수고라고 생각하고 기도가 당장 응답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기도하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는 분들 가운데에도 기도의 역사에 대해서 회의를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가장 적당한 때에 응답하십니다. 기도는 헛수고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기도하는 신앙인들이 지혜로운 신앙인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아브라함22절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아브라함은 두 천사들이 떠난 후에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서 있었던 이유는 바로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2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가까이 나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뜻이고, ‘경배하다’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볼 때, 이것은 기도하기 위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밤을 새워도 이 메마름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폭풍을 맞은 숲처럼 어지러운 생각들을 기도로 올리려 하지만 마음이 다 타고 난 재처럼 닿을 수 없게 바스러져 버립니다.
아무 것도 나를 위로할 수 없을 것처럼 모든 감각이 먹먹하고,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텅 비고 아픕니다. 빛 한줄기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어느 쪽으로 생각의 가닥을 잡고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늘 읽는 말씀조차 남의 것처럼 감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마음에 부딪혀 오는 말씀마저 아전인수격의 해석일 것만 같아 밀쳐내게 됩니다.
상실감에 멍해진 채로 밤새 침대에 앉아 다 포기하라고, 네가 자격이 없는 탓이라고 길게 메아리 치는 어둠의 소리들에 속수무책으로 헝클어지면서, 다 놓아버리고 어디론가 잠적해버리고 싶다는 생각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는데,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성경의 화면 위로 떠올라온 교회 집사님이 올린 아침의 말씀이 단번에 나를 은혜의 그물로 건져 올려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
사역을 하면서 힘든 일이 있거나 마음이 흔들릴 때 늘 위로 받던 말씀입니다.
짙은 어둠을 박차고 힘있게 돋는 해처럼 솟아 올라온 이 말씀에, 밤새 메말라있던 눈시울이 단번에 젖어 들고 둑이 터진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그러니까 넌 안돼” 였던 절망이 단번에 “그러니까 내가 해야만 돼” 라는 힘찬 의욕으로 바뀌고, 절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왜? 라는 물음이 나의 신앙을 단련시키시는 은혜로운 뜻이라는 답으로 바뀌어 영혼에 감당할 수 없는 환희가 일어납니다.

진리의 힘은 실로 위대합니다
세상의 어떤 약이 이런 효험을 발휘하며, 어떤 친밀한 음성이 나를 이렇게 단번에 위로해 회복시키며, 어떤 예술품이 이런 놀라운 감동을 만들어 내며, 세상의 어떤 지식이 나를 당장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성경은 활자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름답고 친밀한 속삭임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모든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은 미움과 적대감이 충만하여, 자기의 기대에 못 미치면 바로 등을 돌리고 사소한 일로도 원수를 맺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사람들의 관계 안에 사랑에 대한 믿음보다는 미움과 분열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하고 두텁게 역사합니다. 우리 모두 정처 없는 나그네로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 속에 살아가면서 왜 이토록 미워하고 하나라도 더 자기의 입지를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며 싸우고 다투는지, 요즘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움과 갈등에 대한 이야기들 때문에 너무 어지럽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 판단과 증오와 미움의 독이 먼저 자신의 생을 좀 먹고, 한번 이기심과 허영과 시기의 마음으로 구멍이 뚫리면 소중한 생의 시간과 에너지가 길바닥에 쏟아져 허비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길 잃은 양입니다.
진리에 목마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를 궁금해하며 내가 잘 가고 있는 건지,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늘 의심하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주저하고 망설이며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에 괴로워하고 사랑 받는 자리에서 밀려날까, 버림을 당할까 노심초사하며,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부담에 눌리며, 비방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작은 목소리를 내면서도 내가 너무 설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허약한 존재들입니다.
십자가 사랑 아래 서면 우린 서로 절대 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어떻게든 우리를 그 사랑에서 떼어내려는 악한 영들입니다.
사랑 없으면 아무리 많은 재물도, 모두가 인정하는 인기나 명예도,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도 소용이 없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오른, 아침 안개가 서린 아름다운 산의 풍경에 마음의 어지러움이 확 가시고 마음의 혼란이 당장 누그러집니다. 이런 풍경 속을 걸으면 하늘 아버지의 손이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것 같습니다.
완전하고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늘 이렇게 깨어지고 헝클어진 모습을 보입니다. 이제는 깨끗하고 향기로운 모습으로만 있고 싶은데 늘 많은 생각과 말들로 때묻은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믿음으로 힘차고 멋진 모습으로 서있고 싶었는데 이렇게 형편없이 실패감으로 파헤쳐지고 지치고 곤비한 모습으로 주저 앉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오늘도 나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내 영혼의 빈 잔에 그 사랑을 가득 따라주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주처럼 무한하며 그 사랑은 끊이지 않는 새로움입니다.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라 내 머리 주 앞에 조아려 하는 말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요..
나 같은 죄인이 절대 받을 수 없었던 그 사랑에 겨워 나 아주 작은 사랑이지만, 너무나 짧은 생애지만 전부를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것들이 나에게 팔을 벌려도 오직 하나를 사랑하는 강직한 사랑으로,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거나 그 어느 누구를 한하고 탓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의 빈칸들을 오직 사랑으로 채워나가며 찬송과 기도를 쉬지 않겠습니다.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터키 이야기 (14)



6. 신약 성경과 터키



5) 이고니온

지금은 콘야(Konya)라 불리며 셀축 왕국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탈환한 후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로마시대에는 이곳을 ‘우상의 도시(The City of Icons)’라 불렀으며 루가오니아 지방의 주요도시들 중 하나였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여행 시 이곳에 와서 복음을 증거할 때 이곳은 종교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 회당에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말하였고, 그들로부터 거절당할 때 이방인에게로 돌아섰다.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불화를 이끌었다. 무리는 나뉘어지고 두 사도에 대항한 사람들은 정부 권세의 지지를 얻어 바울과 바나바를 능욕하며 돌로 치고자 하였으나 루스드라로 도망하여 복음을 전하였다(행14:1-7).

◎ 콘야의 메블라나 박물관
터키의 신비주의 이슬람 종파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메블라나”이다. 셀축 당시 신비주의자였던 젤라틴 루미가 신비주의 종파를 창시했다. 그는 모든 것은 신에서부터 왔고 결국 다시 신에게로 돌아가며, 그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인데, 이 사랑은 인간이 신에게 느끼는 사랑이라고 주장했다.

이 종파는 셰마라고 불리는 특이한 의식으로 인해 유명하다. 셰마 의식은 종파 사제들이 단음조의 음률에 맞추어 회전을 계속하는 춤을 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 회전을 통하여 신과의 신비적 합일을 경험하고, 나아가 인간 사이의 화합과 사랑을 이루게 된다고 말한다. 매년 12월 셰마 의식이 열리는 주간이면 전 세계에서 이 특이한 의식을 관람하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6) 비시디아 안디옥

타우루스 산 서쪽 끝에 있는 소아시의 산간지역으로 바울이 말한 강도의 위험(고후11:26)이 있는 광야인 것 같다. 이곳을 방문하여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통해 계시된 옛 언약의 성취이며,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총은 예수를 통한 죄사함이라 설명하였다(행13:38-39). 온 성이 거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인 반면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변박하고 비방하니 말씀은 이방인에게 전해지고 유대인은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여 그 경내에서 쫓아냈다(행13:44-50).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어떤 질병으로 고생하고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갈4:13-15). 이것을 두고 간질병이라는 사람도 있고, 눈병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바울이 언급한 육신의 가시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과 바나바는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 성에 들어가 제자들의 마음을 신앙으로 견고케 했다(행14:21-22).

시내 중심에서 약 5Km 떨어진 게멘(Gemen) 마을의 언덕 위에 바울 기념교회가 있다. 처음에 이곳에는 커다란 유대인 회당이 있었고 두 번째 작은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는 유대회당이 교회로 바뀐 유일한 사례라 하겠다. 세 번째의 것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성 바울 기념교회로 25m×60m의 규모에 2줄로 이어진 기둥들로 되어있다. 본당의 바닥은 다양한 패턴과 여러 종류의 색돌로 만들어진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개중엔 무덤의 비문들도 있는데, 그 중의 하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하나님의 존전으로 갈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