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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3. 교회연합이라는 땅 위의 바벨탑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영역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 기승을 부리는 옛 로마제국에 뿌리를 둔 두 단어
-즉‘종교’(‘religio’-Lat.) 다원주의와 ‘에큐메니즘’- 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적 진통을 치루고 있다. 어거스틴의 영향하의
교권주의자들은 사단의 ‘교회연합’을 부르짖으나 그리스도의 교회의 사명은 교회연합이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었던 바울이 가르친 그리스도 교회의 전도사명이다. ‘에큐메니칼’운동에 빠진 자들은 요한 17:11“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kjv)-을 본문에서 떼내어
에큐메니즘의 슬로건으로 악용하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은 이미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구절은 우리가 목표로 두고 도달해야하는 어떠한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되라’고 명한 말씀이 아니라, 이미 하나되어있는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도록 아버지께 간구하는 ‘주님의 기도’이다. 에베소서, 골로새서를 통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도 ‘에큐메니칼’적인 교회를 암시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

교회가 아무리 많아도, 많아서 일어나는 문제보다는 교회가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하나되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도
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히틀러’ 정권 때에, ‘신사참배’시기를 통해 이미 경험하였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가장 거대하고도 조직적인 이단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단교주의 이름은 우리 주님의 이름을 도용한『적(Anti-, 反)그리스도』로 그의 신도는 온 세상과 연결되는 ‘인터넷
공동체’로 온라인(Online)을 통해 통제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서 교단신학의 사슬에 매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그 많은 지도자들, 개혁신앙을 부르짖으나 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 개혁자들이 건네준 ‘말씀’은 버리고 ‘인간’신학자들의 무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유행을 쫓는 신학자들, 설교하기 위해서는 대양(大洋)을 건너다녀도 듣기 위해서는 길도 건너지 않으려는 영적자만심에 빠진 자들은 진리에 대하여 항상 새롭게 알려는 자세가 부족하여,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악을 선하다하며…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스스로 지혜롭다…명철하다…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한…”자들에게 성경은 4번이나 “화있을진저”로 경고하고있다.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義)를 빼앗는도다”(사5.18-23).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서 교단신학의 사슬에 매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그 많은 지도자들, 개혁신앙을 부르짖으나 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 개혁자들이 건네준 ‘말씀’은 버리고 ‘인간’신학자들의 무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유행을 쫓는 신학자들, 설교하기 위해서는 대양(大洋)을 건너다녀도 듣기 위해서는 길도 건너지 않으려는 영적자만심에 빠진 자들은 진리에 대하여 항상 새롭게 알려는 자세가 부족하여,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악을 선하다하며…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스스로 지혜롭다…명철하다…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한…”자들에게 성경은 4번이나 “화있을진저”로 경고하고있다.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義)를 빼앗는도다”(사5.18-23).
악한 것을 알고도 선한 것으로 꾸미려는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은 필자의 글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나
저들은 한 나라가 천주교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도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사실에 무지할 뿐아니라, 입을 다물면 자신은 편할지
모르나 자녀들이 맞이할 세상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분들의 소견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로마종교(천주교)가 들어간 나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저들의 악(惡)한 열매들을 보고 혼절(昏絶)하리라. 사단의 사슬에 결박당한 자를 자유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결박당했음을
알려주어야한다. 이 로마종교에 대하여는 옛 선지자들이, 사도들이, 또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 번 경고하셨다.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영혼들을 향하여 경고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미움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0144. 진리의 영, 미혹의 영
0144. 진리의 영, 미혹의 영
신복음주의는 그리스도 교회에서 시작된 운동이 아니라 세상극장에서 공연된 운동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쳐지고
극장용어 ‘프로그램’을 도입, 관객(교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한다. 그러니 ‘회개’가 무슨 인기가 있겠는가? 의자도 극장처럼 편한 것으로 시설을
꾸며야하고, 스크린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때로는 늘 보는 중앙의 십자가도 가려야한다. 어두운 초롱불 밑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던 전도자들의
복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동반하였으나 대형스크린에 문짝만큼 크게 부상되는 설교자의 얼굴을 못 보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지? 참으로 기구한
말세교회들의 관람객 유치를 위한 방법론, 노력들이 너무나 세상적이다. 기독신앙의 기본이자 근본인 내적문제인 ‘죄 회개와 자기부인(自己否認)’이
사라지고 가시적이고 외적인 치장에 너무 요란하다. ‘자기부인’의 전형적 모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주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kjv)고 일축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믿어야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아가 그 위에서 또한 죽어야하는 십자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도 있다. 고난을 제거하고 세상에서의 영광만
구가하는 신복음주의의 성경공부는 악(惡) 그 자체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늘 자기를 대적한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라는 생각자체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만든 신(神)이 바로 자기자신이 된다.
자아에 몰두하는 것은 모두 분쟁, 다툼, 전쟁의 핵심적인 원인이다. 교만은 모두 개인적, 사회적, 국제적 불협화음의 뿌리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나서야 진정한 화평이 가능하다. 거짓사랑은 진리를 더럽히고 희생시키나 참사랑은 정의보다 강하며 십자가사랑의 요구를 보여준다. 우리를 겸손케하는 그리스도 사랑의 엄격성만이 죄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죄의 거짓됨에 대해 대결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거하는 삶은 자기추구적 삶을 철저히 거부한다. 자기 개인의 성공을 목표로 하고 부추기는 삶, 즉 자기중심적 영광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는 전혀 양립(兩立)할 수 없는 모순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각자가 “진리의 영, 미혹의 영”(요일4:6)중 누구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도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야한다. 미국 동부와 서부의 두 신학교(Regent, VA / Fuller, CA)의 대학원장들이었던『빈슨 사이난』과『피터 와그너』는 정기적으로 로마교황청을 들날락하면서 북미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신학계를 크게 오염시켜온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많은 교회가 교인들이 좀 많다고 생각되면 “주의 만찬”시에 성도들을 앞으로 나오게하여 세워놓고 본의아니게 천주교의『미사』(Mass)행위를 하고서는 놀라는 목사님들을 만나게된다. ‘주의 만찬과 미사의 차이’에 대하여 앞으로 다루게 되길 바라지만 우리는 지금 배도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지라 말씀의 등불을 밝혀 놓지 않는다면 쉽게 속아 곁길로 가게된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길이 아니라 오류이고,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며,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터』의 가르침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고까지 권고하고 있다.
자아에 몰두하는 것은 모두 분쟁, 다툼, 전쟁의 핵심적인 원인이다. 교만은 모두 개인적, 사회적, 국제적 불협화음의 뿌리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나서야 진정한 화평이 가능하다. 거짓사랑은 진리를 더럽히고 희생시키나 참사랑은 정의보다 강하며 십자가사랑의 요구를 보여준다. 우리를 겸손케하는 그리스도 사랑의 엄격성만이 죄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죄의 거짓됨에 대해 대결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거하는 삶은 자기추구적 삶을 철저히 거부한다. 자기 개인의 성공을 목표로 하고 부추기는 삶, 즉 자기중심적 영광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는 전혀 양립(兩立)할 수 없는 모순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각자가 “진리의 영, 미혹의 영”(요일4:6)중 누구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도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야한다. 미국 동부와 서부의 두 신학교(Regent, VA / Fuller, CA)의 대학원장들이었던『빈슨 사이난』과『피터 와그너』는 정기적으로 로마교황청을 들날락하면서 북미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신학계를 크게 오염시켜온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많은 교회가 교인들이 좀 많다고 생각되면 “주의 만찬”시에 성도들을 앞으로 나오게하여 세워놓고 본의아니게 천주교의『미사』(Mass)행위를 하고서는 놀라는 목사님들을 만나게된다. ‘주의 만찬과 미사의 차이’에 대하여 앞으로 다루게 되길 바라지만 우리는 지금 배도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지라 말씀의 등불을 밝혀 놓지 않는다면 쉽게 속아 곁길로 가게된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길이 아니라 오류이고,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며,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터』의 가르침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고까지 권고하고 있다.
0145.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성도들에게는 광명한 아침이 되겠지만 그렇지못한 자에게는 영원한 어둠이 될 것이다. 주님의 초림 때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처럼, 주님의 재림때에도 어두움에 속한 자에게는 밤이 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고 권고한다. 우리는 교회시대의 끝을 보려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새시대운동/새세계질서의 세력에 의해 전도와 선교에 의한 개종이 불법(不法)으로 간주될 날이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어떤
지역에서는 이미 이 불법이 활동 중이다). ‘단일세계정부/단일경제체제’(One World Government/One World
Currency)에 의해 ‘현찰없는’(cashless)사회로 들어갈 준비가 다 된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이 세상의 특성이 유동성,
불확실성이라면,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치않는 예수님의 복음을 가진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가장
가까운 듯 하면서도 기독교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방자 사단의 걸작품이기 때문이다. 종교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늘 악(惡)의 병기로 이용당한다. 사단은 정확무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과 겨루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으면서도 3번이나 “만일”이라는 말로 예수님을 유혹하지 않았던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눅4장/27장).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의 아비다. 배도는 이미 시작되었고 늘 평화의 이름으로 파괴를 자행(단8:25)해온 자들은 에큐메니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또 다시 우리 앞에 서 있다. 가슴이 답답해진 전도자가 파수꾼을 향해 거듭 묻는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 답한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사21:11-12).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의 아비다. 배도는 이미 시작되었고 늘 평화의 이름으로 파괴를 자행(단8:25)해온 자들은 에큐메니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또 다시 우리 앞에 서 있다. 가슴이 답답해진 전도자가 파수꾼을 향해 거듭 묻는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 답한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사21:11-12).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찬 188 / 만세 반석 열리니 ③)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찬 188 / 만세 반석 열리니 ③)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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