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8일 금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30 >








0143. 교회연합이라는 땅 위의 바벨탑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영역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 기승을 부리는 옛 로마제국에 뿌리를 둔 두 단어 -즉‘종교’(‘religio’-Lat.) 다원주의와 ‘에큐메니즘’- 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적 진통을 치루고 있다. 어거스틴의 영향하의 교권주의자들은 사단의 ‘교회연합’을 부르짖으나 그리스도의 교회의 사명은 교회연합이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었던 바울이 가르친 그리스도 교회의 전도사명이다. ‘에큐메니칼’운동에 빠진 자들은 요한 17:11“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kjv)-을 본문에서 떼내어 에큐메니즘의 슬로건으로 악용하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은 이미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구절은 우리가 목표로 두고 도달해야하는 어떠한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되라’고 명한 말씀이 아니라, 이미 하나되어있는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도록 아버지께 간구하는 ‘주님의 기도’이다. 에베소서, 골로새서를 통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도 ‘에큐메니칼’적인 교회를 암시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

기독교회사 2,000여년사에 단 한번도 조화를 이뤄본 적이 없는 무리들과 멍에를 함께 매겠다고 하니, 필자가 30여년을 보아온 유럽 교회의 현실이 우리의 앞날이 될까 심히 두렵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당연히 분리된 기독교와 천주교와의 관계를 “부끄러운 분리”(shameful division)로 보는, 그리하여 언젠가는 ‘화해와 일치가 필요한’ 관계로 보는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도자들의 무지몽매함에 기인한다. 많은 유럽 대학의 신학부 안에는 ‘복음주의 신학부’와 ‘카톨릭 신학부’가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고후6:15)을 조화시키느라 대학의 심장부가 이미 곪아터져 그 냄새는 교회, 사회로 들어가 악취를 풍기면서 적(Anti-)그리스도의 모형의 하나인 『히틀러』같은 악마를 구세주로 영접한 영적소경들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도 분명하게 그 조짐을 나타내보이고 있다.

교회가 아무리 많아도, 많아서 일어나는 문제보다는 교회가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하나되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도 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히틀러’ 정권 때에, ‘신사참배’시기를 통해 이미 경험하였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가장 거대하고도 조직적인 이단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단교주의 이름은 우리 주님의 이름을 도용한『적(Anti-, 反)그리스도』로 그의 신도는 온 세상과 연결되는 ‘인터넷 공동체’로 온라인(Online)을 통해 통제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서 교단신학의 사슬에 매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그 많은 지도자들, 개혁신앙을 부르짖으나 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 개혁자들이 건네준 ‘말씀’은 버리고 ‘인간’신학자들의 무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유행을 쫓는 신학자들, 설교하기 위해서는 대양(大洋)을 건너다녀도 듣기 위해서는 길도 건너지 않으려는 영적자만심에 빠진 자들은 진리에 대하여 항상 새롭게 알려는 자세가 부족하여,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악을 선하다하며…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스스로 지혜롭다…명철하다…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한…”자들에게 성경은 4번이나 “화있을진저”로 경고하고있다.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義)를 빼앗는도다”(사5.18-23).

악한 것을 알고도 선한 것으로 꾸미려는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은 필자의 글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나 저들은 한 나라가 천주교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도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사실에 무지할 뿐아니라, 입을 다물면 자신은 편할지 모르나 자녀들이 맞이할 세상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분들의 소견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로마종교(천주교)가 들어간 나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저들의 악(惡)한 열매들을 보고 혼절(昏絶)하리라. 사단의 사슬에 결박당한 자를 자유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결박당했음을 알려주어야한다. 이 로마종교에 대하여는 옛 선지자들이, 사도들이, 또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 번 경고하셨다.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영혼들을 향하여 경고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미움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0144. 진리의 영, 미혹의 영

신복음주의는 그리스도 교회에서 시작된 운동이 아니라 세상극장에서 공연된 운동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쳐지고 극장용어 ‘프로그램’을 도입, 관객(교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한다. 그러니 ‘회개’가 무슨 인기가 있겠는가? 의자도 극장처럼 편한 것으로 시설을 꾸며야하고, 스크린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때로는 늘 보는 중앙의 십자가도 가려야한다. 어두운 초롱불 밑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던 전도자들의 복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동반하였으나 대형스크린에 문짝만큼 크게 부상되는 설교자의 얼굴을 못 보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지? 참으로 기구한 말세교회들의 관람객 유치를 위한 방법론, 노력들이 너무나 세상적이다. 기독신앙의 기본이자 근본인 내적문제인 ‘죄 회개와 자기부인(自己否認)’이 사라지고 가시적이고 외적인 치장에 너무 요란하다. ‘자기부인’의 전형적 모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주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kjv)고 일축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믿어야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아가 그 위에서 또한 죽어야하는 십자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도 있다. 고난을 제거하고 세상에서의 영광만 구가하는 신복음주의의 성경공부는 악(惡) 그 자체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늘 자기를 대적한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라는 생각자체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만든 신(神)이 바로 자기자신이 된다.
자아에 몰두하는 것은 모두 분쟁, 다툼, 전쟁의 핵심적인 원인이다. 교만은 모두 개인적, 사회적, 국제적 불협화음의 뿌리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나서야 진정한 화평이 가능하다. 거짓사랑은 진리를 더럽히고 희생시키나 참사랑은 정의보다 강하며 십자가사랑의 요구를 보여준다. 우리를 겸손케하는 그리스도 사랑의 엄격성만이 죄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죄의 거짓됨에 대해 대결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거하는 삶은 자기추구적 삶을 철저히 거부한다. 자기 개인의 성공을 목표로 하고 부추기는 삶, 즉 자기중심적 영광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는 전혀 양립(兩立)할 수 없는 모순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각자가 “진리의 영, 미혹의 영”(요일4:6)중 누구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도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야한다. 미국 동부와 서부의 두 신학교(Regent, VA / Fuller, CA)의 대학원장들이었던『빈슨 사이난』과『피터 와그너』는 정기적으로 로마교황청을 들날락하면서 북미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신학계를 크게 오염시켜온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많은 교회가 교인들이 좀 많다고 생각되면 “주의 만찬”시에 성도들을 앞으로 나오게하여 세워놓고 본의아니게 천주교의『미사』(Mass)행위를 하고서는 놀라는 목사님들을 만나게된다. ‘주의 만찬과 미사의 차이’에 대하여 앞으로 다루게 되길 바라지만 우리는 지금 배도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지라 말씀의 등불을 밝혀 놓지 않는다면 쉽게 속아 곁길로 가게된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길이 아니라 오류이고,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며,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터』의 가르침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고까지 권고하고 있다.

0145.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성도들에게는 광명한 아침이 되겠지만 그렇지못한 자에게는 영원한 어둠이 될 것이다. 주님의 초림 때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처럼, 주님의 재림때에도 어두움에 속한 자에게는 밤이 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고 권고한다. 우리는 교회시대의 끝을 보려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새시대운동/새세계질서의 세력에 의해 전도와 선교에 의한 개종이 불법(不法)으로 간주될 날이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어떤 지역에서는 이미 이 불법이 활동 중이다). ‘단일세계정부/단일경제체제’(One World Government/One World Currency)에 의해 ‘현찰없는’(cashless)사회로 들어갈 준비가 다 된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이 세상의 특성이 유동성, 불확실성이라면,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치않는 예수님의 복음을 가진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가장 가까운 듯 하면서도 기독교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방자 사단의 걸작품이기 때문이다. 종교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늘 악(惡)의 병기로 이용당한다. 사단은 정확무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과 겨루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으면서도 3번이나 “만일”이라는 말로 예수님을 유혹하지 않았던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눅4장/27장).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의 아비다. 배도는 이미 시작되었고 늘 평화의 이름으로 파괴를 자행(단8:25)해온 자들은 에큐메니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또 다시 우리 앞에 서 있다. 가슴이 답답해진 전도자가 파수꾼을 향해 거듭 묻는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 답한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사21:11-12).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찬 188 / 만세 반석 열리니 ③)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7 장 내적 치유과정의 주제들



우리 부부의 내적 치유 학교나 집회에서 전해지는 중요한 주제는 대략 “열 가지”로 요약된다. 물론 강의는 이 주제들에 국한되지 않고 참석자들의 상황과 질문에 따라서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폭넓게 다루게 된다.

주제 3 :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는 성품과 성격의 문제점 뒤에는 모든 경우 숨겨진 원인이나, 과거의 사건들 (상처와 아픔의 씨앗들)이 있다.

자신의 성품에 백 프로 만족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씩 마음에 들지 않는 성품이 있다. 우리는 그 성품들을 고쳐서 원만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런데 무언가 되는 것 같으면서 계속해서 실패하고 실수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우리가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원하는 열매가 잘 맺히지 않는 데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숨겨진 원인이나 과거의 좋지 않은 사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상처와 아픔의 씨앗들이 오래 전에 뿌려졌고 그것이 내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왔고 이제는 하늘을 덮는 가시덤불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 가시덤불 길을 지나다니면서 찢기고 넘어지고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고쳐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말이다. 그 뿌리들을 찾아내고 주님의 말씀의 약을 치면 지상에 나와 있는 줄기와 열매들, 즉 눈에 보이는 좋지 않은 성격과 성품이 자연스레 시들어가고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제 4 : 내 마음에 어떤 상처와 아픔의 씨앗들이 떨어졌고 얼마나 자라왔는가를 성령님은 나에게 “인격적으로”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신다.

환자로서 병원에 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통증을 없애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통증의 원인”을 찾아달라고 하는 일이다. 원인을 찾지 않고 통증을 제거하면 병을 더 키우게 된다. 우리 내면세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여러 관계를 망가뜨리는 원인을 찾기만 하면 치유는 시간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진단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오해”하고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기보다는 어떤 초월적인 능력으로 (Super power) 생각하고 성령님에게 그런 일을 부탁하고 기대한다. 어떤 서양 교회 집회에 갔더니 유명한 설교자가 두 손가락을 높이 들어서 전기 콘세트에 꽂는 동작을 하게 한다. 성령님의 능력 (POWER)에 연결되어야 한단다. 인격적인 성령 하나님을 내게 주시는 “능력”으로 격하시키는 아주 잘못된 가르침이다.

많은 경우 성령님은 일단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도와주신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상처입고 울고 있을 때에 이유를 묻지 않고 바로 응급 처치를 해주는 엄마의 손길과 같다. 그러나 육신의 부모도 언제까지나 자녀들을 어린아이로 취급하기를 원하지 않듯이 성령님께서도 항상 우리의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제대로 성숙해서 당신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님은 어떤 신령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 내면세계의 모습이나 아픔들을 알려주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당신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과 일대일로 만나시며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 진단 작업을 수행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들이 문제를 드러내 놓고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나아가서 자녀들과 인격적인 대화를 하기를 원하신다. 그 대화 중에서 성령님께서 나 자신, 부모, 자녀들의 문제의 뿌리를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믿음을 건축하다- 1.도전



추방된 지 7개월 만에 선교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더 이상 거주등록을 할 수 없어 가족을 수도에 두고 비거주 사역을 시작했다. 사역지에서 170키로 미터 떨어진 인근 도시로 가서 다시 택시를 타고 잠입해 들어갔다. 성도들로 북적거리던 사택엔 정막만이 지키고 있었다. 창틀에 내린 누런 흙먼지가 주인 없이 지난 시간을 말하는 것 같았다. 감개무량하고 감사하기 그지 없었다. 다시 돌아와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우리 가정이 추방되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자체건물을 가지지 않은 종교단체의 등록을 취소한다는 신종교법이 발효되었다. 개척한 교회는 ‘고려인문화센터’를 임대하여 국가에 등록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없는 사이 교회등록이 취소되었고, 법적으로 공적 모임을 할 수 없어 성도들은 소그룹으로 모이고 있었다. 돌아온 교회에는 산적한 문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히 새로운 예배처소를 구입하거나, 예배당을 건축해야 했다. 도착한 사택 마당에서 기도를 하는데 사택 맞은 편에 예배당을 건축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사택 부지가 넓었기 때문에 공간은 충분했다. 그런데 10월 26일 기공예배와 함께 건축을 시작하라는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난감했다. ‘정말 이것이 주님의 음성이란 말인가? 10월 말에 어떻게 건축을 시작한단 말인가? 11월 초면 눈이 오기 시작하고…… 겨울은 최저 영하 25도까지 내려가는데, 어떻게 겨울에 공사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내년 봄이면 몰라도…….’

한 참 고민스러운 마음을 모우며 기도하는데 사택에서 요란하게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열쇠로 열고 들어가 전화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에선 믿기지 않게 파송교회 교구담당목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 본사의 오부장입니다. 잘 도착하셨는지요? 저희가 손을 모으는 중에 회장님이 그 곳에 사옥을 지으라는 말씀을 하셔서 사장님의 허락을 받고 저희가 적극 돕기로 했습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추방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서는 국제전화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걸려온 전화가 파송교회에서 온 국제전화이고, 예배당을 지으라는 내용이었다. 통신사정이 좋아 진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주님이 주시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확정했다.

목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성도들이 사택으로 달려왔다. 기쁨으로 다시 해후하게 된 것이다. 몇 일이 지나자 성도들을 모아 예배당 건축계획을 의논했다. 교회등록과 함께 합법적인 모임을 위해서 자체건물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 동의했지만, 10월 26일 기공예배를 드리고 건축을 시작하겠다는 나의 말에 모두가 의아해 했다. 성도들은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에 무슨 공사냐는 의구심을 품었지만, 다시는 못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던 목사가 다시 돌아왔으니 하자는 대로 따르는 입장이었다.

건축을 결정했지만 풀 뿌리 수준의 성도들과 함께 건축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고민이었다. 그리고 법적으로 외국인이 종교단체의 활동에 개입할 수 없는 입장이고, 안 밖으로 위험요소도 많았다. 제일 큰 고민 거리는 건축자재를 구하는 문제였다. 계획경제였던 쏘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그 곳엔 그 때까지 7년이 지나도록 건축자재시장이 형성되질 않고 있었다. 건축자재를 시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이나 개인 집에서 사와야만 했다. 그것도 대부분은 장물이었다. 그리고 건축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현지 사정을 알면 알수록 나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볼료자가 나를 찾아왔다. 볼료자는 교회가 개척되자 온 가족이 교회에 나온 첫 가정이다. 그는 극동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난 고려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1947년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러시아에 정책했다. 가정을 이루었으나 삶이 어려워 쌀 농사를 지으러 아랄까지 흘러 들어온 가정이다. 그는 그곳에 자라 학교교사를 했고, 요식업으로 돈을 많이 벌기도 했다. 그리곤 한 때 놀음에 빠져 많은 재산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도시 중심에 두 개의 가게를 운영하는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대화 도중 볼료자는 예기치 않게 불쑥 자신에게 건축을 맡겨 달라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수도에서 건축으로 빚어진 현지인들의 재정사고를 보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함께 기도모임을 하던 동료선교사의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도 있었다. 그 교회의 건축을 맡았던 고려인이 막대한 재정을 들고 모스크바로 도망을 쳤고, 동료선교사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도망친 사람의 장남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되었고, 얼마 후 본인도 교통사고로 객사하여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일도 있었다.

나는 볼료자에게 왜 힘든 건축을 맡고자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자신이 꼭 헌신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건축을 맡게 되면 많은 돈이 오가고, 늘 그 곳에서 부정부패를 보아왔던 불신자들과 성도들 사이에서는 자신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억측이 난무할 텐데 그 짐을 어떻게 지겠냐고 물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성도들 중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기더라도 자신의 예배당을 짓는 일이니 어떤 보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정한 명예와 돈은 한 번에 취할 수 없는 일임을 설명하려 했다. 볼료자는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목사님, 저는 돈 때문에 이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집을 짓는 일에 섬길 기회가 주어지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교회음악 Plus





찬양대원은...



찬양대원은 참 그리스도인으로 구별 된,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서, 영적으로 구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 생활은 물론, 사회생활, 가정생활에서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영의 사람이어야 한다.

찬양대원은, 음악적인 은사나 자질(재능)과 음악에 대한 열심과 열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찬양대는 다른 사람들 보다 일찍 교회에 나와야 하고, 연습 후에 늦게 돌아가야 하고, 그 외에도 특별한 절기(부활절, 성탄절 등)나 특별한 행사(창립기념, 찬양의 밤 등)가 있을 때에는, 또 특별히 시간을 더 내어야 한다. 이런 때에 열의가 없으면 이 모든 일들이 귀찮고 재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하지만 열의가 있으면 아무리 힘든 일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찬양대원은, 성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을 잘 관리하여, 항상 찬양할 수 있도록 몸을 관리하며, 감정과 생활을 성실하게 관리하여, 피곤하더라도 생활의 바쁜 일이 생기더라도, 성실하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기도로 모든 환경과 형편과 자신의 마음과 몸의 상태를,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성실하게 연습과 예배에 임해야 한다. 찬양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성실하게 출석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북한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이번 주에는 지난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시리즈에서 나눈 내용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나누고 3월 한 달은 다양한 주제의 내용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나누었지만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큰 주제안에서 ‘통일’에 대한 정의는 성경적이고 본질적인 관점에서 다루었고 ‘한민족의 부르심’에 대한 거대한 내용은 다루지 못하고 먼저 북한내부의 정치·경제가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어떻게 흔들리고 변화되어왔는지에 대해서 전문가가 아닌 지극히 일반인의 관점에서 아주 간략하게 나눴습니다. 아직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루기에는 이르다는 판단 하에 이 주제는 자연스러운 인도하심에 맡기고 다시 다루기로 합니다.

‘북한’을 떠난 적 없으신 하나님!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시리즈의 마지막 10편을 마치면서 저는 ‘북한을 휩쓸고 있는 한류열풍이 만들어가는 북한에서의 통일준비’에 대해 다소 상세하게 나누었습니다. 남쪽 사람들이 북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북한의 시장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틈새로 들어간 남한의 문화를 통해 어떻게 북한이 ‘남한화’되어가고 있는지, 그래서 북한에서의 자동적인 ‘통일연습’을 바라보며 감사한 부분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초점은 당연히 복음의 문이 더 열리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지난 10편에서 나눈 내용에 이어 북한 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북한 내의 ‘지하교회’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이제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자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북한에서 ‘지하교회’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수적으로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통일운동 또는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끔 강의에 나가서 ‘북한에 지하교회가 있나요? 있다면 몇 명 정도로 추산하는가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잘 정리를 해서 말씀드리지만 마음이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궁금할 것입니다. 최소한 공식적으로 90년대 이전까지는 북한의 ‘지하교회’ 존재여부가 질문거리조차 되지 않았으니까요. 왜냐하면 북에서의 종교말살정책과 더불어 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고 없앴다는 것은 남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래서 그렇게 확고히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온, 세상의 모든 역사위에서 일해오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역사가 북한 땅에서도 있어 왔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북한이 하나님을 버렸기에 저주를 받았고 그곳에는 하나님이 안계신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도, 지구촌의 지난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가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환란과 핍박이 있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신 놀라운 ‘복음의 역사’는 그 분의 열심으로 결코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 궁금해야 하는 것은 북에 지하교회가 또는 그리스도인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찬양하며 기도하며 우리도 ‘통일준비’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순교의 피가 뿌려지고 있는 그 땅의 이기는 자들을 통해, 마지막 때 이 민족을 들어 쓰시려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이제 우리는 보아야만 하고 나는, 우리는, 우리 대한민국 교회는,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명의 자리’를 찾아야만 합니다. 북한 내에 불고 있는 ‘남한열풍’을 능가하는 ‘복음확산의 역사’는 오늘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통일!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꿈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소망이고 비전입니다! 할렐루야!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아브라함 이야기



나그네 인생과 영생하시는 하나님/ 창 21:22-34 (하)


영적인 진리 (1)- 나그네 삶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조약을 강요하면서 아브라함을 나그네로 지칭을 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네가 머무는 이 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머물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르타’ (gartaœ) 인데 ‘머물다’는 뜻도 가지고 있지만 ‘여행한다’는 뜻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로서’ 일시적으로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머무는 이 땅’은 ‘네가 나그네로서 머무는 땅’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비록 네가 여기 머물고 있지만, 네가 사는 이 땅은 너의 땅이 아닌 나의 땅이다. 너는 단지 잠깐 동안 나의 땅에 머무는 나그네일 뿐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단어가 34절에도 다시 한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한국말 성경에서는 이것이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되었지만, 이것을 다시 한 번 정확하게 해석하면, ‘그가 나그네로서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많은 날들을 머물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비멜렉과의 만남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삶이 나그네라는 것을 일깨워주셨던 것입니다.

영적인 진리 (2)- 영생하시는 하나님33절에 보면, 조약을 맺고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장관 비골이 돌아가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나와 있습니다. 가나안에 온지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재산도 많고, 사병조직도 갖고 있고, 자식도 얻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던 그에게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통해서 이 세상의 삶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아비멜렉이 말한 의도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네가 아무리 형통한다고 해도 내가 주인이다’ 라는 의도로 말했지만,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온 이상 다시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고 인생 최대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로서의 실존을 바라보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영원성을 깨닫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바라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에셀나무- 깨달음을 기억함하나님이 깨달음을 얻게 해주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에셀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33절). 여기서 에셀 나무란 반사막성 기후인 가나안과 중동 땅에서 사철 푸른잎을 자랑하는 희귀한 나무이기 때문에 기념수로 자주 애용되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귀한 깨달음을 얻은 사실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하여 그곳에 에셀나무를 심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면 깨달음을 얻은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깨달음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려면 그것을 자꾸 상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귀한 깨달음, 자신이 이 세상의 나그네라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이것을 명심하고 살기 위해서 나무를 심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볼 때마다 자신이 나그네이며 저 영원한 천국으로 가야 할 존재임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기적인 기도와 묵상이 우리에게 에셀나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깨달음을 얻었으면 그 깨달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 적용될 수 있도록 그 말씀을 품고 기도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예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아브라함은 깨달은 것을 상기하려고 에셀나무를 심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3절).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예배드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예배는 인생이 나그네의 삶이라는 깨달음과 지속적인 묵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깨달음과 은혜를 우리는 예배를 통해 드러내야 하며 예배가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필요한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며, 그분을 통해서만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예수님의 재치 있는 표적



작년 가을 즈음에 소개를 받아 어떤 분 집에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집사님인데 예전에 믿음이 좋았으나, 지금은 특별히 출석하시는 교회가 없는 것 같다고 하여, 내심 전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신이 나서 약속을 잡고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분이 신학을 공부하고 집사님이 아니라 전도사님이 되어 계시더군요. 전도는 못하게 되었으나, 귀한 사역자가 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싶어 “앞으로의 사역에 대한 축복을 해드려야겠다” 고 생각하는데, 이 분이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과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이 다르고, 심지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도 어쩔 때는 안수하여 사람을 낫게 하고, 어쩔 때는 환자를 보지도 않고 말씀으로만 고치시고, 또 어쩔 때는 진흙을 눈에 붙여서 병자를 고치는 모습이 나오는 등, 성경에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결론은 성경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다양하게 과장되고, 부풀려지고, 편집되었다는 식의 이야기이고, 또 자신의 학문적 지식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때 바로 드는 생각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고전 8.11) 라는 구절 이었습니다. 저도 캐나다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비평이론에 대해 공부를 하였습니다만, 신학이론은 성경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야지 성경의 내용에 우선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속으로 드는 생각이 이런 사람이 목회하면, 그야말로 바르지 못한 지식으로 믿음이 약한 성도를 넘어뜨리게 되는 일이 생기겠구나 싶어 차분하게 권면하고 나왔습니다만 그 후에는 만나본 일이 없어 소식을 알지 못합니다.

지난 달부터 연속으로 요한복음의 표적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지난 주에 갑자기 그 때의 일이 생각 났습니다. 설교 본문이 바로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눈 먼 자에게 진흙을 눈에 붙여서 낫게 하시는 부분’이었거든요. 확실히 이 표적은 조금 특이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와 달리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라는 특별한 행동을 통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낫게 하실 능력이 없어서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술적인 샤머니즘이 나타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기록이 성경에 삽입된 것도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표적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관되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것을 선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표적들은 뒤로 갈수록 더 강하게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믿음을 가지기보다는 신기하게 여기고 그 기적적인 결과만을 보고 환호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열병에 걸린 아이를 고치시고, 다음은 38년된 병자가 나오고, 그 다음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나오고, 그 다음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표적을 보며 ‘그냥 말씀으로만 고치시지 않고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고치셨다는 사실에’ 더 큰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위트와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보는 독자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시는 행동”을 상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뭐가 생각나십니까? 저는 가장 처음 떠오르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우리 사람을 만드신 창조, 그 창조로 인해 태어난 아이가 날 때부터 맹인(부족함이 있는 피조물)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부족한 부분을 예수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채워 넣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은 물론이요, 창조의 권능이 있음을 보여주셨고, 요한복음 1:3의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의 예를 우리에게 재치 있게 보여 주셨습니다.

다른 표적들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서 ‘광야에서 내렸던 하늘의 양식 - 만나’ 사건에서처럼 주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선포하시고, 물 위를 걸으셨던 표적을 통해 ‘모세의 홍해, 여호수아의 요단강’에서 처럼 심판을 넘어 구원의 약속으로 인도하는 구원자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창조의 권능이 있음을 보여주신 후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표적’을 통해 부활의 권능을 확인시켜 주시며, 우리에게 생명의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사모하는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은혜가 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용균 목사 / 밴쿠버한마음교회 / 778-554-9003]





필객의 붓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사람들이 마음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외롭다고,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상처 받았다고, 우울하고 혼란스럽다고,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 관계의 뿌리에 싸움과 갈등이 얽혀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우자때문에 자녀때문에 부모 때문에 누구누구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를 받을 자신의 분량이 작고 옹졸하고 닫혀있고 이기심에 가득차 있기 때문임과 상황을 해석하는 자신의 생각과 대꾸하는 말에 더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모든 상황과 모든 문제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온전해 질텐데 사람들은 허망한 생각과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채로, 자기 연민과 낙심과 염려안에 고집스럽게 생각의 똬리를 틀고 오히려 술을 마시거나 외도를 하거나 도박이나 게임에 빠지는 등 유혹에 문을 열어놓고 점점 더 방탕의 길로 가는 것을 보면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는 말씀이 속에서 안타깝게 메아리 칩니다.
교육에 대한 최고의 기대는 잠언 1장에서 솔로몬이 언급한 대로 지혜롭고 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교육은 이미 방향을 잃고 불확실의 풍랑과 싸우고 있습니다. 참된 인성과 바른 과정보다는 성공에 초점을 맞추고 높은 연봉이나 폼나는 삶을 위해 치열하게 공부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덕망이 있는 것이 아니고, 크게 성공한 사람이 알콩달콩한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그토록 힘들게 공부한 의사, 변호사들 마저 취업과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흔하게 보고 들으면서도 이 무모하고 극렬한 달림을 멈추지 못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언급을 했다지만 정작 안으로는 무너진 교권, 권위에 대항하는 아이들, 엄청난 사교육비, 기러기 가족등 국민 모두가 교육에 깊은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를 장악한 컴퓨터의 황제가 요절을 하고,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세계적인 가수들이 의문의 죽임을 맞이하고, 국내의 유명한 행복 전도사가 자살을 하고, 건강박사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등, 이 시대의 성공의 아이콘들이 세상에서 허무하게 사라지는것을 보면서, 돌이키라고 삶의 방향을 수정하라고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는 지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이나 성공이나 명예나 남다른 기술 등,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 염원하는 가치들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삶이라는 자동차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며 인간이 잘 되는 길입니다.
잠언을 읽어보면 우리가 이생에서 간절히 얻기 원하는 모든 축복과 약속이 지혜에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한 힘이 성경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성경이 딱딱하고 어렵다는 이유로 너무 단 것을 많이 섞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단 것을 많이 먹은 아이들이 밥을 싫어하듯, 인공 감미료에 미각이 상하여 송이꿀보다 더 단 성경의 참 맛을 모르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요즘 모든 부모님의 공통적인 고민이 아이들이 기계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아이들의 눈 빛이 풀려있고 어디엔가 힘을 뺏기는 것처럼 흐느적거리고, 자발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말이 두서가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조리있게 표현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생각이 깊지 못하고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포스트 모던의 혼돈속에서 아이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다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사는 것이 맞는다고 확신하며 훈계와 충고에 심한 알러지 반응을 보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악한 영들이 드라마나 영화 소설등의 메시지를 통해 어른들의 교훈이나 지혜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도록 교육하고 있는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된 세상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지혜가 우리를 우매의 재앙과 파멸에서 우리의 삶을 보호하고 지켜줍니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아픈 것은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외롭고 두려운 이유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부함을, 용사는 용맹을, 운동선수는 민첩함을, 학자는 지식을 자랑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지혜가 들어가면 최고의 대학에서 열등감에 시달리고 우울증이나 두려움에 시달려 자살하지 않습니다. 성공을 하고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도 없애지 못했던 마음의 고통, 오히려 올라갈수록 더 커지는 심적 부담에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켜 줄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의 샘은 말라가고 있습니다. 기계를 대하면서 관계를 다루고 갈등을 해결하는 인간적 능력이 축소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성경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늙어서도 떠나지 않을 영원한 지혜를 과외 공부 시켜야 합니다.
끝을 향하여 급류로 치닫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혜의 말씀을 듣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킬 수 있도록 성경을 주시고,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게 하시는 이 엄청난 사실을 인식할 때마다 내 영혼이 기쁨을 주체하기가 힘듭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재미있는 사도행전



하나님 진동증후군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 하나가 있다. 참 좋은 젊은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가지길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나도 있는 힘을 다해 기도로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과 같은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목사님 저 아이를 가졌어요!” “정말 축하합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예쁜 아들이었다.

출생 후, 2-3달 쯤, 아이는 엄마, 아빠와 함께 세상 구경을 나섰다. 차는 경부고속도로 위를 힘차게 내달리고 있었다. 이때, 아빠의 핸드폰 속으로 문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빠의 시선은 핸드폰의 작은 화면으로 옮겨졌다. 그 순간.....
집중력 상실이 불러온 사고였다. 아이는 이 땅에서의 짧은 생애를 그렇게 마감하고 말았다.

집중력이란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에 ‘정신적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일일수록 더 큰 집중력을 요한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주길 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4:24).

럭키(lucky, fortunate)란 좋은 이름의 뜻을 가진 ‘유두고’란 청년이 있었다(행20:9). 바울의 설교를 열심히 듣던 중, 졸음이 세차게 밀려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청년은 3층 예배실 창문에 걸터 앉아 설교를 듣던 중이었다(행20:7, 9). 청년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사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의 드로아 고별설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행20:9).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집중력 상실은 영적 죽음을 불러올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사건이었다.

예배는 만남이다. 누구와의 만남인가? 당연히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이 만남의 자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되어져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예배에 초대 받지 못한 불청객 하나가 있다. ‘핸드폰’이 예배의 불의의 도구로 등장한 것이다. 유두고의 ‘졸음’이 오늘의 ‘핸드폰’으로 변신해 우리의 영적 예배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어 핸드폰을 통해 성경과 찬송을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떨쳐버릴 수 없는 불안은 예배 중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뛰쳐 나가는 행위는 자신에게 그리고 집중력을 가지고 예배하려는 자들 모두에게 큰 피해를 주는 행위다. 특히 초신자들 혹은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이런 잘못된 예배의 모습에, 어떤 마음과 어떤 예배관을 가질까를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마저 든다.

요즘 ‘유령진동증후군’이란 이상한 전염병이 돌고 있다. 이 병은 나에게 전화가 왔을 것이라는 착각에 자주 휴대폰을 열어 보는 증상을 말한다. 그리고 휴대폰 벨이 울리지 않는데 벨 소리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증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괴상한 증상이 아니다. 우리에겐 주님이 나를 늘 찾고 계신다는 생각에 자주 그분께 나아가 기도하고, 말씀보는 전염병 즉 ‘하나님 진동 증후군’에 감염되는 것이 필요하다.

[황보창완 목사 (글로리아 한인교회) / 778-708-5540]
 
 
 
 
 

터키 이야기



7. 소아시아와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2) 서머나 (SMYRNA)
 
소아시아 지방의 서해안에 위치한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로서 에게 바다 해안을 따라 아름답게 도시가 형성되었고, 오랜 역사를 통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기에는 지금의 바이락클르(Bayraklı)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지금도 그 유적들이 남아있다.
서머나는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작가로 유명한 고대 헬라의 시인 호머의 고향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옛 도시 서머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가진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서머나가 잠시 그리스령이었으나, 터키 초대 대통령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장군에 의해 터키에 환원되었다. 당시 독립군을 지휘했던 케말 장군이 그리스와의 전투에서 서머나를 되찾은 후 서머나 바닷가에 앉아 술을 마시며 도시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시상이 절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급격히 진행된 무분별, 무계획적인 개발과 도시화의 결과로 그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 초기역사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BC 3천년 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이 나타난다. 그리스에서 이주한 이오니아계 사람들이 살기 이전에 레레그(Lelerl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의 테페쿨레(Tepekule)에서 발견된 도자기 파편들은 BC 10세기경의 것으로 이 시기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집단적으로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현재에 발굴되어 볼 수 있는 거주지 터들은 BC 9-7세기의 것들이며, 이들 가운데 BC 640년에 건축된 아테나(Athena) 신전도 포함되어 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BC 665년 리디아 왕국의 기게스(Gyges)의 이오니아 지역 침공 때 공격을 당했으나,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성벽을 중심으로 침략자들을 격퇴했다. 그러나 BC 600년, 알야테스(Alyattes) 왕이 이끄는 리디아군에 함락을 당해 도시는 폐허가 되고 주민들은 주위로 분산 이주하였다. BC 500년경에 아테나 신전이 복구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여 이 시기에 다시금 도시가 복구된 것처럼 보이나 이전의 규모로 회복하거나 번영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서머나 출신으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저자 호머(Homeros), 2세기경 서머나에 살았던 아엘리우스 아리스티테스(Aelius Aristides)는 멜레스 강변에 호머에서 헌사된 호메레이온(Homereion)이라는 신전이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파우사니아스(Pausanias)도 호머와 관련해서 “서머나에 멜레스강이 있는데, 물이 깨끗하고 좋다. 강 바로 곁에 호머가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강의 근원을 이루는 샘이 솟아나는 동굴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멜레스강은 이후에 터키인들 사이에 멜레즈 시내(Melez Çay)라고 불리며, 1895년 서머나에서 가장 수질이 좋은 이 물을 이용해 서머나 최초의 터키 전통 술인 라커공장이 세워지고도 했다. 공장이 건축될 당시까지도 샘 근처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개발의 물결에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고 있다.
(2) 헬라시대
아나톨리아를 정복하던 알렉산더 대왕(BC 334)이 이곳에 주둔하여 “서머나에 새 도시를 세우라”는 꿈을 꾸고 서머나에 성채를 건설하여 주둔하였고, 자연 항구와 교통의 요지로 인해서 상업도시로 발전되었으며,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Diaspora Jew)들이 이곳에 이주해 살았다. 현재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으며, 회당이 여러 개 있다.
(3) 로마시대
서머나는 로마에 충성을 다했으며(BC 133년 이후) 로마 원로원은 그들의 공로와 충성심을 참작하여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의 신전을 세우도록 하였다. 서머나는 아시아 제1의 도시라는 명예를 얻기 위해 에베소, 버가모 등과 경합을 벌였다(BC 55-56).
스트라보(Strabon)는 이 도시를 “모든 도시 중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표현했다. AD 178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도시 재건을 명령하여 재건설되었고, 1688년과 1778년에도 큰 지진이 있었다. 역사를 거쳐 리디아, 헬라, 아랍, 비잔틴, 십자군, 터키, 그리스 등의 수많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파괴되고 소실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