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일 금요일

필객의 붓



마음 눈을 밝히사



아이패드를 여니 한 입 베어먹은 사과의 로고가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사과를 먹음으로 오히려 인류가 놀라운 테크놀로지의 지식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인 모양입니다. 가볍고 휴대가 간편하면서도 노트북보다 밧데리도 오래가서 어디서나 글도 쓰고 필요한 작업도 할 수 있고, 뉴스를 보고 지식을 검색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성경도 보고 귀한 말씀도 듣는 일까지 나에게 꼭 필요하고 너무나 유용하고 고마운 도구이긴 하지만 선악과를 생각나게 하는 참람한 로고를 볼 때마다 내가 이걸 써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인간이 이룩한 기술이 얼마나 놀라운지, 이제는 아예 종이처럼 얇은 자판 하나만 무릎에 놓고 타이핑을 하면 저 앞에 놓아둔 화면에 조로로 글이 써집니다. 앞으로는 영화에서처럼 허공에 펼쳐진 자판을 두드리거나 생각만 해도 타이핑이 되는 때가 곧 올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은 실로 놀라운 존재입니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나 소리를 테잎에 저장할 기술을 발견 했으며, 전파를 통해 보낸 문서가 멀리 외국에 있는 빈 종이에 똑같은 문서로 재생되는 기계가 생겨났으며, 작은 칩 하나에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들을 담아 내는지, 기술이라기 보다는 요술처럼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런 기술들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 이론으로 설명했다면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물며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은 분명 너무나 아름답고 놀라운 세계일 것입니다. 과학보다도 신기술보다도 훨씬 더 위에 있는 진리의 계시, 발전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한, 사람들의 영혼을 꿰뚫는 권능을 가진 성경을 봅니다.
집집 마다 한권 씩은 있을 정도로 흔한 것이지만 너무나 흔해서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가치가 숨겨져 버렸고 그 안의 지혜와 권능은 깊이 묻혀 있는 책,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관점으로 보면 닫혀있고 지루하기만한 책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임하여 그 아름답고 졍결한 계시의 빛 아래 서면 이 생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보지 않고는 못배기 듯, 성경 안의 거룩한 뜻을 깨닫고 소망으로 용솟음치는 심장의 힘찬 박동을 느껴보고 꿀 송이처럼 단 맛을 본 사람에게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즐거움을 막는다면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입니다.

성경은 한 단어 한 구절 모두에 천국과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담긴 책입니다.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고 심령과 골수와 관절을 쪼개는 역동하는 힘이 실려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나 자신 걸음마 단계인 미숙한 글을 쓰고 있지만, 글을 쓰면서 아주 평범한 문장일지라도 몇 번씩 생각하고 한 단어도 그냥 쓰지 않고 마땅한 어휘를 찾아 고르고 골라서 쓰게 되는 이치로 본다면, 하물며 수 천년의 역사 동안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실 성경은 조사 하나도 결코 우연히 쓰이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만큼 점이나 획 하나도 소홀히 하면 안될 너무나 중요한 말입니다.
성경은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계시로 열려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또한 그 기름 부으심이 친히 우리에게 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시며 아버지의 나라를 열어주십니다. 성경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음성이며 우주의 신비를 능가하는 광대한 계시의 세계이기에,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 문학이 되기도 하고 음악이 되기도 하고 과학이 되기도 하고 신학이되기도 하고 건축이 되기도 하고 사업이 되기도 하고 정치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광대하면서도 세밀하고, 전 우주적이면서도 개인적이고, 밝히 드러난 것 같으면서도 그 비밀이 한 없이 깊은 책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고 창조하게 하고 용서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합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방탕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으며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위로를 얻었고 새로운 삶을 찾았고 죄악의 저주 아래서 생명의 축복으로 옮겨졌습니다.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임하면 사람은 자신이 지어진 목적대로, 자신의 색과 향기와 그 빛깔과 형태와 성질로 충만한 존재가 됩니다.
다윗의 영광된 삶의 비결은 늘 마음에 하나님을 두었던 것에 있습니다
요동치고 억울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눈을 돌려 늘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바라보았고 그분의 힘을 붙들고 의지했습니다. 다윗은 세미나나 신학공부가 아니라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에 이 소원이 충만해집니다.
말씀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 혼자, 단 하나 있는 것처럼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역사의 아주 소중한 일부인 것처럼 귀중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말씀 속에 나의 최고의 행복이 있고 말씀이 나의 영광을 깨웁니다.

오늘의 삶은 절대 밋밋한 반복이 아니라 천년의 신비가 담긴 하루이며 영원의 모습을 이루는 중대한 과정입니다. 인간이 된 존귀한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탐욕과 죄악에 종노릇하며 멸망하는 짐승처럼 살고 있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 눈을 밝혀주사 이 시대, 이 생에로의 부르심의 소망을 깨닫는 놀라운 역사가 복음이 전해지는 곳곳에서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재미있는 사도행전



매력적인 성도의 두 가지 특징 (2)



매력은 자석과 같다. 매력은 사람을 끌어 당기는 강한 힘이다. 매력적인 사람의 가장 큰 힘은 열린 마음과 열린 귀를 가졌다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듣는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자크워드’는 “어떤 칭찬에도 동요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상대에게는 마음이 흔들린다”고 말했다.

사도 바울의 눈에 아주 매력적인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베뢰아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어떤 매력인가?” 사도행전 17장11절을 보라!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라고 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하나님을 말씀을 향한 열린 마음과 열린 귀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믿음은 말씀의 창을 통해 들어온다(롬10:17).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있는 곳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법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니 그들 가운데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다(살전2:13). ‘역사’가 무엇인가? 변화다. 새로운 생명의 변화(행17:12) 그리고 새로운 삶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살전1:6-7).

중견배우 박원숙씨가 모 방송 TV에 나와 이런 고백을 했다. “최진실이 죽기 한 달 전쯤 새벽 2시 반 정도에 전화가 왔다”며 “대뜸 tvN ‘택시’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 출연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 했다. 박원숙은 잠을 깨운 그녀에게 화가나서 “너 술 먹었니?” 하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최진실은 방송 출연을 부탁한 게 하니라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거였다” “난 그때 최진실에게 말동무가 필요한 줄 몰랐다” “그게 너무 마음에 걸린다”며 눈물을 흘렸다. 듣지 않은 것에 대한 뒤늦은 후회 였다.

뒤늦은 후회는 신앙생활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롯의 사위’들을 보라! 그들은 심판의 말씀을 농담으로 알고 듣지 않았다(창19:!4). 그리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역시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삼상2:25).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결과는 참으로 냉혹했다. 비참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창19:23-25,삼상2:34).

말씀을 들어야 산다. 들어야 살 수 있다. 혼탁한 세상 가운데 살면서 말씀을 듣고, 알아야 선과 악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기준을 알 수 있다(시119:11).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무엇인지를 듣고, 알아야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다(느1:8-11).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들이 무엇인지 듣고, 알아야 고통 중에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요14:27).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 받을 수 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질 수도 있다. 열심히 봉사도 가능하다. 오랜 교회생활이 자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명의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열린 마음과 귀를 통해 날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파고들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매력적인 성도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마음과 귀를 활짝 열고, 매일 하나님 말씀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다.

황보창완 목사 (글로리아 한인교회) / 778-708-5540
 
 
 
 
 

아브라함 이야기



하나님 약속의 성취/ 창 21:1-7 (상)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 중 자손에 대한 약속이 드디어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열매없는 황폐한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들을 받고 믿음의 여정을 걸어온지 25년 만에 하나님의 첫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가 감격스럽고 우리를 설레게하는 것은 25년 만에 이루어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첫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약속을 성취하시며 무엇을 우리에게 원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약속을 이루십니다.1절에 보면, ‘말씀하신 대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말씀하신 대로’는 히브리어로 ‘카아쉐르 아마르’ (ka}∞sûer }aœmaœr)란 말로 ‘하나님께서 (과거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란 뜻입니다. 더군다나 짧은 1절 속에 이러한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때때로 약속에 대한 지연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지 않고, 자신의 방법을 따르기도 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비웃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그 말씀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한대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을 합니다. 사소한 시간 약속으로부터, 빌려간 돈을 언제까지 갚겠다는 채무변제의 약속이든지, 평생 남편과 아내만을 사랑하겠다는 결혼 서약 등등.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기이며 기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아서, 생명을 잃어버려서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키고 싶어도 힘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과는 달리 능력이 한이 없으시기 때문에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실행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창 21:1). 신명기 23:19에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약속한 대로 지키실 뿐 아니라, 자신이 하신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 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시기’란 ‘정해진 시간 (at the appointed time)’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때를 무척이나 강조합니다. 그래서 창 17:21에 보면,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고 나와 있는데 이 ‘시기’는 ‘이 정한 때에 (at this set time)’ 입니다. 또한 창 18:14에도 보면,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시간 (at the time appointed)’을 강조하시는데 우리는 자꾸 내 시간표에 맞추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바라며 내 스케줄에 맞지 않으면 실망하고 좌절하고 하나님을 의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시간표가 있다. 내가 정한 시간이 있다 (I have the appointed time for you).’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 앞에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고 약속의 말씀에 늘 붙잡히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밴쿠버 사람, 나성 여행기


지난 주간 세미나 차, L.A에 다녀왔습니다. 한국에 있다가 바로 갔다면 모를까, 밴쿠버에 살다가 가니 참으로 복잡한 도시처럼 보이더군요. LAX공항에 도착하니 주최 측에서 픽업오신 분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제겐 LA가 초행길이었기에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차에 올라 공항을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불안함이 밀려왔습니다. 운전하시는 분이 얼마나 차를 험하게 몰던지요. 이내 운전하시는 분께 저의 불편한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였습니다. “운전이 참 빠르시네요” 그랬더니 바로 그 분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운전이 좀 난폭하지요? LA 운전 습관이 이렇습니다. 이렇게 운전하지 않으면, 여기서 운전하기 힘듭니다”.

그러고 보니 같이 달리고 있던 주변 차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군요. 갑자기 끼어들기는 다반사이고 속력도 굉장했습니다. 저를 픽업하시던 분의 말처럼 제가 밴쿠버에서 운전하던 습관으로는 LA운전이 감당키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LA에서의 첫인상을 맞으며 제게 한가지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도로주행 중인 운전자 모두가 빠른 속력으로 험하게 차를 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정상이 아니고 때로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험하고 빠르게 차를 몰아야만 같은 도로 위에서 주행할 수 있다’라는 말은 마치 우리 신앙인들이 정상적인 신앙의 모습을 중요시 하려는 생각보다 때론 비정상적으로 험하고 난폭한 모양일 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빠르게 과속 질주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의 속도만 생각할 뿐, 바르고 안전하게 가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줄어든 것 같습니다.

분명, LA의 도로교통법이 그렇게 허락하고 있지 않을겁니다. 엄연한 규정속도가 있고, 교통에 관한 여러가지 법률들이 제정되어 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도로 위를 달리는 운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르고 안전한 운전을 유도하기 위해 운전자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교통법보다 다른 운전자들을 기준삼아 자신들의 마음에 내키는대로 질주하며 운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복하여 말씀드리지만 그 모양이 우리의 신앙의 모양과 너무도 닮아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말씀의 기준이 성도들의 삶과 신앙의 기준이 되기보다 각자의 마음에 편하고 원하는대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갈 때가 참 많습니다. 때로는 불안한 마음에 신앙의 속도를 내어 보려고 각종 이단사설과 신비주의적 영성운동, 그리고 그릇된 종말적 이슈 등, 주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것들을 신앙의 여정에 여과없이 충전한 채 스스로 만족하며 전력질주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목회자로서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빠른 것보다 안전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빨리 가는 것 보다 법에 따라 바르게 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운전자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여 제 속도와 제 규정에 맞추어 운전해야 하는 것은 때로 그것이 번거로워 보이고 늦어지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에게 운전미숙의 초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성도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의 기준에 따라 바르게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LA에 가보니, 밴쿠버가 너무 좋습니다. 때론 느리고 더딘 것 같은 캐나다의 풍토가 불만스러웠던 적도 있었지만,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고 바르게 가야 하는 캐나다의 삶에 점점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촌사람의 나성여행기, 하나님이 또 하나의 목회적 교훈을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혹, LA에서 운전하실 기회가 있으시다면 절대 안전운전하셔야 합니다!

[문경돈 목사 / 나무십자가한인교회 / 778-772-4738]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25 >









0124. 무엇이 중요한가? 행복이 아니라 구원이다. 기독교 실용주의는 복음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거나 행복을 약속한다는 류(類)의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자기요구, 자기불만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높은 지성, 지식, 교양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모든 덕을 갖춘 모범적인 사람이 완벽한 삶의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아도 여전히 그는 불행하다. 이 행복이라는 것은 기독신앙에서 주어(주체)가 될 수 없는 단어다.

인간들이 행복을 그렇게도 찾고 있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비극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선진국일수록 ‘불행지수’가 높고 한 때 한국의 ‘행복 대사(大使)’로 알려진 분의 자살기사도 보았다. 현대인들은 죄(罪)보다 자신의 운명을 더 중요히 여긴다. 제2 바티칸공회(1962-65)가 끝나자 온 세상의 일간신문에 ‘오늘의 당신의 운명(사주팔자)’이라는 기사가 실리기 시작하였다. 천주교의 중세암흑시대가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죄가 바로 인간의 운명인데도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는 사단의 전략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끔 되어있다. 죄가 그 사람의 운명인 이유이다.

0125.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5) 누가복음 ②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구원하시는 구원이라…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리라”(눅1:67-79).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단의 반역으로 인간에게도 들어왔다. 죄가 만들어 놓은 그 장벽과 참혹한 결과와 엄격한 실체로서의 죄를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은 사단의 전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부정적인 (매사에 ‘긍정적’이라는 신복음주의 철학을 경계하시라) 정죄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이 세상의 삶이 정상적이 아니고 악하다는 것이다.

전 신약성경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죄의 심각성은 복음서의 전 장(章)에 도배되어 있으며 죄가 매우 심각한 함의를 갖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죄에 대한 사려깊은 고찰과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기독교는 바로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로 흘러들어가게 되어있다. 신복음주의는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마저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도 없고 거듭남이 없으니 구원의 감격이나 확신의 기쁨이 매말라 있는 것이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천국보다 지옥에 대해 더 많은 분량을 언급하고 계심을 보게된다. 죄의 실재성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까지 들어온 세상의 철학, 신정통(신복음)주의 영향으로 인하여 죄의 영원한 결과를 부인하기에 이르렀고 ‘사랑’이란 단어에 대한 현대인들의 천박한 개념은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오해하여 결국은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구원받는다는 현대적 개념에 기만당하고있다(『칼 바르트』부터『헨리 나우엔』등등에 이르기까지). 천국개념은 그대로 흠모하면서도 지옥개념은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영생과 영벌’의 ‘영원한’이란 헬라어는 같은 단어이다. 신복음주의 성경의 대표격인 NIV성경은 구약의 33곳에 언급되어있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100%, 신약에서는 48%를 제거하였다. 다른 ‘지옥’개념의 다른 역(譯)인 ‘하데스’(hades)는『무슬렘』,『뉴에이지』철학에서는 ‘극락, 낙원’을 뜻하는 단어이다. 뉴에이지 이단『죠엘 오스틴』(Joel Osteen)목사(?)는 자기는 “죄”(sin)라는 단어는 입밖에도 내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천명한다. 교회성장세미나 강사라는 자가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교회성장 비결의 하나로 절대로 교인들에게 회개를 강조하면 안 된다고 고매한(?) 방법론을 설파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목회(牧會)인지…? 다들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선한 체 하며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랑이 진리를 희생시킬 때 그 사랑은 이미 참사랑이 아니다. 기독교가 죄인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그럴듯한 사상에 불과한 것이며, 주님과의 확실한 인격적인 관계맺음이 없이 그의 가르침만 수용한다면 그 순종없는 지식은 오히려 우리를 크게 정죄할 뿐이다.


0126. 카톨릭교도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종교적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Gospel)은 종교가 아니다. 이 복음을 종교의 하나로 전락시키려는 마귀의 궤계는 늘 하나님의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가라지로 심어졌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헤롯에게 고했으면서도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종교적 무리를 향하여 “너희가…성경을 상고 하거니와…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라고 책망하셨다.

1984년, 로마 교황의 벨기에 방문을 앞두고 로마카톨릭교회의 단넬스 추기경이 발표한 3.18선언 - “카톨릭교도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종교적이다” - 은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의 진실을 제공한다. 첫째, 로마카톨릭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별개의 종교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 중 어떤 이는 대단히 종교적이란 사실이다. 칼 마르크스 (Karl Marx, 1818-83)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염두에 두었으나 그는 기독교가 종교와 상관이 없는 ‘복음’인 것에 무지했다. 천주교신자였던 어느 자매가 기독교인 신랑을 만나 그 집안을 존중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보도한 기사를 보았다. 우리들이 은연중에 사용하는 개종(改宗)이란 단어의 의미를 독자는 음미하길 바란다(장로교에서 감리교로 ‘개종했다’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리스도 교회안에서도 아직도 방황하며 카톨릭처럼 종교성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려는 유혹이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규칙을 따라 사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율법적 순종과 복음적 순종이 주의깊게 구분이 되지 못할 경우 복음이 자유케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을 옥죄는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시대의 인간의 마음은 율법주의의 오류로 흐르는 그릇된 판단을 추종해왔다. 율법의 책임과 인간의 순종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하나의 율법주의의 계약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즉 언약을 계약으로, 하나님의 은혜나 성령의 은사를 인간의 순종함에 조건부로 주어진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준수는 결국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자비를 제쳐놓고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더 큰 강조점을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죄악된 인간의 심중에서 유래된 이성의 바탕 위에 복잡한 율법사상체계를 가진 구원관을 강조하고 체계화하여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자랑하고 옳은 삶을 통한 구원을 강조함으로 스스로 사단의 ‘종교성’이라는 올무에 걸려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뿌린 옷”(계19:13), 즉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義)로다 하더라”(계19:8, kjv, “the righteousness of saints” / “성도들의 의”를 대부분의 현대역 성경들은 1881년 로마교황추종자『웨스트코트/호르트』에 의해 천주교의 행위구원인 ‘옳은 행실’로 바꾸어져 있음에 주의하시라)를 거절하고 자기 의(義)에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 속이는 자로서의 마귀의 궤계는 다양하며 한 인간이 ‘여자, 술, 도박’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되면 사단은 반대로 경건의 모양을 무기로 낚아채는 것이다. 물론 이 경건이라는 것은 참이 아닌 ‘사악한’ 경건으로 바리새인들이 붙들었던 자기의(自己義)이었다.

0127. 악(惡)으로부터 벗어나려하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자비없이는 불가능하다
한 인간의 영혼에 큰 기적이 일어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탐색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인 믿음, 즉 “계시될 믿음”(갈3:23)이 주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믿음에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아래에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있는 것이다. 종교를 답습하며 율법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경쟁할 뿐 아니라 은혜를 대적하는 무기로 율법을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 이성, 영혼이 다 무너져 내리는 그 곳이 바로 십자가의 그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기독교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1:23 / 1:18 / 2:2 / 갈6:14참조).

복음의 기준은 때로는 세상에서 한없이 불리한 것이다. 복음의 목적을 이 세상에 맞추지 말라. 모든 것을 잃는다해도 영생에 이르는 구원에 두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모한 것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의 같은 이야기의 연속이다.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행한 설교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요구가 ‘회개에의 요구’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회개하여…구원을 받으라”(행2:38-40). 그리하여 “헛된 일을 버리고…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함이라”(행14:15). 자기중심적인 속박된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자유의 삶이라는 은혜의 선물을 받아 누리라는 초대이다. 회개는 하나님께 하게 되어있지 사람들에게 ‘드러내는’(『드러냄』, 치유와 회복)것이 아니다. 모든 혀가 하나님께 직고하게 되어있지 천주교의 고해성사가 아니다. 이 역시 웨스트코트/호르트에 의해 변개된 구절에 기인한다. “너희 허물(fault)을 서로 고하며…”(약5:16)의 ‘허물’을 “죄(罪)”로 변개, 고해성사를 합리화하였고 영국고교회(High Church of England)와『옥스포드』운동(Oxford Movement)과 천주교에서 이를 교리화하였다(1881년 7월에 발간된 아일랜드의 카톨릭계 신문 ‘Dublin Review’는 이제 천주교 신부들은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The Apostles have now power to ‘forgive’ sins, and not simply to ‘remit’ them. ‘Confess therefore your sins’ is the new reading of James 5.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복음의 중심에 둘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다른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에 관한 지식조차도 올바른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 512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②)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손으로 말하는 사람들 ② 위대한 전도자들



전혀 예기치 않게 시작된 농아인들 모임은 급성장하게 되었다. 나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드려다 보기 시작했다. 우리 농아인들 대부분은 쥐꼬리 같은 국가장애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었다. 그 중에 깨인 사람들은 농아협회에서 지정해 준 시장 모퉁이에서 쇼핑백을 팔아 생활하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차별을 받는 천덕꾸러기였다. 필요할 때면 불러 허드레 일들을 시키지만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장애인들 중에서 자신의 장애를 가장 받아 들이기가 힘든 사람이 농아들이다. 겉으로는 장애가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통이 안 되는 불통으로 오는 깊은 분노의 응어리를 가지 있다. 말이 안 통하니 그 흔한 약 조차도 구입이 어렵고, 병원에 데려가도 진단과 처방 조차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경찰에 잡범으로 몰려도 통역을 할 수 없어 변호할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상황이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출산 때가 되면 임신부를 혼자 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흔한 전화 한 통이면 구급차가 오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옆에서 늘 지키고 있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전에 생각조차 못해 봤던 그들의 삶이 내겐 충격과 도전이 되었다. 이들을 섬기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수화통역자들을 키우는 일이었다. 수도의 신학교에서 방학을 맞아 교회로 내려온 ‘콘스탄틴’ 전도사가 농아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신학교로 돌아가자 방과 후 침례교신학교 수화 통역반과 농아신학교육프로그램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농아사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언제 신학교를 마치고 돌아온단 말인가? 아직도 2년이나 남아 있는데! 그래서 나는 교회 청년 중에 몇 사람을 모아 농아학교의 교사를 초청해 수화를 배우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교회는 수화를 배우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러던 한 날 전혀 예기치 않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교회에서 650키로 미터 떨어진 ‘부하라’시의 농아교회에서 보낸 형제들이었다. 우리 지역의 농아들이 교회로 모이고 있다는 소문이 그 곳까지 퍼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낸 교회와 사역비전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매주 우리교회를 방문하여 농아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2-3년 동안 돕고 싶다고 제안했다. 나는 주님께 감사했다. 너무도 적절한 때 준비된 사람들을 보내주신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생긴 첫 농아교회는 ‘부하라’라는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마약 중독으로 살아가던 한 우즈벡 농아가 주님을 영접하고 변화되어 개척된 교회였다. 이 형제가 유럽의 농아교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유럽의 농아교회가 이 교회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면서 40여명의 농아들의 모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크지 않은 농아교회는 대단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우즈베키스탄 12주 주도에 농아교회를 개척하고, 중앙아시아의 주요도시에 농아교회를 개척할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했다. 이미 2명으로 이루어진 주말 개척 팀을 6개 지역으로 파송하여 교회개척을 진행하고 있었다.

돕기로 한 전도자들은 금요일 저녁 ‘부하라’교회에 모여 기도한 후 밤새 버스를 타고 사막을 건너 토요일 새벽 5시경 이면 어김없이 교회의 초인종을 눌렀다. 지친 몸으로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잠시 눈을 붙인 후에는 온 종일 전도와 교육에 매달렸다. 한 사람은 글을 모르는 농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 사람은 글을 아는 농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오후 3시면 자신들의 교회로 돌아갔다. 이들은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선교사들보다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섬김은 농아들은 물론이고 온 교회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우리 가정이 추방 후 다시 입국하여 사역지에 거주할 수 없어 수도에 거주하면서 20여 시간을 운전해 잠입하여 교회들을 섬기고 있었다. 한 달에 몇 번을 집과 교회를 오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나를 괴롭게 한 것은 “목사님, 또 가세요?” 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몇 일 쉬고 다시 짐을 꾸리는 나에게 아내와 아이들이 내게 늘 하던 말도 “아빠 또 가요?”였다. 지쳐 돌아오던 사막 한 가운데 차를 세우고 “아버지, 언제까지 이 길을 오가야 합니까?”라며 한 없이 울기도 했다. 그러나 이 농아형제들의 헌신은 자주 자기연민에 빠지는 나를 사명자로 자리로 되돌리는 영적 각성제가 되었다.

우리 농아교회를 섬기기 위해 왔던 평신도 전도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성도들이었다. 주로 구두수선공, 목동, 시장에서 소매상, 그리고 간혹 자동차 판금을 하는 형제들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좀 도와 주려고 하면 그들은 자신들은 모든 것이 충분하다며 떠날 때 물 2 병과 빵 2개를 요청할 뿐이었다.

농아교회의 성장은 예기치 않던 다른 긴장을 불러왔다. 농아협회는 농아들을 자기들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하는데 점점 교회를 다니는 농아들의 의식이 깨면서 통제력이 줄어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경찰과 정부부서에 ‘불순한 단체’가 농아들에게 관여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공권력은 모슬렘 극렬 분자들이나 과격 종교집단이 그들을 세뇌시켜 테러를 위해 도구화할 까봐 지속적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했고 감찰을 강화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6 장 사랑스러운 톰보이들


아프카니스탄에서 일어난 일들

당시에는 여행도 자유롭고 치안 상태가 괜찮았다. 그래서 선교사 공동체가 제법 컸다. 북부의 마자리 샤리프에서 세미나를 한번 하고 남쪽으로 날아가서 수도 카불에 있는 선교사 공동체에서 한나절 치유 모임을 가졌다.

소속 단체를 초월해서 선교사 가족 30 명이 모였다. 마침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도 있어서 나눔이 더욱 재미있었다. 한편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한편으로는 깔깔대고 웃으며, 각자의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주님의 치유가 시작되었다. 다섯 시간의 모임이 끝나고 나서 모두들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또 함께 사역하는 동료 선교사와 그 가정들에 대해 너무나 몰랐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도 다른 선교지들처럼 톰보이 밭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연약하게 보이는 여성인데도 앞에 세워서 삶을 나누게 부탁하면 여지없이 톰보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아쉽게 세미나를 끝내면서 리더 격인 한 사모에게 큰 기대 없이 “톰보이 클럽”을 운영해 주도록 부탁하고 떠나왔는데 우리를 크게 웃게 하는 메일이 날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안부 메일을 보낸 후 한 달쯤 후에 그 사모가 보낸 것이다.

“목사님, BMW 클럽이 만들어졌답니다.”

목사님, 먼 곳까지 오셔서 참 감사드려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님께서 일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치유 세미나 후로 사람들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들을 보고 있어요. 제 남편도 약간의 변화가 있구요. 예를 들자면 부엌에 좀 더 자주 드나들며 알아서 도와주는 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신혼 때의). 호호 ~~
자매들은 그 후로 BMW 클럽을 시작해서 (Best Missionary Wives 또는 Big Mouth Women 일 수도 있어요~~ 해석은 좋은 걸로 하세요 ~~) 좋은 식당에 가서 잘 먹고 서로 실컷 얘기했어요. 얼핏 들으면 계 모임처럼 들리지만 그런 거는 아니라는 거 잘 아시죠? 두 번 만났는데 자매들이 너무 좋아하고, 마음들을 열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진짜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느낌들을 받고 있어요.
각본이 짜여진 게 아닌데 자연스럽게 자기들에 대해서 얘기하게 되고, 그 나눔을 통해 “나만 문제가 있는게 아니구나...” 하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문제들이 한결 수월하게 생각되게 하는 거 같아요. 남의 얘기를 들으며 자기의 문제가 스스로 해결된다고 할까요?
(주: 이 모임이 이렇게 잘 진행된 비결은 리더인 사모가 톰보이가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모임을 여성적으로 인도해 갔고 톰보이들이 오랜만에 여성스러운 재미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남편들도 샘이 나서 이브 몽땅 (이브에게 몽땅 주는 사람들) 클럽을 만들기로 했는데 그쪽도 참 재미있을 거에요. 기대 되시죠? 다음에 오시면 아마 더 재미 있으실거에요. 감사드려요...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매우 기대가 된다. 네 시간 속성 세미나를 한 곳에서 스무 시간동안 세미나를 한 곳에 못지않은 귀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인간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항상 다른가보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7)



1. 북한의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배경전에 나눈 내용의 상당부분은 1990년대 전반에 해당되는 이야기였습니다. 1990년대 중반 김주석 사망 뒤 원래 하향선을 긋고 있던 북한의 경제는 북한의 진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며 수많은 아사자(餓死者)들과 탈북민을 낳게 됩니다. 조금씩 열악해지던 북한의 배급(공급)시스템은 대외적으로 고립되고 핵무기 개발에 투자하는 비용과 자연재해로 흉년을 더하게 되면서 그 통로는 꽉 막히게 됩니다. 이로부터 전혀 자본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당시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로부터 북한경제는 주민들을 자본주의경제관을 심어주는 물질주의의 현장으로 내몰게 되었고 생존을 위한 북한주민들의 치열한 삶이 막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2. 자급자족의 자본주의 시스템, ‘장마당’(시장경제)문화의 눈부신 활약곁에서 하나둘 굶어죽고(쌀 공급의 중단), 병들어 죽어가는(무상치료제의 허상-약, 주사가 모자라거나 없었음)가족들과 친지들,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북한주민들은 스스로 살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고, 본능적인 생존욕구는 개인들이 갖고 있는(하나님께서 천부적으로 주신 은사와 달란트)재주를 동원하여 먹을 것부터 시작하여 생활에 필요한 온갖 것(everything)들을 만들어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흐름은 자연스러운 물물교환의 장으로 지경을 넓히게 되면서 의미 없던 장마당(시장)은 활력을 얻고, 확대되면서 하나 둘 그곳(장마당)에서 자신들의 필요를 찾고, 발견하고,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합니다. 북한내에서 지역과 지역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없었던 기존의 시스템은(다른 지역으로 가려면 반드시 ‘여행증명서’가 있어야 했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증가로 ‘식량구입’이라는 명목의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면서 허락이 되고 국내 어느 곳이든 장사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해변가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해산물을 가지고 쌀 고장인 평안도, 황해도로 가서 쌀과 교환하기도 하고 해산물이 없는 그 지역에서 해산물을 비싼 가격에 판 뒤 쌀을 사서 쌀값이 비싼 함경도지역에서 팔므로 오고가는 중에 이윤을 남기면서 진정 ‘장사’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돈을 버는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중국 공산품의 90%가 북한 장마당(시장)으로 흘러들어오면서 북한 시장경제의 가속도를 더하는 계기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3. 사회주의 겉옷, 자본주의 속옷 입은 오늘날의 북한그때로부터 15년~1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오늘 북한의 시장경제(장마당문화)는 화폐개혁에도 끄떡없이 북한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당당하게 북한주민들의 생명줄(장마당)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남한물건(특히 전자제품), 미제, 일제 할 것 없이 종류별로 거래되고 있으며, 북한주민들은 장마당에 우리의 생명줄이 있다는 고백을 할 정도로 장마당을 의존하고 있으며 북한 내에 불고 있는 한류열풍의 열기가 북한주민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지는 이미 오래 된 일입니다. 지금의 북한은 사회주의 겉옷을 입고, 자본주의 속옷을 입은 형태의 체제와 시스템으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나오는 겉모습의 체제변화는 없어보이는 것 같지만 내부적인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변했고 또 자본주의 구조로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통일이후를 생각할 때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으로 변화되고 있는 북한의 현재 실정을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이런 변화와 함께 형성된 북한주민들의 가치관과 삶의 현장에 포인트를 두고 나누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 Plus








찬양대원으로 이런 사람 되게 하소서...



첫째는, 바른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인격이란 말이나 행동 등에 나타나는 사람의 품격으로 온갖 행위를 함에 있어서 스스로 책임을 질 자격을 가진 독립된 개인이라 한다. (국어사전에서) 따라서 바른 인격자는 찬양대에서 시간을 지키는 일,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는, 바른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성령의 사람이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생활로 기도생활,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남을 돌보며 예배 생활(개인, 가정, 교회에서)을 가장 우선으로 두며 열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바른 음악인이 되어야 한다. 음악을 사랑하고 열심히 연습하며 훈련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겉으로는 겸손하며 안으로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말이 생각난다.
“찬양대(원이)라고 다 찬양대(원이)냐? 찬양대(원)다워야 찬양대(원이)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개역 개정판 / 갈라디아서 1장 10절)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