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8일 금요일

2013 솔리엔 '희망의 집' 후원공연 안내

 
2013년 2월 23일 오후 7시, 써리 소재 목양장로교회(유용환 목사)에서는 전공자로 구성된 밴쿠버 유일의 여성중창단인 솔리엔의 "아름다운 음악회"가 열린다.

솔리엔의 안재숙 리더는 "음악으로 하나가 되어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솔리엔을 통해 사랑과 희망이 많은 이들의 영혼에 채워지기를 바란다"며 "특별히 이번 공연은 다운타운 홈리스들을 위해 사역하는 '희망의집'(김용운 목사) 후원을 목적으로 준비되었다"고 밝혔다.
 
 

 

교회음악 Plus





찬송은...



찬송은 교회에서 회중예배, 구역, 목장예배에서, 또 가정, 개인적인 예배에서 재 활력의 요소로 재충전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교회에서 그 의의를 상실하고 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찬송을 노래할 때, 또는 찬송의 가사를 읽는 것은, 아름다운 신앙의 경험이 된다. 찬송을 노래하며, 찬송을 통하여 내가 경험한 것을 통해, 찬송의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나누어주면, 도와 주는 것 등은, 영적인 훈련을 풍부하게 한다.

신앙생활 중에서, 성경과 찬송은 기본적인 책들이다. 오늘 찬송은 성경과 함께, 신앙인들의 거룩한 생활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매일 매일 우리 영의 맛있는 음식으로, 우리를 살찌게 하는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성경과 찬송으로 매일 건강하게 살찌는 신앙의 삶이 되어야겠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8)




지금까지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주제로 7편의 글을 나눴는데요, 통일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여 북한의 90년대 중반을 전후로 변화 발전해온 ‘시장경제’를 통해 생긴 북한 사람들의 경제관을 중점적으로 나눠 왔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조금 나누기는 했습니다만 이번 호에서는 계급, 신분사회로서의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북한의 시스템’적인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북한 통치이념의 근간이 되어왔던 주체사상과 그 주체사상의 연장선에서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더욱 굳혀지게 된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구호아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으로 ‘수령, 당, 대중’의 일심단결된 사회시스템을 추구해왔던, 아직 남아있는 북한 정치구조의 이론적인 면을 나누려고 합니다.

북한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힘?북한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과 소련의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념분쟁 사이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게 되고, 이어 1960년 초에 있었던 쿠바위기, 미·소 공존모색, 소련에서 진행되었던 스탈린 격하운동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원리와 다른, 나라의 경험을 북한의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로부터 ‘사상적 주체’를 만들어가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70년 초에 ‘주체사상’을 북한의 통치이념으로 굳히게 됩니다. ‘주체사상’은 잘 아시는 것처럼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인데요, 이 주체사상은 크게 3가지의 주요 사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적 존재론에 기초한 인간중심주의, 둘째는 근로대중집단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계급주의, 셋째는 절대적 엘리트주의를 정리해 놓은 수령론이며 이 모든 사상을 관통하여 ‘수령, 당, 대중’의 일심단결 시스템으로 귀결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낳게 됩니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은 사회란 생명을 지닌 유기체와 같아서 구성원들이 그 유기체를 구성하는 장기와 세포처럼 각각 기능을 수행할 때 사회 전체가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발전하게 되며 개인도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며 여기서 수령은 유기체적 사회의 뇌에 해당하므로 수령의 지시대로 움직일 때에만 사회는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침으로써 수령을 절대적 신의 존재로 간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주체사상을 근간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해오던 북한은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인민 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 불패이다’라는 선포(91.5.15일 담화 중 김위원장 선포)를 하기에 이르게 되었지만 사실상 오늘날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주체사상, 우리식 사회주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를 잘 관찰해보면 인민대중이 마치 주인인 것처럼 표현되어있지만 한편으로 보면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수령은 혁명의 최고뇌수이고 당은 혁명의 참모부이며 인민대중은 혁명의 주인이며 담당자이다.)에 잘 나와있듯이 인민대중은 결국 위에서 지시하는 모든 것에 복종해야 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이념이고 이론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1인 독재 통치하에 모든 시스템이 일사분란하게 위에서 아래로 움직여야만 하는 수직구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론적인 차원에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이런 구조적인 시스템은 인민대중을 제외한 모든 시스템가운데 ‘권력주의와 신분, 계급사회’를 양산하는 틀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6 장 사랑스러운 톰보이들



톰보이의 깨어진 가정

우리 부부가 중국에 나가서 치유 집회를 하고 돌아와서 거기서 만난 한 선교사의 부인과 메일을 시작했다. 세미나 중에 틈틈이 이 부인과 상담 할 시간이 있었고 두어 번 본인의 삶에 대해서 짧게지만 대중 앞에서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다. 대화를 나누기가 매우 어려운 상대였다. 온통 자신의 생각에 붙잡혀 있고 모든 일이 ‘남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고 특히 남자들에 대해서 큰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이 부인을 몹시 피곤해 했다.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가 엄마로부터 많은 상처를 입은 톰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빠 하나에 딸 셋인 집에 첫딸인데 어머니가 아들만을 사랑했고 딸들은 사람대접을 해 주지 않았다. 집에서 오빠가 아무데나 던져놓은 가방을 넘어가기라도 하면 엄마가 날카롭게 야단을 쳤다 “얘, 너는 기집애가 어떻게 오빠 가방을 넘어 다니냐!”
오빠가 누워있는 것을 넘어갔다면 그렇게 야단을 맞을 수도 있겠지만 오빠의 가방을 넘어갔다고 야단을 치는 엄마는 확실히 병적이다. 그 어머니도 딸이라고 부모에게 엄청나게 차별과 천대를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톰보이 엄마는 딸을 많이 무시하기 때문에 그 딸들도 대부분 톰보이가 된다. 자신이 무시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면 딸을 더 보호하고 사랑해 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자신도 모르게 “나는 아들을 가져야만 해.” “아들이 있어야만 내 인생에 의미가 있는거야.” “아들은 딸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거야.” 등과 같은 생각들이 마음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엄마는 딸만 둘을 낳았다, 아들을 간절히 원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아들이었으면 자기 엄마처럼 딸을 차별했겠지만 딸만 둘이기에 반응이 많이 달랐다. 자기 딸들이 여자라고 차별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집 앞에서 스쿨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다가 버스가 오면 먼저 힘센 남자 애들이 타고나서 여자 아이들이 타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을 보는 이 엄마는 속에서 불이 타올랐다. “왜 내 딸들이 나중에 타야 해? 그럴 수 없어 !” 그래서 딸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너희들, 스쿨버스 탈 때에 남자 아이들을 제치고 먼저 타야 한다! 절대로 양보하지 마라!”

세미나에 그 부인의 작은 딸이 함께 참여했다. 그런데 그 딸아이의 여성스러움이 아주 많이 상해 있었다. 얼굴은 여성스러움이 가득한 모습인데 목소리, 말투, 대화의 내용은 ‘완전 남자’다. 그 엄마가 오랫동안 그 딸들을 남자로 그리고 남자와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사람으로 뒤틀어 놓은 것이다.

이제는 선교사 남편과의 관계가 많이 망가져 버렸고 남편은 혼자서 두어 시간 떨어진 곳에 몇 년 째 따로 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상황이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아내는 지금도 부부 사이가 어려워진 모든 책임을 남편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아픔의 뿌리는 그 부인의 어머니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아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였으리라.

컴퓨터를 쓸 줄 모르는 그 부인에게 E-메일 사용법을 가르쳐가며 부모의 삶을 설명해
줄 것을 부탁했다. 기다리던 첫 번 메일이 왔다.

구 선생님, 희진이 엄마입니다.
죄송합니다. 인터넷 사용법은 배웠으나 기계에 대한 두려움과 익숙치 못하여서 여러 번 시도 했지만 계속 연결이 되지 않았어요. 오늘도 편지를 다 썼는데 보낼려고 시도하다가 다 지워져서 다시 쓰는 것입니다.
남편은 얼마 전에 한번 다녀갔지만 요즘엔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그동안 제 마음에서는 남편에 대한 미움과 섭섭함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과거에 대한 아픔들과 용서하지 못함의 자책으로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하고 스스로 위로 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계속>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손으로 말하는 사람들 ③ - 약한 자들을 택하사



부흥을 경험한 농아교회는 부하라 형제들이 보여 준 모범을 따라 거점도시로 흩어져 전도를 시작했다. 사람은 본대로 하는 모양이다. ‘콘스탄틴’이 신학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오자 지도자 훈련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7개 지역에 모임이 개척되어 든든히 서가게 되었다.

한 날 기도중인 농아성도들의 모임에 들어갔는데 기도하던 형제자매들 몇 사람이 땅바닥에 구르기 시작했다. 은혜가 임하자 손으로 기도하다가 손의 움직임이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자 쓰러져 온 몸으로 구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그 때 그들 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가난함과 갈망을 지켜보며 눈물로 기도했다. 그 후 입으로 말하는 성도들이 몸이 아프거나 문제가 있으면 농아성도들에 찾아가 기도 부탁을 했다. 그 때마다 역사가 따랐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지방 전도를 떠나는 5명의 농아교회 전도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전도하러 다닐 때 가는 곳의 잠자리가 너무 불결해 개인 침낭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침낭을 사서 선물할 때 형제들은 순교의 각오라도 한 듯이 침낭을 받아 들고 비감한 감사기도를 했다. 농아형제들이 국경을 넘어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까지도 투르크메니스탄에는 공식적인 교회가 하나도 없었다. 투르크메니스탄 북서부 거점도시인 쿤야 우르겐치로 갔던 형제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온 교회는 기도하기 시작했고 몇 일이 지나 형제들이 돌아왔다. 전도하는 중에 경찰에 붙들려 많이 맞고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국경까지 호송되어 쫓겨났다는 것이다. 취조하던 경찰들이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해서 때리고 몇 일 가두었다가 성경만 빼앗고 다시 돌려 보낸 것이다. 말 못하는 것이 이렇게 은혜라며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다섯 명의 전도자 중에 가장 신실했던 청년은 카작민족인 ‘아바이’였다. 부모와 형제들은 들을 수 있으나 그는 어릴 적에 열병으로 청력을 잃었다. 그는 잘 생기고 영민한 청년이었다. 몸은 그리 튼튼하지 못했지만 교회건축이나 모든 일에 솔선수범이었다. 어느 날 ‘아바이’가 다른 도시로 선을 보러 갔다 오겠다며 떠났다. 몇 일 뒤 너무도 고운 처녀를 데리고 교회에 나타났다. 데려온 예비신부도 후천성농아였다. 농아교회 담임전도사가 된 ‘콘스탄틴’은 나에게 그들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했다. 나는 전통적으로 모슬렘인 양가의 허락을 받아 교회에서 혼인예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농아형제자매들은 오랫동안 준비한 수화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신랑신부를 축복했다. 내가 둘이 부부가 된 것을 선포한 후 신랑신부가 차례로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도록 했다. 신랑신부는 그들 속에 있는 감사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서서히 손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틴이 양가부모들과 하객들을 위해 수화를 러시아말로 통역하고, 다시 볼료자는 러시아말을 카라칼팍말로 통역했다. 수화를 모르는 가족들은 이 농아 부부가 자신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눈치로 만 헤아릴 뿐 그 때까지 한 번도 말 못하는 이들의 속내를 속 시원히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늘 아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정을 가질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살아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형님!......” 신랑신부의 수화가 통역되어 러시아말과 카라칼팍말로 전달되기 시작하자 먼저 양가 부모들이 울먹이기 했고, 연이어 가족들과 친지들, 하객들은 복받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예배당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주례인 내가 겨우 진정을 시키고 양가부모들이 신랑신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요청했다. “아들아, 어릴 적 열병으로 귀가 먼 너를 키우며 이 어미는 평생 죄인의 심정으로 살았다. 너무 너무 미안하구나…. 그리고 이제 너를 보니 아들아, 너무 자랑스럽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아.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

이 말이 수화로 통역되자 신랑신부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 고운 신부의 화장은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드디어 소통과 공감이 찾아온 것이다. 소통은 오랜 묵었던 담을 허물고 서로에게 깊은 사랑와 일치를 가져다 주었다. 내가 했던 주례 중에 가장 감동적인 주례였다. 내 인생에 그런 감동적인 일이 다시 올 수 있을 지?

우리 농아교회는 타직스탄으로 2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국으로 일하러 간 동생이 말 못하는 형을 위해 현지인은 쉬이 가질 수 없었던 컴퓨터를 선물로 사 준 것이다. 그 즈음에 그곳에도 인터넷이 막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인터넷을 통해 게임과 음란물에 노출되면서 영적으로 무너져 실족해 버리고 만 것이다. 혼자 보낼 수 없어 대기시킨 다른 한 사역자도 이성교제로 열심이 식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실망하고 낙담했다. 특히 밤낮으로 가르쳤던 콘스탄틴과 부하라 농아형제들의 실망감은 이만 저만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의 핍박은 더욱 거세져 갔고 모임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열심이던 농아형제들도 지쳐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으로 갔던 ‘막셑’이 돌아왔다. 막셑은 농아교회 개척초기에 신앙에 회의를 품고 쾌락을 쫓아 육신의 길을 가다가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주님은 몇 년 간 방황하며 죄악의 늪에 빠져있던 그를 다시 찾아 불러내신 것이다.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죄악 중에 있는 그를 깨끗하게 하시고, 천국의 문이 서서 닫히고 있는 것을 보여주시며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는 일어나 복음을 전하고 형제들을 일깨우라!” 말씀하신 것이다. 막셑이 지방을 돌며 그 받은 은혜를 나눌 때 침체되었던 모임들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농아 리더들은 그와 함께 여러 도시를 다니며 기울던 모임을 새롭게 일으키기 시작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26 >







 
 

0128. 양(羊)과 염소
양(羊)과 염소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죽을 때도 다르다. 한 집에서 10마리의 양을 죽여도 이웃집에서 모를 수가 있다. 칼을 목에 대어도 조용히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염소는 한 마리만 죽여도 온 마을이 알게 된다. 죽지 않겠다고 지르는 괴성이 온 마을을 진동시킨다. 자아(自我)를 죽이지 못한 자의 교만은 어디서나 요란하여 화평을 깨는 사단의 종 노릇을 하게 된다.
우드브리지(Charles Woodbridge)박사는 신복음주의를 ‘불신’(unbelief)과 타협하는 영(靈)으로 정의, 신복음주자들이 일치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다섯 단계에 대하여 정확히 언급하였다:
1) 오류(誤謬)를 묵인함,
2) 오류를 수용함,
3) 오류와 협력(제휴)함,
4) 오류에 감염(感染)됨,
5) 오류에 정복(굴복)당함.
“함께하여”(Together, 고후6:14)로 시작하여 “일치”(고후6:16)로 끝날 운동에 대하여, 성경은 다섯번이나 “어찌?”로 경고하고 있다(고후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마귀의 궤계는 세상을 향한 연합일치를 부르짖으나 세상과 분리되고 구별되라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0129. 히틀러를 구세주로 맞이하였던 독일교회들 히틀러가 라디오 진공관이 찢어질 듯한 음성으로 독일 기독교회를 유린하고 있었을 때, 크리스마스 캐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우리의 총통이 돌보시는 밤”으로 불려졌다. 그리고 독일 기독교 목사들의 거의 대부분이 “우리의 위대한 카롤릭『히틀러』만세!”로 화답하였다. 담대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아돌프 히틀러를 통해서 오셨다’라는 구호가 대중화되었다. 바로 지난 주는 독일 국민이 히틀러에게 권력을 쥐어준지 80년이 되는 주간이다(1933-2013). 현 독일 수상 메르켈(Angela Merkel)은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지성들이 책을 불태움에 내어줌으로써 독재자를 허락하였다고 독일의 과오를 분석, 히틀러에 의해 독일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데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던 독일계 유대 시인(詩人)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동족 유대인들에게는 배척받았으나 ‘책을 불태우는 자는 인간을 불태움으로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로 나치당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나치당의 끝을 미리 보았던 시인이었다. 히틀러의 조국 오스트리아(Austria)에서는 히틀러의 생가건물을 허문다는 소식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히틀러가 독일 사람이 되고, 비엔나에서 일생을 마친 독일인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사람이길 바란다는 이야기가 있다.
1979년 12월,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국 아이오와 주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천주교 성가대는 “기쁘다 교황오셨네, 만백성 맞으라”로 환영하였다. 화산 폭발 직전의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다. 속이고 속임을 당하는 기간일 따름이다. 잘못이 약간 섞인 진리는 거짓보다 더 위험하다. 그런 것들은 믿을 만하게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선(善)하심만 극구 찬양하는 인기있는 메세지만을 외치는 자들을 조심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자, 또한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불의(不義)를 보고도 회피하는 기회주의적인 교계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미사여구(美辭麗句)로 포장하고서는, 마치 예수께서는 마귀도 사랑한 것처럼 오도된 사랑을 외치는 자들을 경계할 것은,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않기”(고전13:6)때문이다.

0131. 구원의 심판 / 구약성경도 정독하자!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누구신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율법의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게 해준다. 구약을 이스라엘의 역사로만 보는 어리석음은 신구약의 일관성을 무시하게 된다. 구약성경이 계속하여 지시하셨던 것의 결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바라보던 것이 드디어 이루어졌다는데에 있다. ‘이루어진’ 것만 보고 있다면 뿌리가 없는 신앙이 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부터 십자가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신 계획은 구약의 처음장(章)들에서부터 계시된 것이다. 원칙상 어떤 새로운 것이 갑자기 신약성경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지 구약은 구원을 약속과 준비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율법없이는 은혜가 은혜로 깨달아질 수가 없다. 율법과 은혜의 구분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는다면 늘 살아서 다시 고개를 처들고 꿈틀거릴 가장 무서운 원수, 자기의(自己義)를 제어할 수가 없게 된다.

캐나다인 시골교회 집회의 마지막 날의 질의시간. 한 중년부인이 자기는 지금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는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를 만난 장면에서, 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한20:17, kjv)고 하셨는가 질문하였다. 정답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25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백성들은 그를 만져서는 안되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떠나오신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시기 직전이셨다(히9장 참조).

모세를 향하여 “신을 벗으라”(출3:5)고 명하신 하나님,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향하여는 “신을 신기라”(눅15:22)고 명하신다. 율법이 선포될 때 3천명이 죽임을 당하였으나(출32:28),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 선포될 때 3천명이 구원을 받는다(행2:41).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에는 즉각적인 징벌이 나타났으나, 신약에서는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 것을 더 사랑하여 따라간 불순종을 길이 참고 보신다. 그리하여 로마서 1장의 23가지 죄악들(우리 성경과 현대역 성경에는 두 개가 빠져있다-“곧 모든 불의, <음행>,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화해하지 아니하는 자요>, 무자비한 자라”)에 3번 선언된 “욕심에 내버려두사” 자연스럽게 거짓을 믿기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심으로 그 미혹 속에 갇히도록 심판하신다.

이미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세상은 또 다른 심판이 필요없었다. 아들을 통한 ‘구원의 심판’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복음거부는 곧 생명을 거부한 죽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제 성질대로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죄의 파괴력과 치명적인 결과들(롬6:23)에 속수무책으로 “내버려진” 인간들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결안한 “내어주심”-“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이가 어찌…”(롬8:32)나 “성도에게 단번에 ‘(내어)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라”-은 같은 헬라어 단어들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완벽한 신뢰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유기되고 포기된 자로 취급받으심으로써 거룩한 분이 죄인들과 동일시되었다. ‘노아의 홍수’ 심판도, ‘소돔과 고모라’성에 내린 불의 심판도 이 “내버려진” 심판에 비교되지 못한다. 전성경을 통틀어 가장 무서운 심판의 저주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수행된 십자가 위에서의 속죄행위에서 나타났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죄인들의 대표로서 죽음에 찢기게 “내어버려지게” 하심으로 성부의 슬픔은 절정에 달하였음을 아들의 절규에서 읽게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 막15:34).
하나님의 선민 유대인의 고난의 의미는 기독교인에게는 거울이다. 신구약은 한 권의 책이다. 하나님의 속성(성품)을 의미하는 완전수 ‘7’(일곱)은 구약, 신약이 한 권의 책으로 나타날 때에야 완전한 계시가 성립된다:
1) 7 ד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 구약(레19:18)
6 신약(마19:29/22:39/막12:31/롬8:9/갈5:14/약2:8)
2) 7 ד호산나”(Hosanna)
1 구약(시118:25/”이제 구원하소서”)
6 신약(마21:9×2/21:15/막11:9/11:10/요12:13)
3) 7 ד모퉁이의 머릿돌”
1 구약(시118:22)
6 신약(마21:42/막12:10/눅20:17/행4:11/벧전2:4,7)
4) 7 ד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는)”
1 구약(시110:4)
6 신약(히5:6,10/6:20/7:11,17,21)
(*한글성경 및 부패한 바티칸사본을 따른 대부분의 현대역 성경들은 모두 히브리서 7:21 kjv에서 이 구절을 삭제하고있다)

0132. 종교가 복음을 대신하게 되는 이유
구약성경은 종교란 단어를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종교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다. 전 성경을 통틀어 5번 언급된 이 단어는 종교성에 빠진 유대인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한 것이 전부다. 반면에 신구약에 120여 번 줄기차게 언급된 복음, 복된 소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책으로 연결하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종교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종교는 인간을 규율의 틀에 묶어 질식상태에까지 끌고가서 복종케 만든다. 우상의 본질은 인간의 자유정신이 말살되어 자유로이 생각할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그러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23)는 약속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3:17)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된다. 종교가 복음을 대신하게 되는 이유는 종교라 하는 안전한 피난처를 추구, 신앙의 모든 결단과 모험으로부터 도망을 시도하려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의 틀을 만들고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추는 일에 열중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종교 안에 머무르실 수가 없으신 분이다. 종교는 유전과 제도와 의무를 분담해줄 사제를 만들어 낸다. 종교가 만든 규율 및 법전은 결단성이 없는 자에게는 복음보다 편리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종교를 인간의 마음에 만족할 때까지 변형시킨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란 우상의 고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의 장엄한 선포이며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관계’(relation)를 맺는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이란 진리나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의 문제로 하나님과의 화목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5:19).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유일성과 어떠한 죄인일지라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포용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한 지체로서의 나(自我)를 직시하게 된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평생의 소망으로 삼고, 그의 영광을 추구하는 열정에 불타고 있는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기쁨의 삶의 희열을 느끼고 있는지, 하나님을 섬기며 헌신하려는 의지는 있는지, 나의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성령의 능력안에서 하루를 시작하는지… 교회의 무기력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부터 깨달아야한다.
영국 중부지방의『존 번얀』(John Bunyan, 1628-88)의 고향 시골 엘스토우(Elstow)에서 한나절을 보내면서 떠올렸던 필자의 생각은『천로역정』이 아니라 ‘모두가 나(我)같으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그의 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기독교인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는 변치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터를 닦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히3:1)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각자가 직접 나아갈 길을 발견한 천국백성들이다. 광야의 소리, 물가의 복음은 이렇듯 종교와 상관없이 갈릴리에서 시작되고 예루살렘의 종교는 염소들의 놀이터가 되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늘 돌질로 맞이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자여”(마23:27)라고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오늘날『예루살렘』성(城)에는 여러 종교의 견본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은 처음부터 종교와 무관하였다. 종교의 상징이었던『예루살렘』성 바깥, 『베들레헴』의 구유통을 빌어 구세주가 탄생하였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부터니라”(미5:2,kjv). 복음은『예루살렘』성 바깥, 『갈릴리』에서 힘을 얻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 512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③)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첫 번째 표적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 제자들을 받아들이십니다. 이 때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이 있는데 다름아닌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표적입니다.
이 표적은 굉장히 특별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이적과 표적이 나옵니다. 바다를 가르기도 하고 물위를 걷기도 하고 풍랑이 잔잔해지기도 하고 타는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도 하고 불 속에서도 해를 당하지 않고 무사하게 나오고 아픈 자가 치유되고 눈 먼 자가 보게 되고 걷지 못하는 자가 걷게 되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수많은 기적과 표적들이 있는데 아마 이 중에 가장 시시해 보이는 것을 고르라면 바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표적이 꼽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시시해 보이는 표적을 첫 번째 표적으로 고르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경에서 특별한 일을 담당하지 않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에게 수태고지를 들은 후 하나님께 찬송 드린 일 말고는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도, 고난 당하실 때도, 심지어 목숨을 잃는 순간에도,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때에도 어떤 특별한 역할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장면이 성경에 나오는데, 바로 이 장면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때 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예수님께 알리는 사람도 마리아요, 예수님께서 일단 거절 하셨음에도 하인들에게 순종할 것을 명한 것도 마리아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을 보여주는 순간인데, 그런 것 치고는 중요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기껏 잔치에 쓸 포도주를 위해서라니요……

보통 생각으로는 그냥 어디선가 구해오거나 빌려오거나 정 없으면 그만 잔치를 끝낸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포도주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이미 적당히 다 마셨는데 말입니다. 포도주가 없다고 누가 죽는 것도 아니고 아픈 사람이 낫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또 결혼한 부부가 잘못되는 것도 아닌데 왜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행하시는 첫 표적으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을 선택하셨을까요? 오직 한 번 나오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적극성도 여기에서만 보이고 말입니다.

물이 무엇이고 포도주가 무엇인지를 보면 조금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때 쓰인 물은 유대인의 정결의식에 쓰이는 항아리에 채운 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일상생활 속에서 부정해진 사람이 이 물을 이용해서 정결하게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규정된 것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했던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자신이 부정한 일을 하였거나 부정한 것과 접촉하였거나 정결해질 필요가 있을 때 정결의식을 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정결의식에 사용할 물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셔 버렸습니다. 혼인잔치를 위해서는 좋은 일인데 이제 정결의식은 어떻게 하지요? 자신이 부정해졌다고 느낀 사람이 율법에 의해 정결해지려고 씻으려는데 필요한 물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덩그러니 포도주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포도주로 씻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율법에 규정된 대로 복잡한 의식이 필요했었습니다. 사실 그런 유대인의 정결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온전하게 다 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표적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만드는 물을, 우리의 죄를 씻어내는 물을, 율법을 상징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버리신 것입니다.

포도주가 상징하는 것은 혼인잔치의 기쁨과 축복이기도 하고,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표적을 통해 더 이상 우리의 노력으로 죄를 씻어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행하신 축복과 은혜로 우리의 죄가 씻겨지고,
우리가 정결하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기쁨의 혼인잔치에서 부부가 하나되어 가족이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 그 자녀 되는 귀한 축복이 임하기를, 또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첫 표적을 보고, 듣고, 믿는, 모든 분들께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용균 목사 / 밴쿠버한마음교회 / 778-554-9003]





필객의 붓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낮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어 맞는 새벽은 쓸쓸하고 적막합니다. 여행중인 지금 뿐 아니라 우리는 인생이란 여행에서 매일아침 낮선 시간에 표류하는 여행객이 아닌가 합니다. 심난하고 어지러운 꿈에서 깨어나 휘적휘적 잠의 물살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가면서 이생의 삶이 꿈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게 무게감이 없습니다. 꿈도 내 인생에서 적지 않은 시간의 분량을 차지하는 내 삶의 중요한 일부이기에, 꿈에서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거룩함에 영광스러운 빛 아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잠들지만 뜻대로 안됩니다.

우리 부부가 25년을 함께 살아낸 세월을 감사하고 앞으로의 인생을 새롭게 헌신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여행을 떠나왔습니다. 낮선 땅에서 둘이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다니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화장실 앞에서 기다려주고 함께 먹으면서 부부로서 살아온 세월이 더욱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길 이름도 생소한 땅에서 오직 서로를 의지하고 둘만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행을 하니 더욱 각별한 마음이 듭니다. 부스스한 여독이 서려있는 얼굴로 곁에서 지도를 보고 있는 이 사람은 내 인생의 드라마에서 상대 역의 주인공 역할을 맡은 너무나 중요한 사람인데 늘 편하다는 이유로 잘 챙겨주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부는 은혜로 엮어진 관계입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어쩌면 철저히 남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심정이 어떤지 살펴주고, 건강을 염려해주고, 픽업해주고, 어디든 기쁨으로 함께 동행해주고, 동일한 소망을 품고 기도하고, 기쁨과 속상함을 같이 나눠주며, 힘들때 토닥여주고, 아플 때 옆에서 손 잡아주고,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함께 이사를 가는 너무나 친밀한 사이입니다. 만약 다른 누가 이토록 나에게 친절하게 해주었다면 평생의 은인으로 고마워 했을것인데도 이 사람에겐 너무나 당연하게 받을 뿐 아니라 더 안 준다고 늘 투정을 부렸습니다. 돌아보면 25년의 세월이 몇날의 길이처럼 너무도 짧게 느껴지는데, 너무나 짧고 소중한 삶에서 왜 그렇게 상대의 단점만 보고 내가 받은 상처만 억울하게 여기며, 헛된 일로 다투고 불평을 하고, 위한답시고 용기를 꺽는 말을하고, 있지도 않을 일을 두려워 하면서 힘들게 했었는지 많이 반성이 됩니다. 삶은 이렇게 살아지는 것인데, 살아가는 모퉁이마다 감당할 수 있는 은혜가 따르고 있고, 삶이야 말로 나의 안간힘이나 노력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의 뜻으로 세워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에 무지해서 너무 안달을 했던 일들이 미안합니다.

부부로서 함께 살아가는 일은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하신 말씀처럼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시고, 함께 안에 두신 능력과 지혜와 힘과 평강은 세상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종류의 너무나 신성한 것이며 비용의 세계에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의 가치를 순수하고 맑게 빛나게 합니다. 사람들이 지금도 밖에서 찾고 있는 인정과 사랑과 위로와 축복이 바로 이 안에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가장 예쁜 색을 내고, 가장 예쁜 생각을 하며,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며 재능과 힘과 사랑스러움이 극대화 됩니다. 우리에겐 둘만의 사이에서만 인정되는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던 날, 잠 자던 모습, 웃던 얼굴, 첫 이가 돋아나던 경이로운 순간, 유치원을 들어가고 앞니가 빠지고 학예회에서 발표를 하던 모습, 내 키를 넘어가면서 목소리가 바뀌고 아이 티를 벗고 훌쩍 성숙해진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의 많은 추억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 추억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의 역사는 아름답게 거듭나고 내일을 향한 더 밝은 소망이 생깁니다. 함께라는 것이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보다, 어떤 위대한 일을 행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영화며 드라마며 책에서 열심히 이혼을 교육하고 홍보하고 있는 덕분에 이혼이 부부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답처럼 되고 있는 지금, 이혼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어 주변에 부부 간의 불화의 소식이 가득합니다. 사실 부부로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깝기에 더 상처를 주고 편하기에 더 함부로 대하면서 서로 골이 깊어가지만 자기 손을 깨물며 아프다고 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부부관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어 사람들이 너무 고통을 당합니다. 부부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복주신 최초의 관계이며 인간은 결혼을 통해 완전해지는 존재입니다. 결혼이라는 축복을 벗어나면 아름다운 잔디가 바로 잡초밭이 되듯 가족 모두가 바로 황폐해집니다. 서로 물고 싸우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하신 말씀은 부부안에 가장 먼저 적용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기에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있었습니다. 자칫 패배할 뻔했던 체스판의 말을 아름다운 자리로 옮겨주심으로 우리의 결혼을 사단의 손에서 지켜주신 은혜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보았던 휠체어를 밀며 함께 여행하는 노 부부처럼, 앞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25년의 삶을 허락하신다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움의 요구나 허영이나 긴장이 없는, 상대를 향한 오직 순수한 존중과 사랑으로, 진리이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이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랑으로 진짜 사랑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아브라함 이야기



하나님 약속의 성취/ 창 21:1-7 (하)



둘째,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셨을 때, 아브라함은 거기에 걸맞는 행동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짓습니다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 17:19). 그런데 이 이삭이란 이름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비웃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그 비웃음을 참 기쁨, 참 웃음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며, 또한 앞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베풀어주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였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행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으로 지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합니다 (4절). 17:10절에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고 나와 있고, 또 17:13절에 보면,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는 하나님께서 지키셔야 할 일방적인 약속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례라는 것은 언약의 표징 즉, 믿음의 표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면서 약속하십니다. 약속을 받은 우리는 믿음의 표시를 드러내야 합니다. 주일성수, 기도, 전도, 십일조는 바로 우리의 믿음의 표시이고 언약의 표징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이 어떠한 형태로든 고백되어지길 원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약속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축복하셨을 때, 우리는 그 은혜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풍성함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황폐하고 열매없는 삶에서 풍성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애쓰고 수고하였으나 황폐하고 아무 열매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 11:30).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고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황폐한 삶이 아닌 열매맺는 삶,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진짜 웃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6). 또한 아무 소망없이, 죽은 것 같이 살던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창 21:7).

지금 이 시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수고하고 애써도 열매없는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평안을 주시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우리가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큰 축복과 평안과 풍성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약속에 붙들려 순종함으로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구체화되어 기쁨과 축복이 넘치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재미있는 사도행전




바다거북 닮은 교회


예루살렘 출신 여러 선지자들이 안디옥을 방문했다. 그 중 ‘아가보’라는 자가 예언 했다. “천하에 흉년이 들리라”(행11:27-28). 이 예언이 로마의 4대 황제 글라우디오(AD 41-45) 때 그대로 적중했다. 사도행전 11장26절에 보면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고 정확히 확인해 주고 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도 AD46-48년 어간에 유대에 기근이 발생해 ‘아디아베네의 헬레네’(Queen of Helena of Adiabene) 여왕이 예루살렘의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구호하기 위해 이집트로부터 곡물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작은 마을에 친구 두명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진정한 친구라고 소개 했다. 어느 날 이 친구 두 명이 길을 걷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큰 곰 한마리가 나타났다. 한 친구는 혼자 살겠다고 나무위로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 자리에 엎드려 죽은척 하고 있었다. 그때 곰이 다가와 그 친구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고는 그자리를 떠나버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친구가 급히 나무 위에서 내려와 다급히 물었다. “곰이 너한테 뭐라고 말하고 갔니?”그러자 그 친구가 하는 말 “위험할 때 친구 혼자 두고 도망가는 친구와 놀지 말라고 했어!”라고 말했다.

안디옥 교회는 좋은 친구와 같은 교회였다. 흉년으로 인해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아픔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했다(행11:30). 사도행전 11장 29절을 보면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라고 했다. ‘각각 그 힘대로’ 했다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자기 형편에 따라서 많이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이 내고,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적게, 돈의 액수와 관계 없이 이웃교회를 돕는 일에 온 교회의 힘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좋은 일, 하나님이 기쁘하시는 일에 힘을 하나로 모을 줄 아는 능력을 가진 교회가 아니겠는가?

바다거북은 알을 한번에 1,000개 정도를 낳는다. 부화할 때면 백사장으로 나와 알을 백개씩 나누어 구덩이를 파고 묻는다. 이 알이 부화하면 바다거북 새끼들은 덮인 모래를 뚫고 나와야 하는 힘겨운 작업이 시작된다. 동물학자들은 바다거북 새끼들이 어떻게 구덩이 흙을 뚫고 세상으로 나오는 지를 관찰했다. 구덩이 안에서 막 깨어난 새끼들 중 꼭대기에 있는 녀석들은 천장을 파내고, 가운데에 있는 녀석들은 벽을 허물고, 밑에 있는 새끼들은 떨어지는 모래를 밟아 다지면서 모두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하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맛보는 것이었다. 또 다른 사실 하나는 거북의 알을 한 개씩 옮겨 묻어 놓았을 때, 바다거북 새끼의 생존율은 27%, 두 개씩 묻어 놓았을 때 84%, 네 개 이상을 묻어 놓으면 거의 100%가 구덩이 밖으로 나왔다.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절로 생각나는 이야기다.


교회는 절대 경쟁 상대가 아니다. 함께 협력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는 같은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이다. 우리는 함께 상생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것 만을 움켜 쥔다. 그리고 혼자 달린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함께 달린다. 그리고 베풀 때 나의 것이 더 풍족해 지는 성경의 진리를 알고, 실천에 옮기는 자다(눅6:38).

황보창완 목사 (글로리아 한인교회) / 778-708-5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