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8. 양(羊)과 염소
양(羊)과 염소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죽을 때도 다르다. 한 집에서 10마리의 양을 죽여도 이웃집에서 모를 수가 있다. 칼을 목에 대어도 조용히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염소는 한
마리만 죽여도 온 마을이 알게 된다. 죽지 않겠다고 지르는 괴성이 온 마을을 진동시킨다. 자아(自我)를 죽이지 못한 자의 교만은 어디서나
요란하여 화평을 깨는 사단의 종 노릇을 하게 된다.
우드브리지(Charles Woodbridge)박사는 신복음주의를
‘불신’(unbelief)과 타협하는 영(靈)으로 정의, 신복음주자들이 일치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다섯 단계에 대하여 정확히
언급하였다:
1) 오류(誤謬)를 묵인함,
2) 오류를 수용함,
3) 오류와 협력(제휴)함,
4) 오류에
감염(感染)됨,
5) 오류에 정복(굴복)당함.
“함께하여”(Together, 고후6:14)로 시작하여 “일치”(고후6:16)로
끝날 운동에 대하여, 성경은 다섯번이나 “어찌?”로 경고하고 있다(고후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마귀의 궤계는 세상을 향한 연합일치를 부르짖으나 세상과 분리되고 구별되라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0129. 히틀러를 구세주로 맞이하였던 독일교회들 히틀러가 라디오
진공관이 찢어질 듯한 음성으로 독일 기독교회를 유린하고 있었을 때, 크리스마스 캐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우리의 총통이 돌보시는 밤”으로
불려졌다. 그리고 독일 기독교 목사들의 거의 대부분이 “우리의 위대한 카롤릭『히틀러』만세!”로 화답하였다. 담대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아돌프
히틀러를 통해서 오셨다’라는 구호가 대중화되었다. 바로 지난 주는 독일 국민이 히틀러에게 권력을 쥐어준지 80년이 되는
주간이다(1933-2013). 현 독일 수상 메르켈(Angela Merkel)은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지성들이 책을 불태움에 내어줌으로써
독재자를 허락하였다고 독일의 과오를 분석, 히틀러에 의해 독일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데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던 독일계 유대 시인(詩人)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동족 유대인들에게는 배척받았으나 ‘책을 불태우는
자는 인간을 불태움으로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로 나치당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나치당의 끝을 미리 보았던 시인이었다. 히틀러의 조국
오스트리아(Austria)에서는 히틀러의 생가건물을 허문다는 소식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히틀러가 독일 사람이 되고, 비엔나에서 일생을 마친
독일인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사람이길 바란다는 이야기가 있다.
1979년 12월,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국 아이오와 주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천주교 성가대는 “기쁘다 교황오셨네, 만백성 맞으라”로 환영하였다. 화산 폭발 직전의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다. 속이고
속임을 당하는 기간일 따름이다. 잘못이 약간 섞인 진리는 거짓보다 더 위험하다. 그런 것들은 믿을 만하게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선(善)하심만 극구 찬양하는 인기있는 메세지만을 외치는 자들을 조심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자, 또한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불의(不義)를 보고도 회피하는 기회주의적인 교계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미사여구(美辭麗句)로 포장하고서는, 마치 예수께서는 마귀도
사랑한 것처럼 오도된 사랑을 외치는 자들을 경계할 것은,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않기”(고전13:6)때문이다.
0131. 구원의 심판 / 구약성경도 정독하자!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누구신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율법의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게 해준다. 구약을 이스라엘의 역사로만 보는
어리석음은 신구약의 일관성을 무시하게 된다. 구약성경이 계속하여 지시하셨던 것의 결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바라보던 것이 드디어 이루어졌다는데에 있다. ‘이루어진’ 것만 보고 있다면 뿌리가 없는 신앙이 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부터 십자가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신 계획은 구약의 처음장(章)들에서부터 계시된 것이다. 원칙상 어떤 새로운 것이 갑자기 신약성경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지 구약은 구원을 약속과 준비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율법없이는 은혜가 은혜로 깨달아질 수가 없다. 율법과 은혜의 구분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는다면 늘 살아서 다시 고개를 처들고 꿈틀거릴 가장 무서운 원수, 자기의(自己義)를 제어할 수가 없게 된다.
캐나다인 시골교회 집회의 마지막 날의 질의시간. 한 중년부인이 자기는 지금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는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를 만난 장면에서, 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한20:17, kjv)고 하셨는가 질문하였다. 정답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25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백성들은 그를 만져서는 안되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떠나오신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시기 직전이셨다(히9장
참조).
모세를 향하여 “신을 벗으라”(출3:5)고 명하신 하나님,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향하여는 “신을
신기라”(눅15:22)고 명하신다. 율법이 선포될 때 3천명이 죽임을 당하였으나(출32:28),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 선포될 때 3천명이
구원을 받는다(행2:41).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에는 즉각적인 징벌이 나타났으나, 신약에서는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 것을 더
사랑하여 따라간 불순종을 길이 참고 보신다. 그리하여 로마서 1장의 23가지 죄악들(우리 성경과 현대역 성경에는 두 개가 빠져있다-“곧 모든
불의, <음행>,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화해하지 아니하는
자요>, 무자비한 자라”)에 3번 선언된 “욕심에 내버려두사” 자연스럽게 거짓을 믿기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심으로 그 미혹 속에 갇히도록
심판하신다.
이미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세상은 또 다른 심판이 필요없었다. 아들을 통한 ‘구원의 심판’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복음거부는 곧 생명을 거부한 죽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제 성질대로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죄의 파괴력과 치명적인 결과들(롬6:23)에 속수무책으로 “내버려진” 인간들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결안한 “내어주심”-“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이가 어찌…”(롬8:32)나 “성도에게 단번에
‘(내어)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라”-은 같은 헬라어 단어들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완벽한 신뢰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유기되고 포기된 자로 취급받으심으로써 거룩한 분이 죄인들과 동일시되었다. ‘노아의 홍수’ 심판도, ‘소돔과 고모라’성에 내린 불의
심판도 이 “내버려진” 심판에 비교되지 못한다. 전성경을 통틀어 가장 무서운 심판의 저주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수행된 십자가 위에서의
속죄행위에서 나타났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죄인들의 대표로서 죽음에 찢기게 “내어버려지게” 하심으로 성부의 슬픔은 절정에 달하였음을 아들의
절규에서 읽게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 막15:34).
하나님의 선민
유대인의 고난의 의미는 기독교인에게는 거울이다. 신구약은 한 권의 책이다. 하나님의 속성(성품)을 의미하는 완전수 ‘7’(일곱)은 구약, 신약이
한 권의 책으로 나타날 때에야 완전한 계시가 성립된다:
1) 7 ד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
구약(레19:18)
6 신약(마19:29/22:39/막12:31/롬8:9/갈5:14/약2:8)
2) 7
ד호산나”(Hosanna)
1 구약(시118:25/”이제 구원하소서”)
6
신약(마21:9×2/21:15/막11:9/11:10/요12:13)
3) 7 ד모퉁이의 머릿돌”
1
구약(시118:22)
6 신약(마21:42/막12:10/눅20:17/행4:11/벧전2:4,7)
4) 7 ד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는)”
1 구약(시110:4)
6 신약(히5:6,10/6:20/7:11,17,21)
(*한글성경
및 부패한 바티칸사본을 따른 대부분의 현대역 성경들은 모두 히브리서 7:21 kjv에서 이 구절을 삭제하고있다)
0132. 종교가 복음을 대신하게 되는 이유
구약성경은 종교란
단어를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종교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다. 전 성경을 통틀어 5번 언급된 이 단어는
종교성에 빠진 유대인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한 것이 전부다. 반면에 신구약에 120여 번 줄기차게 언급된 복음, 복된 소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책으로 연결하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종교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종교는 인간을 규율의 틀에
묶어 질식상태에까지 끌고가서 복종케 만든다. 우상의 본질은 인간의 자유정신이 말살되어 자유로이 생각할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그러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23)는 약속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3:17)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된다. 종교가 복음을 대신하게 되는 이유는 종교라 하는 안전한 피난처를 추구, 신앙의 모든 결단과 모험으로부터 도망을 시도하려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의 틀을 만들고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추는 일에 열중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종교 안에 머무르실 수가 없으신
분이다. 종교는 유전과 제도와 의무를 분담해줄 사제를 만들어 낸다. 종교가 만든 규율 및 법전은 결단성이 없는 자에게는 복음보다 편리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종교를 인간의 마음에 만족할 때까지 변형시킨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란 우상의 고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의 장엄한 선포이며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관계’(relation)를 맺는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이란
진리나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의 문제로 하나님과의 화목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5:19).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유일성과 어떠한 죄인일지라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포용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한 지체로서의
나(自我)를 직시하게 된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평생의 소망으로 삼고, 그의 영광을 추구하는 열정에 불타고 있는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기쁨의 삶의 희열을 느끼고 있는지, 하나님을 섬기며 헌신하려는 의지는 있는지, 나의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성령의 능력안에서 하루를
시작하는지… 교회의 무기력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부터 깨달아야한다.
영국 중부지방의『존 번얀』(John Bunyan, 1628-88)의
고향 시골 엘스토우(Elstow)에서 한나절을 보내면서 떠올렸던 필자의 생각은『천로역정』이 아니라 ‘모두가 나(我)같으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그의 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기독교인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는
변치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터를 닦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히3:1)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각자가 직접 나아갈 길을 발견한
천국백성들이다. 광야의 소리, 물가의 복음은 이렇듯 종교와 상관없이 갈릴리에서 시작되고 예루살렘의 종교는 염소들의 놀이터가 되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늘 돌질로 맞이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자여”(마23:27)라고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오늘날『예루살렘』성(城)에는 여러 종교의 견본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은 처음부터 종교와 무관하였다. 종교의
상징이었던『예루살렘』성 바깥, 『베들레헴』의 구유통을 빌어 구세주가 탄생하였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부터니라”(미5:2,kjv). 복음은『예루살렘』성 바깥, 『갈릴리』에서 힘을
얻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 512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③)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