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5일 목요일

자살하면 지옥 간다? 안 간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 안 간다?  개혁주의 내에서도 입장차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자살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지옥에 가는 걸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일까. 신학자들의 의견은 갈렸다. 같은 개혁주의, 칼빈의 신학을 따른다는 이들마저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총회장 이기창 목사)가 지난 5일 서울 대치동 총회회관에서 개최한 총회 설립 100주년 기념 제3회 ‘개혁주의 신학대회’에서 가장 ‘핫’(hot)했던 주제는 다름 아닌 ‘자살’이었다. 이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 신원하(고신대 신대원) 교수와 논평한 박혜근 교수(칼빈대)의 입장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신학적 근거 없는 통설”  : “자살 방조 초래할 수도”
  
‘자살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분석과 성찰’을 주제로 발표한 신원하 교수는 “자살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 가장 혐오스러운 죄로 취급됐다”며 “(그런데) 자살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통설은 어디서 기원했는가. 이것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한국교회 어느 교단이 이런 교리나 이에 관한 신학적 입장 및 지침서를 만든 적이 있는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 통설은 오랫동안 교회를 지배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살이 구원받지 못할 죄라는 통설은 중세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제정한 교회법과 교리에 기원하고 있다”며 “로마 가톨릭은 그 성격과 심각성에 따라 죄를 대죄와 소죄로 구분해 이해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을 대죄로 분류했다”고 분석했다.

신 교수는 “(로마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대죄로 취급된 자살은 마땅히 고해성사를 통한 화목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다”며 “현실적으로 자살한 자는 고해성사를 할 수 없고, 따라서 자살은 구원받지 못하는 죄가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기독교의 자살에 관한 통설은 이런 로마 교회의 자살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주장에 논평한 박혜근 교수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통설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하겠다는 시도는 시의적절하고 필요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박 교수는 “‘자살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와 세계 2차 대전의 전범인 히틀러는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고 한 박 교수는 “자살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통설이 무차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할 때 단순화의 위험이나 논리적 모순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자살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통설이 잘못이라고 공공연하게 비판하게 되면서 자살을 간접적으로나마 방조할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것은 신 교수가 통설을 반대하면서 초래한 더 풀기 어려운 과제일 것”이라고도 했다.

“구원의 결정적 변수 아냐” : “견인교리 오해하지 말아야”

특히 이 둘은 개혁주의 교리 가운데 하나인 ‘성도의 견인’을 자살에 적용하는 것에 있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먼저 신 교수는 “‘성도의 견인’ 교리는 참된 신자는 전적으로, 종국적으로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고, 끝까지 견딘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가르치는 교리”라며 “이 교리로 자살을 들여다 볼 때, 자살이라는 그 행위 자체는 구원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없다. ‘성도의 견인’의 핵심은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작정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인간이 비록 자유의지적으로 자살을 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성도를 견인하는 것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며 “왜냐하면 자살이 하나님의 자비와 주권에서 나오는 선택의 작정을 변경할 수 없고, 또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을 무효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박 교수는 “개혁주의 견인의 교리에 대한 오해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견인에 관한 칼빈주의 정통교리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안에서 성도의 안전을 찾는 동시에 칭의와 점진적 성화의 필요성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라며 “즉 하나님은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중생 이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구원을 위해 적극적 노력을 펼치도록 이끄신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보존된 자들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바른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는 성화의 진보를 나타내야만 한다고 믿는다”면서 “반면 비전통적 칼빈주의자들은 일생 중 한 번의 신앙고백만으로 구원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정된다고 믿기 때문에 구원을 위한 성화의 절대적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 교수의 논문 내용만으로 그가 비전통적 칼빈주의자들의 견인 교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며 “그러나 구원과 관련한 성화의 필요성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일관된 강조와 비타협적인 태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꼬집었다.

“자살도 여러 죄들 중 하나” : “안전한 죄란 없다”

아울러 신 교수는 “선택된 자라 하더라도 극단적으로 약하게 될 때 극단적인 죄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는 것이 그가 선택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며 “자살도 육체의 약함과 사탄의 유혹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잘못들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교회는 자살한 자의 유족들에게 더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통설을 바로 잡고 그것이 근거가 없음을 교육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박 교수는 “자살과 구원하는 믿음이 상호 무관한 것, 혹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것으로 믿게 하는 어떤 암시를 주려는 시도는 잘못”이라며 “모든 죄의 보편적인 속성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성이며 죄의 값은 사망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안전한 죄란 없는 것이며 죄의 종류는 사실상 문제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따라서 어떤 죄든 그것의 위험성과 그 잠재적 파괴성을 영벌과 관련해 경고하는 것은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신앙을 견고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견인 교리의 취지에서나 성화의 차원에서나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신학대회에선 문병호 교수(총신대 신대원), 신국원 교수(총신대), 이관직 교수(총신대 신대원) 등이 각각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동성애에 대한 개혁주의 기독교적 접근방법’ ‘중독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을 제목으로 발표했다.


아브라함 이야기



약속을 확신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 창 15:1-6 (상)




창 14장에서 아브람은 멜기세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The most high God)이심을 깨닫았을 뿐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믿음의 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아브람은 신앙의 두려운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창 15장을 보면, 아브람은 전쟁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물질의 부족에 대해서 걱정하며, 지연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아직도 그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칠흙같이 어둡고 두려운 신앙의 밤 한 가운데서 별처럼 빛나는 약속을 주시면서 아브람으로 다시금 말씀에 대한 확신 가운데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함
창 12:1, 13:14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는 표현이 나오는 반면, 창 15:1과 4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예언자에게 계시를 주기 전에 나타나는 표현(삼상 15:10; 호 1:1)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이어 나오는 13-16절까지의 예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대신에 ‘여호와의 말씀’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말씀’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언약만을 온전히 의지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원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 중심의 신앙, 말씀에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는 신앙을 원하고 계십니다. 

전쟁의 보복을 두려워한 아브람
창 15: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지금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는 네  방패”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방패’란 ‘마겐’(māg̱ēn)으로 군사적 용어인데, 아브람의 두려움이 군사적인 것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아브람은 기습작전으로 패배시킨 그돌라오멜 연합군의 보복공격을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의 5개국 연합군을 물리칠 정도로 강한 그돌라오멜 연합군이 언제 갑자기 쳐들어와 아브람과 그의 사병들을 쓸어버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호를 약속하신 하나님
이렇게 전쟁의 보복 때문에 두려워 떨면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친히 방패가 되어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하셨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아브람이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확신있게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극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확신에 차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방패가 되어 주시며,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주시겠다 (마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자녀들은 두려운 일을 만날 때에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니라”고 하신 하나님은 이어서 자신이 또한 “너의 (아브람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상급’이란 말은 ‘사카르’(śāḵar)로 ‘(특히 용병들의) 임금(급료)’을 - 이 단어가 겔 29:19에서는 “(군대의) 보상”으로 번역됨 -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용병들의) 급료’라고 하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 14:23-24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재미있는 여호수아서


참 지도자인가?




세계의 최고봉은 에베레스트 산이고, 지도자의 최고봉은 ‘희생’이란 산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희생하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자신이 손해 볼 것을 뻔히 알면서, 그걸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사람 위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모든 것을 가질려는 사람이 아니다. 베푸는 사람이다. 또한 지도자는 사람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일에 앞장서서 본이 되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항상 분명한 사명감으로 일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거나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이다. 희생이 없는 지도자는 지도자의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진정한 지도자는 될 수 없다.

2010년 8월5일 칠레 북부 산호세 광산 갱도가 무너졌다. 지하 700m, 습도 90%, 섭씨 35도가 넘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 33명의 광부들은 69일간의 사투 끝에 구출 되었다. 세계의 시민들은 작업반장 ‘우르수아’에게 열광했다. 그는 사고 발생 이후 지상 구조팀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자신의 모든 우선권을 포기했다. 그리고 17일간 비상식량 분배 규칙을 세우고 광부들의 행동을 통제했다. 그는 지하공간을 작업실, 수면실, 화장실 등으로 나누고, 광부들이 규칙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일과표를 짰다. 또한 그는 최후 구조 순간까지 그의 희생은 멈추지 않았다. 최후 구조 순번 33번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올리고, 모든 동료가 구조 받을 때 까지 33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그는 가나안 정복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이다. 당연히 여호수아는 가장 먼저, 가장 크고, 좋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땅 선택권을 백성에게 넘겼다. 엄청난 배짱이다. 주는 대로 받고, 절대 욕심내지 않았다. 백성들은 여호수아에게 에브라임 산지의 딤낫세라를 주었다. 딤낫세라는 어떤 땅인가? 그 곳은 성읍으로 발전하지 못한 ‘황무지 땅’이였다. 여호수아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냥 소처럼 그 땅을 개간하고, 그곳에 묵묵히 살아갈 뿐이었다(수19:49-50). 이런 여호수아를 향해 종교개혁자 칼빈(Calvin)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확보한 후에야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여호수아의 절제된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간디는 인간을 부식 시키는 7가지 것으로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윤리 없는 비즈니스, 인성 없는 과학, 신념 없는 정치, 그리고 희생 없는 종교를 들었다. 교회의 지도자가 희생하지 않고, 희생을 가르치지 않고, 희생하기를 꺼린다면 기독교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희생이 무엇인가? 히브리어, 헬라어를 막론하고 희생의 의미는 ‘도살’을 의미한다. 정말 살벌한 말이다. 희생 한다는 것은 자신을 도살하는 일과도 같이 힘든 일이란 말이다. 진정한 지도자가 많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는 지배적 소수와 창조적 소수가 존재 하는데 진정 역사를 발전시킨 주인공은 지배적 소수가 아닌 창조적 소수였다”라고 말했다. 역사를 움직이는 인간형에는 지배자와 지도자가 항상 공존해왔다. 지배자는 사람을 자기 마음껏 지배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이다.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마음이 이어질 때


니고데모의 안경 - 신국원




세계관은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생각의 지도’라고도 합니다. 스스로 인식하든 안 하든 세계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공동체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세계관에는 여러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세상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나?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세상은 이다지 고통과 죄악으로 가득한가? 구원이 실제로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며, 세상과 역사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기독교 세계관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크게 창조- 타락- 구속의 진리로 대표됩니다. 이 삼중렌즈로 우리는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적 세계관으로서 우리의 안목을 고쳐 주는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모든 것을 제대로 보게 합니다.

창조
창조는 세상과 만물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창조를 통해 성경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봅니다. 창조 진리는 특별히 인간 근원과 목적에 대한 물음에 답을 줍니다. 창조는 우주와 역사의 기원과 더불어 인간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있게 되었는지를 밝혀 줍니다. 틸리케는 인간창조의 특별함을 묘사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중대 결단’ 이며 ‘모험이라고도 했습니다. 세상이 인간에게 맡겨지고 그에 의해서 좌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운영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소위 ‘문화명령’이라 불리는 ‘다스림’의 사명이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의 청지기라는 인식은 문화와 역사도 그에게 순종해야 함을 알게 합니다. 

문화는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창조 세계를 조성하고 보호하며 가꾸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문화의 표지는 ‘샬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통해 인간은 자발적 순종의 특권을 받았습니다. 물질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영혼을 가진 존재이며, 영원을 보는 안목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타락
지금의 세상은 창조된 그대로가 아닙니다. 현실은 문제와 비정상적인 것들로 가득합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와 악으로 물든 비극적인 곳이기도 하고, 여기서 인간은 갖 고통에 시달립니다. 죄와 악, 그리고 죽음은 인간이 직면한 가장 큰 비극입니다. 악이 세상에 온 것은 인간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창3장). 인간의 타락이 악의 원인이라는 관점은 성경에만 있는 특별한 진리입니다. 악은 철저하게 후천적인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깨뜨린 순간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삶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타락은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기준이 하나님에게서 인간 자신에게로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인격의 중심인 마음이 부패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의 핵심적 기능인 지,정,의가 왜곡되고 비뚤어졌습니다. 전적 타락,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이 되었습니다. 타락의 결과는 이토록 심각한 것입니다. 타락이 중대한 문제인 까닭은 그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만물이 사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상 속에 사는 우리는 악을 체험하는 동시에 죄악의 권세아래 살아갑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반역한 자기 자신을 섬김으로 타락은 곧 우상 숭배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타락의 원리는 유전되며, 인류의 대표로서 아담이 지은 죄는 인류 모두에게 전가됩니다.  

구속  
이 세상에는 과연 살 소망이 있을까요? 죄와 악 그리고 타락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세상과 삶은 암울하게 보입니다. 구원은 이러한 세상에 대해 소망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타락 이후 인류의 소망은 오로지 구원에 대한 약속에 있었습니다.  특히 구원을 가져올 “여자의 후손”, 즉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 소망의 근거였습니다. 구약 시대의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과연 약속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일’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었습니다.  성경은 ‘오실 예수’와 ‘오신 예수’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회복입니다(고후 5:17-18). 아담이 깨뜨린 언약을 회복하는 것이고, 세상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대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재창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타락으로 죄악 가운데 죽은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하여 그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돌리신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속은 순간적인 역사인 동시에 하나의 긴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교회보다 훨씬 큰 실재이며, 그 범위는 구속을 통해 회복되는 세계 전체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진정한 방법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군사와 일꾼을 기르는 훈련소라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구별된 삶을 통해 불의한 세상 속에서 의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완성을 기다리는 사람은 구속 역사의 동참자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세상이 주는 쾌락과 재미에 탐닉하지도,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문화의 누룩으로 복음을 통한 변혁을 바라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올바로 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778-868-3063 / Ezekiel475k@gmail.com]

필객의 붓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여름임에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한기와 부슬부슬 내리는 비 때문인지 어슴푸레한 어둠 속으로 잠겨 드는 도시의 거리가 쓸쓸하고 처량하게 느껴집니다. 선교 여행 준비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도시의 사람들이 깃들어 피로를 달래고 있는 희끄무레한 등불 속을 달리면서, 몇 시간 동안 목소리를 높여 기도하고 가르치던 것들이 와이퍼에 닦이는 빗물처럼 참 맹랑하고 부질없게 느껴지려고 합니다. 
두 주간의 짧은 여름의 행보가 뭔가 대단한 일처럼 너무 과장되고 부풀려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위해서 의미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뭔가 하나님께도 대단한 것인 양 각색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이 됩니다. 
요즘 티브이며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희끄무레한 유령들이 출몰할 것만 같은, 비 내리는 도시의 음산한 허무 속을 달리고 있는 중, 차 안에서 재잘대는 아이들의 소리가 생명의 색깔과 위안의 음성으로, 그래도 내가 서 있어야 할 위치가 믿음이고 사랑임을 일깨워줍니다. 

요즘은 해골 패션이 유행입니다.
옷이며 액세서리, 컴퓨터용품이나 심지어 문신에 이르기까지 해골 그림이 유행입니다. 스컬 룩(skull look) 이라는 근사하고 감각적인 패션 용어에 굴복하여 사람들은 이미 깊이 해골을 받아들였습니다. 
성공의 보루에 선 인물들을 통해 총 천연의 이미지들과 지적인 언어와 감각적인 소리들로 보암직하고 탐스러움을 향한 갈망을 충동질 당하지만, 이것이다 하고 붙잡을 만한 것이나 무게를 두고 기댈 것이 없게 텅 비어있는 현실 속에 뼛속까지 메마른 현대인의 갈증을 조롱하는 것 같습니다.

신비 종교에 빠진 세계적인 배우가 자신의 자녀까지 그 종교에 넣으려 한다는 이유로 이혼 소송을 당했다는 기사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요즘 헐리웃의 영화들을 도배하고 있는 유명 연예인들이 동성애나 양성애자 임을 과도하게 드러내고, 그들의 이혼도 결혼도 정치, 경제적인 이슈를 타고 하고, 공연 때마다 예수님을 모욕하는 귀신의 형상을 한 가수를 세계적인 대 스타로 부추기는 언론 플레이를 보면서, 이제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고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사단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굴복하고 경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세계 유명 연예인들이나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사단을 숭배하며 귀신들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말, 그들이 만약 귀신의 지령에 불복하면 당장에 파산을 시키고 스캔달로 대대적인 망신을 준다는 말이 사실인 듯 느껴집니다. 줄에 묶여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놓인 부귀 영화를 눈으로만 만족하며, 자신이 누릴 수 없는 것을 자기 것이라 믿고 있다가 뇌물을 받아 감옥에 가고 파산하는 사람들을 보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움의 잔인한 덫에 걸린 것처럼 가엽고 안쓰럽습니다. 

사람들은 목마릅니다.
미디어의 덕분에 인정 받고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극대화 되어 있는 반면, 기계의 시스템에서 전산으로 처리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체온을 나눌 수 있는 기회들은 점점 줄어들고, 그나마 함께 있는 동안도 경쟁하고 비교하고 이생의 자랑으로 심하게 나뉘어 있는 현대의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외롭고 사랑과 인정에 굶주려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구걸하며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가정은 와해되고, 은행이 재산을 빼앗아가고,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학교는 아이들의 꿈을 억압하고, 정부는 더 이상 국민들을 위하지 않고, 자녀들은 더 이상 부모님에게 복종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랑이란 음란과 남녀 상열, 탐욕과 죄악의 이름 위에 유혹의 느낌으로 어필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큰 구원의 날을 선포하는 명절 끝 날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음성은 조용하고 나직했을 거라 여겼었는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울부짖으셨다고(cry out)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부산스럽지만 종교적인 형식에 매여 생명은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이신 그분을 몰라보는 눈먼 소경들, 생수 되신 분을 곁에 두고도 목마름에 허덕이는 영혼들을 보시며, 도저히 참지 못하시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지금 교회 안의 신자들 중에도 생수를 곁에 두고서도 목말라 허덕이고, 생명의 떡을 손에 들고서도 헛된 가치들을 구하며, 영생의 약속을 취할 수 있음에도 여전히 이생의 썩어질 것들을 구하며, 자신이 무엇을 믿는 줄도 모르는 채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신자들이 가득합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질병, 사망, 궁핍이 아니라 미련한 생각과 반응이며 우리에게 가장 큰 재앙은 진리에 눈 멀고 귀먹음입니다.
우리의 배에서 성령의 생수의 강이 터지면 이 세상의 가치가 유혹할 수 없습니다. 
권력이 두렵지 않고, 가진 자들 부럽지 않고, 없어도 서럽거나 꿀리지 않고, 유명한 자들이 나보다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진리가 주는 자유, 그 자유가 없는 권력과 부와 명예는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부와 귀와 권세가 만물의 주재가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모든 사람들을 크게 하심과 부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습니다. 

침울에 잠겨있는 목마른 도시를 향해 외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내 가슴에도 사라지지 않는 외침으로 살아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목사와 장로 간 갈등, 어떻게 해결할까



직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권한과 역할 다름 인식해야

영남신대 김승호 교수 주장


‘목사 주도형’ 및 ‘장로 주도형’ 목회 장점 불구하고 한계성 내포
갈등 극복과 협력의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

장로들만 없다면 목회할 맛이 날 것이라고 말하는 목사들이 있다. 반면, 장로들은 목사다운 목사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한숨을 내쉰다. 이 때문일까. 결국 목사와 장로는 갈등 및 긴장 관계로 치닫게 된다. 사실 목사와 장로 사이의 갈등과 긴장 관계는 교회 규모에 상관없이 한국 교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영남신대 김승호 교수는 목사와 장로 간 갈등을 유발시키고 있는 목회 유형을 ‘목사 주도형’과 ‘장로 주도형’으로 구분했다. ‘목사 주도형’은 목사와 장로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규정한다. 목사는 명령자로, 장로는 목사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로 이해한다.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오랫동안 그 교회에서 목회해온 경우 이런 유형을 자주 볼 수 있다.

김 교수는 “이러한 교회들은 목사의 강력한 카리스마 때문에 교회 구성원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교회가 정한 목표를 효과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목사 주도형’은 목사와 장로를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보기 때문에 목사와 장로 간 소통의 부재와 부정적 감정이 쌓여 결국 심각한 충돌이나 위기에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특히 오랜 세월 동안 목사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장로들 위해 군림했던 경우, 은퇴 시에 심각한 갈등관계에 직면하는 경우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 김 교수는 “장로들이 후임목사를 청빙할 때 이전 목사의 독재와 전횡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게 하려면 후임목사 직무와 역할을 상당 부분 제한 축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장로 주도형’은 장로 개인이나 장로그룹을 교회의 주인으로, 목사를 월급 사장이나 피고용자로 보는 유형이다. 장로(장로그룹)가 목사의 직무와 역할의 범위 등을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경우도 있다. 결과적으로 장로는 목사의 목회를 협력하는 것이 아닌 견제 혹은 감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김 교수는 “장로가 이전 담임목사의 독단적이고 비민주적인 목회를 경험했거나, 목회자들에 대한 부정적 사고 때문에 목회 협력보다는 견제 및 감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많은 장로교회들이 이와 같은 ‘장로 주도형’을 선택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당회를 거치지 않는 일방적인 목회방식을 유지하거나 재정유용, 성적탈선 등의 일탈행위로 권위가 상실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목사와 장로의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보고, 목사의 권위를 기능적 측면에서만 인정하려는 분위기, 영적 지도자로서의 목사에 대한 존경심이나 목사로 안수 받은 사실 자체에 대한 존중감 등이 부족한 분위기도 장로 주도형 교회로 나아가게 된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장로 주도형’은 협력에 의한 목회가 아닌 장로의 견제와 감독을 받는 목회가 돼 목사와 장로의 잠재적인 갈등과 문제를 키울 수 있다. 목사가 활기차게 목회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목사 주도형’과 ‘장로 주도형’은 나름의 장점이 있음에도 한계성 때문에 목사와 장로 간 갈등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교회 행정의 직무에 대한 목사와 장로 간 이해 차이로 각 사역 부서장이나 부원을 결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부교역자 청빙, 교회 예산 편성 및 집행, 목회자 사례비 및 목회활동비 책정 등 인사 및 제정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갈등양상을 보인다.

그렇다면 목사와 장로 간 관계 개선을 위한 방안은 없을까. 김 교수는 우선 목사와 장로가 각각 자신과 상대방의 직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교회법과 교회문화에 따른 서로 간의 권한과 역할의 다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목사는 장로들과 함께 목사와 장로의 직무에 대해 지속해서 대화하고, 그 직무를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 후속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며 “가능하다면 목사와 장로의 직무와 세부적인 역할에 대해 목사와 장로가 함께 문서형태로 작성해 공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헌법에 나타난 장로의 직무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김 교수는 “한국 교회는 장로의 직무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다스리고 돌아보는 일은 목사에게 국한된 직무가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 전체로 구성된 당회에 속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역과 직무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할 수 있도록 목사와 장로가 지속해서 교육받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노회 혹은 총회 차원에서 각 지역의 신학교와 협력해 목사와 장로의 직무에 대한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김 교수는 “여성 장로들을 많이 세우는 것도 필요하다”며 “여성 장로들의 확대는 그 자체로 전통적인 남성 중심으로 된 당회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고, 부드러운 당회 분위기를 조성할 뿐만 아니라 모성적 차원의 사역을 확대하는 차원에서 매우 유용하다”고 피력했다.

교회 치리에 있어서 목사와 장로 간 갈등을 극복하고 협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다. 목사와 장로 모두 인간이기에 인격적 결함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부족한 점이 보여도 사랑으로 덮어주고 협력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김 교수는 “서로에 대해 더욱 따뜻한 인간애와 형제애, 동역자 의식을 경험하기 위해 지속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 관계 증진에 힘써야 한다”고 당부했다.

낙태비용 1불씩 지불하고, 성경공부하다 벌금 물고 …



미국이 7월 4일 영국 식민지로부터의 자유가 선포된 독립기념일을 맞아, 크리스천들의 자유는 얼마나 존중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세계 기독 박해 국가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오픈도어선교회의 칼 몰러 회장은 “자유는 쉽게 얻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세운 이들의 피로 산 바 된 것”이라며 “그저 폭죽놀이와 바베큐로 즐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그리고 종교 자유를 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감사를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 독립운동가였던 패트릭 헨리는 말했다. “이 위대한 국가는 종교주의자들이 아닌 크리스천들에 의해 세워졌고, 종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세워졌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 예배의 자유가 주어지게 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미국은 기독교 정신을 잃고 기독교가 타 종교보다 더 박해받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우려를 사고 있다. 일부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이슬람 관련 수업을 정규 과정에 받아들이면서도, 성경공부나 기독 클럽은 엄격히 제한하거나 혹은 아예 허용하지 않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말 캘리포니아에서는 집에서 진행한 성경공부를 이웃이 신고해 벌금을 물게 한 경우도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최고법원의 합헌 판결로 이슈가 되고 있는 오바마케어를 두고, 크리스천들이 종교 자유 박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크리스천들이 오바마 케어를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생명연장약물을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생명을 끊는 약물은 무료로 제공되는 것 ▲선택 낙태 비용을 매달 1불 이상 지불해야 하는 것 등이다. 만약 미국인 노동자 절반이 매달 1불 이상 지불할 때, 매년 낙태 지원 비용으로 9억2천400만불이 지원되는 셈이다.

크리스천법률센터 LDA(Legal Defense Alliance)는 “이 이야기는 결국 2백만명 이상의 태아를 낙태할 수 있는 비용을 강제로 지원해야 하는 꼴이 된다. 미국 236년 역사상 이같은 종교 자유 박해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바마케어는 종교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년연합컨퍼런스를 진행한 워싱턴교회협의회 오선일 목사는 지난 3일 집회를 마치면서 “이 땅을 위해 피를 흘려 자유를 쟁취한 수많은 선조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 이민자들이 행복하게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며 “이제는 우리 이민자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 미국을 위해 함께 중보해야 할 때”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2012년 7월 4일 수요일

“탈북자 고통 침묵한 罪 회개 합니다”


북송반대 해외 300인 목사단 8월 美서 통곡기도대회




탈북자 북송반대 추진을 위한 해외 300인 목사단(공동대표 박희민 이원상 송정명 손인식 김인식 목사)은 내달 14일 오후 2시(현지시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 베델한인교회(손인식 목사)에서 ‘2012 크리스천 북한 포럼 및 통곡기도대회’를 개최한다. 

15일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이번 행사는 해외 한인교회 목회자와 국내 목회자, 평신도 1만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북한 주민과 탈북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 우리 민족과 교회가 침묵했음을 회개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다.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 북송이란 비인간성과 야만성에 대해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한 미주 지역 목회자들은 지난달 중순 탈북자 북송반대 추진을 위한 해외 300인 목사단을 결성하고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운동과 중장기적 복음통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대회에는 미주에서 2008년 서울평화상 수상자 수전 솔티 여사, 샘 브라운백 미국 캔자스주 주지사, 에드 로이스 하원의원, 조진혜 탈북민 북한민주화 미주 대표, 박희민(나성영락교회) 이원상(와싱톤중앙장로교회 원로) 송정명(미주 평안교회) 김인식(웨스트힐장로교회) 목사 등이 강사로 초청된다. 

국내 강사로는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신동혁 요덕수용소 출생 탈북자, 김현욱 평통수석 부의장, 주성하 김일성대 출신 동아일보 기자, 길이진 탈북 목회자, 김지우 통일시대사람들 대표, 임창호 탈북민기독교총연합회 회장 등이 나선다. 

탈북자 인권에 앞장서는 한국 연예인 부부의 간증과 한국계 호주시민 ‘유튜브 스타’인 쌍둥이 자매 제이에스 리의 북한 인권을 위한 공연도 함께 열린다. 

이 행사를 2004년부터 매년 주관하고 있는 손인식 목사는 “탈북자들은 북한으로 가게 되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거나 평생 고난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가게 된다”며 “우리 모두 힘을 합해 북한 인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부르짖어야 한다”고 말했다(미국 949-854-4020·cfnk.org). 

[사진 왼쪽부터 수전 솔티 여사, 손인식 임창호 목사]

아브라함 이야기


15. 약속을 확신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 창 15:1-6 (상)



창 14장에서 아브람은 멜기세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The most high God)이심을 깨닫았을 뿐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믿음의 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아브람은 신앙의 두려운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창 15장을 보면, 아브람은 전쟁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물질의 부족에 대해서 걱정하며, 지연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아직도 그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칠흙같이 어둡고 두려운 신앙의 밤 한 가운데서 별처럼 빛나는 약속을 주시면서 아브람으로 다시금 말씀에 대한 확신 가운데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함
창 12:1, 13:14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는 표현이 나오는 반면, 창 15:1과 4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예언자에게 계시를 주기 전에 나타나는 표현(삼상 15:10; 호 1:1)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이어 나오는 13-16절까지의 예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대신에 ‘여호와의 말씀’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말씀’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언약만을 온전히 의지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원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 중심의 신앙, 말씀에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는 신앙을 원하고 계십니다. 

전쟁의 보복을 두려워한 아브람
창 15: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지금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는 네  방패”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방패’란 ‘마겐’(māg̱ēn)으로 군사적 용어인데, 아브람의 두려움이 군사적인 것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아브람은 기습작전으로 패배시킨 그돌라오멜 연합군의 보복공격을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의 5개국 연합군을 물리칠 정도로 강한 그돌라오멜 연합군이 언제 갑자기 쳐들어와 아브람과 그의 사병들을 쓸어버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호를 약속하신 하나님
이렇게 전쟁의 보복 때문에 두려워 떨면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친히 방패가 되어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하셨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아브람이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확신있게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극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확신에 차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방패가 되어 주시며,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주시겠다 (마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자녀들은 두려운 일을 만날 때에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니라”고 하신 하나님은 이어서 자신이 또한 “너의 (아브람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상급’이란 말은 ‘사카르’(śāḵar)로 ‘(특히 용병들의) 임금(급료)’을 - 이 단어가 겔 29:19에서는 “(군대의) 보상”으로 번역됨 -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용병들의) 급료’라고 하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 14:23-24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예수님의 마음 치유

구 목사 가정의 이야기




1998년 봄에 나는 서양 교회의 부목사직을 사임하고 아내는 카나다 은행의 매니저 승진을 내려놓고 작은 딸과 함께 국제 YWAM 하와이 제자 훈련 5개월 과정 (CDTS)에 들어갔다.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 자신 제법 괜찮은 목사라고 믿었기 때문이고 좀 배워서 나중에 선교지에 가서 사역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나 형편없는 나의 육적인 모습이 적나나하게 들어나는 것이었다. 

뜨겁게 성령의 사역을 하고,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가르치는 목사였는데, 내가 봐도 맘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이 수시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곤 하는 시간이었다. 3 개월 강의 과정을 마치고 2 개월 중국 현지 훈련을 떠났다. 내 깊은 모습이 더 들어났다. 그리고는 훈련이 끝났다. 밴쿠버로 돌아와서 한동안 선교 단체를 돕는 일을 하다가 얼마 전 담임 목사가 사임한 문제 많은 교회에 청빙을 받았다. “자신 있게” 부임을 했다. 

그러나 이민 교회 목회에서 많은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년 만에 사임을 했다. 뒤돌아보면 모든 것이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냥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다. 상처 많고, 고통하며,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섬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잘난 목사였던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안쓰러움이 지금도 마음에 가득하다.  

물론 우리 부부를 좋아하고 따라준 성도들도 많았다. 대부분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많이 아픈 사람들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했던 것이고, 그 아픈 사람들이 나를 대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나 자신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와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 또 이어진 교회개척을 통해서 주님이 마음 치유, 내적 치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음성을 쏟아 부으시기 시작했다. 어디서든지 “치유” 라는 말만 들으면 귀가 쫑긋해지고 그냥 내 마음이 그리로 흐르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치유 책들을 다시 읽었고 특히 데이빗 시맨즈 (David Seamands)의 책이 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반복해서 읽으면서 내 자신의 숨겨진 모습이, 나의 인생의 뿌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아픔이 드러나면서, 아버지를 일찍 잃어버린 안타까운 마음이 건드려지면서 많이 울었다. 통곡했다. 그러면서 12 주에 걸쳐서 내적 치유 설교를 시작했다. 아내와 성도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8주 과정의 치유 학교를 개강했다. 

바로 내가 변하기 시작했다. 주님을 따라가는 인생의 아주 중요한 비밀을 깨달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서서히 다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를 친구하는 사람들도 늘어갔지만 무엇보다 내가 주님과 더 깊은 친구가 되어가는 느낌이 나를 행복하고 여유롭게 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선교지 세미나와 외부 집회를 시작했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 saranghealing@hanmail.net

2012년 7월 2일 월요일

세계침례교연맹, 베뢰아 가입 청원 긍정적 검토


침례교, 강한 반발 속 ‘가입철회’ 강력 요구




세계침례교연맹(이하 BWA)이 한국 교회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설립총회장:김기동, 이하 베뢰아)의 가입 청원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어 교계에 비상이 걸렸다.

이와 관련 BWA에 가입돼 있는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장:배재인 목사)의 경우 강력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BWA 측에 항의서한을 발송하는 등 베뢰아의 가입철회를 공식적으로 요청한 상태다.

최근 미국 BWA 사무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침례교 증경총회장 한명국 목사(BWA 전 부총재)에 따르면 BWA는 현재 베뢰아의 가입 청원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한 목사는 BWA 총무와 면담을 진행하는 가운데 침례교의 한 유력 인사가 베뢰아를 이단으로 규정한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베뢰아 측에 BWA 가입청원과 관련 추천서를 써준 것을 파악했다고 밝혀 교단과 교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이에 대해 침례교 한 관계자는 “베뢰아 측에 추천서를 써준 침례교 인사가 자신의 행동을 철회할 가능성도 있다”며 “만약 철회하지 않을 경우 교단 차원의 강한 조치가 뒤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침례교는 또한 베뢰아의 가입청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BWA에 보다 강력하게 항의하기 위해 베뢰아를 이단으로 규정했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이단 결의 공문과 함께 가입철회를 요구하는 서한을 재차 발송하기로 했다.

한편, 베뢰아 가입청원에 관한 논의는 7월 4일(현재시간)부터 칠레에서 열리는 ‘2012 BWA 상임위원회’에서 다뤄질 예정이다. 이때 한명국 목사를 비롯해 BWA 상임위원으로 있는 5~6명의 침례교 목회자들이 대책위원으로 참석해 베뢰아의 가입 철회를 적극 요구할 방침이다.

침례교 한 관계자는 “BWA는 최근 SBC(미국 남침례교)가 탈퇴해 큰 혼란을 겪기도 했다”며 “베뢰아의 BWA 가입이 성사된다면 베뢰아를 이단으로 규정한 한국 교회의 이단 결의가 무색해질 위험성이 있으며, 일부 연합기관과 교단에서 이단 규정을 풀 가능성도 높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이어 “BWA가 베뢰아의 가입 청원을 받아들인다면 베뢰아가 정통 교단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며 “4일부터 진행되는 BWA 상임위원회가 진리를 고수하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국 교회의 기도와 관심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