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2일 금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32 >







 
0147.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인생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취하게 되는 지식의 양이란 참으로 미비하기 그지없다. 불과 4-5백년 전만 해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늘의 별을 일일이 세어보니 모두 1022개가 되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프랑스의 빠스깔(B. Pascal, 1623-62)의 ‘빵세’(명상록)에 기록되어있다. 남반구의 별은 생각지도 못한 시대였다. 머리 위에만 별이 있는게 아니라 우리의 발 아래(남미, 호주지역 등)있는 별들은 북반구에서는 볼 수가 없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헤르셀, 아인슈타인, 허블 등등의 천체(물리)학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빠스깔의 구닥다리 망원경에 하나로만 보였던 그 별은 오늘날의 고성능망원경으로 보니 실제로는 1조(혹은 10조, trillion)의 별의 집단이었다. 평생을 세어도 셀 수 없는 숫자이다. 헬라어의 ‘갈락토스’(‘우유’의 뜻)에서 ‘은하계’(galaxy)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돈다는 빛의 속도로 1년간을 달려가는 거리를 ‘1광년’(1光年)이라고 배운다. 우리의 태양계를 포함하고 있는 이 은하계의 중심에까지 이르려면 빛의 속도로 달려서 25-50만 광년이 걸린다고 하니…그런데 이 우주에 우리의 은하계 같은 ‘조’(trillion)의 별의 집단이 몇 개가 있는지? 천만 개, 억만 개…?

우리가 살고있는 거대한 유성, 이 지구도 우주에서는 모래알 하나에 비유된다. 지구의 주위를 도는 달의 크기는 모래알 하나를 쪼개고 또 여러번 쪼개야하는 크기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대하심은 측량할 길이 없다. 겨우 달에 발을 디디고 돌아와서 ‘우주를 정복했다’는 인간의 교만에는 혀를 차게 된다. 차라리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시8:3-4)라고 노래한 다윗의 마음이 위대하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무지의 영역을 기하급수적으로 더욱 크게 확대시켜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러한 광대무변한 창조에 관하여는 지극히 간결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천지창조의 ‘클라이막스’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 창조 1-6일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안식’을 취하신 일곱째 날, 즉 구원의 날이다. 하나님이 손수 예비하신 ‘그리스도안에서의 쉼’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0148. 이스라엘의 죄악 / 독일의 죄악

‘축복과 저주’의 신명기 28장에서 복을 저버리고 저주의 완악함의 길을 걸어온 이스라엘. 창조주 아들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서야 어찌 이스라엘이 편할 수 있었겠는가…? 유대인 박멸에 나선 나치 독일은 점령하는 나라마다 수용소를 건립, 무려 15,000개가 넘었고 유대인들의 국적은 모두 29개국에 달했다. 단 이틀 동안에 우크라이나 대학살로 33,000여명이 처형당했고 폴란드에서는 3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6곳에 흩어져있는 수용소 가스실에서 질식해 죽었다. 연합군에 의한 뉘렘베르크에서 있었던 나치 전범 재판에서 교수형을 당한 폴란드의 총독 한스 프랭크(Hans Frank)는 나치 전범으로서 독일의 죄를 고발하고 죽었다: “1,000년이 지나도 독일의 죄는 지워지지 않을것이다”(“A thousand years will pass and the guilt of Germany will not be erased”).

중세 십자군의 주체 세력은 거의가 ‘게르만’족들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이라고 하나 프랑스의 무신론자 볼테르의 말대로 ‘로마적’이라기 보다 ‘게르만적’이었다. 왕권을 동원, 전 게르만 인구의 1/3을 살생한『30년 전쟁』(1618-48)은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한 기독교인 대학살을 위한 전쟁이었다. 독일 낭만파 작곡가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는‘마탄의 사수’(또는 ‘자유사수’, Der Freischuetz)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잔악행위와 평화롭던 마을을 불태웠던 ‘30년전쟁’직후의 이야기를 소재로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끝을 맺는다. 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가 “개인으로서의 독일인의 우수성과 집단으로서의 사악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다(“I have often felt a bitter sorrow at the thought of German people, which is so estimable in the individual and so wretched in the generality…” - Goethe).

0149. 로마교황청의 죄(1)

베버나 괴테의 예견대로 이 독일은 제1, 2차 세계대전에 다시 연루되었다. 로마교황청 사절의 대표(Papal Nuncio)로 독일에 오래 근무하였던 Eugenio Pacelli(1876-1958)가 교황 비오(Pius)12세가 되어 ‘히틀러의 교황’이 됨으로써 유대인 대학살이 다시 시작되었다. 로마제국의 권력을 동원하여 정결한 성도들이었던 도나티스트(Donatists)파들을 괴롭혔던 ‘하나님의 도성’의 성 어거스틴이나 히틀러의 아리안주의(Aryanism)는 기독교회사 초기부터 거론되어온 역사로서 늘 정치권력을 동원, 로마교회의 본질이 정치임을 나타내고 있다. 사단은 이 사악한 히틀러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세상의 권위를 동원하였다. 히틀러를 만나 ‘나치’세력을 직접, 간접적으로 보증선전해준 자들이다. 신학자, 사제들 외에도 미국의 이혼녀와 결혼을 위해 왕위를 버린 영국왕조지 5세(1937) 내외가 히틀러를 예방한다. 경비행기로 뉴욕에서 빠리까지 대서양을 ‘논스톱’으로 횡단, 팬암 항공사 설립 멤버 중에 한 사람이 되었던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 1902-74), 영국의 사가 토인비(A. J. Toynbee, 1889-1975, 조카 토인비)가 1936년 2월에 히틀러를 만나 서유럽의 생존을 위해 독일세력의 우크라이나(the Ukraine)와 우랄(the Urals)까지 확산을 종용한 사실을 사가이자 Koeln대 교수인 힐그루버(Andreas Hillgruber, ‘Germany and the Two World Wars’, Harvard Univ.)가 토인비 교수의 저서(‘Acquaintance’, London, 1967)를 직접 인용하여 밝혔다.

헤밍웨이, 린드버그, 간디…등등 온 세상이 ‘대중의 영웅숭상 히스테리아’(‘the mass hysteria of hero worship’)에 몰두하던 시대라 히틀러는 쉽게 대중을 미치게 만들 수가 있었다. 로마교황청의 20세기 십자군으로 시작한 ‘나치’십자군은 다시 유럽을 재난에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을 다시 황폐하게 만들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1914-45)기간은 제2의 ‘30년 전쟁’으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 오늘 날의 매스미디어들이 ‘영웅’(hero)이라는 단어를 남발하고 있는 것은 이제 히틀러를 능가하는『빅 브라더』(Big Brother)란 영웅(hero)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0150. 로마교황청의 죄(2)

‘그리스도를 죽인 자’(‘Christ Killer’)들 이라고 유대인 박멸에 나섰던 로마교황의 진리에 대한 무식함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무지함이다. 기독교가 아님은 물론, 종교도 아니면서 종교의 얼굴(천주교)을 하고 정치(바티칸)세력을 확장해왔던 이 비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비밀”(Mystery, 계17:5)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영적지도자들로 자처하는 많은 분들이 이 비밀에 가리워져 있어 배도는 어디서나 쉽게 기세를 부린다. 종적(宗敵)인 헤롯과 빌라도가 주님을 대적하기 위해 그날은 “하나”(one mind)가 되었다(눅23:12/행4:27). 신약의 바벨론은 구약의 바벨론과 다르다. “어미”(母, Mother, 계17:5)로서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여자이다”(계17:5-6). 두 번이나 기록된 “한마음”(계17:13,17)에 유의하시라. 종교가 이 “어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종교가 아닌 종교는 천주교 밖에 없다. ‘성모’(聖母, Holy Mother)교회, 성모병원 등등… 유럽에서는 마피아도 ‘거룩’(?)하다(Holy Mafia, ‘쌍타 마피아’).

오랜 기간 동안 기독교 박해사에 관심을 두고 로마교황청이 저질러온 잔악상을 정리해보았다. 늘 왕권의 정치세력과 결탁, 계획적/조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유대인 및 기독교인)을 진멸해온 로마교황청의 역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또 내가 보니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 까지도 놀란다. “내가 그 여자를 보고 크게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계17-18장을 정독하자).

0151. ‘누가 그리스도를 죽였는가?’

그리스도를 죽인 자(Christ Killer)는 유대인이 아니라 내 죄(罪)가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진리의 가장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엡2:3).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속에 들어옴으로써 그리도인이 되었다. 우리가 행한 무슨 일의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의(義)는 “더러운 옷”(사64:6)에 비유된다. 아버지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신다.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시사하는 모든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깨닫는 은혜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처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하는 이 없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계시고…”(딤전3:16, kjv)라고 크게 외칠 수 있는 ‘복된 확신’이다. 할렐루야!!!

영화로신 주 성령
나의 맘에 비추사
어둠 몰아내시고
밝게 하여 줍소서

(찬 176 / 영화로신 주 성령 ①)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서로 돌아보라



주님의 은혜로 제가 교회를 개척한지 벌써 육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옮겨 다닌 곳 만해도 현재 장소까지 다섯 번째입니다. 밴쿠버에서의 어려운 목회 환경들 중에 한 가지는 온전하게 예배드릴 장소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교회 건물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백인 교회 관계자와 교회 렌트 문제를 두고 두 시간 가까이 길게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화 내용은 우리가 예배드릴 수 있도록 사용하지 않는 시간대에 교회 건물을 대여해 달라는 것이지만, 그 교회 관계자는 그럴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울컥 하게 만든 말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집에 한 가족만 사는 것처럼, 이 교회 건물에도 한 가족만 있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순간 너무 큰 이질감과 타국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의 서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지 않는가? 그런데 미래의 하늘나라에서만 한 가족이고, 현실에서는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같이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교회 관계자의 모든 말에는 당위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에서 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당신의 사랑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진지하게 지금 당신의 사랑이 어디에서 작용(Working)하고 있느냐?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분도 이 말에 좀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랜 시간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 교회 관계자는 교회 렌트에 대해서 다른 관계자들과 상의를 해 보고, 안된다면 새로운 곳을 찾도록 꼭 기도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제 자신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었는데 우리들 사이의 이 냉랭함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너무 서로 각자의 삶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제 자신에게도 물었습니다. 나의 사랑은 무엇이고, 그리고 그 사랑이 지금 나의 삶에서 어디에서 작용(Working)하고 있는가? 그동안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제 자신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최근에 참석했던 설교 세미나에서 들었던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에스겔서 46장 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백성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대로 나갈지며”

왜 하나님은 볼일이 있어서 북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자기 일을 보고 북문으로 다시 나가지 못하게 하고, 필히 남문으로 나갔다가 먼 길을 다시 돌아서 가도록 말씀하셨을까요?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명령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기에 깊은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일만 해결하고 바로 집으로 가지 말고, 반대쪽 문으로 가면서 여기 저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형제, 자매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서로 돌보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주님의 참다운 공동체의 본 모습이 아닐까요?

잠시 각자 열심히 살아가던 삶의 걸음을 멈추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섬기시는 공동체에서도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그들의 아픔은 무엇인가? 좀 느끼면서 그리고 도우면서 우리가 살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나 하늘나라에서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라일주 목사 / 로고스교회 / 778-898-1558]
 
 
 
 
 

아브라함 이야기



하나님의 시험과 아브라함의 반응 / 창 22:1-6 (하)



아브라함의 반응 1 - 지체하지 않음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일찌기 일어났다고 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후 지체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다음날 일찍이 일어나 마치 평상시 제사드리는 것처럼 모든 준비를 한 후에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반응 2 - 흔들리지 않음
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여행을 시작한지 이미 삼일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고사성어에 보면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심한 것을 삼일 넘기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결심을 하지만 그 결심대로 지키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지만, 여행을 하면서 생각이 많아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이 여행을 하다가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리가 낡아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더 이상 갈 길이 없었기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해주신다면, 제 재산의 절반을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기도한 후 다리를 절반 쯤 건넜는데 의외로 다리가 튼튼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절반은 너무 많고 1/3만 드리겠나이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자 마자 다리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서둘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농담도 못하나요.”
이 이야기는 결단하기는 그래도 쉽지만 그 결단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삼일 동안의 여행이 아브라함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든 커다란 시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그 곳만을 여전히 바라보았습니다: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그만큼 이제 그의 믿음은 성장했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울 만한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반응 3 - 방해를 미리 차단함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산 아래 오기까지 종들의 도움과 나귀가 필요했기에 데리고 왔지만 이제 산을 오르기 전에 그들에게 산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만약에 종들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가 이삭을 잡아 번제로 바치려고 했다면 그의 종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조건 아브라함을 말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을 뿐 아니라, 흔들리지도 않았고, 방해를 미리 예상하고 그것을 미리 차단했던 것입니다.

순종의 이유 - 부활의 하나님을 믿음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하나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부활의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종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분명히 이삭과 함께 돌아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임시로 종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히 11:18-19을 보면,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흔들리지 않고, 방해를 미리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부활의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21장에서 아비멜렉의 사건을 통해서 깨달았던 믿음을 하나님의 시험 앞에서 그대로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시험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 당한 것 같은 시험을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그 뒤에 사단의 유혹이나 하나님의 테스트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시험을 이기고, 시험에 합격하고, 통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견고하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방해를 예상하고 미리 차단하십시오. 그래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벌써? 하는 느낌으로 주말을 맞으며, 만만한 속도로 돌아가는 회전문에서 방심하다 뒤꿈치를 받친 것 처럼 등줄기가 서늘해집니다. 몇 일의 시간이 어느 포문에 갇혀있다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것 같은 갑작스러운 속도감에 허둥거리며, 속이 빈 콩깍지처럼 헐겁게 지나가버린 일주일의 낱알이 몇 개 빠졌던 것은 아닌가 되짚어 셈을 해봅니다. 매 번 이렇게 시간에 놀라면서 인생의 세월을 날아가는 화살이나 눈 깜짝할 사이같은 순간에 비유한 것이 절대 지나친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급류처럼 사라져버린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이제껏 시간이 나를 중심으로 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시간 위를 표류하며 겨우겨우 여기까지 흘러 온 것처럼 느껴지고, 내일이란 시간도 오늘 내가 선 자리로 흘러와 채워진다기보다 나와 오늘의 상황이 내일의 자리로 흘러 떠내려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단 한번의 어김이나 단 일초의 오차도 없이 꼬박꼬박 채워지는 매일의 시간들이 앞으로도 한정없이 주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부주의하게 흘러 보낼 일이 아니라 사는 날까지 매 순간을 소중하게 받들며 살아야 할 것이란 다짐을 또 하게 됩니다.

얼마전 소천하신 이민아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우리가 바라는 행복을 줄 수 없음을 또 확인했습니다. 학자로서 저명 인사인 아빠, 유복한 집안, 뛰어난 학벌과 변호사로서 화려한 경력, 수려한 외모 등, 이 세상이 바라고 원하는 최고의 형용사를 다 갖춘 그녀도 결국 작은 사랑에 목말라했고,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불행하고 우울하고 힘들었노라 고백합니다.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유학을 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그녀는 어릴적부터 배우고 성취하고 달성하고 이루기 위해 밤 새워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며 치열하게 살았겠지만, 그녀가 고백하는 가장 가치 있었던 삶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것이었다 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녀가 얻었던 것들을 얻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이 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런 치열한 홀로서기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임을, 그녀의 간증을 통해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여전히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며 쫓아가는 좋은 학벌과 성공한 커리어, 아름다운 비전과 사랑하는 사람들, 그 어느 것 하나 지참하지 못하고 그녀는 떠났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인간은 불행하고 불안합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을만큼 풍요롭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놀라운 편리를 누리며 예전의 왕이 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음에도, 외롭다고, 불행하다고 하는 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을 보면 풍요가 행복에 대한 답이 아니며, 편리가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주는 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인간은 빵 이상의 것을 원합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 감각되는 것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작년 연말 어느 호텔에서 어린이 고객을 위하여 빵과 과자와 사탕으로 만들어 놓은 집을 보았습니다. 어릴 때 과자와 사탕으로 만든 집에 대한 동화책을 읽을 때 그곳은 분명 이 세상에는 없는 꿈의 세계일 것이라 상상했더랬는데, 그날 나는 그곳을 진동하는 비릿한 계란 냄새와 사탕과 젤리의 단 냄새에 머리가 아프고 배부른 고통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곳을 드나 드는 아이들도 너무나 당연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으며, 행복하게 빵과 과자를 뜯어 먹던 동화속의 아이들과는 달리 전혀 과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보리고개를 넘기기 위해 산과 들로 나물을 뜯으러 다니고 농사를 돕고 오직 배 곯지 않는 것이 생의 목적이었던 시대를 지나시며, 생의 가장 큰 가치가 먹는 것이었던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셨다면 뭐라 하셨을까, 당신의 세대의 가장 큰 염원이었던 삼시 세끼를 다 챙겨 먹을 수 있는 풍요속에 사는 자식들이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거대한 불만을 사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생에서 인간이 땀 흘릴 가장 고귀한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전쟁들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주야로 율법책을 묵상하며 그 입에서 율법이 떠나지 말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떠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일말의 염려나 걱정의 멘트도 입에 올리지 말라는 것이며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라는 것은 단 한줄기 생각 속에서도 허망한 것을 용납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상황을 보거나 자신을 바라보았다면 절대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불평과 불만이 습관이 된 거대한 민족을 이끌고, 하필 추수할 때라 언덕을 넘치던 요단강을 뗏목 하나 없이 건너야 하고, 오만하고 거칠고 악에 받친 가나안 거민들이 살고 있는 난공불락의 거대한 성 여리고를 취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자신이 발을 딛고 선 처지나 상황을 봤다면 당장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경제 공황이 오고 전세계적인 식량난이나 전쟁에 대한 흉한 풍설이 나돌고 있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식량을 살 수 없는 때가 곧 이를 것 같은 조짐이 보이고 있고, 교계 안에도 에큐메니칼이나 베리칩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뼈가 녹아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사람들에게 필요
한 것은 빵을 보장하는 새로운 정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합니다.

마피아 정국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분간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는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순결한 교회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교회음악 Plus





찬양대의 교회생활은


찬양대의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성도들과 관계를 원만히 가지며, 신앙적으로도 덕을 세우며 개개인이 특별하지는 않아도 지도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찬양대 안에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여 모든 일을 함께 나누며 감당해야 한다.

찬양대의 교회 안에서의 위치는 분명 교회 안에서의 회중의 일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찬양대는 특권의식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 특히 전도회 등에서 다른 회원들과 나누어야 할 때 친교나 봉사 할 때는 무엇인가 다르게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찬양대는 교회 안에서 독립단체가 아니다. 누구보다 더 겸손한 자세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교회 내에서 임해야 한다.

찬양대는 세상의 모임과 구별 되어야 한다. 혹 세상에서 다하지 못한 일과 충족되지 못한 일들을 슬며시 교회에서 찬양대를 통하여 채우려고 하는 일들을 보게 되는데 이런 일들은 철저하게 세상사람들로부터 구별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성도들과 하모니를 이루고 교회의 직분자들과 지도자들과 목회자들과의 하모니를 이루어야 한다. 찬양대는 주님을 사랑하며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성도와 이웃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므로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고 교회에 덕을 세워 모든 성도성도부터 사랑 받고 함께하며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한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7 장 내적 치유과정의 주제들



우리 부부의 내적 치유 학교나 집회에서 전해지는 중요한 주제는 대략 “열 가지”로 요약된다. 물론 강의는 이 주제들에 국한되지 않고 참석자들의 상황과 질문에 따라서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폭넓게 다루게 된다.

주제 9 : 예수님께서는 그 간단한 비밀을 몰라서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며 낭비한 지나간 세월을 풍성하게 회복시켜 주신다.

집회나 세미나 때에 이렇게 질문을 해본다 “지난 세월 중에 낭비한 세월이 아주 많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하면서 내가 먼저 손을 들어 올린다. 거의 모든 손이 따라 올라간다. 그런데 그 중에서 손을 들지 않고 있는 선교사 장로님에게 물었다. “장로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슴 뭉클한 대답이 흘러나온다. “낭비하지 않은 세월이 거의 없지요...” 이런 생각들과 마음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별 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많이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말이다. (사 55: 8-9) 그와 함께 (시편 119편) 의 말씀이 함께 떠오른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수많은 고난과 실패와 좌절을 겪게 하신다. 모세를 부르시기 전에 40년 양치기를 시키셨고, 요셉을 사용하시기 전에 십여 년을 감옥에 있게 하셨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기 전에 25년을 연단하셨고, 홍수를 겪기 전에 노아에게 120년 동안 배를 짓는 “쓸데없는 일”을 시키시며 인생을 “허비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월을 몇 번이나 덮고도 남을 영광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았고 더 큰 영광의 삶으로 들어갔다.

주님은 당신의 마음을 낮추시고 치유하시기 위해서 많은 세월을 낭비하게 하셨다. 이제 당신에게 낭비한 세월이 많다고 느껴지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의 부르심의 시간이 가까웠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만큼 당신이 겸손해져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마음속 장애물이 제거되어서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과 인도를 온전히 받게 될 때에 당신도 모세와 요셉과 아브라함과 노아가 경험한 진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주제 10 : 내적 치유의 원리를 겸손하게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우리 부부의 치유 과정 중에서 자주 반복하는 중요한 말씀이다. 목회자와 교회 제직들이 치유 세미나에 참석할 때는 대부분 “배우려고” 온다. 배워서 목회와 사역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세주만 지나면 원래의 목적을 내려놓고 자신의 삶에 이 치유의 원리를 적용해 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지나간 삶이 물위로 떠오르는 것을 눌러버리는 작업을 이제 포기하는 것이다. 마치 홍수 때에 뚝이 터지고 나면 모래 제방 쌓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강의 내용을 자신의 부부 관계, 자녀와의 관계에 적용하면서 자신의 삶을 겸손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강의 중에 자주 이렇게 강조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만나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다른 사람은 배경일 뿐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그렇습니다.” 서서히 이 연습이 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이 일어나고 예수님의 눈을 갖게 되고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서 말한 모든 치유와 회복이 저절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 순간부터 주위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가며 그들이 함께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글을 통해 주님이 당신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북한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은? (2)



지난주에 이어 갑니다. 북한 사람들에게도 ‘통일’이라는 이슈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한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고 또 존중하고 공감하고 갈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성경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통일을 살기 위한 몸부림’은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한출신 또는 해외의 교포출신으로 참 귀하게 여러 가지 모습과 다양한 방법으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통일일꾼들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귀한 사역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실제로 북으로 오가시는 분들과 그렇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는데 이 분들이 갖고 계시는 통일의 시각에도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북을 다니시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계속 주고 싶어하는 마음과 또 흡사 북한 사람이 되어져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내부에서 만났던 북한주민들의 생각과 표정, 마음에 감명을 받고 또 그들의 생각을 존중해준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과 표현, 행동은 다 각본이라고. 당연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기성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다니신 분들 대부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초기에는 경계를 하기 위한 방법으로 거리를 두기도 하고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방문하는 사람의 진심과 마음을 안다면 그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짜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북에 들어가지 못하시거나 북한사람들을 많이 접촉해보지 못하신 분들은 조금 다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과의 만남이 없는 것이 이렇게 상이한 결과를 줄 수도 있겠구나 싶어 이해가 됩니다만 이것은 반드시 사람을 만나고 안만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관건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 역시 ‘사람을 자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되다보면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그 간격이 좁아질수록 친해지고 진심을 주고받는 사이가 될 수 있는데, 진짜 핵심은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의 마음은 전달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접촉점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철저한 이해타산(돈을 버는 이해타산이 아니라 반드시 이행하고 성취하려는 어떤 목적)을 앞세워 주는 분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의심하게 되고 때로는 실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주기 위해 들어가는 사람과 계산을 하고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똑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받아들이는 결과는 확연히 다를 수 있습니다. 무조건 주려고 들어가는 사람은 잃을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주려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똑 같이 주려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마음 안에 ‘어떤 계산’이 있게 되면 그에 대한 결과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잃게 되거나 계획한대로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불안하고 화가 나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을 내려 보내실 때 계산을 하셨다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전에 우리가 정말 주님의 구원의 십자가를 믿고 따라올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의심하시고 계산하셨더라면 아마 십자가를 던져버리고 확 하늘로 가버리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같은 성경을 보고 사는 우리들안에서 엇갈리는 생각의 차이들을 보면서 저는 오대원 목사님께서 쓰신 ‘두려움의 집에서 사랑의 집으로’라는 책에 담겨진 내용에서 북한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그들과 함께 갈 수 있을지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년전에 쓰여진 이 얇은 책에 오대원 목사님은 성경속에 흐르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정확히 파악하셔서 우리의 심장을 찌르는 주옥같은 방법론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한마디로 겸손의 왕,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 사셨던 예수님처럼 우리가 살아내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