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기독교회를 향한 유대인의 감정은 단순하지가 않다. 복잡하다못해 처절하다. 중세 로마카톨릭교회의 일곱 차례의 십자군 원정(역사가에 따라서는 여덟 차례로 보기도 함)은 유대인들에게는 또 다른 재앙이었다.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살육과 약탈을 일삼아온 로마교황청의 야욕을 그대로 표출한 역사였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군’(Crusade)이란 단어를 혐오하기 때문에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가 유럽대륙에 상륙하면 CC (Campus for Christ)로 바뀐다. ‘회칠당한’ 교회사에 속임당한 북미교회나 그 영향아래 있는 교회들이 아직도 십자군의 망령에 묶여있는 것이다. 로마교황청의 지원아래 천주교 ‘십자가’ 깃발 아래서 결단, 로마카톨릭교회의 아들 ‘나치’ 히틀러의 유럽침공과 600만이 넘는 유대인 살육을 감행한 ‘20세기 십자군 나치’ 역사를 통해 기독교를 보는 유대인들의 감정은 치유가 불가하다할 정도로 그 상처의 골이 깊다.
기독교회를 향한 유대인의 감정은 단순하지가 않다. 복잡하다못해 처절하다. 중세 로마카톨릭교회의 일곱 차례의 십자군 원정(역사가에 따라서는 여덟 차례로 보기도 함)은 유대인들에게는 또 다른 재앙이었다.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살육과 약탈을 일삼아온 로마교황청의 야욕을 그대로 표출한 역사였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군’(Crusade)이란 단어를 혐오하기 때문에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가 유럽대륙에 상륙하면 CC (Campus for Christ)로 바뀐다. ‘회칠당한’ 교회사에 속임당한 북미교회나 그 영향아래 있는 교회들이 아직도 십자군의 망령에 묶여있는 것이다. 로마교황청의 지원아래 천주교 ‘십자가’ 깃발 아래서 결단, 로마카톨릭교회의 아들 ‘나치’ 히틀러의 유럽침공과 600만이 넘는 유대인 살육을 감행한 ‘20세기 십자군 나치’ 역사를 통해 기독교를 보는 유대인들의 감정은 치유가 불가하다할 정도로 그 상처의 골이 깊다.
이스라엘에 가면 초등학교의 산수 교과서에는 만국 공통부호인 더하기(+)표가 없다. 십자가 모양이라 하여
‘더하기표(⊥)’ 모양이 우리와 다르다. 숫자 4안에도 십자가 모양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숫자 4는 변형된 모양( )이다. 국제 적십자
기관도 있으나 붉은 십자가 모양을 쓰지 않고, 청색의 ‘다윗의 별’( )로 대신하고 있다. 다윗의 별로 알려진 이 별은 유대인의 백과사전에
의하면 실제로는 다윗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임을 『히브리』대 교수들과의 만남에서 알게 되었고 전 세계 33개국이 넘는 국가에서도 발견되어지는
별이다. 헤르츨이 초안한 이스라엘의 국기는 ‘일곱 별’을 그린 것이 그의 스케치북에서 발견되었으나 이 다윗의 별은 유대교의 비교(秘敎)
카발라(Cabbala) 종교에 심취하였던 독일계 유대인 은행재벌 로스차일드(M. Rothschild, 1743-1812) 가문의 후손들에 의해
채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5년도 더 된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반(反)셈주의’ (Antisemiticism)란 주제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과 ‘야드 바셈’(Yad Vashem)이 주관한 여름모임(Summer Session)에서 필자가 받은 교육은 건국 이스라엘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세계에서 20여명이 선정된 모임이었는데 하루 7-8시간씩 강행된 강의가 거의 1개월간 계속되었다. 마사다(Masada)와
텔아비브의 ‘유대인 박물관’견학 외에는 예루살렘의 온 여름을 강의실에서 보냈다. 성지(聖地)의 이곳 저곳을 여행하게 되리란 계획과 기대는 포기한
상태였다. 여러 명의 『히브리』대 교수들의 강의 중점은 2000여년의 유대인들의 방황과 십자군, 나치의 대학살 등의 모든 불운을 기독교에 돌리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필자의 지적으로 인해 시간마다 들어오는 유대인 교수들의 어색한 눈총을 받게 되었다.
미국 태생의 플로리다주(州)에서 온 젊은 유대인 ‘랍비’가 자기는 필자가 언급한 사실들은 다 이해하고 있다면서 교수들도 잘못 알 수 있지않겠냐고
반문하였다. 착하고 진실하게 보였던 그의 위로로 지루했던 1개월간의 강의를 견뎌낼 수 있었다.

중세 십자군 원정을 통해 예루살렘을 탈취하려던 로마교황청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저들은 그 야욕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천주교의 아들 히틀러의 다음 목표는 ‘예루살렘’이었으며, 그 당시에 이미 예루살렘에 세워질 로마교황청의 청사진이 완료되어 있었음을
『예루살렘 포스트』(The Jerusalem Post, Apr. 3, 1993)가 보도하였다. 1994년 말, 이스라엘은 중동의 평화를 위해
로마교황청에 ‘예루살렘의 양도(讓渡)’를 합의하였다. 예루살렘을 바티칸에 맡겨 세계 평화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계획으로써 예루살렘의 시장으로는
이스라엘측과 팔레스타인측 시장이 선출될 것이지만 두 시장은 로마교황의 지시를 받게 된다. 예루살렘은 제2바티칸이 되어 교황의 지배하에 세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대표하도록 되어있다. 이스라엘이 로마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 무역과 관광 등에서 큰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간의 갈등도 쉽게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도 표시했다. 이스라엘을 삼겹 사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18개의 아랍국가들과
중앙에 놓여있는 이스라엘을 비교한 지도의 국토면적을 보면 이스라엘은 마치 대형 축구장 한 복판에 놓여있는 휴대용 노트북 컴퓨터 한 대와 같은
크기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로마교황 아래 두기로 제시한 이스라엘의 ‘라빈’(Yitzhak Rabin, 1922-95)수상은 1년이 채 못되어
암살 당했다.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서 고토(故土)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최초의 수상이었다.
0079. 『라테란』공회
AD 445년 야심적이며 활동력이 강한 로마의 『레오』주교는 로마교회의 수위권에 몰두, 스스로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언하고 로마교회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교리들을 창안해 내기 시작하였다. 황제의 에큐메니칼 교회가 존속한 325-1054년 까지는 아직도 황제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최고승원장(Pont. Max.)의 칭호를 지니고 있었고, 이 기간동안에는 로마교회의 교황권을 언급한 믿을 만한 문서는 단 하나도 존재한 적이 없다. AD 1054년, 수위권 다툼으로 동방교회와 갈라진 로마교회는 1123년에 가서야 유럽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들만의 모임인 라테란(Lateran) 공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최근의 제2바티칸공회(1962-65)에 이르기까지 13번의 공회는 모두 로마카톨릭교의 영토안에서 개최되었고 동방교회에서는 이를 인정치 않는다.
0079. 『라테란』공회
AD 445년 야심적이며 활동력이 강한 로마의 『레오』주교는 로마교회의 수위권에 몰두, 스스로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언하고 로마교회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교리들을 창안해 내기 시작하였다. 황제의 에큐메니칼 교회가 존속한 325-1054년 까지는 아직도 황제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최고승원장(Pont. Max.)의 칭호를 지니고 있었고, 이 기간동안에는 로마교회의 교황권을 언급한 믿을 만한 문서는 단 하나도 존재한 적이 없다. AD 1054년, 수위권 다툼으로 동방교회와 갈라진 로마교회는 1123년에 가서야 유럽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들만의 모임인 라테란(Lateran) 공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최근의 제2바티칸공회(1962-65)에 이르기까지 13번의 공회는 모두 로마카톨릭교의 영토안에서 개최되었고 동방교회에서는 이를 인정치 않는다.
0080. 십자군 원정의 시작
로마종교 안에 늘 있어온 세력다툼으로 동방교가 생겨나자 이 ‘어미’(The Mother, 계17.5)는 곧이어 십자군원정이란 악(惡)을 세상에 내어보냈다.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등과 함께 1096년 부이용(Bouillon, 현 벨기에 남부의 小都)에서 시작된 첫 십자군원정군은 처음부터 로마교황청의 대외기업(對外企業)으로서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예루살렘 성을 장악, 땅 위의 모든 권위의 구색을 갖추려고 하였던 이 어미 종교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 기록된 기독교의 어머니의 모조품이다. 『라틴』형의 십자가로 요란하였던 『십자군』들은 『유대』인 등을 대량 살육하였고, 200여 년 동안 유럽사(史)를 피로 칠한 7차의 십자군원정은 로마카톨릭교회가 산출해낸 탐욕의 열매로써, 로마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크게 증대 강화시켰다. 옛 로마제국의 혼(魂)은 1273년에 다시 로마카톨릭교회 안에서 신성로마제국이란 제국을 품었다. 제수이트 교육을 받은 볼테르(F. Voltaire, 1694-1778)에 의하면,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적(的)이지도 아니한(사실은 『게르만』적이었다.), 한 제국도 아닌’, 이 비밀의 큰 바벨론은 세상영토 확장에 광분하였다. 오늘 날까지 로마교황은 해외여행 중 비행기에서 내리면 그 나라의 영토에 입맞춘다. ‘이 땅도 로마카톨릭교회의 영토가 되게 하소서’라는 염원과 함께...
로마종교 안에 늘 있어온 세력다툼으로 동방교가 생겨나자 이 ‘어미’(The Mother, 계17.5)는 곧이어 십자군원정이란 악(惡)을 세상에 내어보냈다.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등과 함께 1096년 부이용(Bouillon, 현 벨기에 남부의 小都)에서 시작된 첫 십자군원정군은 처음부터 로마교황청의 대외기업(對外企業)으로서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예루살렘 성을 장악, 땅 위의 모든 권위의 구색을 갖추려고 하였던 이 어미 종교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 기록된 기독교의 어머니의 모조품이다. 『라틴』형의 십자가로 요란하였던 『십자군』들은 『유대』인 등을 대량 살육하였고, 200여 년 동안 유럽사(史)를 피로 칠한 7차의 십자군원정은 로마카톨릭교회가 산출해낸 탐욕의 열매로써, 로마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크게 증대 강화시켰다. 옛 로마제국의 혼(魂)은 1273년에 다시 로마카톨릭교회 안에서 신성로마제국이란 제국을 품었다. 제수이트 교육을 받은 볼테르(F. Voltaire, 1694-1778)에 의하면,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적(的)이지도 아니한(사실은 『게르만』적이었다.), 한 제국도 아닌’, 이 비밀의 큰 바벨론은 세상영토 확장에 광분하였다. 오늘 날까지 로마교황은 해외여행 중 비행기에서 내리면 그 나라의 영토에 입맞춘다. ‘이 땅도 로마카톨릭교회의 영토가 되게 하소서’라는 염원과 함께...
0081. “교회와 국가를 하나로 묶은 『니케아』(Nicaea) 공회”
에큐메니즘 종교사에 나타나고 있는 공회를 기독교회 공회라고 믿는 것은 중대한 오해이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이 아닌 종교에서 찾는 어리석음과 같다. 예루살렘 공회 이후로 모든 공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적하는 교리를 산출한 ‘사단의 회’(계2:9)였다. 교리제정, 이단근절의 미명하에 콘스탄틴 황제의 명(命)에 의해 소집된 니케아(Nicaea, AD 325)공회는 교회와 국가(Church and State)를 하나로 묶는데 이용된 공회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교리를 제정하였다고 하나 성경에 이미 예수님의 신성이 기록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 공회(AD 381)가 “성령의 신성”을 제정하기 전에 이미 성령께서는 신성하셨던 분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해서 성경이 “성(聖, Holy)”령이라고 말씀했단 말인가? 마치 인간들의 공회가 산출한 생명없는 거짓된 고백이 기독신앙을 보호해온 것 같이 착각말라. 황제들은 공회들을 정권유지의 목적으로, 이미 권력의 창부로 타락한 교회를 교리제정의 미명하에 황제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언제든지 소집이 가능하였다. 로마종교의 이단교리들 대부분이 이러한 공회를 통해서 산출되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공회는 늘 주님을 대적한 사단의 공회였다(요한11:47-53 및 행4:14-28 참조, 꼭 읽으시기를...).
에큐메니즘 종교사에 나타나고 있는 공회를 기독교회 공회라고 믿는 것은 중대한 오해이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이 아닌 종교에서 찾는 어리석음과 같다. 예루살렘 공회 이후로 모든 공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적하는 교리를 산출한 ‘사단의 회’(계2:9)였다. 교리제정, 이단근절의 미명하에 콘스탄틴 황제의 명(命)에 의해 소집된 니케아(Nicaea, AD 325)공회는 교회와 국가(Church and State)를 하나로 묶는데 이용된 공회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교리를 제정하였다고 하나 성경에 이미 예수님의 신성이 기록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 공회(AD 381)가 “성령의 신성”을 제정하기 전에 이미 성령께서는 신성하셨던 분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해서 성경이 “성(聖, Holy)”령이라고 말씀했단 말인가? 마치 인간들의 공회가 산출한 생명없는 거짓된 고백이 기독신앙을 보호해온 것 같이 착각말라. 황제들은 공회들을 정권유지의 목적으로, 이미 권력의 창부로 타락한 교회를 교리제정의 미명하에 황제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언제든지 소집이 가능하였다. 로마종교의 이단교리들 대부분이 이러한 공회를 통해서 산출되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공회는 늘 주님을 대적한 사단의 공회였다(요한11:47-53 및 행4:14-28 참조, 꼭 읽으시기를...).
0082.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에베소 공회(AD 431)는
마리아를 두고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란 이름을 뒤집어 씌웠고, 이 교리는 1931년 비오 11세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칼케돈
공회(AD 451)가 마리아 숭배(Mariolatry)을 제정함으로써 이교의 대모(Great Mother) 숭배죄에 빠지게 하였다. 져스티니안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공회(AD 533)를 이용,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원리를 이용, 지상통치를 꿈꾸었고, 로마의 주교는 세계교회 위에
군림할 음모를 꾸몄다. 기독교 고전(古典)의 하나로 둔갑한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은 실제로는 ‘요한 계시록’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는 책이다.
또 다른 니케아 공회(AD 787)는 죽은 성자, 순교자에 대한 기도의 효험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공회였다.
사제들의 결혼을 금한 라테란 공회(1123년), 수백 년 동안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는 베로나 공회(Verona,
1184)가 만들지 않았던가! 화체설 교리를 만들고, 사제들에게 고해성사를 하도록 한 라테란 공회(1215년), 그레고리 9세에 의해 성경을
금서(禁書)로 확정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차단한 발렌시아 공회(1229년), “주의 만찬”에서 성도들에게 잔을 금한 콘스탄스
공회(1414년), “7성례전”을 제정한 플로렌스 공회(1439년), 트렌트
(1545-63년) 공회들... 무슨 말을
더하랴?

환란 중에 하는 말 예수 구원하신다
다시 살아나시어 예수 구원하신다
지은 죄를 인하여 슬픈 맘이 있어도
숨질 때에 내 할 말 예수 구원하신다
(찬송가 252 / 기쁜 소리 들리니 ③)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