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04.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2) 마가복음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천국복음(하나님)을 전파하여”(막1:14)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 복음안에 거하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천국복음(하나님)을 전파하여”(막1:14)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 복음안에 거하라)”
어느 복음서이든지 복음서를 크게 나누면 ‘죄사함과 회개를 통한 구원’으로 정리된다. 첫째로, 마가복음 1장에 세
번이나 언급된 ‘복음’은 무엇인가? 둘째로, 복음의 중심에 이르는 길로서 ‘죄사함과 회개’, 즉 ‘희생과 변화’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희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셋째로, ‘죄사함과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 안에서 ‘3박자
구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신적기원을 선포하고 있다. 인간적 기원에 의한 종교가 아니다. “시작”(알케)이라는 단어는 인간적인 시간의 의미라기보다 영원하신 분의 ‘기원, 근원, 근본, 원천’의 존재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다.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엔 알케)와 같은 의미로 모든 존재가 생겨나게 된 근원, 즉 로고스(Logos, 말씀)가 모든 존재의 근원 됨을 선언하는 구절이다. “주의 길”(막1:3)은 “하나님의 대로”(사40:3)로써 이 분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신적기원을 선포하고 있다. 인간적 기원에 의한 종교가 아니다. “시작”(알케)이라는 단어는 인간적인 시간의 의미라기보다 영원하신 분의 ‘기원, 근원, 근본, 원천’의 존재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다.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엔 알케)와 같은 의미로 모든 존재가 생겨나게 된 근원, 즉 로고스(Logos, 말씀)가 모든 존재의 근원 됨을 선언하는 구절이다. “주의 길”(막1:3)은 “하나님의 대로”(사40:3)로써 이 분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0105. 복음과 종교
복음은 “복음, 좋은 소식”등으로 신구약에 120번 언급된 단어다.
1. Gospel 101회
2. Gospels 3회
3. Glad Tiding 4회
4. Good News 1회
5. Good Tiding 11회
총 120회
“종교”, “종교적”이라는 단어는 구약과 복음서에는 단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단어로서 신약의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만 모두 7번 나온다.
1. 종교 (religion)
5회 (행26:5 / 갈1:13,14 / 약1:26,27)
2. 종교적 (religious)
2회 (행13:43 / 약1:26)
영어 religion은 라틴어 ‘religio’에서 유래된 로마제국의 용어로서 로마제국의 의례의식을 지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keep the Roman ceremonies’).
복음은 “복음, 좋은 소식”등으로 신구약에 120번 언급된 단어다.
1. Gospel 101회
2. Gospels 3회
3. Glad Tiding 4회
4. Good News 1회
5. Good Tiding 11회
총 120회
“종교”, “종교적”이라는 단어는 구약과 복음서에는 단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단어로서 신약의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만 모두 7번 나온다.
1. 종교 (religion)
5회 (행26:5 / 갈1:13,14 / 약1:26,27)
2. 종교적 (religious)
2회 (행13:43 / 약1:26)
영어 religion은 라틴어 ‘religio’에서 유래된 로마제국의 용어로서 로마제국의 의례의식을 지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keep the Roman ceremonies’).
0106. 천국복음(the gospel of kingdom of God, kjv)을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 선포’가 바로 복음(좋은 소식)이다. 하나님의 통치(reign)는 영역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지배이다. 역동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뜻이다. 천국복음 골자는 인간들이 궁리해낸 철학사상, 노력이나 탐구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며, 이 메시지는 인간들에게 스스로 진리를 찾아보라는 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진리, 즉 하나님의 계시에 귀를 기울이라는 선포이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내가 무엇을 해야하며, 또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에 관한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선한 사람들이 준비하여 노력해서 완수해야 하는 어떠한 것으로 오해하였다.
인간의 이성을 통한 모든 추론이나 의지를 동원한 노력은 무익하니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 즉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함을 선언하고 있다. “…사람의 뜻으로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갈1:11,12).
‘하나님 나라 선포’가 바로 복음(좋은 소식)이다. 하나님의 통치(reign)는 영역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지배이다. 역동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뜻이다. 천국복음 골자는 인간들이 궁리해낸 철학사상, 노력이나 탐구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며, 이 메시지는 인간들에게 스스로 진리를 찾아보라는 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진리, 즉 하나님의 계시에 귀를 기울이라는 선포이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내가 무엇을 해야하며, 또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에 관한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선한 사람들이 준비하여 노력해서 완수해야 하는 어떠한 것으로 오해하였다.
인간의 이성을 통한 모든 추론이나 의지를 동원한 노력은 무익하니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 즉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함을 선언하고 있다. “…사람의 뜻으로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갈1:11,12).
0107. 복음이 타락하면 종교/도덕이 된다 복음의 쇠퇴, 즉 복음이
천국복음을 선포하는 구실을 제대로 못하면 종교나 도덕으로 타락해버린다(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타락하여 도덕이나 종교가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종교나 도덕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향하게 만들며, 결국은 인간의 행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격을 행동보다 못한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심각한 인격적 멸시로 인간을 모욕한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본질적 관계강조가 축소되어
사라지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기독교 문화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까지 심각하게 모욕하는 것이다. 이 불경건은 가장 크고 핵심적인 죄악이며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새로운 시작으로 초청, 인간을 저주받은 운명에서 새 생명으로 회복시키며, 궁극적인 실패와 파멸로 선포된 죄와 죄로 인한
유혹을 이길 힘을 약속하며 능력으로 보장한다.
0108. 죄와 신복음주의
세상문화에다 심리학, 종교학까지 동원하여 잘 절충된 “다른 복음”은 ‘드러냄, 치유와 회복’이란 심리치료라는 세속 언어의 옷을 입고 진리되신 그리스도보다 인간 소비자(교인)에 더 환호하고 있다. 그리고는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죄를 피해간다. 신복음주의에서 뉴에이지로 발전한 단계에서는 죄의 실체를 부인하고 비웃으며 경멸, 조롱의 대상으로 멸시한다. 죄는 감정을 격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증오를 일으키는 주제가 됨으로 피하고 점잖은(?)사람이 발설해서는 안되는 주제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인간 이성이 이뤄낸 성취자랑이나, 이성이나 학문적 업적을 부추김으로 죄의 강력하고도 무서운 힘인 분명한 영적 실체를 못 보게 만든다.
위대한 그리스도 복음의 지적유산을 다 팔아치우고는 문화적으로 종교심리학적으로 물든 실용공리주의적인 자기계발이라는 잡동사니를 끌어들여 치장하고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대신 감히 ‘문화의 옷’을 걸치고도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몰염치하고도 뻔뻔함을 나타내기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예수믿으면 만사형통인가? ‘예수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라는 메시지는 ‘미제’(Made in U.S.A)번영신학의 상품으로 예수님의 성전 청소 때 척결된 주제로 실상은 십자가의 길에 어긋나는 가르침이다(이는 예수님이 모든 문제해결을 하실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좁은 길’에 들어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주제가 아니다. 넓은 길을 선택한 ‘행복’타령에 젖어있는 세상이 추구해온 “다른…예수…다른 영…다른 복음”(고후11.4)으로 결국은 영혼을 죽인다.
세상문화에다 심리학, 종교학까지 동원하여 잘 절충된 “다른 복음”은 ‘드러냄, 치유와 회복’이란 심리치료라는 세속 언어의 옷을 입고 진리되신 그리스도보다 인간 소비자(교인)에 더 환호하고 있다. 그리고는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죄를 피해간다. 신복음주의에서 뉴에이지로 발전한 단계에서는 죄의 실체를 부인하고 비웃으며 경멸, 조롱의 대상으로 멸시한다. 죄는 감정을 격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증오를 일으키는 주제가 됨으로 피하고 점잖은(?)사람이 발설해서는 안되는 주제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인간 이성이 이뤄낸 성취자랑이나, 이성이나 학문적 업적을 부추김으로 죄의 강력하고도 무서운 힘인 분명한 영적 실체를 못 보게 만든다.
위대한 그리스도 복음의 지적유산을 다 팔아치우고는 문화적으로 종교심리학적으로 물든 실용공리주의적인 자기계발이라는 잡동사니를 끌어들여 치장하고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대신 감히 ‘문화의 옷’을 걸치고도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몰염치하고도 뻔뻔함을 나타내기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예수믿으면 만사형통인가? ‘예수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라는 메시지는 ‘미제’(Made in U.S.A)번영신학의 상품으로 예수님의 성전 청소 때 척결된 주제로 실상은 십자가의 길에 어긋나는 가르침이다(이는 예수님이 모든 문제해결을 하실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좁은 길’에 들어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주제가 아니다. 넓은 길을 선택한 ‘행복’타령에 젖어있는 세상이 추구해온 “다른…예수…다른 영…다른 복음”(고후11.4)으로 결국은 영혼을 죽인다.

0109. 행복(happiness)타령?
‘행복’이라는 명사(noun)는 전 성경을 통해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단어이다. 형용사 ‘happy’가 28번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종교는 장미빛 행복을 약속한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세요’(교황『요한 바로오』2세). ‘행복한 꿈을 이루세요’(K 추기경). ‘행복하여라!’(C 추기경). 이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행복이 이르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은 더욱더 야비해지고 이기적으로 되어져가는 자신을 발견, 환멸과 재앙을 자초하게 된다.
살전4-5장에 기록된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4가지 중 첫 번째가 “거룩함”(holiness, 살전4:3)이다. 이 단어는 전 성경에 43번 언급되어 있으며, 형용사 “거룩한”(holy)은 무려 50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면 안되는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참된 기쁨과 평강은 십자가의 길에서만 발견되어지는 행복이다. 세상(사람)의 잣대로 측정되어 질 수 있는 그러한 저질의 행복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이 땅에서만의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불행한 인생’을 살다가 갔는가? 그들이 누린 행복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누리다 가신 분들이다. 끝없는 고난과 어려움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신을 불사르다 가신 사도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행복하셨는지 불행하셨는지 물어보시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기쁘게, with joy>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행20:24 KJV).
신구약을 통틀어 기술된 믿음의 선진들,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나오시는 분들, 그리고 기독교회사의 그 많은 성도들…
‘행복’이라는 명사(noun)는 전 성경을 통해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단어이다. 형용사 ‘happy’가 28번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종교는 장미빛 행복을 약속한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세요’(교황『요한 바로오』2세). ‘행복한 꿈을 이루세요’(K 추기경). ‘행복하여라!’(C 추기경). 이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행복이 이르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은 더욱더 야비해지고 이기적으로 되어져가는 자신을 발견, 환멸과 재앙을 자초하게 된다.
살전4-5장에 기록된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4가지 중 첫 번째가 “거룩함”(holiness, 살전4:3)이다. 이 단어는 전 성경에 43번 언급되어 있으며, 형용사 “거룩한”(holy)은 무려 50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면 안되는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참된 기쁨과 평강은 십자가의 길에서만 발견되어지는 행복이다. 세상(사람)의 잣대로 측정되어 질 수 있는 그러한 저질의 행복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이 땅에서만의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불행한 인생’을 살다가 갔는가? 그들이 누린 행복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누리다 가신 분들이다. 끝없는 고난과 어려움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신을 불사르다 가신 사도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행복하셨는지 불행하셨는지 물어보시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기쁘게, with joy>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행20:24 KJV).
신구약을 통틀어 기술된 믿음의 선진들,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나오시는 분들, 그리고 기독교회사의 그 많은 성도들…
0110. 복음의 2대 주제: 죄사함과 회개
복음, 특히 공관복음 전체가 두 부분, 즉 죄사함과 회개로 구성되어 있다.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마9:13 KJV / 막2:17 KJV / 눅5:32).
이 구절은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에만 나오는 구절이다. ‘회개’라는 단어는 마틴 루터(M. Luther,1483-1546)로 하여금 ‘참회와 고해성사’에서 헤어나오도록 역사한 단어다. 사단에게 볼모잡힌 로마교황 추종자『웨스트코트/호르트』(W/H)는 마태/마가 복음에서 “회개 시키려”(to repentance)를 삭제하였다. 복음의 종교적 이해는 신복음주의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회개를 인간에게 ‘드러내는’ 고해성사로 방향을 돌렸다. 학문으로 가장한 ‘종교학과 심리학’의 타락에 물든 ‘드러냄, 치유와 회복’을 통해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그리스도의 교회안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좋은 소식의 골자는 인간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의(義)가 그리스도의 중보와 행위로 이루어진다. 모든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한 소식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신’ 하나님의 크신 구원행위에 관한 소식이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이다.
복음, 특히 공관복음 전체가 두 부분, 즉 죄사함과 회개로 구성되어 있다.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마9:13 KJV / 막2:17 KJV / 눅5:32).
이 구절은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에만 나오는 구절이다. ‘회개’라는 단어는 마틴 루터(M. Luther,1483-1546)로 하여금 ‘참회와 고해성사’에서 헤어나오도록 역사한 단어다. 사단에게 볼모잡힌 로마교황 추종자『웨스트코트/호르트』(W/H)는 마태/마가 복음에서 “회개 시키려”(to repentance)를 삭제하였다. 복음의 종교적 이해는 신복음주의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회개를 인간에게 ‘드러내는’ 고해성사로 방향을 돌렸다. 학문으로 가장한 ‘종교학과 심리학’의 타락에 물든 ‘드러냄, 치유와 회복’을 통해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그리스도의 교회안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좋은 소식의 골자는 인간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의(義)가 그리스도의 중보와 행위로 이루어진다. 모든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한 소식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신’ 하나님의 크신 구원행위에 관한 소식이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이다.
0111. “회개하라”는 명령을 애써 피해가는 신복음주의
신복음주의의 골자는 죄와 자아로부터 회개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돌아서라는 명령이 무시당하며 교회안에서도 회개의 필요성이 현저하게 결여되어있다. 교회성장을 위해 십자가의 도(道)를 마귀에게 저당잡힌 경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의 세례 요한에게서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나, 또는 모든 제자들의 선포의 특징은 “회개하라”에 있다(마3:1 / 4:17 / 막6:12).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도 아시아의 7 교회를 향한 회개촉구로 시작된다. 즉 신복음주의에 물든 교회는 하나님의 선물인 회개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사역, 특별히 목회(牧會)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목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 원리를 벗어나면 목회자의 가장 큰 우상이 ‘목회’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선교지의 모든 사역도 같은 원리이다). 목회를 통한 자아성취나 자아실현달성을 위한 화려한 꿈은 실상 고난의 복음안에서 무산되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과 타협, 적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변질되어 철저하게 완전히 달라져버린 ‘다른 복음’을 접하게되고 그것을 붙들고 천국을 가겠다는 비극이 오늘날의 신복음주의 교회의 자화상이다.
회개도 없고 죄사함도 없고 거듭남이 없으니, 구원의 확신이 있을 리도 없다. 기독교의 핵심인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relation)도 없으니 종교(religion)도 타락하는 것이다.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19).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다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닌가? 약에다 물을 타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신(新, Neo-)복음주의는 더 이상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복음이 아니고 ‘새롭게’ 무엇인가를 첨가하고 빼고하여 변질시켰다는 뜻이 아닌가? 바라옵기는 그리스도의 교회에만 주어진 ‘하나님의 3중적인 축복’(행6:7 / 12:24 / 19:20) -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황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 을 누리는 사역이 되도록 아버지께서 세우신 종들에게 복을 내려주소서!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찬 511 / 내 구주 예수를 ②)
신복음주의의 골자는 죄와 자아로부터 회개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돌아서라는 명령이 무시당하며 교회안에서도 회개의 필요성이 현저하게 결여되어있다. 교회성장을 위해 십자가의 도(道)를 마귀에게 저당잡힌 경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의 세례 요한에게서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나, 또는 모든 제자들의 선포의 특징은 “회개하라”에 있다(마3:1 / 4:17 / 막6:12).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도 아시아의 7 교회를 향한 회개촉구로 시작된다. 즉 신복음주의에 물든 교회는 하나님의 선물인 회개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사역, 특별히 목회(牧會)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목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 원리를 벗어나면 목회자의 가장 큰 우상이 ‘목회’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선교지의 모든 사역도 같은 원리이다). 목회를 통한 자아성취나 자아실현달성을 위한 화려한 꿈은 실상 고난의 복음안에서 무산되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과 타협, 적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변질되어 철저하게 완전히 달라져버린 ‘다른 복음’을 접하게되고 그것을 붙들고 천국을 가겠다는 비극이 오늘날의 신복음주의 교회의 자화상이다.
회개도 없고 죄사함도 없고 거듭남이 없으니, 구원의 확신이 있을 리도 없다. 기독교의 핵심인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relation)도 없으니 종교(religion)도 타락하는 것이다.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19).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다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닌가? 약에다 물을 타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신(新, Neo-)복음주의는 더 이상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복음이 아니고 ‘새롭게’ 무엇인가를 첨가하고 빼고하여 변질시켰다는 뜻이 아닌가? 바라옵기는 그리스도의 교회에만 주어진 ‘하나님의 3중적인 축복’(행6:7 / 12:24 / 19:20) -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황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 을 누리는 사역이 되도록 아버지께서 세우신 종들에게 복을 내려주소서!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찬 511 / 내 구주 예수를 ②)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바로잡습니다 - <21>회 사진 설명 3번 중 『틴데일』(W.
Tyndale, ? ~ 1936)을 (? ~ 1536)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