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0일 목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22 >











0104.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2) 마가복음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천국복음(하나님)을 전파하여”(막1:14)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 복음안에 거하라)”

어느 복음서이든지 복음서를 크게 나누면 ‘죄사함과 회개를 통한 구원’으로 정리된다. 첫째로, 마가복음 1장에 세 번이나 언급된 ‘복음’은 무엇인가? 둘째로, 복음의 중심에 이르는 길로서 ‘죄사함과 회개’, 즉 ‘희생과 변화’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희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셋째로, ‘죄사함과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 안에서 ‘3박자 구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신적기원을 선포하고 있다. 인간적 기원에 의한 종교가 아니다. “시작”(알케)이라는 단어는 인간적인 시간의 의미라기보다 영원하신 분의 ‘기원, 근원, 근본, 원천’의 존재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다.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엔 알케)와 같은 의미로 모든 존재가 생겨나게 된 근원, 즉 로고스(Logos, 말씀)가 모든 존재의 근원 됨을 선언하는 구절이다. “주의 길”(막1:3)은 “하나님의 대로”(사40:3)로써 이 분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0105. 복음과 종교
복음은 “복음, 좋은 소식”등으로 신구약에 120번 언급된 단어다.
1. Gospel 101회
2. Gospels 3회
3. Glad Tiding 4회
4. Good News 1회
5. Good Tiding 11회
총 120회
“종교”, “종교적”이라는 단어는 구약과 복음서에는 단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단어로서 신약의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만 모두 7번 나온다.
1. 종교 (religion)
5회 (행26:5 / 갈1:13,14 / 약1:26,27)
2. 종교적 (religious)
2회 (행13:43 / 약1:26)
영어 religion은 라틴어 ‘religio’에서 유래된 로마제국의 용어로서 로마제국의 의례의식을 지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keep the Roman ceremonies’).

0106. 천국복음(the gospel of kingdom of God, kjv)을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 선포’가 바로 복음(좋은 소식)이다. 하나님의 통치(reign)는 영역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지배이다. 역동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뜻이다. 천국복음 골자는 인간들이 궁리해낸 철학사상, 노력이나 탐구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며, 이 메시지는 인간들에게 스스로 진리를 찾아보라는 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진리, 즉 하나님의 계시에 귀를 기울이라는 선포이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내가 무엇을 해야하며, 또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에 관한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선한 사람들이 준비하여 노력해서 완수해야 하는 어떠한 것으로 오해하였다.
인간의 이성을 통한 모든 추론이나 의지를 동원한 노력은 무익하니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 즉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함을 선언하고 있다. “…사람의 뜻으로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갈1:11,12).

0107. 복음이 타락하면 종교/도덕이 된다 복음의 쇠퇴, 즉 복음이 천국복음을 선포하는 구실을 제대로 못하면 종교나 도덕으로 타락해버린다(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타락하여 도덕이나 종교가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종교나 도덕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향하게 만들며, 결국은 인간의 행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격을 행동보다 못한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심각한 인격적 멸시로 인간을 모욕한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본질적 관계강조가 축소되어 사라지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기독교 문화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까지 심각하게 모욕하는 것이다. 이 불경건은 가장 크고 핵심적인 죄악이며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새로운 시작으로 초청, 인간을 저주받은 운명에서 새 생명으로 회복시키며, 궁극적인 실패와 파멸로 선포된 죄와 죄로 인한 유혹을 이길 힘을 약속하며 능력으로 보장한다.

0108. 죄와 신복음주의
세상문화에다 심리학, 종교학까지 동원하여 잘 절충된 “다른 복음”은 ‘드러냄, 치유와 회복’이란 심리치료라는 세속 언어의 옷을 입고 진리되신 그리스도보다 인간 소비자(교인)에 더 환호하고 있다. 그리고는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죄를 피해간다. 신복음주의에서 뉴에이지로 발전한 단계에서는 죄의 실체를 부인하고 비웃으며 경멸, 조롱의 대상으로 멸시한다. 죄는 감정을 격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증오를 일으키는 주제가 됨으로 피하고 점잖은(?)사람이 발설해서는 안되는 주제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인간 이성이 이뤄낸 성취자랑이나, 이성이나 학문적 업적을 부추김으로 죄의 강력하고도 무서운 힘인 분명한 영적 실체를 못 보게 만든다.
위대한 그리스도 복음의 지적유산을 다 팔아치우고는 문화적으로 종교심리학적으로 물든 실용공리주의적인 자기계발이라는 잡동사니를 끌어들여 치장하고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대신 감히 ‘문화의 옷’을 걸치고도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몰염치하고도 뻔뻔함을 나타내기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예수믿으면 만사형통인가? ‘예수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라는 메시지는 ‘미제’(Made in U.S.A)번영신학의 상품으로 예수님의 성전 청소 때 척결된 주제로 실상은 십자가의 길에 어긋나는 가르침이다(이는 예수님이 모든 문제해결을 하실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좁은 길’에 들어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주제가 아니다. 넓은 길을 선택한 ‘행복’타령에 젖어있는 세상이 추구해온 “다른…예수…다른 영…다른 복음”(고후11.4)으로 결국은 영혼을 죽인다.



0109. 행복(happiness)타령?
‘행복’이라는 명사(noun)는 전 성경을 통해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단어이다. 형용사 ‘happy’가 28번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종교는 장미빛 행복을 약속한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세요’(교황『요한 바로오』2세). ‘행복한 꿈을 이루세요’(K 추기경). ‘행복하여라!’(C 추기경). 이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행복이 이르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은 더욱더 야비해지고 이기적으로 되어져가는 자신을 발견, 환멸과 재앙을 자초하게 된다.
살전4-5장에 기록된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4가지 중 첫 번째가 “거룩함”(holiness, 살전4:3)이다. 이 단어는 전 성경에 43번 언급되어 있으며, 형용사 “거룩한”(holy)은 무려 50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면 안되는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참된 기쁨과 평강은 십자가의 길에서만 발견되어지는 행복이다. 세상(사람)의 잣대로 측정되어 질 수 있는 그러한 저질의 행복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이 땅에서만의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불행한 인생’을 살다가 갔는가? 그들이 누린 행복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누리다 가신 분들이다. 끝없는 고난과 어려움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신을 불사르다 가신 사도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행복하셨는지 불행하셨는지 물어보시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기쁘게, with joy>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행20:24 KJV).
신구약을 통틀어 기술된 믿음의 선진들,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나오시는 분들, 그리고 기독교회사의 그 많은 성도들…

0110. 복음의 2대 주제: 죄사함과 회개
복음, 특히 공관복음 전체가 두 부분, 즉 죄사함과 회개로 구성되어 있다.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마9:13 KJV / 막2:17 KJV / 눅5:32).
이 구절은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에만 나오는 구절이다. ‘회개’라는 단어는 마틴 루터(M. Luther,1483-1546)로 하여금 ‘참회와 고해성사’에서 헤어나오도록 역사한 단어다. 사단에게 볼모잡힌 로마교황 추종자『웨스트코트/호르트』(W/H)는 마태/마가 복음에서 “회개 시키려”(to repentance)를 삭제하였다. 복음의 종교적 이해는 신복음주의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회개를 인간에게 ‘드러내는’ 고해성사로 방향을 돌렸다. 학문으로 가장한 ‘종교학과 심리학’의 타락에 물든 ‘드러냄, 치유와 회복’을 통해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그리스도의 교회안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좋은 소식의 골자는 인간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의(義)가 그리스도의 중보와 행위로 이루어진다. 모든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한 소식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신’ 하나님의 크신 구원행위에 관한 소식이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이다.

0111. “회개하라”는 명령을 애써 피해가는 신복음주의
신복음주의의 골자는 죄와 자아로부터 회개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돌아서라는 명령이 무시당하며 교회안에서도 회개의 필요성이 현저하게 결여되어있다. 교회성장을 위해 십자가의 도(道)를 마귀에게 저당잡힌 경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의 세례 요한에게서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나, 또는 모든 제자들의 선포의 특징은 “회개하라”에 있다(마3:1 / 4:17 / 막6:12).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도 아시아의 7 교회를 향한 회개촉구로 시작된다. 즉 신복음주의에 물든 교회는 하나님의 선물인 회개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사역, 특별히 목회(牧會)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목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 원리를 벗어나면 목회자의 가장 큰 우상이 ‘목회’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선교지의 모든 사역도 같은 원리이다). 목회를 통한 자아성취나 자아실현달성을 위한 화려한 꿈은 실상 고난의 복음안에서 무산되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과 타협, 적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변질되어 철저하게 완전히 달라져버린 ‘다른 복음’을 접하게되고 그것을 붙들고 천국을 가겠다는 비극이 오늘날의 신복음주의 교회의 자화상이다.
회개도 없고 죄사함도 없고 거듭남이 없으니, 구원의 확신이 있을 리도 없다. 기독교의 핵심인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relation)도 없으니 종교(religion)도 타락하는 것이다.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19).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다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닌가? 약에다 물을 타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신(新, Neo-)복음주의는 더 이상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복음이 아니고 ‘새롭게’ 무엇인가를 첨가하고 빼고하여 변질시켰다는 뜻이 아닌가? 바라옵기는 그리스도의 교회에만 주어진 ‘하나님의 3중적인 축복’(행6:7 / 12:24 / 19:20) -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황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 을 누리는 사역이 되도록 아버지께서 세우신 종들에게 복을 내려주소서!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찬 511 / 내 구주 예수를 ②)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바로잡습니다 - <21>회 사진 설명 3번 중 『틴데일』(W. Tyndale, ? ~ 1936)을 (? ~ 1536)으로 바로잡습니다.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4)


2013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가 늘 우리를 향해 오듯이 통일도, 주님의 오심도 그렇게 ‘주님의 때’에 올 것입니다. 밴쿠버에 사시는 모든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2013년이 통일코리아를 위해 정말 멋지게 살아내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1. 이해하려는 마음의 준비가 상대의 마음 문을 열수 있습니다.지난 12월 대한민국에서 있은 대선은, 제가 목격한 대선 중 가장 치열하고도 파장이 큰 대선이었습니다. 대선결과에 대한 많은 분들의 엇갈린 반응들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모든 세상사가 주님의 섭리와 경륜가운데 진행되는 것을 믿고 있는 제게 있어서 앞으로의 5년은 얼마나 중요할지 더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가 통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분량만 잘 감당한다면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통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들의 행진을 격려해주시고 전진하게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통일을 위해 일하시지만 문제는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몸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의 마음부터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 북한의 체제와 역사에 대한 이해이해(understanding)라는 언어의 의미가 ‘아래에 선다’는 뜻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겸손의 왕으로, 인간을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배워 우리도 상대(그것이 북한이든 어떤 나라이든)의 입장과 아래에서 이해하려는 마음의 준비가 하나됨의 지름길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으니 우리도 당연히 따라가야겠죠. 쉽게 사람(또는 무엇이든)을 평가하고 규정짓고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지난 호에서 나눴던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기에 그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마음 문을 열고 낮은 자리로 갑시다. 열린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질 때 통일코리아의 미래는 밝아질 것입니다.

통일이 되면 함께 살아야 할 북녘의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태어나 살아온 북한의 체제와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영향을 받고 살았고 그 체제와 시스템 안에서 가치관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체제와 시스템을 이해하고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역사를 재해석하여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보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이해함이 선행된다면 하나가 되는 것은 상당히 쉬워질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나라와 나라가 하나로 연결되는 것은 더 쉬워질 것입니다. 때문에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해왔던 부정적인 시각들을 이제 버려야 합니다 (이 말은 좋게 보라는 뜻도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높은 차원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야 할 북한주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북한의 과거와 현재 시스템’의 변천과정의 흐름을 나누는 것이 중요한데요, 다음 주부터는 경제영역을 중심으로 나누기 원합니다. 이제 기존에 갖고 있던 북한체제와 시스템에 대한 편견을 미련없이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북한을 바라보기로 결정함으로 향후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를 같이 그려봅시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세상적인 가치기준과 인본주의적인 관점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차단합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6 장 사랑스러운 톰보이들



“한쪽이 해결되니 다른 한쪽이...” - 중국에서 온 소식



E-메일 치유가 얼굴을 대면하는 상담보다 치유의 속도가 느린 것 같지만 많은 경우 속도가 느린 치유가 더 깊은 치유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얼굴을 보지 않고 이루어지는 대화이기에 보다 솔직하고 진지한 마음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자매 선교사의 이야기이다. 아주 담대한 톰보이다. 학교 다닐 때 데모도 많이 했다. 그런데 이 자매가 세미나에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세미나를 하고 떠나온 지 얼마 후에 자매가 메일을 보내왔다.

추운 날씨에 건강하신지요?
이 곳은 지난주부터 계속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 (중략) ...
그동안 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해서 많이 힘들었는데 이제 제가 해야 할 일들을 다시 깨닫게 되었어요. 지난 주간에 큰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꿈을 꾸었는데 제가 꿈에 사람을 죽였지 뭐예요! 꿈에서 깨어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예배 드리는 중에 “네 옛사람은 죽었다.” 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중략)... 목사님의 세미나 이후에 관계가 어려웠던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가 많이 회복되었고 그들을 향한 사랑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답니다. 남편과의 어려움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 같구요. 그렇게 미웠던 사람이 한결 사랑스러워진 것 같아요. 치유 세미나 이후에 계속되는 좋은 변화인 것 같습니다. ...(하략)... 자매의 메일이 아주 많이 길어졌다. 마음을 풀어내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이다. 격려의 메일을 보내면서 사역이나 프로젝트와 무관한 즐거운 시간을 갖는 연습을 하기를 부탁하며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은주 자매는 내게 메일을 자주 쓰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그것이 지속적인 치유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래요. 또한 대화보다 행동이 먼저인 것을 강조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기를 부탁해요. 우리가 이렇게 메일을 하는 것이 바로 대화하는 것이예요. 특히 어떤 중요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누구하고라도 이렇게 메일로라도 대화를 나누기를 권해요. . .... (하략) ...

놀랍게도 바로 답신이 날아왔다. 자신의 삶의 변한 모습을 잔잔히 적어주었다. “기적”같은 변화다.

죄송해요. 늘 이일 저일에 쫓기다 보니 진득하니 앉아서 메일 쓰는 것이 많은 노력을 요구하네요. 지난 주 수요일은 휴일이라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자매들끼리 뭉쳐서 아이들을 모두 남편들에게 맡겨놓고 시장에 쇼핑을 갔습니다. 남편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다녀오라”고 했지만 우리들은 너무 신이 났습니다. 자매들 네 사람이 함께 모여 시장에 가보기는 처음이라서요. 자신들의 개인 물건을 사려고 나갔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교회에 필요한 것들 뿐... 아이들 장난감등 정작 제가 원하던 것은 하나도 사지 못하고 남편이 준 돈을 다 써버렸어요. 오히려 부족해서 다른 자매에게 꾸어서까지 샀답니다. 조금은 아쉬운 쇼핑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을 돌아다닌 지 한 시간 만에 남편의 전화로 신나는 기분은 깨졌고 다시 시간에 쫓기며 쇼핑을 마감하고 다른 자매들은 남겨둔 채 저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남편은 왜 이런지... 아내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답니다... 비록 짧았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편안하게 자매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제가 빠진 이후에도 자매들은 다섯 시간 동안이나 함께 쇼핑을 하며 정말 기분을 팍 풀었다고 하는군요....
저녁에 팀 미팅 대신 자매들을 위해서 남편들이 한턱내는 식사를 하면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데 마음들이 다 풀리고 아주 많이 가까워 졌더라구요. 참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좋은 것을 가르쳐주신 목사님께 너무 감사해요. 그동안 선교사라는 이름 때문에 “우리는 일만 해야 한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참 쉬운 방법으로 관계들이 열리는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일들을 못하는 것도 없는데 말이예요. 기분이 좋아서 모든 일이 더 잘 되더라구요~~ ... (중략) ...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선교사 선교칼럼



45. 선교사님 살아 돌아오세요!



성탄과 새 해 맞이도 지나 갔다. 대학공부를 하러 떠났던 큰 딸과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이면 늘 오랜 시간을 보냈던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추억들을 더듬어 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사무실 지붕을 두드리는 세찬 겨울비가 내 기억을 아련한 선교지에서의의 추억으로 이끌어 간다. 선교지에서도 을씨년스런 겨울비의 낙수물소리는 고향생각에 젖게 하고 특히 명절이면 진한 향수병을 도지게 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자주 동료선교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약을 먹으러 오라고 초청을 했다. 다들 이심전심이라 그 보약이 무슨 약인지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양사, 농심에서 조제한 라면이었다. 그렇게 모인 우리가 라면에다 수다라는 고명까지 얹어 먹으면 향수병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다시 힘을 얻어 사명의 자리로 되돌아가곤 했다. 라면은 늘 우리에게 그렇게 명약 중에 명약이었다.


구 소련이 해체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엔 성탄절 분위기란 것이 없었다. 거리에는 캐럴송이나 성탄카드라는 것도 찾아 보기 어려웠다. 밋밋한 선교지에서 성탄과 연말을 맞은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은 본국에서 보내오는 성탄선물이었다. 마치 어릴 적 처음 먹어본 추억의 씨레이션과 같았다라고 할까.
해년마다 조국의 파송교회와 후원교회에서 보내주던 성탄과 새해 맞이 선물을 설렘으로 기다리곤 했다. 우체국에 소화물 도착을 알리는 표가 배달되면 아이들과 함께 중앙우체국으로 가서 소포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우체국 보관실에서 소포가 나오기 까지 키가 작은 아이들은 까치발로 데스크를 향해 목을 뺀 채로 쳐다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소포박스를 열기 전에 아이들의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듯 나는 늘 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다.
그 내용물은 아이들 벙어리 장갑에다 마이구미 젤리, 오리온 쵸코파이, 학용품과 젖갈류 그리고 남은 공간엔 휴지 대신 라면으로 채워져 있었다. 특히 부산에 있던 파송교회와 기장에 있던 협력교회에서 보내오는 선물박스엔 늘 감동이 있었다. 거기엔 중앙아시아에 없는 건어물과 해산물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아내가 가장 행복해 하던 때는 기장미역과 다시마를 꺼낼 때였다. 그리고 한 동안 우리 집은 산모가 있는 집처럼 끼니 때마다 미역국이 상에 올라왔다. 아삭거리는 다시마 튀김은 아이들의 더 좋을 수 없는 간식거리였다. 한 해에는 건조가 덜 된 멸치를 보내왔는데 한 달이 넘는 수송기간에 부패되어 곰팡이가 가득한 봉지를 꺼내 들면서 아까워 탄식이 섞인 소리를 내던 아내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99년 신학교 친구가 목회하는 협력교회에서 예기치 않던 성탄선물을 처음으로 보내왔다. 우체국 직원이 부피가 큼직한 선물박스를 탁자 위에 올려 놓자 아이들은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소포를 뜯을 때에 나도 기대로 설레고 있었다. 뚜껑을 열자 위쪽에 성탄카드가 가득했다. 투명비닐 봉지에 나뉘어 쌓인 카드 뭉치 위에는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청년부라고 쓰여진 카드가 얹혀 있었다. 교회의 모든 부서가 선교사 가정을 감동시키기 위해 성탄카드 보내기 운동을 전개한 것이 분명했다. 한 쪽엔 그리운 친구목사의 성탄카드와 가족사진, 그리고 장로님들의 성탄카드도 들어 있었다. 족히 300장 가까운 성탄카드가 도착한 것이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박스에 머리를 박고 자기 선물을 찾는다고 법석이었다. 나는 비닐 봉지에서 꺼내든 카드를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다.

유치부 아이들의 고사리 손으로 그린 크레용 그림카드, 손 맵시가 제법인 중등부 여학생들의 카드, 그리고 꽤 의미심장한 글귀들이 실린 청년들의 카드까지 그야말로 형형색색이었다. 어느 짓궂은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쓴 카드에는 “정선교사님, 사모님! 얼굴도 모르고 선교사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전도사님이 쓰라고 해서 카드를 씁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살아서 돌아오세요!” 라고 쓰여 있었다. 아련히 우리 부부는 초등학교시절 12월이면 써야 했던 국군장병아저씨께 보내던 위문편지가 생각나서 한참을 웃었다.
나는 거실에 줄을 치고 카드들을 걸어 놓았다. 무슨 한국의 운동회 때 운동장에 걸려 나부끼는 만국기 같기도 했다. 온 방을 가득 채운 성탄카드 속에서 우리는 멀리 있지만 잊혀지지 않은 의미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곱십고 곱십었다. 그 때 과자와 장난감을 누나와 서로 가지겠다고 아웅다웅 하던 둘째가 자라나 이곳 캐나다에 와서도 성탄절을 맞을 때면 그 때 우리 집 거실과 방을 뒤덮었던 그 일을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자신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사건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자신은 때론 선교지에서 힘들기도 했지만, 그런 위로가 있어 행복했다고 한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안 것이다.

올 해도 선교회의 책임을 맡아 현장 선교사들의 가정에 성탄선물을 준비해서 보냈다. 매년 연례행사이니 말이다. 그러나 정말 그 때의 그 감사와 감격으로 선교사들과 자녀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인지 모르게 함량미달인 것 같은 마음이 든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사인사색 밴쿠버목양일기









씨 뿌리는 교회



2013년 새로운 한 해의 교회 비전을 놓고 기도하다가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주제로 삼아 교회 목표를 “씨 뿌리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혼자 전도지를 가지고 길에서 나누어 주다 보면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한인교회이다 보니, 백인들에게는 그냥 “God bless you~!” 인사하고 맙니다. 주로 아시아인들을 살피고, 그 중 한국 분이다 싶으면 더 반갑게 웃으며 전도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제 눈썰미가 부족한지 중국사람들을 잘 구분 못하는 편입니다. 반갑게 말을 걸었다가 중국 사람이면 머쓱하니 웃고 역시 “God bless you~!” 인사하고 맙니다. 짧게 예수님을 믿는지 묻고, 교회에 다니시라고 권유하기는 하지만 한국 분을 바라 볼 때처럼 간절함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한국에서 노방전도 할 때의 생각이 간혹 나곤 합니다. 그 때는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이 다 한국사람이었고, 내 말을 듣는 사람이 다 한국사람이었는데…… 하고 말입니다.

예전에 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귀한 씨앗을 함부로 뿌리는 것일까요? 좋은 땅에만 정성껏 심어서 잘 가꾸면 될 텐데 말입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는 아예 처음부터 뿌리지 않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은 모른 채 말입니다. 굳이 여기에서 “과거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농법으로 농사짓지 못하고 그냥 모든 곳에 씨를 뿌리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다니면 길이 생기기도 했다”라는 식의 해석을 붙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뻔히 보이는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떨기 위에도 뿌려지는 씨앗의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렵니다.

예전 유명한 S그룹의 회장이 이런 말을 했지요. “한 명의 엘리트가 만 명, 십만 명을 부양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세계적인 대기업이 되어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세상적으로 보면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적어도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는 그의 말을 결단코 부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 곳에나 씨를 뿌리는 것이 합리적이지 못하고 비효율적이라고 생각이 드는 이유는, 우리들 스스로가 좋은 땅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좋은 땅이 아니라, 돌밭이고 가시떨기, 아니면 심지어 길가인지도 모릅니다. 귀한 생명의 씨앗을 아낌없이 다 뿌리고, 가꾸어 모두 좋은 밭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이겠지요. 그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이고 은혜인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누가복음 5:32)

선한 사람을 찾고, 의인을 보고, 좋은 땅을 찾는 것은 우리들 사람의 마음입니다. 내가 사역하는 교회에 올 것 같은 사람에게 눈길이 더 가고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겠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인을 구하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실 때, 좋은 땅만 찾으시지 않고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에도 아낌없이 생명을 뿌리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2013년 한 해 동안 우리모두 좋은 땅이 되어 백배의 결실을 수확하기를 축복합니다. 더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떨기에도 아낌없이 나누는 풍성한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김용균 목사 / 한마음교회 / 778-554-9003]

아브라함 이야기



롯의 엄청난 불행들 / 창 19:23-37 (2)



롯의 불행- 아내를 잃음
천사들은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창 19:17). 그러나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동안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26절). 눅 17:31-32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롯의 처가 물질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던 것은 물질에 대한 미련과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집착과 불신은 롯의 아내가 소돔 출신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롯의 처에 대한 언급이 없을 뿐 아니라, 가나안에서 기근을 만나 이집트로 갔다가 올라온 후, 소돔성으로 갔을 때에도 롯의 아내에 대한 언급이 없고, 나중에 19장에 가서야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롯의 아내가 소돔 출신이었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고, 롯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한 순간에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롯의 불행- 두려움아내를 잃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겨우 몸만 빠져나온 롯과 그의 두 딸들은 이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19:30). 소알성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두려움 없는 삶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 23:4). 하나님께서는 두려움 대신에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롯의 불행은 하나님의 평안을 잃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롯의 불행- 근친상간동굴에 기거한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19:31). 이 말은 “결혼을 하려면 지참금도 필요한데 가진 것도 없고 아버지가 늙어서 돈을 벌 수도 없으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통해서 후손을 이어가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딸들의 생각은 롯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소돔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롯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창 19:8). 이것은 이미 정혼한 딸들이기 때문에 몰려온 무리들이 두 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롯의 지혜로움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도 세속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롯이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모습을 두 딸들은 무의식적으로 배웠고, 택해서는 안되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즉, 롯과 두 딸들의 관계는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입니다.

롯의 불행- 술취함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위해 롯에게 술을 마시게 합니다. 이것은 굴 속으로 피신을 하면서도 술을 가지고 올 정도로 롯이 그 동안 술을 즐겨 마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약으로 술을 쓰라고 권했기 때문에 술먹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술을 절제하기가 쉽지 않고 술에 취하면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롯은 술에 취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창 19:33). 그러므로 금주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롯은 술로 인해 영적인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롯의 두 아들- 모압과 암몬두 딸들과의 근친을 통해 태어난 아들들이 바로 모압과 벤암미 즉 암몬족속의 조상이었던 것입니다. 모압이란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이고, 암몬이란 “나의 친척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오늘날의 요르단을 가리키는데 모압과 암몬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고 괴롭히는 죄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스바냐 2:8). 롯은 자신이 세상적 방법을 따른 것의 결과로 인해 평생 후회와 수치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즉, 그는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자긍심을 모두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 세상의 방법을 따랐던 롯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정말 수치스럽고도 치욕스러운 여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잠 4:23)의 말씀처럼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지 않도록 믿음을 지키며, 그 믿음위에 서서 세상을 변화시키며 하나님만을 존중히 여기는 애독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재미있는 사도행전



2013, 꿈에 미쳐라! (1)





2012년 8월, 영국 프리미어리그 스완지 시티에 입단한 기성용은 구단 역사상 가장 비싼 선수로 스완지 시티에 입단했다. 영국의 ‘BBC’ 등 현지 언론이 보도한 기성용의 이적료는 600만 파운드(약 107억)였다. 한국인 선수 이적료 중 최고액이다.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QPR)로 이적한 박지성의 이적료 500만 파운드(약 89억원)를 훨씬 뛰어 넘는 액수다.
기성용 선수가 ‘셀틱’에서 ‘스완지시티’로 입단 할 때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제야! 저의 어릴 적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는 프리미어 그리에서 빨리 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다. 꿈이 있는 사람은 눈빛부터가 다르다. 꿈이 있는 사람의 눈은 빛이나고, 앞을 향하며 눈물이 고여있다. 꿈이 있는 사람의 입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다. 꿈이 있는 사람은 열정과 자신감에 사로잡혀 일한다. 그리고 꿈이 있는 사람은 ‘존재의 이유’가 있어 늘 기쁨에 넘쳐 살아간다.

꿈이 없는 사람은 출렁이는 바다위, 흔들리는 배 위에서 놀고 있는 사람과 같다. 언제 풍랑이 일지,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 잠언 29장18절을 보라!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비전이 없는 사람은 망할짓만 골라서 한다’는 말이다. 목표가 없으니 할 일이 없어 늘 빈둥 거린다. 빈둥 거리다 보면 잡념에 사로잡힌다. 인간의 잡념에서 나올 것은 뻔하다. 죄지을 생각만 생산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세우는 방법은 아주 특이하다. 먼저 꿈을 심는 작업부터 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6).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는 복이 될지라”(창12:3). 요셉에게 “요셉이 꿈을 꾸고”(창37:5, 9). 사도바울에게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사람은 꿈을 품고, 꿈을 위해, 꿈을 이루며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바울이 기록한 신약성경 13권의 1장 1절을 보라! 바울의 비전으로 장식되어져 있다. 바울은 몽상가로 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꿈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자였다. 바울이 토해내는 그의 비전을 들어보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고전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고후1:1, 갈1:1, 엡1:1, 빌1:1, 골1:1 딤전1:1, 딤후1:1).

<다음 주 계속>

황보창완 목사 / 778-708-5540







필객의 붓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작년 연말 저희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방안이 엉망입니다. 도둑이 들어와도 가져 갈 것이 없다고, 내 집에 도둑이 드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호언 장담하며, 키를 안가져간 아이들을 위해 문도 열어놓고 나가고, 몇 주간 집을 비우면서도 안심하고 다니며 문단속을 허술하게 하면서도 전혀 걱정이 없었고, 심지어 바로 몇 주전에 근방에 사시는 선교사님 댁에 도둑이 들었던 생생한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면서도 이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조금도 의심해 보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예배를 마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온 집에서, 이전에 선교사님 댁에서 보았던 것처럼 침대가 뒤집혀 있고 서랍들이 열려있고 옷가지가 방안에 널려있는 광경을 보면서도, 내 생애 절대 그럴일이 없을 것이라 했던 믿음(?)이 너무 크게 작용해서 한동안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 꼭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딸을 혼인시키던 날 도둑을 맞은 선교사님 가족들에게는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니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침착하게 위로했었지만 막상 내가 당하고 보니 시간이 갈수록 충격이 느껴지고, 외출해서도 안심이 안되고, 집에 들어올 때마다 마구 어질러진 그 때의 모습이 떠올라 두렵고, 어두운 손길이 뒤지고 다녔을 집에 혐오스런 마음이 들고, 그 날 등이라도 하나 켜놓고 나가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고 속상하여 몇 일 동안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내가 잃어버린 것이 생명도 건강도 소중한 가족도 구원의 믿음도 아니라 컴퓨터와 노트북 뿐이고, 마침 내 노트북은 고장난 자판 때문에 수리점에 보내야 해서 모든 문서들을 유에스비에 옮겨놓아 글 한 줄 잃어버리지 않은 점에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도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는 동안 집을 지켜주시지 않은 하나님께 야속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새벽, 이 일을 통해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도적같이 이를 것이라 했던 말씀이 너무나 실감나게 다가온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어느 날 주님께서 이렇게 오실 것인데, 준비 안된 채로 주님께서 오셨음을 안다면 지금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후회할 뿐 아니라 성경의 표현처럼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란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늘 사람들에게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글도 그런 글을 쓰고, 스스로의 기도에도 늘 입에 붙이고 사는 말이면서도 실제로 가슴에 부딪혀오는 실감은 느끼지 못했으며,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고대하면서 살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에는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졸음같은 막연함 속에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고, 졸다가 찬물 바가지를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우리의 이생에서의 마지막 날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처럼 세계적이고 인류 전체의 역사적인 사건에 의해서가 아닐지라도, 너무나 짦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질병과 불의와 사고 등 무수한 종말의 가능성과 악한 조건들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말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예고 없이 닥칠 수 있는 일이며, 죽음은 예외없이 누구에게나 작정된 일입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시간이라는 귀중한 자산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잠깐 졸았던 봄 꿈처럼 짧다고 하는 인생의 시간이 지금도 쉬지 않고 닳아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주는 가장 큰 착각은 너무도 짦은 생애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언제 이가 나고, 언제 말을 하며, 언제 커서 학교에 갈까 했었는데, 이사할 때 서랍 속에 흩어져 있던 사진 몇장을 남기고 아이가 벌써 대학생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때는 멀리만 보이던 시간에 순간적으로 당도한 것만 같습니다. 이제 곧 아이들 모두 결혼을 해 집을 떠나고, 손주를 보고, 둘 중 한쪽을 먼저 보내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공원에 앉아 허공에 회상의 시선을 드리우다가 영원쪽으로 사라질 날이 순식간에 현실이 될 것을 생각하면, 세월의 속도감에 현기증이 일어 반사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움켜잡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지 않으셨기에 오늘도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자만하고, 늘 건강하고 무사할 것처럼 마음을 높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취소하시면 당장 모든 상황은 지옥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맛과 향과 기쁨과 안식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겐 끝나버린 기회요 은혜임을 생각하면, 지금 내가 가진 그 어떤 것도 내 것이라 자랑할 수 없으며 살아있는 동안 모든 순간들에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의 비밀을 깨달은 베드로 사도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사단의 존재에 대해 말하면서 근신하여 깨어있어야 한다고 엄히 경고했습니다. 준비가 안된 채로 세월이 간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준비 없이, 인격의 성숙과 지혜의 무르익음이 없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노인이 되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돈이나 집이나 명예 인기 등 이 생에서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은 도둑이 구멍을 뚫고 가져갈 수 있지만, 우리가 받은 생명의 복음은 도둑질 당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 때가 큰 은혜의 때이며 축제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깨어 준비하여 복음의 등불을 들고 있을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지금은 회개와 회복이 필요해”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

미국 3개 주 동성애 합법화ㆍ2개 주 마리화나 합법화에 대한 염려 나타내

▲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는 지난해 11월 미국 3개 주에서 인정된 동성혼과 2개 주에서 통과된 마리화나 합법화 법안에 대해 영적, 도덕적 위기가 올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가 최근 동성혼 증가와 마리화나 합법화, 선정적이고 폭력성 넘치는 TV 프로그램의 증가에 대해 미국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크리스천포스트지의 지난 1일 보도에 따르면 대표적인 미국 복음주의권 전도가인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는 이같은 염려와 함께 나라가 점점 죄악에 병들어가는 것은 눈앞에 다가온 ‘재정절벽’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주 공개서한을 통해 “지난 몇 주간 많은 언론매체가 국내 재정과 직결된 ‘재정절벽’ 문제를 염려해왔지만, 영적ㆍ도덕적 절벽 문제가 국가에 가져올 영향력은 이와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

그 이유로는 지난해 11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워싱턴ㆍ메릴랜드ㆍ메인 3개 주에서 높은 지지하에 동성혼이 합법화된 점과 미네소타 주에서 결혼이 남녀 간에 이루어진다는 법적 정의가 수정된 점을 들었다.

또한 지난해 11월 높은 찬성투표율로 콜로라도 주와 워싱턴 주에서 마리화나가 기분전환용으로 합법화된 점도 한 가지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오늘의 세태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도 “가슴이 아픈 것은 아버지와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회복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소망이 남아있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가 비록 어두운 시기를 지나며 처음 국가를 세웠던 기초가 파괴될 위기에 놓여있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며 “구약시대 영적으로 어두웠던 므낫세 왕의 남쪽 유다왕국이 다시 손자인 요시아 왕의 회개운동을 통해 회복된 처럼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igood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