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6일 토요일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북한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은? (1)


지난주에 우리는 북한 내의 ‘남한열풍’과 더불어 확산되는 ‘북한의 복음화’에 대해 나눴습니다. 이 맥락에서 계속하여 나누기 원하는데요, 북한의 복음화는 우리 모두 바라는 것이고 또 북한의 ‘남한화’는 어떤 의미에서의 자생적인 ‘통일연습’으로 보여지기에 다소 안도감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한쪽만의 통일연습이지 남과 북에 사는 사람들이 그리는 통일의 합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북한사람들은 어떤 통일을 꿈꾸며 그들이 그리는 통일은 과연 우리 남한 사람들이 또는 세계에 흩어져있는 디아스포라 코리안들이 생각하는 ‘통일’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공통점이 있을지 생각해봐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북한 안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또 돈 맛에 길들여져 가는 주민들이 생각하는 통일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또 해외에 나와 있는 탈북민들이 생각하는 통일의 그림도 있겠지요. 사람은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세계관이 형성되기도 하는데, 북한 내에 또는 북한 외부에 사는 북한인들의 통일에 대한 그림이 정말 궁금하고 또 이것은 ‘통일을 생각하는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안이기도 합니다.

북한사람들에게도 ‘통일의 소원’이 있음을 기억해주십시오!

대한민국에 2만 5천명의 탈북민들이 있고 그 중에 사역자와 목회자들을 포함하여 신학을 하는 탈북민은 100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 하는 통일관련된 행사에 가보면 아직 탈북민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을 전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과연 2만 5천명이 생각하는 ‘통일’은 어떤 것일까요? 잠시 고향의 자리로 돌아가 봅니다. 제게 ‘통일’이라는 이슈가 감격으로 몰려왔던 것은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열렸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TV에서 나오는 한국의 전대협 대표 ‘임수경’씨의 등장은 그야 말로 환호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동족이고 내 동포라고 생각했던 ‘남조선사람’의 얼굴을 보았고 또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정치적인 어떤 것도 모르기에 순수할 수밖에 없었던 10대 시절 제게 그려진 ‘통일’의 그림은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티비 스크린 속에 비춰진 수많은 평양시민들의 열광하는 모습과 임수경씨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리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곳 한국에 와서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며 어쩌면 손잡고 우시는 많은 분들 중에 모르긴 해도 ‘이산가족’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친지는 아니지만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의 얼굴을 보고 손을 만질 때의 감격이 어떤 것이었을까 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10대이던 시대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고 그래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익숙해진 우리 북쪽에 있는 분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도 상당히 달라졌겠지만 분명한 것은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서 ‘통일’은 정치적인 것을 뛰어넘은 ‘한 혈육, 한 민족’으로서의 깊은 갈망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임을 북에서 살았던 일인으로서 확신하는 부분입니다. 또한 지금 북쪽 사람들도 남한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잘 살고 있는 남한이 우리와 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에 더욱 같이 살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럴진대 전쟁시대에 헤어진 이산가족과 또 전쟁 없는 시기에 본의 아니게 흩어지고 나뉘어진 지금의 이산가족(탈북민들과 그의 가족들)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야 말을 해 뭐하겠습니까. 통일! 누구에게는 관심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지 모르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수십년의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쓸어내린 ‘애증의 강’을 건넌 상처의 자국이기도 합니다.

북한 사람들에게 통일은 내 혈육이기에 이뤄져야 하는 갈망이기도 하겠지만 결코 누구에게 강압적으로 또는 북한의 모든 문화와 북한 사람들의 생각이 무시되어 진채 이루어지는 통일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 Plus





찬양대원은...



찬양대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실한 믿음으로 빠짐없이 참석하는 출석이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성실하게 찬양하는 찬양대원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그 찬양을 받으심은 물론 그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는다. 찬양대원은 내가 찬양하는 이 찬양이 하늘 보좌에 상달됨을 믿고 찬양하는 찬양을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리라 믿는다.

찬양대원은 영적인 사람, 음악을 사랑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 성실하며 사교적이고 친교적인 사람, 신앙 안에서, 교회 안에서, 예배의 중요성과 그 예배에 있어서 찬양대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으로 교회음악과 찬양대의 목적이 유흥이나 연주 또는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며 예배 중 각자의 재능과 가지고 있는 부분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음악을 통해 많은 영적인 부분들이 채워지고 이루어짐을 인식하고 예배중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예배에 임하는 경건성, 회중 찬송시 리더, 성경교독시 낭독, 설교와 기도 등에 열심히 듣고 임하는 사람, 일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경건한 삶을 통해, 예배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와 찬양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찬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7 장 내적 치유과정의 주제들



우리 부부의 내적 치유 학교나 집회에서 전해지는 중요한 주제는 대략 “열 가지”로 요약된다. 물론 강의는 이 주제들에 국한되지 않고 참석자들의 상황과 질문에 따라서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폭넓게 다루게 된다.

주제 5 : 성령님께서는 이 깊은 원인들을 하나씩 드러내시고 치유하시며 그것들의 깊은 뿌리를 제거해 주신다.

성령께서 하시는 치유는 세상의 상담이나 심리치료와는 크게 다르다. 일반적인 상담이나 정신 분석에서도 많은 경우 원인을 제대로 찾아낸다. 그렇지만 그들은 처방에서 인간적인 방법을 쓰며 그것이 제대로 안 될 때는 바로 약물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많은 크리스천 상담자들도 의사에게 가서 약물 처방을 받을 것을 권유한다. 이 부분이 성령님의 내적 치유와 아주 다른 것이다.
성령님은 세상의 약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물”을 사용하신다. 우리 속에는 우울증, 조울증, 강박증이나 여타 모든 내면의 아픔과 손상을 치유할 수 있는 온갖 호르몬들을 만들어내는 설비가 완전하게 세워져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의 뿌리를 잘 아시기에 우리를 바로 그 곳으로 인도하셔서 보게 하시며 그 뿌리를 제거하시는 작업을 우리와 함께 시작하신다. 그러면서 덮이고 눌려있던 생명의 샘을 열어 주신다.
그리고 성령님은 문제의 뿌리를 제거하는 작업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진행해 가신다. 그것은 마치 육신의 치유를 받을 때에도 우리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약을 써가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인 것이다. 만일 암을 빨리 치유하겠다고 방사선 치료를 무리하게 진행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장이 손상을 입을 것이고 환자가 일찍 죽을 수도 있다. 성령님은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내 마음이 치유되기만 하면 .....

주제 6 :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치유되기만 하면 저절로 되기 시작한다.

주제 7 :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모든 망가진 관계도 내 힘으로 회복될 수 없다. 내 마음이 치유되기만 하면 아주 쉽게 해결되기 시작한다.

주제 8 : 나의 성품과 성격도 내 힘으로 회복될 수 없다. 내 마음이 치유되기만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으로 아름답게 회복되어간다.

나 자신이 원하는 변화와 성숙은 환경의 변화와 개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별안간 돈이 많이 생긴다고, 명예가 생긴다고, 건강해 진다고 내가 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면 오히려 엄청나게 뒷걸음을 치게 된다. 나의 성품의 변화는 오직 마음의 치유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성령님의 진단과 조명으로 내 마음의 여러 장애물과 상처들의 뿌리가 드러나고 성령님과 함께 내가 그 뿌리를 제거해 가는 만큼씩 변화와 성숙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애를 쓴다고 주님의 과수원이 내 마음 속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나님의 생명나무를 심으시고 성령님이 생명수를 흐르게 하셔서 그 나무가 열매 맺는 데까지 이르게 하시기에 멋진 과수원이 되어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성령님의 생명의 능력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감사하게도 성령님은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를 동역자로 불러 주시는 것이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믿음을 건축하다- 권능



초겨울이 다가오는 10월 26일 온 성도들이 모여 기공예배를 드렸다. 예배당 건축을 위해 성도들은 구차한 살림 가운데서도 정성껏 헌금을 했다. 성도들 중에는 인부들이 먹을 빵을 구워오거나, 애지 중지하던 양을 끌고 오기도 했고, 주방 일을 섬기기도 했다. 이것도 저것도 드릴 것이 없는 젊은이들은 인부로 자원을 했다. 기초공사가 진행되던 11월은 평년 기온 보다 훨씬 높았다. 건축 책임을 맡은 볼료자는 가가호호를 뒤져 시멘트를 몇 포대씩 실어왔다. 새로 구입한 볼료자의 소형 승합차는 완전히 짐 차가 되어 버렸다. 기초가 놓이자 다른 도시에서 10여명의 벽돌공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예기치 않던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도시에 두 개의 벽돌공장이 있었는데 그런데 자치주 수도에 몇 년 째 짓고 있던 문화예술회관을 속히 완료하라는 중앙정부의 독촉이 떨어졌다. 벽돌이 급히 필요한 지방정부는 벽돌판매를 통제했고, 아예 경찰이 벽돌공장을 지키고 서 있었다. 벽돌은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가 된 것이다.


벽돌공장 인부들이 월급대신 모아 놓은 것을 겨우 사들여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인부들이 벽돌이 없다며 소리를 질렀다. 자신들도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성도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쉬라고 하시는 뜻이다”라며 내려와서 간식이나 점심을 먹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공사현장의 모든 성도들이 찬송하며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매일 속이 다 타 들어 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주님은 아멘 소리와 함께 정확하게 벽돌 실은 트럭을 보내주셨다. 처음엔 기도한다고 무슨 벽돌이 하늘에서 떨어지냐며 인부들이 우리를 비웃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예배와 기도를 마칠 때면 트럭들이 도착하여 눈앞에 벽돌을 쏟아 붓길 10여일. 그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 틈을 놓칠세라 성도들은 그들에게 전도를 계속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때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건축이 한 창 진행 중이던 어느 날, 나는 사택에서 교역자회의를 하고 있었다. 인부들의 점심 준비를 돕던 알렉산드라가 빵을 사러 갔다가 예기치 않은 한 사람을 데리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는 강신 무당인 ‘바바 지나’였다. 알렉산드라가 줄을 서서 빵을 사는데 섬뜩해서 뒤를 돌아보니 수 십년 단골무당이 서 있었던 것이다. 놀란 알렉산드라가 응급 결에 한 말이 “바바 지나, 우리교회에 예배당을 짓는데 가 볼래요?” 했다는 것이다. 그 말에 “어디서 짓는데?”라며 그 무당이 따라 나서자 교회로 데려온 것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점치러 다니던 습관이 있었으나 자신의 딸이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되는 것을 보고 회개하고 주께 돌아온 성도였다.

알렉산드라가 사택의 문을 열고 들어오며 우리가 모여있던 방 쪽으로 ‘바바 지나’가 왔어요라고 하자 앉아있던 몇 사람은 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걸음소리와 함께 나이든 깡마른 할머니 한 분이 목을 빼어 방안을 힐끗 한 번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려다가 뒤로 다시 물러서며 방안에 앉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방에 계신 모든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신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리고는 몸을 비틀며 머리를 쳐 든 채 이를 악물었다가, 다시 입을 크게 벌려 린 채로 가뿐 숨을 몇 번씩 몰아 쉬는 것이었다. 순간 앉아 있던 우리 모두는 머리카락이 서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 발을 우리가 있는 방으로 내딛고 한 발은 복도에 둔 채 눈은 하늘로 치켜 들고, 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내가 보니 지금 이 카라칼팍스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사탄의 나라가 나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때 우리교회 성도들은 아이들까지 150명 정도 되었다. 150만 되는 자치공화국에 지극히 적은 무리가 믿음 가지고 주를 섬기고 있었다. 핍박과 환난이 심했고, 믿음 때문에 갖은 위협을 다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적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기도할 때 마다 “주여, 우리를 이 땅에 보냄은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때로는 자기연민으로 울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당을 통해서 그 땅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바바 지나’는 방안에 들어서자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선생님, 할 수 있다면 제 안에 있는 이 귀신들 쫓아 주세요. 저는 30여 년 동안 이 귀신들에게 갖은 시달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할 수만 있다면 이 귀신들을 쫓아 주세요”그 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나는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전에 내어 쫓아주어도 다시 들어와 더 괴롭힐 것이라며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다.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초청했다. 그 때 그녀의 몸 안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여러 뒤틀림과 불안이 썩여 있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혼신을 다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나는 주님을 영접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얻고 축사와 축복의 기도를 했다. 긴 기도를 마치고 머리에서 손을 떼려는 순간 그녀는 내 손을 붙잡고 다시 자기 머리로 가져 가며 “선생님, 아직도 남아 있어요!”라고 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기도하는 모든 교역자들은 기겁을 했다. 나는 오래 기도할 작정으로 다시 머리에 손을 얹고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그녀의 머리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흔들고 있는 내 손등을 두드리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이제 그만 하세요. 다 나갔어요!”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31 >







0146.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 네 가지 (살전4-5장)



(1)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살전 4-5장에서는 거룩이라는 단어가 네 번, “하나님의 뜻”은 두 번이나 언급되어있다. 3, 4절은 ‘성화’를, 7절은 완성된 ‘거룩함’이다. 바울 서신은 믿는 자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는 권고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없이는 이 거룩함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세우는 삶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21세기 바리새인이 되어 사람앞에서 자신을 세우느라 온갖 유희를 하게 된다.

활동중독증에 걸린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 하나님에게까지도 인본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해온 신복음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세상과의 차이점을 가르치기보다는 오히려 유사점을 강조하여 여전히 옛 사람이 삶을 지배하고 있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을 방해한다. 율법주의의 본질은 ‘자기속죄’(自己贖罪)이다. 자신이 자기의 죄를 속죄하려는 행위이다.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이성과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제일 급선무는 죄인의 변화이다(세상변화가 아니다). 옛 사람을 파괴하는 작업에 착수하는 일이다. 활동적인 교회일수록 죄를 대적하지 않고 피하려고 신경을 쓴다. 대중을 끌어모으고 즐겁게 해주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개종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신복음주의 사상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세상기업의 방법을 면밀히 조사, 모방하여 요란한 선전광고와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면서도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회개치 아니한 사람들, 깨끗치 못한 사람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 그야말로 사람들의 종류는 많은데 모두 세상을 그대로 교회안에다 옮겨놓은 세상장터를 방불케한다(기독교 고전의 하나인 J.C. 라일 감독의 ‘거룩/복있는 사람 간행’을 추천합니다).

예배를 몰아내고 프로그램이 등장하여 조직화하여 부산한 활동들이 넘치나, 이 활동이라는 것은 성령님의 개입 없이 오직 자신들의 특출함을 의식하는 인간의 재능만으로도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생존번성가능하다는 통속적인 활동중독증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신앙의 모양만 건드리고 신앙의 본질속으로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면서도 무엇인가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줄을 이은 행사계획이 살아있는 교회라는 무서운 모순의 착각에서 우리는 하루속히 구원을 받아야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약교회의 참된 힘이시다는 결론으로 돌아가야한다(행2:4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


(2) “항상 기뻐하라” (살전5:16) 예수를 믿는 증거는 “기쁨과 평강”(롬15:13)이다. 신앙의 연륜이 아무리 오래되고 직분이 크다해도 지금 내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신앙의 현주소가 병들어있다는 증거다.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서 슬픈 일을 당하나 우리의 영혼 깊숙하게 숨겨진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기쁨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게 도우신다. 기독신앙체계의 뿌리에 놓여있는 것은 하나님의 역설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죄는 우리의 기쁨을 소멸시킨다. 매일매일의 회개를 통해 기뻐하면서 찬송하게 된다. 회한이 아니라 회개이다. 천주교의 종교적인 경건한 슬픔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이를 수 있다고 느끼는 자기 감정의 덫에 걸리게되면 속아살게 된다. 회한은 영혼을 파괴시키나 회개는 우리의 심령을 매일매일 새롭게 소생시킨다.

죄는 너무나 무겁고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심오한 사고나 그럴듯한 행위로도 죄의 치명적인 결과를 조금도 감할 수가 없다. 하나님 한 분 만이,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죄를 씻어낼 수 있다. 만성적인 후회(회한)는 여전히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일종의 ‘좌절된 회개’이다. 마귀는 회한의 감정을 부추겨 자신의 죄 때문에 생긴 피해에 벌을 부과, 배상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받으려고 스스로 애쓰게 만든다. 자신의 노력으로 죄를 없앨 수 있다는 착각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괴롭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해드리면서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느끼는 본능적인 생각 때문에 자기자신에게 벌을 부과, 종교의 끔찍한 고행과 슬픔은 함께 동거하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나 성화는 등한시하며, 명예는 바라나 십자가는 지지 않으니 참기쁨이 없다. 오늘날 신복음주의 사조는 기독신앙의 근본을 오해한 전도자들을 대량생산해내고 있다. 부정적인 것은 숨기고 오직 긍정적인 면만 강조하면서 신구약성경의 고난의 종들의 이야기는 피해간다. 희생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속인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지루하지 않게, 즐겁게 해주어 교회에 나오도록 훈련되어져버린, 안일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고 착각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기쁨이 없다. 분주함 뒤에 따르는 공허함에 무의미 해진다. 생명없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

기독신앙을 철학, 과학 및 그 밖의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동원, 그것을 너무 믿은 나머지 ‘이성주의’라는 우상을 숭배, 복음의 모든 것들을 이성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니 기쁨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연적이고도 합리적인 것으로 조화시키려 머리를 짜낸다. 그리스도의 기쁨은 설명할 때가 아니고 선포할 때 임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착지는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앙(위)에 호소하기 때문이며, 실험이나 논리적 증명이나 변증법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증거가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인간의 무지, 교만을 내려놓고 ‘말씀’에 의지했을 때 가장 지혜로웠으며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19:20)는 사도행전의 기쁨이다. 여기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걸려있다.

(3)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사도행전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결안한 것 중 하나는 “기도하는 것”(행6:4)이었다. “기도하지 않은 자는 비록 그가 목사일 지라도 크리스찬이 아니다”라는 청교도들의 준엄한 질책이 있다. 모든 직분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말씀의 거울’앞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내가 말씀의 거울 앞에 서 있는데 그 거울 안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인다면 말씀을 잘못보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A장로에게 필요한 구절인데…이 말씀은 B집사가 꼭 알아야하는데…’등등. 오전에는 사람을 만나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야한다. 마귀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남으로서 목회에 크게 도움을 줄 것 같은 착각으로 목회자들을 바쁘게 만든다.

한국교회의 은퇴하신 어른이신 J목사님의 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으나 어느 신문에 공개된 글이라 게재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대부분 목사의 문제입니다. 목사들이 변화되지 않고 은혜받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목사들이 은혜받으려 하지 않고 설교만 하려듭니다. 자기가 은혜받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도들에게 은혜를 줄 수 있습니까? 성도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인을 보고 목회할 필요가 없어요. 목회자는 먼저 자신을 바라보며 회개해야합니다. 목사는 자기를 보고 목회를 해야합니다. 목사가 변하면 교회가 변하며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엎드려야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목사자신의 모습이 낱낱이 들어나야합니다. 도대체 기도생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는지… 목회의 가장 중요한 시간은 엎드리는 시간이며 엎드림이 없이는 길이 없으며, 목사가 엎드리지 않으니 목회가 평생 힘들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해야 할 것을 안 하니까 쉬운 목회가 어렵게 된다는 주장이다. “목사가 변화되는 만큼 성도들이 변화되며 설교는 강단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한다”.

오늘 날 소위 분주한 일들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교회안으로 들어와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를 밀어내고 있다. 신구약성경에 똑같이 나오는 구절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마21:13/사56:7)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임재가 사라질 때 사람들은 그 대용품으로 초라한 상징들을 찾게 마련이다. 기독교적 연예오락이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일들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신앙을 크게 왜곡시켜왔다. 하나님의 진리를 오락거리로 동일시하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졌다. 축제니 ‘페스티발’이니 하면서 예배부재현상까지 보고있다. 예배주관자가 성령이 아니고 그 부재 현상을 이제는 수많은 저급한 찬송과 행사프로그램으로 대체하게 되면서 교인들의 관심을 끌려고 몸부림친다. 기독신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다니면서 인간의 열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오해하기에 이르렀다. “기도의 집”을 ‘경배와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노래방’으로 만들어놓았는데도 무감각, 무감동으로 철저하게 길들여져 버렸다. 기독신앙이란 적어도 교회에서는 함께하는 예배이다. 인기상승, 성공에 목말라하는 종교적 ‘스타’나 유명인사의 유명세에 편승해야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의 우(愚)를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강단 위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 하기 위해서 처절하게 찢기시고 피흘린 십자가 앞이 아닌가!!

(4)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모든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나 반면 감사는 하나님을 향해 올려드리는 우리 영혼의 예물이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하신 일,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성하여 주셨음을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며 성경에 나오는 ‘감사’라는 단어만 찾아 상고해도 하루가 부족할 것이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을 가장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노예의 땅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는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열 번이나 격노케 하셨다고 기록하고있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원ㆍ불ㆍ교’(오해하지 마시라. 불교의 원불교가 아니라 원망과 불평을 달고 사는 기독교인을 말하고자 함이다)에 가까운 그 많은 사람들. 우리에게 원망과 불평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분석하여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자. 재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질문제로 원망불평을 아버지께 늘어놓은 때도 있었다. 아버지께서 주신 음성의 의외였다. “너희들이 예수도 안 믿는 자들이 받는 그런 수준의 것(돈)을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구나…”(잠언30:7-9절로 만족하겠습니다).

대인과의 관계에서 원망, 불평으로 인해 우리의 감사가 어두워질 수도 있다. 우리는 인류역사상 가장 이기적이고도 사랑이 메말라져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양육된 이 ‘코카콜라’세대(Coca-Cola Generation)는 타인의 아픔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세대가 아닌가 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바울의 권고는 새 힘을 준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오래참음으로 옷입고…”(골3:12). 원망, 불평을 잠재우지 못하고 소리가 커질 때 그 소리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감사’밖에 없다.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이 “죄, 은혜, 그리고 감사”라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상한 일이 될 수가 없어야한다. 바로 이『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서를 작성한 독일교회는 “하나님의 뜻” 4가지 -“거룩, 기쁨, 기도, 감사”-를 저버렸고 세상을 향하여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실패, 히틀러의 ‘나치’군화에 밟히는 소금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버렸다.

그리스도의 찔림, 고난의 영광의 광채앞에서는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두려움을 한낱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달려 죽은 십자가”(찬147)의 가사를 생각하며 계속 부르시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신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쏟아지는 모든 악을 선으로 갚아야함과 또 이길 힘을 주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5:44, kjv).

살아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찬 188 / 만세 반석 열리니 ④)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아브라함 이야기


하나님의 시험과 아브라함의 반응 / 창 22:1-6 (상)




하나님의 부르심
1절은 “그 일 후에”라는 문구로 시작을 합니다. ‘그 일’이란 바로 21장에서 일어났던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은 일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나그네로서의 유한한 인간의 실존과 영생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은 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깨닫게 하신 후에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시험여기서의 ‘시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닛사’ (nissaœ) 인데 이것은 ‘유혹’ (temptation)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혹’이 무너뜨리고 망가뜨리기 위한 사단의 계략을 의미한다면 여기서의 시험은 ‘테스트’ (test)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비멜렉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배우게 하신 후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테스트는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 10:13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서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이 주는 유익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 다닐 때, 시험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보면 시험을 보고 난 뒤에 오답 노트를 꼭 작성합니다. 왜냐하면 아는 문제를 틀리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문제를 반복적으로 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있는 부분에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한 부분, 늘 넘어지는 부분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 가운데 약한 부분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 시험하실 때, 시험이 주는 유익을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
2절에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번제’란 ‘올라’ ({oœlaœ)로 ‘burnt offering’을 의미합니다. 한문으로는 ‘사를 번’을 씁니다. 즉, 완전히 불살라서,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번제드리는 법
레위기 1:4-9에 보면, 제사드리는 사람이 제물을 끌고 와서 머리에 안수한 후 그 짐승을 죽이면, 제사장들이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립니다 (5절). 그런 다음 제사자는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6절). 여기서 각을 뜬다는 것은 머리, 다리, 몸통 등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제단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위에 머리와 몸통, 그리고 물로 씻은 내장과 다리를 불붙은 나무에 올려놓고 태우는 것입니다 (7-9절). 그러니까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이삭을 죽여서 그의 피를 뿌리고 사지를 절단해서 나무 위에 올려놓고 불살라 제사를 드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하기 힘든 하나님의 시험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지극히 비정상적인 테스트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이 신앙생활을 한지 25년 만에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너무나 귀한 아들이고, 이제까지 키우느라 정이 들만큼 들었을 뿐 아니라 이삭이 없이 산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는 상상할 수 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이제까지 한 번도 이방사람들이 하듯 인신제사를 요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방식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자식을 죽이고 훼손한 후 그 몸을 태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믿음으로 감당하였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 앞에서 아브라함이 보인 세 가지 반응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배움에는 끝이 없고 배우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제 삶의 모토 중에 하나가 평생학습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매주 목요일마다 함께 모여 성경을 공부하는 동역자 모임을 좋아합니다. 비슷한 또래들이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연구하며 목회적 고민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모임입니다. 모임이 시작된 지 벌써 수년이 흘렀지만 변함없는 우리 모임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미국 밸링햄에 있는 교회에서 ‘국경의 밤’이라는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미주개혁교회(CRC) 교단에 소속된 한인 목사님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이 달에는 특별히 도르트 신학교에서 교수로 수고하시는 심재승 목사님이 오셔서 함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이 글도 공부를 마치고 깊은 밤에 숙소에서 쓰고 있습니다.

유행가 vs classic

유행가는 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사와 리듬이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어 즐거움과 위로를 주기고 하고, 때론 눈물을 흘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목사가 유행가를 듣는다고 하면 좋게 보지 않는 분들도 있지만, 유행가보다 고상하게 생각하는 클래식 음악도 사실은 그 당시 유행가였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랜 동안 감동을 줄 때 클래식이 되는 겁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노래들은 들을 때는 좋은데 클래식이 될 만한 곡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크게 히트한 곡도 그 유효기간이 너무 짧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은 클래식이 돼야 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563년 청년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그 지역 교회들의 설교를 위한 가이드로서, 다양한 개신교회들 사이의 통일된 신앙고백의 형태로 작성된 것입니다. 올해로 450년이 됩니다. 우리와 지역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거기에다 아주 오래된 신앙고백서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클래식과 같이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참 신앙의 깊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의 고민도 예전에 선진들이 다 했던 것입니다. 삶 가운데 부딪쳐 오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신앙의 고민과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입니다.

한인교회도 이제는 유행가 보다는 클래식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한국교회가 짧은 역사에 비해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전 세계 역사 가운데 이런 경우가 없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한국에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유행가처럼 크게 히트 했다가 쉽게 잊혀 지지는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이번에 세미나를 하면서 드는 생각은,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같은 신앙고백을 자체적으로 만들지 못할까라는 아쉬움입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만큼 후대에도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려면 더 많이 성숙해야 합니다. 그 시작이 저희 교회에서부터 그리고 여러분의 교회에서부터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세규 목사 / 밴쿠버오늘교회 / 778-887-8648]
 
 
 
 
 

재미있는 사도행전



조폭 보스의 행복한 죽음



조폭 보스가 부하들을 대동하고, 대중목욕탕 안으로 들어섰다. 보스의 온 몸에 새겨진 문신은 목욕탕 탈의실의 요란함을 한 순간, 잠재워 버렸다. 벗겨진 보스의 몸은 탕 안, 깊숙한 곳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탕 안은 이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재자의 땅이 되어버렸다.

‘나를 죽이진 않겠지?’ ‘아냐, 쥐도 새도 모르게 나를 죽여 버릴 수도 있어’ ‘조직원들을 시켜서 나를 죽일지도 몰라’ ‘정말 괴롭다!’ 도저히 떨쳐 버릴 수 없는 전도의 부담감이 나에게 몰려왔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부담을 주시나’ ‘도저히 자신이 없다’ ‘어떻게 하지?’

턱까지 차 오르는 거친 숨을 억제하며, 보스의 뒤로 서서히 접근했다. 나의 떨리는 손끝이 보스 오른쪽 팔 살갗에 닿았다. “저-기!” “뭐야!”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일은 벌어졌다. 이제 한 고비만 남았다. 입만 열면된다. “회개하고, 예수님 믿으세요.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는 나를 사우나 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사우나실 문이 닫히는 순간! ‘세상에 어찌 이런일이’ 그는 바로 나의 발끝에 무릎을 꿇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떨리는 목소리로 “목사님, 예수님 믿겠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요”, “저는 지금 너무 불안합니다.”(전3:11). 그의 머리에 나의 손이 얹혀지고, 주님을 영접하는 긴 기도가 시작되고 또한 끝이났다.

보스에게 복음을 전한 목사님은 목욕을 마치고, 목욕탕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은 말그대로 난장판이 되어져 있었다. 구급차, 경찰차, 국과수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국과수(국립과학수사 연구소) 요원 한 명이 한구의 시신을 흰 천으로 덮고 있었다. 목사님의 눈은 그 시신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그 순간! 목사님의 온 몸은 마비되어 버렸다. 그 시신이 바로 그 보스였던 것이다. 상대편 조직원의 칼에 그만 ....

미루지 말라! 미루면 후회한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전3:1). 이 때를 놓치면 눈물과 후회만 남는 법이다. 세계적인 신학자 C.S. 루이스는 그의 책 <악마의 편지> 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탄의 전략은 하나님에 대한 일들을 미루게 한다’ 우리는 안다. 마귀는 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 시급한 일이 무엇인지! 그러나 사탄은 우리에게 늘 이 일을 내일로 내일로 미루게 한다.

사도바울은 아주 민첩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루는 법이 없다. 특히 생명 살리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바울에게 살 길이 열려졌다. 그를 묶어 두었던 옥문과 착고가 자동으로 열리고 풀려졌다(행16:26). 그의 몸 하나 피하기도 바쁜 순간에 자기를 괴롭혔던 간수와 그의 가족에게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외치고 있다(행16:31). 전도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바울의 ‘전도 순간 포착 능력’이 돋보인다.

내일로 미루어지고, 포기되어진 생명이 없는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보장된 내일은 없다. 단지 오늘만 있을 뿐이다. 오늘이 바로 기회의 날이다.
(위의 ‘조폭 보스 이야기’는 필자가 직접들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이야기로 엮은 것입니다)

[황보창완 목사 (글로리아 한인교회) / 778-708-5540]
 
 
 
 
 

필객의 붓



 

사망을 삼킨 생명


걷는 것은 마음에 쉼을 줍니다.
어깨에 내려 앉는 눈 부신 봄 햇살이 마음속까지 환하게 비춰드는 것 같습니다. 걷 잡을 수 없는 초록으로 번져오르는 봄 기운이 들썩이는 거리로 나서니, 마음 한켠 눅눅하던 생각들이 하얀 깃털같은 기도말로 풀려 오르고 늘 무심히 지나치던 담장 밑의 풀들이 봄 햇살에 반짝이고 있음이 눈에 들어옵니다. 냉장고의 소음에 익숙해져있던 귀가 엔진이 멎었을 때 새롭게 소음의 강도를 인식하는 것처럼, 꽉 조이던 마음의 단추가 풀린 것 같은 이완의 느낌이 들고 푸근하게 마음이 놓이는 것을 보니 지붕 아래 평소의 삶에서 조차 얼마나 마음의 엔진을 크게 돌리며 긴장이 많았었는지가 인식이 됩니다.


무릎을 꺾는 인간의 뉴스들에 휘청거리며 사는 삶에 탁트인 하늘을 보며 살아갈 수 있음이 정말 다행스럽습니다. 하늘을 통해 하나님이 계신 보좌를 그릴 수 있고 드넓게 펼쳐진 소망의 시어들을 읽을 수 있다면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단이 인간에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하늘을 가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 기계들을 만드느라 혈안이 된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놀라운 컴퓨터의 세계가 0과 1의 숫자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숫자의 가장 밑이나 위로도, 가장 작은 단위의 간격 안에도 무한대로 존재하는 숫자를 통해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광대하고 세밀하신 창조는 도무지 상상도 못할 너무나 아름답고 경이가 가득찬 세계일 것이며 천국이나 영원의 시간이 너무나 광대하고 충만할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건널목에 꽃이 놓여있습니다.
누군가 불의의 사고로 이 생을 떠난 자리인 모양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빠져들어간 영원의 틈새를 더듬으며 애통하는, 누군가의 눈물이 고여있는 자리가 두렵도록 안쓰러워 눈길이 갑니다. 죽음도 이렇게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며 사람의 존재는 영원이 아니면 설명이 안됩니다. 아무리 보이고 들리는 것만을 인정하겠다는 듯 물질에 코를 박고 살아도 곳곳에서 영원의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매일 많은 죽음들을 보고 접하며 살아가면서도 이 생의 자랑과 걱정이 영원할 것처럼 기를 쓰며 사는 것을 보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했던 사단의 거짓말이 문자 그대로 인간의 심장에 박힌 것은 아닐까 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부활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벗어나기 전, 이 생에서도 많은 죽음을 지나가야 합니다. 자아가 죽어야만 인간에게 부여하신 진정한 생명이 본질이 살아납니다. 날마다 죽노라 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자아가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날마다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가정을 이루는 일도 부모가 되는 일도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헛된 꿈과 기대에서 죽어야 자녀들을 제대로 돌볼 수 있고, 상대에 대한 허영심과 집착에서 죽어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부부로서의 참된 사랑과 존중의 관계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원망, 집착, 쓴뿌리, 남의 탓에서 죽어야 진정한 친교와 소통의 문이 열립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이 고귀한 죽음이 빠져 있습니다. 교회가 비는 기도의 내용 역시 우상 앞에 비는 사람들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움의 형상으로,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녀들이 보란듯이 잘되고, 승진하고 사업체를 늘려가고, 남이 부러워할 만한 뭔가를 손에 쥐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종탑 안에서 조차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말다툼에서 이겨야 하고, 조금만 나를 힘들게 하면 밀쳐버리고, 조금만 부담이 되고 조금만 불편하고 조금만 이해가 안 되어도 견디지 못하고, 조금만 내 뜻에 어긋나도 욕하고 바로 등을 돌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차하고 누추하고 치졸한 생각에 갇혀 가슴을 치며, 미워하고 저주하고 복수의 칼을 가는 말을 함부로 뱉으면서 사는게 사는게 아니라고 울부짖습니다. 이에 대한 치유는 상담이나 심리분석이 아니라 말기암보다 더 치유 불가능한 자아를 통째로 드러내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채워넣음으로 감사와 축복과 영광이 가득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기적을 이룰수 있습니다.

믿는 자의 부활은 완전한 영광 속에 있습니다.
욕된 것을 심고 영광스러움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을 심고 강한 것으로 살고, 육의 몸을 심고 신령한 몸 즉 썩지 아니할 것과 죽지 아니할 것을 입습니다. 꽃씨를 품고 있던 땅이 꽃을 피워올립니다.
언땅을 비집고 올라온 새로운 생명에 길게 입을 맞추는 봄 햇살에 숨죽인 바람도 빛에 녹아들어 온화한 숨을 뿜어 냅니다. 여기저기 피어난 꽃들을 보고 꽃씨를 품고 있던 땅이 어디였는지가 드러나듯 지금은 마음이 보이지 않더라도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은 숨길 수 없습니다.

나중의 삶이 아름답고 향기로울 수 있도록 꽃씨처럼 아름다운 기도 말을 오늘 마음에 품어야 겠습니다. 삭막하고 흉악한 소식들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예수님의 향기요 진리의 빛깔이 될 수 있도록 생각속에 말씀만을 새겨 넣으렵니다. 봄 볕에 무섭도록 번져나가는 신록의 생명처럼, 오늘도 생명의 복음이 편만하게 퍼져 나가길 기도합니다. 꽃을 피우는 봄의 부드러움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의 폭력을 삼키는 것 처럼 예수님의 진리가 죄와 사망의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의 눈물과 아픔과 미련과 악을 삼킬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