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6.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 네
가지 (살전4-5장)
(1)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살전 4-5장에서는 거룩이라는
단어가 네 번, “하나님의 뜻”은 두 번이나 언급되어있다. 3, 4절은 ‘성화’를, 7절은 완성된 ‘거룩함’이다. 바울 서신은 믿는 자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는 권고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없이는 이 거룩함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세우는 삶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21세기 바리새인이 되어 사람앞에서 자신을 세우느라 온갖 유희를 하게 된다.
활동중독증에 걸린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 하나님에게까지도 인본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해온
신복음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세상과의 차이점을 가르치기보다는 오히려 유사점을 강조하여 여전히 옛 사람이 삶을 지배하고 있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을 방해한다. 율법주의의 본질은 ‘자기속죄’(自己贖罪)이다. 자신이 자기의 죄를 속죄하려는 행위이다.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이성과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제일 급선무는 죄인의 변화이다(세상변화가 아니다). 옛 사람을 파괴하는 작업에 착수하는 일이다. 활동적인
교회일수록 죄를 대적하지 않고 피하려고 신경을 쓴다. 대중을 끌어모으고 즐겁게 해주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개종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신복음주의 사상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세상기업의 방법을 면밀히 조사, 모방하여 요란한 선전광고와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면서도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회개치 아니한 사람들, 깨끗치 못한 사람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 그야말로 사람들의 종류는 많은데 모두 세상을
그대로 교회안에다 옮겨놓은 세상장터를 방불케한다(기독교 고전의 하나인 J.C. 라일 감독의 ‘거룩/복있는 사람 간행’을 추천합니다).
예배를 몰아내고 프로그램이 등장하여 조직화하여 부산한 활동들이 넘치나, 이 활동이라는 것은 성령님의 개입 없이
오직 자신들의 특출함을 의식하는 인간의 재능만으로도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생존번성가능하다는 통속적인 활동중독증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신앙의
모양만 건드리고 신앙의 본질속으로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면서도 무엇인가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줄을 이은 행사계획이 살아있는
교회라는 무서운 모순의 착각에서 우리는 하루속히 구원을 받아야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약교회의 참된 힘이시다는 결론으로
돌아가야한다(행2:4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
(2) “항상 기뻐하라” (살전5:16) 예수를 믿는 증거는 “기쁨과
평강”(롬15:13)이다. 신앙의 연륜이 아무리 오래되고 직분이 크다해도 지금 내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신앙의 현주소가 병들어있다는 증거다.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서 슬픈 일을 당하나 우리의 영혼 깊숙하게 숨겨진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기쁨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게 도우신다.
기독신앙체계의 뿌리에 놓여있는 것은 하나님의 역설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죄는 우리의 기쁨을 소멸시킨다.
매일매일의 회개를 통해 기뻐하면서 찬송하게 된다. 회한이 아니라 회개이다. 천주교의 종교적인 경건한 슬픔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이를 수 있다고
느끼는 자기 감정의 덫에 걸리게되면 속아살게 된다. 회한은 영혼을 파괴시키나 회개는 우리의 심령을 매일매일 새롭게 소생시킨다.
죄는 너무나 무겁고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심오한 사고나 그럴듯한 행위로도 죄의 치명적인
결과를 조금도 감할 수가 없다. 하나님 한 분 만이,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죄를 씻어낼 수 있다. 만성적인 후회(회한)는 여전히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일종의 ‘좌절된 회개’이다. 마귀는 회한의 감정을 부추겨 자신의 죄 때문에 생긴 피해에 벌을 부과, 배상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받으려고 스스로 애쓰게 만든다. 자신의 노력으로 죄를 없앨 수 있다는 착각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괴롭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해드리면서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느끼는 본능적인 생각 때문에 자기자신에게 벌을 부과, 종교의 끔찍한 고행과 슬픔은 함께 동거하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나 성화는 등한시하며, 명예는 바라나 십자가는 지지 않으니 참기쁨이 없다. 오늘날 신복음주의 사조는
기독신앙의 근본을 오해한 전도자들을 대량생산해내고 있다. 부정적인 것은 숨기고 오직 긍정적인 면만 강조하면서 신구약성경의 고난의 종들의 이야기는
피해간다. 희생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속인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지루하지 않게, 즐겁게 해주어 교회에 나오도록 훈련되어져버린,
안일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고 착각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기쁨이 없다. 분주함 뒤에 따르는 공허함에 무의미 해진다.
생명없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
기독신앙을 철학, 과학 및 그 밖의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동원, 그것을 너무 믿은 나머지 ‘이성주의’라는 우상을
숭배, 복음의 모든 것들을 이성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니 기쁨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연적이고도 합리적인 것으로 조화시키려 머리를
짜낸다. 그리스도의 기쁨은 설명할 때가 아니고 선포할 때 임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착지는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앙(위)에 호소하기
때문이며, 실험이나 논리적 증명이나 변증법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증거가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인간의 무지, 교만을 내려놓고 ‘말씀’에 의지했을 때 가장 지혜로웠으며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19:20)는 사도행전의 기쁨이다. 여기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걸려있다.
(3)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사도행전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결안한 것 중 하나는 “기도하는 것”(행6:4)이었다. “기도하지 않은 자는 비록 그가 목사일 지라도 크리스찬이 아니다”라는 청교도들의 준엄한
질책이 있다. 모든 직분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말씀의 거울’앞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내가 말씀의 거울 앞에 서 있는데 그 거울 안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인다면 말씀을 잘못보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A장로에게 필요한 구절인데…이 말씀은 B집사가 꼭 알아야하는데…’등등. 오전에는 사람을 만나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야한다.
마귀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남으로서 목회에 크게 도움을 줄 것 같은 착각으로 목회자들을 바쁘게 만든다.
한국교회의 은퇴하신 어른이신 J목사님의 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으나 어느 신문에 공개된 글이라 게재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대부분 목사의 문제입니다. 목사들이 변화되지 않고 은혜받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목사들이 은혜받으려 하지 않고
설교만 하려듭니다. 자기가 은혜받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도들에게 은혜를 줄 수 있습니까? 성도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인을 보고 목회할
필요가 없어요. 목회자는 먼저 자신을 바라보며 회개해야합니다. 목사는 자기를 보고 목회를 해야합니다. 목사가 변하면 교회가 변하며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엎드려야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목사자신의 모습이 낱낱이 들어나야합니다. 도대체 기도생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는지… 목회의 가장 중요한 시간은 엎드리는 시간이며 엎드림이 없이는 길이 없으며, 목사가 엎드리지 않으니 목회가 평생 힘들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해야 할 것을 안 하니까 쉬운 목회가 어렵게 된다는 주장이다. “목사가 변화되는 만큼 성도들이 변화되며 설교는
강단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한다”.
오늘 날 소위 분주한 일들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교회안으로 들어와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를 밀어내고 있다.
신구약성경에 똑같이 나오는 구절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마21:13/사56:7)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임재가 사라질 때
사람들은 그 대용품으로 초라한 상징들을 찾게 마련이다. 기독교적 연예오락이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일들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신앙을 크게 왜곡시켜왔다. 하나님의 진리를 오락거리로 동일시하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졌다. 축제니 ‘페스티발’이니 하면서
예배부재현상까지 보고있다. 예배주관자가 성령이 아니고 그 부재 현상을 이제는 수많은 저급한 찬송과 행사프로그램으로 대체하게 되면서 교인들의
관심을 끌려고 몸부림친다. 기독신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다니면서 인간의 열정을 성령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오해하기에
이르렀다. “기도의 집”을 ‘경배와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노래방’으로 만들어놓았는데도 무감각, 무감동으로 철저하게 길들여져 버렸다.
기독신앙이란 적어도 교회에서는 함께하는 예배이다. 인기상승, 성공에 목말라하는 종교적 ‘스타’나 유명인사의 유명세에 편승해야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의 우(愚)를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강단 위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 하기 위해서 처절하게 찢기시고 피흘린
십자가 앞이 아닌가!!
(4)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모든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나 반면 감사는 하나님을 향해 올려드리는 우리 영혼의 예물이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하신 일,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성하여 주셨음을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며 성경에 나오는 ‘감사’라는 단어만 찾아 상고해도 하루가 부족할
것이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을 가장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노예의 땅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는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열 번이나 격노케 하셨다고 기록하고있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원ㆍ불ㆍ교’(오해하지 마시라. 불교의 원불교가 아니라 원망과 불평을 달고 사는
기독교인을 말하고자 함이다)에 가까운 그 많은 사람들. 우리에게 원망과 불평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분석하여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자. 재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질문제로 원망불평을 아버지께 늘어놓은 때도 있었다. 아버지께서 주신 음성의 의외였다. “너희들이 예수도
안 믿는 자들이 받는 그런 수준의 것(돈)을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구나…”(잠언30:7-9절로 만족하겠습니다).
대인과의 관계에서 원망, 불평으로 인해 우리의 감사가 어두워질 수도 있다. 우리는 인류역사상 가장 이기적이고도
사랑이 메말라져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양육된 이 ‘코카콜라’세대(Coca-Cola Generation)는 타인의
아픔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세대가 아닌가 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바울의 권고는 새 힘을 준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오래참음으로 옷입고…”(골3:12). 원망, 불평을 잠재우지 못하고 소리가 커질
때 그 소리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감사’밖에 없다.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이 “죄, 은혜, 그리고 감사”라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상한 일이 될 수가 없어야한다. 바로 이『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서를 작성한 독일교회는 “하나님의 뜻” 4가지 -“거룩,
기쁨, 기도, 감사”-를 저버렸고 세상을 향하여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실패, 히틀러의 ‘나치’군화에 밟히는 소금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버렸다.
그리스도의 찔림, 고난의 영광의 광채앞에서는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두려움을 한낱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달려 죽은 십자가”(찬147)의 가사를 생각하며 계속 부르시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신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쏟아지는 모든 악을 선으로 갚아야함과 또 이길 힘을 주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5:44, kjv).
살아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찬 188 / 만세 반석 열리니 ④)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