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2일 목요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말을 많이 하면 공허합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가려서 말을 해도 간교한 혀 밑에는 어떤 식으로든 내 자랑과 허영의 설탕이 묻어있습니다. 부주의하게 뱉어진 말들이 석연찮은 진동을 일으키며 빈 벽 같은 가슴을 헐어내고, 핵심을 잃고 불발된 말의 파편들이 뒤척일 때마다 침상 위에서 와작와작 부서집니다. 길고 깊은 새벽 잠에서 건져 올려진 맑은 양심이 어제 밤 선교 여행 준비 모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말들을 저울에 달아 자격을 논하려 들면, 나 분명 함량미달이고 부족하기에 얼른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피합니다.  

청소년 아이들을 데리고 두 주간 아이티로 떠나는 단기 선교 여행을 계획하는 시작부터, 너무나 위험하고 불결한 곳으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부터 시작해서 예방 접종, 음식이나 기후와 물과 신변안전,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길 경우 내가 져야 할 막중한 책임 등, 염려라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형체 없는 적과 씨름하려 치면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느라 몇 배로 힘을 더 소모할 것이기에, 이럴 때 내가 오직 할 수 있는 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며 납작 엎드립니다. 

사실은 인생 자체가 참으로 위험한 여행으로,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짙은 어둠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약 한 달 전 동네에서 일어났던 총기 사고나 교통사고로 죽은 가족을 기리는 길가에 놓인 꽃들을 보면서나, 테러나 불의의 사고 등, 매일 우리 귀에 들려지는 뉴스들을 통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덮쳐올지 모르는 죽음의 요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불안한 인생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매사에 지금처럼 예민하게 염려의 촉수를 세운다면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불안과 공포에 질려 살아야만 할 터인데, 우리가 그 위협들에 무뎌지고 둔감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감사할 입니다. 일상에 돌보심의 은혜가 따르듯, 이 여행을 그 두터운 은혜에 맡깁니다. 

이 여행에 소망하고 바라는 것은 아이티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위로한다는 기대에 앞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움의 중병이 들어, 껍데기만 보고 신경 쓰면서 내면의 깊이나 진실을 볼 수 없게 눈멀고, 물질과 기계로 인해 바짝 메마른 우리 아이들의 영혼이 치료받는 것이 사실 더 큽니다. 부요함 속에 살면서도 만족을 모르는 아이들, 연예인들의 화보를 따라 화장하고 옷 입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부정하는 아이들, 게임이나 재미를 주는 기계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영혼을 흐트러뜨리는 음악과 타인의 취향과 음성들에 혼잡되어 자신이 진정 원하고 바라는 것 조차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이 아이티의 가난하고 순박하고 천진한 눈빛을 가진 어린 아이들과 성경 캠프도 하고 춤과 노래를 가르치면서, 사랑에 대한 교감을 잃고 플라스틱처럼 딱딱하고 메마른 아이들의 영혼이 인간적 감성과 웃음과 눈물이 회복되어 눈 먼 행복들에 눈뜨고,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까지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과 행복이 물질과 소리와 색깔적인 것들에 달린 것인 양 현혹할 테지만, 인간의 실존이 세상이 숭배하고 예찬하는 물질적 가치들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묵상과 진실한 기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진정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싸움을 했던 선진들의 심령이 온통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되어 있었기에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엄청난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눈에 보이는 상황이나 사람들의 말을 묵상하고 따랐다면 거대한 믿음의 싸움들에서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갑 속에 아껴두었던 새 돈이 허물기가 무섭게 손 사이로 빠져 달아나는 것처럼, 벌써? 하며 시작했던 7월도 반이 싹둑 잘려 나갔습니다. 세월의 속도를 모르는 바도 아니건만 매번 새로 당하는 일처럼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란 숨가쁘게 달려서 따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이길 수 있는 속도인줄 알기에, 제멋대로 허공을 떠도는 생각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립니다. 잠깐 무릎을 꿇는 시간에는 실로 엄청난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며 안달에 길들여진 감각으로는 모든 것이 멈춰있는 듯, 어리석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 시간 속에서 전능하신 분의 힘과 지혜와 능력을 힘입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높이는 자리에서, 그 찬란한 영광의 비췸 아래 각자의 영광을 흔들어 깨어야 합니다. 존귀는 바깥의 지위나 외모나 부귀와 영화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 마음에 존귀한 생각이 깃들기 시작하면 그토록 갈망하며 밖으로 찾아 헤매던 인정과 사랑이 영혼의 뜰 안으로 날아와 둥지를 틉니다.

묵상과 기도는 조급한 시간의 열을 벗어나 영원에 속한 존재로서의 끝없는 평화와 기쁨을 맛보는 실로 대단한 아름다움입니다. 
앞으로 남은 이 생의 시간들 속에서,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생각과 말로써 척박한 마음의 땅을 기경하고 싶습니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재미있는 여호수아서


도피성Ⅰ


유대인 ‘시몬 비젠탈’은 2차 대전 때 아유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그의 자녀를 포함해 모두 89명의 가족을 잃었다. 그는 결심했다. ‘만약 내가 이 수용소에서 살아만 나간다면 나치들에게 피의 복수를 하리라’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긴 인내의 시간을 거쳐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다. 1945년 2차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난 것이다. 비젠탈은 철저한 복수를 위해 비엔나와 린쯔에 ‘전범 기록 연구소’를 세웠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깊게 가담했던 나치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비젠탈은 학살자들의 대부분이 잠수함에 금괴를 싣고 남미로 도망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이들을 찾아 남미로 떠났다.  

1960년 5월, 비젠탈은 오랜 숨바꼭질 끝에 유대인 학살의 제 2인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최악질 전범 아이히만이 잡혔다는 소식에 유대인들의 복수심은 극에 달했다. “저 아이히만을 찢어 죽여라! 히틀러보다 더 나쁜 놈이다”고 외쳤다. 아이히만의 신변처리 문제는 유대인뿐 아니라 전 세계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세계의 이목은 이제 비젠탈의 말과 행동에 집중되어졌다. 그런데 이런 해괴망칙한 일이 또 있을까? 불타오르는 복수심 때문에 비젠탈이 미쳐버린 것일까? 비젠탈은 갑자기 “용서하자! 그러나 절대 잊지는 말자!”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를 인간적 감정이 아닌,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쳐 그를 처벌하자고 호소했다.

비젠탈은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아이히만을 전범 재판에 회부 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아이히만은 뉘른베르크의 전범 재판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비젠탈은 왜 그의 전 생애를 바쳐 붙잡은 원수를 자신의 복수심에 의존하여 처리하지 않고, 국제 사회의 법정에 세운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이유는 민수기 35장 그리고 여호수아서 20장에 나오는 ‘과실치사자’들을 위한 ‘도피성’의 원칙을, 살인자 아이히만에게 적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피성’(수20:1-6)이란, 말 그대로 ‘도망가서 피하는 성’이다. 도피성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인간을 향한 그의 사랑과 자비심의 표현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로 사람을 죽이거나 다른 여러 죄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아시기에, 도피성을 만들어 피할 길을 주신 것이다. 도피성 제도는 너무나 중요한 제도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민35장)를 이어, 여호수아(수20장)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도피성의 설치 장소, 처리, 재판방법, 심지어는 피난자의 책임 한계까지 분명히 명시해 주신 것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정복 후, 땅을 지파별로 분배했다. 그러나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하지 않았다. 레위지파 사람들은 성막과 제사 일을 맡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각 지파 속으로 흩어져 살았다. 그래서 가나안 땅 전체에 48개의 레위인 성읍들이 있었다. 이 중 여섯 군데를 지정해서 도피성을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도피성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성읍이라는 것, 그리고 도피자들을 돌보는 사람은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었다.             <다음 주 계속>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힉스입자와 그리스도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소속 과학자들이 ‘힉스 입자’로 추정되는 새 소립자를 발견했다고 지난 7월 4일 발표했다. 영국 과학기술시설위원회(STFC)의 존 우머슬리 대표는 “힉스 입자 이론에 부합하는 입자가 발견됐다고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 입자는 우주 탄생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 중 가장 유력한 표준 모형(Standard Model)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립자들 중 유일하게 아직 존재를 증명받지 못한 입자다. 이번 발견이 크리스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힉스 입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와 함께 전문가로부터 들어본다.   【편집인】  



2012년 7월 4일,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거대강입자가속기(Large Hadron Collider: LHC)에 설치된 두 검출기(ATLAS, CMS)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힉스입자(Higgs particle)일 가능성이 높은 입자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힉스입자는 같은 장소, 같은 양자상태에 (한 개의 입자만 존재할 수 있는 fermion과는 달리) 여러 개의 동일한 입자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보존(boson) 입자군에 속합니다. 그래서 힉스입자는 힉스보존(Higgs boson)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힉스입자는 만물을 구성하는 17개의 기본 입자들 중 마지막으로 발견된 입자로서 힉스입자와 그와 관련된 힉스장(Higgs Field)의 존재는 왜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Standard Model)에 등장하는 다른 기본입자들이 질량을 갖는지를 설명합니다. 표준모형이란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1973년에 개발된 이론인데 이 모델에서는 기본입자로서 쿼크(quark) 6개, 경입자(lepton) 6개 등 12개와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4개의 매개입자(gauge particle, force), 그리고 이들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입자 등 총 17개의 입자로 자연계의 현상을 설명합니다. 즉 이 17개 입자가 우주의 모든 물질과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만든다는 것이 표준모형의 핵심 개념입니다.

지금까지 표준모형을 구성하는 기본입자들은 힉스입자를 제외하고 모두 실험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본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17번째의 힉스입자가 없이는 현대물리학의 뼈대로 불리는 표준모형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기본입자들이 힉스입자와 상호 작용하는 정도에 따라 질량이 결정된다는 게 표준모형의 전제인데, 힉스입자가 없으면 입자들이 질량을 가질 방법이 없어지고, 따라서 표준모형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표준모형이 옳다면 힉스입자는 있어야 하며, 힉스입자가 없거나 예측과 다르다면 표준모형을 수정하거나 폐기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리학자들이 반세기 가까이 끈질기게 힉스입자를 찾아 헤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힉스입자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태초의 대폭발 순간에 해당하는 초고온, 초고압의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큰 가속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CERN의 LHC와 같은 어마어마한 가속기가 없었다면 힉스입자의 발견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피터 힉스가 자기 생전에 힉스입자가 발견될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 말도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생전에 힉스입자를 생성시킬 수 있는 강력한 초대형 입자 가속기가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한 때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입자가속기를 보유했던(지금은 CERN에 이어 두 번째) 시카고 인근의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 페르미랩)에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힉스입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가속기링 길이만도 6.28Km에 이르는 페르미랩의 가속기 테바트론(Tevatron)도 충분히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페르미랩 소장을 역임하고 중성미자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던 레더만(Leon Lederman)이 힉스입자가 아무리 찾아도 발견되지 않자 역정을 내는 의미로 자기 책 제목을 “제기랄 입자”(The Goddamn Particle)라 붙인 것도(책 제목이 너무 도발적이어서 후에 출판사에서 ‘The God Particle,’ 즉 ‘신의 입자’라고 수정해서 출간했다고 함) 그만큼 힉스입자를 찾기가 어려움을 말해줍니다. 이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대형 입자가속기를 가진 연구소에서 힉스입자를 찾기(만들기) 위해 그렇게 오랜 시간 노력을 했지만 실패한 것은 바로 대폭발 순간을 모의할 수 있을 정도로 입자 에너지를 높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본입자들에게 질량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던 17번째 기본입자 힉스는 지금까지 관측할 수 없었고, 태초의 대폭발 때에만 잠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힉스입자는 처음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에 존재하다가 기본입자들에게 질량을 부여하고 사라진 가상적인 입자입니다. 그러므로 137억년 전 우주가 처음 창조될 때를 입자가속기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는 힉스입자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CERN에서는 LHC를 이용하여 광속에 가깝도록 가속시킨 양성자들을 충돌시킴으로 극히 작은 스케일이지만 대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즉 현재의 태양보다 10만배 정도 더 뜨거운, 극히 높은 밀도의 상태를 순간적으로 만들 수 있었고, 양성자들이 “부서질 때” 그 부서진 조각들 속에서 힉스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CERN의 힉스입자 연구결과 발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 대폭발 이론에 대한 평가에 대해 신중해야 합니다. 아쉽게도 한국 교회에는 몇몇 미국 근본주의 단체들의 영향을 받아서 대폭발 이론은 무신론이고 유물론이기 때문에 반기독교적이라는 오해가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대폭발 이론에 대해 긍정적인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합니다. 물론 대폭발 이론 속에 무신론이나 유물론을 끼워 “마케팅”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폭발 이론 자체가 마치 무신론이나 유물론인 듯이, 혹은 대폭발 이론은 반드시 무신론이나 유물론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할 때 하나님께서 적어도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 우주를 창조하셨다면 대폭발의 방법을 사용하셨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기독교인 중에는 하나님이 “대폭발이 아니고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뭔가를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말은 대폭발을 통해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개념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으로 우주를 만든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얼마든지 대폭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에 기본적인 개념이 제시된 대폭발 이론은 100여년의 역사를 지나면서 정교하게 수정, 보완된 이론입니다. 처음 제시된 원시적인 대폭발 이론은 1950년대를 지나면서 가모브(George Gamow) 등에 의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다듬어졌고, 우주개발이 본격화 된 1960년대부터 대폭발의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증거들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1965년에 발견된 우주배경복사(Cosmic Microwave Background Radiation)를 필두로 우주가 대폭발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중요한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번 CERN의 발표는 아직도 물리학의 영역에 속한 초기 우주 연구 중에서 대폭발 이론을 지지하는 가장 분명한 연구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폭발 이론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은 힉스입자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간접적이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나뭇잎이나 깃발, 다른 움직이는 것들을 보고 바람의 존재와 방향, 강도를 유추하는 것처럼 물리학이나 천문학 등에서는 직접적인 관찰이 불가능하더라도 간접적인 증거가 믿을만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본 것만을 믿는다면 현대 과학 전체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합니다. 현대를 가리켜 전자시대라고 하지만 아무도 전자를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전자의 집합적 행동조차 직접적인 관찰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천문학에서 말하는 암흑물질이나 블랙홀 등도 아무도 직접 관측한 적이 없지만 이제는 전문가들이라면 아무도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간접적인 증거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과학적 언어와 신앙적 언어는 구별해야 합니다. CERN에서 발표한 내용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힉스입자의 질량이 약 125∼126GeV(1GeV=10억 eV)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번에 CERN에서 이 질량 영역에 속하는 입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실험적 오류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힉스입자가 존재할 확률은 99.99994%로서 300만 번의 실험에서 한 번 정도 오류가 발생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힉스입자 연구를 진행한 CERN에서는 ‘힉스 발견’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힉스에 일치하는 새 입자 발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번에 CERN에서 발견한 입자는 기존 표준모형에 들어맞는 힉스입자일 가능성이 확실시되지만, 만의 하나 완전히 새로운 이론으로 설명해야 할 입자일 수도 있습니다. 거의 힉스입자가 맞을 거라고 보지만 그래도 혹이나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지요. CERN에서는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금년도 하반기 추가 실험을 진행한 뒤 12월께나 힉스의 존재를 최종 발표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주의 깊게 연구를 해도 인간이 하는 연구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정상적인 과학 활동의 모습입니다. 오류의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지 않는, 다시 말해 잠정성(tentativeness)이 없는 주장은 더 이상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철학자 포퍼(Karl Popper)의 용어를 빌리자면 반증이 가능하지(falsifiable) 않은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어떤 증거를 제시하더라도 자기 이론은 절대로 틀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자연에 대한 설명이라 해도 더 이상 과학적인 언급이 아니라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신앙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확률을 99.99994%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셋째, 우리의 지성을 자연과 초자연 모두에 대해 열어두어야 합니다. CERN에서 발표한 것처럼 금년 연말 쯤 되어 힉스입자의 존재가 완전히 증명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우주 창조의 방법으로 현대 물리학이나 우주론에서 제시하는, 대폭발이 아닌 제 3의 메커니즘이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선 성경에 나타난 많은 기적들처럼 우리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메커니즘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었을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경우에 국한됩니다. 또한 현재까지 쌓인 증거로 봐서는 대폭발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방법일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여전히 대폭발 이론보다 더 그럴 듯 하고 이론적, 실험적 증거가 많은 과학적 모델이 있을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합니다. 아마 그런 과학적 모델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노벨상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초자연적 영역에만 묶어 두는 것이나 자연적 영역에만 묶어 두는 것은 둘 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초자연과 자연으로 나누는 우리 인간의 기준과는 무관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가 생기는 것이나 일식이 일어나는 것처럼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현상에도 관여하시지만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의 현장에도 관여하시는 분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동안 몰랐던 우주의 신비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 발견의 실용적 유익을 넘어 그 자체가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를 설명하는 표준모델에서 실험적으로 발견되지 않은 마지막 입자인 힉스입자는 어떻게 기본입자들이 질량을 얻게 되었는지, 그래서 별들과 행성들이 중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번 CERN의 힉스입자 연구발표는 그동안 표준모델에 근거한 대폭발 이론에서 예측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결과를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힉스입자의 존재에 전 세계가 흥분하는 이유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대폭발 이론을 비롯하여 물질의 궁극적인 기원과 구성에 대해 지금까지 이론적으로, 실험적으로 쌓아 온 체계가 옳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힉스입자 발견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힉스는 “저는 이러한 결과가 이렇게 빨리 나오게 된 것에 놀랄 뿐입니다. 이는 연구자들의 전문성과 정교한 기술이 함께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 저는 제가 살아있는 동안 이러한 일이 일어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힉스입자의 발견은 LHC와 같은 100억불(약 11조원) 이상의 입자가속기와 전 세계 수천 명의 전문 과학자들의 공동 연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힉스가 처음 이 입자의 존재를 예언했던 1964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연구환경입니다. 그래서 발표장에서 힉스는 거듭 언론과의 인터뷰나 코멘트를 사양하면서 스포트라이트는 자기 이론이 옳음을 증명한 과학자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는 힉스입자의 발견을 기뻐하는 힉스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자들의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올 때마다 함께 기뻐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상적인 과학자들의 연구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오면 어쩌나 하면서 노심초사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과학자가 그리스도인인지 여부를 떠나 저들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기대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의 관측, 실험, 계산을 통해 발견한 자연의 대칭성, 통일성, 조화 등에 나타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설계의 증거들은 아무리 기뻐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다만 과학이라는 옷을 입고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오는 인간의 자랑과 교만, 과학주의나 물질주의 등 이데올로기들만 주의한다면 누가, 어느 곳에서 발견하든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양승훈 교수 [PhD. / VIEW 학장]

섬김의 혁명 - 빌 하이벨스


섬김의 혁명 - 빌 하이벨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직자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임재와 내주(內住)가 그 증거입니다. 목회자이든 아니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임을 감당하며, 영혼을 돌보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이를 인식하고 참여하고 헌신할 때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소수의 유급 전임 사역자에 의존하는 것은 다시 구약의 제도로 회귀한 것 같은 양상입니다. 성도들이 마치 소비자처럼 교회에 와서 그냥 즐기고 가버리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참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공동체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잠자는 성도를 깨워 잠재력을 발휘하게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관람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봉사는 재미있고 유익하며, 교회의 영적 자원이며,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의미를 추구하고 사랑을 따라 행하며 섬겨야 합니다. 사람들이 은사를 발견하게 하고, 소명과 재능, 그리고 열정을 개발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돕는 일에 교회가, 특별히 목회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게 꼭 맞는 활동을 찾아라.
무엇을 섬길 수 있을까요? 성숙한 섬김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직업을 통해 열정을 쏟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낯선 영역에 도전하기도 하고, 전문지식을 활용하기도 하고, 또 마음의 감동이나 열정을 따라 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많은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 안의 다양성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값없이 주신 은혜의 자원을 활용할 때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교회는 더 많이 교회 안과 밖을 향해 봉사해야 하고, 더 많은 성도들의 적극적인 봉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회의 문을 여실 때 순종함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부르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섬김은 일회성이 행사가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관리, 성령충만이 필수적이며, 봉사자들의 변화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섬김의 삶은 예수님을 본받는 삶입니다. 예수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들도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섬기는 이유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고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친히 섬기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열심히 품고 주님을 섬기듯이 이웃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진정으로 섬기시려면 팔에 수건을 두르고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따라가야 합니다. 남을 섬기는 것은 겸손의 모형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남을 섬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를 권면하라
많은 경우 성도들이 봉사에 적극적인 않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이미 봉사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을 끌어 들이는데 적극적이지 않아서 이기도 합니다. 소극적인 대처, 봉사도 기득권처럼 소수의 사람이 독점하려고 할 때 가 있습니다. 이제는 이를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봉사의 가치와 필요를 알려야 합니다. 봉사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을 홍보하고 봉사축제와 같은 열린 기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합니다.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단순히 일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사명이 있고, 의미있고 가치 있는 사역임을 주지시켜야 합니다. 주의 할 점은 새가족들은 쉽게 상처 받을 수 있음에 유의하시고, 봉사자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그들을 낙담시키는 지름길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계속적인 동기부여로 그들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합니다. 

봉사의 유익을 경험하라.
예수님께서는 가장 이타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만족과 성취를 가져왔습니다. 섬김의 삶은 진정한 성숙을 이루고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게 합니다. ‘나’중심에서 ‘다른 사람 ‘ 중심으로 옮겨갈 때 비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놀랍게 회복되게 합니다. 사랑의 수고와 섬김은 우리의 마음을 넓게 하며 너그러이 용서하고 용납하게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미 받은 봉사를 다른 사람에게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수고와 헌신과 땀과 눈물을 누리며 살아온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저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하게 됩니다. 선행은 영적으로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하며 치유의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뭔가를 봉사하라.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면 사고와 발상의 전환뿐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야 합니다. 과감하고 도전적인 시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순간, 어디선가에서 뭔가를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778-868-3063 / Ezekiel475k@gmail.com]

아브라함 이야기

약속을 확신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 창 15:1-6 (하)




물질을 포기한 아브람
당시의 관습은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나 국가가 모든 포로들과 전리품들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많은 물질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관습적으로 보면, 모든 전리품과 포로들은 아브람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창 14:21에서, 소돔왕은 아브람에게 마치 큰 선심이나 쓰듯이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고 거만하게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창 14:23)”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모든 전리품과 포로들을 포기합니다.  

보상을 약속하신 하나님
비록 많은 물질적 손해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고 아브람은 인간적인 보상을 거부하였는데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전쟁경비의 과다지출로 인해 물질적인 어려움이 예상되었고, 아브람은 물질부족에 대해서 염려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네가 나를 위해 포기한 물질에 대해서 보상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때때로 아브람처럼 믿음으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한 후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지연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던 아브람
전쟁의 보복과 물질적 손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아브람은 창 15:2에서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자녀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무리 보호하시고 물질적으로 보상해주셔도 자식이 없기 때문에, 그 모든 축복은 자신의 종 엘리에셀이 물려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창 15:3에서는, 이렇게 된 것이 다 하나님 때문이라고 원망까지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즉,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까지 왔지만, 하나님께서 아직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허사라는 것입니다.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말씀을 통해서 확신을 주십니다. 창 15:4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은 두렵고 절망적인 신앙의 한 밤 중에 있는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어 내시고, 마치 수놓은 것처럼,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확증을 하십니다.   

여호와를 믿은 아브람
창 15:6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여호와’ 자신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한 확신과 확증을 얻었을 때, 그것을 다시 한 번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믿는 그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통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며 믿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두렵고 걱정되는 불면의 밤을 보내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와 보상에 대한 확신을 갖고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원하시며 기뻐하십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