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신앙 / 창 23:1-20 (상)
오늘 말씀은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난 아브라함의 신앙과 하나님 약속에 대한 성취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라의 죽음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127세에 죽었다고 나옵니다: “사라가 백이십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죽음은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우리 인생 최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살아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신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죽음을 연기하거나 피할 수 없습니다. 본래 죽음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서, 형벌로서 세상에 들어온 우리의 적입니다.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이 아닙니다. 죽음은 바로 하나님을 대항해서 반역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켜 주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딤후 1:10). 하지만 주님의 승리는 믿음의 백성들인 우리가 부활의 몸을 가질 때까지는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127세에 죽었다고 나옵니다: “사라가 백이십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죽음은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우리 인생 최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살아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신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죽음을 연기하거나 피할 수 없습니다. 본래 죽음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서, 형벌로서 세상에 들어온 우리의 적입니다.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이 아닙니다. 죽음은 바로 하나님을 대항해서 반역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켜 주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딤후 1:10). 하지만 주님의 승리는 믿음의 백성들인 우리가 부활의 몸을 가질 때까지는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애곡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자 슬피 울었습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2절). 아브라함은 자신의 전 생애를 사라와 함께 나누었습니다. 가나안으로 이주할 때 그와 함께 걱정을 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을 함께 기다렸고, 아들 이삭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사라와 나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우리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지만,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요 11:35), 바울도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 12:15)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자 슬피 울었습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2절). 아브라함은 자신의 전 생애를 사라와 함께 나누었습니다. 가나안으로 이주할 때 그와 함께 걱정을 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을 함께 기다렸고, 아들 이삭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사라와 나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우리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지만,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요 11:35), 바울도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 12:15)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별의 슬픔
4,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문자적인 뜻은, “나의 눈 앞에서 나의 죽음을 묻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라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위로를 주시기 위해 나타나시거나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친구였던 아브라함 조차도 사별의 슬픔과 외로움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별의 경험은 우리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4,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문자적인 뜻은, “나의 눈 앞에서 나의 죽음을 묻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라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위로를 주시기 위해 나타나시거나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친구였던 아브라함 조차도 사별의 슬픔과 외로움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별의 경험은 우리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민자- 나그네요 외국인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애도하거나 눈물만을 흘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죽음 앞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3절).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4절). 이것은 우리의 인생이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는 나그네라는 의미입니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 하-14).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고백은 그가 비록 사별의 슬픔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천국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소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으니라” (히 11:16). 즉, 아브라함은 우리의 인생이 나그네와 같은 존재들이며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애도하거나 눈물만을 흘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죽음 앞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3절).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4절). 이것은 우리의 인생이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는 나그네라는 의미입니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 하-14).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고백은 그가 비록 사별의 슬픔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천국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소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으니라” (히 11:16). 즉, 아브라함은 우리의 인생이 나그네와 같은 존재들이며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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