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원심 목사(전남 광주) 간증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땅에 새 생명들을 피워내는 따스한 봄에 한 여인의 이름 없는 들풀 같은 인생 이야기를 해 보려합니다. 저는 전남 나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몸 반쪽을 못 쓰시는 장애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가난과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나이가 훨씬 많은 집에 후처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저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아픔을 많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시집을 갔을지 몰라도, 제가 자라는 과정은 날마다 가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집안에서 17살 소녀가 공장에 다니며 받은 월급은 혼자 사는 엄마와 두 동생을 거두는 생활비로 사용 되었습니다. 소녀 가장의 짐을 지고 살아가면서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슬픔과 고통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때 신앙의 눈이 열리게 되고, 기도를 통하여 이겨내는 훈련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제 신앙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골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고생하며 살던 원심이가 좋은데 시집을 갔다”고 위로와 격려를 했습니다. 마음씨 좋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젊은 우리부부는 믿음을 키워가며, 사역에 꿈을 키우며, 부지런히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누리는 행복이었습니다. 사역자가 되겠다던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받은 그 당시 우리 세 모자의 생명줄 같았던 사천만원은 갑자기 당한 슬픔의 시간 속에 그만 사기를 당하게 되고, 어린 두 아들과 저는 세상에 버려진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어린 시절을 숱한 가난과 시련을 견디며 살아 왔었지만, 그 당시의 제 처지는 앞이 캄캄하고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그토록 사역을 꿈꾸던 그 마음을 이어받아 주님께 매어 달리며 신학을 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1인 3역을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아파도 아플 시간이 없을 정도로 두 아이의 엄마로, 야간에는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주일은 교회 전도사로,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이겨나가던 어느 날, 작은 아들이 다른 아이들 같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병원에 데려 갔더니 “자폐아”라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때의 “자폐 장애” 판정은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젊은 전도사의 마음과 믿음을 사정없이 깨부수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 아이가 4살이 넘어가면서 그 증세가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그런 아이를 데리고 사역을 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전도사 과정을 다 마치고도 전임 사역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풀타임 사역자가 되어야 교회에서 사택을 제공받아 어린 두 아들을 따뜻하게 잠을 재울 수 있는데, 우리 처지를 받아주는 사역지는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파트타임도 수없이 많은 눈치를 받으며,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심정으로 어렵게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 집에 혼자 두자니 더 큰 사고가 염려되어 마침내는 내가 나를 미워하는 그런 날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전도사가 그래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이 너무나 멀리 계신 것 같았습니다. 내가 속한 어느 곳에서도 도무지 사랑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주님이 부르신 사명을 붙잡고 이를 악물고 여러 교회를 다녔습니다. 아이들 말대로 짤릴 때까지 다니니 남들이 보기에는 왜 저렇게 살까? 하겠지만 제 나름대로는 그것이 내가 붙잡은 작은 사역이며 목회였습니다.
목회가 아픈 목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평범한 전도사님들 보다 내게는 약점이 많았기에 교회의 온갖 허드렛일은 다 감당을 하였고 장애자 아들을 끼고 살아가는 제 생활은 누구의 사랑과 긍휼을 얻기 이전에 제 자신이 날마다 더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을 데리고 저녁부터 교회 성전에 엎드렸습니다. 잠이든 아들을 눕혀 놓고 “하나님 우리 모녀를 오늘 천국으로 데려 가 주십시오.”하면서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사실 우는 것이 아니라 통곡을 하였습니다. 새벽 기도를 인도하시려고 연세드신 담임 목사님이 처절하게 울며 기도하는 저를 보시고 가까이 오시더니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주님 여기 이 전도사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하며 간절히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목사님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면 저희 모자는 지금 천국에 가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 중에서도 전라도 여러 지역의 교회에 길을 열어 주셔서 주님이 허락한 장소에서 몸을 던지면서 감당케 하셨습니다. 지금은 전남 광주 변두리에 어떤 젊은 남자 목사님이 목회하셨던 비어 있는 개척 교회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지나 큰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를 복학하여 장애를 가진 동생을 시간이 허락 되는 대로 도와주니 큰 힘이 됩니다. 그 아들 역시 어린 시절을 동생에 치이며 자라서 볼 때마다 미안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잘 자라줘서 큰 위로가 됩니다.
이번에 캐나다 초청을 신청하면서 남들 같이 저는 내세울 사역도 열매도 없습니다. 다만 부끄러운 지난 일들을 안고 있는 저에게 꿈에도 엄두 못 낼 캐나다와 미국 여행을 하는 위로의 시간이 주어진다니, 저를 참여 시킨 것은 아마 숭실교회에서 많이 울면서 살아왔다는 말 그대로 위로하시려고 저를 선택 해 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말이 사역자이지 언제나 맨 뒤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잘해서 어느 교회서 불러주지도 않고 큰 사역을 간증하라고 해도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저 많이 울어서 영산강 물에 내 눈물이 보태 진 것 같은 그런 지난 시간을 가진 저에게 비행기를 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막상 가려고 하니 또 작은 아들이 밟히고 걱정이 되어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는 저에게 큰 아들이 꼭 갔다 오라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분명히 아들이 떠미는데 꼭 예수님이 시키신 것 같았습니다.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고 어른들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길이 그렇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다시 캐나다 여행을 하면서 주님께 새 힘을 달라고 기도 할 것이며, 돌아와서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긴 나머지 사역을 붙잡으려 합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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