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종교성 강화되면 사회 나아질 것”



“종교성 강화되면 사회 나아질 것”, 미국인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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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대다수는 미국 사회에서 종교가 영향력을 잃고 있다고 느끼면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종교성이 강화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은 기독교 전통이 뿌리 깊은 나라여서 종교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가리킨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최근 미 전역의 성인 1535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77%가 “종교가 미국인의 삶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있다”고 응답했다고 30일 밝혔다.

종교의 영향력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1950년대 이래로 가장 부정적인 결과다. 종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응답은 20%에 그쳤다.

이 같은 인식은 교회에 자주 출석하는 사람이나 안 하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개인의 삶에서 종교가 아무리 중요해도 사회적 차원에서 느끼는 종교의 영향력은 약화되는 추세가 뚜렷한 것이다.

이런 추세에는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 동성애와 낙태 옹호론자들이 기세등등해진 세태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기독교적 가치관에 반하는 이슈들이 공공연히 용인되면서 자연히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것이다.

이전 조사를 보면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으로 반전여론이 치솟고 히피문화가 휩쓸던 1969년에도 종교의 영향력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75%로 매우 높았다. 반면 ‘종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응답이 최고치(71%)를 기록했을 때는 2001년 9·11 테러로 미국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던 시기였다. 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초반인 2005년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집권기인 1980년대 등 사회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했을 때 종교의 영향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우세했다.

이번 조사에선 “더 많은 미국인이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사회에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이란 대답이 75%를 차지했다. 종교의 잠재력에 대한 긍정적 견해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의미다. 조사 책임자인 프랭크 뉴포트는 “미국인 대다수가 종교의 영향력이 퇴색한 현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미국보다 긍정적인 편이다. 지난해 11월 불교사회연구소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50.2%가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가했다”고 답했으며, 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로 개신교(43.3%)를 꼽았다.

올해 초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종교생활·의식조사에서도 “개신교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응답은 43.8%를 차지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
 
 
 
 
 

교회음악 Plus


 

교회 안의 찬송은...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흔히 교회음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조건 교회 안에 있다고 교회음악은 아니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과 바른 목적에 맞지 않으면, 이는 교회음악이라 할 수 없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 무분별하게 음악들이 들어 오고 이들이 교회음악으로 자리잡으려고 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교회음악인들이(목회자, 지도자들도) 교회에 대해서 먼저 바로 알고 신앙을 바로 가지고 음악에 대한 선별과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회음악인들은 음악을 알기 전에 먼저 교회에 대하여 그리고 그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한다.
찬양(Praise) 안에는 감사, 감사(Thanks) 안에는 구원, 구원(Salvation) 안에는 십자가, 십자가(Cross) 안에는 보혈, 보혈(Blood of Christ)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Love)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할렐루야!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New Korea Season! (4)


오늘도 주의 나라를 세워가시는 밴쿠버의 모든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오늘도 호흡이 있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하고 여쭤보며 한민족의 통일을 위해 더욱 기도의 끈을 동이는 우리네 삶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주까지 저는 New Korea Season이라는 음성을 듣게 된 초창기 NK100일중보기도의 시간을 회상하면서, NK100일중보기도의 미션을 받았던 북한선교캠프(현재 통일비전캠프로 매해 진행되는 캠프)에서 첫 날 첫 예배 때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 은혜는 2006년 이스라엘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부르셔서 ‘거룩과 기름부으심’의 코드로 ‘한반도 부흥의 키는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고, 열방의 부흥의 키는 한반도가 통일되는 것’이라는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신 하나님의 예비된 은혜였음을 나눴습니다. 이 일이 먼저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NK100일중보기도를 하면서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3) 북한을 위한 100일기도를 시작하라!
  2008년 2월 북한선교캠프에 참석한 첫날 첫 예배에서 저는 지난 두 주에 거쳐 나누었던 감격을 아주 짧은 시간에 온 몸으로 전율하며 받았었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나에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라는 대목에서 2006년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간 것이죠.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찬양의 가사(사 61:1-3)처럼 내게 기름을 부으시는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 된 자에게 주님의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주님의 신원의 날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저는 울고 또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고 그래서 거룩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흐느껴 울며 감격하는 그 때에 또렷한 한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북한을 위한 100일기도를 시작하라!”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흐느껴 울다 말고 저는 바로 질문했습니다. “네? 북한을 위해서 100일기도를요?” 그리고 주님과의 주고받는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은 알겠지만 왜 하필 100일인지 저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예배 중에 계속 물었습니다. “왜 하필 100일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40일도, 21일도 아닌 왜 100일인지 알려주십시오.”
  그렇게 첫날 씨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한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008년 2월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경유했던 중국에서 저는 북한으로 오랫동안 다니시며 사랑으로 선교하시는 한 목사님을 뵙게 되었는데 그 분과 차안에서 주고받았던 아주 짧은 내용이었습니다. 캐나다로 강의가 있어 떠나시는 그 선교사님을 배웅해드리고자 함께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은 혼잣말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정말 큰일이야. 태양절 100주년이니 어쩌니 하면서 북에서는 강성대국 건설한다고 또 우리 힘없는 인민들을 닦달하고 있으니...” 북녘의 백성들을 향한 그 선교사님의 애절한 마음을 금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스쳐들었는데, 글쎄 왜 100일동안 기도해야 하는지 집요하게 묻는 저에게 성령님은 그 차안에서 들었던 내용을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순간 저는 ‘아! 태양절 100주년 때문이었구나!‘ 라고 눈치 챈 다음 대체 태양절 100주년이 언제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태양절 100주년은 아직 5년이나 더 있어야 하는 2012년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 또 따지듯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아니 주님, 태양절 100주년은 2012년이고 지금은 2008년인데 왜 벌써 말씀하십니까?” 그랬더니 주님은 “그들이 태양절 100주년이라고 저렇게 여전히 내 앞에서 목을 곧게 하고 ‘강성대국’(경제강국, 군사강국, 사상강국)을 세운다고 하는데 지금부터 기도해야 하지 않겠니? 내가 저 땅의 우상숭배의 뿌리를 뽑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설득력 있는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일단 100일이라는 기간과 기도를 시작해야 함에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20 장   유산의 공포를 체험한 사람들

 
“유산의 공포”라는 제목을 보면서 산모가 유산을 앞에 놓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말이 아니다. 이 공포는 뱃속에 있는 아이가 경험하는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다.
 
태아는 잉태가 되고 -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 아주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받아먹으면서 또 밖에서 들리는 수 많은 음성과 대화를 이해하면서 자라난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증명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 전에 그 비밀을 알고 태교를 강조한 것이다.
 
종전 칼럼에서도 자세히 설명했지만 「태교 신기」에 이런 말씀이 있다.
 
     임산부가 성낼까 두려우니 분한 일을 들려주지 말고
     임산부가 무서워할까 두려우니 흉한 일을 들려주지 말고
     임산부가 걱정할까 두려우니 어려운 일을 들려주지 말고
     임산부가 놀랄까 두려우니 화급한 일을 들려주지 마라
 
태중의 아기는 엄마의 말은 물론이고 그 생각과 마음까지도 다 이해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능력이다. 뱃속의 아기는 엄마의 유산에 대한 생각과 시도를 다 알고서 결사적으로 엄마를 붙잡고 살아남으려 투쟁을 벌인다. 실제로 인공 유산을 시키려고 기계를 자궁 속에 밀어 넣으면 태아가 최선을 다해서 그 기계를 피해다니는 모습을 과학자들이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엄마가 유산을 생각하고 구체적인 시도를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기에게는 충격 그 이상이다. 지금까지 아기는 엄마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왔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었고, 살 집을 주고, 모든 음식을 공급해 주던 사랑의 엄마가 이제 별안간 돌변해서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배신감은 말할 수도 없다. 피할 방도도 없다. 그냥 좁은 자궁 안에서 그 시련을 견디어 내어야만 한다. 살아나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가 잠시라도 그 아이의 처지가 되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된다. 사람에 대한 모든 신뢰가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그 아이는 계속해서 이렇게 독백을 할 것이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어. 나 혼자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거야.”  그러면서 깊은 우울에 빠져 들어간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대인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그 가까워짐을 받아들이기가 겁이 난다. 그 사람이 꼭 자기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가까워지기 전에 먼저 거부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화장실 숫자만 늘리다 죽은 인생 1.  

 

-  무엇이 되고 싶니? (누런 금메달)

 
 
우리 가정이 선교지로 출발할 때 둘째 아이는 생후 20개월쯤 되었었다. 아들이 자라자 언젠가 나는 다른 아버지들이 하는 것처럼 “너는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니?”라고 물었다. 그 때 5살쯤 된 아들은 스스럼없이 버스 운전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소방차나 대형버스 운전사도 아닌 ‘마슈르트까’.... 마슈르뜨까는 우리가 살던 지역에 12인승 마이크로 버스로 도시의 거점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이었다. 적잖게 실망한 나는 속내를 감추며 “왜 굳이 마슈르뜨까 운전사가 되고 싶니?”라고 물었다. “아빠, 마슈르뜨까 운전사는 돈을 많이 벌잖아요! “아니, 무슨 운전사가 돈을 많이 번다고 그래?” “아빠! 엄마랑 시장 갈 때마다 마슈르뜨까 타는데, 앞 사람이 바구니를 돌리면 차에 탄 모든 사람들이 돈을 담아 운전수에게 건네주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돈을 많이 벌겠어요!”

어쩌다가 목사, 선교사의 아들이 돈을 벌어보겠다고 운전사가 된다는 건지? 나는 그런 작은 꿈 말고 큰 꿈을 꾸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더 큰 꿈을 가지게 할까 생각하던 나는 바로 “얘, 운전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겠니, 아니면 그 버스를 수 십대, 수 백대를 운영하는 버스회사 사장이 돈을 많이 벌겠니?  “아빠, 버스회사도 있어요? 그러면 나는 버스회사 사장될래요. 그래서 돈을 많이 벌래요”

왜 돈타령인지? 이유는 금방 감이 잡혔다. 현지생활 수준에 맞게 생활하다 보니 아들 놈이 좋아하는 장난감 ‘레고’며, 노란 바나나를 사주질 않고 지내다 보니, 아들은 선교사의 가정은 늘 가난해서 그런 것을 부모님이 사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나는 막막하기만 했다.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이 한 창일 때 선교지에서도 응원열기가 대단했다. 아들은 머리에 띠를 띠고 “대한민국, 짜작짝 짝짝!’을 연발하며 드라마틱하게 4강에 올라가는 한국팀을 응원했다. 결국 브라질이 우승을 했다. 브라질 축구팀은 우승컵을 높이 들어 올리며,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아 언더 셔츠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등의 글귀를 새기고 나와 전세계에 하나님을 증거했다.
 
월드컵이 끝나자, 한국에서 선물로 붉은 악마들의 빨간 셔츠가 도착했다. 둘째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말자, 가방을 집어 던지고 붉은 옷을 갈아 입고서, 집 근처에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200미터 트랙을 30바퀴 돌고, 턱걸이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를 불러 축구 골대 앞을 가로 막고 서서는 패널티 킥을 차라는 것이었다. 왜 이러느냐고 묻자, 자기는 거미 손의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래! 브라질 선수들이 하는 것 봤지! 우승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을.” 나는 그래도 아들의 새로운 꿈이 운전사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흥분을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나를 당황케 했다. “아빠! 죄송해요. 전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금메달을 따고 싶어요!” “금메달, 좋지! 그래서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하는 거야?”  “예! 금메달이 얼마나 비싼 되요. 저도 금메달 따서 부자가 되고 싶어요!”.
나는 기가 막혀 “야! 이 녀석아! 브라질 선수들이 목에 건 금메달은 돈으로 따지자면 그 사람들이 받은 연봉에 비하면 껌 값이야!”라고 했지만 연봉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들은 변함없이 누런 금메달이 달러로 얼마나 되는지 집요하게 물었다.
 
안식년을 맞아 한국으로 온 아들은 매일 학교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국학교라곤 다녀 본적이 없어 받아쓰기는 늘 50점을 밑돌았지만, 반에서 골키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아들은 눈치를 살펴 내가 좀 자유롭다 싶으면 나를 놀이터 모래사장으로 불러내곤 했다. 여러 개의 테니스 공을 구석으로 던지면 날렵하게 다이빙을 해 막아내는 훈련을 수 없이 했다. 그래서 집안은 온통 모래투성이였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갈 때 제일 먼저 챙겨 간 것이 축구공과 그리고 모형 우승컵, 골키퍼용 손 장갑이었다. 선교지로 돌아온 후에도 운동장을 뛰는 것과 철봉연습은 매일 빠뜨리지 않는 아들의 일과였다. 그 때까지도 아들에게는 금메달은 인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누런 금송아지로 보였던 것이다.
 
그 해 겨울 방학을 맞아 나는 가족을 태우고 먼 사역지로 운전하여 가고 있었다. 새벽에 출발한 차는 20여 시간 운전을 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스텝지역과 사막을. 좁은 승용차에서 지루해 지기 시작하자 무료함과 졸음을 깨우기 나는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카세트를 꽂았다. ‘샘물 호스피스’ 원장인 원주희 목사의 강의 테이프였다. 틀자마자 거기엔 기막힌 이야기 하나가 소개되었다.
 
샘물 호스피스에 중년의 여성 말기암 환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원장은 이 여성에게 “이제는 마지막을 준비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자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악을 쓰면서 “나는 못 죽어요! 어떤 X 좋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악에 받친 대답에 놀란 원장이 차근차근 그 여인의 지난 삶을 캐물어 보았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필객의 붓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홈통을 타고 흐르는 빗물소리에 새벽을 맞는 동네가 물 위에 둥둥 떠있는 느낌입니다. 빗물에 번지는 포근한 불빛 앞으로 분사되는 투명한 빗방울을 보고 있으니 새벽 하늘이 흘린 눈부신 비늘이 땅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몇 일째 내리는 비에 부쩍 우거지고 푸르러진 풀과 나무들처럼, 지붕아래 깃든 인간들도 저 맑은 물에 씻겨 탁해진 영혼이 맑아지고 어두워진 총명이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나누며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각자의 담장에 갇혀 마음에 짓눌리고 힘들어하지 않고 살 수 있을텐데, 이웃의 얼굴도 잘 모르고 살 정도로 우리는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갑니다. 관계에서 단절되면서 사람들이 점점 이상 성격으로 변해가고 있고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허리가 휠 정도로 무거운 죄짐을 지고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도 없이는 정신을 가눌 수 없어 늘 기도를 갈망하면서도 막상 기도하려 앉으면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광야에 표류하여 어디로 방향을 잡고 발을 떼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무엇부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늘 난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할까를 물어 우리 주님께서 기도의 본을 남겨주셨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접했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친구를 따라 갔던 여름 성경학교에서 받은 책받침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 사진 옆에 쓰여진 주기도문을 통해서입니다. 그 이전에 단 한번도 교회에 가본 적 없는 나였지만 그 말들은 세상의 언어와는 다른 신성한 기운과 함부로 할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미신적인 분위기에서 삼재나 액땜이나 부적이란 말을 들으며 귀신을 무서워하며 살던 나에게는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말이 무척 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악이란 알아갈수록, 살아갈수록 더욱 악하고 잔인하고 몸서리쳐지도록 무서운 것임을 깨닫습니다.
 
죄를 심상히 여기며 웬만한 죄는 죄로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서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죄를 싸고 있는 포장이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워 아이들은 죄악의 형상을 흠모하면서 자라납니다.
남자 아이들이 귀를 여러개를 뚫고 화장을 하고 눈을 그리기까지 하는 것이 이제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여자들까지 문신을 하고 야한 옷과 음란한 몸놀림을 하는 것이 별 거부감 없이 먹혀들어가고 있고, 욕이 아니면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아이들의 언어가 망가져있습니다. 노골적인 폭력과 음란의 문화에 쩔어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반항으로 눈빛이 날카로우면서도 총명의 빛이 어두워져 게슴츠레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게임을 끊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말고 노래를 듣지 말라고 하면 ‘그럼 나보고 죽으란 말인가’ 하는 얼굴로 뜨악해합니다. 어른들마저 죄도 짓지 않고 심심하고 따분해서 어떻게 사는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재미가 없을 것이라 동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양식은 쾌락이나 재미가 아닌 진리와 거룩함입니다.
 
성경을 19금의 책으로 하는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서명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쓴, 성경을 폄하하고 비방하는 글을 읽으면서 정말 마지막 때의 징후 중 가장 뚜렷한 징후를 보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나쁜 쪽으로 부각시키며 일리(?)가 있게 써놓았는지,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합니다. 세상에 악이 충만하다는 성경의 표현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합니다. 도대체 세상이 어때서..?  이 편한 세상.. 이 아름다운 세상.. 이라는 긍정의 문구에 익숙하며 아직도 세상은 나쁜 사람들보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으며 갖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도 많은,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극단적이고 광신적이며 혐오스러운 표현이라고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과격한 표현들을 피하고 슬그머니 긍정의 언어들과 섞어 그 의미들을 누그러뜨렸습니다.
이 세상 신은 사람들을 욕망으로 충동질해서 악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들면 사람들은 그 어떤 지혜의 말이나 눈물의 호소로도 설득할 수 없을 정도로 미련해지고 앞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결국 죄는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키고 신의 성품을 썩음으로 오염시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음이 악이요 고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음이 바로 악인 것이고 고통입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제는 좀 됐나 싶으면 여지 없이 나의 허물과 죄가 나옵니다. 양파껍질 처럼 죄와 허물과 더러움과 부끄러움은 까도까도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내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죄악을 멈출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영이 내 생명의 주체가 되시기에 더이상 죄가 나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오늘도 예수님의 한없이 온유하고 평온한 음성이 나를 너무나 영광스러운 은혜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허무로 짙은 그림자 나라에서 시간에 허덕이며 사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이지만, 오늘도 예수님의 영이 나를 악에서 건져주시며 성령님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를 덮으시라는, 과감한 기도를 하늘로 쏘아 올립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건강 칼럼



 
 
 
 
 
 
 

養生 十六宜  (2)

 
5. 齒宜常叩 (치의상고)
이를 강하게 하고 잇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이를 자주 맞부딪힌다. 이를 가볍게 탁탁 부딪치면 이와 잇몸이 튼튼해진다. 위아래의 이를 서로 부딪쳐서 소리가 나도록 하는데, 먼저 어금니를 하고 다음 앞니를 한다. 각각 18번씩 한다. 아침 저녁으로 할 수 있다.

6. 舌宜舔顎 (설의첨악)
혀로 자주 입천장을 핧는다. 혀로 입천장 여기저기를 핧으면 혀 안에서 침이 생겨 입이나 혀가 마르지 않고, 아울러 소화도 잘 된다. 혀끝으로 입천장에 대고 전후좌우로 침이 고일 때가지 핧는다.

7. 津宜數咽 (진의삭인)

침을 자주 삼킨다. 침을 자주 삼키면 오장의 기능을 도와서 건강해진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핧은 뒤 입을 부풀려 침을 입안에서 양치질하듯이 머금었다 꿀꺽꿀꺽 소리를 내면서 삼키는데 마음속으로 배꼽 아래 단전으로 내려 보낸다고 생각한다.

8. 濁宜常呵 (탁의상가)

탁한 기운을 자주 내 뱉는다. 기를 원활하게 소통시킴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은 것을 없애준다. 입을 다물고 코로 깊게 숨을 들이쉬어 가슴과 배가 불룩하게 솟아 숨이 가득 들어차면 꾹 참고 멈추었다가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려 탁한 기를 단숨에 내뱉는다. 이처럼 맑은 기운을 들이마시고 탁한 기운을 내뱉는 것을 5~7번씩 반복한다.

9. 大小便宜緊口勿言 (대소변의긴구물언)

대소변을 볼 때 입을 꼭 다문다. 아래위가 마창나게 뚫린 상태로 두면 기가 빠져나가 허한 상태가 되기 쉽다.

10. 腹宜常摩 (복의상마)

배를 자주 쓰다듬는다. 소화기능을 돕고 배를 따뜻하게 하며, 기가 제대로 돌고 쌓인 것을 풀어줄 수 있다. 두 손을 비벼 뜨거워지면 손을 포개서 살에 직접 닿거나 속옷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의 한가운데를 배꼽에 댄 다음 시계방향으로 돌리면서 문지른다. 먼저 작은 원을 돌리다 점점 크게 돌린다.

11. 谷道宜常提 (곡도의상제)

항문을 자주 오므려 올린다. 기운을 끌어올리고 치질과 요실금을 예방할 수 있으며 젊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몸을 똑바로 세워 앉은 다음 정신을 몰두하고 숨을 돌이쉬면서 의도적으로 항문과 회음 부위를 오므리면서 올렸다 잠시 멈추고 숨을 내쉬면서 힘을 빼는데 수시로 하면 좋다.

12. 足心宜常擦 (족심의상찰)

발바닥을 자주 비빈다. 발바닥의 위쪽 1/3오목한 부분 한가운데는 용천혈이 있는 곳인데 항상 문지르면 신(腎)장을 튼튼하게 하고, 허리가 강해지며, 스트레스로 화(火)를 끌어내리고 정신을 맑게 한다. 저녁에 발을 씻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양쪽 발바닥을 천천히 문지르는데 뜨거워질 때까지 문지르고 50번 이상 문지른다.

13. 衣膚宜常乾浴 (의부의상건욕)

살갗을 자주 문지른다. 살갗을 맨손이나 부드러운 마른 수건으로 문지르면 기혈순환을 도와주고 살결이 윤기 있어지고 탄력이 좋아진다. 두 손바닥으로 온 몸의 살결을 닦듯이 문지른다. 외기로부터 외사를 방어하는 위기가 강하게 하면 감기와 피부병을 방지 할 수 있다.

14. 肢節宜常搖 (지절의상요)

등을 대고 누워서 팔다리를 들고 자주 흔들어 준다. 사지는 제양지본이고 이 운동을 자주함으로 손발의 붓기를 내리게 할 수 있다.

15. 背宜常暖 (배의상난)

등을 따뜻하게 한다. 오장육부의 배수혈을 포함하는 12경락 중 방광경 1,2라인이 있기 때문에 따뜻하게 함으로 기혈의 순환을 돕고 감기를 예방하기 위함이다.

16. 胸宜常護 (흉의상호)

가슴을 드러내지 않고 보호한다. 주요 장기인 폐장, 심장, 간장을 보호하고 외사로 한기로부터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클로버데일한인교회 담임 / 엘림한방클리닉 원장 R.Ac, TCM.P / 604-441-6934]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사회적 복음

얼마 전 한 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무엇입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흔히들 언급하는 대형 교회들의 재정 투명성의 문제점을 지적할까요? 아니면 목회자의 세습 문제를 이야기 할까요? 요즘 밴쿠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몇 몇 선교단체들의 자기만족의 함정에 빠져버린 잘못된 선교전략을 들 수도 있고, 지나치게 은사의 체험에만 집중하는 흐름을 우려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이라고 꼽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복음의 선포와 선교를 이야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며 왜 ‘사회적 복음’이 한국교회에 부족한 점이냐고 반론할 수 도 있겠습니다. 저 자신도 목사이지만 강단에서 선포되는 목회자의 메시지를 분류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비중으로 Social Gospel이 선포되고 있습니까? 혹시 선포되는 복음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개인 영혼의 구원에서 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안겨 주신 그 거룩한 복음의 선물을 반토막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성도 분들을 만나 대화하다 보면 생각 외로 많은 분들이 ‘사회적 복음’에 대해 낯설어 한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분께는 사회적 복음을 두고 ‘좌익이냐?’‘빨갱이 아니냐?’ 라는 말까지 들은 적도 있습니다. ‘사회적 복음’을 따로 특별하게 포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경계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뜻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이요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가 바로 사회적 복음입니다. 의미를 조금 좁혀보자면, ‘정의(Justice)’가 되겠고 공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중요성은 구약의 선지서를 통해서 얼마나 강조되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모스서 5장 21-23절에 이런 말씀이 선포됩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절기와 성회도 넓게 보아 예배를 뜻함이고, 번제나 소제도 예배를 말함입니다. 어떤 분은 화목제를 감사의 예물이니, 감사헌금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감사예배’라고 하고 싶습니다. 노랫소리와 비파소리는 당연히 찬양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찬양을 듣지 아니하시겠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어지는 24절의 당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우리가 사회적 정의를 지키지 않고 공의를 어기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도 듣지 않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뿐입니까? 5절에서 언급되는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의 예배 중심지였습니다. 주로 이스라엘의 부유한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명예로운 자들이 나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역시 곧이어 이유가 밝혀집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들에게 정의가 없고 공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회적 복음’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않으시겠다고 하실 때는,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해서, 찬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정의와 공의를 지키지 않아서 입니다.
사회적 복음에 부딪히는 간단한 예를 한 번 들어보자면, 우리 삶에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 중 ‘주일성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 밴쿠버에서 주일성수는 엄격한 주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주일성수 못하는 성도를 정죄해 본적은 없습니다만, 그것은 신앙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주일성수가 중요하지 않아서는 아닙니다. 그런데 소수의 몇몇 분들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는 열어서 직원들을 시켜서 운영하고 자신은 예배에 참석하여 주일성수 한다고 하는 것을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일성수 하는 것일까요?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예배드리지 않는 것보다는 예배드리는 것이 낫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 복음의 측면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이 주일을 온전히 지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될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돈을 주며 예배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이지, 죄를 줄이고 위선으로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를 의롭다 하신 것도 같은 원리 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실 때는 자신 만이 아니라, 가족과 일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머무는 손님까지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나만 혼자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구원 받았으니 다른 이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 이유인데, 그 동일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진 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저 사람을 내가 가진 것이 많다고, 힘이 조금 더 있다고 핍박하고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나만 홀로 구원받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구원받고 더불어 잘 살아 가는 것,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사회적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충성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용균 목사 / 밴쿠버한마음교회 / 778-554-9003]
 
 
 
 
 

아브라함 이야기



문제, 해결 그리고 신앙고백/ 창 24:2-9 (하)

맹세의 내용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과 족속에게로 가서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을 맹세하라고 하였습니다 (창 24:4). 아브라함의 원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란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겼기 때문에, 훗날 아브라함의 종은 갈대아 우르가 아닌 하란으로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시키는 대로 맹세를 한 후, 아브라함의 종은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일에 대비하여 질문을 합니다. 즉, 만약에 자신이 택한 신부감이 가나안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삭을 데리고 하란으로 가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는 아브라함과 종과의 대화를 통해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천지의 주재이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3절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여기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땅과 하늘을 지으신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는 종으로 하여금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게 맹세하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종에게만 그런 맹세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미 오래 전에 소돔 왕에게 똑같은 맹세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창14:22). 이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이 가식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능력은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과 거룩함에서 비롯됩니다.
2. 불러주시고 소명을 주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7절에 상반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종에게 고백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이것은 욕심과 고집대로 살아가던 나를 불러주셨을 뿐 아니라 살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고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바로 천지와 우주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진화론은 우연을 믿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필연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처럼, 오늘 우리가 신앙인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인으로 견고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3. 약속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7절 하반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는 것은 마지막 시험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창 22:16). 여기서 맹세란 반드시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을 불러주시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에,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다시 한 번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7절).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사자가 너를 인도하지 않아, 신부감으로 정한 여자가 가나안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삭을 데리고 가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나를 불러주셨고, 말씀하셨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부모 공경을 통한 장수의 약속과, 주일성수를 통한 평안의 약속과, 기도를 통한 응답의 약속과, 십일조를 통한 축복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믿고 고백하고 순종함으로 범사의 복을 누렸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고백,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범사가 잘 되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41 >



 
 
 

666 이야기(6)  로마교황의 축복과 저주 ④

 
 



61. 1982년 9월, 모나코의『그레이스』왕비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이 사고가 있기 약 2년 전 왕과 왕비는 로마에서 홍보영화 촬영을 하는 동안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62. 1984년 5월, 로마교황『요한 바오로』2세는『파푸아 뉴기니아』를 방문,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뉴 브리턴』섬의『물루웨이』화산이 분출하여 섬주민들은 대피하였고 1985년에는 집단강간 살인, 강도 등의 폭력사건이 온 섬에 만연하였다. 1986년『소매어』는『윙티』에 의해 축출되었다. 
63. 1984년 5월, 로마교황은『과달카날』과『호니아라』를 방문, 『솔로몬』군도(群島)를 축복하였고, 아울러 인근『피지』와『바노트』섬에서 온 방문자들도 축복하였다. 1985년 1월『에릭』이라 불려진 태풍과 3일 후『니켈』이라 명명된 태풍이 섬들을 강타하였다. 특히『피지』와『바노트』에 있는 가옥과 농장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86년 3월, 태풍『나무』는『솔로몬』군도를 황폐케 만들었고, 섬주민의 절반이 집을 잃었고, 계속하여『시카이나』,『말라이타』,『과달카날』,『산 크리스토벨』섬들을 강타하였다.
64. 1985년 8월 13일 로마교황은 아프리카『카메룬』국의『보멘다』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야외미사를 가졌다. 1년 후 화산호(湖)인『니요스』호수에서 독가스가 분출되어『보멘다』시의 외곽지대의 촌락들에서만 2천 여 명이 사망하였고, 짐승^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65. 1986년 11월 22일, 로마교황은『랭』수상이 이끄는 뉴질랜드를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다. 1989년 8월, 『랭』수상은 더 이상 정치적 압력을 견디다 못해 사임하였다. 비록 그가 속한 당이 1987년 8월 선거에서 이겼지만 그에 대한 개인적인 추문은 그를 계속 괴롭혔다. 
66. 1986년 11월 25일, 뉴질랜드 야당 당수였던『하워드』는 의회에서 로마교황을 환영하였다. 그의 환영연설문 중 일부를 발취해보자: “(로마)교황께서는 이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기독교인으로서 이 곳을 방문하셨습니다…우리는 당신을 교회의 가장 추앙받는 위대한 지도자로서 환영합니다…기독교신앙의 최고 멤버로서 말입니다…!” 『하워드』는 1988년 총선에서 패배 당한 후 자유당 당수직에서 밀려났다.
67. 1986년 11월 26일, 『제프 커넽』은 자신이 비록 로마카톨릭교도가 아닐지라도『플레밍톤』경마장에서 로마교황 집전하는 미사에 참가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로마교황을 만났다. 1989년『커넽』은 빅토리아에 있었던 선거에서 패배, 6개월 후 자유당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68. 1986년 11월 26일, 『뉴 사우스 웨일즈』의 수상『언스워스』는 시드니에서 로마교황을 영접하였다. 호주노동당은 1988년 선거에서 패배하고『언스워스』는 실각하였다.
69. 1986년 12월 1일, 호주의 재벌『알란 본드』는『퍼트』에서 로마교황을 영접하여 무릎을 꿇고 교황의 반지에 입맞춘 후 개별적으로 교황과 면담을 가졌다. 그 후 그의 사업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호주의 방송심의위는『본드』가 방송면허를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판결하였고, 그의 재정상태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70. 1987년 로마교황이 미국을 떠난 지 한 달이 채 못되어『월』가(街, Wall Street)의 엄청난 주가폭락에 온 세계는 “검은 월요일”(Black Monday)을 맞았고, 미국은 로마교황『요한 바오로』2세가 준 축복의 사태에 깔려 휘청거렸다. 

아마도 1,700년 동안 로마교황(청)의 축복을 받고 망한 사람들을 계수한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두 번이나 로마교황의 축복을 받은 한국, 그가 떠난 후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를 만난 교계 지도자들에게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슈퍼스타”, “날으는 교황”의 별명이 붙은 이 교황은 지구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축복하고 있다(역대 로마교황들은 거의 로마를 떠나지 않고 죽었다). 그의 발이 닿는 곳은 곧 재난을 동반하였으며 이것은 온 세상에 임할 재앙을 우리들에게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교황의 축복이 재앙을 동반한다면 그의 저주는 응당 축복을 가져올 것이다.
▣ 로마교황『비오』9세는 이탈리아의 해방자였던『빅토르 엠마누엘』왕을 저주하였다. 또 이탈리아를 자유국으로 만들고 로마를 그 수도로 선포한 이탈리아 정부를 저주하였다. 로마교황의 저주로 이탈리아는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었지만, 이디오피아를 정복하러 떠나던 이탈리아 군을 로마교황이 축복한 후부터 이탈리아 제국은 다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가리발디』는 그의 모든 애국적인 노력 때문에 로마교황으로부터 파면되었다. 특히『시실리』왕국을 전복시켰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었고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들이 여기저기에 세워졌다.

▣『비스마르크』와 프러시아왕이『제수이트』(일명 예수회)사제들을 추방했을 때 로마교황은 프러시아를 저주하였다. 로마교황의 저주는 축복이 되어 프러시아는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하였고, 어느 날 그 지도자가 로마교황과의 친교관계를 맺는 불운이 오기 전까지 수년간 서유럽 최강의 제국으로 군림하였다.

▣『헨리』8세와『엘리자베스』여왕에게 내린 로마교황의 저주는 영국에 큰 축복이 되었다. 반대로 아일랜드에 내려진 로마교황의 축복은 아일랜드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마틴 루터』가 로마교황『레오』10세로부터 받은 저주로 인해 온 세계의 기독교회가 누려온 축복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엄히 말씀하시고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말라기 2:2)
하나님께서는 대원군을 일으키시고 프랑스 군함에 실려오는 로마카톨릭교의 세력을 막게 된 바, 한국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로마화(化)되는 것을 막아주셨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로마종교가 들어간 나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오늘 날 로마종교와의 일치운동에 빠져있는 한국교회의 낭만적인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받을 저주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이들이 짓는 죄악은 무겁고 분명한 진리인 바, 이 진리가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침통하고 슬픈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羊)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게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7:15-20)
 
      성부 하나님께 영광 성자 예수께 영광
      성령님께 크신 영광 돌려보낼지어다
      찬양하리 찬양하리 죽임 당한 어린양
      주께 영광 돌리어라 나의 죄를 씻어 주셨네
      <찬198 / 정결하게 하는 샘이⑤>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 알려드립니다 ◇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필자의 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7월에 다시 연재될 예정입니다.【편집인】
 
 
 
 
 

건강 칼럼



 
  

養生 十六宜

 
우리는 종종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고들 말한다. 우리의 살고 죽는 것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육신을 건강하게 잘 관리할 임무 또한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의 영혼은 육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육신 또한 강건 하기를 늘 간구하신다.(요한3 1:2) 예수님께서도 이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마 9:3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과 심신이 온전히 거룩하며, 영과 혼과 몸이 마지막 날까지 흠 없게 보전되기 원하신다.
 
의료인들이 행하는 의료행위의 최종 목적은 사람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더는 병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우리의 육신을 얼마나 잘관리하고 있는가? 병이 나면 치료에 열심을 다하는 것보다 먼저 병의 예방에 신경을 써야 하는것이 치료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예방이 최선의 치료라고들 말하는 것이다. 옛날부터 건강하게 장수한 사람들은 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양생(養生 보건위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실천 하였다. 한의학의 고전, 황제내경의 소문편에 보면 모든 질병을 막는 예방의 근간은 양생을 전제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양생에 좋은 16가지 방법(養生十六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방법들은 명나라의 냉겸이 <수령요지>에서 당나라의 명의, 손사막이 쓴것을 정리하고 보충하여 만든 양생에 좋은 일상생활관리법이다. 필자는 독자들이 이 방법을 반복적으로 시도함으로 각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질병을 방어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 방법을 소개한다.
 
養生 十六宜
1. 面宜多擦(면의다찰) - 얼굴을 자주 문지른다.
두 손을 비비어 열이 나면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세수하듯이 문지른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수십 번씩 꾸준히 하면 주름살을 펴주고, 얼굴에 윤기가 돌면서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가 있다.
 
2. 髮宜常琉(발의상류) - 머리를 자주 빗는다.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빗질하듯이 긁어 내리는데 앞에서 뒤로 또는 옆으로 수 십번 빗는다. 머리를 자주 빗으면 스트레스로 울체된 기를 풀어주어 풍(風)을 몰아내고 상기된 화(火)를 내려준다. 또 눈을 밝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한다.
 
3. 目宜常運(목의상운) - 눈을 자주 돌린다.
눈동자를 천천히 돌리는데, 왼쪽으로부터 시작하여 위, 오른쪽, 아래 및 제자리의 순서로 15번 정도 한 다음, 방향을 바꾸어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위, 왼쪽, 아래 및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서에 따라 15번 정도를 한다. 마지막으로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뜬다. 눈동자를 자주 돌리면 눈에 총기가 있고, 시력이 떨어지는 것을 예방한다.
 
4. 耳宜常彈(이의상탄) - 귀를 자주 튕겨준다.
두 손바닥으로 양쪽 귀를 꽉 막은 뒤에 손가락을 뒤통수에 대놓고 집게손가락을 가운데손가락 위에 얹고 나서 힘껏 미끄러져 내리면서 가볍게 뒤통수를 퉁겨 퉁퉁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한다. 10번씩 퉁기고 나서 손바닥을 귀에서 떼었다 다시 하기를 3~4번 반복한다. 뇌를 건강하게 하고, 귀가 밝아지는 효과가 있어 어지럼증이나 이명증을 예방할 수 있다.    <다음 주 계속>
 
 
[클로버데일한인교회 담임 / 엘림한방클리닉 원장 R.Ac, TCM.P / 604-441-6934]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왜곡(distortion)과 극단(extreme)


요즘 신문기사를 보니 일본의 역사왜곡이 심각한 듯 합니다. 식민지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위안부를 정당화 하려는 움직임까지 구체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주변 국가들뿐 아니라 우방국들의 염려를 자아내게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왜곡의 현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일본국민 대다수 의견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노린, 현 아베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계 극우세력들의 꼼수가 만들어 낸 작품인 것 같습니다. 이른바 우익세력의 세를 결집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려는 꼼수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일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국내에서는 최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의 특수부대가 남파되어 선동한 폭동이라는 왜곡된 내용이 종편방송을 통해 방송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미 평가되어 국가적 기념일로까지 제정된 분명한 사실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참으로 안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방영한 채널이 한국의 우익성향을 대표하는 언론사가 사주로 있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반면,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전쟁이 남측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는 소설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극좌파의 성향을 가진 분들의 입에서 종종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 이 또한 터무니없는 심각한 왜곡이지요.
 
우파든 좌파든, 어느 사회에나 두 부류는 공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 발전적 견제의 관계성으로 사회 전체에 공동의 유익을 도출해 낸다면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는 극우나 극좌의 성향입니다. 저들의 특징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사상을 절대화하여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는 정도를 넘어 사실로 드러난 정황까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사상의 옷을 입혀 왜곡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몇가지 예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으로 치닫을 때, 우리 신앙은 왜곡된 모습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안에 신비한 현상을 인정하고 기대하는 것은 좋으나, ‘신비주의’는 문제입니다.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좋으나, ‘은사주의’는 문제입니다. 종말을 고대하고 기도하는 것은 좋으나, ‘종말주의’는 문제입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극단주의적 신앙의 색깔들을 주의하고 배척하는 성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단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성교회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자극적인 극단에 사람들이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왜곡’은 ‘극단’에 따라오는 필수적 결과물입니다.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믿고 싶은 것을 믿지 말고, 믿어야 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파도, 좌파도 아닌 주(主)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문경돈 목사 / 나무십자가한인교회 / 778-772-4738]

아브라함 이야기



문제, 해결 그리고 신앙고백/ 창 24:2-9 (상)

 
아브라함의 범사에 복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노쇠하게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복은 내가 애써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아브라함의 문제, 하나님의 해결 방법, 그리고 종의 맹세 속에 드러난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를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제 1 온전히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그에게 3가지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자손과 땅과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창 12:1). 하지만 약 6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 하나 뿐이었습니다. 사실 이삭을 얻은 것만도 기적 중의 기적이었지만, 원래 하나님은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지 이삭 하나만 주시기로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와 비교한다면 이삭은 정말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문제 2 아브라함의 노쇠함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 자신이 죽기 전에 이삭의 아내를 구해 이삭과 결혼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삭의 신부를 구하러 다니기에는 아브라함이 이미 너무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는 커녕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것도 제대로 간수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해결 1 신실한 종을 세우심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신실한 종을 허락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범사에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2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하여 신실한 종을 세우시므로 이제까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모든 복을 유지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한 이삭의 결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약해진 것을 이용하여, 그의 종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이 실현될 수 있도록, 미리 아브라함에게 신실한 종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이처럼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과의 만남이 서로에게 복된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해결 2 종으로 맹세하게 하심
하나님께서 늙은 자신을 대신해서 약속을 성취하도록 자신의 종을 세우신 것을 깨달은 아브라함은 먼저 종에게 맹
세를 하도록 합니다. 2절에 보면,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미국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면서 성경 위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허벅지는 히브리어로 “예레키” (y§reœk≈ˆî)라고 하는데 “넓적다리 혹은 허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허벅지 밑으로 넣었을 때, 손이 “생식기관”에 닿기 때문에 이 말은 “생식기관”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성한 맹세” 즉, 거룩한 하나님의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는 엄숙한 맹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아브라함과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으므로 “생식기관”을 “언약의 표시”가 있는 “거룩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며, 지금 아브라함의  종이 하려고 하는 일은 자손의 번성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에는 맹세의 내용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시험에 들게 마옵시며

 
우리 집에서 하이웨이로 나가는 길목에는 몇 년 전 사고를 당한 사람을 위해 유가족들이 가져다 놓은 촛불과 꽃과 인형과 사진들이 놓여있습니다. 사고를 당한지 벌써 몇 해를 넘기고 있는데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곳을 방문하는 모양으로, 맑은 날은 물론이고 비가 오는 춥고 어두운 겨울에도 우산을 받쳐들고 촛불을 켜는 모습을 자주 보았더랬습니다. 그곳은 생의 소음과 욕망과 속도로 들끓고 있는 이생에서 벗어난 진공의 공간처럼 마음에 어지럽던 생각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쾌락과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세속의 거센 바람이 힘을 잃고 멎어버리는 곳 같습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생의 마지막에서도 여전히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너무도 짧고 기약이 없는데 마치 살아있는 날들이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생명을 소홀히 하거나 사랑하는 일을 미루지 말아야 함을 다짐하면서, 아직 나에게 회복할 기회가 있고 생명을 실현할 기회들이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나 뿐 아니라 그곳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생에 대한 실망감을 이겨내고 살아갈 용기를 얻고,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등의 선한 역사들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애통의 자리, 세상에서 가장 아픈 저 자리에서는 아무도 마음을 높일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시험에 들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시험의 대부분이 판단의 문제로 사단은 교묘하게 인간의 생각 안에 자기 의를 넣어주고 그 기준에 못미치는 사람들을 실랄하게 판단하게 하며 분열시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 인터넷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가나안 성도라고 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교회 안에서 시험 든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인간 관계에 말려들기 싫고 부담을 피하고 언제든 자신이 편한 시간에 자신이 편한 방식으로 믿는 장점이 있다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종교가 아니라 관계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체험을 통한 앎임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그런 식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유명 설교가들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유익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식으로 뭔가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목사님들의 말씀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위험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예배를 위한 섬김과 헌신과 성도의 교제를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세상과 분리되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서로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을 선하고 아름답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영생의 복을 명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인간적인 체온을 부비며 함께 울고 웃고 갈등하고 부딪히며 온전해지는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혼자는 활활 타오를지 모르지만 거울 속의 불처럼 죄악과 탐욕의 먼지 하나도 사를 수 없는 가짜 불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영이 아니라 육으로 흐르기 쉽고 그들이 추구하는 사랑과 진리가 실재가 아니라 피상이고 허구가 되기 쉽습니다. 예배는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한 남편에게 속한 아내처럼 한 교회에 속하여 그곳에서 견디고 깍이고 깊어지고 사랑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바람난 여인처럼 여기저기 떠돌다보면 결국 자신의 신앙이 시큰둥해지고 판단의 정신이 굳어져 어딜가나 쉽게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율법의 요약은 정죄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첫째 속성은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에서 참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참는 것은 억울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할 말 다하고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지 않는 이 세대가 맺은 열매는 분열과 거역과 폭력과 불순종의 고통으로 가정과 직장, 인간 관계들이 상처와 눈물로 얼룩져 있습니다.
 
금지옥엽으로 기른 소중한 딸을 시집보내면서,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을 말하며 그 집안의 진정한 가족이 되게 했던 옛 어른들의 지혜를 생각하면, 영생을 같이할 교회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평생을 생각 없는 자처럼, 말을 못하는 자처럼, 보지 못하는 자처럼 살아도 가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시험은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무경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마음 안에 있습니다. 같은 상황을 지나가도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니라 성숙의 기회로 바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이 신실하고 겸손한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판단이 급한 사람치고 지혜가 많은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속이 정리가 안되고 불안에 쌓인 사람일수록 남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판단합니다.
 
죽은 이의 생일이었는지 축하 풍선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습니다. 유가족들의 진지한 사랑과 기림의 행위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교회 안에 저런 절절한 실재가 되어, 주님 오시는 날까지 더욱 깊이 사랑하고 용납하며 크고 작은 시험들을 이겨내는 굳건한 교회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내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니 (2편)

 
“안나 할머니에게 부탁해 놓을 테니 한글을 배워보세요.” 차로 태워다 드리고 돌아왔다.
반 년이 지났을 즈음의 일이다. 교회 개척의 핵심이던 안나 할머니와 또 다른 성도 간에 다툼이있어 교회가 평온칠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안나 할머니는 젊은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면박을 주었다며 용서를 못한다며 감정 섞인 말을 토하고 다녔다. 조용히 불러 성숙한 분들이 좀 품으라고 했더니 자기는 다시는 그 사람 얼굴을 안 보겠다고 역정을 냈다. “사람의 힘으로는 용서가 안되니 기도하는 길 밖에 없다.”라며 달이 훤히 뜬 사막 한 가운데로 기도하러 가자고 모시고 갔다. 물론 안나의 그림자 같은 슈라 할머니도 따라 나섰다. 마침 대보름이라 달이 훤히 비취는 사막에서 우리는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개인기도 시간을 가지는데 안나 할머니가 대성방곡을 했다. 기도가 끝나고 용서할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하늘의 헤아릴 수 없는 별들과, 이 사막의 모래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모래 하나만도 못한 나를 용서하셨는데,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겠냐”고 눈물을 닦았다.
 
그 일 이후에, 두 달이 못되어 다시 분란이 나고 말았다. 이제 남들 보기도 부끄러우니 교회를 안나오겠다는 것이다. 용서해야 한다고 내가 간곡히 권면을 하는 데도 안나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슈라 할머니가 가만히 들고 있던 한국어 성경책을 열더니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주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성경에도 이렇게 사랑하라고 쓰여 있잖아요. 안나, 하나님 말씀대로 용서하세요!”

나는 눈과 귀를 의심했다. 몇 달 전 까지 글을 읽지 못하던 할머니가 한글성경을 줄줄이 토씨 하니 안 틀리고 읽어 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거의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니,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슈라 할머니, 그 사이에 한글을 뗀 것입니까?” “예, 안나가 얼마 동안 읽는 법을 가르쳐 줘서 한글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안나할머니도 슈라가 읽는 ‘사랑장’에 감동을 받았는지 자기의 좁은 마음을 위해 기도해 달라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어느 날 슈라가 나에게 찾아와 자신이 집안살림을 돕겠다는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물었더니 죽은 자기 아들과 내가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죽은 아들에게는 해 주고 싶어도 못하고, 나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니 자신이 수발을 하겠다는 것이다. 추방되었다가 돌아오면서 수도에 가족을 두고 사역지를 오가는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식사와 빨래였다. 게다가 교회 안에 있는 사택은 늘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치질 않았다. 응답이다 생각하여 허락을 했다. 슈라는 새벽에 일어나 넓은 예배당 정원을 안팎으로 돌봤다. 밭일에 이골이 난 사람인지라 손이 가는 모든 곳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갔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슈라에게 ‘황금의 손’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사택이며 예배당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정돈 하고, 틈이 나면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교회에 드나드는 고아들 몇 명을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자신의 어릴 적 처지를 생각해서 인지 턱없이 부족한 자신의 연금으로 그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었다. 교회는 늘 배고픈 이들로 들끓었다. 많은 부분이 슈라의 부담이었다. 고아들 중 하나인 알료샤에게 특별한 사랑을 주었다. 갓 대학에 들어간 알료사는 슈라에게 러시아철자법과 읽는 법을 가르쳤다. 슈라의 손에 쥐여진 러시아어 성경은 점점 손 때가 묻어 가더니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 4시 30분에 예배당으로 가서 문을 열고, 5시 새벽기도회 준비를 마치고 혼자 기도를 시작한다. 저녁이면 9시에 예배당으로 나가 한 시간 반 기도를 하고 돌아와서 어김없이 내 잠자리를 봐 주고, 머리맡에 차주전자와 찻잔을 가져다 놓았다. 교회의 청소는 슈라의 몫이 되었다. 농아교회 개척초기 좌변기에 물을 내리는 법을 몰라 뒷일을 보고 그냥 달아나 버리면 뒷정리는 슈라의 연단 거리였다. 자신도 모르게 역정을 내고 불평을 터뜨리면 내가 나가 조용히 뒷처리를 하곤 했다. 그러면 슈라는 “목사님은 더럽지도 않습니까? 화장실 막힌 것을 치우자면?” 나는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슈라할머니, 성숙한 사람이 섬기는 법이랍니다!”
몇 개월이 지나 성탄절과 연말이 가까워 오자 수도에 있던 아내와 아이들이 교회로 내려와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친할머니처럼 슈라를 따랐다. 아내는 교회의 성탄선물을 준비하면서 특별히 슈라할머니에게 겨울코드 한 벌을 선물했다. 곱게 포장을 해서 슈라할머니 침실에 넣어 놓았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누군가 본당에 있던 나를 불러 사택에 가보라고 했다. 사택 문을 열자 복도에는 슈라에게 선물로 준 코트가 패대기 쳐져 있고, 아내는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고, 아이들은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슈라할머니가 선물로 드린 코드를 보고선 역정을 내시며 “이런 것 받으려고, 내가 목사님과 교회를 섬긴 것이 아니라며 옷을 집어 던지고 집으로 가 버리셨어요.”라는 것이다.

무슨 연유가 있겠지 생각하며 차를 몰고 슈라할머니의 집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아이 마냥 웅크려 앉아 울고 있었다. 한 참을 기다리다 무슨 맘 상한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목사님, 사람들이 뒤에서 내가 ‘목사님을 섬기면서 얼마나 미국달러 많이 받기에 얼굴이 저렇게 폈을까!’라고 해요. 나는 내가 좋아서 하는데, 사람들은 내게 애매한 소리를 해요. 내가 한 푼이라도 무엇을 바라고 그 일을 했으면 벌을 받아요.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의 수근 거리는 말 때문에 힘이 드는데, 사모님이 선물로 준 그 코트 걸치고 다니면 사람들에게 내가 정말로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달러 받은 것이 되요. 그러면 나는 아무 공이 없어요”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는, “내 집에 올 때도 내 허락을 받고 왔으면 갈 때도 내 승락을 받고 갔어야지요! 이건 무효! 아직 보따리도 안 풀었네요. 자 다시 갑시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참지 못하고 역정을 내서, 사모님이랑 아이들에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하시고, 갑시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20 장   유산의 공포를 체험한 사람들

 
마음의 상처로 인한 우울증들
우리 주위에 우울증이 참으로 심각하다. 그 결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하루에 35명, 한 달이면 천명이 넘는다. 참으로 엄청난 숫자다. 그런데 사람들이 크게 놀라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대한민국이라는 큰 집의 한쪽 귀퉁이가 주저앉고 있는 것을 보는 것같이 안타깝고 안타까운 상황인 것이다.
물론 모든 자살의 원인이 우울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경험과 관측으로는 우울증이 없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는다. 즉 마음에 큰 상처가 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죽어 버리자...” 라는 생각에 웬만해서는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떻게든 살아갈 길을 찾는다. 어찌하든 일어서려 한다.
이렇게 우울증이 자살과 심각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우리가 할 일이 있고 또한 소망이 있다. 즉 우울증을 잡으면 많은 자살을 막는 것이 되는 것이고 수많은 슬픔과 극심한 상실의 고통과 나아가서 가정과 사회의 무너짐 현상을 막게 된다는 말이 된다.
자신이 겪고 있는 우울증의 원인이 자기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게, 즉 부모로부터 그냥 넘겨받은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모르고 살아간다. 즉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부모들에게서 비롯된 우울한 마음을 마음 속 깊이 다져넣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 우울한 마음은 주기적으로 겉으로 번져 나와서 그의 삶을 우울하게 하는 것이다. 나이가 어릴 때에는 생명력이 왕성해서 그 마음을 누를 수 있었지만 나이가 많아지고 삶에 큰 어려움이 닥치면 그 우울증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그중에서도 참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유산에 따른 이야기들 몇 개를 독자들과 나누면서 함께 해결책을 연구해보고자 한다.
병 주머니 사촌 누님

  나의 막내 사촌 누님은 병주머니이다. 그런데도 형제들이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면 거의 결사적으로 거부한다. 대학 때까지 교회에 잘 다녔고 성가대도 했는데 불교 학생회장 출신의 남편을 만나서는 완전히 교회를 떠났다. 남편이 군대에서 불교 신도회 회장을 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불교계 직장에서 중책을 맡으면서 더욱 그리 되어버렸다. 이제는 나이도 많아져서 예수를 다시 믿을 만한데도 계속 어깃장을 놓는다. 병주머니이면서 말이다.

  서울 방문 길에 사촌들을 모아놓고 작은 모임을 가졌다. 다행히도 그 누님이 참석했기에 예수님 이야기를 빼고서 내적 치유 진단 과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누님이 예상외로 관심을 보인다. 얼마 전 결혼해서 딸을 하나 낳은 외동딸 수영이가 있는데 손녀딸을 기르는 방법에서 사사건건 어머니와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님이 보기에 딸이 손녀에게 너무 심하게 한다는 말을 하면서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오는 것이다.
  이렇게 답을 해드렸다. “누님, 수영이가 자기 딸에게 그렇게 심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엄마, 즉 누님과의 관계가 원활치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요즈음의 관계가 아니라 에미가 어렸을 때에 엄마, 즉 누님으로부터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그러면서 누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누님,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유산 시키려 애를 쓰셨지요?” 큰 집에 자녀가 많았고 누님의 행동으로 보아서 나에게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다. 그러자 눈시울을 붉히면서 즉각적인 응답이 흘러나온다. “말 말어 동생, 우리 엄마가 나를 유산시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몇 달 동안 별짓을 다 하셨대... 한약을 지어먹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시고 ...”
  나의 큰 어머니는 고달픈 삶을 사셨다. 자식을 많이 낳았는데 아기를 낳고서 2-3일 만에 일어나서 밭일을 나가야 할 정도여서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하였다. 너무 가난했고 먹일 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원하지 않는 임신이 된 것이다. 그래서 수단을 다해서 유산시키려 애를 썼지만 그 누님은 엄마를 꼭 붙잡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내가 다시 물었다. “누님 어렸을 때에 많이 혼자 놀았지요?” “응. 나는 주로 깜깜한 방에 들어가서 혼자 있곤 했어...” 내가 유산의 공포를 심각하게 경험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삶의 어려움과 그 자녀들에게 끼치는 영향과 그 사례를 설명해 드리는 동안 누님의 얼굴에서 일어나던 표정의 변화가 눈에 선하다. 흑암 속을 더듬다가 환한 바깥으로 나온 듯한 표정이 된다. “아! 이제 알았다....” 하는 깨달음... 이제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긴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예수님을 다시 영접하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하게 하는 귀한 만남이었다. 이 만남으로부터 약 1년 반이 지난 후에 매형이 암으로 입원을 했고 나이 70세에 병원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누님은 매우 자존심이 상했지만 남편이, 병원에서 포기한 죽을 병에서 살았기에 잠잠히 보고 있는 중이다. 그 가정에 새로운 소망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New Korea Season! (3)


기다리고 기다리던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한 저는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온갖 폼을 다 잡고 앉아 왜 그리로 오라 하셨는지 조용히 주님께 여쭈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이내 주님께서 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23:9-10절 말씀이었습니다.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마음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 때문이라 이 땅에 간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이 말씀을 받고 저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 말씀을 주시려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부르셨단 말인가? 어찌 이럴수가... 저는 심히 두렵고 불쾌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나이도 어리고 여린 자매에게 이렇게 엄청나고 두려운 말씀을 주시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누구에게 전하라고 하시는 건지, 왜 하필 제게 그런 말씀을 주시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주시려고 저를 이 머나먼 이스라엘까지, 그것도 겟세마네동산으로 부르셨다는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궁금증은 후에 모두 다 풀리게 되었습니다.
2) 거룩과 기름부으심
겟세마네 동산에서 돌아와 곰곰이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는 중에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거룩’이라는 코드였습니다. 이스라엘 첫날 도착하여 보았던 ‘거룩’이라는 글귀가 쓰여진 깃발을 본 환상과 예레미야 23장의 말씀도 결국 ‘거룩’과 관련된 말씀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에서의 시간은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는 저를 이스라엘로 초대했고 또 40일 금식하시던 집사님이 이스라엘로 팀을 이끌고 온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워낙 이스라엘로 부르신 주님께만 관심이 꽂혀있던 저는 그 팀이 왜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팀이 온 이유는, 40일 금식이 마쳐지는 날 ‘다윗 성’이라는 곳에서 ‘기름붓는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초대한 이유는 북한 대표로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라는 마음을 주셨기때문이라는 겁니다. 저는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그 팀의 기름붓는 사역에 대해서 다 나눌 수 없지만, 저는 이스라엘 오기 전 기도모임에서 주님께서 제게 기름붓기 원하신다던 말씀이 떠올라 완전히 전율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저를 초대한 집사님 역시 제가 주님께 그런 음성을 들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40일 금식이 끝난 날 10여명의 사람들이 ‘다윗 성’에 위치한 ‘기도의 집’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기름붓는 사역이 거행되었는데, 저는 성령에 사로잡혀 그 기도의 집을 들어가서부터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마음을 강력하게 만지시는 그 어떤 힘에 사로잡혀 울고 또 울고 토해내고 또 토해냈습니다. 본의든 아니든, 내가 알든 모르든 내 안에 있는 거룩하지 못한 모든 것들을 토설하게 하셨습니다. 사실 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제가 운 것은 정말 감격 그 자체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저의 중심에 이런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내가 마지막 때에 너를 통해 ‘거룩한 신부의 세대’를 일으키기 원하는데, 통로로 쓰임 받아야 할 네가 거룩해야 하지 않겠니? 너는 거룩해야 한다.” 그 마음에 저는 저를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고, 그런 귀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 감격하여 울고 또 울었습니다. 기름부음의 사역이 거행되었고 저는 완전히 새로운 뭔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선교캠프에서의 첫 예배 시간에 부어진 감격은 이미 계획되어진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2006년 제게 기름을 부으시고 주셨던 메시지는 2008년에 행하실 하나님의 ‘한반도 회복의 역사, New Korea’를 세워가기 위한 신호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기름부으심과 거룩의 코드, ‘한반도의 부흥의 키가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고, 열방의 부흥의 키가 한반도의 통일’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충분히 풀어내셨고 지금도 풀어가고 계십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 Plus



 
 
 

찬송을 부르는 이여 !

 
지금 우리는 소통하는 찬양. 하나님과, 성도들과 함께 통하는 찬양을 드릴 때이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만 즐기면서 부르지 말고 함께하는 성도들을 좀 배려 하여야 한다.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곡들을 선곡하고 잘 준비하여서 자신들이 먼저 곡을 소화하고 은혜에 들어 간 다음에 앞에 서면 참 좋겠다.

왜 잘 아는 곡들을 선곡하면 안될까? 항상 새로 나온 곡, 잘 모르는 곡, 자신들도 잘 알지 못해서 앞에서 헤매면서 부르는 곡들을 부르는 걸까.

모두가 잘 아는 곡들을 기도로 선택하여 함께! 함께! 열심히, 기쁨으로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끼리도 잘 통해야 하나님과도 잘 통하지 않을까.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1서 1:3-4)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십일조 생활 철저할수록 경제력 더 넉넉”



“십일조 생활 철저할수록 경제력 더 넉넉”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지키는 크리스천들이 그렇지 않은 교인들에 비해 경제사정이 낫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맥시멈제너러시티 등 미국 교계 단체들은 미 전역의 십일조 준수 교인 4413명의 신앙·헌금·경제생활을 조사, 분석한 ‘스테이트오브더플레이트’ 연례 보고서를 22일 내놨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십일조를 내는 크리스천의 80%는 신용카드 빚이 없고, 74%는 자동차 할부 미납금이 없으며, 48%는 모기지(주택담보대출) 미납금이 없다고 밝혔다. 28%는 어떤 종류의 빚도 없다고 답했다.

  반면 십일조를 지키지 않는 크리스천 중 38%는 “금전적 여유가 없어서”, 33%는 “빚이 너무 많아서” 십일조를 못한다고 응답했다. 또 18%는 “배우자가 동의해주지 않아서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를 발행한 브라이언 클루스 목사는 “십일조를 지키는 교인은 ‘그래, 십일조를 꾸준히 내기 때문에 내가 잘되고 있는 거야’라고 믿는 반면 십일조를 안 지키는 교인은 ‘그래, 저 사람들은 잘사니까 십일조를 낼 수 있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십일조 준수 교인의 77%는 소득의 11∼20%를 내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확히 소득의 10%를 내는 경우는 23%에 그쳤다. 또 70%는 순소득이 아닌 총소득에 근거해 십일조 금액을 결정한다고 답했다.

  십일조 생활을 시작한 시기는 20대 이전이 63%로 가장 많았다. 이는 어릴 때부터 십일조를 생활화한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경제적 여유를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

  보고서는 미국에서 1000만명의 교인이 매년 500억 달러(55조6000억원) 이상을 십일조로 낸다고 밝혔다. 1000만명이면 미국 전체 인구(3억1600만명)의 3.2%에 불과하다. 미국인의 70% 이상이 스스로 기독교인(가톨릭 포함)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십일조 준수 인구가 적은 편이다. 현지 여론조사 업체에 따르면 2001년 전체 인구의 8% 정도였던 십일조 준수 인구는 2002년 6%, 2007년 5%, 2011년 4%로 계속 감소했다.

  클루스 목사는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일부를 바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의무이며,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내놓는 것”이라며 “경제사정이 어렵다고 십일조를 멈춰선 안 된다”고 말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




2013년 5월 19일 일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40 >



 
 
 

666 이야기(5) 로마교황의 축복과 저주 ③

 
 
 
 
41. 1970년 10월 10일 이디오피아의『하이레 셀라시에』황제는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1972-73년에 걸쳐 이디오피아는 심한 기근과 가뭄에 시달렸다. 1974년 8월, 그는 쿠데타에 의해 폐위당하고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1975년 8월 27일,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42. 1970년 11월 30일, 로마교황『바오로』6세는 피키스탄을 방문하고 폭풍우로 인한 피해상황을 돌아보고 난민들을 동정하였다. 1971년 3월, 내전이 일어나 일년 이상 계속 되었고 수십만의 사람이 죽고 수백만이 난민이 되었다. 1972년 4월, 로마교황의 방문을 허락하였던 칸(Khan)대통령은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하야했다.
43. 1970년 12월, 로마교황『바오로』6세는 호주를 방문, “하나님의 축복이 위대한 호주 위에 함께 하기를, 또 평화와 번영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호주를 축복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매우 기뻐하며 국가 위에 큰 축복이 임하기를 기대하였으나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1973년 4월 27일, 『위트램』수상은 로마교황을 접견하고 몇 달 후 호주 역사상 최초로 바티칸과의 외교관계를 국민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수립하였다. 그 후 많은 노동쟁의가 일어났으며, 절제없는 임금인상요구, 경제불황, 17%에 이르는 높은 인플레, 심각한 실업률은 1982년이 되도록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74년 12월 15일, 『다윈』시는 무서운 폭풍우에 의해 초토화되었고, 1975년 12월 13일 호주노동당은 선거에서 대패당하였다. 『프레이져』가 수상이 되었고 다시 한 번 노동당이 참패하면서『위트램』은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44. 1972년 10월 5일, 영국의『히드』수상은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1973년 12월 17일, 영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경제적, 산업적 위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1974년 3월 4일, 보수당이 패배하고『히드』수상은 사임하였다. 1975년 2월『마가렛 대처』가 당수가 되고『히드』는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45. 1972년 11월 14일, 망명 중이던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은 새 대통령으로 부임하기 전 로마교황을 먼저 접견하였다. 1974년 7월 2일, 그는 일년간의 공직생활 후 심장마비로 서거하였다.
46. 1973년 4월 9일, 월남의『티우』대통령은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1975년 7월 24일, 월남군은 월맹군과 베트콩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어『티우』는 해외로 탈출하였다.
47. 1975년 6월 4일, 『포드』대통령 부부는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1976년 11월 4일, 『포드』대통령은 선거에서 패배하고『지미 카터』가 새대통령이 되었다.
48. 1977년 7월 4일, 호주수상『프레이져』는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이번에는『프레이져』수상에게 재앙이 내리는 대신에 1987년 8월 6일 로마교황『바오로』6세가 죽었다. 새로 선출된 로마교황『요한 바오로』1세도 교황으로 선출된지 한 달이 못되어 급작스럽게 죽었다. 그러나『프레이져』수상에게 올 재앙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인플레 대응책은 큰 실패로 돌아갔고 호주는 최대의 실업률로 시달렸다.
49.1978년 2월 14일,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1981년 10월 7일 그는 암살당한다.                           
50. 1979년 11월, 로마교황『요한 바오로』2세는 터키를 방문, 『디머렐』수상의 영접을 받았다. 1980년 9월 12일, 『디머렐』수상은『이브렌』장군이 이끄는 터키 군부의 무혈 쿠데타에 의해 하야하였다.
51. 『카터』대통령은 1979년 10월 로마교황『요한 바오로』2세의 미국방문 시, 교황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백악관에 초청하였고, 의회연설까지도 하게 하였다. 연이어『카터』대통령은 1980년 6월 23일 개인적으로 바티칸을 방문하였다. 1980년 12월 선거에서 그는『레이건』에게 압도적인 대패를 당했다. 로마교황의 두 번에 걸친 축복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52. 1981년 2월, 『오히라』수상은 일본을 방문한 로마교황『요한 바오로』2세를 환영하였다. 같은 해 6월 12일 그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53. 1981년 2월, 로마교황『요한 바오로』2세는 필리핀 군도를 방문, 관습대로 땅에 입맞추고 필리핀을 축복하였다. 그 이후 이 나라는 태풍의 피해로 인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상실하였다. 마닐라 대주교인『신』추기경은 필리핀의 경제가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The Age, 1981년 1월 2일자). 마르코스 대통령은 굴욕스럽게 쫓겨났고, 새 대통령 아키노는 인기를 잃었다. 재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이다.
54. 1980년 5월 9일, 로마교황『요한 바오로』2세는『가나』의『아크라』를 방문, 『리만』대통령의 환대를 받았다. 1982년『로링스』가 일으킨 군사혁명은『리만』대통령의 부정부패를 규탄, 정권을 축출하였다.『리만』대통령은 해외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되었다.
55. 1980년 6월 2일, 로마교황『요한 바오로』2세는 프랑스를 방문, 『지스까르 데스땡』대통령으로부터 국가원수급의 예우를 받고 개인적인 면담을 가졌다. 일년이 채 못된 1981년 1월 5일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당수인『미테랑』에게 패배당하였다.
56. 1980년 7월 1일, 로마교황은 10일간에 걸친 브라질 방문을 시작하였다. 1982년 브라질의 정부관리들은 900억불의 외채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1983년에는 지난 5년동안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브라질 일부지역을 휩쓸었고 경제위기에 시달리게 되었다.
57. 1981년 11월 11일, 인디라 간디 수상은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1984년 11월 그녀는 시크교도인 자신의 경호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58. 1982년 2월, 로마교황은『니제리아』를 방문, 『세가리』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세가리』대통령은『바하리』장군이 이끄는 쿠데타에 의해 축출당하고, 그 후『바하리』대통령은 1985년『다고냐라』장군이 이끄는 쿠데타에 의해 축출당했다.
59. 1982년 6월, 로마교황은 아르헨티나를 방문, 야외미사에서『갈티리』장군을 비롯한 군수뇌 장성들을 축복하였다. 4일 후 아르헨티나군은『포크랜드』섬의『스텐리』항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하고, 『갈티리』장군은 사임하였다. 1983년 10월에는 아르헨티나 공군의 고위장성 두 명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은 공군사령관『플레시』장군이었다. 『갈티리』장군은 12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60. 영국은 사상초유로 로마교황의 영국방문호의를 수락하였다. 1982년 5월로 예정된 로마교황의 영국방문을 몇 주 앞두고 영국은 국민의 95%가 로마카톨릭교도국인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 말려들었다.
      성부 하나님께 영광 성자 예수께 영광
      성령님께 크신 영광 돌려보낼지어다
      찬양하리 찬양하리 죽임 당한 어린양
      주께 영광 돌리어라 나의 죄를 씻어 주셨네 
      <찬198 / 정결하게 하는 샘이⑤>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건강 칼럼



 
 
 

어린이 들에게 발병하는 수족구병

 
봄과 초여름과 같은 따뜻한 날씨에 주로 4-5월에서 가을 까지, 생후 만 6개월에서 5세 이하어린아이들에게 발생하지만 종종 10세미만 까지의 어린아이에게 발병 하는것을 볼수 있다. 가벼운 열감기 증상과 함께 손, 발의 발진과 입안의 궤양성 병변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수족구병(手足口病)이라고 부른다. 현재까지 보고된 바에 의하면 장 바이러스 일종인 콕사키 바이러스(Coxsackievirus) 와 엔테로 바이러스(Entero Virus), 이 두가지 바이러스 감염시 발병되고 있다고 알려져있다. 특히 엔테로 바이러스 71은 뇌수막염이나 뇌염 등의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한방에서는‘온병(溫病)’이라고도 하여 속에 열이 막히거나 가득 차 생긴다고 보는데 온병은 크게 온열병(溫熱病)과 습열병(濕熱病)으로 나눈다. 둘 다 열의 기운이 문제이지만 온열병은 건조한 반면 습열병은 축축하다는 게 특징이다. 수족구는 열을 동반하며 손과 발, 입에 물집이 잡히는 질환으로 온병 중에서도 습열병인 경우가 많다. 
질병의 원인은 주로 환자의 호흡기 분비물, 수포의 진물 등으로 비말감염되고, 때로는 분변 등에서 경구 감염된다. 감염된 환자와 접촉하면 약 4~6일 정도의 잠복기를 거쳐서 발열, 식욕부진이 나타나면서 수포, 궤양 등이 손, 발, 입 안에 생기게 된다.
한방에서는 긍극적으로 이 질환의 원인은 감기와 같은 상한병(傷寒病)에 노출된 뒤 치유되지 않은 잠복된 열로 발생하는 온병의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수족구병이 주로 늦은봄, 여름, 가을에 발생하는 것도 지난 겨울이나 이른봄에 해결 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위와 대장의 습열(濕熱)이 원인이 된다고 볼수 있다.
주목할만한 증상은 입안의 병변을 살펴보면 목젖 주변을 포함하는 연구개 부위에 점막 궤양이 잘 생기고, 이 밖에도 혀, 입 천장, 잇몸, 입술 등에도 병변이 생길 수 있습니다. 통증이 매우 심하므로 큰 아이들은 심한 통증을 호소하거나 입안이 맵다고 표현하는 아이들도 있다. 영아기보다 어린 나이에 발병할 경우 먹지를 못하고, 침을 삼키지 못하여 많은 침을 흘리게 된다. 발진은 주로 손등과 발등에 생기고 붉은색을 띤 물집 형태를 하고 있으며, 대부분 통증이나 가려움증 등의 다른 증상은 없다. 고열이 동반되는 경우가 흔하며 때로는 해열제에도 잘 반응하지 않는다. 고열이 심할 경우 열성 경련이 동반될 수도 있다. 만약 수족구병에 걸린 아이가 구토를 하고 심한 두통이나 의식 저하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응급실에 가야 한다.
이질환은 미리 예측하기는 어렵고, 항바이러스제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고 보고 되어 있다. 수족구 병을 예방 하기 위해서는 감기치료를 잘해야 하며 평소 외출 후에는 손발을 깨끗이 씻고 아이들 장난감이나 놀이 시설을 청결하게 하며 수족구 병에 걸린 어린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전염시킬수 있는 위험이 있기때문에 외부 출입을 자제 시켜야한다.
수족구 병과 같은 온병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인이 열기에 있는 만큼 몸속 열기를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몸속을 식혀 열기를 몰아내고 약해진 면역을 되살려야 한다. 몸속을 시원하게 하면서 정체되어 있는 기운을 돌게 하고 진액을 보충하는 치료가 중요하다. 수족구병을 한방에서는 위대장의 습열을 제거하는 약물로 치료 함으로써 아이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고 병에서 회복이 되더라도 위와 대장의 기능을 강화하여 다른 열병에 노출 않토록 하고 또한 재발이 되지 않토록 하여야 할 것이다.
 
[클로버데일한인교회 담임 / 엘림한방클리닉 원장 R.Ac, TCM.P / 604-441-6934]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요즘 밴쿠버의 교민들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한인 사회가 전반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곳의 어려운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거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남아 있는 교민들뿐만 아니라 한인 교회들도 각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어려울 때에 우리 자신들을 점검해 보는 기회로 삼는 다면 미래를 위해서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밴쿠버에서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큰 교회라고 인식되는 곳은 수백 명의 성도들이 출석하는 몇몇 교회였지만, 그동안 빠르게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수천의 한인 성도들이 출석하는 대형 교회가 몇 군데 등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기간에 전체적으로 한인 교회들의 숫자도 열배 가까이 늘어난 상태입니다. 그러나 밴쿠버 교민 사회에서 교회의 미미한 영향력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의 영성이 한인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거의 찾기 힘들 정도로 미미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사회에서의 영향력은 고사하고 내부의 문제로 인해서 병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스럽습니다. 저는 이런 차원에서 사도행전 5장을 읽으면서 한 가지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 1절에서 11절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초대 교회에서 일어납니다. 이제 막 역사적인 교회가 탄생을 하고 부흥의 길로 들어서는 시점에서 두 사람이 죽어 나가는 너무나 큰 사건이 발생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많은 성도들이 있었지만, 사도 베드로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두 부부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들은 자신들의 밭을 판 돈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전부인양 사도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런 거짓된 믿음과 헌신으로 인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차례대로 죽어 나가는 일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초대 교회에 큰 충격이었고 이 일로 인해서 교회는 침체에 빠질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매우 심각한 일 뒤에 아이러니 하게도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더 큰 부흥이 시작됩니다.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숫자로 헤아릴 수 있는 부흥이었지만, 이제는 남녀의 큰 무리라고만 표현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옵니다. 표적과 기사도 이전 보다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사도 베드로는 교회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능력은 없었지만, 그가 지금 분명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큰 문제가 발생을 했지만, 그는 교회의 본질을 지키고 강화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속이려는 시도를 한 사람들의 거짓된 헌신을 거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수하고 온전한 믿음 위에 교회는 세워져 갑니다. 이 사건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있어서 큰 교훈을 가져다가 준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복음과 함께 믿음, 소망, 사랑, 화평, 거룩, 헌신, 겸손, 성실 이런 것들을 지켜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 교회의 가장 큰 매력이고 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동안 이 땅의 교회들이 이런 부분에 있어서 온전했었는지 저 자신부터 반성해 봅니다. 성도들의 숫자가 많아진 것이 부흥이 아니라, 진정 건강한 교회를 이루었느냐가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밴쿠버의 교회들이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 때, 이 시기를 그냥 보내지 말고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고 쇄신할 적기로 삼는다면 매우 유익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영성을 버리고 교회의 순수한 본질을 강화시키고 키운다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 사회에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순수성 그 자체가 이 사회를 향한 큰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교회의 부흥이 아닐까요? 이 땅에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큰 부흥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라일주 목사 / 로고스교회 / 778-898-1558]

아브라함 이야기


범사에 복을 받은 아브라함/ 창 24:1 (하)

 
믿음으로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12:2).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무찌른 후, 롯과 모든 재물을 다 되찾아 가지고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제사장인 살렘왕 멜기세덱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창 14:19).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지 지금 65년 이상이 되었지만 아브라함이 받은 가시적인 복은 물질의 축복과 아들 이삭이 전부였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축복이 더디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의 분량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만을 누리게 되면 인간은 교만해지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성공했다고 오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는 물론, 사라가 죽었을 때도 약속 굳게 설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지날 수록 크고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갈수록 좋아지는 하나님의 축복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가나안 땅으로 왔지만, 그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축복이 아니라 가나안의 심한 기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였지만 그의 삶은 축복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에 거하지 않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믿음생활을 시작하지만 처음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너무나 미미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기대하고 왔다가 세상으로 다시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모든 축복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갖고 조급해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바로 그 믿음에 축복을 주셔서 마치 눈덩이가 굴러가는 것과도 같은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문제를 극복하는 축복의 삶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이 어려움이 전혀 없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비록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도 문제를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죄악으로 타락한 이 세상이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삭을 얻었지만, 이삭은 아직 결혼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삭을 결혼시켜 자손을 얻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24장에서, 자신의 그 문제를 또 다시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문제를 극복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삶의 위기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미치는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차츰 잃어가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다고 하는데 ‘범사’ 즉 ‘모든 일’에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만난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노화와 상실의 문제는 의학이나 사회 보장제도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영적인 것을 찾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비록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이 더디게 나타나고,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의 영혼은 이미 축복을 받았고, 다만 그 축복이 믿음을 통해 가시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뿐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시 90:10). 요즘처럼 의학이 발달하고 먹거리가 풍성해 지면서 구십, 백살을 살다 세상을 떠나시는 노인분들도 많지만 대체로 팔십이면 세상을 떠나갑니다. 다시 말해 세월을 비켜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늙는 것을 비켜가기 위해 안간 힘을 씁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은 아름답게 늙어가는 인생입니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열심히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며 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어두워지는 것은 하나님을 뵈올 날이 가까워져서 세상의 짐을 내려 놓고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통해 영적인 축복을 누림으로, 가진 것이 행복이 아니라, 내려 놓고 비울 줄 알며, 나눌 수 있는 것이 행복한 인생임을 깨달는 아름다운 노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며

 
 
뜰에 앉아 잎새를 흔드는 햇살과 바람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에 하늘의 평화가 담겨옵니다. 나이가 드니 정물이 주는 고요와 평안이 좋아집니다. 놀거리 없이 잠시만 가만히 있어도 지루하던 어릴 때는 자연은 무척 심심하고 무료한 세계였는데 이제 자연은 나에게 늘 새롭고 풍성한 쉼과 교훈의 세계로 열렸습니다. 자연의 맑은 숨결과 부드러운 색감 속에서 속도와 소음에 지친 오감을 쉬고 긴장으로 탁한 숨을 맑게 걸러내며 이렇게 하루 종일 앉아있으라 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무와 풀과 하늘과 꽃과 바람.... 이름만으로도 그대로 아름다운 시요, 영혼을 깊고 풍요롭게 하는 노래입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의 모습이 만물보다 경이롭고 아름다웠음을 “심히 좋았더라” 강조하신 하나님의 감탄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인간들은 사망의 쏘는 표적이 되어 평생 고통으로 속을 파먹히고 일그러진 생각과 부정적인 자아상으로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동성끼리의 결혼을 인권이라 하고, 나체로 돼지 우리에서 지내는 것을 행위 예술이라 하는 제 정신이 아닌 세상이 음란과 쾌락의 문화로 사람들의 정욕의 화덕에 불을 일구고, 도저히 이성을 가진 사람이 한 짓이라 할 수 없는 패륜과 엽기적인 범죄행위들을 보면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죽는다는 솔로몬의 격한 표현이 오히려 얌전하게 느껴집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음으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너무도 담대합니다. 죄악의 관영함과 사람의 생각과 도모가 너무나도 악한 세상의 뉴스들을 보면, 노아 이전의 세상을 죄악으로 파괴시켰던 옛 뱀들이 음란으로 얽혀 우글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고, 심판 때에 소돔과 고모라가 이 땅보다 견디기 쉽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탄식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은 미디어를 통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쏟아 붓고 있으며 이런 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비교의식의 전갈에 쏘이고 경쟁의 독침에 찔린 것 같은 쓰라린 고통을 당합니다. 모래보다 무거운 미련한 생각의 짐과 늘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고통때문에 사람들의 영혼이 곤비합니다. 저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은, 평범이상의 부와 권력과 명예와 재능과 외모를 가진 사람들도 예외없이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며 뒤채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생계와 건강과 취업과 불확실한 진로 등 많은 고민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와 관계와 나이 등의 변수들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확실한 성곽을 구축하려고 열심히 애를 쓰며 달리지만, 왕의 아들이란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모든 지혜와 권력과 돈과 명예를 소유했으며 주변국들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강대국의 왕으로서 천하 만민의 칭송을 받았던 솔로몬도 허무의 고통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이 무거움을 치울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무서운 고통의 이름은 죄짐입니다.
이 끝없는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을 인간 최고의 달성으로 여기는 불교 뿐 아니라 인류 종교의 최대 숙원이 죄짐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죄짐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뿐입니다. 그것은 면벽수도나 고행이나 명상을 통해 없앨 수 없고 선행이나 구제, 몸을 불사르는 희생으로도 그 고통의 무게를 한치라도 덜 수 없습니다.

복음의 메시지의 핵심은 죄와 회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용서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아 죄가 씻음받고 그래서 사단이 더 이상 죄책감의 냄새를 맡고 덤빌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형으로 정죄하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죄와 사망의 법 아래서의 복역의 때가 끝나고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의 새로운 은혜의 삶이 열렸습니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서 놓임을 받았다는 것은 백만 장자가 된 것보다 대통령이 된 것보다 어느 분야에서 최고의 인물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하고 복된 일이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평생을 기쁨에 젖어 살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과 용서의 기적을 맛보고 죄책의 짐을 벗은 사람은 더이상 욕심과 정욕에 휘둘리지 않으며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이생의 자랑에 흔들리거나 미움과 갈등에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는 일생에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셀 수 없이 구할 수 있는 은혜라는 사실은 심장이 떨리도록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눈다 해도 삭감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빛이 그렇고 소리가 그렇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비춘다 해도 절대 감하거나 나뉘지 않고 전체의 명도와 강도로 주어지는 오늘의 맑고 투명한 햇살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누구를 향해서나 동일하고 완전합니다. 교회인 우리는 죄악의 포로가 되어 마음이 상하고 죄짐에 억눌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전할 아름다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주님 다시오실 그날까지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사랑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일 것입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한국 홀사모 난생처음 밴쿠버 나들이 (4)









조향기 목사 (강원영월) 간증
 
 
“할렐루야”
강원도 산골짜기 작은 교회에서 38살 노처녀가 산비탈 땅을 일구며 그들의 영혼을 붙들고 기도하며 교회에 불을 끄지 않으려고 주님과 보낸 시간이 벌써 30년이 흘렀습니다. 이 산골에 와서 변변히 해 놓은 일은 없건만,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는 제 모습을 보면서 흘러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나를 돌아 볼 여유 없이 걸어온 이 시골 여 목회자를, 가끔은 길에 있던 아이들이 할머니라고 부르는 68세의 늙은 저를, 캐나다 초청을 위해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오니 부족함을 양해 바랍니다.
  저는 충남 논산에 있는 유교 집안의 엄한 환경에서 4째로 태어났습니다. 엄한 아버지의 핍박 때문에 숨어서 교회가고 거짓말하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현균 목사님의 부흥집회 때 은혜를 받게 되었고 목회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감리교 신학을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교계 어른들의 추천을 받아,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수동리 마을에 30대 후반의 노처녀가 결혼을 포기하고 예수님과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전국에 울리는 그런 외침에도 불구하고 거의 도시 문명과 거리가 먼 수동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시골 마지막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작은 다리 4개를 건너니, 이미 발이 부르트게 되었고 가슴에 불타오르던 복음의 열정은 짐승들이 길 삼아 다니는 길을 걸어오면서 육신이 먼저 지쳐 금방이라도 두 손 들고 “항복”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걸었던지 발바닥이 다 부풀고 발톱이 빠졌습니다. 겨우  도착한 교회 건물은 오래 전에 비워진 시골 곳간(상여를 보관하는 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쁘다는 소리를 듣던 이 초년병 조 전도사를 이 교회가 겨우 버티고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회도 사택도 다 부서지고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으니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습니다. 초가집 지붕은 풀이 자라고 부엌은 나무 판으로 겨우 바람을 막아 놓았기에 조금만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뒷산에서는 가끔 큰 돌이 굴러오고 온통 겁이 나고 두렵게 하는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로 몇 일을 보내며 정신을 가다듬고 십자가 붙들고 다시 힘을 내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교인들마저도 조금만 강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떠내려가 나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 여건을 다 감수하며 온 마을의 환경과 지리를 익히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저를 홀로두지 아니하시고 동행하시며 힘을 주셨습니다.
  우선 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새로 건축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나이 많으신 시골 권사님 내외분과 오직 믿음으로 함께 작정기도하기 시작 했습니다. 제가 가진 과부의 두렙돈 같은 물질을 앞에 놓고 기도를 시작하였고 지방 감리사님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비록 작고 작은 시골 교회이지만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기에 사탄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영적 전쟁을 치르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 한분이 대지를 하나님께 바쳤고 마을 돈을 빌리고 강에서 모래를 채취하여 벽돌을 찍고 지방교회가 조금 협조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체험해 보지 않으신 분들은 아마 아무도 그런 기쁨을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그 해 큰 태풍이 강원도를 강타하면서 눈물범벅으로 여 전도사가 벽돌을 찍으며 지은 교회의 지붕이 날아가고 종탑이 무너졌습니다. 옛날 오빠가 돌아가시고 울었지만 교회가 파손될 때 울부짖었던 그 울음은 말 그대로 통곡 그 자체였습니다. 성도들에게 성전건축이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인지 두고 보라며, 여러분이 받을 축복을 세어보라고 보증 수표 쓰듯이 말했던 저의 눈앞에 사용도 제대로 못해본 교회가 전부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허락하신 은혜를 얼마나 감격 했었는데, 서울에 그 어떤 성전보다도 제게는 더 귀하고 아름답던 그 성전이 태풍으로 초토화되니 온 성도들이 절규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강원도 여러 교회들의 도움으로 힘을 모아 다시 성전이 처음 모습으로 복구가 되었습니다. 힘들었던 성도님들에게 위로가 채워지고 흩어진 성도님들이 다시 돌아오고 안정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섬기는 영월 무릉교회에 교역자가 없고 비어 있는 곳이라며 교단의 권유로 파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두 번째 사역지를 주셨고 역시 그곳에서도 교회를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무릉교회 온지 1년이 되었을 때 다시 성도님들과 교회 건축을 계획하였으나 역시 여러 가지 만만치 않은 어려운 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건축이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으로서 “여자가 무슨 교회를 짓는단 말이냐”며 놀리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체, 우여 곡절을 겪으며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교회 내부에서 더 큰 도전이 밀려왔습니다. 그 당시 30만원 작정하시고 10만원 바치신 한 권사님이  건축에 대한 불만을 가지시고, 강단에 서있는 전도사를 향하여 삿대질을 해대며 내 돈 돌려 달라고 소리 지르시던 기억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게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지난 일이고 지금은 아마 천국에서 저를 보시며 사랑으로 격려 해 주시고 계실 것이라 믿으니 저도 그 권사님을 잊을 수 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다 그렇듯이 사역도 한 굽이 지나면 또 다른 굽이가 기다리고, 그래서 돌고 돌아가는 가 봅니다. 그 후 지방회 목사님들과 노회를 다녀오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여 엄청나게 많이 다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겨우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려는 2010년 12월 22일 대장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혹이 있다하여 간단하게 치료 될 줄 알았는데 암으로 판정되어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병마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저는 그 사명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병마와 싸우며 혈혈단신 혼자서 산골 사람들을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문득 욥이 생각났습니다.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 하는구나”(욥30:17) 말씀을 보면서 내가 지금 욥이 아픈 만큼 아픈 것 같은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부끄러워지고, 또 나를 복종시키며 제 자리로 돌아서게 됩니다.
단종 유배지이며 우리나라 오궁 중 하나인 이곳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새벽마다 또 한국 교회에서 정한 공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유교 사상이 강한 이곳에 복음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느덧 2년 후면 정년을 맞이합니다. 아쉬움이 많은 지난 사역의 길을 돌아보고, 그런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캐나다에서 뜻밖에, 어쩌면 30년 시골 목회를 위로하는 선물로 비행기 표를 보내왔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오직 예수님 때문에, 또한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어서 이 지면을 통하여 감사를 전합니다. 숭실 교회, 크리스천 신문사, 그리고 밴쿠버 교민 여러분들께서 마음으로 저희 여 목회자들을 맞아주신다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강원도 영월에서 조향기 목사 드립니다.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내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니 (1편)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력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되는 곳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복음이 인간을 어떻게 수렁에서 건져 내고, 깨어진 인생을 고치는지 ‘슈라’를 소개한다. 
선교지에서 초창기 과부 몇 명이 주축이 된 교회를 개척할 때이다. 그들 중의 리더였던 안나 할머니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고려인 과부 할머니가 있었다. 그의 이름이 ‘알렉산드라’, 러시아식 애명이 ‘슈라’였다. 찬송을 부를 때면 눈을 지긋이 감고, 성경을 교독할 때면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듣고만 있던 그녀, 특이하게도 몇 번 들은 찬송은 거의 다 외워서 부르시는 분이었다.
개척사역이 한창이던 어느 날 밤, 슈라는 과일을 사 들고 교회사택으로 나를 찾아왔다. 마주 앉은 슈라는 잔득 뜸을 들이더니 나에게 한글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내가 “왜 갑자기 한글을 배우려고 하시냐?” 라고 묻자 “목사님이 지난 주 설교 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려면 반드시 성경을 읽고, 알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그랬죠. 러시아어 성경이 있는데 굳이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으실 이유가 있나요?”  이 말에 조금 긴 침묵이 흘렀다. “목사님, 저는 러시아어를 읽을 줄 몰라요.” 순간 나는 멍해져 눈을 깜박거리며 무슨 뜻인지를 몰라 슈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목사님, 실은 저는 글을 읽지 못해요! 저는 학교에 다닌 적 적이 없어요. 그냥 급해서 조금 붙여 읽고, 제 이름만 쓸 줄 알아요”
 이게 무슨 일인가! 우리 교회 할머니들은 구 쏘련 시절 의무교육으로 다 고졸이고, 대부분 초급대학이상을 나온 분들인데. ‘슈라’가 무학에다 문맹이라니. 내가 전해 듣기로는 공산당은 산꼭대기에 양치는 목동도 잡아다가 학교를 보냈다는데…… 무슨 사연이 있어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았단 말인가? 아련히 덕유산 중턱에서 무교회 촌 개척사역을 할 때 섬기던  할머니들 생각이 났다.
 “아니 그 동안 글을 모르고 어떻게 생활하셨어요?”라는 질문을 하려는데 슈라는 자신의 인생의 보따리를 먼저 풀어 놓았다.
슈라가 자신에 대해 가진 희미한 첫 기억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기 직전 자신은 노름꾼이었던 아버지에 의해 5살이 채 안된 나이에 노름 빚으로 팔렸다는 사실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버림을 받아 한 많은 인생살이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기억은 자신을 데려갔던 사람들과 열차를 타고 와 중앙아시아에 카작스탄 ‘우스토프’역에 내릴 때인데, 아마도 친 언니가 아닌가 생각하는 한 여자아이가 멀어지는 기차에서 자신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일이다. 그후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르는 이가 없어 이름을 잊어버렸고, 박씨라는 성도 데려간 집의 성과 그들이 지어준 이름 “꽃님이’가 나중에 러시아 이름으로 알렉산드라가 되었다고 한다.
 슈라는 자신의 이마 위와 머리에 있는 커다란 흉터를 보여 주었다. 이주되어 우스토프에 정착하던 중에 학교가 생겨 몰래 동네아이들을 따라 하루를 갔다 왔다. 그 사실을 안 주인이 “우리가 너를 공부시키려고 데려온 운 줄 아느냐?” 라며 어린 애를 등에 업히고 띠를 매어 주었다는 것이다. 너무 학교에 가고 싶어 몰래 도망쳐 학교에 몇 번 갔는데 화가 난 주인의 갈고리로 머리와 얼굴을 때려 그 때 생긴 흉터라며 앞머리를 올려 보여 주었다.

“목사님, 그 날부터 제 등에선 지린내가 시집가는 날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인 집 아이를 다 키웠고, 큰 아들 장가가서 난 아이들도 다 키우고 나니 18살이 되었습니다.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분노와 좌절 속에 반항할 때면 주인집 남자들은 잔인하게 막 다루었습니다.” 슈라는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려 인두로 지져진 상처를 내보였다. 나와 아내는 말문이 막혀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부모 복이 없으니 남편 복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19살에 시집을 갔는데, 그 남편 역시 평생 놀음과 바람기로 편할 날이 없었어요. 아들 하나, 딸 넷을 낳았는데 이제 딸 둘만 남았습니다.”
그녀의 가슴앓이는 절절이 이어졌다. 둘째 딸을 데리고 고분질을 갔는데 밭에서 만나 눈이 맞은 청년이 변심하자 그 딸은 강물에 투신하여 죽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도 장가들어 어린 딸 둘을 낳고 살다가 취중에 오토바이를 타다가 화물차에 치여 즉사했다는 것이다. 세 째 딸은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사내 놈이 가방에다 장난 삼아 뱀을 넣었는데 수업 중 가방에서 손을 넣고 학용품을 뒤지는데 뱀이 소매를 타고 등뒤로 올라가 붙는 바람에 심한 경기로 그 날부터 간질이 생겼다고 한다. 시집을 가서 딸 하나를 낳았으나 간질이 심해져 버림을 받고, 시름시름 앓다가 몇 달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지금 그 딸이 낳은 외손녀와 함께 생활한다고 했다.
이어지는 그 다음 말이 우리를 더 놀라게 했다. 분에 못 이겨 자신의 딸을 그 지경으로 만든 철없는 사내놈의 집에 찾아가 몇 번이나 갖은 욕과 저주를 다 퍼부었다고 한다. “우리 딸 죽는 날 네 놈도 죽는다!”라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막내 딸이 나이가 들면서 그 사내 놈과 눈이 맞았고, 죽기로 반대했지만 끝내 살림을 차려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저주 때문인지 그 사위도 평생을 마약으로 살다가 폐결핵까지 겹쳐 오늘 내일 하는 형편이라며 막내 딸 나타샤가 시골로 다니면서 장사를 해서 겨우 가정이 연명하고 했다.
우리 부부는 듣다가 가슴에 멍이 들고 말았다. 결국에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래도 큰 딸이 작은 포목전과 옷 가게를 해서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의 끝이 나갈 때 슈라는 다시 간곡하게 내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목사님, 죽기 전에 꼭 조선말로 하나님 말씀을 다 읽고 가고 싶습니다.”
“60중반인 이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순간 나는 목사의 양심으로 갈등하며 번민하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책임 질 수 없는 일이었다. 난감했다. 그런데 갑자기 묘안이 떠 올랐다. 안나 할머니에게 부탁을 하면 해결 될 문제였다. 안나 할머니는 평생 러시어어 선생님을 하시다가 교장으로 은퇴하신 분이시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기 전에 5살에 이미 독립군이던 부모님으로부터 한글을 배웠던 분이다. 내가 안나 할머니에게 부탁을 할 테니 좀 기다리라며 겸연쩍은 표정으로 긴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New Korea Season! (2)

 
지난주에 이어 계속하여 New Korea Season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데 고민이 있습니다. New Korea에 대한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나눌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짧게 나눌 것인지 아니면 상세하게 나눌 것인지... 하지만 그런 부담마저 내려놓고 편하게 나누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간증형식으로 이어지는 앞으로의 내용들을 밴쿠버에 계시는 그리스도인 여러분들도 편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한반도의 부흥의 키는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 열방의 부흥의 키는 한반도가 통일되는 것
2008년 2월, 계획에 없던 ‘북한선교캠프’에 저는 한 전도사님에 의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캠프에 참석한 첫날 첫 예배 때였습니다. 이사야 61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으로 지은 고형원선교사님의 ‘주 여호와의 신이 나에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라는 찬양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6년 처음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다윗 성 기도의 집’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가 생생히 기억났습니다.  
1) 한민족의 하나됨의 회복
2006년 5월 저는 기도 중에 ‘겟세마네동산으로 오라!’는 짧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언제 가야 할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집사님의 전화가 걸려왔고 이스라엘 여정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기 전날 기도모임에서 기도하는데, 또 한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저를 이스라엘로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저에게 기름 붓기 원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하여 “주님, 제가 뭐라고 제게 기름 붓겠다고 하십니까? 안됩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어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네게 기름 붓기로 내가 결정한 것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에 저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겟세마네동산으로 가야 한다는 목적과 기름을 붓겠다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아무것도 모른 채 저는 다른 팀과 함께 처음으로 이스라엘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도착하여 간 ‘기도의 집’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하나의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집 중심 센터에 회오리바람이 불다가 하나의 깃대가 세워졌는데, 그 깃대 위에 하얀 천의 깃발이 보였는데 그 천에 크게 ‘거룩’이라고 쓰여져있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뒤이어 40일 금식을 하고계시는 집사님이 계셔서 그 집사님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는데, 주님은 그 분의 금식이 끝날 때까지 금식에 참여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나라와 민족, 열방을 위해 금식기도를 자주 하시는 그 분이 그때에는 왜 금식기도를 시작하셨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저는 기간이 얼마 남았는지 알지 못한 채 순종하는 마음으로 금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금식에 왜 동참해야 하는지에 대해 주님은 2005년 한국을 위해서 태백산에서 기도할 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을 통해서 한반도를 회복하기 원하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한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한국을 대표하고 저는 북한을 대표하여 함께 금식을 마침으로 ‘한민족의 하나됨’을 이루실 거라는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이라는 글귀가 쓰여진 깃발에 대한 환상과 ‘한민족의 온전한 하나됨의 회복’을 위한 금식에 참여하는 것이 이스라엘 도착하자마자 벌어진 주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식으로 기도하던 중 저는 그렇게 기다리던 ‘겟세마네동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예수님의 마음치유



B. 내면적인 변화
 
 
 
앞에 설명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면서 우리의 내면에도 기대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난다. 이 제목들을 독자들이 소그룹에서 하나씩 읽으면서 삶을 구체적 나누어 보기를 부탁드린다.
(1)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가득해진다.
 
(2) 나 자신을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인정하며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자신을 더 이상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려 애를 쓴다.
 
(3)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도 충분히 가능한 것임을 계속해서 경험하게 된다.
 
(4) 성경 말씀이 그냥 믿어지며 믿음이 쑥쑥 자라난다. 성경 말씀이 전부 나를 향하신 사랑의 말씀인 것이 그대로 받아진다.
 
(5) 미움과 섭섭함과 안타까움과 한스러움이 마음에 쌓이지 않고 감정의 하수구로 흘러나가는 것을 날마다 경험한다.
 
(6) 내가 하나님의 생명 시냇가에 살고 있는 것이 느껴지며 내 주위 사람들에게 이 생명수를 전하겠다는 열망이 생긴다. 남을 치유하는 기쁨을 경험하며 주님이 내 인생에 귀한 사명을 주신 것이 깨달아진다.
 
(7)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쉬운 것을 몰랐네...” 하는 고백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마음의 치유와 회복의 과정은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4-5년, 길면 10년, 20년, 아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치유는 바로 성화 (Sanctification)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성급한 기대를 가지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입주해서 20년, 30년 또는 50년 이상을 살아오던 집이 기울어지고 문틀이 뒤틀리는 상황이 된 것을 상상해 보라. 그 집에 그대로 살면서 지하실 밑의 기초부터 점검하며 고쳐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잘 돌아가는 것 같았던 삶을 이리 저리 뒤적이면 온갖 약점들과 창피한 것, 지저분한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땅을 파고 기초공사가 부실한 부분을 수리해야하고, 전기 배선, 수도 배관, 가스 배관까지 다 건드려야 한다. 나아가서 기울어지고 비틀어진 마루나 문틀을 고쳐야 하고 여기저기 틈새가 벌어진 것도 바로 잡아야 한다. 온 집안의 페인트 작업과 도배도 물론 다시 해야만 한다. 엄청난 일이다. 수시로 중단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앞으로 수십년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좋은 집을 만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교회음악 Plus



 

 

찬송하는 사람은

 
찬송하는 사람은 찬송을 통하여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찬송을 부르는 이유는? 찬송을 무엇으로 하는지? 찬송을 언제 하는지?
찬송을 부르는 사람은 먼저, 말씀을 읽고 말씀 가운데 녹아져서 말씀에 의해 살아 가야 한다.
말씀과 함께 기도로 항상 준비하며 기도로 무장하고 기도로 힘을 키워서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위해 성도들의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목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항상 세상 속에서도, 말씀 안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며 찬송으로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로 아름다운 냄새로 오늘도 주님의 기적을 이루며 나아가는 찬송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개역한글판 행 16:25)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2013년 5월 11일 토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39 >



 

 

666 이야기(4) - 로마교황의 축복과 저주 ②

 
21. 오를레앙(Orleans)가(家)의 포르투갈의 한 왕비는 로마교황의 축복을 받았다. 왕이었던 남편과 장남은 마차를 타고 가다가 왕비 옆에서 살해되었고, 목숨을 건진 왕비는 살아남은 다른 한 아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포르투갈은 공화국이 되었다.
22. 권세가 극에 달했던 독일의 황제는 1908년 로마교황을 방문하고 그의 축복을 받았다. 1918 년 그는 왕위를 잃었고 망명 중 죽었다. 독일은 패망하여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23. 1914년 영국의 재산가였던 다이어 에드워드(Dya Edwards)는 로마교황 신봉자가 되었다. 1916년 그는 로마를 방문하고 로마교황의 축복을 받았다. 4일 후 그는 죽었다.
24. 1926년 로마교황은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황금장미를 보냈다. 1934년 왕『알베르』1세는 등반사고로 죽었고, 그들의 자부였던, 왕비가 되기위해 로마카톨릭교로 개종한 스웨덴 출신의『아스트리드』왕비 또한 스위스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25. 1928년 로마교황은 비행선 ‘이탈리아’를 축복하고 북극점에 놓을 십자가도 주었다.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비행선은 추락하여 두 동강이 되었고, 승무원의 절반은 실종되었다. 노빌(Nobile)장군은 부상을 입었고 그 후 사건조사위원회로부터 심한 견책을 받았다. 이 사건은 그 당시 최악의 사건이었다.
26. 무쏠리니가 이디오피아(Abyssinia-이디오피아의 옛 이름)사람들을 학살하고 그 땅을 약탈했을 때, 로마교황은 이태리 국민을 ‘위대하고 선량한 국민’이라고 축복하였으나 무쏠리니와 그의 정부(情婦)는 살해되어 거꾸로 매달려 군중에게 공개되었다.
27. 1961년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로마교황청의 요청대로 검은색 의상을 입고 로마교황을 방문하였다. 그 이후로 해가 지는 날이 없었던 대영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으며, 로마협약에 의한 유럽공동시장에 가입함으로써 그 주체성을 잃고 경제적으로 로마에 예속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또 영국왕실 왕족들의 로마교황과의 잦은 접촉은 자신들과 국민들에게 정치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28. 1963년 3월 7일 소련의 후르시쵸프(Khrushchev)수상은 로마교황과 직접 접견하지는 않았지만, 바티칸-소련간의 관계개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딸과 사위인 아주벨(Adzubel)을 로마에 보내어 로마교황을 접견케하였다. 일년 반 후 1964년 10월 16일, 그는 권좌에서 밀려나 당서기장직을 사임하였으며, 그 이후로 그는 정치세계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 쏘련 수상이 조그만 공원 보다 더 작은 나라 바티칸 국가와의 관계 개선이라니...)
29. 1963년 7월 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로마교황을 접견하고 축복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월남파병병력을 증강시킴으로써 미국을 월남전에 깊이 개입시켰다. 1963년 11월 12일 그는 암살당하였다.                           
30. 1964년 로마교황은 황금장미를 베들레헴에 보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영토내, 특히 ‘거룩한’ 장소로 불리는 곳에서 끊임없는 소요가 잇달았다.
31. 1964년 5월 12일, 요르단의 후세인왕은 로마교황을 접견했다. 일년 후 1965년 6월 5일, 요르단군은『6일전쟁』에서 이스라엘군에게 대패당하였고 많은 영토를 잃었다.
32. 1964년 10월 12일,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은 그 권력이 절정에 있었을 때, 로마교황을 접견하고 평범한 신도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받았다. 1976년 2월 그는 축출되었다.
33. 호주의 노동당 다우인 『아더 코웰』은 로마교황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곧 이어 그의 정치생활은 종지부를 고했고 정치무대로부터 사라졌다.
34. 1965년 10월 5일 로마교황 바오로 6세는 뉴욕 시를 방문, 유엔총회에서 연설하였다. 존슨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로마교황을 방문하였고 미국을 위해 뜻깊은 방문이라며 환영하였다. 대통령은 자신의 부인과 딸을 로마교황에게 소개하였다. 그 후 그들은 로마카톨릭교회의 미사에 자주 참석하였다. 1968년 4월 1일, 그는 차기선거에 나서지 않을 것을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은퇴하였으며, 일년 후 사망하였다. 그가 임기를 치룬 3년은 미국정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때였다. 50만명 이상의 미군이 월남에 파병되었으나 전쟁은 교착상태였다. 대학가에서는 반전데모가 한창이었고 흑인폭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해외에서의 미국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
35. 1966년 4월 24일 그리스의 콘스탄틴 왕과 마리 왕비는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일년 후 1967년 4월 21일, 일단의 육군장교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콘스탄틴 왕을 폐위시켰다. 같은 해 12월 12일 친왕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하자 왕과 그 가족은 그리스로부터 탈출하였다.
36. 1967년 2월 5일, 로버트 케네디 상원위원은 대통령선거에 출마함과 동시에 로마교황을 접견했다. 1968년 6월 6일 그는 암살되었다.
37. 1967년 6월 1일, 프랑스의 드골 장군은 독일, 이태리, 일본의 3개 주축국이 항복한 후 형성된 평화위원회에 바티칸 대표를 절대 용인않겠다는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로마교황과 화해하기위해 로마교황을 접견했다. 1969년 8월 24일, 드골 대통령은 헌법개정안이 부결된 후 사임하였다.
38. 1967년 5월 12일, 로마교황 바오로 6세는 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를 방문, 수상 살라자 박사로부터 환대를 받았고 일년 후인 1968년 9월 8일 살라자 수상은 중풍에 걸려 사임하고, 캐타노 박사가 새 수상이 되었다.
39. 1969년 7월 31일 로마교황 바오로 6세는 아프리카 우간다를 방문, 자신을 초청한 밀톤 오보테 대통령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하고 우간다 국민을 축복하였다. 1971년 1월, 오보테 대통령은『이디 아민』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하야,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후 8년 동안 우간다 국민은『이디 아민』의 폭정에 시달렸다. 1979년 4월 12일, 인접한 탄자니아에서 온 해방군은『이디 아민』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이디 아민 대통령은 해외로 탈출하였다.
40. 1970년 9월 29일, 닉슨 대통령은 로마교황을 방문하고 월남전으로부터 모든 미군을 철수시킬 계획을 말하였다. 이때 그는 로마교황으로부터 냉대를 받고 축복도 받지 못하였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은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불행하게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은 미국헌법이 공식대표부를 두는 것을 인정치 않으므로 자신의 개인적인 특사를 바티칸에 보냄으로써 로마교황청과 타협하였다. 1972년 12월 21일, 닉슨대통령의 딸『패트리샤』와 사위는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1974년 8월 24일, 닉슨 대통령은『워터게이트』사건에 연루되어 불명예스럽게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왜 로마 교황은 월남전을 원했는가?)
 
      감사하신 주의 은혜 나를 영접하셨네
      내가 지은 모든 죄와 허물 용서하셨네
      찬양하리 찬양하리 죽임 당한 어린양
      주께 영광 돌리어라 나의 죄를 씻어 주셨네 
      <찬198 / 정결하게 하는 샘이④>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