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화장실 숫자만 늘리다 죽은 인생 1.  

 

-  무엇이 되고 싶니? (누런 금메달)

 
 
우리 가정이 선교지로 출발할 때 둘째 아이는 생후 20개월쯤 되었었다. 아들이 자라자 언젠가 나는 다른 아버지들이 하는 것처럼 “너는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니?”라고 물었다. 그 때 5살쯤 된 아들은 스스럼없이 버스 운전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소방차나 대형버스 운전사도 아닌 ‘마슈르트까’.... 마슈르뜨까는 우리가 살던 지역에 12인승 마이크로 버스로 도시의 거점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이었다. 적잖게 실망한 나는 속내를 감추며 “왜 굳이 마슈르뜨까 운전사가 되고 싶니?”라고 물었다. “아빠, 마슈르뜨까 운전사는 돈을 많이 벌잖아요! “아니, 무슨 운전사가 돈을 많이 번다고 그래?” “아빠! 엄마랑 시장 갈 때마다 마슈르뜨까 타는데, 앞 사람이 바구니를 돌리면 차에 탄 모든 사람들이 돈을 담아 운전수에게 건네주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돈을 많이 벌겠어요!”

어쩌다가 목사, 선교사의 아들이 돈을 벌어보겠다고 운전사가 된다는 건지? 나는 그런 작은 꿈 말고 큰 꿈을 꾸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더 큰 꿈을 가지게 할까 생각하던 나는 바로 “얘, 운전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겠니, 아니면 그 버스를 수 십대, 수 백대를 운영하는 버스회사 사장이 돈을 많이 벌겠니?  “아빠, 버스회사도 있어요? 그러면 나는 버스회사 사장될래요. 그래서 돈을 많이 벌래요”

왜 돈타령인지? 이유는 금방 감이 잡혔다. 현지생활 수준에 맞게 생활하다 보니 아들 놈이 좋아하는 장난감 ‘레고’며, 노란 바나나를 사주질 않고 지내다 보니, 아들은 선교사의 가정은 늘 가난해서 그런 것을 부모님이 사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나는 막막하기만 했다.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이 한 창일 때 선교지에서도 응원열기가 대단했다. 아들은 머리에 띠를 띠고 “대한민국, 짜작짝 짝짝!’을 연발하며 드라마틱하게 4강에 올라가는 한국팀을 응원했다. 결국 브라질이 우승을 했다. 브라질 축구팀은 우승컵을 높이 들어 올리며,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아 언더 셔츠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등의 글귀를 새기고 나와 전세계에 하나님을 증거했다.
 
월드컵이 끝나자, 한국에서 선물로 붉은 악마들의 빨간 셔츠가 도착했다. 둘째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말자, 가방을 집어 던지고 붉은 옷을 갈아 입고서, 집 근처에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200미터 트랙을 30바퀴 돌고, 턱걸이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를 불러 축구 골대 앞을 가로 막고 서서는 패널티 킥을 차라는 것이었다. 왜 이러느냐고 묻자, 자기는 거미 손의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래! 브라질 선수들이 하는 것 봤지! 우승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을.” 나는 그래도 아들의 새로운 꿈이 운전사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흥분을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나를 당황케 했다. “아빠! 죄송해요. 전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금메달을 따고 싶어요!” “금메달, 좋지! 그래서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하는 거야?”  “예! 금메달이 얼마나 비싼 되요. 저도 금메달 따서 부자가 되고 싶어요!”.
나는 기가 막혀 “야! 이 녀석아! 브라질 선수들이 목에 건 금메달은 돈으로 따지자면 그 사람들이 받은 연봉에 비하면 껌 값이야!”라고 했지만 연봉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들은 변함없이 누런 금메달이 달러로 얼마나 되는지 집요하게 물었다.
 
안식년을 맞아 한국으로 온 아들은 매일 학교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국학교라곤 다녀 본적이 없어 받아쓰기는 늘 50점을 밑돌았지만, 반에서 골키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아들은 눈치를 살펴 내가 좀 자유롭다 싶으면 나를 놀이터 모래사장으로 불러내곤 했다. 여러 개의 테니스 공을 구석으로 던지면 날렵하게 다이빙을 해 막아내는 훈련을 수 없이 했다. 그래서 집안은 온통 모래투성이였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갈 때 제일 먼저 챙겨 간 것이 축구공과 그리고 모형 우승컵, 골키퍼용 손 장갑이었다. 선교지로 돌아온 후에도 운동장을 뛰는 것과 철봉연습은 매일 빠뜨리지 않는 아들의 일과였다. 그 때까지도 아들에게는 금메달은 인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누런 금송아지로 보였던 것이다.
 
그 해 겨울 방학을 맞아 나는 가족을 태우고 먼 사역지로 운전하여 가고 있었다. 새벽에 출발한 차는 20여 시간 운전을 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스텝지역과 사막을. 좁은 승용차에서 지루해 지기 시작하자 무료함과 졸음을 깨우기 나는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카세트를 꽂았다. ‘샘물 호스피스’ 원장인 원주희 목사의 강의 테이프였다. 틀자마자 거기엔 기막힌 이야기 하나가 소개되었다.
 
샘물 호스피스에 중년의 여성 말기암 환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원장은 이 여성에게 “이제는 마지막을 준비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자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악을 쓰면서 “나는 못 죽어요! 어떤 X 좋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악에 받친 대답에 놀란 원장이 차근차근 그 여인의 지난 삶을 캐물어 보았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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