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목요일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사회적 복음

얼마 전 한 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무엇입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흔히들 언급하는 대형 교회들의 재정 투명성의 문제점을 지적할까요? 아니면 목회자의 세습 문제를 이야기 할까요? 요즘 밴쿠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몇 몇 선교단체들의 자기만족의 함정에 빠져버린 잘못된 선교전략을 들 수도 있고, 지나치게 은사의 체험에만 집중하는 흐름을 우려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이라고 꼽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복음의 선포와 선교를 이야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며 왜 ‘사회적 복음’이 한국교회에 부족한 점이냐고 반론할 수 도 있겠습니다. 저 자신도 목사이지만 강단에서 선포되는 목회자의 메시지를 분류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비중으로 Social Gospel이 선포되고 있습니까? 혹시 선포되는 복음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개인 영혼의 구원에서 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안겨 주신 그 거룩한 복음의 선물을 반토막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성도 분들을 만나 대화하다 보면 생각 외로 많은 분들이 ‘사회적 복음’에 대해 낯설어 한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분께는 사회적 복음을 두고 ‘좌익이냐?’‘빨갱이 아니냐?’ 라는 말까지 들은 적도 있습니다. ‘사회적 복음’을 따로 특별하게 포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경계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뜻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이요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가 바로 사회적 복음입니다. 의미를 조금 좁혀보자면, ‘정의(Justice)’가 되겠고 공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중요성은 구약의 선지서를 통해서 얼마나 강조되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모스서 5장 21-23절에 이런 말씀이 선포됩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절기와 성회도 넓게 보아 예배를 뜻함이고, 번제나 소제도 예배를 말함입니다. 어떤 분은 화목제를 감사의 예물이니, 감사헌금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감사예배’라고 하고 싶습니다. 노랫소리와 비파소리는 당연히 찬양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찬양을 듣지 아니하시겠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어지는 24절의 당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우리가 사회적 정의를 지키지 않고 공의를 어기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도 듣지 않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뿐입니까? 5절에서 언급되는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의 예배 중심지였습니다. 주로 이스라엘의 부유한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명예로운 자들이 나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역시 곧이어 이유가 밝혀집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들에게 정의가 없고 공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회적 복음’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않으시겠다고 하실 때는,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해서, 찬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정의와 공의를 지키지 않아서 입니다.
사회적 복음에 부딪히는 간단한 예를 한 번 들어보자면, 우리 삶에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 중 ‘주일성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 밴쿠버에서 주일성수는 엄격한 주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주일성수 못하는 성도를 정죄해 본적은 없습니다만, 그것은 신앙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주일성수가 중요하지 않아서는 아닙니다. 그런데 소수의 몇몇 분들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는 열어서 직원들을 시켜서 운영하고 자신은 예배에 참석하여 주일성수 한다고 하는 것을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일성수 하는 것일까요?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예배드리지 않는 것보다는 예배드리는 것이 낫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 복음의 측면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이 주일을 온전히 지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될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돈을 주며 예배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이지, 죄를 줄이고 위선으로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를 의롭다 하신 것도 같은 원리 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실 때는 자신 만이 아니라, 가족과 일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머무는 손님까지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나만 혼자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구원 받았으니 다른 이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 이유인데, 그 동일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진 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저 사람을 내가 가진 것이 많다고, 힘이 조금 더 있다고 핍박하고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나만 홀로 구원받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구원받고 더불어 잘 살아 가는 것,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사회적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충성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용균 목사 / 밴쿠버한마음교회 / 778-554-9003]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