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20 장   유산의 공포를 체험한 사람들

 
“유산의 공포”라는 제목을 보면서 산모가 유산을 앞에 놓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말이 아니다. 이 공포는 뱃속에 있는 아이가 경험하는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다.
 
태아는 잉태가 되고 -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 아주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받아먹으면서 또 밖에서 들리는 수 많은 음성과 대화를 이해하면서 자라난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증명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 전에 그 비밀을 알고 태교를 강조한 것이다.
 
종전 칼럼에서도 자세히 설명했지만 「태교 신기」에 이런 말씀이 있다.
 
     임산부가 성낼까 두려우니 분한 일을 들려주지 말고
     임산부가 무서워할까 두려우니 흉한 일을 들려주지 말고
     임산부가 걱정할까 두려우니 어려운 일을 들려주지 말고
     임산부가 놀랄까 두려우니 화급한 일을 들려주지 마라
 
태중의 아기는 엄마의 말은 물론이고 그 생각과 마음까지도 다 이해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능력이다. 뱃속의 아기는 엄마의 유산에 대한 생각과 시도를 다 알고서 결사적으로 엄마를 붙잡고 살아남으려 투쟁을 벌인다. 실제로 인공 유산을 시키려고 기계를 자궁 속에 밀어 넣으면 태아가 최선을 다해서 그 기계를 피해다니는 모습을 과학자들이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엄마가 유산을 생각하고 구체적인 시도를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기에게는 충격 그 이상이다. 지금까지 아기는 엄마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왔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었고, 살 집을 주고, 모든 음식을 공급해 주던 사랑의 엄마가 이제 별안간 돌변해서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배신감은 말할 수도 없다. 피할 방도도 없다. 그냥 좁은 자궁 안에서 그 시련을 견디어 내어야만 한다. 살아나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가 잠시라도 그 아이의 처지가 되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된다. 사람에 대한 모든 신뢰가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그 아이는 계속해서 이렇게 독백을 할 것이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어. 나 혼자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거야.”  그러면서 깊은 우울에 빠져 들어간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대인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그 가까워짐을 받아들이기가 겁이 난다. 그 사람이 꼭 자기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가까워지기 전에 먼저 거부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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