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2.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3) 마가복음②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 복음 안에 거하라)
“때가 찼고”는 히브리서 1장에 잘 설명되어있는 “이 마지막 날”이다. 신약성경은 서두부터 “회개하라”(마3:2)는 명령으로 시작되고 마지막도 회개로 끝맺는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경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7)
“때가 찼고”는 히브리서 1장에 잘 설명되어있는 “이 마지막 날”이다. 신약성경은 서두부터 “회개하라”(마3:2)는 명령으로 시작되고 마지막도 회개로 끝맺는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경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7)
예수님도 세례 요한처럼 갈릴리에서 똑같이 회개에 대한 촉구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다(마4:17). 모든 사역이
‘회개로 시작 회개로 끝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길을 잃고 뒤틀린 사역에 함몰되어 헤어나오기가 힘들게 된다. 죄악된 세상은 회개가 없다면 곧
시궁창이 되기 때문이다. 구원얻는 믿음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사역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우선 되어야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벧후1:1). 회개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 회개하는 사람을 일종의
행위구원적인 의(義)에 종속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개를 우리의 능력을 동원해 이루어낼 수 있는 덕행의 하나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의 하나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 우리의 본성에는 하나님께 회개의 순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적으로 결여되어있다. 죄인의 회개행위는 율법주의나 공로적인 의를 조금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회개는 1)죄를 인식하는 지적요소 2)죄를
슬퍼하고 통회하는 감정적 요소 3) 죄를 철저히 버리는 의지적 요소를 포함한다.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 즉 성령을 거스르기 때문에
‘거듭남’이후에도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함으로 이는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회개는 우리자신의 힘으로 죄에서 돌이킬 수 없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주심으로 시작된다. 이 회개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한다. 예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안에는 인간이 회개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인간의 죄의 뿌리가 너무나 깊은 까닭에 불신자가 회개하는 것은 구스 인이 피부를 바꾸거나 표범이 반점을 바꾸는 것 이상으로
불가능하다는 선지자 예례미아의 부언이 강조되고 있다(렘13:23). 이 회개는 하나님만이 가능케 하시는 인간의 반응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의 환경을 조성하시고 죄인들에게 회개할 능력을 선물로 베푸신다. 사도바울이 여러 곳에서 회개자체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능력이자
선물이라는데 이의 없이 동의하고 있다(롬2:4 / 딤후2:25).

0113. 회개란 은혜를 내동댕이친 넒은 길의 신복의주의 교회들
기독교의 세속화는 회개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값어치에 대한 인식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회개요구도 사라진 값싼
죄사함, 통회도, 죄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도 없는 마음에 선언된 죄의 용서, 고난(십자가)도 없는 값싼 은혜의 선포로 인한 ‘신앙
편의주의’(Easy-Believism)가 만연한 이 시대는 더욱더 세상문화적 유행을 쫓아가느라 쉬운 편리추구가 앞선 믿음을 염가판매하며,
고객(교인)유치경쟁에 혈안이 되어있다. 놀랍게도 외부로부터의 핍박이 아니라 교회안에서의 값싼 은혜로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하게 파멸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믿음을 헌신과 순종에서 따로 분리시킴으로 믿는 일을 쉬운 일로 만듬으로써 실은 믿음의 자리를 고통의 지옥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추구에 목말라하는 쇼(show)식의 그 뻔질난 대형집회들, 세상기업의
CEO들보다 더 거창한 감투 -‘총재, 사무총장’등등- 들은 성경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 어지러운 허영으로 요란하다. 복음전파란 미명하에 세상에
호소하며 100-200만, 100-200개국에 지부를 둔 ‘세계적’선교기관이라는 등등의… 천국복음이 아니라 이 생(生)의 자랑들로 꽉 찬 세상을
향한 자기과시다. ‘세계적’이란 ‘세상적’이란 말에 불과하다.
우리 마음의 내적인 변화로 삶의 방향이 전환되어 ‘하나님의 얼굴’을 온전히 구하지 않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형체’를 가진 하나의 우상으로서 우리의 영혼을 계속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바울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근심을 담아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로 이어짐”(고후7:9-11)을 이야기하고 있다. 참된 회개는 우리의 수치, 자기혐오,
자책 등의 의식도 수반한다. 이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자(거듭남이나 칭의와는 달리)인간의지의 행동이다. 그러나 세상근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 우상숭배의 결과이며, 낙심의 근원에서 솟구쳐 오르는 자기사랑, 자기연민, 자기주장과 자기분노라는 특징을 뿜어내 보인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은혜의 원수가 늘 기생하고 있음으로 계속적인 회개의 습관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이 회개는, 1)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성장하게 하며 2)우리의 양심을 하나님을 향하여 깨어있게
만들고 3)우리 자신의 의(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4)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특히 반대자나 원수의 죄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려는 헛된 마음가짐에서 우리자신을 지켜준다.
0114. “…복음을 믿어라”(막1:15)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가 이뤄내야 할 임무가 아니라 믿어야하는 ‘좋은 소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초점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세우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받는
무엇이다(히12.28). ‘거저 받는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하심, 즉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위에서 지불하신 가격은 너무나
엄청나서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의(義)로는 지불이 불가능하기때문에 거저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예수께서 ‘내
교회를 세워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고 확언하셨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중심,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이 아니면, 우리의 초점이 여전히 우리의 행위에 맞춰져 있다면…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강조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을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윤리도덕주의도 아니다. 이 도덕주의라는 괴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하기도
하나 이는 심한 궤도이탈로 탈선한 상태로 있는 것이다. 한 영혼이 개과천선하여 종교와 도덕에 머문다해도 그것은 아직도 사망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종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원히 이해불가하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를 훤히 들여다보며 분석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가
도달하려고 애쓰는 계율이나 윤리가 아니라 자기형상으로 창조한 인간들에 의해 배척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을
하나님 자신과 화해할 수 있도록 스스로 낮아지신 창조주의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자신과
화해시켰다는 ‘좋은 소식’이 담겨있다. 그리스도만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고전1:30).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신뢰나 자력구원에 기초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가 물으신다. 가장 놀랍고 위대한 이야기에 대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가 아니면 도무지 들을 수가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되어야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찬송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마귀의 궤계에 속지말라. 교회는 복음이 아니다.
신앙사수? 신앙은 우리가 보호해야하는 피보호체가 아니다.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로 대신하여 읽어보시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고 해서 주님이 무너지실 분이 아니다. 즉, 신앙(예수 그리스도)은 우리의 보호를 필요로하는 피보호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신앙(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함으로 보호함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서신에 가장 많이 언급된 구절(164회)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이다.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을 때 구원을 받는 것이 기독교가 바로 그리스도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이 언급한 강조점은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0115. 나의 삶이 복음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전파하는 것이 복음전파이다. 복음은 삶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변화된 삶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다 더 잘 전파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복음을 강조하는 대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요구사항리스트들만 늘어놓기 때문에, 이 복음 없는 율법강조는 성도들을 지치게 만든다. 활동이나 프로그램들이 교묘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르침들을 교체해 버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다 더 잘 전파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복음을 강조하는 대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요구사항리스트들만 늘어놓기 때문에, 이 복음 없는 율법강조는 성도들을 지치게 만든다. 활동이나 프로그램들이 교묘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르침들을 교체해 버리게 된다.
그리스도 복음전파에 예술문화프로그램 등의 비즈니스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 위에 사도행전의 성도들처럼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행6:4)하는 복음증거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기도) 하나님의 방법(말씀)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이목에 호소하면서 옹호해야 할 대항문화가 아니다. 베드로나 바울 등의 사도들이 오늘날의 교회활동 프로그램들을 본다면 아마도 그들은
기겁하여,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칼을 빼어들 것이며,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의 ‘저주’를 다시 한 번 더 선언할 것 같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21세기나 1세기의 인간성정이나 똑같이 그대로 죄 아래 갇혀 구원을 기다리는 불행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신복음주의 부류의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기도는 먼저 나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들만이 변화를 입게 된다. 기도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바울의 세 번 간구는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의 한 부분이
됨을 가르쳤다. 즉, 기도는 모든 고난을 회피하는 통로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통일을 앞당기자”(하나님께서 통일을 허락하실 때, 우리가
통을 지연시킬 수도 있다는 뜻인가?) 라는 구호에 속지 말라. 세상을 변혁하려는 사명은 우리의 사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들의 일이
하나님의 일을 대체한다면 십자가의 원수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 안에 보루(堡壘)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지만 세상을 구하라고 보내시지는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실어 날라야 할 선언이지 변증하고 협상할 의지가 아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증거하고 섬기라고 보내신 것이다.
악(惡)은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이 우리 밖에서 오는 것이다.
0116. “너, 아시아의 허풍쟁이 조선 사람들아”
지지난 세기 우리의 땅에 도착한 초기의 미국 선교사가 쓴 시(詩)의 한 구절이다. 과장과 허풍이 심한 한민족의
피를 읽으신 분의 시 구절이다. 신(新, Neo-)복음주의는 한국인들의 기질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 ‘철학’이다. 철학이라고 말함은
‘…주의’(主義, -ism)가 붙게 되면 철학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철학도, 심지어 ‘복음주의’까지도 철학으로 타락하여 아무도
구원 못하는 기독교 사상의 하나로 전락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구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 당장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義, 롬10:5)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겠다고 발버둥친다. 신복음주의로 인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구속의 일, 즉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하는 생명과 일을 세상으로
확장시키는 사명을 감당한다는 거짓된 개념이 교회 안에 만연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속받는 피조물이지 구속하는 창조주가 아니다. 목회(牧會)나
선교의 사명수행은 목회자나 선교사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대사로, 사자로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선언 “회개하라!”로
시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지 않는다면 열심과 탈진의 악순환에 침몰될 것이다. 그리하여 “회개하라!”로 시작하고 끝을 맺은 신약성경의 주님과
제자들, 사도들이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고는 완전히 ‘다른’것을 전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65:4)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찬 511 / 내 구주 예수를 ③)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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