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6일 토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24 >









0117.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4): 누가복음①

죄(罪)아래 있는 인류는 그 죄를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고 하나님을 찾으며 여전히 흑암 중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히9:26)에,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2).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 하는 복음이 “돋는 해가 되어 위로부터 인류에게 임하셨다”(눅1:77-78). 세상 끝에 주어진 복음은 인류의 마지막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기독교는 처음과 끝이 분명한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46:10)고 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라고 말씀하신다.

복음은 글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章)중의 하나인 누가복음 2장은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고하는 천군천사들의 대합창소리로 꽉 차 있다: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 위에서는 평화요 인생들을 향하신 은총이로다 하니라”(눅2:5-14, kjv). 성경은 근본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활동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는 책이다. 태고 이래로 인간의 모든 지식적 탐구를 다 동원하여도 인간은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 조차도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모든 구도자의 자세로나 아무리 심오한『헬라』적인 신학교육으로도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신학교육의 많은 부분이 이 지점에서 크게 오해하고 실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들의 수준에 자신을 맞추시고 우리들을 찾아 내려오신 하나님의 이야기가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의 시작과 끝이다. 비록『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이지만 기독신앙은 철저하게『히브리』적 사유(思惟)를 따라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신앙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즉 헬라적인 인간의 탐구가 아니라 히브리적인 사유를 따른 하나님의 계시신앙임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는 바이다. 진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인간들은 제아무리 지혜롭고 총명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신앙은 모든 종교들과 철저하게 구분되는 유일성(배타성이 아님)을 나타내 보인다.

0118. 종교와 복음의 차이

모든 종교는 멸망받을 죄인들을 피해다닌다. 먹고 마시는 일과 손 씻는 일까지 까탈을 부리며 세리와 창녀를 피해다녔던 병적인 섬세함을 소유하였던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주위에는 죄인들이 얼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크게 경악한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없고 하나님의 긍휼, 은혜, 자비를 간구하기에는 자아가 너무나 커서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義)에 도달하겠다는 자신들의 교만에 포로가 되었다. 자기자신에게 편협하게 갇히고 이런 기초위에서 주위를 판단하고 몸짓을 사리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선천적인 자기중심성에다가 자기자신들 자아의 본질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다루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간의 가식의 껍질을 벗기고 먼저 자기 주장확대를 종식시킴으로써 자아를 죽이는 기능을 위해 주어진 율법에 대해 저들은 대담하게도 “우리가 다 들으리이다”(출20:18-21)라는 자기의에서 분출된 자기확신의 맹세로 맞섰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신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 kjv)로 더욱 담대해졌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오해는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유리, 방황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교회안에서도 복음에 대한 오해가 많은 사람들을 방황하게 만들고는 있지 않은가? ‘다른 불’을 사용하였던 ‘나답과 아비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즉각적이고도 최종적이었다(레10:1-7).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니면서도 불에 맞아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또 얼마나 자주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녔던가? 생각하면 두렵고 섬뜩해진다. 남다른 열정과 진실이 있다고 해도 우리 모두에게는 잘못된 견해가 있을 수 있으며 진리가 아니면 그 얼마나 그릇된 열심으로 오도하겠는가? 바리새인처럼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은 지식이라는 것이 열정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진리가 진실함과 크게 부딪히는 충돌을 보게 될 것이 아닌가? 성경의 계시신앙의 중심은 죄인을 찾으시는 복음이다. 종교는 죄인을 피하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보고 찾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두 죄인 강도들의 중간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한 강도를 구원하시고 숨을 거두셨던 것이다.


0119. “구유에 뉘었으니…”

말 구유, 당나귀 구유였는지?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도 침묵하는 것이 지혜이다. 확실한 것은 ‘죄 없는’ 짐승들의 구유였다. ‘죄 없고 흠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짐승들 틈바구니에서 탄생하셨다. 겸손하신 비천함의 신비이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서『버킹검』궁전같은데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가장 작은 나라, 작은 고을, 누추한 구유에서 태어나신 ‘낮아지신’ 신비를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높지는 않은가?

모든 구약성경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신약의 십자가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예표로 죽임을 당했던 구약의 그 많은 짐승들!!! 이제 아기 예수는『베들레헴』의 구유간의 짐승들까지도 위로하신다: ‘이제 너희(짐승)들을 죽이는 모든 제사는 다 끝났다!’고. 인간들의 죄악으로 인해 짐승들에게까지 미쳤던 만물의 피곤함을 돌아다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선이 온 인류를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0120. “주의 사자(천사)가…”

기독교 최초의 복음 전도자(evangelist)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였다. 사람들이 궁리해낸 종교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밑(땅)에서 찾아 올라가고자 애쓰는 종교가 아니라, 위(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 인간을 찾아온 진리라는 뜻이다.

0121. “무서워 말라…”

종교는 자유를 약속하나 실제로는 억압하고 속박한다. 종교의 근본은 사람을 무섭게 만든다. 거기다 공갈협박까지 한다. 바울이 종교인중의 종교인,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친백성들을 조직적으로 진멸하기 위해 무서운 열정으로 돌아다녔던 자였다. 종교는 복음의 최대의 원수이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으로부터 “기쁨과 평강”(롬15:13)을 선물로 받게 되면 무서움에서 자유케 된다. 진리안에 거하게 되고 주의 영을 소유함으로 공포와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0122.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큰 슬픔의 나쁜 종교’가 아님을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다. 기독교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유일성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비록 교회안에 있다할지라도 아직도 구원의 담 밖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배타적이란 타협과 양보, 협상에 의해 비(非)배타적, 즉 모든 것을 수용하며 배타적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나 친교를 통해 변개될 수 있는 인간들의 기준이나 기초에 의한 류(類)의 것이 전혀 아니다. 우리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영국인이나 멕시칸에 대해 배타적이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영국인이 멕시칸이나, 그 반대로 멕시칸이 영국인을 향해 영국인이나 멕시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조롱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영국인이나 멕시칸으로 또는 어떠한 종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유일한 것이다.

한 나라의 왕 또는 대통령이 특별한 날이 이르러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의 사면 - 즉 ‘좋은 소식’(복음) - 을 선포했다고 가정하자. 그 나라의 종교지도자들이 죄수들에 대한 왕의 사면이 부당하고 배타적이니 하고 있다면 그들은 ‘좋은 소식’을 종교의 하나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0123. “하나님께 영광…땅 위에서는 평화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되고 산업화된 현대문화는 개인간의 갈등, 우울, 조급, 학대 등등 그 밖의 많은 심리학적 질환으로 큰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과의 개선에 대해 선포하고 우리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고 자기계발이라는 색다른 구원관을 기독교회안으로 불러들여 개인적인 요청에 초점을 맞추고 진리보다 심리치료라는 용어를 채택하여 ‘다른 복음’의 영역으로 돌아서 버렸다. 죄 회개와 구원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평이 아니라 ‘드러냄, 치유와 회복’이라는 내적 자아 심리치료로 내 마음, 타인과의 화평 수준으로 인간의 필요만족에 온 심혈을 기울여왔다.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을 사람의 필요에 종속시키는 치유를 택한 것이다.

자기충족이라는 기준이 많은 세속 심리학적인 상담을 통한 단말마적이고도 즉각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풍조를 그리스도의 교회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내적자아 정도로 격하시킨 내성화(內省化)한 “다른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자비를 구하는 대신 자기자신의 내적자아를 붙들고 씨름하면서 ‘어린 시절의 상처’니 ‘가문에 흐르는 저주’운운하면서 단순하고 정결한 복음을 요란하고 조잡하게까지 만들고 있다. 예수의 복음서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그 많은 병고침(치유)의 현장에서 단 한 번도 언급한적이 없는 내용들이다(요9:1, 10:21 참조).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아담 이후로 가문에 흐르는 ‘죄의 저주’를 품고 태어난다. 첫 아담의 타락은 모든 피조물의 모든 삶이 속박되고 좌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출현은 모든 피조물의 삶이 죄에서 자유케 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땅 위에서의 평화’를 약속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누가복음의 찬송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2:30)-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하시는 일에 그 강조점을 두고 있다. 즉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평화로서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평강을 선언하고있다(눅1:79 / 2:14). 이 평강의 원천은 하나님의 자비이며 예부터 약속된 구원으로 아담과 맺어진 약속이 이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가치없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눅1:55-79). 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떠나서는 그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명확히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치유가 아니라 ‘회개,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을 통한 순종’이며, 이는 교회 안에서까지도 점점 잊혀져 가는 용어들이 되었다. 회개를 요구하는 죄(罪)보다 치유를 요구하는 끊임없는 필요들에 더 집착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즉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더 자주 증언하셨음에 유의하시라.

구약의 놋뱀사건(민21장)은 구원얻는 믿음의 성격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광야에 달린 뱀은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병 고침이나 어떠한 치유를 받는데 어떠한 신앙적인 공로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상처’니 ‘가계에 흐르는 저주’니 하면서 조상들의 죄까지 들먹여야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불뱀에 물린 자들이 고침을 받기 위해서는 단지 믿음으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 수가 있었다(요3:14,15). 기독교가 말하는 죄책과 칭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도취적인 종교/도덕주의적인 심리요법으로 주관적인 죄책감과 단지 다른 누구에게 이를 털어놓기만 하면 되는 ‘카타르시스’적인 해소만 있다면 나 자신의 치유가 급선무가 되어야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도 회개가 필요한 죄인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증거의 초점이 어느 종교안에서나 발견되어지는 사람들의 변화된 삶이 고작이라면 많은 사람들을 쉽게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사람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너무나 압도된 나머지 자신들의 이야기에는 열중할 겨를도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것은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증언’이라는 사실을 매일매일의 삶으로 확정하였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나 자기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기 때문에 늘 고난의 길, ‘좁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자아앞에서의 ‘행복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의 ‘거룩한’ 삶을 위한 부름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 512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①)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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