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 갈 수 만 있다면

우리 가정은 교회 개척과 함께 교회를 국가에 등록하여 카라칼팍스탄 정부로 부터 일년 종교비자로 받았었다. 돌아올 때 비자가 두 달 남짓 남아 있어 연장을 신청했다. 예상한 비자 수령일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어 담당자를 찾아갔다. 담당직원은 더 이상 자신들은 비자 발급 권한이 없어 우즈베키스탄 중앙정부에 비자발급 승인이 나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 무렵 우즈베키스탄은 자치공화국인 카라칼팍스탄의 자치권과 외교권을 몰수하고 영사권한을 완전히 중앙정부에 복속시킨 시점이었다. 얼마 뒤 다시 담당자를 찾아 갔을 때에 수도로 가서 우즈베키스탄 외무부에 직접 문의하라고 했다. 나는 양육하던 볼료자를 수도로 올려 보냈다. 몇 일 뒤 들려온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새로운 종교법이 지난 해부터 발효되어 외국인에게는 더 이상 종교비자를 줄 수 없게 되었는데 자치정부가 이 법령을 모르고 나에게 종교비자를 발급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중앙정부가 알게 되면서 지방정부의 종교성과 외무부, 내무부 외국인 등록부서에 문책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다음 날 내무부 외국인 담당자가 나를 불렀다. 그 나라는 비자만으로 거주할 수 없고 다시 내무부에 외국인 등록을
해야 하기에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의 정책변화를 모르고 지난 해에
비자와 외국인 등록증을 주었으나 연장신청을 계속 진행하면 자신들의 입장이 너무 곤란해 진다는 것이다. 다음에 들어 올 수 있도록 협조할 테니
비자만료 전에 나가달라고 심각하게 부탁을 했다. 자신들의 입장을 위한 립서비스라는 것을 알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 사택 앞에는
경찰 두 사람이 지키고 서 있었다.
수도에서 돌아 온 볼료자는 모슬렘이 대세인 종교성에서 외무부에 항의한 상황이어서 비자연장의 길이 없으니 일단
한국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온 가족이 짐을 채 풀기도 전에 추방이라니 당황스럽고 막막하기만 했다. 성도들은 누가 돌보고, 파송교회에는 또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하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지라 성도들과 파송교회에 이 사실을 알렸다.
성도들 중 유력한 몇 분은 자신들이 힘있는 관계들을 통해 해결할 테니 좀 기다라고 했지만 지방정부 관료들과의
관계성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결국 다시 짐을 꾸려 성도들을 격려하고, 풀뿌리 같은
지도자에게 가르칠 것을 준비시켜 놓고 수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저녁 10시 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는 새벽 2시 30분으로 연기되었다. 공항에서 다시 사택으로 돌아오자 어린 아이들은 곤한 잠을 잤다. 출발시간이 되어 아이들을 깨우자 일어나 아무 소리없이 자기 가방을 메고 눈을 부비며 신을 신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이 드신 성도들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들을 끓어 안고 울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멀뚱히 옆 눈길로 제 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3월 중순 사막의 밤 기운에 뼈 속까지 한기가 느껴졌다. 희미한 불빛 아래 난방도 없는 대합실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데 창문 너머 거칠 것 없는 사막 끝에 나지막이 뜬 별들만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검색대를 지나 성도들이 멀어진 어두운 복도를 지날 때 나는 저들을 주님께 맡기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돌아오게만 해주시고,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게만 해 주신다면 저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라고 굳게 다짐했다.
저녁 10시 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는 새벽 2시 30분으로 연기되었다. 공항에서 다시 사택으로 돌아오자 어린 아이들은 곤한 잠을 잤다. 출발시간이 되어 아이들을 깨우자 일어나 아무 소리없이 자기 가방을 메고 눈을 부비며 신을 신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이 드신 성도들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들을 끓어 안고 울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멀뚱히 옆 눈길로 제 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3월 중순 사막의 밤 기운에 뼈 속까지 한기가 느껴졌다. 희미한 불빛 아래 난방도 없는 대합실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데 창문 너머 거칠 것 없는 사막 끝에 나지막이 뜬 별들만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검색대를 지나 성도들이 멀어진 어두운 복도를 지날 때 나는 저들을 주님께 맡기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돌아오게만 해주시고,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게만 해 주신다면 저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라고 굳게 다짐했다.
파송된 지 석 달이 못되어 다시 파송교회로 돌아갔다.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의 얼굴을 어떻게 대면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담임목사님은 “그 민족에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우리 교회 성도들의 기도가 더 필요한 것 같으니 정선교사는 낙심치 말고 기회있는
대로 예배와 각종 모임에서 사역을 알리고 기도를 모아주세요”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 후 나는 담임목사님의 배려로 자주 설교를 했고 선교기도회로
모인 곳은 다 초청을 받아 사역을 소개하고 기도요청을 했다. 달이 가고 세월이 가도 비자가 나오지 않자 인사로 건네는 “언제 가세요?”라는 말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그 많은 성도들이…….,
송곳 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아내는 교회의 허락을 받아 시골의 부모님과 생활하게 하고 나는 이 곳 저 곳에서
집회를 인도하며 기도하러 다니고 있었다. 대사관에 여행비자를 신청해 보았으나 블랙리스트에 올라 거부되었다.
‘정말 다시 입국할 수 있는 것인가?’ 조바심이 나면서 혹시나 내가 부족하거나, 죄 때문에 아닌가 자신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심한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말 다시 입국할 수 있는 것인가?’ 조바심이 나면서 혹시나 내가 부족하거나, 죄 때문에 아닌가 자신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심한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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