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인간적 대안의 결과 / 창 16:1-6 (하)
아브람의 반응아무리 사래가 이성과 논리를 앞세운 그럴듯한 인간적인 대안을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언약을 받은 아브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말없이 사래의 말을 따릅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 다시 말하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대처하면서
그 주도권을 사래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여기서 ‘들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잇쉬마아’로 문자적인 뜻은 ‘그 목소리를 듣다’ 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말에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왜 아브람은 사래의 말에
따랐습니까? 그것은 막연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래의 제안이 훨씬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래의 말을 따르면, 자손의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문제의 시작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인 아브람은 사래가 이집트 여인
하갈을 데려다 주었을 때, 그녀와 동침하여 드디어 기다리던 임신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창
16:4). 하갈의 임신 소식은 사래의 인간적인 대안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임신 때문에, 그의 가정에 다른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즉,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 16:4).
여기서 ‘멸시하다’라는 말은 ‘테칼 베에이네이하’로 그 뜻은 ‘그녀의 눈들로 (그녀의 여주인을) 가볍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깔보았다’ 혹은 ‘얕잡아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일로 사래는 분노하면서, 이번에도 주도권을 쥐고 아브람을 원망을 합니다: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창 16:5). 그런데 이 문장을 문자적으로는 번역하면 ‘나의 폭력이 당신 위에’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내가 받는 모욕”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하마쉬’로 그 뜻은 ‘나의 (내가 받은) 폭력’ 혹은 ‘나의 (내가 받은) 부당함’인데, 이 단어가 창
6:11, 13절에서는 “포악함”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래가 하갈의 자만심을 얼마나 못 견뎌 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창 16:5 끝에서 거의 저주와 같은 말을 합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의 우유부단
하갈을 취한 사건 때문에 가정에 분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너무도 무책임하게 화가 난 사래만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창 16:6). 그 결과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그 학대를 당하다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하게 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 16:6).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인간적인 대안을 선택한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평화롭던 가정에 평지풍파가 일어나 여주인과 종이 미워하고 반목하다가, 결국 하갈은 임신을 한 채 광야로 도망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마저도 위태롭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에 기근이 왔을 때에, 자신의 생각대로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경험을 이미 했었습니다. 그러한 신앙경험들을 통해 그의 믿음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 온전한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또 다시 그럴듯해 보이는 인간적인 대안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인간적인 대안이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막연하게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도합니다.
하갈을 취한 사건 때문에 가정에 분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너무도 무책임하게 화가 난 사래만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창 16:6). 그 결과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그 학대를 당하다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하게 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 16:6).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인간적인 대안을 선택한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평화롭던 가정에 평지풍파가 일어나 여주인과 종이 미워하고 반목하다가, 결국 하갈은 임신을 한 채 광야로 도망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마저도 위태롭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에 기근이 왔을 때에, 자신의 생각대로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경험을 이미 했었습니다. 그러한 신앙경험들을 통해 그의 믿음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 온전한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또 다시 그럴듯해 보이는 인간적인 대안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인간적인 대안이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막연하게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도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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