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Ⅱ

‘도피성’과 예수님은 닮은 점이 많다. 세 가지 면에서 그렇다. ‘도피성’(수20:1-9)과 예수님은 ‘접근성’이 아주 뛰어나다. 도피성은 이스라엘 지역의 그 어느 곳에서 출발해도 하루 정도만 달려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두었다(요단강 좌우, 3개). 그리고 유대 전성에 의하면 도피성으로 가는 길목에 ‘미클라트’(도피성) 표지판을 두어 쉽게 그곳을 찾아 갈 수 있도록 했다. 예수님도 접근성이 아주 뛰어나신 분이다. 로마서10장12절을 보라! 주의 이름을 부르며 누구나 그에게 나가갈 수 있다. 신인(神人)의 벽을 완전히 허무셨다. 예수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고. 언제나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단지 우리는 그가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는 명령에 순종만 하면 된다.
두 번째로 ‘도피성’과 예수님은 ‘개방성’이 뛰어나다. 도피성 제도는 절대 유대인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모든 자들, 거류민, 타국인,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수:20:9절, 민35:15). 누구든지 부지중에 죄를 범하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조차도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주 개방적인 분이셨다. 그에게는 차별이 없다. 그 어떤 조건도 없다. 누구든지 그에게 믿음의 엔진을 달고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마태복음 11장28절을 보라! 땡볕 더위에 얼음 냉수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앞문, 뒷문, 옆문, 하늘 문까지 다 열어 놓으셨다.
마지막으로 도피성과 예수님은 ‘자발성’을 요구한다. 도피성은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억울한 죽음을 면하기 위해 마련된 도피성이지만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민35:25). 예수님께 나가는 것도 ‘자발성’이 필요하다. 요한계시록 3장20절 말씀을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주님이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내가 문을 열어 그에게로 들어 가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생명과 위로와 평강이 있을지라도 그에게 피하지 않는 자는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힘과 능력을 내려놓고 그에게로 달려가야 한다. 그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14:6) 되시기 때문이다.
음란의 토네이도는 사춘기 남학생의 순수한 마음에 견딜 수 없는 무게의 죄책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 쳤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에게 도피성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는 영접했다. 세월이 흘러 그는 ‘주의 종’이 되어 나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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