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이야기 (8)
5) 히포드럼 (경마장)
로마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리우스에 의해 AD 203년, ‘비잔티온’에 만들어졌다. 그 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확장되었다. 당시 경기장의 규모는 폭이 117m, 길이 480m에 달했으며, 10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각종 경기, 황제를 위한 축제 등이 거행되었던 비잔틴 시민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두 차례의 대학살이 이곳에서 발생하는 등 슬픈 역사의 비극도 함께 간직하고 있다.
경기장의 중앙 분리대는 ‘스피나’라 불렀으며, 당시 이곳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를 비롯한 많은 대리석
및 청동탑이 세워졌으나 현재는 다음 세 개의 유적만 남아있다.
◎ 히포드럼 - 청동 뱀 기둥
히포드럼에 있는 두 번째, 즉 가운데 있는 청동제 뱀 기둥(Serpentine Column)이다. 이 기둥은 이스탄불에 있는 그리스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원래 이 기둥은 페르시아 제국과의 살라미스 해전 및 플라미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31개의 그리스 도시국가가 기원전 479년, 그리스에 있는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세운 것이다. 이 기둥의 아랫부분에 31개의 도시국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콘스탄틴 대제가 이곳으로 가져온 것으로 추측된다.
히포드럼에 있는 두 번째, 즉 가운데 있는 청동제 뱀 기둥(Serpentine Column)이다. 이 기둥은 이스탄불에 있는 그리스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원래 이 기둥은 페르시아 제국과의 살라미스 해전 및 플라미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31개의 그리스 도시국가가 기원전 479년, 그리스에 있는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세운 것이다. 이 기둥의 아랫부분에 31개의 도시국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콘스탄틴 대제가 이곳으로 가져온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으로 된 3마리의 뱀이 서로 꼬여서 있는 모습의 이 탑은 원래 8미터 높이였는데, 머리 부분이 소실되어
5.5m만 남아있다. 이 뱀의 머리 위에는 금으로 된 삼각 받침대 위에 황금 꽃병이 놓여있었다고 하나, 이곳에 가져오기 전에 이미 델피에서부터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없어진 3마리의 뱀의 머리 중 하나가 1847년에 발굴되어 현재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히포드럼 - 콘스탄틴 기둥
바로 뒤에 보이는 탑이 콘스탄틴 기둥 또는 일명 거상(The Colossus)이라 하며, 이 기둥은 AD 940년, 콘스탄틴 7세에 의하여 석회석 돌(높이 32m)로 만들어 세우고 기둥 표면 위에 청동을 덮어씌우고 그 위에 농부와 어부들의 모습을 새겨 놓았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들어와 이 도시를 파괴하면서 청동을 벗겨서 다른 용도로 동전 및 주조에 사용하였다 한다. 현재는 보이는 것처럼 거칠게 보이는 돌기둥으로 남아있으며, 청동을 벗긴 흔적이 남아있다.
◎ 이집트 오벨리스크 (Egyptian Obelisk)
24m 높이의 한 개의 반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화강석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왕 “투트마시스 3세(ThutmasisⅢ)” 치하(기원전 1502-1448)에 이집트의 고대도시인 다이렐 바흐리(현재의 ‘룩소’)에 있는 카르낙 신전에 세워진 4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였는데, 약 2,000년 후인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것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와 하나의 의식을 거쳐 스키나에 세운 것이다. 이것을 세우는데 만 32일이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벨리스크는 수송 중에 40%가 훼손되어 20m 높이의 대리석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 대리석 받침대의 4면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내용이 부조되어 있다.
바로 뒤에 보이는 탑이 콘스탄틴 기둥 또는 일명 거상(The Colossus)이라 하며, 이 기둥은 AD 940년, 콘스탄틴 7세에 의하여 석회석 돌(높이 32m)로 만들어 세우고 기둥 표면 위에 청동을 덮어씌우고 그 위에 농부와 어부들의 모습을 새겨 놓았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들어와 이 도시를 파괴하면서 청동을 벗겨서 다른 용도로 동전 및 주조에 사용하였다 한다. 현재는 보이는 것처럼 거칠게 보이는 돌기둥으로 남아있으며, 청동을 벗긴 흔적이 남아있다.
◎ 이집트 오벨리스크 (Egyptian Obelisk)
24m 높이의 한 개의 반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화강석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왕 “투트마시스 3세(ThutmasisⅢ)” 치하(기원전 1502-1448)에 이집트의 고대도시인 다이렐 바흐리(현재의 ‘룩소’)에 있는 카르낙 신전에 세워진 4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였는데, 약 2,000년 후인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것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와 하나의 의식을 거쳐 스키나에 세운 것이다. 이것을 세우는데 만 32일이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벨리스크는 수송 중에 40%가 훼손되어 20m 높이의 대리석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 대리석 받침대의 4면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내용이 부조되어 있다.
북쪽 편에는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황제 및 황제 가족들, 서쪽 편에는 정복된 적들로부터 충성을
서약 받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1세 및 그의 가족이 보이고, 아래층에는 조공을 바치고 있는 정복 민족들이 부조되어 있다. 남쪽 편에는 경주를
관람하고 있는 황제 및 그의 가족과 경호원, 관람객들의 모습이 보이고, 아래쪽에는 히포드럼의 경주 코스 모습이, 바닥의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황제와 사령관 프로클루스를 칭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쪽 편에는 마차 경주의 승자에게 수여하기 위해 월계관을 손에 들고 서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과 양 옆에 그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와 호노리우스(Honorius)의 모습이 보이고, 그 뒤에는 경호원 및
관객들의 모습, 아래쪽에는 무희들 및 악대들의 모습이 보인다.
6) 그랜드 바자르
비잔틴 시대부터 시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정복자 메흐멧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1461년 나무로 지붕을 놓고 대상들의 무역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잦은 화재로 여러 번 재건되었으며, 오늘날 벽으로 둘러싸이고 돔 형식으로 된 건물은 그 면적이 20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이곳에는 5000여 개의 상점들이 작은 거리와 통로로 된 미로에 퍼져 있으며, 카펫, 공예품, 금, 은, 가죽제품 등을 취급하고 있다.
<계속>
이집트 오벨리스크 대리석 받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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