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3. 구원받고도 불안한 구원인가? (히6:4-6)
4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위 구절을 안고 불안해 하던 때가 있었다. 또 시달림까지 당해왔다. 의외로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구원얻는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사역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다. 믿음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요6:65).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The just shall live by faith”- 합2:4/롬1:17/갈3:11/히10:38).
1)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게 임할 <장래의/shall> 믿음을 보았다.
2) 로마서는 <의인(義人)/the just>을 정의하고 있으며
3)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live>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4) 히브리서는 <믿음으로/by faith> 믿음을 설명한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힘써 노력해서 타내어야 할 상급이 아니라 거저 받아 누려야 할 과분한 선물이다.
위 구절을 안고 불안해 하던 때가 있었다. 또 시달림까지 당해왔다. 의외로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구원얻는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사역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다. 믿음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요6:65).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The just shall live by faith”- 합2:4/롬1:17/갈3:11/히10:38).
1)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게 임할 <장래의/shall> 믿음을 보았다.
2) 로마서는 <의인(義人)/the just>을 정의하고 있으며
3)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live>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4) 히브리서는 <믿음으로/by faith> 믿음을 설명한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힘써 노력해서 타내어야 할 상급이 아니라 거저 받아 누려야 할 과분한 선물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6:28). 예수님은 초점을 그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위)로 초점을 옮기신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인간의 특출한 지식이나 복음전도 방법도 설득도 이 믿음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외적인 도덕적 종교적 모범적 생활로도 믿음은 오지 않는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 안에, 살아있는 믿음을 불어넣으신다(고전2:1-5). 회심은 본질적으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에 압도당해 자기만족이라는 자아(自我)에서 발가벗김을 당하기 전에는 여전히 구원은 요원하다. 구원(택하심)은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나”(살전1:4-5).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선물은 확실한 것이지 희미한 것이 될 수가 없다.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경험적으로 우리에게 확실한 실제가 된다(슥12:10/히10:29). 히6:4-6에 대한 여러 글들 중 비교적 간결한『데머리스트』(Bruce Demarest)교수의 책(‘십자가와 구원’/부흥과 개혁사刊을 추천함)에서 발췌, 정리하여 소개한다:
히브리서의 몇몇 경고성 본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대목은 히6:4-6이다. 이 편지를 받는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유업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고 그 결과 영적으로 게을러졌다(히6:12/참조5:11). 이렇게 미성숙한 상태에서 핍박까지 받다보니 그들은 안전한 유대교의 울타리 안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를 받은 이들은 <네 개의 부정 과거 분사>로 묘사된다.
(1)그들은 “비췸”을 얻었다(4절). 이는 그들이 거듭날 때 영적 조명을 받았음을 의미한다(참조. 히10:32/고후4:6/엡1:18).
(2)그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4절). 여기서 맛보았다는 말은 비유적으로 믿음을 참되게 경험하고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시34:8/벧전2:3). 이런 표현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참조 엡3:7).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라는 말은…회개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분명히 경험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3)그들은 “성령에 참예한 바”되었다(4절). 여기서 명사 메토코스(metochos, ‘참여자’, 참조 히3:1,14/12:8)는 진정으로 거듭남의 보증인 성령에 참예하는 것을 가리킨다.
(4)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5절). 여기 등장하는 또다른 맛본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의 역사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또, “한번”(4절, 참조 9:26-28/10:2/12:26-27)이라는 표현은 이미 경험한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서신을 받는 이들은 아마도 참된(유대인)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따뜻하게 “(거룩한)형제들”(3:1,12/10:19/13:1,22)이라고 불렀다.
(2)그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4절). 여기서 맛보았다는 말은 비유적으로 믿음을 참되게 경험하고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시34:8/벧전2:3). 이런 표현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참조 엡3:7).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라는 말은…회개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분명히 경험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3)그들은 “성령에 참예한 바”되었다(4절). 여기서 명사 메토코스(metochos, ‘참여자’, 참조 히3:1,14/12:8)는 진정으로 거듭남의 보증인 성령에 참예하는 것을 가리킨다.
(4)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5절). 여기 등장하는 또다른 맛본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의 역사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또, “한번”(4절, 참조 9:26-28/10:2/12:26-27)이라는 표현은 이미 경험한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서신을 받는 이들은 아마도 참된(유대인)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따뜻하게 “(거룩한)형제들”(3:1,12/10:19/13:1,22)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6절)라고 말한다. 여기서 쓰인 ‘아뒤나톤’(adynaton)이란 말은 실제적인 불가능성을 뜻한다(참조. 6:18/10:4/11:6).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버린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어떤 치유책이나 회복할 수 있는 길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만일 동요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유대교를 위해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그들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모든 가능성을 상실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그들은 구원의 유일한 기초, 즉 능력있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문장의 주어를 1인칭(1, 3절)에서 3인칭(4, 6절)으로 바꾸고 “너희에게는”(9절)이란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아가페토이’(agapetoi, ‘사랑하는 자들’)의 배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확신을 나타낸다. 그들의 선행, 사랑 및 성도들에 대한 섬김(10절)은 그들의 견인을 확증해준다. 흔들리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전해진 이런 엄중한 경고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견인을 이루시기위해 쓰시는 중요한 방편을 보여준다. 이 본문은 보존과 견인의 관계에서 인간의 책임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글을 읽은 이들 중에 실제로 배도하는 이들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참조. 요일2:19).
히브리서 기자는 히10:26-31에서 믿음의 친구인 유대인 성도 중에 “어떤 사람들”(25절)이 그리스도와 언약과 성도의 회중을 업신여기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이들은 (1)“진리를 아는 지식”(26절/참조6:4)을 받았고, (2)언약의 피로 거룩하게 함을 받았으며(29절/참조 고전6:11), (3)빛을 받았다(32절/참조6:4).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거듭난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행위는 결국 그리스도를 경멸하며 거부하고, 그분의 희생을 모독하며, 은혜의 성령을 오만하게 거절하는 행동으로 귀결된다(29절). 죄에 대해 효력을 가진 유일한 희생제물을 버린 것에 대한 형벌은 하나님의 징계의 심판이다(27-31절). 거스리(Guthrie)는 이 두 번째 본문에 “죄가 또 다시 가정적인 방식으로 언급되었고, 실제로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히10:26-31은 6:4-6과 같은 의미, 즉 유대인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무익한 유대교로 돌아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엄중한 경고로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 본문에서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고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39절/참조6:9). 흔들리는 믿음의 벗들을 격려하기 위해 히브리서 기자는 수많은 시련에도 굳건히 믿음을 지켰던 옛 믿음의 영웅들을 길게 소개하고 있다(히11장).
벌카우어(Berkouwer)는 히브리서 6장(및 다른 경고성 본문들)이 “이 서신을 읽을 사람들을 더 안전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씌어진 권면”이라고 결론지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의 배도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 처한 교회를 진심으로 권면하고 교회에 믿음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기 쉬운 온갖 잘못된 생각을 피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0164. 그리스도의 완전성안에 숨겨진 그리스도인의 불완전함
『제2바티칸공회』에서는 구원을 실존적으로 재정의, 구원의 범위를 비기독신자와 무신론자까지 포함하도록 넓힘으로써 오늘날의 로마교황청 신학은 소위 ‘만인구원설’(universalism)의 견해를 취한다. 『칼 바르트』신학이 로마교황『요한』23세로부터 극찬(?)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2006년 80여 개국에서 3,000여 명이 참석한 서울에서 있은 ‘세계감리교대회’에서 로마교황청 대표와 마주앉았다는 사실 자체가『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91)에 대한 모독이며, ‘칭의론’문서 합의교환에 도달했다는 것은 ‘대(大)저주’에 속하는 어두움이다. 지도자들을 통한 “배도”(살후2장)는 예언을 지나 이미 현실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성숙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절대적 도덕성이나 영적 완전에는 아무도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며 자신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죄를 너무 가볍게 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무거운 우리들의 죄짐을 옮기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십자가 위에서 찢겨지고 피흘리신 십자가 신학의 본질에 무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거할 때에만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보혈로 덮으신 우리의 불완전을 완전으로 보시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의 ‘잘남’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로 우리의 ‘못남’, 또는 잘못해서 잃어버리는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태어난’자녀(육으로나, 성령으로나)는 언제나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분의 자녀임을 명심해야한다.
신령하신 주 성령
나의 맘에 계시사
망령된 일 고치고
홀로 주관합소서
(찬 176 / 영화로신 주 성령 ④)
나의 맘에 계시사
망령된 일 고치고
홀로 주관합소서
(찬 176 / 영화로신 주 성령 ④)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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