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다가 살아나다
부산 수영로교회에 도착한 나는 선교대회 기간 동안 졸지에 예기치 않던 스팥 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선교대회가 끝난
후에도 정필도목사님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선교사 세 가정을 데리고 삼 일 동안 틈틈이 특강을 하시면서 위로와 격려를 주셨다. 선교담당목사에게
나의 처한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으나 그 때 까지는 어떤 결정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기도하자고 했다.
아내의 몸이 힘들었지만
교단파송을 받기 위해서는 일 년에 한 번 밖에 없는 선교사훈련을 먼저 마쳐야 했기에 수술은 뒤로 미루어 놓았다. 훈련을 마치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7월 중순이 되었다.
선교사들에게 특혜가 있는 병원을 수소문해 김포공항 근처에 있는 서안복음병원을 찾아갔다. 각종 검사를 마치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자궁에 있는 큰 근종과 상태가 좋지 않은 왼쪽 나팔관을 제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내의 수술을 시작하기 전 나를 불러
의사선생님들과 간호사분들이 함께 손을 잡고 기도를 했다. 나는 수술시간 내내 교회로 가서 착잡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수술은 잘 끝났고 두 주
정도 입원하여 회복을 기다려야 했다. 아내는 더운 날씨에 수술부위가 잘 아물지 않아 고생을 했지만 수술 시에 경험했던 은혜로 잘 견디었다.
아내가 전신 마취중에도 의식이 살아 의사와 간호사들의 수술의 모든 과정이 예배로 하나님께 올라가 것을 보았다고 간증을 했다.
퇴원 날이 가까워 지면서 병원비를 마련을 위해 기도하면 마이너스 통장부터 통장잔고를 다 찾아 모았다. 예상한
병원비 보다 몇 만원이 많았다. 퇴원 후 그래도 빨리 회복되도록 몸에 좋다는 음식 한 그릇은 사 먹이고 처가로 데려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친구가 섬기던 개척교회에서 오래된 차를 빌려 병원으로 향했으나 무슨 일지 몇 분이 안되어 에어컨이 고장이 나더니 차는 삼복 더위에 찜통으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는 짐을 챙겨 퇴원수속을 밟기 위해 수부로 갔다. 아내는 천천히 걸어서 약국 앞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청구서를 받아 든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913,000원. 예상했던 금액보다 오만 몇 천원이 더 나온 것이다.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직원은
수술비 전체 금액 중 반은 할인해 주었지만 아내가 맞은 무통주사는 할인이 되지 않아 그 금액이라는 것이다.

나는 청구서를 들고 아내의 눈을 피하여 화장실로
갔다. 지갑을 열어 뒤지고는 가지고 온 돈을 세고 또 세었다. 모두 903,000원. 만원이 모자랐다. 뒤지고 뒤졌으나 다른 돈은 없었다.
당황스럽고 견딜 수 없는 비참한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의 눈을 피해 ATM기계로 가서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현금카드를 넣었다.
예금인출 키를 눌렀으나 나온 영수증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잔고 3300원. 만원 이하는 인출할 없습니다.” 나는 거의 패닉 상태가 되고
있었다.
수부에 갔던 내가 불안한 모습으로 안절부절 돌아다니자 아내는 핏기 없는 얼굴로 애써 웃어 보이면서 “여보, 우리
언제가요?”라고 한다.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단순히 돈 만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다음에 갔다 준다고 하고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하나님과 관계의 문제였다. 아무리 틀어 막으려 해도 한 쪽 구석에선 이런 생각이 밀고 올라왔다.
“그래, 이건 저주를 받지
않고서는 있을 수는 없는 일이야. 땅끝까지 순종해 간 너희가 파송교회에서도 짤렸지, 이제 만원이 없어 이렇게 붙들려 있잖아. 너희 집 오 남매,
처가 구 남매 중 누구 하나 이 절박한 순간에 너희에게 관심을 기울이니? 너희는 하나님의 눈 밖에 났어!”
나는 속으로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나님. 제가 열 여덟 살 주님을 영접하고 지금까지 주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다 했잖습니까? 선교사되라고 해서 신학교 갔고,
신학교 입학하자마자 합동교단 속한 날 통합측에 교육전도사로 보내실 때도 갔고, 덕유산 중턱 무교회촌에 개척하라고 하실 때도 갔고, 다시 땅 끝
카라칼팍스탄까지 갔잖아요. 완전한 순종은 못했지만 할 만큼은 했잖아요. 저도 타락한 종들 많이 보았습니다. 오늘 이 상황이 되고 보니 그들이 왜
돈 때문에 타락했는지 알겠습니다. 주님, 지금 이 시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더 이상은 저의 중심과 진정성을 드릴 수 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목사의 옷을 벗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쪽에서 올라는 다른 애절한 마음의 생각이 있었다.
“시험이다. 견뎌야 한다.
시험이란다. 넘어야 산단다”
나는 두 사이에 끼인채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 몇 분이 영겁과 같았다.
아내는 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왜 안가냐고 물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병원비 만원이 모자란다고 대답했다. 이
말에 아내는 꼭 꺼진 풍선에 마지막 바람이 빠지듯 목을 떨구며 주저 앉아버렸다.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내 마음엔 “아, 이것이
죽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여보, 그 지갑 좀 다시 보세요.” “응, 몇 번을 봤어!” 몇 분이 지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지갑을 보라고 했다. 나는 곤욕스럽고 고통스러워 지갑을 꺼내 들고는 아내를 향해 까발리듯 펼치며 “봐,
없잖아!”라고 하며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런데 왠 일인가! 오른 손 중지 끝에 만원 짜리 신권지폐 하나가 딸려 나오는 것이었다. 주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산 것이다. 나는 시험이었음을 그제야 알아 차렸다. 눈물을 흘리며 남은 삶에 마지막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도 주님을
위해 드릴 것을 마음으로 서원했다. 나는 수부로 가서 그 만원을 더해 병원비를 지급하고 집으로 향했다. 중복 날씨에 차는 찜통이었지만 내 마음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회복을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에 두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야 했다. 파송교회가 나서질 않지만 현장에서
기다리는 성도들을 생각하니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기도하는데 권사님 한 분이 전화를 하셔 나를
찾으셨다. 나의 사정을 다 아신 권사님이 파송교회가 나설 때까지 후원을 하시겠다며 매월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권사님도 잘 아는
친구 목사가 개척교회라 어렵지만 일부를 부담하기로 했으니 남은 금액을 감당하시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 권사님은 항공비와 생활비라며 헌금을
건네셨다. 그리고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사역하라고 위로해 주셨다.

항공권을 구입하고 후원하기로 한 친구에게 내일 출발한다고 전화를 했다. 친구 목사는 출발 전에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가라고 요청을 했다. 새벽기도 후 아침을 먹으러 가자며 지갑을 찾는다고 서랍을 열더니 탄성을 질렀다.
“정목사, 사모님 수술비 어떻게
됐어? 야, 내 정신 좀 봐라! 우리교회에서 사모님 수술비를 하라고 헌금을 해서 내게 전달했는데 서랍에 넣어두고 깜깜하게
잊어버렸네!”
나는 “야, 인생아! 잊어버릴 것을 잊어버려야지 그걸 잊어버리냐!” 농담 삼아 한 마디 했지만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친구
목사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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