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6일 토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24 >









0117.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4): 누가복음①

죄(罪)아래 있는 인류는 그 죄를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고 하나님을 찾으며 여전히 흑암 중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히9:26)에,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2).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 하는 복음이 “돋는 해가 되어 위로부터 인류에게 임하셨다”(눅1:77-78). 세상 끝에 주어진 복음은 인류의 마지막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기독교는 처음과 끝이 분명한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46:10)고 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라고 말씀하신다.

복음은 글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章)중의 하나인 누가복음 2장은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고하는 천군천사들의 대합창소리로 꽉 차 있다: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 위에서는 평화요 인생들을 향하신 은총이로다 하니라”(눅2:5-14, kjv). 성경은 근본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활동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는 책이다. 태고 이래로 인간의 모든 지식적 탐구를 다 동원하여도 인간은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 조차도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모든 구도자의 자세로나 아무리 심오한『헬라』적인 신학교육으로도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신학교육의 많은 부분이 이 지점에서 크게 오해하고 실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들의 수준에 자신을 맞추시고 우리들을 찾아 내려오신 하나님의 이야기가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의 시작과 끝이다. 비록『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이지만 기독신앙은 철저하게『히브리』적 사유(思惟)를 따라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신앙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즉 헬라적인 인간의 탐구가 아니라 히브리적인 사유를 따른 하나님의 계시신앙임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는 바이다. 진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인간들은 제아무리 지혜롭고 총명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신앙은 모든 종교들과 철저하게 구분되는 유일성(배타성이 아님)을 나타내 보인다.

0118. 종교와 복음의 차이

모든 종교는 멸망받을 죄인들을 피해다닌다. 먹고 마시는 일과 손 씻는 일까지 까탈을 부리며 세리와 창녀를 피해다녔던 병적인 섬세함을 소유하였던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주위에는 죄인들이 얼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크게 경악한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없고 하나님의 긍휼, 은혜, 자비를 간구하기에는 자아가 너무나 커서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義)에 도달하겠다는 자신들의 교만에 포로가 되었다. 자기자신에게 편협하게 갇히고 이런 기초위에서 주위를 판단하고 몸짓을 사리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선천적인 자기중심성에다가 자기자신들 자아의 본질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다루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간의 가식의 껍질을 벗기고 먼저 자기 주장확대를 종식시킴으로써 자아를 죽이는 기능을 위해 주어진 율법에 대해 저들은 대담하게도 “우리가 다 들으리이다”(출20:18-21)라는 자기의에서 분출된 자기확신의 맹세로 맞섰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신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 kjv)로 더욱 담대해졌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오해는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유리, 방황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교회안에서도 복음에 대한 오해가 많은 사람들을 방황하게 만들고는 있지 않은가? ‘다른 불’을 사용하였던 ‘나답과 아비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즉각적이고도 최종적이었다(레10:1-7).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니면서도 불에 맞아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또 얼마나 자주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녔던가? 생각하면 두렵고 섬뜩해진다. 남다른 열정과 진실이 있다고 해도 우리 모두에게는 잘못된 견해가 있을 수 있으며 진리가 아니면 그 얼마나 그릇된 열심으로 오도하겠는가? 바리새인처럼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은 지식이라는 것이 열정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진리가 진실함과 크게 부딪히는 충돌을 보게 될 것이 아닌가? 성경의 계시신앙의 중심은 죄인을 찾으시는 복음이다. 종교는 죄인을 피하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보고 찾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두 죄인 강도들의 중간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한 강도를 구원하시고 숨을 거두셨던 것이다.


0119. “구유에 뉘었으니…”

말 구유, 당나귀 구유였는지?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도 침묵하는 것이 지혜이다. 확실한 것은 ‘죄 없는’ 짐승들의 구유였다. ‘죄 없고 흠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짐승들 틈바구니에서 탄생하셨다. 겸손하신 비천함의 신비이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서『버킹검』궁전같은데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가장 작은 나라, 작은 고을, 누추한 구유에서 태어나신 ‘낮아지신’ 신비를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높지는 않은가?

모든 구약성경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신약의 십자가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예표로 죽임을 당했던 구약의 그 많은 짐승들!!! 이제 아기 예수는『베들레헴』의 구유간의 짐승들까지도 위로하신다: ‘이제 너희(짐승)들을 죽이는 모든 제사는 다 끝났다!’고. 인간들의 죄악으로 인해 짐승들에게까지 미쳤던 만물의 피곤함을 돌아다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선이 온 인류를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0120. “주의 사자(천사)가…”

기독교 최초의 복음 전도자(evangelist)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였다. 사람들이 궁리해낸 종교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밑(땅)에서 찾아 올라가고자 애쓰는 종교가 아니라, 위(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 인간을 찾아온 진리라는 뜻이다.

0121. “무서워 말라…”

종교는 자유를 약속하나 실제로는 억압하고 속박한다. 종교의 근본은 사람을 무섭게 만든다. 거기다 공갈협박까지 한다. 바울이 종교인중의 종교인,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친백성들을 조직적으로 진멸하기 위해 무서운 열정으로 돌아다녔던 자였다. 종교는 복음의 최대의 원수이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으로부터 “기쁨과 평강”(롬15:13)을 선물로 받게 되면 무서움에서 자유케 된다. 진리안에 거하게 되고 주의 영을 소유함으로 공포와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0122.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큰 슬픔의 나쁜 종교’가 아님을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다. 기독교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유일성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비록 교회안에 있다할지라도 아직도 구원의 담 밖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배타적이란 타협과 양보, 협상에 의해 비(非)배타적, 즉 모든 것을 수용하며 배타적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나 친교를 통해 변개될 수 있는 인간들의 기준이나 기초에 의한 류(類)의 것이 전혀 아니다. 우리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영국인이나 멕시칸에 대해 배타적이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영국인이 멕시칸이나, 그 반대로 멕시칸이 영국인을 향해 영국인이나 멕시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조롱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영국인이나 멕시칸으로 또는 어떠한 종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유일한 것이다.

한 나라의 왕 또는 대통령이 특별한 날이 이르러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의 사면 - 즉 ‘좋은 소식’(복음) - 을 선포했다고 가정하자. 그 나라의 종교지도자들이 죄수들에 대한 왕의 사면이 부당하고 배타적이니 하고 있다면 그들은 ‘좋은 소식’을 종교의 하나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0123. “하나님께 영광…땅 위에서는 평화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되고 산업화된 현대문화는 개인간의 갈등, 우울, 조급, 학대 등등 그 밖의 많은 심리학적 질환으로 큰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과의 개선에 대해 선포하고 우리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고 자기계발이라는 색다른 구원관을 기독교회안으로 불러들여 개인적인 요청에 초점을 맞추고 진리보다 심리치료라는 용어를 채택하여 ‘다른 복음’의 영역으로 돌아서 버렸다. 죄 회개와 구원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평이 아니라 ‘드러냄, 치유와 회복’이라는 내적 자아 심리치료로 내 마음, 타인과의 화평 수준으로 인간의 필요만족에 온 심혈을 기울여왔다.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을 사람의 필요에 종속시키는 치유를 택한 것이다.

자기충족이라는 기준이 많은 세속 심리학적인 상담을 통한 단말마적이고도 즉각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풍조를 그리스도의 교회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내적자아 정도로 격하시킨 내성화(內省化)한 “다른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자비를 구하는 대신 자기자신의 내적자아를 붙들고 씨름하면서 ‘어린 시절의 상처’니 ‘가문에 흐르는 저주’운운하면서 단순하고 정결한 복음을 요란하고 조잡하게까지 만들고 있다. 예수의 복음서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그 많은 병고침(치유)의 현장에서 단 한 번도 언급한적이 없는 내용들이다(요9:1, 10:21 참조).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아담 이후로 가문에 흐르는 ‘죄의 저주’를 품고 태어난다. 첫 아담의 타락은 모든 피조물의 모든 삶이 속박되고 좌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출현은 모든 피조물의 삶이 죄에서 자유케 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땅 위에서의 평화’를 약속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누가복음의 찬송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2:30)-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하시는 일에 그 강조점을 두고 있다. 즉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평화로서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평강을 선언하고있다(눅1:79 / 2:14). 이 평강의 원천은 하나님의 자비이며 예부터 약속된 구원으로 아담과 맺어진 약속이 이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가치없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눅1:55-79). 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떠나서는 그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명확히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치유가 아니라 ‘회개,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을 통한 순종’이며, 이는 교회 안에서까지도 점점 잊혀져 가는 용어들이 되었다. 회개를 요구하는 죄(罪)보다 치유를 요구하는 끊임없는 필요들에 더 집착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즉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더 자주 증언하셨음에 유의하시라.

구약의 놋뱀사건(민21장)은 구원얻는 믿음의 성격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광야에 달린 뱀은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병 고침이나 어떠한 치유를 받는데 어떠한 신앙적인 공로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상처’니 ‘가계에 흐르는 저주’니 하면서 조상들의 죄까지 들먹여야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불뱀에 물린 자들이 고침을 받기 위해서는 단지 믿음으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 수가 있었다(요3:14,15). 기독교가 말하는 죄책과 칭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도취적인 종교/도덕주의적인 심리요법으로 주관적인 죄책감과 단지 다른 누구에게 이를 털어놓기만 하면 되는 ‘카타르시스’적인 해소만 있다면 나 자신의 치유가 급선무가 되어야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도 회개가 필요한 죄인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증거의 초점이 어느 종교안에서나 발견되어지는 사람들의 변화된 삶이 고작이라면 많은 사람들을 쉽게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사람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너무나 압도된 나머지 자신들의 이야기에는 열중할 겨를도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것은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증언’이라는 사실을 매일매일의 삶으로 확정하였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나 자기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기 때문에 늘 고난의 길, ‘좁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자아앞에서의 ‘행복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의 ‘거룩한’ 삶을 위한 부름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 512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①)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교회음악 Plus










찬송이란 2



찬송은 우주적인 교회에 대한 성도들의 증언과 같다. 교파를 초월한 교회주의의 한 요소로서, 지속적인 믿음의 표현과 교회생활의 표현이다. 찬송은 이 땅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교회가 성도들이 하나되게 하는, 가장 좋은 도구이며 예수님의 기도와 마지막 유언을 이루어 나가는 최선의 도구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표준새번역 요한복음 17:11)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작곡자나 작시자가 누구인지 질문을 한다. 왜냐하면, 그 찬송의 가사가 좋은 신앙이어야 하며 음악도 신앙적인 좋은 음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좋은 찬송을 부를 때 이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찬송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며 우리 서로가 하나가 되는 좋은 길이 된다.

찬송은 우리의 신앙고백에 대한 증언이다. 찬송이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의 중요한 점을 강조하며 신앙의 중요한 요소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찬송은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들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찬송은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들을 가지고 있다. 대단히 중요한 믿음의 뿌리를 찬송을 통해 찾게 되며, 믿음의 조상들과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형성되어 성장하여 왔는지를 알게 하여 준다. 좋은 찬송은 옛날과 현재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옛날 찬송들은 시대를 지나면서 조금씩 재편집되어 그 의미를 시대와 나라를 넘어서 신앙을 전하고 있다. 이 시대의 찬송들도 그 유산을 이어 신앙의 아름다운 전통을 찬송을 통해 이어가기를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원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가? 정숙하게 노래해야 한다. 찬송의 노래의 정숙이란 무엇인가? 가사가 성경적이어야 한다. 리듬이 경건해야 한다. 하모니가 경건해야 한다.

음악적 정서, 감정, 찬송은 신령과 진정으로 찬송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영적인 찬양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찬송할 때, 비로소 영적인 찬송이 이루어진다. 신앙인의 음악적 정서, 감정은 영적이어야 한다.

찬송의 영적인 정서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연령마다 음악의 정서가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10대 전후는 율동적인 음악정서가 그들을 지배한다. 20대는 리듬적인 음악이 이들의 정서를 지배한다. 3,40대에는 선율적인 음악을 좋아한다. 5,60대에는 가사적인 매력에 중점을 두게 된다. 사람마다 연령마다 관심과 정서가 다름이 있어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선호하게 된다. 그렇지만 찬송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 보며 자기 중심의 정서와 감정을 내세우기 보다는 하나님 중심의 영적인 공통점을 찾아 하나가 되어 찬송을 바르게 드리기를 기도한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6)



지난호에서 북한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배경과 그로부터‘사회주의 겉옷, 자본주의 속옷 입은 오늘날의 북한’이라는 표현으로 오늘날의 북한 자본주의경제구조를 다루었는데요, 여러분께 얼마나 피부로 다가갔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북한내에서 일어난 경제구조변화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번호에서는 지난호에 이어 약속한 대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과 함께 변화되어가고 있는 북한주민들의 가치관(경제관)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이 나눔을 통해 통일된 한반도에서 함께 살아야 할 북한주민들을 이해하고 한걸음 다가서는데 있어서 해외에 사시는 우리 한인 디아스포라 코리안들이(그리스도인) 고민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함께 보기 원합니다.
북한 사람들의 가치관(경제관)
북한의 시장경제 활성화로 인해 변화된 북한사람들의 가치관(경제관)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라는 새로운 ‘생존철학’으로, 중요한 가치관으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이전에는 ‘경제관’에 대한 개념보다는 ‘사상관’이 투철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90년대 중반이후 그렇게 ‘사상관’의 중심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의 ‘가치관’이 ‘경제관’에 더 무게를 두고 지금까지 북한은 눈부시게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오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주의체제 시스템이 돌아갈 때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일(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권력과 신분을 이용하여 많은 군중의 눈을 속여 돈과 뇌물의 논리로 산 이들도 있지만)입니다. 이 가치관이 아주 강력하게 북한주민들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 살아남아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깝게는 가족, 멀게는 친지와 친구, 이웃들과 동료들이 굶어죽어 갔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 때에도 돈이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지금도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먹을 수 있다’라는, 즉 ‘돈만 있으면 북한도 살만한 곳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한주민들의 돈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높습니다. 이것은 정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북한의 90년대 중반이후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경제(장마당)’문화와 더불어 많은 이들에게 각인된 가치관(경제관)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읽으시는 한인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이 3대 독재체제하에 무조건적인 ‘충성심’으로 무지하게 살아오던 것 보다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드시는가요? 아마도 진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고백하시는 분들은 당연히‘아니요’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런 북한의 실태를 들으시면서 아마도 여러분 마음안에 들어오시는 생각은, 속히 그 땅에 복음이 들어가야 한 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신처럼 우상시하고 살아왔던 그들에게 열려진 길이 ‘배금주의’이고 물질만능주의라는 사실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껏 사람을 신으로 알고 속고 살아왔던 그들이 이제 가야 할 길은 오직 ‘복음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들이 돈의 노예가 되기전에 북한에 다양한 모양으로 연결되어있는 ‘복음의 통로와 문들’이 더 활짝 열리도록 함께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하며, 통일된 코리아가 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으로 거듭나서 열방을 섬기고 축복하는 통로의 나라가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다음호에서는 좀 더 폭넓은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원합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6 장 사랑스러운 톰보이들


“아내가 다 했지요. 저는 그저 설교와 기도만 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한 도시에서 그 지역 선교사들을 초청해서 치유 세미나를 가졌다. 두 번에 나누어서 3일 동안을 풀로 만나면서 함께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치유의 은혜를 경험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참석한 여성들 중의 60-70 퍼센트가 톰보이인 것이다. 나의 일방적인 진단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열면서 본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40대 후반의 사모 한 사람을 “톰보이 클럽”회장으로 임명(?)을 하고 톰보이 모임을 갖기를 부탁하고 그곳을 떠나왔다. 그 부부는 지난 십년 동안 여러 번의 건축을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인데 남편 목사님이 이렇게 말을 한다. “모든 건축은 제 아내가 시작해서 주관하고 완성했습니다. 저는 그저 설교와 기도만 했습니다.” 밴쿠버로 돌아온지 한참 후에 그 톰보이 사모가 장문의 메일을 보내왔다.

구 목사님 내외분께 문안드립니다. 세미나 동안 받은 은혜가 너무나 많았고 삶에 새로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 (중략) ... 저희 부부가 세미나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체험했기에 삶에 적용하며 서로 잘 해보려고 하는데 더 많이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생각에 맞추어 상대방을 변화시키려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도우심이 없이는 어렵다는 것, 그래서 자신를 내려놓고 아버지의 은혜 앞에 겸손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 (중략) ... 목사님이 떠나시고 다음 주 토요일에 톰보이 클럽 첫 번 모임을 가졌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중보 기도나 말씀 연구를 미루어두고 부담 없이 서로의 삶의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 (하략) ...

기쁜 마음으로 바로 답신을 띄운다.
너무 반가운 메일입니다. 톰보이에게서 이렇게 긴 메일을 받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랍니다. 하하! 톰보이들은 앉아서 차분히 글을 쓰는 것을 아주 어려워하기 때문이고 글 대신에 바로 행동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 (중략) ... 이제 사모님에게 한 가지 중요하게 부탁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곳의 여러 톰보이들이 제게 메일을 보내도록 격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글로 자기 생각을 써야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조금씩 깨달아 알아가게 되어 있답니다. 글을 쓰면서 “아~~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구나 ...” 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 (중략) ... 사모님, 몇 가지를 권면합니다
1) 여성들끼리 만나서 자주 그냥 대화하도록 노력을 하십시오. 기도회 하기 전에.
해결할 용건이 없는 수다와 넋두리의 시간이 될수록 좋습니다
2) 또 주기적으로 밖으로 좀 놀러 다니십시오 (사역에만 잡히지 말고). 그룹을 지어서 당일치기 여행을 하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하루라도 자구 오면 더 좋고요.
3) 주기적으로 저 같은 사람에게 메일을 하십시오. “메일 할 용건이 없는데요...” 하지 마시고 마음이 답답할 때에 “용건 없이” 마음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성스러운 여성들에게는 매일 매일의 모~든 일이 중요하지만 톰보이들은 사람들이 듣고 놀랄만한 뉴스가 아니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남성적인 사고입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몇 번씩 시시한 일(?)로 전화통을 오래 붙잡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열을 받습니다. “저렇게 할일이 없나...인생을 낭비하는구나...”하고 혀를 찹니다. 그런데 여자들에게는 그게 정상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모습입니다. 그곳 톰보이들도 서서히 그렇게 되어가기를 기대 합니다. 하하!! ... (하략) ...

오랫동안 메일이 끊겼다. 그 지역 메일 사정이 나쁘기도 하고 그 분들의 사역 현장이 외부 사정으로 큰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메일 교신이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주님의 치유는 계속되고 있으리라.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얼마전에 한 성도로부터 목사님도 방언 기도를 하는지요?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은사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북미주에서 또 다시 잘못된 신비주의에 대한 흐름이 생기자 아마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전 오래전 신학교 때부터 방언 기도를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은사에 대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사모도 합니다. 그러나 은사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편리한 도구일 뿐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우려가 되는 것은 은사 자체가 목적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하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는듯합니다.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것 자체를 믿음 생활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북미주의 교회들이 이런 영향권 안에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범종교적 유행이 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에 있어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집회에 참여해서 안수와 기도를 통해 신비한 현상들을 경험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기독교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일어납니다. 방언, 치유, 예언, 입신 더군다나 무아지경에 이르는 단계에서 통증 없이 실제로 칼로 머리를 찌르고, 가슴을 관통시키고, 송곳으로 입안을 찔러서 밖으로 튀어 나오게 합니다. 신기하게도 상처 난 곳은 피가 거의 없고, 치료되는 회복 속도도 놀라울 정도로 빠릅니다.

현대의 종교들에게 있어서 이런 현상은 서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공통된 모습에서 바로 샤머니즘의 얼굴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은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 생명이 매우 끈질깁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만 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삼국 시대에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한민족의 정신문화를 지배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가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백년 유교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처음의 불교와 유교는 토착화 되어지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다분히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 샤머니즘의 얼굴이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는 안전한가? 우리의 신앙은 안전한가?”입니다. 현재 샤머니즘은 기독교에 얼씬도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전 이 질문에 부정적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는 기복신앙의 모습에서 최근에는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신비주의 형태로 활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특히 북미주의 교회들이 이 유행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영적 현상 자체에 뿌리를 두는 신앙은 자동적으로 영적 쾌락주의를 형성하게 됩니다. 좀 더 자극적이고 강한 현상을 쫓게 되면서 그런 것을 찾아 전전긍긍합니다. 반면 믿음의 성숙과 인격적인 성장과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분히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샤머니즘적인 그림자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 영향으로 교회 공동체를 해치는 모습을 주변에서 종종 봅니다.

요즘은 잘못된 종말론과 부합하여 영적 엘리트주의로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음모론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영적 엘리트주의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잘 모르는 것을 체험하고 특별한 비밀을 소수만 알고 있다는 희열이 잘못된 엘리트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최근에 논란거리로 북미주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잘못된 은사주의 운동과 종말론이 이것에 해당되지 않는가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강단에서 말씀 중심의 설교가 살아나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의 말씀보다 강한 파워는 없습니다. 말씀보다 더한 설득력은 없습니다. 풍성한 말씀이 있으면 유행을 탈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강단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이 땅에 건강한 교회의 부흥이 시작되리라 생각합니다.

[라일주 목사 / 로고스교회 / 778-898-1558]





아브라함 이야기



선지자 아브라함 / 창 20:1-7 (하)



아브라함의 사명아비멜렉의 온전함을 인정하신 후,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다 죽을 줄 알지니라” (7절).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선지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할 때 아비멜렉의 병이 나을 것이며 불임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란 말은 히브리어로 ‘나비’ (nāḇı̂ʾ)이며, 그 직무는 중재하는 것 즉, 중보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서 하나님께 대신 기도하면 아비멜렉의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책망과 아브라함의 변명아비멜렉은 잠에서 깨자마자 그의 신하들을 불러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아브라함을 불러서 책망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9절). 그러자 아브라함이 변명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0절). 즉,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아니기에 사라를 빼앗고자 자신을 죽일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도 사라가 자신의 이복 누이라고 밝힙니다: “또 그녀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2절). 여기서 이복누이란 ‘나의 아버지의 딸’로 배다른 오누이라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사라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3절). 이것은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시도 (영적인 약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을 깨달은 아브라함아브라함의 변명을 들은 후 아비멜렉은 그의 아내 사라를 돌려주는 것은 물론 양과 소와 종들, 그리고 은 천 개를 아브라함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준 것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꿈에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7절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7절). 다시 말하면, 아비멜렉을 통해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부름받은 목적과 자신이 해야 할 일 (천하만민이 복을 받는 일)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3);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 18:8).

중보 기도자 아브라함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중재자로서 아브라함의 사명은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중보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고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아브라함만 잘 먹고 잘 살게 하거나 높이 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천하만민이 구원받고 복을 받게 하시고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환경이 어려워지자 사명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 (두려움과 거짓말)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직도 신앙적으로 약함을 아신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통해서 책망은 물론 사명까지 일깨워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의 사명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셨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세상만민이 복을 받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중보 기도를 통해 이룰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도 세상을 위해 중보기도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중보 기도를 통해서 닫혔던 문들이 열려지고, 막혔던 곳이 허물어지며 화해와 통합의 역사가 일어나 심령마다, 가정마다, 직장마다, 교회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살 맛나는 세상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재미있는 사도행전



매력적인 성도의 두 가지 특징 (1)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능이나 학벌, 운이 아닌 바로 ’매력‘이다’라고 규정했다. 그러면 매력이란 무엇인가? 매력은 자석이다. 매력은 끌어 당기는 힘이다. 무엇을? 다른 사람을 나에게로 끌어 당기는 힘을 말한다.


몇 해 전, SBS에서 ‘매력 DNA’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에 관심을 가졌다. 이 프로의 핵심은 ‘사람의 매력은 어디에서 발생되는가 였다. 이 물음에 답을 내리기 위해 오프라 윈프리, 오바마 대통령, 히딩크 감독, 유재석, 김연아, 이효리 등을 등장 시켰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을 찾았다. 많은 공통된 매력 요소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 초고의 핵심 두 가지는 첫째, 열린마음 둘째, 열린 귀였다.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의 곁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머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기 주관이 너무 강하고 마음이 굳어 있고 닫혀 있는 사람 곁에는 항상 사람이 떠난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 평지가 되면, 거기엔 어떤 울타리도 벽도 허물어 진다. 그래서 열린 마음의 소유자는 끌어 당기는 힘이 강하여 자기 주위에 사람들로 늘 넘쳐 나는 것이다.

공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이 말을 배우는 데는 2년, 경청하는 데는 60년이 걸린다”. 귀가 열렸다는 말은 주위의 의견을 잘 들을 줄 안다는 말이다. 반대로 귀가 닫혔다는 말은 아집과 독선에 빠져 있다는 말이다. 귀가 닫힌 사람은 늘 화를 부르고, 엄청난 피해를 다른 사람에게 안겨 줄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사도바울은 일찍이 말세의 징조 가운데 하나로 이것을 지목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하니하며 귀가 가려워서”(딤후4:3),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4). 말세의 징조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에 안테나를 높이 세워 놓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참으로 매력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그들의 마음과 귀가 진지하게 열려져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베뢰아 사람들이다. 바울은 베뢰아 사람들을 향해서 마음이 ‘너그러운’사람들이라 했다. NLT 성경에 보면 ‘너그럽다’”(행17:11)는 말을 오픈 마인드(Open-mind)로 번역했다. 그리고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귀를 활짝 열어 놓은 자들이었다(행17:11). 이런 베뢰아 사람들에게 바울은 엄청난 매력을 느꼈다.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데살로니가 사람들 보다 더(행17:11,살전1:2-8) 오픈 마인드를 가진 자들이라고까지 했으니 말이다. (다음 주 계속)

황보창완 목사 (글로리아 한인교회) / 778-708-5540
 
 
 
 
 

필객의 붓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갑자기 흐름이 끊긴 것처럼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창가에 앉아 온 동네를 밝고 따스하게 품어주고 있는, 눈이 부시도록 맑은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잠시만 기도를 멈추고 생각을 풀어놓으면 이런 저런 근심에 쌓여 작은 박스 안에 움츠리고 있는 내 영혼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늘 신앙의 위대한 힘을 가르치고 그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가끔씩 뭔가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린 것처럼 황망해지고 지금 내가 당면하고 있는 도전들을 어떻게 감당해 나가야 할지 자신이 없어지고 의기소침해지곤 합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는 하늘에 나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토로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내 소망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저 하늘 빛을 쓰고 싶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의 모든 삶의 여정위에 늘 있었던 저 하늘이 오늘도 나에게 새로운 소망과 믿음의 말들로 기도를 열어줍니다. 어디서나 나를 따르고 있는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표상처럼 푸르게 펼쳐져 있는 하늘을 보니 안도로 숨이 깊어지고 탁트인 해방감을 느낍니다.

요즘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힘들다는 말을 합니다.
전 세계적인 불황의 소식 앞에서 이제는 없는 자들 뿐 아니라 가진 자들 마저도 근심의 염기가 버석거리는 듯 얼굴이 까칠하고 내일에 대한 불안으로 말끝이 흐느적 거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일에 속한 일일 뿐, 지금 당장 오늘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천국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지금 우리가 사소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한 육체가, 내 발로 걸을 수 있음이, 나의 분명한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이, 오늘 먹을 수 있고 편안하게 깃들일 수 있는 곳이 있음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음이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이 세상에는 굶주리고, 편안하게 눕지 못하고, 맘대로 다닐 자유가 없고, 마실 물이 없고, 비가 와도 피할 곳이 없고, 열악한 환경에서 병들어 죽어면서도 약을 쓰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겐 지금 나의 삶은 그대로 천국일 것입니다.

상황보다도 절망에 빠른 우리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늘 절망을 예언하는 풍설에 귀를 기울이고 실제로 닥치지도 않을 재앙의 파도를 쉴 새 없이 맞으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마음의 화면에 근심 거리를 올려놓고 괜한 생각에 기력을 빼앗기며 걱정과 염려 속에 소중한 세월을 다 흘려버립니다. 영의 눈이 열려 악의 실체들을 볼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근심이라는 바늘을 꽂고 생의 에너지를 흡혈하는 마귀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습니다.


상황보다도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고되고 무거웠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근심하고 염려했던 것을 글로 쓴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분량일 것입니다. 하루 밤에도 근심이라는 재료로 거대한 성을 지었다 허물었다 하면서, 두려운 생각 때문에 도전하지 못했고 주저하는 생각 때문에 돌아왔고 안일하고 미련한 생각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고 납덩이처럼 짓누르는 근심으로 인해 실제로 몸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근심은 정말 어릴 때부터 고질적으로 나를 괴롭혀왔습니다. 막상 닥치면 매 한대나 핀잔 몇마디로 끝날 사소한 잘못에도 몇 일을 죽을 만큼 고민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깃들일 수 있는 아버지의 지혜와 방법이 너무나 많음을 말씀하십니다. 하갈이 죽음의 절망으로 울부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녀의 눈을 띄워 주셔서 이미 그곳에 있었던 샘물을 보게 해 주셨신 것처럼 신앙은 우리 곁에 있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에 눈 뜨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인 절망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샘물, 사방으로 우겨씸을 당하여도 하나님께서 열어두신 피할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은혜의 창을 통해 보면 내 인생 톤이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삽화 같습니다. 심하게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며 살아왔지만 이전의 아프고 힘들고 부끄러웠던 시간들까지도 다 나를 성숙시키고 온전함을 이루어가는 소중하고 고마운 과정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선하고 아름답게 지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좋고 나쁜 것, 잘하고 못하고의 구분의 선을 넘어서, 없었으면 좋았을 일들도, 아프고 힘들었던 순간도,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들도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심포니 속에서 모두 소중한 역할이며 깊고 풍성하게 인생의 음악을 완성시키는 은혜의 악장입니다.
이제 내 인생 오직 그분의 선하신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관자 이시기에 나 오늘도 푸른 초장, 맑은 시내물가에 눕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파랗고 투명한 하늘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이던 노을이 검붉은 색으로 짙어지고, 운치있는 겨울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점점 검은 그림자로 변해가는 나무와 집들의 신비한 색의 변화를 오래도록 지켜보며 추억처럼 따스하게 스며드는 밤을 맞아들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는 표현처럼 인생은 너무나 짧고 덧없지만,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는 천년의 가치로 주어진 것입니다. 또 하루의 천년을 근심으로 허물지 않고 기도로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와 그 거룩한 의를 이루며 살아야만 하겠습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터키 이야기



7. 소아시아와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 에베소의 주요 유적들 ◇

◎ 사도요한 교회 ◎
사도 요한의 무덤이라고 전승되어 오던 곳에 사각형의 목제건물이 세워졌고(4세기), 이 건물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에 의해 길이 130m가 넘는 장엄한 규모로 십자가 모양의 교회가 증축되었으며, 7세기경에는 교회 외부의 성벽을 만들었다. 중세 성지순례가 유행하던 시기에 각색 병자들이 방문했는데, 그 이유는 창문에서 기둥을 타고 들어오는 먼지를 맞으면 병을 고치게 된다는 미신적인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요한의 유해 중 남은 것은 없고, 교회 내에 있었던 안치소만 볼 수 있다.

◎ 아데미 신전 ◎ (세계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제단과 신전으로 구분되며 규모는 55m×110m이며, 세계 최초의 대리석 건물로 대리석 기둥만 해도 120개나 되었다고 한다. 아데미(아르테미스)는 라틴어 디아나와 동일시되며 이 신전은 서쪽과 바다를 향하고 있다. 아데미는 에베소의 수호신이며 아시아 전역에 편만했던 신으로 인간과 동물, 가축의 다산의 신, 풍요의 신으로 가슴에 수많은 유방이 있다.

이 신전에 종사하는 제사장은 고자였고, 여사제들은 천한 여성들이었으며, 노예들도 함께 종사했다. 제례의식이 끝나면 이어서 음주와 매음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 신전은 BC 550년에 건립되어 7번 무너졌고, AD 262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된 후 부분적으로 보수되었으나, 기독교의 등장으로 이 신전의 대리석들은 새로운 기독교 건축물들을 짓는데 사용되므로 단순한 채석장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신전의 일부 유물은 비엔나에 있다. 현재 1세기경의 ‘큰 아데미’ 여신상과 2세기경의 ‘에베소’ 여신상이 셀축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데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테미스’ 여신으로 라틴어는 다이애나(Diana)이며, 주피터(Jupiter)와 라토나(Latona)의 딸로서 아폴로신과 쌍둥이이다. 아르테미스 신은 달의 여신이며, 사냥의 여신으로 개를 앞세우고 사냥을 다니는 사냥꾼으로도 알려져 있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처녀여신’을 숭배한 것은 이 지역의 전통적인 풍작제의(豊作祭儀)와 관련된 대모(大母)여신 숭배와 혼합된 듯하다.

◎ 마리아의 집 ◎ 카톨릭 전승에 의하면 요한이 로마의 박해(AD 37-42)를 피하여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왔다고 하며, 에베소에서 7Km 떨어진 해발 420m의 뷸뷰르(Bülbür) 산 위에 마리아가 살았다고 한다. 카트리나(Katerina Emmerich, 1774-1824)라는 독일 여인은 지체 불구자로서 태어나서 한 번도 자기 침대에서조차 일어나 보지 못한 여자인데, 그녀가 보았다는 환상에 대해서 들은 바 있는 신부가 1891년 그곳을 방문하여 본 결과 그녀의 환상과 일치함을 확인했다. 그곳은 원래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이 있던 자리였으며, 지역 정교도인들이 8월 15일 마리아 승천일에 마리아를 기념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이 복합되어 이곳을 마리아의 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논쟁도 늘어감에 따라 1950년 지금의 형태로 보수하였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가 카톨릭 교회의 성지로 공포함으로 이곳이 카톨릭에서는 공식적인 성지로 인정되어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코란에도 마리아에 대한 내용이 많이 언급되기 때문에 모슬렘들 역시 성지로 인정하고 있어서 많은 모슬렘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

◎ 원형 경기장 (The Stadium) ◎
헬라시대에 만들어졌으나 네로 황제 때(AD54-68) 변형, 확대되었으며(230m×30m), 투사들의 전투경기, 전차경기들이 이루어졌다. 특히 기독교가 심한 박해 아래 있을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맹수들의 밥으로 잔인하게 죽였으며, 그 장면을 즐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기독교가 공인되자, 기독교인들이 원형 경기장의 좌석들을 다 뽑아버리고 기독교 건축물을 세우는데 사용하였다. 사도요한 교회 건축에 많은 부분이 사용되었다.

◎ 성모 마리아 교회 ◎ (The Church of The Virgin MARY)
원래 로마시대의 건물로 하드리안 황제 때에 Museion(특별교육을 위해 세워진 특수학교의 일종)으로 의학과 과학의 수준 높은 교육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4세기 콘스탄틴 대제 시대에 교회로 전환하여 증축하였고, ‘성모 마리아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아시아에서 최초의 마리아 교회이다. 이곳에서 431년 200명의 주교들이 모여 제3차 에베소 종교회의를 가졌다. 이 종교회의에서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고 주장했던 네스토리안(Nestorian)은 이단으로 정죄되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로서 받아들여졌다.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방문으로 마리아 교회와 마리아의 집을 성지로 지정하였다.
<계속>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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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0년대 중반 이전, 공급위주의 북한 경제시스템 이해.지난 주에 약속한대로 북한의 경제구조를 면밀히 들여다보려고 합니다만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은 저는 경제학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북한 경제흐름의 변화의 중심에서 실제 영향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으로서 쓰는 것임을 참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북한체제와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하여 요약해 볼까 합니다. 북한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사회주의체제이고 시스템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국가에서 배급(쌀, 식료품, 학용품, 의류 등)해주는 방식이었는데요, 도시에서 사는 이들은 직장에서 나오는 월급(로임)으로 쌀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들을 국가에서 매겨놓은 가격으로 구매하여 살았고 농촌에서 사는 농민들은 1년에 한번(가을수확 뒤) 쌀로 분배받아 월급(돈)이 크게 필요 없이 살았습니다. 직장이든 농장이든 북한의 노동자, 농민들이 일하는 목적은 하나였는데요, 그것은 국가의 계획경제에 의해 내려지는 중앙당의 ‘명령’에 충성을 다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집도 국가에서 지정해주는 것이었고 교육과 병원치료는 모두 무료로 누릴 수 있었고, 세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철저한 국가시스템(공급)위주의 삶이었습니다.

2. 공급(배급)시스템과 충돌하는 주민들의 실제 가치관
개인적인 어떤 욕심이나 탐심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사회주의체제 안에서 북한 주민 모두가 ‘충성심’ 하나로만 사는 줄 알았던 제가 철이 들면서 보기 시작한 북한의 모습은 벌써 80년대에도 바람직한 사회주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리와 뇌물작전이 사회를 좀먹는 듯이 보여진 것은 ‘사상교육’을 철저히 받았던 제게 의문을 가지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과 수령을 위해 충성’을 하도록 교육 받았는데, 간부 자녀들의 뇌물을 받아 성적을 위조하고, 대학에 진학시키는 교사들의 비리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쉽게 말해서 계급사회였기에, 북한주민들에게 있어서 승진, 출세, 성공여부는 얼마나 더 열심히 일해서 간부(공장, 기업소, 농장 모든 분야에서 요직에 오르는 것-지배인, 초급당비서, 관리위원장, 반장 등)가 되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출세의 길로 가는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 학교를 졸업할 때 결정되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17세에 학교를 졸업하여 성인이 되는 북한의 학생들은 거의 세 갈래의 진로로 사회에 나가게 됩니다. 한 부류는 군대를 가는 것이고(남자는 필수, 여자는 오히려 빽이 있어야 갈 수 있음) 다른 한 부류는 시험을 치른 뒤 대학을 가고 남은 한 부류는 바로 시에서 배치하는 직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학교 담임선생님이니, 학교에서의 비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순수하기만 했던 제가 너무나 세상과 ‘죄인의 속성’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승진은 계급사회인 북한에서 살아남는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승진하기 위해서는 가정성분이 좋아야 하는데 가족대대로 꼬리표(사회주의체제에 저해되는 세력이 집안에 있거나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문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일컫는 말-월남자 가족, 처단자 가족 등)가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출세의 꿈은 포기해야 했고 다만 승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당원’(당에 가입)이 되는 첫 관문을 통과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북한에서의 경쟁은 누가 국가에서 내린 명령을 최단기간 내에, 질적으로 잘 이행하냐 즉 사상(충성심)적인 것이었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의 기준인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 Plus








찬송이란  1



찬송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노래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노래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찬송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 노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이 찬송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이 노래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들, 그 분에게 지음 받은 자들, 그분의 자녀들이 부를 때에,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이사야서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은 복음전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기쁨, 감사로 복음의 내용들을 노래에 담아서, 세상을 향하여 외치며, 전파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찬송은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조화 안에서 기쁨과 신앙 경험을 모든 성도들이 함께 선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찬송을 모은 찬송가는 최선으로 엄선된 영적인 노래들의 모음이어야 한다. 찬송은 제사용이 아니라, 예배자 들을 위한 것이며, 신앙을 선포하고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람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찬송은 교육의 도구로 사용된다. 기독교 신학과 신앙을 찬송하며 간단하게 배우게 되며, 신앙의 성숙을 위한 실질적인 배움의 도구가 된다. 신앙인의 가슴과 마음에 찬송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들을 메시지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찬송은 진실되고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준다. 찬송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배우며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고 나타낸다. 찬송은 열린 기도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음악을 통해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목소리로 신앙의 감정과 느낌을 표현한다. 특히 찬송의 가사와 함께 건전한 신앙의 감정과 복음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찬송은 우주적인 교회에 대한 성도들의 증언과 같다. 교파를 초월한 교회주의의 한 요소로서, 지속적인 믿음의 표현과 교회생활의 표현이다. 찬송은 이 땅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교회가, 성도들이 하나되게 하는, 가장 좋은 도구이며, 예수님의 기도와 마지막 유언을 이루어 나가는 최선의 도구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표준새번역 요17:11)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6 장 사랑스러운 톰보이들



한쪽이 해결되니 다른 한쪽이...” - 중국에서 온 소식

그동안 선교사라는 이름 때문에 “우리는 일만 해야 한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참 쉬운 방법으로 관계들이 열리는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일들을 못하는 것도 없는데 말이예요. 기분이 좋아서 모든 일이 더 잘 되더라구요~~ ... (중략) ...

남편과도 많이 좋아졌는데 그래도 가끔씩은 마음 속에서 욱~하고 치미는 것이 있어요. 남편이 성격이 좀 특이하거든요. 평소엔 온순하다가도 어떤 일에서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히스테릭해지고 그런 모습을 보면 저도 참지 못하고 막 쏘아붙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목사님 다녀가시고 또 목사님과 계속해서 메일하면서 아주 좋아진 것입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제 사춘기에 들어선 딸 아이 와의 관계가 많이 힘이 듭니다. 말하는 것마다 꼬치꼬치 따지며 덤벼들어서 순간 화가 확 치밀고 결국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놓고 후회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아이도 갈수록 점점 떼를 쓰는 것 같습니다. 한 쪽이 좋아지니 다른 한편이 또 문제가 되네요. 그것도 좋아 지겠지요 ...(중략)...

아버지께서 인내하는 힘을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또 화목케 하는 능력도요. 오늘은 글이 잘 써지네요. 그나마 한시간 반의 쇼핑이 기분 전환이 되었나봐요... 감사드립니다!!

엄청나게 긴 메일이다. 마음속이 다 들여다 보인다. 은주 자매에게 주님의 치유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바로 답신을 날린다.

은주 자매, 너무나 반갑게 받은 메일!! 드디어 은주 자매 마음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것이 보이네 ... 앞으로도 자주 쇼핑을 나가도록 해요. 물건을 사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섞여서 구경하는 재미, 물건 값 깎아보는 재미, 맛있는 것 사먹는 재미, 웃고 떠드는 재미... 현지 사람들과 만나서 일과 상관없이 깔깔대는 재미, 인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맛보는 재미...

남편들은 시간 주고 돈 주어도 못하는 것이니까 안쓰러워 할 것도 없어요. 그리고 남편들이 가끔 애들 보는 것도, 집안 일 하는 것도 그들에게 꼭 필요한 귀한 시간이니까 미안해 할 것 없어요. 당당하게 여성들의 권리를 누리기 바래요. 그 권리를 찾지 않으면 아내들이 바보가 되고 온 집안이 눌려 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요. ... (중략) ...

앞으로는 팀 미팅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여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깔깔대고 웃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부탁해요. 남자들이 뭐라고 하면 다른 방으로 가서 회의하게 보내버리고 여자들끼리 재미있는 시간을 한참동안 갖도록 해요. 그러면 심각한 이야기는 아주 짧게 끝내질 거예요. 아내들이, 즉 여성들이 살아야만 모두가 산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며~~ 계속해서 좋은 메일을 기대해요 ...

은주 자매의 치유와 회복, 나아가서 그 가정과 팀의 치유와 회복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선교지에서 가해지는 여러 가지 부담이 있기 때문에 더 오래 시간이 걸리리라. 그러나 이제 자신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기에 큰 물꼬가 열린 것이다.

전에는 사역자들 간에 대화다운 대화가 거의 없었기에 너무나 답답했고 마음이 무
겁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 원인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선교사의 시각에서 부드러운 여성의 시각으로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다. 이 안목이 삶의 모든 면에서 적용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지만 주님이 계속해서 인도하실 것이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 선교사의 선교칼럼




손으로 말하는 사람들 ①



한 날 수도에서 전화가 왔다. 갓 부임한 이선교사였다. 그는 농아들을 ‘손으로 말하는 사
람들’이라부르며, 장애인사역을 시작하려는 분이었다. 원래 원불교 집안에서 자라 “소록도엔 왜 교회만 있고 법당은 없는가?”라며 원광대 불교학과를 나와 그 곳에 법당을 짓고 염불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소록도 한센인들에 의해 믿음이 전염되어 법당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회심한 후 선교사가 된 것이다. 수도에 농아교회를 개척하려고 준비 하던 중 동역할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을 데리고 가니 2주일만 재워 주고 먹여달라는 것이다. 목탁과 출신인 이 친구에게 나는 선교지에서 낚시를 가르쳐 살생을 유도한 얄궂은 관계였으므로 흔쾌히 오라고 했다.

공항에서 영접을 하는데 우즈벡 청년 ОО이란 사람이 인사를 했다. 저녁을 먹고 이선교사가 그 청년을 자세히 소개하는데 나는 기가 막혔다. 그 청년의 부모는 다 선천성 농아이고, 형제들 중 반은 듣고, 반은 듣지 못하는 농아인 가정의 장남이었다. 하는 일이 가관이었다. 수도의 복잡한 시장 통에서 벌어지는 사행성 놀음판의 전문 야바위꾼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해가 되질 않아 하필이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저 사람이냐는 투로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이 목탁과 출신이 도를 좀 닦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를 보며 빙긋이 웃는 것이 “어찌 깊은 혜안을 너 같은 범인이 알겠느뇨!”라는 표정이다. 그래도 이유가 뭐냐고 캐물었다.

농아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역자는 선천성 농아 집안에서 태어나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양쪽을 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농아들에 대해 특별한 심정을 가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긴 뭔가 봤기에 1200킬로 미터를 비행기로 태워 데려 왔겠지 라며 믿기로 했다. 이선교사가 ОО에게 예수님를 전했으나 무슬림이라 개종에 부담이 있고, 가족의 생계에 대한 짐과 조직에서 이탈할 경우 벌어질 일 때문에 결단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교회 성도들이 집중적으로 ОО이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 세례를 받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교회의 리더들에게 이선교사와 ОО을 소개하고 방문목적을 위해 기도를 요청했다. 우리 교회에 놀음꾼에서 확실한 은혜를 받고 변화된, 그리고 과거에 조직의 보스 출신이었던 두 전도사가 있어 열심으로 ОО를 위해 기도하며 격려했다. 오전에는 내가 그와 전도용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몇 일이 지나자 마음을 열고 복음을 들은 ОО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다. 우리 모두는 기쁨이 충만했다. 그러나 그날 밤, ОО에겐 심각한 영적인 공격이 있어 몇 차례나 가위 눌림과 헛소리로 옆에 누운 자던 우리들은 일어나 대적기도를 해야 했다.

주일이 되자, 아침을 먹고 시장으로 나간 이선교사와 ОО이 7명의 농아들을 데리고 예배에 참석했다. 유난히도 중앙아시아에는 소아기 때 열병으로 청력을 잃은 후천성 농아들이 많다. 비공식 통계는 전 인구 2% 정도라고 한다. 예배 설교를 ОО형제가 수화로 통역했다. 나는 아직 성경을 모르는 농아들이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있을까 라며 설교 내내 조바심을 냈다. 다음 날 오후 20여명의 농아인들이 교회로 왔다. 이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초대한 것이다. 이선교사는 갓 배운 소련식 수화로 열심히 전하긴 했지만 짧은 자기의 수화실력에 답답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먼 곳 이국 땅, 다른 민족이 와서 수화를 하는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몇 일이 지나자 이선교사는 ОО을 데리고 수도로 돌아갔다. 주일이 되자 농아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십여 명이 뒤쪽에 자리를 잡고 예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난감했다. ‘통역이 없으니 어떻게 설교를 전달하며, 찬송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도 그 분들은 사뭇 진지하기만 했다. 그 다음 주에는 열다섯 살쯤 돼 보이는 한 소년이 서서 통역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앙이 없고, 성경도 전혀 모르는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광고 통역 뿐이었다. 나는 그 아이를 불러다가 주중에 신앙교육과 설교통역을 준비시켜야 했다. 나도 러시아말이 온전치 않은데다 그 아이도 모국어는 카라칼팍어이고, 러시아말은 길거리에서 배운 수준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갑갑하기만 했다. 수화통역을 맡은 아이는 부담이 되어 예배출석을 들쭉날쭉하는 사이에 교회에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고 말았다.

문제는 같은 예배에 참석하지만 농아인과 기존 성도들이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뿐 아니라 서로는 심한 생활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농아들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적어 삶이 열악했고, 그 흔한 수세식 화장실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이 허다했다. 급한 김에 볼일을 보고는 어떻게 물을 내려야 할 지를 몰라 도망치듯 사라지길 다반사, 특히 예배당은 마루바닥이어서 신을 벗고 들어와 앉아야 하는데 문제는 발 냄새가 너무 심했다. 급기야 교회의 리더들이 나를 찾아와 예배를 따로 드렸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소리냐고 했지만 다음 회의에 다시 거론되자 나도 슬그머니 물러서 농아형제들의 의향을 물어보고 결정하겠노라고 대답을 했다.

나는 농아형제들 중 맏형 격인 ‘우작바이’를 불러 점잖게 예배를 따로 드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미 성도들의 불평을 눈치채고 있던 ‘우작바이’는 그 큰 눈에 근심이 가득하여 큰 팔을 놀려 천천히 손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목사님, 우리에겐 제대로 된 통역이 없어 성도들에게 답답해 보이고, 손으로 찬송해야 하니 다른 형제자매들을 집중하지 못하게 할 때가 있어 죄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 공기를 타고 우리 몸에 부딪히는 그 느낌과 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스피커의 바이브레이션 만으로도 우린 행복하고 충분합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를 형제자매들에게서 떼어 따로 예배드리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23 >









0112.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3) 마가복음②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 복음 안에 거하라)
“때가 찼고”는 히브리서 1장에 잘 설명되어있는 “이 마지막 날”이다. 신약성경은 서두부터 “회개하라”(마3:2)는 명령으로 시작되고 마지막도 회개로 끝맺는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경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7)

예수님도 세례 요한처럼 갈릴리에서 똑같이 회개에 대한 촉구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다(마4:17). 모든 사역이 ‘회개로 시작 회개로 끝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길을 잃고 뒤틀린 사역에 함몰되어 헤어나오기가 힘들게 된다. 죄악된 세상은 회개가 없다면 곧 시궁창이 되기 때문이다. 구원얻는 믿음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사역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우선 되어야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벧후1:1). 회개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 회개하는 사람을 일종의 행위구원적인 의(義)에 종속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개를 우리의 능력을 동원해 이루어낼 수 있는 덕행의 하나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의 하나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 우리의 본성에는 하나님께 회개의 순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적으로 결여되어있다. 죄인의 회개행위는 율법주의나 공로적인 의를 조금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회개는 1)죄를 인식하는 지적요소 2)죄를 슬퍼하고 통회하는 감정적 요소 3) 죄를 철저히 버리는 의지적 요소를 포함한다.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 즉 성령을 거스르기 때문에 ‘거듭남’이후에도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함으로 이는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회개는 우리자신의 힘으로 죄에서 돌이킬 수 없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주심으로 시작된다. 이 회개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한다. 예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안에는 인간이 회개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인간의 죄의 뿌리가 너무나 깊은 까닭에 불신자가 회개하는 것은 구스 인이 피부를 바꾸거나 표범이 반점을 바꾸는 것 이상으로 불가능하다는 선지자 예례미아의 부언이 강조되고 있다(렘13:23). 이 회개는 하나님만이 가능케 하시는 인간의 반응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의 환경을 조성하시고 죄인들에게 회개할 능력을 선물로 베푸신다. 사도바울이 여러 곳에서 회개자체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능력이자 선물이라는데 이의 없이 동의하고 있다(롬2:4 / 딤후2:25).



0113. 회개란 은혜를 내동댕이친 넒은 길의 신복의주의 교회들

기독교의 세속화는 회개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값어치에 대한 인식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회개요구도 사라진 값싼 죄사함, 통회도, 죄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도 없는 마음에 선언된 죄의 용서, 고난(십자가)도 없는 값싼 은혜의 선포로 인한 ‘신앙 편의주의’(Easy-Believism)가 만연한 이 시대는 더욱더 세상문화적 유행을 쫓아가느라 쉬운 편리추구가 앞선 믿음을 염가판매하며, 고객(교인)유치경쟁에 혈안이 되어있다. 놀랍게도 외부로부터의 핍박이 아니라 교회안에서의 값싼 은혜로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하게 파멸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믿음을 헌신과 순종에서 따로 분리시킴으로 믿는 일을 쉬운 일로 만듬으로써 실은 믿음의 자리를 고통의 지옥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추구에 목말라하는 쇼(show)식의 그 뻔질난 대형집회들, 세상기업의 CEO들보다 더 거창한 감투 -‘총재, 사무총장’등등- 들은 성경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 어지러운 허영으로 요란하다. 복음전파란 미명하에 세상에 호소하며 100-200만, 100-200개국에 지부를 둔 ‘세계적’선교기관이라는 등등의… 천국복음이 아니라 이 생(生)의 자랑들로 꽉 찬 세상을 향한 자기과시다. ‘세계적’이란 ‘세상적’이란 말에 불과하다.

우리 마음의 내적인 변화로 삶의 방향이 전환되어 ‘하나님의 얼굴’을 온전히 구하지 않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형체’를 가진 하나의 우상으로서 우리의 영혼을 계속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바울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근심을 담아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로 이어짐”(고후7:9-11)을 이야기하고 있다. 참된 회개는 우리의 수치, 자기혐오, 자책 등의 의식도 수반한다. 이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자(거듭남이나 칭의와는 달리)인간의지의 행동이다. 그러나 세상근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 우상숭배의 결과이며, 낙심의 근원에서 솟구쳐 오르는 자기사랑, 자기연민, 자기주장과 자기분노라는 특징을 뿜어내 보인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은혜의 원수가 늘 기생하고 있음으로 계속적인 회개의 습관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이 회개는, 1)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성장하게 하며 2)우리의 양심을 하나님을 향하여 깨어있게 만들고 3)우리 자신의 의(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4)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특히 반대자나 원수의 죄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려는 헛된 마음가짐에서 우리자신을 지켜준다.

0114. “…복음을 믿어라”(막1:15)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가 이뤄내야 할 임무가 아니라 믿어야하는 ‘좋은 소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초점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세우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받는 무엇이다(히12.28). ‘거저 받는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하심, 즉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위에서 지불하신 가격은 너무나 엄청나서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의(義)로는 지불이 불가능하기때문에 거저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예수께서 ‘내 교회를 세워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고 확언하셨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중심,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이 아니면, 우리의 초점이 여전히 우리의 행위에 맞춰져 있다면…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강조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을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윤리도덕주의도 아니다. 이 도덕주의라는 괴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하기도 하나 이는 심한 궤도이탈로 탈선한 상태로 있는 것이다. 한 영혼이 개과천선하여 종교와 도덕에 머문다해도 그것은 아직도 사망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종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원히 이해불가하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를 훤히 들여다보며 분석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가 도달하려고 애쓰는 계율이나 윤리가 아니라 자기형상으로 창조한 인간들에 의해 배척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을 하나님 자신과 화해할 수 있도록 스스로 낮아지신 창조주의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자신과 화해시켰다는 ‘좋은 소식’이 담겨있다. 그리스도만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고전1:30).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신뢰나 자력구원에 기초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가 물으신다. 가장 놀랍고 위대한 이야기에 대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가 아니면 도무지 들을 수가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되어야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찬송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마귀의 궤계에 속지말라. 교회는 복음이 아니다.

신앙사수? 신앙은 우리가 보호해야하는 피보호체가 아니다.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로 대신하여 읽어보시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고 해서 주님이 무너지실 분이 아니다. 즉, 신앙(예수 그리스도)은 우리의 보호를 필요로하는 피보호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신앙(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함으로 보호함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서신에 가장 많이 언급된 구절(164회)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이다.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을 때 구원을 받는 것이 기독교가 바로 그리스도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이 언급한 강조점은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0115. 나의 삶이 복음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전파하는 것이 복음전파이다. 복음은 삶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변화된 삶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다 더 잘 전파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복음을 강조하는 대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요구사항리스트들만 늘어놓기 때문에, 이 복음 없는 율법강조는 성도들을 지치게 만든다. 활동이나 프로그램들이 교묘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르침들을 교체해 버리게 된다.

그리스도 복음전파에 예술문화프로그램 등의 비즈니스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 위에 사도행전의 성도들처럼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행6:4)하는 복음증거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기도) 하나님의 방법(말씀)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이목에 호소하면서 옹호해야 할 대항문화가 아니다. 베드로나 바울 등의 사도들이 오늘날의 교회활동 프로그램들을 본다면 아마도 그들은 기겁하여,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칼을 빼어들 것이며,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의 ‘저주’를 다시 한 번 더 선언할 것 같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21세기나 1세기의 인간성정이나 똑같이 그대로 죄 아래 갇혀 구원을 기다리는 불행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신복음주의 부류의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기도는 먼저 나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들만이 변화를 입게 된다. 기도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바울의 세 번 간구는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의 한 부분이 됨을 가르쳤다. 즉, 기도는 모든 고난을 회피하는 통로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통일을 앞당기자”(하나님께서 통일을 허락하실 때, 우리가 통을 지연시킬 수도 있다는 뜻인가?) 라는 구호에 속지 말라. 세상을 변혁하려는 사명은 우리의 사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들의 일이 하나님의 일을 대체한다면 십자가의 원수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 안에 보루(堡壘)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지만 세상을 구하라고 보내시지는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실어 날라야 할 선언이지 변증하고 협상할 의지가 아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증거하고 섬기라고 보내신 것이다. 악(惡)은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이 우리 밖에서 오는 것이다.

0116. “너, 아시아의 허풍쟁이 조선 사람들아”

지지난 세기 우리의 땅에 도착한 초기의 미국 선교사가 쓴 시(詩)의 한 구절이다. 과장과 허풍이 심한 한민족의 피를 읽으신 분의 시 구절이다. 신(新, Neo-)복음주의는 한국인들의 기질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 ‘철학’이다. 철학이라고 말함은 ‘…주의’(主義, -ism)가 붙게 되면 철학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철학도, 심지어 ‘복음주의’까지도 철학으로 타락하여 아무도 구원 못하는 기독교 사상의 하나로 전락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구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 당장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義, 롬10:5)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겠다고 발버둥친다. 신복음주의로 인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구속의 일, 즉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하는 생명과 일을 세상으로 확장시키는 사명을 감당한다는 거짓된 개념이 교회 안에 만연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속받는 피조물이지 구속하는 창조주가 아니다. 목회(牧會)나 선교의 사명수행은 목회자나 선교사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대사로, 사자로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선언 “회개하라!”로 시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지 않는다면 열심과 탈진의 악순환에 침몰될 것이다. 그리하여 “회개하라!”로 시작하고 끝을 맺은 신약성경의 주님과 제자들, 사도들이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고는 완전히 ‘다른’것을 전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65:4)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찬 511 / 내 구주 예수를 ③)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4색 밴쿠버 목양일기






얼마 전에 미국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세미나 강사를 모시고 씨애틀에 다녀오다가 밸링햄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비가 많이 내렸는데 차에서 내려 나오는 데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낡은 필통 같아 보여 그냥 지나치려다 혹시 하는 마음에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놀랍게도 신분증과 신용카드 그리고 현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신분증의 주인은 백인 여성이었는데, 아마 비가 많이 와서 급하게 움직이다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지를 다른 목사님들에게 물어보니 식당 주인에게 맡겨놓으면 아마도 찾으러 오지 않겠냐고 대답을 합니다. 식당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지갑을 맡기고 돌아서는데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식당 주인을 어떻게 믿지? 저 사람이 중간에서 가로채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이런 의심 가운데 혹시 하나님께서 저 지갑에 든 돈을 오늘 저녁식사 비용으로 예비해 주신 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저녁은 제가 사기로 했었고, 식사비용이 지갑에 있던 현금액수와 얼추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제가 만약 그 지갑 속의 현금이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돈으로 밥을 사 먹었다면 잘 한 일이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잘못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런 식으로 오해 할 수가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일반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맞을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 저희 교회 앞으로 미국에서 두툼한 카드가 왔습니다. 워싱톤 주에 사시는 어떤 분이 보낸 카드였습니다. 저는 혹시 하나님께서 어제 한 일에 칭찬으로 뭔가 보답을 주시는 것이 아닐까라는 어리석은 기대를 가지고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또박 또박 써놓은 카드 한 장과 설교시디 그리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베리칩(Verichip)에 관한 홍보물 뿐이었습니다.

어쨌든 시디 내용을 들어보니 미국 LA에서 사역하는 어떤 목사님이 베리칩은 짐승의 표(666)이고, 이 칩을 받으면 멸망을 받는다는 참 열정적인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좀 내용이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사실(fact) 보다는 추측(fiction)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첫 부분에서 캐나다 정부가 화폐를 다 폐지하고 오직 베리칩 만으로만 거래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베리칩에 관한 논란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저는 사실 베리칩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짐승의 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의 내용은 다니엘서 7장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둘 다 묵시(예언서)문학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의 특징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기에 해석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을 보면 두 시대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환난을 당하는 시기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온전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핍박과 맞서야만 했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 가운데 사도 요한과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믿음의 인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온전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동일한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 받지 못하고 안받으면 구원 받는다는 식의 주장은 구원을 너무 유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종말의 시대에 깨어 있어야 하고, 세대를 분별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음모론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직접적으로 베리칩을 짐승의 표, 즉 666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몇 몇 분들이 베리칩 일 것 이라고 해석을 하는 겁니다. 해석은 잘해야 합니다. 경험상 과거에도 잘못된 해석으로 피해를 준 적이 많았지 않습니까? 해석을 잘못하면 마치 제가 지갑을 주워서 주인을 찾아주지 않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여겨서 밥값으로 쓰는 행동과 비슷합니다. 상식적이지도 않고 한마디로 참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할 여지가 너무 많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베리칩만으로 구원을 판가름할 수 있다면, 오히려 구원받기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안받으면 되니까요! 베리칩만 가지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인 구원을 매우 값싸게(베리 칲하게-very cheap)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세규 목사 / 밴쿠버오늘교회 / 778-887-8648]
 
 
 
 
 

아브라함 이야기

 

 

선지자 아브라함 / 창 20:1-7 (상)


창세기 20장은 다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랄로 간 아브라함
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네게브’는 남쪽을 의미하며, ‘그랄’은 서쪽을 의미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남서쪽으로 옮겨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18:1절에 나오는 ‘마므레’에서 남서쪽인 블레셋 사람의 지역 ‘그랄’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동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창 12:10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아마도 양들을 먹일 풀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옮겨갔을 것입니다.

문제를 만난 아브라함그런데 옮겨간 곳에서 아브라함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2절). 즉, 그랄 사람들에게 사라를 누이동생으로 소개했는데 그 일 때문에 사라가 그만 아비멜렉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 사건과의 유사성
2절의 말씀은 창 12:10-20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자료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자료의 중복으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의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문서로 기록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편집을 하였다면, 중복되고 비슷해 보이는 이야기는 누가 보더라도 이야기를 짜맞추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점
만약 본문의 말씀이 같은 사건의 다른 버전이 아니라면, 이것은 아브라함의 약점을 우리에게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실수는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신체적인 약점이 건강이 약해질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영적인 약점도 주변의 어려움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면, 가장 먼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점은 두려움과 거짓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단력도 좋았고, 참고 인내할 줄도 알았지만,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쳐올 때, 두려워했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해져 가나안을 떠나고, 목숨을 보전하고자 거짓말을 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한 번도 그를 직접적으로 꾸짖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대신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3절). 여기서 ‘네가 죽으리니’라는 말은 아비멜렉이 병들었음을 암시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사라를 후궁으로 들인 아비멜렉이 갑자기 병들었고, 병의 원인이 남편있는 여자 때문이라는 것을 아비멜렉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의 집에는 불임의 문제까지 생겼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18절). 그 결과 아비멜렉은 사라를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4절).

아비멜렉의 항변죽을 병에 걸리자, 아비멜렉은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항변을 합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4-5절).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차디크’ (ṣaddı̂q)이며 ‘righteous’를 뜻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마음’이란 히브리어로 ‘톰-레바브’이며 ‘perfection of heart’를 의미합니다. 특히 두 번째 단어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창 17:1)과 의로운 욥 (욥 1:1, 8)을 지칭할 때 쓰일 정도로 굉장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비멜렉이 자신의 ‘온전한 마음’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아비멜렉의 온전함을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이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6절). 왜 하나님께서 잘못도 없는 아비멜렉에게 어려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재미있는 사도행전

 

 

 

2013, 꿈에 미쳐라! (2)



2012년 개최된 영국 런던올림픽을 은퇴 무대로 선언한 수영황제 ‘마이클 펠프스’는 6개 종목에 출전해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를 따내며 세계 최강자의 명성을 과시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펠프스 수영 인생의 ‘화룡점정’이었다. 총 8개 종목에 출전한 펠프스는 모든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8관왕에 올라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다관왕에 올랐다.

얼마전 펠페스에 대한 기사 하나가 떴다. 타이틀은 “한계를 모르는 수영 황제 펠페스의 신기록 행진”이었다. 펠페스는 어린 시절 “주의력 결핍 과다 행동장애”가 있었다. 그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쳐박히는 수모까지 겪었다. 그러나 이런 아픔을 딛고 위대한 수영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펠페스의 어릴적 코치 바우먼 때문이었다. 바우먼은 항상 운동을 시작하기 전, 펠페스에게 목표를 종이에 적은 후 운동을 시작하게 했다. 이것 때문에 그는 매일 자신이 정한 목표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함을 받았습니다”(롬1:1)
사도 바울은 자신의 꿈을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는 그의 비전을 실현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나는 여러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로 갈 때에 로마까지 가기를 바랬습니다”(롬15:23).
그는 구체적으로 꿈의 실현을 계획했다. 머리로만 그린 꿈이 아니었다. 꿈의 기록은 꿈을 자신에게로 끌어 당기는 강한 힘이 있다. 또한 꿈의 기록은 강한 실천의 원동력 이다.

꿈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어리석은 부자형 꿈과 바울형 꿈’이다. 어리석은 부자형 꿈은 오직 자기 배만 채우 것이 목적이다. 누가복음12장17-19 보라! 이 짧은 세 구절 안에 ‘내가, 내’라는 말이 6번 나온다. 부자의 꿈 안에는 오직 자기 자신 뿐이었다. 바울형 꿈은 어떤가! 철저히 하나님을 향해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그리스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는 큰 꿈을 꿨다. 더 많은 땅을 가지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죽음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두 손을 관 밖으로 내 주세요” 그 이유는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한 손에 쥐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중국의 황제 진시왕은 서시라는 사람에게 명령했다. “소년 소녀 3천명과 보물을 싣고 동해에 있는 신선이 사는 섬으로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와 약을 구해오라!” 물론 그런 약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일을 두고 많은 유생들이 비웃기 시작했다. 화가난 진시왕은 460명의 유생을 생매장하고 그들의 책까지 불태워 버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분서갱유’ 사건이다.

이들과 차원이 다른 최후의 고백을 들어보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노라”(딤후4:7-8).
정말 멋진 고백이다. 자신만의 꿈과 비전을 위해 달린 자는 꿈도 꿀 수 없는 고백이다. 하나님이 주신 잃어버린 꿈이 있는가? 회복하라! 그리고 2013, 그 비전에 미쳐라!

황보창완 목사 / 밴쿠버 글로리아교회 / 778-708-5540
 
 
 
 
 

필객의붓



 
  

인간의 본질

창가에 앉아 새로 이사한 동네의 밤 거리에 투명한 빗금을 그으며 내리는 비를 올려다 보며 땅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앞 집의 오래된 굴뚝에서 흩어지는 연기처럼 잡힐 듯 말듯, 어릴 때의 감상과 이름 모를 그리움이 마음에 스멀거립니다. 아버지 없이 각박하고 힘들기만 했던 시간이라 별로 들춰보지 않는 기억들 속에서도 푸근한 그리움을 피워 올리는 세월에게 인자한 성품을 느낍니다. 눅눅하고 짙은 어둠에 잠긴 집들의 창에서 티브이 불빛이 번쩍이고 있습니다. 실내를 어둡게 해놓고 티브이 불빛을 바라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외롭고 우울한 현대인들의 초상을 느낍니다. 음산할 정도로 어두운, 살아가는 의미마저 휑하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비오는 겨울을 잊기 위함이겠지만 너무나 소중한 생의 시간이 화면 앞에서 스러지는 것이 무척 아깝습니다.
티브이의 역사와 함께 사람들은 존재감, 자신의 가치, 인격과 인격이 부딪혀 얻을 수 있는 순박함과 지혜와 사랑과 분별을 잃어버리고 더 자존심 세고 상처받기 쉬운 닫힌 인간으로 변질되고 있으며, 비본질의 성탑은 자꾸만 높아만 가서 심하게 훼손된 본질 속에 살아가는 부조리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력이 권력으로만 커져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을 압제하고, 교육이 교육으로만 문턱이 높아져 어렵고 난해한 책의 분량이 도서관을 가득 채울만큼 쌓이고 전문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원기가 팔팔한 젊은 날 동안 자기의 경험을 죽이고 오직 책만 끼고 있어야 하며, 모노폴리의 경제는 한쪽으로 재물을 쌓는 쪽으로만 발전해 갑니다.
많은 정보들과 미디어의 높은 볼륨 속에서 사람들은 이 복잡한 미로 같은 많은 길들 속에 어느 길을 택해 가야 할 것인지, 이렇게 많은 형상들 속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 것인지, 많고 많은 색들 중에 나는 어떤 색으로 피어 있어야 할지, 다양한 소리들 중에 어떤 소리를 내야 할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합니다. 대낮에도 담을 더듬듯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에 대한 전문가들까지 생겼지만, 그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봐도 본질을 꿰뚫는 통쾌한 지혜보다는 오히려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 일관성 없는 이론으로 아리송하게 흘러갑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일상의 삶, 몸 담고 있는 건물도 번화하고 놀랍도록 신기술이 쏟아져 나와 이보다 더한 발전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인간의 생활의 편리가 극에 달했고 인간의 교육은 문맹이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 되었지만, 인간 관계의 땅은 더 황폐해져 불안과 불면과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이생의 자랑으로 세워진 거대한 성에 신경증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남과 못남, 가짐과 없음, 학벌의 차이가 마치 대단하고 영원한 것처럼 느끼며 비교하며 살아가면서, 남의 이목의 노예가 되어 모든 관심과 신경이 온통 성과나 주변의 사람들의 평가와 인식에 가있어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지만, 혹독하게 자신을 평가하는 눈들과 소리들은 실상이 아닌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들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눌림을 감당 못하고,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단 한루만 누려봐도 영광일 화려한 인기와 권력과 명예나 우리 같은 서민들은 평생 써도 못쓸 만한 가치의 재산을 두고서도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아무런 무게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허무에 그토록 마음이 짓이겨지며, 들리지도 않는 소리들에 지레 두려워하고 파르르 떨면서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고린도 후서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자지 못하고 매를 맞고 후욕을 당하고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갇힘 속에 있으면서도 영광을 느끼고, 자신이 악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아름다운 이름으로 여기고, 속이는 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참됨의 자부심을 느끼며, 아무 것도 없는 가난뱅이 같은 삶을 살면서도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부요를 누리는 행복 속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본질, 인간의 본질은 믿음에 속해있는 증거일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영원에 속해 있어 찰나적인 기쁨이나 쾌락이나 표피에 대한 자랑으로 절대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예배입니다.
나무가 땅에 심겨져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물고기가 물에 있어야 살 수 있듯,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함 속에 있어야 가장 인간다운 향기와 존귀로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인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의 삶 안에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은 귀에 듣기 좋고 끝없이 이생의 복을 추구하는 자아를 만족시켜 주는 좋은 말씀을 찾아 헤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과한 새 생명을 얻지 못해 여전히 육적인 것들에 흔들리며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감정과 상한 마음에 시달리며 일주일을 버티다가 교회에서 겨우 마취제 같은 말씀을 듣고 위안을 얻는 것이 신앙인 줄 착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귀에 거슬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폼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정 반대의 길을 제시하시며 신앙 안의 위선을 지적하시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았고 대중들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명상과 자기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신을 거부하는 정신이 깊어지고 있는 뉴에이지의 때에,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만이, 인간을 참 인간되게 하는 본질의 메시지 만이 오직 교회 안에 살아있기를 기도합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터키이야기 (15)


7. 소아시아와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 신약성경과 에베소 ◇

오순절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교회 중심지였고, 안디옥은 이방인의 교회 중심지였으며, 바울의 순교 이후에는 에베소가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베소는 성경시대에 버가모를 누르고 아시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소아시아 지방의 정치, 교통, 무역, 문화의 중심지였다. 에베소는 성경에 16번 언급되었다.

1) 사도바울과 에베소
에베소 전도는 체류 기간과 사역 규모로 보아 바울의 전 전도여행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에베소는 바울이 2, 3차 전도여행 때 들렸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의 귀로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에베소에 들러 유대인의 회당에서 변론하고 가이사랴로 갔다(행18:19-21). 3차 전도여행 때(54-59년) 에베소에 와서 3개월간 회당에서 가르쳤고(행19:8), 그 후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3년 동안 가르쳤다(행19:9-10).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설교에서 3년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에베소뿐만 아니라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포함하여 소아시아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바울 이후에는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돌보았고(딤전1:3), 아볼로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가 이곳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행18:24-26).

바울이 이곳에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또한 이곳에서 감금된 듯하다(롬16:3,7; 고후6:4-10; 11:23-27; 고후1:8).

2) 사도요한과 에베소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바울이 순교당한 후 사도요한이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이곳에 와서 에베소 교회 목회와 전도를 하며 노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핍박을 받고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했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요한복음, 요한서신서 등도 이곳에서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한은 트라얀 황제의 통치기간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연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평소에 요한이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에 묻히기를 유언하여 동산에 무덤을 만들었고, 후에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요한의 무덤이라고 전승되어 온 장소에 교회가 세워졌다.

3)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 (계2:1-7)
당시 황제숭배의 강요와 이에 따른 박해를 참으며 신앙의 정절을 지켰고, 거짓 사도들과 니골라당을 물리치고 진리를 분별하여 교리를 수호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었음을 책망하며, 처음 사랑의 회복과 처음 행위를 다시 되찾을 것을 권면하고 회개를 촉구하면서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긴 자에게는 낙원의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당시 에베소의 형식적 전통주의와 넘치는 풍요로움이 처음 사랑을 잃게 하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4) 신약 이후의 에베소
AD 110년경,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속사도 교부 이그나티우스가 체포된 몸으로 순교를 당하게 될 로마로 호송 중 서머나에 들렀을 때 에베소에 보낸 서신이 남아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당시 에베소 감독이었던 오네시모를 통하여 보여주었던 친절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몇몇 권면과 당부를 전하였다. 특히 오네시모 감독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나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라”(몬20)라고 하면서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을 원용하였듯이, 이그나티우스도 바울이 사용한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여 “나로 너희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라”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빌레몬서의 오네시모와 이그나티우스의 에베소 서신의 오네시모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자주 제기되었다. 만일 빌레몬서의 오네시모가 회심 당시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었다면 이그나티우스와 만났을 때는 나이 70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시카고학파는 바울의 서신이 처음으로 모아진 것은 2세기 초 에베소에서였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을 대표하는 J. Knox 같은 학자는 감독 오네시모가 그 일의 책임자였으며, 빌레몬서도 바울의 서신 속에 포함시켰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만일 오네시모가 후에 에베소의 감독이 된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 옆에서 바울을 도우며 누구보다도 바울을 잘 알고 있었던 그가 바울의 서신을 모으는 일을 했으며, 빌레몬서도 자연스럽게 모음집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오네시모의 이야기는 역사 소설가들에게는 매력 있는 주제가 되어 미치슨(N. Mitchison)이나 존(P. John) 등 여러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으며, “오네시모”라는 소설이 연재되기도 했다.

이그나티우스의 에베소의 20절에서 특별히 성찬식에 대한 언급을 할 때 요한복음 6장 50절을 염두에 두고 주님의 몸인 떡을 “불사약이며 죽음의 해독제”라고 언급하고 있다. <계속>




 <사진 위: 에베소의 사도요한 교회 / 아래: 성베드로 성당의 성 이그니티우스 조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