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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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슬슬 이제 우리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늘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다간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할 때면 나도 정말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라, 그렇다고 당당한 모습도 아닌(당연히 그럴 수 없고) 마음 깊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과 마음을 따라 온 것에 대한 즐거움으로 그냥 그렇게 잘 서있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보았습니다. 지난 호부터 시작된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앞으로 계속하여 심도있게 밴쿠버 그리스도인 여러분과 나누기 원합니다.

1. 한민족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한민족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 궁금한 사안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호에서 나눈 ‘통일의 본질’을 기억하신다면 한민족을 향하신, 통일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당부분 엿보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원래 하나였던 것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 원래 한민족이었던 남과 북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 ‘통일의 본질’과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은 더 이상 의문표를 달아야 할 사안이 아닌 것이죠. 하나님의 관점으로 한반도 통일을 바라보아야 하고, 통일은 반드시 됩니다.

2. 통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직도 장벽이 저렇게 있고 남과 북이 냉랭하게 맞서고 있는데 통일이 시작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곧 다시 오마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을 따라 지금 살고 있는데, 통일이 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으실겁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완전한 통일을 이루셨던 하나님께서 사탄이 깨어버린 분리(분열)를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통일’을 이루셨고, ‘통일’을 이루신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통일됨’은 이미 이루어졌고, 세상에서 그 ‘통일’을 이뤄나가고 계십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이요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남과 북은 어떠합니까? 남북도 이미 통일이 시작되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급작스레 일어난 북한에서의 아사자(餓死者)발생은 탈북민을 만들어내고 탈북민은 국내에만 2만 4천 400여명, 해외에 있는 디아스포라 탈북민들은 최소 10만에서 30만 명까지 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문제로 탈출했다고 생각했던 관점에서 하나님은 눈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이루어지는 통일코리아의 미래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탈북민들은 지금 남한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은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를 이미 살고 있는, 통일을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로 더 이상 탈북민이 아닌 ‘통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3. ‘탈북민’도 ‘탈남민’도 아닌 우리는 ‘통일인’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탈북민’이라는 호칭이 별로 듣기 좋지 않다는 평가가 있어 ‘새터민’이라는 호칭도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그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우리가 ‘새터민’이면 한국사람들은 ‘헌터민’이냐고 해서 우리를 웃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해외에 오래전에 이민 가신 어떤 분은 당신은 ‘탈남민’이라고 하시면서 탈북민인 우리의 처지에 깊이 동감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우리 모두 ‘통일인’으로 살기 위해 아브라함처럼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 부름 받은 원래의 자리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Plus








깊이 생각해야 할 일들



음악의 구성, 내용은 대화와 같이, 서로 묻고 대답하는 형태로 되어있다. 음악에서 주고 받는, 대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음악의 예술적 행위를 통한, 감동과 연주내용에 대한 감탄과 경탄에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을 얼마만큼 감동시키고, 마음에 얼마나 인상 깊이 만족시키는 가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행위는 완벽할 수 없고, 사람들의 만족을 완전히 채울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음악은 예술적인 연주만으로 그 책임을 다할 수 없다. 교회 음악의 예술적 행위 안에는, 우리 주님 만이 사람들의 희망과 빈 마음을 채울 수 있고 언제나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생각이나 생활과 감정의 부분들을 민감하게 하시고 다시 조이고 바르게 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음악 연주 안에는 항상 주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교회음악 연주와 연주자는 가장 큰 목적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임을 확신해야 한다. 교회음악인이 자신을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물들지 않도록 하는 일은 교회음악 연주를 통하여 회중과 성도들에게 감동의 물결이 전달 되고 감격하며 떨림이 있고 신앙의 신선한 충격을 줄 때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전달되는 것으로 착각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께로 향한 성도의 삶의 목적이며 신앙 성장에 큰 도움을 준다.

교회음악으로 인한 감동과 감정의 충격은 세상에서의 감격, 감동, 충격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야고보서 1장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아멘.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6 장 사랑스러운 톰보이들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더 깨
달았다. Email을 보내왔다.

목사님, 두 번 째 참석하는 치유학교, 너무 좋습니다 !!
저는 오랫동안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나의 십자가다’라고 생각하고 십자가를 성실하게, 또 제대로 지고 산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지워주지 않은 십자가를 제 스스로가 저의 상처 때문에 땀을 흘리며 지고 있었다는 것을. 쯧쯧... 이런 무식한... 이제 그 십자가를 날마다 내려놓는 중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가끔은 그 십자가를 잊지 못하고 다시 짊어지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만... 제게 치유학교가 없었더라면 제 삶이 또 제 아이들의 삶이 어떤 길로 흘러가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

그런데 지난 주 강의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저도 여러 사람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저만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늘 생각했는데...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자세히 생각이 나니까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고, 큰 빚을 진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했고 이제는 직접 사과할 수 있는 용기도 주셨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빠른 시일 내에 사과 작업을 시작하려 합니다.

많이 성숙해진 여성의 모습이 나온다. 상처를 많이 입은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나는 피해자야!’라는 강한 확신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상처를 주었고 그래서 그 사람이 지금도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없고 느낌도 없다. 그래서 그 사람 주위의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상처를 입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서 이루는 가정은 예수를 믿는 가정일지라도 천국의 분위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보는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삶의 여러 상황을 남편의 관점에서, 자녀들의 관점에서, 직장 동료의 관점에서, 상사의 관점에서, 목회자의 관점에서 보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만져 주는 시림이 되어가는 것이다. 메일이 계속된다.

목사님 내외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해지는 저를 발견합니다. 마음 한 쪽에서 분노를 삭이면서 어쩔 수 없이 꾹 참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 사람의 행동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살피게 되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흥분이나 분노도 많이 줄어드는 거 같아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무시당했다거나 하는 상황에서도 예전처럼 울거나 슬퍼하거나 화내거나 하지 않으니까요. 목사님, 제가 너무 너무 대견하지요 ?? 제가 봐도 그래요 ㅋㅋㅋ ....

이제부터 해결해야 할 관계들이 아주 많다. 앞으로도 상처받고 눈물을 흘리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부모님과의 관계, 자매들 사이의 관계도 아직 많이 어렵다. 자녀들을 기르면서 어린 시절의 아픔들도 자주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자매와 그 가정에서 꾸준히 일하시는 것이 보인다.

내가 자매에게 여러 번 강조해 주었다. “자매님의 치유를 계속 진행시키면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예요. 자매님이 지금까지 경험한 치유의 은혜를 주위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나누어주는 것이예요.”

내적 치유는 매우 아주 큰 떡 시루를 연상시킨다. 한 층이 드러나서 그것을 해결하면 바로 그 다음 층이 솟아오른다. 아무리 치유를 계속해도 그 다음, 그 다음 층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몇 층이나 남아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우리를 좌절하게도 하고 흥분하게도 한다. 그러나 그 다음 그 다음 층을 주님과 함께 해결해 나가면서 경험하는 기쁨과 보람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늙은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히 수도를 다녀올 일이 있었다. 그래서 볼료자라는 형제에게 수요일 성경공부를 인도하도록 준비시켜 놓고 출발했다. 돌아와 보니 교회의 분위기가 왠지 썰렁해져 있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연세 드신 몇 분이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이런 분위기가 가시질 않아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너무도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수요일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볼료자가 자신들과 같은 늙은이들은 다 죽어야 교회가 산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로 인해 나이든 사람들은 굳이 교회에 다니면서 젊은 사람들이 죽어주길 바라는 처지가 될 바엔 그냥 집에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안 나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늙은이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 바엔 젊은 사람들끼리 잘 하면 될 것 아니냐며 섭섭함을 토했다.

교회 개척은 과부들 몇 사람으로 시작했지만 그 들 중엔 세상에서 유력한 사람들도 있었다. 볼료자는 유난히 장유유서의 전통이 강한 그 지역에서 나이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는 몇 사람이 교회를 좌지우지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편 개척초기에 열심이던 연세드신 분들은 청년세대가 부흥하게 되어 젊은 리더들이 세워지자 선교사까지도 젊으니 서로 짝짜꿍이 되어 자신들에게는 소원한 것 같아 서운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늙은이가 다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나는 볼료자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내용은 이렇다.

볼료자가 예수를 믿은 지 육개월 쯤 되었을 때 현지인 의식개혁을 위해 한국의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초청프로그램이 있었다. 볼료자는 교회의 젊은이 한 사람과 함께 한국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 훈련을 마치고 어느 목사님 댁에 묵게 되었는데 그 목사님은 “여러분이 죽어야 선교지의 교회가 삽니다”라며 몇 번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한국에서 들었던 그 말씀을 성도들에게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라고.

나는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볼료자에게 어르신들은 자신들이 다 죽어야 교회가 산다고 하니 교회 다니며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죽길 바랄 바엔 집에서 죽는 것이 나으니 교회를 안가겠다는데 한국에서 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성도들에게 전달했느냐고 물었다. 볼료자가 궁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나는 그냥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 보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제 나의 할 일은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죽는 것인지를 본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몇 주 동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 안에서 내가 죽고 산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시간이 흐르자 이해가 되었는지 모두가 숙연해졌다. 진정 죽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것 같았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가 되고 그렇게 소원하는 바이지만 나 자신이나 그들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내가 펄펄 살아있지 않는가!

얼마 전 미국에서 선교강의를 하러 왔던 한 선교사가 이런 말을 했다. 가장 무섭고 끔찍한 일 중의 하나가 죽다가 덜 죽은 일이라며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완전히 죽어야 한다며 이런 일화를 들려 주었다.

그 자신이 시골에 살 때 명절에 닭을 잡다가 놓쳐 닭이 모가지가 꺽인 채로 피를 흘리며 온 마당을 뛰어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흔들거리는 머리와 부릅뜬 눈으로 뛰어 다니는 그 모습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이었다고 한다. 죽으려면 완전히 죽어야 하는데 덜 죽어서 혐오스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아닌가?

이 사건 이후에 교회는 안정이 되었고 신실한 젊은 사람들이 세워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개척초기부터 열심으로 섬기던 교장출신의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자 교회의 결정에 사사건건 불만을 토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다른 교회를 개척하겠다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그 분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일부 성도들은 난감한 입장이었다. 신앙적으로 판단하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오래 인간적인 관계로 얽혀 있던 지역교회에서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상황이 벌어지자 곤욕스러운 입장이었다. 그래서 결국 얼마의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 새로운 모임을 시작했다. 나는 선교지에서 처음으로 교회의 분립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었다.

죽어야 할 우리가 죽지 않아 지금도 하나님과 그 분의 일을 거스르고 있지는 않는지?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20 >









00X-MAS’ 12 우리 딸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연극에서 베들레헴의 별이라는 애매한 역을 맡았다. 첫 리허설이 끝나자 딸은 금색 반짝이를 붙여 환히 빛나는 별 옷을 입고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연극에서 네가 하는 일이 뭐니?” 내가 물었다. “그냥 서서 반짝이기만 하면 돼요.” 딸은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영 잊혀지질 않았다. 딸이 연극에서 맡은 역할이 내 삶의 한 장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 때 빛나려고 서성이던 시절이 있었다.

언젠가 우리 집에서 여자들의 모임이 있어 차를 대접했다. 그들이 차 마시는 일에 갖은 공을 드리는 것을 잘 아는지라 나는 레이스 달린 냅킨, 꽃 장식, 은제품, 고급 빵 따위로 며칠씩 야단법석을 떨었다. 한 손님이 “오늘은 정말 전에 없이 실력을 발휘하셨네요”라고 말했다. 칭찬으로 했을 그 말이 돌연 진리가 되어 나를 때렸다. 나는 모든 사람보다 더 잘하고 더 빛나려고 애썼다. 내 동기는 따뜻한 대접과 우정이 아니라 스타(Star)의 인정욕구였다. 모임이 끝난 후 나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스타가 되려는 내 욕구를 애써 내려 놓았다.

화려한 스타는 칭찬받을 만한 일을 줄줄이 성취하려 전력분투한다. 이 화려한 스타라는 에고(ego)의 가면을 쓰면, 가장 환히 빛나는 사람이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개념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진정한 스타의 과제는 자기 ‘내면의 빛, 하나님의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란한 행위로 스스로 빛과 온기를 만들어 내려고 끊임없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
- 수 몽크 키드 / 『기다림』에서


0091. “동방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 왔도다”(찬116 ①)젊은 옥스포드 학자 로버츠(P. W. Roberts)의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헌 책 한 권이 선물로 놓여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Marco Polo, 1254-1324, Travels)이었다. 13세기의 유럽 미개인들에게는 동양의 중국 등의 선진국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베니스 태생의 무역상인 폴로는 실크 로드(Silk Road)를 따라 계속 여행 중 옛 『바사』(Persia, 오늘날의 이란) 제국을 지나면서 동방박사 세 사람의 무덤과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이 이야기가 로버츠씨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동방박사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무덤에서 출발하여 베들레헴까지 여행을 계획, 옛 바벨론 제국(이락), 옛 앗수르 제국(시리아)을 거쳐 드디어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동방박사들의 행로를 따라 여행을 마친 그는 ‘In Search of the Birth of Jesus - the Real Journey of the Magi’ (1995) 라는 책을 출간하였다(그는 캐나다로 이주하여 현재 토론토에 살고 있다).

0092.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 (1) 마태복음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2:11).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의 3중 직책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었다(구약성경에서 ‘사사’들은 이 기름부음이 없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 동방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 세가지는 이 직책 - 황금(왕), 유향(선지자), 몰약(제사장) - 을 상징한다.
주님이 탄생 시에 받으신 세 종류의 예물은 주님이 세상 떠나실 때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모두 주고 가신 선물이다:
1) 황금 (재물, 왕, 뜰, 길) - “우리는 다 왕 같은 제사장”(벧전2:9-12)이지만 세상, 재물, 황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뜰에 들어갈 때 다 태워 죽여야하는 값진 짐승일 수도 있다. 우리의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지 못할 때에는 그 재물은 재난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시라.
2) 유향 (재능, 선지자, 성소, 진리) - 재물은 없으나 재능가진 자의 재능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지 못할 때에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라. 성소에서 배우고 세상에서 전해야 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우리의 모든 재능이 동원되어야하는 원리이다. 얼마나 많은 재능자들이 ‘자기실현’, ‘자기구현’에 자기재능을 낭비함으로 자기우상숭배로 인생을 마치는가를 생각해보시라.
3) 몰약 (목숨, 제사장, 지성소, 생명) - 재물, 재능이 없는 자도 이것들보다 더 귀한 목숨은 갖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대제사장이시면서 동시에 스스로 자원하여 제물이 되셨다.

009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마1:21)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의 제일가는 목적 중 하나는 자기백성들의 죄문제 해결을 통한 구원이다. 정치, 경제,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도덕, 윤리문제 해결하기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1960대에 길거리의 만병통치약 파는 약장사 같은 만병통치약 ‘복지’로 전하는 목사들도 있다. ‘모든 문제가 다 끝났다’라는 등의 난폭한 설교들... 교회사의 가장 흔한 갈라디아서 2:20절 이단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구약을 인용해가면서 왜 예수가 그리스도인지를 설명하지는 않고 무슨 ‘혁명구호’외치듯 외치면 기적이 일어날 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독한 미신이다. 신복음주의의 트레이드 마크인 대형집회와 구호에 크게 오염되어 입력이 크게 잘못되어있는 것 같다.

0094. “<첫>(맏)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마1:25, KJV)
모든 성경, 천주교 Latin Vulgate 성경에도 나오는 이 한 단어 “첫”(Firstborn)은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타이틀로 일곱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천주교 교리의 하나인 마리아의 ‘평생동정녀설’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최근에 성경에서 제거시킨 단어다. 이 단어 하나가 천주교 신학을 뿌리채 흔들기 때문이다. “첫(맏)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첫 아들을 낳은 후에는 동침했다는 뜻이며, 첫 아들은 둘째, 셋째 자녀들도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에서 첫 열매라는 개념은 나중에 열릴 열매를 암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함의가 없이는 ‘첫’열매의 ‘첫(맏)’이라는 단어는 무의미 해진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활을 동반하는 것이다(골2:12/3:1/살전4:16).
“...낳으메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1:25) NIV등 현대역 성경들은 창조주 예수님을 인간 요셉의 아들로 만들어 ‘뉴에이지’ 예수로 변개시켜 놓았다. 즉, 요셉이 예수님의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he gave him the name Jesus”).

0095. 1948년 / 신복음주의의 시작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영향하에 1948년을 기해 오켕가(H. J. Ockenga)목사의 주도하에‘신복음주의’(Neo/New Evangelicalism)가 미국 남가주 파사데나(Pasadena)의 화려한 시청극장에서 시작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입힌 피해는 너무나 크다. 사단은 우선 성경용어들을 제거시키고 심리학, 철학, 인본주의자들의 세상적 일상용어로 바꿈으로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신복음주의의 대부 맥거번 박사에 의해 ‘영혼구원’(Soul Winning)은 ‘교회성장’(Church Growth)이란 용어로 둔갑하였다. ‘회개와 구원’은 ‘드러냄, 치유와 회복’이란 심리학적 용어로 바뀌면서 기독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자 인간 최고의 재난인 “죄 가운데서 죽는 것”(요8:24)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무시하였다.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라는 주제의 핵심인 ‘회개와 구원’은 유치한 주제로 밀려나 ‘회개와 구원’을 외치면 성숙되지 못하고 좀 모자란 설교자로 취급당하게까지 되었다. 마9:13의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to repentance)도 성경 본문에서 제거되었다. 주제가 밀려나니 21세기 교회안에서 미신을 섬기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믿음을 사장시키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로 유지되어야할 믿음은 인간들의 야망에 초점을 두고 겉치레로 거창하고 화려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시적인 미신적 구호들로 가득 찬 피조물들의 행위종교(religion)로 향하게 만들었다. 죄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다시 종교의 사슬에 묶여버렸다.

현실적인 죄와 싸우는 전투적 삶은 사라지고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초점을 모은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라는 말씀을 “내가 행복하니 너희도 행복할지어다”로 읽고있다. 교회강단에서 기타들고 부르는 노래를 잘 들어보시라: “나는 기뻐요 나는 행복해요” 하나님 경배가 아니고 자기가 경배대상인 자아(自我)예배다. 이래저래해서 “예수믿고 청와대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세상에서 성공”, 하나님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을 통한 자기실현으로 자기만족이다.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고난을 다루고있는 히브리서를 인용한 설교제목이 ‘행복비타민’이라니...? (목사의 복장이 ‘행복비타민’을 따라주는 술집 ‘바텐더’복장을 하고 있으니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고있는 것 같아 혐오스럽다. 생선은 대가리부터 썩는다더니...). 하나님께가 아니라 사람에게 신경쓰느라 정신이 없다. 신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천국복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간들의 모든 필요에 따라 초점을 맞추느라 현대교인들을 완전히 스포일(spoil)시켜놓아 교인들은 이미 영적성장을 멈춘 탁아소의 유아들이 된 것도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이 종교적 실용주의, 신복음주의는 기독신앙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아 사람만 많이 모인다든지 효과적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진리로 여겨지게까지 되었다. 결과만 얻을 수 있다면 무조건 좋은 일로 추앙, 지도자등을 평가하면서 고뇌하는 소수의 진실된 종들의 목을 죄인다. 그러나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의인(義人)의 수는 ‘좁은 길’에 있어 그 수는 지극히 적을 뿐 아니라 우리도 지금 좁은 길의 선상을 걸어가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한다.

최근의 뉴욕타임즈에 의하면 전 미국 성인의 10%가 넘는 숫자가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무서운 숫자이다. 캐나다도 뒤따르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본인 죄(罪, sin)문제를 다루지 않으니 죄의 결과인 범죄(crime)문제가 경찰, 국가로 넘어갔다. 국민의 세금으로 교도소를 세우고 또 세워도 모자랄 정도로 범죄자들이 차고 넘친다는 기사이다. 교도소를 증축하느라고 주(州)예산이 부족하여 초등학교들을 폐교하는 지경에 이른 캐나다 서부의 실정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평생의 외침이 ‘회개와 구원’에 관한 선포임은 너무나 자명하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 직분들은 갖고 있으나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를 맺고 있는 교인은 실제로 2-30%가 안된다고 보면 지나친 편견일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religion)로 오해하고있다. 세미나 중 식사시간에 어느 목사님이 “선교사님은 후합니다”라고 하신다. 무슨 말씀인가 물으니 자기 생각으로는 교인들 10%도 거듭나지 못한걸로 본다고 한다. 교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직분이 문제가 아니다. 창피한 것은 이 세상 살 동안 다 당하고, 구원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여러 분야에서 노심초사 사역하시는 종들의 사역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고 무궁무진하여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6.25사변 후, 길거리에 앉아 점치는 점쟁이 할머니로부터 “자네는 예수믿을 팔자라네, 예수한테나 가게나!”라는 점괘를 받고 목사가 되신 분도 있으니... 인간이란 다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같은 존재이며 필자 자신도 누추하고 허물많은 사람이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이 늘 더 급한 사람이자 문제아다. 온전한 영적 거듭남와 혼적치유의 구분이 사라지고 있으니 종교통합이 더러운 홍수처럼 밀려온다. 혼적치유가 채워지자 더 이상 주님을 찾지 않은 9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눅17:11-19)는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 거듭남의 기회를 혼적치유가 가로채어 영적 길을 방해하는 것도 ‘마귀의 궤계’(엡6:10-20) 목록에 들어있어 어느 종교 안에서나 사단이 자유자재로 크리스천을 속인다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명이 치유, 회복받았으나 실제로 주님으로부터‘구원’의 확답을 받은 자는 사마리아인 한 명 뿐이었다(19절).

완벽주의는 죄(罪)의 음흉함과 회개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성령운동?(성령이 무슨 운동기구인가? 성부운동, 성자운동도 있단 말인가?)은 ‘나서기’좋아하는 자들이 자기 교만에 속아 ‘마귀의 궤계’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다. YWAM(예수전도단)은 이 단체를 세계적인 조직으로 키우기 위해 로마교황청과 협상, 1987년 New Orleans에서 있은 ‘Charismatic Congress’(은사주의자들 대회)때 이미 1,000명이 넘는 카톨릭 스텝들을 ‘YWAM workers’(‘O Timothy’, 15 Nov. 1987)사역자로 받아들였으며 로마카톨릭 교구전도를 극찬한 Loren Cunningham (LC asks every denomination to help fulfill the Great Commission, and praised a Catholic Church plan to evangelize parish by parish - Charisma, Aug. 1990)이나 20명이 넘는 로마카톨릭 성자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인정한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 (책의 내용은 ‘배도하는 그리스도인’이다)을 쓰신 분은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표현대로 ‘적응, 타협의 명수’들로 둔갑하였고,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한국교회는 로마화(化)의 재난에 처해있다(이 주제는 계속 다룰 생각이다).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십자가 밝히 보여주소서
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
(찬 531 /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④)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 4색 밴쿠버 목양일기










4인 4색 목양 일기를 시작하면서 컬럼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 하던 때가 있었는데 벌써 두 번째 컬럼을 쓰게 됩니다. 이번에는 목회 초년생으로서 많이 고민했던 것 한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에 누군가 목사를 ‘목적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씁쓸한 웃음을 진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만이 가지는 이 무거운 짐을 그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짧은 목회였지만,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성도들의 삶의 문제들이 제 문제로 투영되는 부분입니다. 부 교역자로서 사역을 할 때에는 알지 못했었는데, 담임 목사가 되고 나서 절실히 느끼게 된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물질적인 문제나 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 내 문제처럼 다가와서 같이 안타까워하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많아질수록 점점 그런 일들이 가중되어 졌습니다.

이런 일들로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늦은 밤 기도 중에 영혼으로 밀려오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순간 절실히 경험되어진 깨달음이 일어났습니다. “목회는 짐을 지는 것이다(마16:24).”
그 순간 밴쿠버에서 오랫동안 목회하는 선배 목회자들에 대해서 그렇게들 목회하고 계셨구나 하는 측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때 나지막한 음성이 마음을 또 깨웠습니다. 목사의 믿음은 그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렀더군요. 그동안 성도들이 당면한 답답한 현실에 있어서 내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있거나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큰 역사를 일으키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과정도 믿음입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을 둘러싼 앗수르 왕 산헤립으로부터 항복하라는 편지 한 통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는 이 위기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그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 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진 짐을 맡긴 것입니다(왕하19:14-19).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연말입니다. 매년 이 때쯤이면, 목회자들의 가슴앓이가 시작이 됩니다. 성도들의 삶의 변동에 따라서 그들이 풀어 놓는 문제들을 오늘도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히스기야 스타일의 해결 방식을 배우고 나서는 그때부터 평안이 생기고 어느 정도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무거운 짐을 진분들이 계시다면, 올해는 히스기야 스타일로 마무리 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목사란 이렇게 “목회에 생명 걸고 사는 사람”입니다.

[라일주 목사 / 로고스교회 / 778-898-1558]
 
 
 
 
 

재미있는 사도행전



영적 ‘에너지 블랙홀’이 되라!



전 세계는 제한된 양의 ‘에너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중국과 인도는 에너지 소비량이 급속히 늘어 이들을 “에너지 블랙홀”이라 일컫는다. 에너지(energy)란 말은 그리스어로 일을 의미하는 에너곤(energon)에서 유래된, 에네르기아(energia)가 어원이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세상의 무슨 일이든 에너지가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다. ‘영적 에너지’가 있어야 영적인 일을 할 수 있다. ‘영적 에너지’가 무엇인가? ‘성령충만’이다. 성령은 성도의 필수 에너지다. 초대교회 일꾼의 기준 1호가 무엇이었는가? ‘성령충만’이었다(행6:3).

성령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역에 많은 열매가 나타났다(행6:8). 동시에 이를 시기하는 자들 또한 나타났다(행6:9). 그들은 스데반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꼼수를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매수하고 충동질(행6:11-12)했다.
그리고 스데반을 공회 앞에 세우고 급기야 돌로 쳐서 ‘즉시처형’(Immediately executed) 해 버렸다(행7:58-60).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당당했다(행6:15). 용기있게 유대인의 죄악도 적날하게 고발했다(행7:51-53). 전혀 굽힘이 없었다. 죽음 앞에서도 진심어린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행7:60). 성령충만은 이기는 힘이다. 그리고 성령충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의 근원’이다.

성경은 말한다.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엡5:18). 이것은 권유하는 말이 아닌, 명령이었다.

성령충만은 철저한 자기 점검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교만한 마음이 없는 가를 점검하라!(잠16:18,벧전5:5)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를 살피라!(시66:18, 롬3:23) 마지막으로 세속적 쾌락에 물든 몸과 마음이 없는가를 점검하라!(마6:24-33)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성경은 엄히 경고하고 있다(딤전5:6).

현대 과학자들은 화석 연료, 석유 45.7년, 석탄 119년, 천연가스는 62.8년분 정도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에너지의 고갈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다. 영적에너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영적 에너지의 고갈은 영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적 에너지의 충만한 확보는 성령충만한 삶과 직결된다.

세상은 절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당해낼 방법이 없다. 저들은 우리의 머리 위에서 늘 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힘도 능도 아닌 오직 성령으로 만이 가능한 일이다. 스가랴 4장은 6절은 이렇게 말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아브라함 이야기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창 19:1-22 (하)



지난 주에 이어 소돔의 심판과 롯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소돔성롯의 집을 에워싸고 동성애를 요구한 사람들을 통해 소돔성의 모든 죄악이 드러났고,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천사들은 소돔성을 멸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롯에게 그의 가족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말합니다. 이에 롯은 자신의 두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가서 같이 성 밖으로 피하자고 말합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19:14). 여기서 ‘농담’이란 ‘므차헤크’ (mṣaḥēq) 로 ‘이삭’ (yiṣḥāq)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즉, 그들은 롯이 말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도 안 되는 ‘웃긴 것’ 정도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지체하는 롯심판의 시간은 다가왔고 천사들은 롯을 재촉하지만, 롯은 자꾸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19:16). 롯은 일찌기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으로 왔고 아브라함과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과 함께 이집트로 갔다가 풍성한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을 체험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적 축복으로 말미암아 짐승들을 먹일 풀이 부족하여 목자들끼리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그는 가나안을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 땅이 비옥하고 물이 넉넉한 소돔으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롯은 소돔성에서 살면서 그 성의 죄악이 얼마나 패역한지를 보았고 그 죄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입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그 죄악된 곳을 떠나 가나안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동안 그가 이를 악물고 모았던 물질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힘으로 물질을 모으며 살았던 삶의 결과는 그 동안 애착을 갖고 모았던 모든 물질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위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의 위기는 앞에서 물질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는 심판이 임박했을 때, 지체하고 머뭇거렸던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하나님은 자신을 떠나 물질을 택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즉시 순종하기 보다는 머뭇거리고 지체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19:16). 그리고 산으로 도망을 가라고 명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19:17).

자기 주장을 펴는 롯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롯은 다시 한 번 주의 사자들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18). 이것은 영어로 보면 더 이해가 빠릅니다; “Oh, no, my Lords.”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도 롯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약해질 때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고, 롯은 불순종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롯은 도중에 죽을 수도 있으니 산이 아닌 작은 성읍에 머물게 해달라고 합니다 (19:19-20).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더 자비를 베푸셔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고 롯이 피할 동안 소돔에 대한 심판을 잠시 늦춰 주셨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자기 생각대로 움직였던 롯에게는 더 끔찍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불행은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롯의 모습은 세상과 물질을 택한 결과가 물거품이요 헛수고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 건강,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려워도 믿음과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기 바랍니다.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떼의 새들이 겨울 아침 공기의 저항에 따라 열을 바꾸며 날아가고 있습니다. 과학도 기하학도 모르는 새들이 바람의 저항을 가장 적게 받도록 대열을 이루어 서로의 힘을 도우며, 길고 힘든 여행에 지치지 않도록 선두를 바꾸어가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본능과 예지에 감탄합니다. 학창시절 그렇게 이해가 어렵던 과학이나 기하학도 결국 자연의 존재 원리나 생명의 이치를 해석하면서 발달한 학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학문이 제 아무리 놀랍도록 발전하여 날마다 신기술로 거듭나고 있다고 해도 지으신 모든 만물에 투영된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 앞에서는 실로 초등학문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우주의 법칙은 얼마나 광대하면서도 섬세한지, 거세게 이는 바람의 입김에 불려 빠르게 밀려와 바위에 부딪혀 와장창 박살이 나는 물결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알고 순종합니다. 저 물결이 만약 제 기분 내키는대로 한없이 밀려 들어온다면 인간들은 날마다 불안에 떨어야 했을 것입니다.

마야의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로 끝이 났다며 종말에 대한 흉흉한 분위기에서 시작했던 2012년 한해가 테러와 지진과 태풍과 각종 인재의 피로 얼룩진 채 저물어 가는 이 때 한국은 대통령 선거로 또 한번 크게 들썩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권력은 저 새들처럼 서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자리를 이양하며 서로 힘을 북돋아 국제 정세의 저항을 이겨낼 수 있도록 국력을 키우며 함께 가지 못하고 왜 그렇게 여러 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는지, 이렇게 심각하게 분열된 국론으로 다가오는 2013년의 국제 정치 경제 기후등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며 대처해 나갈지 정말 기도가 됩니다.
어떤 공동체든 사랑과 협력을 통해서만 세워질 수 있음을 저 새들에게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인류에게 선하게 나타나시도록, 그리고 온 세계의 복음화가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흩어져 있는 주님의 종들에게 영성을 더하셔서 교회가 다른 지식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교회들이 힘을 합하여 한 목소리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행을 홍보하는 광고 메일에서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설문조사에 응해 여행에 대한 평을 남겨놓은 것을 보게 되는데, 무척 흥미로운 사실은 같은 여행에서 같은 서비스를 받고 나서도 어떤 사람은 혹평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좋았다고 평하는 점입니다. 여행의 내용과 질을 결정하는 것은 여행지의 환경이나 조건보다는 그 여행을 받아들이는 각 사람의 마음 가짐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를 쌓은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도 감사로 반응하고 평소에 불만을 쌓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속에서 끓고 있는 불만이 넘쳐 흐르기 마련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논하고 해석하며 하나님의 처사가 자신의 판단에 못미치는 양 깊이 좌절하고 있던 욥에게, 인간은 당신이 지으신 우주의 비밀과 그 광대한 오묘를 깨달아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작고 나약하고 소심하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벌레만도 못한 인생이 하나님의 영화로운 광채를 입고 이 땅에서 선한 기회들을 누리며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묘하고 영광스럽게 다가옵니니다. 오직 죄밖에 질 줄 모르는, 죄 보따리 같던 인생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입어, 가는 곳이 변했고, 말과 생각이 변했고 취향과 걸치는 옷이 변했고 신분이 변한 사실이 너무도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로서 누리는 매일의 사치와 복락은 대통령도 부럽지 않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나는 잊었어도 하나님은 절대 내 기도를 잊지 않으시고 모두 응답하신 것을 보며 놀라곤 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셔서 어리석음으로 구한 것을 지혜로 응답하시고, 하나 밖에 볼 줄 모르는 무지로 구했지만 두루 온전하고 성숙하게 하시고, 성마르게 보채는 기도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역사하시고, 내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능히 넘치도록 채우시며,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따르시는 하나님의 발자국이 너무나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노래한, 작사가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벅차 오르는 심정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끝도 없이 넘실대는 바닷물이 펜촉에서 사라지고 작은 글씨로 저토록 광대한 하늘을 다 채우려면 영원의 세월에도 절대 끝나지 않을 일이라 해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그보다 크고 오묘하며 영원하다는 고백이 얼마나 아름답고 공감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나의 남은 삶은 늙어가는 우울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향해가는 기대와 기쁨이고, 영원으로 떠나는 행복한 여행을 준비하는 즐거움입니다.

이생의 여행을 마치고 생에 대한 나의 평가는 내가 걸어온 시간과 소중한 관계들에 대한 감사와 존중의 의미로서 오직 행복했노라고, 그분의 이름 때문에 내 인생 너무나 영화롭고 따스했노라는 뜻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도 이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z”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9 >





0088. 이스라엘과 크리스챤의 택함의 비밀

하나님의 이정표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때를 알려주는 시계와 같다. 3000여 년 전 다윗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122:6)
이스라엘의 택함, 크리스챤의 택함의 비밀은 같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거울이 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시고 특권과 사명을 주신 것은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었고” 또 “목이 곧은 백성”들이었다(신7-9장/출32장). 이스라엘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의도적인 사랑에 기초한 택하심을 오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쌓아놓은 무슨 공로에 의거하여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원리이다. 우리의 미덕이나 적합성도 아닌 하나님의 순전한 긍휼과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더 악하고 강팍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출애굽의 구원은 넓은 의미에서 영적구원의 한 전형으로 묘사하고 있다(시74:2/107:2/사43:1/렘31:11). 창세기 3:15의 은혜로운 선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택하시고 이루시는 모든 자비로운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 고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 사명이 아니고 특권이라고만 믿는 것은 사단의 유혹이다.’ 자기사랑, 지독한 에고(ego), 이기심으로부터의 구출,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것들로부터의 ‘출애굽’이 요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죄, 자아(自我)속에 있는 세상, 자기의(自己義), 사망’으로부터의 출애굽을 도와서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0089. “그리스도 네 마음에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시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왜 교회가 무기력한가?”라는 주제가 제기되었다. 대답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단체로 죽을 프로그램들로 광분하고 있다. 아무도 구원 못 할 것들로 분주하다. 이미 교회가 아니다. 교회도 크고 사람도 많은데 복음 전하는 교회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강(江)과 바다가 오염되었다고 다들 걱정들 하지만 이 지구 상에서 제일 오염된 지역이 있다면 그 곳은 “십자가의 도(道)”가 전해지지 않는 교회강단보다 더 오염된 지역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듣고있던 젊은 목사님이 상심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지켜야할 율법의 총체로서 들려주신 사랑의 율법이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또는 내가 해야하는 무엇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 이루신 무엇이다. 그 무엇이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이루신 의(義)이다.” 나를 통해 하신 일, 내가 이루어 놓은 무엇 등등은 복음의 결과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이 아니다. 100세에 낳은 “독생자 이삭”(히11:17)을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산(山)에서 바치라고 하신다. 전 성경을 통틀어 아브라함만큼 하나님의 심적 번민 속에 들어간 자가 있을 것인가? 아브라함이 출발한 순간부터 아들은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 죽어 있었다. 사흘 길은 주님이 무덤에 계셨던 시간이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위해 이 복잡한 내 마음의 세상에, 흠없고 티 없으신 아기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하는 계절이다.

0090. 기독교 최초의 교회사 사도행전

우리의 기독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본 교회사라기 보다는 땅에 속한 세상권세 중심의 로마카톨릭종교사다. 천국복음의 본질에 기준을 두고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회사가 아니라 혼합된 ‘에큐메니즘’종교사다. ‘기독교인’이란 용어 또한 “위로부터”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적개념이 결여되어 있고, 땅에 속한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통해 생겨난 제도적 용어로 전락해 버렸다. 기독교회사에서 이 말보다 더 오해를 받아온 단어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신학자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가 가장 짧다”라고 썼다.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세상 지성인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권중심의 교회사를 보고 ‘기독교는 크게 나누어 로마카톨릭교, 동방정교, 프로테스탄트 등으로 나뉜다’는 식으로 썼다. 이는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무지한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어떠한 교단에 속하였든지 간에 기독교 안에는 기독교인만이 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이기 전에 우리는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의 시작은 예수의 복음에서 시작된다. 기독교 최초의 교회사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가 보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카톨릭교인’이나 ‘정통파’로 부름을 받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바울의 전도를 받은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라고 하였다.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벌써 1세기 때부터 사도들이 전해준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유브라데 강(江) 유역, 아르메니아 등의 소(小)아시아 지방에는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한 폴리시안(Paulicians)이란 별명이 붙은 무리들이 일어났다. 침례교회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몬타니스트(Montanists, AD 150년경)파는 소아시아 지방과 아프리카 지역에 퍼져있었던 무리들이었다. 로마카톨릭교의 사제 맥브린(R. McBrien)은 그의 저서 “로마카톨릭주의”에서 이 몬타니스트들을 로마교회보다 더 거룩하였던 집단으로 간주, “정결한 이단”(최상급 표현사용, Purist heresy)이라 썼다. 감리교의 요한 웨슬리를 위시하여 많은 교회사가들은 면밀한 검토를 통해 몬타니스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로 간주하고 있다. 이어서 터툴리안(Tertullians, 2-5세기경)파가 따른다. AD 251년 칼타고 공회에서 파문선고를 받은 당시 로마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었던 노바티안을 따랐던 노바티안(Novatians)파들은 소아시아 지방, 이태리, 북 아프리카 지역에 퍼져 5세기까지 계속 재침례파의 하나로 흡수된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으로부터 “흠을 찾을 수 없는 성도들”이란 별명을 얻은 도나티스트(Donatists)들은 북아프리카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무리들이었다.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이 천지만물 모두 변하나
변찮는 주여 함께하소서

(찬 531 /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②)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1)






사랑하는 밴쿠버 그리스도인 여러분, 이곳 한국은 가장 추운 1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추위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후끈 달게 하는 12월 19일 대선을 앞에 두고 있어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향후 5년, 더 나아가서 통일코리아의 길들을 여는데 있어 과연 하나님께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실지 사뭇 긴장케 되는 시간들의 연속입니다. 밴쿠버의 겨울은 그리 춥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한반도의 계절에 봄이 올 수 있도록 함께 응원하고 기도하며 마음을 모아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1. 무엇이 통일인가?
분단국가에 사는 자국민이 쉽게 떠올리는 ‘통일’에 대한 정의는 당연히 남과 북의 하나됨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통일’은 좀 더 본질적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참 통일의 진가를 알고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내고 우리 인생을 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2장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16절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0절의 말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요, 우리가 예배시간마다 올려드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앞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던 완벽한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됨과 통일! 그것을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통해 분리시키고 나누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분리를 십자가 위에서 한방에 깨뜨리시고 하나님과 다시 하나(통일)가 되게 하셨고, 지금도 그 뜻은 성취되어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통일’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이요, 그 분의 사역방식이며 늘 삼위일체로 지금도 인류를 위해 일하시고 그 하나됨 안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통일은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는 것이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2. 남과 북의 통일하나님의 뜻이 원래(본질)의 것을 회복하시기 위한 여정인 것처럼 남과 북의 나뉨 역시 원래 하나였던 이 민족이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분열된 것을 원래의 자리, 하나됨의 자리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통일’을 이루실 것이고 그 ‘통일’의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한민족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고 내 조국 한반도를 위해 기도하며 각 교회의 몫,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몫을 찾아 ‘통일’에 기여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영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분단시대를 살고 있고 이는 ‘통일시대’에 걸맞게 살아야 할 충분한 당위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통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길이요, 우리 모두는 그 위대한 부르심에 초대받았기에 이제 각자의 자리를 찾아야만 합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Plus







교회음악의 목적



교회에서의 음악은 그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맞도록 준비하고 연주되어야 한다. 교회음악의 목적은 예배이다. 그리고 그 목적에 맞도록 준비하고 연주되어야 한다.

교회음악이 점점 콘서트(연주회)로, 자기 발표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드리며 감사하며 주님을 향한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함께 한다는 가면을 쓰고 사람을 향하고 연주하는 자신들이 만족하며 즐거워하는 모습들이 보여질 때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 빨리, 깨닫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향하여 드리는 그런 음악의 자리로, 그래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

예배와 찬양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감사와 찬양 기도와 봉헌을 드리는 것이다. 특히 찬양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것으로 그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 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혹 요사이에는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축복하며 하나님은 빠진, 저 멀리 한쪽 구석에 모시는 것 같은(?) 그런 내용의 노래들을 많이 듣게 된다. 물론 이런 노래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 주심을 알게 되기는 하지만 노래의 중심이 우리가 되어서 서로 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외면되는 것이 아닌지 염려가 된다.

예배와 찬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찬양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장 10절)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6 장 사랑스러운 톰보이들




거의 모든 톰보이들은 자신이 아주 여성스러운 사람으로 굳게 믿고 살아간다. 주위 사람 모두가 “저거 왕 톰보이네...” 라고 말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고, 귀엽게 보인다. 그러나 그 착각을 깨닫게 해 주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모임에 아주 여성스러운 여성 두어 사람을 끼어 넣으면 된다. 그러면 톰보이들은 “아... 저 여자들 참 다르네요... 근데 왜 저렇게 살아야 하지요??” 진지하게 묻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성스러운 여성들은 그 다음 모임부터 나타나질 않는다. 톰보이들이 자신들과 너무 다르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톰보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치유를 받아야 한다. 본인은 치유 받지 않아도 잘 살아가는 것처럼 믿고 있지만 자녀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치유를 받아야 한다. 딸들을 위해서 더욱 그렇고, 자신의 노년을 위해서 더더욱 그렇다. 항상 자기 마음대로 자식들의 삶을 좌우하려는 자세 때문에 자식들이 (특히 며느리, 사위가) 넌더리를 내며 관계를 멀리해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나의 사촌 누님 한 분이 그렇다. 큰 교회 권사이고 여선교회 대표 회장도 역임한 참으로 씩씩한 일꾼인데 (물론 지금은 은퇴했지만) 자녀들과의 관계가 아주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는데 엄마를 돌아보는 자식이 없다. 그동안 너무 자신의 마음대로 자식들의 삶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보기에 너무 안쓰럽다.

그런데 이 치유가 그렇게 쉽지도 않고 빨리 되지도 않는다. 첫째 이유는 대부분의 톰보이들이 자신이 톰보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치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즉,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때에 틀이 잡힌 성품을 치유해서 복구하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치유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깊이 깨달으며 겸손하게 자신의 약점을 인정해야 하고 모든 망가진 관계들을 하나 하나 회복해가는 어려운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야만 한다.

“저도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네요”
전 집사는 딸이 넷인 집의 둘째 딸이다. 첫째는 맏이라고 귀염받고 셋째는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그 사이에 끼어서 없어도 되는 것 같은 천덕꾸러기로 자라났다. 자기 소유가 없는 삶이었고, 식구들이 모이면 모든 일을 도맡아하는 어머니의 하녀다.
아주 남성적으로 자라났다. 예수 믿기 전에는 직장 동료들과 술도 잘 마셨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어디서나 사람들이 그녀를 참 좋아했다. 그런데 자매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를 못하다. 부부 사이에 깊은 대화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도 그 아버지에게 받은 많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었기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내에게 할 말 못할 말을 쏟아내며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치유 학교를 참석하면서 자신의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비록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지만 전 집사의 삶에 새로운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고 웃음이 회복되고 얼굴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강의 중에 이렇게 물었다. “전집사가 치유 세미나를 통해서 받은 가장 귀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일초도 지체함이 없이 바로 대답이 나온다
“제가 참으로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거요. 저에게는 여태껏 아무도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거든요...”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더 깨달았다. Email을 보내왔다. <계속>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43)



양자가 되어 주오



선교지 교회를 개척하면서 찬송가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 초신자들을 위해 수도에 있는 알렉산드더 전도사를 초청했다. 음악엔 재주가 없는 나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피아노를 전공한 알렉산드더가 와서 2주일 동안 성도들에게 간단한 음악이론과 찬송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성도들 중엔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젊은이들도 있으니 피아노를 구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그 당시 많은 러시아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무거운 피아노는 애물단지가 되어 미화 300불이면 동독제 명품을 살 수 있었다. 성도들에게 수소문하자 성도 한 분 사람이 친척집에서 피아노를 판다고 했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는데 좌우 대문에 윗 쪽엔 빛 바라낸 명패와 금색 별들이 붙어있었다. 나는 안내하는 성도에게 저 것들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노동영웅들이 사는 거리라고 설명해 주었다. 몇 집을 지나 멈춰 선 집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데 밖으로 난 창문들은 이상하리 만큼 푸르고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이 먼지 투성인 비포장길가에 유리창을 저렇게 관리할 정도라면 보통사람들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칠 십세 정도 되신 분이 반가이 문을 열어 주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집안 구석 구석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실로 안내된 나는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피아노를 구입하러 왔다고 했다. 그러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손녀가 치던 피아노는 얼마 전에 이미 팔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할아버지가 이것 저것을 묻다가 성씨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정가라고 했다. 그 분은 다시 본이 어디냐고 물었다. 동래 정가라고 하자 본인은 진양 정씨인데 원래 동래와 진양은 형제간이라며 부부는 친척이 왔다면 반가워 했다. 카라칼팍스탄 고려인들 중에는 전씨가 많은데 정씨가 드물다며 내 나이를 물었다. 내 나이가 자신의 막내 아들 나이와 같다는 것이다. 온화하고 친절하신 할머니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고 계셨다. 한참 정감있는 이야기가 오가는데 갑자기 어르신이 나를 자신의 양자로 삼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왜 그런 마음이 드셨는지 물었다. 내가 자신의 죽은 막내아들과 닮았다는 것이다. 사 남매 두었는데 막내 아들은 결혼한 지 삼 년 만에 딸 하나를 두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내가 죽은 아들과 닮았으니 양아들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뭇 진지한 분위기였다.

나는 두 분에 대한 아는 바가 없고, 두 분도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내심 이 분들에게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이곳으로 왔는지를 설명하며 전도할 생각을 했다. 내게 들려준 두 분의 이야기는 어릴 적에 원동에서 강제 이주되어 카라칼팍스탄에 정착하면서 남달리 근면하고 성실하게 논 농사를 지었고 자신이 이끄는 브리가다가 쏘련 전체의 수확량에 1위를 기록하면서 노동영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공산 이념 처럼 나누어 가지며 혼자만 배불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자 우리를 안내했던 성도는 어르신이 공화국 전체 고려인을 대표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되길 원하시면 아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내가 믿는 창조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을 소개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온 목사요 선교사라고 소개를 했다. 놀랍게도 노인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수십 년 동안 논에 씨를 뿌리고, 벼가 자라고 익는 것을 보면서 햇빛과 우로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어떻게 식물들이 자라날 수 있는가라는 생각하며 하나님을 찾았다고 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이 신은 없다라는 소리를 할 때면 자신은 속으로 웃었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도 지금까지 자신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 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들을 때 두 분은 감격하여 울고 있었다. 나는 믿은 자의 받은 성령에 대해서도 증거했다. 그 때 두 분은 온 몸에 진동이 와서 떨면서 겨우 울음과 격정을 참고 있었다.
그 날 두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와 아들 사이가 되었다. 내겐 ‘정 니꼴라이, 류보브’라는 새로운 부모님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 두 분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예배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모든 고려인 성도들은 그 분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믿음과 행실로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 이 분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다.
세월이 지나고 심방을 가서 양어머님과 담소를 나누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두 분이 나이가 들어 교회로 새벽기도를 다닐 수 없어서 새벽 다섯 시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지 오래 되었다고 했다. 새벽마다 찬송을 하고 성경을 석장 씩을 교독하고 각자 방에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자신에겐 매일 매일 기적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원래 눈에 문제가 있어 글자는 읽을 수가 없는데 성경만 펼치면 너무도 또렷하게 글자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기도할 때면 자신의 눈에 흰구름 같은 것이 방안에 내려 앉아 있는데 눈을 감아도, 떠도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구름을 처음으로 보던 날 구름의 일부가 자신의 코 속으로 들어가면서 향기가 진동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사십 년 가까이 심한 축농증으로 냄새를 못 맡았는데 그 후로부터 아침 공기의 신선함과 함께 흙 냄새가 느껴지면서 냄새를 다시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대체 그 빛나는 흰구름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8 >







0085. 프랑스의 두 마을 이야기(2): 바닷가 마을 『세뜨』
유대국가 건국사에 가장 영웅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유대인 4,515명을 태운 『엑소더스47』이 떠난 항구

지금은 인구증가로 제법 큰 타운이 되었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인 70여년 전의 마을 이야기 - 필자가 가진 엑소더스 47에 대한 자료가 상세하지도 않고 또 그나마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도 않아 지지난 호 <16>에 사진만 게재하고 간단히 설명하였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계신 분이 이스라엘 독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간한 『약속의 땅의 여명』(Dawn of the Promised Land, The Creation of Israel, 210pp.)이란 책을 보니 『엑소더스47』에 승선하셨던 분의 이야기도 기술되어 있어 반가웠다. 아버지께서 다시 정확하게 글을 쓰라고 하시는구나 생각하고 헌책을 구입하였다.

산골마을『샴봉』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남불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몽쁠리에’(Montpellier)에 도착하였으나 아무래도 대도시는 숙박비가 비쌀 것 같아 이름없는 시골에서 이틀정도 더 지내기로 하였다. 초행길이라 아무 계획이나 지도도 없이 기차가 처음 선 시골역에 내렸다. 조금 걸으니 바닷가 갯벌내음이 코에 와 닿는다.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필자에게는 가슴에 시원한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특징없어 보이는 시골 어항이었으나 골목길로 들어가 조그만 여인숙에 숙소를 정하고 오는 길에 보았던 바닷가에 늘어선 수수한 어촌식당에서 오랜만에 싱싱한 해산물 식사한끼 잘 먹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무엇을 먹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으나 싼값에 맛있게 잘 먹었다. 유럽을 떠나 북미에 온지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유대인 관계서적을 읽다가 이 작은 항구 세뜨(Sete)에서 ‘엑소더스47’배가 출항했다는 역사를 읽고 크게 놀랐다. 나는 몰랐으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셨고, 역사적 현장으로 인도하셨음을 알고 찬송하게 되었다.

1947년 7월 중순 ‘세뜨’항을 떠난 ‘엑소더스’호는 미국 ‘미시시피’강(江)을 오르내리던 증기선으로 120명의 부유한 고객들을 태우고 다녔던 유람선을 개조한 배였다. 유대인 난민 4,515명을 태우고 이스라엘로 일주간 항해예정으로 이 항구를 떠났다. 바다위에서 첫날밤에 두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좋은 징조라고 다들 기뻐하였다. 나흘 째 되는 날, 세 번째 아기가 태어났다. 그러나 죽음의 수용소를 벗어났던 산모는 조국 이스라엘로 가는 배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미 부모들을 독일의 수용소 가스실에서 잃은 고아들만 600명이 넘게 타고 있었던 이 배에 아기고아를 남기고 그녀는 이스라엘의 건국국기가 될 국기에 싸여 바다에 수장되었다. 모두가 다시 불안하고 슬퍼졌다. 온 세상이 박대하였던 세상의 고아 유대인들, 온 세기를 두고 괴롭힘을 당해왔던 세기의 고아 이스라엘. 그러나 저들을 택하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고아의 아버지가 되셨다. 삼사일이 지나자 영국구축함 두 대가 미행하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많은 난민들로 인해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발을 뻗고 잘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일주간의 항해로 모두가 지쳐있었고 극도의 긴장 속에 빠졌다.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태운 이 엑소더스(출애굽)호는 구약의 애굽으로부터의 ‘출애굽’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출애굽’(‘출’전세계)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의 ‘하이파’(Haifa)항이 가까워지자 상륙거부령과 배는 하이파 항에서 압류되고 난민들은 다시 영국 구축함 3대에 분승되었다. 이 와중에 최루탄 발사등으로 3명이 죽고 30여명이 부상당한 불상사 속에서 선원 몇 명이 탈출, 이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게 된다. 유대인들은 떠나온 프랑스로 다시 옮겨졌다. 마르세유(Marseille)근처의 다른 소항구(Port-de-Bouc)였다. 프랑스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고집, 하선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단식투쟁 등으로 배는 다시 대서양으로 나가 북상, 바닷가 마을 세뜨 어항을 떠난지 근 2개월 후인 1947년 9월 8일, 패전독일의 영국관할 지역인 함부르크가 가까운 ‘리벡’(Luebeck)항 근처인 포펜도르프(Poppendorf)라는 마을에 감금 수용되었다.

독일 땅에는 다시 발을 딛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하선시키느라 항구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 소식은 전파를 타고 온 세계로 퍼져나갔다. 유대인들이 도착하여 재수용된 수용소는 바로 나치가 유대인 감금에 사용하였던 수용소였다. 영국정부의 비 인도적 처사에 온세계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뉴욕, 미국의 수도 워싱턴과 프랑스 빠리의 영국대사관 앞에서의 대대적 시위로 영국정부는 크게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강제로 독일에 억류되었던 이들은 거의 대부분 1년 내로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옮겨졌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다시 전세계의 여론을 크게 흔드심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에 담대함과 용기를 심어주고 계셨다. “우리의 선조의 조국땅을 찾아가는 것이 불법이라니?”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대학살이 시작된 1938년부터 이스라엘의 건국 전 해인 1947년까지 10년 사이에 이미 600,000이 넘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도우셨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전후로 101,000명이, 그리고 1949년에는 239,000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子民)을 순산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 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 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사66:8-10)





































0087. 역사를 왜곡하는 괴물들(Berlin/AP-Daily World, 05 Oct. 2012)    

지난 달에 캐나다 일간지에서 오려두었던 ‘기뻐하지 않는 자’의 뉴스 한 토막. 남부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법원은 “유대인 대학살”, “가스실” 등등이 사실이 아니라고 TV인터뷰를 통해 주장한 영국 카톨릭교의 주교 윌리암슨(Richard Williamson, 72세)의 발언을 범죄행위로 규정, 형벌을 결정하였다. 전후 독일에서는 “유대인 대학살” 부인, ‘친(親)나치’행위는 중대한 사상범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0088. “공회도, 신조도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

불의한 것은 진리를 산출할 수가 없다. 공회라는 것은 이단근절의 핑계로 하나님의 성도들을 말살하는데 앞장섰고, 교리제정 구실로 이단교리들을 만들어 놓고 거룩한(?) 공회로 가장하였던 저들은 세상을 흑암으로 몰아넣는 암흑시대를 몰고 왔다. 그러나 공회(公會)안에도, 신조(信條)안에도 없었던 생명은 바울이 그토록 강조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비로소 발견된다.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하는 것은 공회(councils)도, 신조(creeds)도 아닌 그리스도(Christ)이다. 진리는 인간들이 진리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도 이미 진리로서 부족함이 없이 존재해 왔으며,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손색없는 진리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공회의 결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미비한 복음이 아니다. 제자, 사도들은 공회가 제정한 신조없이도 예수의 이름 하나만 가지고도 세상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찬 531 /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①)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 4색 밴쿠버 목양일기










아빠와 아들


연말입니다. 할 일도 많고 마음이 분주합니다. 올 한 해를 뒤돌아 보면서 혹시 미루고 있던 일들이 있다면 잘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기에도 좋은 시간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사랑의 신발박스” 8개를 만들어 보냈습니다. 교인이 적다 보니 저희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모두 하나씩을 맡았습니다. 상자 당 20불 가량의 물건을 구입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물건을 사러 간 곳이 우연히도 한국 분이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아이들이 좋은 일을 한다고 가격도 좀 내려 주시고 물건도 더 주셨습니다. 주인 분의 이런 친절은 아이들에게 어려운 이를 도울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보람을 더해 주는 경험이 되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좋은 것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얼마 전부터 제가 가지게 된 고민은,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대물림 할 수 있을까 입니다. 자녀 유학 문제로 잠시 저희 교회를 방문 하셨던 성도 분께 친교 기도를 부탁했는데, 내가 가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우리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경험되고 유전 되었으면 좋겠다고 구하셨습니다. 저도 100% 동감합니다. 아이들이 틴에이저가 되면서 어릴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자기 생각과 주장이 생기면서 스스로 판단을 합니다. 더 이상 강압적으로 내 마음대로 다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에 딸 하나와 아들 둘을 주셨습니다. 모두 틴에이저입니다. 형제가 없이 자란 저에게 아들 형제를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 가졌던 소망은 친구 같은 아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친구도 아니고 아버지 노릇도 잘 하는지 의문입니다. 친구처럼 함께 놀아 주지도 못하고, 과거에 아버지들이 가졌던 권위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12월의 마지막 날에 가족이 모여서 새 해에 바라는 소망들을 적어 보았습니다. 각자 열 가지씩 적은 후에 발표 했는데, 그 때 저를 놀라게 한 것이 큰 아들의 소망 가운데 하나가 아빠와 친해지기였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저도 아들과 친해지기를 썼었습니다. 올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부자가 서로 얼마나 친해졌는지를 따져 볼 날도 며칠이 남지 않았군요!

언제부턴가 아들이 듣는 한국 노래가 귀에 익숙하게 들립니다. 알고 보니 저희 시대에 유행했던 노래들이 지금 아들 세대에서도 다시 유행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한 편으로 반가웠습니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생겼으니까요. 더 나가서 아빠 시대의 문화 컨텐츠가 얼마나 우월하면 30년 세월이 지나서도 먹히는지에 대한 자부심도 가졌습니다.
그런데…이런…다시 신앙의 문제로 돌아와서, 저는 아들과 얼마만큼의 신앙을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아들에게 자랑할 만한 믿음의 컨텐츠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 자녀는 없고 다만 문제 부모만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사는 지를 보면서, 배우면서 아이들이 자랍니다. 그래서 존경 받는 부모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인 저도 어려움을 느낍니다. 얼마 전에 밴쿠버에 청년과 Youth를 섬기기 위한 “Young 2080”이란 단체가 생겼습니다. 한국에 본부를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청년 사역에 헌신한 단체의 밴쿠버 지부입니다. 제가 이 단체를 후원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작은 교회는 큰 교회처럼 교회 학교를 운영하기가 힘듭니다. 목회자 자녀 조차도 커리큘럼화 된 교회학교 교육을 받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힘이 부족하면 연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작은 교회가 힘을 모아 “Young 2080” 같은 단체를 후원하면, 그곳에서 연구되고 개발된 컨텐츠를 가져다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자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아빠와 아들은 먹는 것을 공유하면서 티격태격하지만 따뜻한 정을 보여줍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해서는 무엇을 공유해야 할까요?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1:5)

[오세규 목사 / 밴쿠버오늘교회 / 778-887-8648]







재미있는 사도행전



일반삼토 일목삼착(一飯三吐 一沐三捉)



좋은 조직은 목표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목표가 아주 구체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목표와 계획이 있어도 그 조직과 목표를 이끌어갈 좋은 ‘인재’가 없다면 그 조직은 이미 죽은 조직이다. 인재란 말의 한자어는 사람 인(人)에 재능 재(材)이다. 말 그대로다. 인재는 재능있는 사람을 말한다. 사전적인 의미를 보아도 ‘인재’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학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2012년 8월23일 한국경제 신문 기사 내용이다. ‘삼성전자, 전 세계에서 불러 모은 박사급 인재 4500명’, 이들이 만들어낸 성적표, 한국의 1년 예산 326조 1,000억원, 삼성 2012년 총 매출 270조 8천억원이었다. 이것은 삼성이 전 세계의 숨은 인재를 찾기 위해 인재 스카우트 전담팀 IRO(International Recruit Office)을 가동한 결과물이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가? 좋은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종을 대왕이라 부른다. 그가 이룬 수 많은 업적들 때문이다. 이것이 세종 혼자 한 일인가? 정치-황희, 맹사성. 국방 -이종무, 최윤덕. 과학-이순지, 장영일 이란 걸출한 인재들이 그와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양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로 평가 받는 중국 주나라의 주공의 이야기다. ‘주공’은 뛰어난 인재가 오면 밥을 먹는 중에도 먹던 음식을 세 번 뱉고, 머리를 감다가도 머리채를 세 번 잡고 만났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주공의 ‘일반삼토 일목삼착(一飯三吐 一沐三捉)’의 일화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아주 좋은 지도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재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리고 교회의 인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았다. 이들이 제시한 교회인재의 자격은 두 가지였다. 내적인 조건으로 ‘성령과 지혜의 충만’, 외적인 조건으로 ‘칭찬’ 받는 사람 즉 ‘증명된 사람’ 이어야 했다(행6:3).

초대교회는 인재등용에 성공한 조직이었다. 일곱 명의 인재(행6:5) 등용으로 얻어낸 결과물을 보라!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해 갔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된 것이다.
둘째,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셋째, 세상이 항복하게 되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니라.”(행6:7).

사람은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다. 어떤 사람을 찾는가? 하나님이 쓰실 준비된 좋은 그릇(딤후2:20-22)을 찾고 계신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