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일 금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4 >





0068.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인류역사 이래로 전쟁이 없었던 평화의 해(年)는 통틀어 300년이 채 안 된다고 한다. 그 300년도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기간이었다고 보면 인간은 끝없이 분쟁을 일삼는 존재임이 확실하다. 그래서 옥스포드(Oxford)대학의 두 사가(史家)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52-83와 그의 조카 1889-1975, 동명이인)는 “인류사는 전쟁사(史)다”라고 규정하였다. 지난 1992년 한 해 동안에만 인류는 지구상에서 모두 93번의 전쟁을 치뤘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 많은 전쟁들 중 어찌하여 두 번의 ‘세계대전’(World War)이 20세기에 들어서자 일어났는가?하고 골몰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흔들었노라’는 음성이 마음에 들려온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영혼 안에 질(質)의 재창조가 일어나는 심오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자신과 세상을 향한 가치관에 대한 변화를 곧 인식하게 된다. 육신적인 감각을 통해서 세상을 볼 수 밖에 없었던 자아(自我)가 영적인 감각 또는 감수성으로 세상을 판별하게 된다. 역사를 보는 마음의 눈도 바뀐다. 인간중심사(史)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의 눈으로 역사를 헤아리게 된다.

아론과 모세가 바로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내 백성을 가게하라”(‘보내라’, 출5-10장). 7번을 고했으나 바로는 듣지 않았다. 9번의 재앙과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치는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애굽인들로부터 귀금속 등의 보화까지 받아 애굽을 떠나게 된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가면 지난 2천여년 동안 유대인들이 살다가 돌아온 나라의 국기들이 걸려있다. 무려 100개국이 넘는 나라의 국기들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이 유럽의 왕들과 군주들을, 그리고 로마교황을 만났으나 그의 요구는 거절당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는 말씀은 무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온 유럽의 ‘저주거리’였던 유대인들을 온 세계(100개국이 넘는 나라들)로부터 불러내어 옛땅에 다시 심기위해 ‘세계대전’을 허락하셨다. 먼저 프랑스 혁명, 보불전쟁, 『드레퓌스』사건으로 흔드셨다. 제1차세계대전(1914-18)은 1918 년 11월 11일 밤 11시 11분에 끝났다.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 해에 러시아의 유대인들을 불러내기 위하여 ‘러시아 혁명’(1919-29)을, 그리고 독일 나치가 1938년에 ‘유대인 대학살’(the Holocaust)을 감행하자 곧바로 ‘제2차세계대전’(1939-45)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는 오늘 이 시간에도 전진하고 있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보다 끔찍한 동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의 식인종도 아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게르만 민족에 의해 자행된 만행을 보면서 인간은 금수(禽獸)도 하지 않는 짓을 조직적으로 하는 금수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이 결성, 출발하였던 벨기에 남부의 소도(小都) 부이용(Bouillon)의 산 위에 있는 옛 성(城)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진열 되어 있었던 천주교회가 종교재판 때 사용 하였던 끔찍한 고문 기구들을 보았을 때의 구토증과 역겨움이 다시 일어난다. ‘유대인 대학살’ 사진들은 너무나 끔찍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줄 용기가 나질 않는다. 모세가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한 “복과 저주”의 말씀이 살아서 움직인다: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너를 도와줄 자가 없을 것이며...이르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해서 네가 미치리라...”(신28:25-35).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신31:29).


0069.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 법
‘제1차세계대전’(1914-18)으로 2천만명이, ‘제2차세계대전’(1939-45)에서는 6천만명이 생명을 잃었다. 남편을, 자녀들을 전쟁터에 보낸 유럽인들은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참견할 겨를이 없었다. 애굽에 임하였던 10번째 재앙이 온 세상에 임함으로써 세상은 겸손해졌고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옛 고토,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모으기 시작하였다. ‘가나안’(창12:5, 시105:11), ‘이스라엘’(삼상13:19), 또는 ‘유대’(마19:1, 막10:1) 땅으로 불려진 유대인들의 고토는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철저히 부인한 로마교황청의 입김으로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블레셋’(Philistiens, 삼상13:19)이란 지역거민의 이름에서 유래된 ‘팔레스타인’이란 이름으로 둔갑해있었으나, 구약에 140여번 기록된 유대인들의 고토복귀에 관한 예언에 ‘팔레스타인’이란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에스겔37장 참조).
‘제2차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온 나라들이 자국의 전쟁폐허 재건복구에 골몰하고 있었을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옛땅으로 인도하심으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을 허락하셨다. 3년 후인 1948년, 2000여년 동안 전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옛 고토에 심겨져 다시 나라를 건국하였다:
“...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를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가 또 내 신(神)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로 살게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의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간바(흩어진) 열국에서 취하여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山)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겔37장).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 인간보다 악한 동물이 있을 것인가?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일간신문이 발간된다. 그 신문의 기사 내용들이 누구에게나 확인시켜주는 진실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교회가 무기력하다는 비판을 듣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칭 의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자각이 온 영혼으로 기쁘게 깨달아짐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이 “거듭남”(요3:1-7)은 인간이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체험하게 되는 모든 경험들 중에서도 가장 기쁘고도 놀라운 정점이다.

0070. 하나님의 돌과 『바벨론』의 벽돌
니므롯은 시날 평지에서 도시건설에 착수하였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그 이름을 바벨이라하여...”(창11:1-9).
이‘어미’바벨론종교의 자기구속은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하나님을 대적한 인간문명의 시도이다. 아브라함, 이삭 등 하나님의 사람은 성(城)을 쌓거나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성(城)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간의 손으로 구운 벽돌이 아닌 자연석(石) 즉, 돌을 취해왔다. “돌을 대신하여” 라는 말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 스스로가 『여호와』신앙을 떠나 사단종교의 굴레에 얽매이는 것을 말한다. 야곱이 베게로 취한 “돌”베게는 곧 하나님의 돌이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창28장).
야곱은 다시 돌을 취하여 돌기둥을 만들고 그의 삼촌 라반과 언약을 맺는 것을 보게된다(창31:43-45).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아론과 훌은 돌을 취하여 모세의 아래에 받쳐놓아 아말렉을 쳐서 이겼고(출17:8-16), 돌 위에 십계명을 손수 쓰신 하나님은 돌단을 요구하셨고(출20:22-26), 솔로몬 성전은 돌로 지어졌다. 다니엘은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단2:34)부숴뜨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인간이 구운 벽돌은 곧 속박과 우상숭배 종교를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서 “벽돌”굽는 노예들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었으나(출1:14),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벽돌을 버리지 못하고 벽돌 위에서 분향함으로써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여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사65:1-7).

0071. 하나님의 고귀한 무리들
초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샀다. 그들은 좋은 시민으로서 국가의 법에 순응하였다. 그러나 가이사가 자신을 주 하나님(The Lord God)으로 선언하자 문제가 발생하였다. 가이사의 신성(神聖)에 대한 제사요구를 거부하자 곧 핍박이 따랐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도덕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곧 국가로 선언한 황제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신(神)으로 선언한 가이사들의 눈총에 났다. 맹수들에게 던져지기 전에 그들은 세속화되어 가고 있었던 교회조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기를 원하였고, 곧 “고귀한 무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사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이란 배도가 있은 후 이 에큐메니즘의 국가종교는 스스로 무덤을 파고 인간을 더욱 조직적으로 죽이기 시작하였으며 국가의 권력을 동원, 기독교인의 생명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0072. “떨어져나간 형제들”이란 음모
AD 39년경 북(北)이태리의 브레스치아(Brescia)의 로마교회의 수(首)주교(主敎) 필라스트리우스(Filastrius)는 그의 전생애를 바쳐 이미 그 당시에 이단으로 알려진 156개 집단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단이란 말은 무서운 말이다. 중세암흑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선고받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은 자신은 물론 온 가문에 내려진 사형선고를 의미하였다. 1926년 로마카톨릭교의 예수회 학자 마르케(John Markoe)가 그의 저서 ‘교회의 승리’(The Triumph of the Church)에서 정죄한 88개의 이단들 중에는 - 몬타니스트(Montanists)로부터 구세군에 이르기까지 - 오늘날도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24개의 이단(?)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재침례파, 루터교, 장로교, 메노나이트, 성공회, 칼빈파, 위그노, 화란개혁파, 모라비안, 감리교 등, 로마카톨릭교회가 아니면 모두 이단이었다. 초대교회시대 때에 지하 등으로 숨었던 성도들 자신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며, 참 성도의 기록은 발각되는 대로 이단 서적, 금서로 간주되어 소각되었고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초기문서의 대부분은 로마교회가 참 성도들의 모임을 ‘영지주의’(靈知主意, Gnosticism) 이단 등으로 몰아 부치고는, 로마카톨릭교회에 유리한 문서들만이 귀중한(?) 자료로 간주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들은 성경과 수 많은 개혁자들을 불태웠으나 그리스도의 진리는 태울 수가 없었다. 최근의 제2바티칸공회(1962-65)전 까지만 해도 기독교(『프로테스탄트』포함)내의 모든 교단들은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었었다. 이제는 『프로테스탄트』교회를 향해 ‘떨어져 나간 형제들’이라고 하며 로마교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저들은 말하나, 사실은 AD 313년에 저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떨어져 나갔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로마종교와의 짝사랑에 눈이 가려져, 믿음의 선진들이 그렇게도 확실하게 들려준 유언들을 무시하고 있다. 흑암에서 가느다란 빛줄기를 발견한 루터가 목숨걸고 대항한 로마카톨릭교회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기쁜 소리 들리니 예수 구원하신다
만민에게 전하라 예수 구원하신다
주님 명령하시니 산을 넘고 물 건너
온 세상에 전하라 예수 구원하신다

(찬송가 252 / 기쁜 소리 들리니 ①)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사망에서 생명으로 (2)



주님의 이름으로 또다시 밴쿠버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문안드릴 수 있음이 참으로 행복한 오늘입니다. 지난호에서 나누었듯이 죄인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저를 어둠의 터널에서 건져내시고 선교사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굶주림에 내몰린 생존본능의 탈북행이 대한민국으로 이끌어 온 줄 알았는데, 나의 인생을 디자인하고 설계하신 하나님의 완벽한 인도하심과 계획이 제 인생 가운데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면서 살아온 10년의 삶은 인생 최고의 행복과 기쁨을 맛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자기 자리를 찾는 인생만이 행복할 수 있음을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자리, 그것이 우리 모두의 ‘진짜 자리’임을 고백합니다. 밴쿠버의 지금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아름다운 계절과 더불어, 우리의 주변상황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이번 주간도 하나님과 함께 매일의 삶을 디자인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북한인에서 탈북민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더군요. 그것은 태어나고 죽는 것, 자기의 부모와 나라와 민족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모든 인생은 이 땅에 던져졌고 그래서 우리 인간은 모두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아주 간단한 불변의 진리 앞에 저 역시 비켜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저는 북한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22년을 살았는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굶주림이라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감행한 탈북행이 결국 하나님의 때와 시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도였으니, 어찌 하나님께로부터 온 인생을 세상적인 눈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저와 유사한 동기와 목적으로 고향을 떠나온 북한인들을 역사는 ‘탈북민’이라고 정의를 하더군요. 한국을 포함한 해외에 있는 북한인들 역시 탈북민 또는 탈북민 디아스포라로 새로운 흩어짐의 역사를 90년대 중반부터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90년대 중반에 이런 탈북민들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라는걸 누가 감히 상상을 했을까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노래가 있던가요? 우리 인생은 에덴동산에서부터 끊임없는 흩어짐의 연속으로 이어져온 나그네 삶이었고 그 삶은 우리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이 바로 흩어진 사람들의 정체성인거죠.

3. 세상의 자유를 맛보는 ‘자유인’으로 등극하다

탈북민들이 고향을 떠나 제3국에서 경험하고 맛보게 되는 가장 큰 짜릿함은 ‘자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탈북민들 모두가 북한에서 살 때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알긴 했을까요? 글쎄요, 다른 사람이 아닌 필자의 소감을 정직하게 나눈다면 “저는 북한에 자유가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폐쇄국가였던 북한체제 외의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자유에 대한 개념 조차 몰랐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북한에 자유가 없었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의 시스템에 들어왔을 때 발견하게 된 개념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습니다.(정치범수용소에 오랫동안 갇혀있던 북한사람들이 느끼는 자유에 대한 박탈감은 제가 느끼는 것과는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의 3~4년의 삶은 참으로 자유로웠습니다. 내가 조금만 노력하여 일한다면 그에 따른 보상이 있고 그 보상으로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해결할 수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돈이면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없음을 배운 시간이기도 했고 그것이 진정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참 자유’인지 알았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38)


 

우리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가장 힘든 일은 용서하는 것이다.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서 용서와 화해, 화목하게 하는 복음을 들려 땅 끝으로 보내 주셨지만 부딪히는 현실 앞에서는 용서와 화해라는 주제는 여전히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길로, 사는 길로 들어서려면 원망과 시비를 그치고 마음으로 용서하는 길 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엎드리지만 가슴에 내 힘으론 도저히 몰아 낼 수 없는 응어리가 앉아 있고, 머리엔 아무리 그치려 해도 제어되지 않는 악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곤고하고 처참한 심정으로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저는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절규했다. 이른 아침 주님이 다시 내 마음에 음성을 들려 주셨다. “용서하거라. 그가 너에게 괴로움만 준 것이 아니란다. 오늘의 네가 있기까지 나는 그를 통해 네게 많은 것을 가르쳤단다. 내가 너를 용서함 같이 너도 그를 용서하거라.” 다시 마음에 작정을 하고 용서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몇 일이 지났다. 새벽기도 시간에 내 눈 앞에 한 교회의 예배당 안 전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강대상이 보이고 그 뒤엔 배너가 걸려 있었다. 거기엔 ‘정성헌, 김은숙 카라칼팍종족입양선교사 파송예배’라고 쓰여 있었다. 그 교회가 어느 교회인지 비춰진 것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곳이 수영로교회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부산 수영로교회라? 나는 그 때까지 그 교회를 가 본적이 없었다. 담임인 정필도목사님과는 컨퍼런스에서 얼굴을 뵌 적이 있지만 개인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분이었다. 너무도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나는 아내에게 이런 환상을 보았다고 말했다. 아내는 조심스레 듣기만 했다.

나는 이것이 주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너무 강한 소원을 두고 기도하다가 지나쳐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수영로교회에서 파송한 한 여선교사님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수영로교회 파송요건을 물어보았다. 그 분의 대답은 너무도 실망스러운 것이다. 선교부의 규정에 의하면 본교회 교역자출신이라야 파송이 가능하다라는 것이다. 혼돈스러웠다.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파송교회에 대한 너무 강한 열망 때문에 헛것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는 나를 향하여 목사님이 환상을 보고 무슨 개꿈을 꾸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며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빌2:13)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분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일으키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즈음 아내의 하혈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UN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았다. 초음파 검사를 마친 의사는 자궁에 직경이 16센티 미터가 되는 근종이 있는데 이것이 터지면 쇼크사 할 수 도 있으니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왼쪽 나팔관의 상태도 좋지 않다고 했다. 정말 설상가상이었다.
나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사역을 내려 놓고 한국으로 가서 아내의 건강문제를 해결하고, 파송교회를 찾아야 지속적인 사역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미 개교회 단독파송으로 관계가 단절되어 어려움을 겪은 터라 교단파송을 받기로 결정을 했다. 이를 위해서는 선교사 훈련을 받고 파송교회를 찾아야 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출구로 빠져 나오는 내 심정은 조국의 품에 안긴 평안한 느낌보다는 또 다른 낯설고 막막하기만 선교지 같았다. 공항에서 처가로 향하던 차 안에서 지척에 있는 이전 파송교회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관계가 단절되었으니 파송교회라고 갈 수도 없고, 목회윤리라는 것 때문에 어느 성도 한 사람과도 만날 수가 없는 상황. 이런 기가 막히고 막막한 현실을 털어 놓고 나눌 이름 조차도 마음에 떠오르질 않았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8)”

처가에서 도착하여 도착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자 전화벨이 울렸다. 장모님은 나를 찾는 전화라며 수화기를 건냈다.
“저는 수영로교회 선교목사입니다. 저희 교회가 어제 밤부터 카라칼팍족과 다른 10개의 종족을 입양하여 미전도종족선교대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족들과 관련된 선교사님들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연결이 되질 않았습니다. 어제 저녁 타슈켄트에서 대회에 참석한 이○○ 선교사님이 카라칼팍종족 사역을 시작한 정 선교사님 가정이 오늘 한국에 도착하신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긴 이야기는 전화로 드리기가 어려우니 죄송하지만 지금 바로 온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시길 부탁드립니다. 항공권은 저희가 준비하도록 하고 공항에 마중할 분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가슴이 뛰고 있었다. 짐을 풀지도 못한 채 다시 차에다 짐을 싣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4 장 남편을 살리는 아내, 아내를 살리는 남편


2) “주위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되어간답니다”
당신이 간호사가 되어가는 증거이다. 여태까지는 누구를 만나면 내 이야기를 하느라고 바빴던 사람이 이제는 상대방에게 진실된 관심을 가지고 그의 이야기를 묻게 되었고 또 듣게 되었다는 증거다. 진실된 대화를 배워가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 부부에게 말하곤 한다.
“두 분 앞에선 전화만 해도 제 마음이 그냥 풀려져 나오는 것 같아요. 마음이 너무 시원해져요. 얼른 또 만나 뵙고 싶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이렇게 남들의 어려운 이야기만 들으면서 목사님 내외분의 마음은 답답해지지 않나요?”
그렇지 않은 것이 주님의 은혜다. 우리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 부부의 마음에 함께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함께 주님의 생명수를 받아 마시는 것이기에 양쪽의 마음이 함께 깨끗해진다. 그리고 서로 더 만나고 싶어진다.

3) “나 자신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성숙하게 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성경 공부, 예배, 선교, 봉사 등등. 그러나 가장 효과적이고 중요한 과정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반복해서 “마음”에 (머리가 아니라) 새겨주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조금도 의심없이 “마음으로”믿게 해주는 것이다. 자신이 귀한 사람인 것을 아는 사람만이 이웃을 귀하게 대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고 존귀한 자녀인 것이 온전히 믿어지는 사람만이 형제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고, 진실로 용서할 수 있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전서 2: 9a)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왜 교회에서 많은 다툼이 일어나는가? 왜 교회에서 파당이 일어나고 시기 질투가 흘러 넘치는가? 왜 교회가 작은 일로 나뉘어지는가?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은 교회에 어려움을 끼치지 않는다. “의로운 분노” 라고 교회 안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족속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처 많은 사람들인 것이다. 자신에게 많은 상처가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그 사람은 아가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4) “성경이 꿀 송이 같이 달아졌어요”마음이 치유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마음이 해결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말 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사이에 막힌 것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성경 속으로 쉽게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말씀을 자신의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막힘이 풀리면서 그 말씀들이 생명의 말씀인 것을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읽는 대로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믿음이 쑥쑥 자라난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5) “집안에서 큰소리가 아주 없어졌어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라. 마음이 치유되어가는 사람은 바로 말이 달라진다. 늘 감사가 입술에 달린다. 주위 사람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이 먼저 나온다. 어떤 경우에도 가족들에게 소리를 지를 이유가 없어지고, 소리 지르는 일이 너무나 힘들어진다.

(마태 복음 15장 18-19절)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니

6) “고난을 감사하게 되었답니다”
내게 닥치는 어려움과 곤란과 상대방의 비난을 통해서 주님이 내 마음을 치유하시고 계시다는 믿음이 자라난다. 집안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주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천사(Angel)인 것이 의심없이 믿어진다.

(시편 119편 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아브라함 이야기 (22)-2



아브라함의 섬김 / 창 18:1-8 (하)


아브라함이 섬길 수 있었던 이유
고대 근동지역이 손님 대접을 큰 미덕으로 여겼고, 지금도 이것이 유목민족인 베두윈의 전통으로 내려오긴 하지만, 아브람의 행동은 풍속을 넘어서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심이 후한 주인이 나그네를 대접했다기보다는 주인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17장에 나타난 사건의 결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불신과 완고함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러한 섬김의 모습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과 완고함이 무너진 다음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섬김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정도에 비례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고의 섬김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이 주인이었고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최고로 섬길 수 있었던 이유가 아브라함의 영적인 회복에 있었다면, 최고로 믿음에 견고하셨던 예수님에게서도 이러한 섬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 13장에 보면, 예수님은 스승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유월절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허리에 수건을 동인 채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빌 2:6-8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최고의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서로 섬기기를 원하시는 주님
요 13:15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즉, 주님은 제자들이 주님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셔서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 13:14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여기서 ‘옳다’는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서로 섬기는 모습이 제자들의 올바른 모습이기 때문에 반드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나가는 나그네라 할지라도 박대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풍성하게 섬기는 모습, 서로의 발을 씻는 섬김의 모습이 제자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거룩한 섬김이 있는 교회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데 더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습니다. 어느덧 직분은 일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자신의 신앙 년수를 자랑하고, 교회 안에서의 얼마나 많이 인정받는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요3서 9에 보면, 디오드레베는 으뜸되기를 좋아하고 형제들을 영접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영접하고자 하는 자들을 금하고 교회에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디오드레베를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거룩함으로 섬기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가 이 땅에 든든히 서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친목회나 사회복지단체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에게 섬김의 모습이 약하게 나타나고 있다면 먼저 믿음에 견고한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고, 어떠한 삶을 원하시는지를 바로 깨닫고 아브라함처럼 주님이 원하시는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시지 않으시면



가을의 풍경이 그려진 또 한 장의 달력을 뜯어내면서 모든 것이 미진한 채로 세월만 가는 것 같아 초조해집니다. 한 발도 뒤로 무를 수 없고, 단 한 순간도 뒤로 돌이킬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단 한번뿐인 순간을 살고 있으면서도, 그토록 귀한 시간의 가치에 합당한 내용을 이루며 살고 있질 못함이 늘 아쉽습니다. “자고 나면 십 년” 이란 말에 무릎을 치게 되는 나이에 이르고 보니,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적어도 부끄럽고 누추한 자취들은 말끔히 정리해놓고 갈 수 있도록 준비된 채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가버리는 시간을 따라 잡지 못해 오늘 할 일도 미처 끝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몇 달 전부터 정리하려 했던 사물들도 여전히 마음에 부담으로 쌓여있고 자꾸만 늘어가는 글들도 요연하게 정리가 안된 채로 있습니다.

산 등성이에 있는 달이 산에 오르면 손에 닿을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처럼, 인생이 바로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을 요즘 자주합니다. 크게 부를 이룬 사람이 오히려 더 숫자에 찌들어 보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을 이룬 사람의 품위가 오히려 평범한 이보다 격이 떨어질 때도 있고, 최 정상의 인기를 누린 사람의 입에서 외롭다는 고백이 나오기도 하고, 평생 눕지도 않고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잠도 자지 않고 고행을 하며 단 한 순간도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오직 착한 생각만 하고 온전한 지혜로 행하며 살았던 위대한 수도승들의 입에서도 결국 무(無)가 고백인 것을 보면, 좀 더 열심히 살면, 좀 더 노력하고 좀 더 착하고 바르게 살면 뭔가 잡을 수 있고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텅 빈 의식, 이 허무의 고통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그토록 취할 거리들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취해 있는 동안의 뭔가 채워진 것 같고 가까워진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이 귀한 생애를 아무렇게나 흘러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생의 종점에서 그들이 도달한 곳이 영원한 황폐와 멸망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얼마나 놀라고 두려울까 걱정이 됩니다.

지금 미국 동부지역에 태풍 샌디의 영향으로 폭설과 홍수로 인한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보도 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한국에서도 물고기가 떼 죽음을 당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밴쿠버에도 규모 7.7의 지진이 있었습니다. 화산이나 태풍, 지진 등의 자연 재해뿐 아니라 전쟁의 위협, 기름 값 상승, 세계적인 불황, 청년 실업 등 세계적인 재앙의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안전을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지키시지 않으시면 아무리 철통 같은 자물쇠로 집을 잠가놓고 지킨다고 해도, 아무리 좋은 음식만 챙겨 먹으며 몸을 보양한다 해도, 지하 깊은 곳에 지은 호화 캡슐에 들어가 있다 해도 목숨과 재산을 보전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시간과 돈과 학벌과 인맥과 경력이 인생의 관건이라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그 은혜를 모르고 인생이 나의 노력에 달린 것인 양, 무작정 달릴 때에는 더 잘했어야만 했고 그런 말을 하면 안됐었고 등, 마음에 걸리는 생각들 때문에 찜찜하고 괴로워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기관차를 염려나 안달이 아니라 은혜로 바꾸고 보니 어디서나 평안합니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염려의 가라지를 뽑아내고 좋은 생각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면서 신경뿐 아니라 음식이나 잠자리나 사람에 대해 좋고 싫음의 까탈이 없어지고 물 흐르듯 모든 것과 어우러져 가는 순탄함을 맛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내 마음에 탐욕과 이생의 자랑, 생활에 대한 염려가 있지만 마음에 늘 좋은 생각들로 바로 바로 바꾸면서 많이 행복해졌습니다.

사람들은 길을 묻습니다
앞으로 어떤 운명이 펼쳐질지 알기 위해 손금을 보고 행운을 점칩니다. 그러나 생은 정해진 운명의 궤도를 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 오늘 내가 하는 선택으로 채워집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산에 가면 나무들을 볼 것이고 바다를 가면 파도가 나의 경험이 될 것입니다. 산이냐 바다냐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를 가든지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는가 입니다.

나의 집을 세우시고 성을 지키시는 하나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극진한 보호하심이 언제나 나를 두르고 계시다는 믿음으로, 바람에 어지럽게 흩어진 염려의 낙엽과 생각의 잔가지들을 치워내니 영혼에서 맑은 가락이 울려납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주님 앞에 엎드리는 일이 단 몇 줄 성경을 읽을 따름이고 얇고 불안정한 음성으로 기도 몇 마디 올리는 정도일 뿐이지만, 삶이 참 존귀하게 느껴지고 행복합니다.

위대함은 성취나 소유한 물질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성실과 충성을 담은 마음의 크기 안에 있고 인간의 존귀는 거룩함에서 나오는 것을 알겠습니다. 이제 남은 나의 역사가 존귀하고 보배로운 것이 될 수 있도록, 지금 나를 두르고 있는 관계와 일들이 좋은 의미들로 맺음 할 수 있도록 오늘 감사와 정직과 사랑의 말을 심을 것입니다.

오늘 부는 바람이 내 인생의 배를 위협한다면 더 높은 소망을 품고 돛을 높이 올리겠습니다.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재미있는 사도행전



진정한 슈퍼맨



진정한 ‘교만’이 무엇인가? 해석이 필요없다. 이 이야기 하나로 충분하다. 한국에 있었을 때 일이다. 노회 주일학교 찬양대회기 있었다. 나는 행사 임원을 맡았다. 그 해, 심사를 맡은 음대 교수님들은 유년부 대상(大賞)을 두명 선정했다. 둘의 실력이 비등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행사를 잘 마쳤다. 잠시 후 행사 진행 사무실로 유년부 대상을 받은 아이의 엄마가 사무실을 찾았다.

딸 아이가 받은 상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자존심 상해서 이 상을 못 받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아주 가관이었다. “나는 성악을 전공해서 잘 압니다. 대상은 우리 아이만 차지해야 하는데, 왜 대상이 두명이 나왔습니까?”라는 괴변을 토해냈다.

정말 강심장 이었다. 찬양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높이는 것 아닌가? 그녀의 관심은 오직 딸과 자신의 영광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진정한 교만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보여주고 떠났다.

베드로가 참 많이 변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베드로가 굉장히 겸손해 졌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나면서 걸어 본적이 없는 사람을 걷게 했다.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베드로를 슈퍼맨으로 보았다(행3:7-8).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행3:11).

베드로는 불을 꺼버렸다. 그를 향한 열광의 불을 꺼버린 것이다. 메뚜기도 한 철인데 이때 인기 몰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차버린 것이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왜 나를 주목하십니까?”,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닌 예수님의 능력입니다”(행3:12-16)라고 절규했다.

진실로 예수님을 만난 자의 대표적인 표가 무엇인가? ‘겸손’이다. 19세기 남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는 ‘앤드류 머레이’가 자신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오랜 고민과 깊은 묵상 끝에 나온 책, ‘겸손’에서 그리스도인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피조물이고, 죄인이고, 성도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합니다”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 동네 못(농수를 담아 놓는 작은 댐)에서 수영하다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수영의 달인 귀섭이가 나를 구하러 왔다. 나는 살고보자는 마음에 그의 목을 있는 힘을 다해 끌어 안았다. 귀섭이도 나 때문에 죽게 생겼다. 귀섭이는 머리가 비상했다. 이러다 자기도 죽겠다 싶어, 나의 머리채를 잡고는 목을 비틀어 버렸다. 목이 틀리니 그 어떤 힘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귀섭이는 힘빠진 나를 연못 밖으로 끌어 낼 수 있었다.

‘진정한 슈퍼맨’은 나의 힘을 빼고,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자다(고후13:9).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터키 이야기 (13)




6. 신약 성경과 터키



4) 갑바도기아 (Cappadocia)

◎ 카이막클르 (Kaymaklı)이 지하 동굴도시는 기원전 5세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독교인들이 아랍의 핍박자들로부터 피신처로 사용되었다. 통로가 낮고 좁으며 경사가 진 점에서 데린쿠유 지하도시와는 다르며, 1964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위치는 네브쉐히르에서 남쪽으로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는 환기 갱 주변으로 지하 4층까지만 발굴되었다. 이 지하도시는 방어를 더 잘 할 목적으로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구역마다 지름이 약 1.5m 되는 맷돌 모양의 바위 문으로 막아서 서로 격리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구역 간 통로는 약 30Km에 이르며 회랑은 매우 좁다. 그러나 거실, 회의실, 교회 및 기타 시설들은 매우 안락하게 지어졌다.

창고는 주민들이 수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을 저장할 수 있을 만큼 크다. 환기 갱과 우물은 15,000명이 모두 함께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살기에 충분한 규모이다.

지하 1층은 축사로서 그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서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다른 곳에 더 많은 축사들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축사 왼쪽으로 있는 통로에는 맷돌 모양의 돌문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거실로 쓰인 방들이 있다. 지하 2층에는 교회가 있으며 그 옆으로 무덤이 있다. 지하 3층에는 창고, 포도주 양조장, 부엌 등이 있으며, 지하 4층에 있는 포도주 양조장에 토기로 된 항아리 두는 곳과 저장실이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이 지하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마즈 (Mazı)마즈는 울귭에서 남쪽으로 18Km, 카이막클르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지하도시는 마을 서쪽에 가파른 계곡에 있으며, 지금까지 4개의 입구가 발견되었다. 이 지하도시도 데린쿠유나 카이막클르와 같이 축사, 포도주 양조장, 거실, 교회 등이 있으며, 입구 통로에는 맷돌 모양의 돌문이 있다. 이 지하도시의 특징은 아래층은 짧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나, 위층은 길고 좁은 통로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통로가 무너졌기 때문에 지하도시 전체 규모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하도시에 교회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넓은 지역의 지하도시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외즈코낙 (Özkonak)외즈코낙 지하도시는 아바노스에서 북쪽으로 14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1972년에 발견되었으나, 아직 완전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데린쿠유나 카이막클르와는 달리 매우 길고 좁은 방들이 있어 층간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돌문 중앙에는 구멍이 없지만 문 앞 천정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고 터널로 연결되어 적에게 이 구멍으로 뜨거운 기름을 붓거나 창으로 찌를 수 있게 되어있다. 입구에 있는 축사나 부엌, 거실, 무덤 등이 있는 것은 데린쿠유나 카이막클르 지하도시와 비슷하다.

◎ 탓라린(Tatlarin)
이 지하도시는 아지괼 북쪽 10Km에 위치한 탓라린 마을에 있는 ‘성채’라 하는 이름의 언덕 위에 있다. 1975년에 처음 발견되어 1991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성채에는 지하도시 외에도 다수의 교회가 있었으나, 자연현상에 의해 대부분 붕괴되었다. 지하도시는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있지만, 지하 2층까지 일부분만 공개되며, 공간의 규모, 창고의 수, 수많은 교회 등으로 보아서 이곳은 요새이거나 수도원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L자 모양의 통로를 지닌 화장실이 발견되는데 L자 통로는 냄새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화장실을 이곳 외에는 오직 규젤율트 지하도시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