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2일 금요일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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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편까지 우리는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주제안에서 1990년대 중반을 전후로 큰 변화의 추이를 가져온 북한의 경제영역과 또 지금까지의 북한을 지탱하게 한 정치구조적인 시스템안에서 살아온 북녘의 사람들에게 생긴 가치관의 변화를 보았습니다.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주제는 사실 너무나 큰 주제인데, 우리는 그 큰 주제안에서 아주 조금의 북한을 맛본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북한이든 어느 나라든 우리가 ‘선교적 관점’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아는 것이고 또한 그 어떤 체제의 변화나 이익관계보다는 바로 ‘한 영혼’을 살리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하기에 ‘북한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개의 큰 카테고리를 조금 이해한 셈입니다. 이번 주에는 ‘한류열풍’으로 인해 생성되어지는 북한에서의 ‘통일준비’에 대한 나눔으로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주제는 일단락 하고 3월부터는 새로운 장르로 이야기를 나누기 원합니다.


북한을 휩쓸고 있는 한류열풍이 만들어가는 북한에서의 ‘통일준비’
1990년대 중반 식량난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북한의 시장문화와 함께 가장 먼저 북한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중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공산품들이었습니다. 즉 사상관이 투철했던 사람들안에 자연스럽게 물질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하게 된 것입니다. 국내에서 만들어진 낙후하고 질 좋지 않은 물건들에 비해 중국에서 들어온 물건들은 무엇이 되었든 국산(북한내에서 만들어진 물건- 그것마저도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지만)보다는 훨씬 좋았기에 돈을 좀 버는 사람들이라면 중국물건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시장문화가 확대되면서 중국 상품 중에서도 질 좋은 것들을 사람들은 찾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들어오는 일본과 미국, 한국제 중고품들이 인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에 벌써 장마당(시장) 곳곳에서는 ‘남조선 것이 좋다’라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는데, 이제는 한국제가 아니면 별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즉 우선순위에서 중국 물건이 뒤로 밀린 것은 오래 전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한국물건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틈새로 다양한 CD가 불법복제 되어 함께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그 중에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 다양한 한국음악과 문화가 섞여있어 국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명절 때에 한국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은 하나의 낙이 될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남한으로 오시는 분들 중에는 오히려 여기 있는 남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드라마를 알고 있고 연예인 이름도 더 잘 알아, 북한에서의 ‘한류열풍’을 실감하게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전제품은 물론이요 전자제품도 한국의 것을 선호하니 전국적으로 200여개가 넘는 북한의 시장에서는 ‘돈만 있으면 여기도 살만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물건도 무엇이든 잘 아는 사람들에게 주문만 하면 돈으로 살 수 있는 북한내부에서의 ‘통일연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의 영향으로 탈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드라마를 통해 보는 한국의 언어와 패션에도 빠른 속도로 반응하고 따라오고 있어 북한내부에서의 ‘통일연습’은 자동으로 형성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와 함께 ‘복음’을 담은 CD나 MP3, 노트북도 들어가고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문들도 열고 계셨습니다. 북한에서의 한류열풍이 가져다주는 ‘통일연습’에 어느 정도 감사할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초점은 좀 더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도록 기도하고 있는 자리에서 ‘통일’을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더 많은 이야기들은 3월에 나누기 원합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2013 솔리엔 '희망의 집' 후원공연 안내

 

 

2013 솔리엔 '희망의 집' 후원공연 안내

 
 


2013년 2월 23일 오후 7시, 써리 소재 목양장로교회(유용환 목사)에서는 전공자로 구성된 밴쿠버 유일의 여성중창단인 솔리엔의 "아름다운 음악회"가 열린다.

솔리엔의 안재숙 리더는 "음악으로 하나가 되어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솔리엔을 통해 사랑과 희망이 많은 이들의 영혼에 채워지기를 바란다"며 "특별히 이번 공연은 다운타운 홈리스들을 위해 사역하는 '희망의집'(김용운 목사) 후원을 목적으로 준비되었다"고 밝혔다.

2013년 2월 21일 목요일

교회음악 Plus

찬양대는...




찬양대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모임이다. 이들을 예배를 돕는 모임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찬양이란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고, 구원과 감사를 찬양대가 성도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찬양대는 이를 위해 찬양하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찬양대는 예배를 돕는 모임이 아니라, 찬양대원 자신이 예배하는 자요 찬양대는 예배하는 그룹인 것이다. 예배의 대상이요 예배의 주체, 중심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원하는 찬양대는 어떤 찬양대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대는 어떤 찬양대인가?
찬양대, 찬양대원의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찬양대원인가?
진실하고 바르게 말씀과 함께,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6 장 사랑스러운 톰보이들


톰보이의 깨어진 가정

구 선생님, 안녕하세요. 희진 엄마입니다.
남편이 이런 마음을 알고 있느냐구요? 남편은 타인의 마음은 잘 알아도 가족의 마음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구요? 타인은 지나칠 정도로 돌보고 이해하고 돌보아 주느라 아내나 자녀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나보지요. 무엇이든지 의논이 없고 언제나 통보이지요. 이야기 좀 하자고 그러면 다 듣고 있으니 말 하라고 하죠. 그러나 5분도 안되어서 코 골며 잠들어요. 일과 중에 이야기하면 말하라고 “그래 말해” 해놓고는 전혀 경청하지 않습니다.

남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였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일을 하여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보다는 부모에게서 돈을 타서 쓰는 편이었고요. 그래서 어머님과 큰누나가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남편은 공부도 재미 없어하고 청개구리였다고 누나에게 들었어요. 왜 공부하기 싫어했느냐 하면 “아버님은 일본까지 가서 공부했지만 가족도 책임지지 못하는데 공부는 해서 무엇 하느냐” 하면서 자신은 돈을 많이 벌어서 어려운 사람도 돕고 어려운 교회도 돕고 선교도 할꺼라고 자주 말했어요. ... (하략) ...

남편을 용서하고 짧게라도 위로의 편지를 써보라고 권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날아왔다.

희진 엄마입니다.
‘용서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너무 잘 알지만 순간순간 나를 괴롭히는 남편에 대한 미움과 섭섭함은 저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남편을 용서하지 않으면 저도 결코 용서받을 수가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수없이 파내고 지워버려도 어느 순간에 또 다시 저를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들은 용서가 되고 그럴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을 알고 지워지는데 왜 남편의 기억들은 그리 쉽게 용납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라 그런 것인지요... 어떤 때는 입으로 십어서 불어버리고 싶고 어떤 때는 발로 밟아서 뭉개 버리고도 싶습니다. 내가 당한 만큼 남편도 처절하게 당했으면 하고 마음으로 되뇌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기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있는지요......

이 부인의 남편을 향한 사랑이 진하고 진하게 우리의 마음을 울려온다. 너무나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긴 아내의 마음이 미움으로 변한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답신을 보내면서 말씀의 암송을 계속해서 권면했다. 며칠 후에 훨씬 좋은 답이 날아왔다.

구 선생님, 희진 엄마입니다.
앞서 메일을 쓰고 난 후 오히려 제 마음은 평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내적 치유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빌려 와서 읽기 시작 했어요.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암송하라고 하신 말씀들을 꾸준히 암송하며 제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며칠 동안 이 근처 기도원에 갑니다. 다녀와서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치유가 시작은 되었지만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또 모든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동안 전혀 모르고 있던 자신의 마음의 깊은 것과 삶의 뿌리를 보게 되었고 자기 자신과 딸들이 마음의 깊은 치유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사실이다. 나가서 남편도 많은 아픔을 가진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여태껏 남의 탓만을 해온 삶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으로 서서히 변하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와 계속해서 메일을 하며 인생을 함께 세워갈 것이다. 몇 년 후에는 아름다운 회복의 역사를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추수와 열정 2



쪽 모퉁이를 가리키시며 그곳은 본인이 직접 거둘 테니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셨다. 궁금해서 다가가서 보니 종류가 서로 다른 콩들이 섞여 있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어찌된 일이냐 묻자 콩을 심으면 다람쥐들이 내어 먹고, 새들이 파먹어서 몇 번을 다시 심었다는 것이다. 파종시기가 지나서 다른 콩 모종을 심어 여러 콩이 섞여 있다고 설명하셨다. 콩이 섞이면 일이 더 복잡해지니 본인이 직접 거둘 것이라며, 주머니가 몇 개씩 달린 앞치마를 두르시고 작대기를 의지하여 먼저 밭으로 들어 가셨다. 짐승들이 파먹은 그 곳에서 콩이 얼마나 난다고 성치도 않은 다리로 이 산중 밭을 몇 번을 오르셨단 말인가? 경제적인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낫을 들고 콩을 꺾기 시작했다. 허리를 숙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얼마 못되어 통증으로 숙였다 폈다 하기를 반복했다. 숙인 허리 위로 드러난 맨 살은 시리고 작은 고무신에 끼인 발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음에는 불이 붙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미친 듯이 콩을 꺾어 나가자 얼마 못되어 어머니는 “야야, 그렇게 막 다루면 익은 콩 다 벌어진다. 좀 살살 하거라”. 하긴 그랬다. 콩을 추수하자는 것이지 콩대를 거두자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조신하게 콩대를 꺾자니 허리는 더 빠지는 것 같았다. 허리를 펴면, 다음 날 있을 설교 걱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콩을 꺾으면서 묵상을 시작했다. 주님은 종일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 추수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늦가을 추수 밭에서 주님은 자연을 통해 내게 많은 교훈을 주셨다. 내가 정말 어머님처럼 뿌리고, 뿌리고, 또 뿌리는 열심있는 천국 일군인지? 나의 사역지, 카라칼팍스탄이 눈에 어른거렸다. Passion, 이 말은 열정과 수난이라는 상이한 의미를 동시에 가진 단어이다. 그러나 같은 뜻을 가진 러시아어에는 ‘수난’이란 말과 ‘추수하다’라는 말이 같은 어근이다.

추수는 열정과 고난을 동반하는 일이다. 추수꾼에겐 낫을 기다리는 밭을 볼 때 끓어오르는 열정과 짧은 시간 내에 추수를 마쳐야 하는 혹독한 육체적 고난이 늘 상존하는 법이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보면 뿌리고 가꾼 자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지만 추수는 또한 혹독한 수고를 요구한다. 가을 짧은 볕에 익은 곡식을 거두자면 추수꾼은 쉴 수 가 없다. 오죽하면 농번기엔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린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얼마나 일손이 부족하면 고양이가 혀로 다리에 침을 묻혀 털을 고르는 모습에 그 앞다리가 일손으로 보이는 것일까? 그러나 추수는 그런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만족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Passion of Christ.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낳아 주시기 위해 고통을 견디셨다. 그 수난은 이루어질 생명의 추수를 향한 주님의 강렬한 열정, 열망의 표현이었다.

쌀쌀한 날씨에 힘든 노동인지라 시장기가 금새 찾아왔다. 챙겨 온 점심을 어머님과 함께 앉아 긴 감사 기도를 드리고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은 자꾸 등 뒤 밭으로 가고 있었다. 숟가락을 놓자 마자 다시 밭으로 향했다. 한 참이 지나 추수 밭으로 어머님이 새 참을 들고 오셨다. 마음에 앉을 여유가 없이 나는 선 채로 먹었다. 해는 서산으로 반쯤 기울어지고 있었다. 해가 넘어 가기 전까지 남은 콩은 다 꺾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밭에 쌓인 저 많은 단을 어떻게 길로 옮길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아버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병원에 있어야 할 분이 어떻게 여길 오셨단 말인가? 어머님도 놀라 병원에 있지 무엇 하려고 여기까지 왔냐며 타박을 하셨다. 아버님은 병원에서 밭의 일이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옆 사람에게만 알리고 몰래 병원을 빠져 나오셨다는 것이다.

폐에 물을 빼기 위해 꽂아 놓은 호스를 매단 채 밭으로 오신 것이다. 어머님은 경칠 일 없으니 그냥 앉아 있으라고 언성을 높였지만, 아버님은 밭으로 들어가셔서 고랑에 쌓인 단을 길가로 옮기기 시작하셨다. 허리를 숙이면 통증이 있어서 꼿꼿이 콩단을 머리에 이고 나가셔서, 콩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내려 놓았다. 못 말리는 일이다. 나도 그만 두시라고 성화를 부리다가 결국은 포기했다. 밭 가에 가득 쌓여가는 단을 어떻게 집까지 실어갈지 고민하는데 우리 밭 쪽으로 트럭 한 대가 요란스레 소리를 내며 올라오고 있었다. 먼 친척 형님 내외가 트럭에서 내렸다. 아버님이 오시면서 부탁을 해서 짐을 실으러 왔다는 것이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우리는 트럭을 타고 산을 내려갔다.

늦은 저녁을 먹은 후 나는 부모님에게 “내년부터는 농사, 그만 좀 지으세요! 두 분이 연세 드셔서 이렇게 고생하는 것 생각하면 자식들 마음이…….” “야야. 그렇지 않아도 내년엔 조금만 할란다. 먹을 것이나 좀 하지 뭐. 이젠 더 하고 싶어도 힘에 부쳐서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두 분의 그 말이 빈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년 봄이 되면 또 그 병이 도져 논밭으로 나가실 것을 훤히 알기 때문이었다. 뿌리는 자의 소망과 거두는 자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는 분들이기에...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28 >






0136. 구세군 창설자『부스』대장의 예견

구세군 창설자 『부스』(William Booth 1829-1912)는 다섯 번의 “어찌?”(고후6:14-16)로 100년 후의 오늘의 교회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신 분이다.
“다가오는 세기의 가장 큰 위험은 :
1) 성령없는 신앙
2)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3) 회개없는 사죄함
4) 거듭남없는 구원
5) 지옥 없는 천국이 될 것이다”



0137. 주님과의 연합으로 나타나는 성품의 변화

‘인간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철인(哲人) 아리스토 텔레스의 말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믿는 것이 있다. 심지어 무신론도 사실은 하나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배제된 지식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는 종교이다. 자기의(自己義)에 빠지면 죄를 깨달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만(自慢)으로 발전하여 결국은 자기기만(自己欺瞞)에 이른다. 불신(不信)의 가치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기 고집으로 자기 운명(죄)에 밀착, 죄와 함께 멸망당할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위에서 임한 것이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살게 하시고 또 죽게 하셨다. 복음의 목적 또한 위로 향해야하는 이유는 복음은 위의 것에 관한 이야기로 하나님의 말씀은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고, 머리(그리스도)를 붙들라고 명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기원을 둔 어떠한 종교행위도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최초의 원수인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이기신 십자가 신앙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배운다. 영혼구원, 교회부흥도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은사를 체험하고 그 일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은사, 치유, 기적 등등을 통해 유혹, 멸망으로 이끌어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떠난 방언운동, 치유기적도 보았다. 주님께 영광돌리는 대신 자신을 드러내기위해 온몸으로 열중하며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 자체를 예배하는 것도 보았다. 기적은사 소유자로서, 또는 언제나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로서의 자신의 지위확립을 위해 영적권능을 오용하는 자들로서 성삼위 하나님을 자기들이 원하면 언제나 부릴 수 있는 무슨 (불)가시적인 힘으로 남용하기도 한다.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 스스로 자신에게 주인이 되고 기도도 자신에게 한다. 기독신앙에 있어서 은사가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주님과 연합, 하나가 됨으로써 나타나는 성품의 변화이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쇼(show)나 시위가 아니다.

우리 자신들의 이기적이고도 탐욕적인 필요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순종 중심의 기독신앙으로의 전환하지 않으면, 즉 위로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산만하고도 요란한 주위의 필요에 눌리게 될 것이다. 복음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주님의 삶은 주님 주변에서 밀어닥치는 그 많은 필요들에 끌려 다니면서 종이 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은사의 원천이신 예수님의 삶은 군중들의 요구에 의해 지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된 것이었다. 인간의 요구 혹은 요청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심으로 정해졌다.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보다 놀라운 말도 많지 않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 집중하여 이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보잘것없는 우리의 의(義)를 내세우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선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간과 인간의 개선에 대해 분주해지고, 죄로부터의 구원은 종교적이고도 도덕적인 개선을 통한 자아의 향상과 행복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내지 내(自我) 마음의 평화를 내세우며, 하나님앞에서의 의(義)와 거룩한 삶이 아니라 자아앞에서의 행복한 삶으로 하나님보다 인간에게 초점을 둠으로써 하나님의 거룩을 배제하고 우리의 행복이라는 미궁에서 길을 잃게 된다.

우리 스스로가 복음의 중심에 앉아 주인노릇을 하며 지나치게 분주한 노력과 또 우리 자신의 변화된 삶에 목을 맬 때,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셨던 위선은 이미 우리의 영혼에 은밀히 잠복해 들어와 그 위선으로부터도 구원받아야할 새롭게 추가된 영역은 더욱더 넓어진다.

0138. “그는 흥하여야겠고” - 나의 원수는 바로 나 자신이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마9:14)등 인간의 유전에 중독된 자들의 물음은 온통 종교적인 것들로 차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종교적인 규율에 매이지 아니하셨고 이는 예루살렘 성의 ‘스캔들’거리가 되었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종교적 환경을 떠나 산 꼭대기 변화산상에서 변형된 자신을 보여주셨다. 종교안에서는 ‘나’(我)를 부르짖고 복음안에는 “그는 흥하여야겠고”(요3:30)라고 주님 제일주의가 된다. 종교는 전통자랑, 건물자랑, 이 생(生)의 자랑으로 꽉 차있으나 기독교에서는 예수 밖에 자랑할 것이 없어 바울은 예수 이외의 것을 모두 배설물로 보았던 것이다. 종교적 출세주의자들은 직분을 직위와 감투로 착각, 섬기려는 자세보다 군림하려 들며, 이들 때문에 신앙의 자유가 교회 안에서 방해를 받는다. 직분을 받은 자들이 종교 안에 머물 때, 그 옛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았을 때 토해낸 “화로다 나여…나를 떠나소서…”라는 두렵고 떨리는 고백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종교적인 야심은 늘 비본질적이고도 외적인 것에 대해 전문가가 된다. 의식과 예식을 수행한다거나 규칙을 준수할 때에도 예외를 두는 법이 없다. 세세한 것에 대해서는 그들을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전문가였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율법의 목적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율법의 철자하나에까지 까다롭게 굴었지만 정작 그 율법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에 대해서는 외인이었다. 저들은 자신이 처한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자신들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크게 당황하였고, 때로는 전전긍긍하였다. 타인에게 얼마나 존경받는가 하는 도덕적이고도 외적인 처신에 대해서는 세련된 자들이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죄인이 바로 설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종교인은 자기 편리대로 말씀을 써먹고, 기독교인은 말씀(그리스도)에 쓰임당한다. 예수께서는 세리도 용납하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창녀도 그 자리에서 사함을 주셨다. 그러나 천국복음을 가지고 종교놀이에 빠졌던 지도자들을 꾸짖는 곳에서는 가장 큰 분노의 음성을 발하셨다. 그는 종교인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3년 반이나 물고 늘어지셨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회칠한무덤…”(마23장). 그들은 6백가지가 넘는 율법을 지키는 데는 대단한 노력을 경주했으나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 한 가지도 못 지켰다(요13:34,35).

실로 그리스도는 종교의 사슬에 매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말씀으로 임하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나 인간영혼의 중심인 마음을 겨냥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여러 방면에서 옳다고 할지라도 영혼이라는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문제가 있어 잘못된 지점에 서있다면 타인에게는 빛처럼 보일지라도 실상 하나님앞에서는 끔찍한 어두움일 뿐이다. 자신의 겉모습으로 타인을 속일뿐 아니라 자기자신도 속임으로써 스스로 속아 살면서도 자신은 아니라는 무지함과 동거하는 것이다. 원수는 바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결국 온갖 종교적 외양을 갖추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의 종교지도자들은 지극히 높은 자에 대한 유일한 참예배자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과신한 나머지, 그 교만은 시기증오로 변해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세상이 조롱하는 예수, 그는 종교(예루살렘) 바깥으로 끌려나가 처형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0139. 존 스토트 / 빌 브라이트 / J. I. 패커

종교는 부패한 인간 안에서 시작된 것이며, 복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중(心中)에서 떠나온 ‘복된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품고 계획하신 것으로 그 광대함은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것이다. 이 복음의 전제는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 최고의 범위마저도 초월하기 때문에 복음 그 자체를 완전무결하게 이해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길은 결코 넓은 길이 될 수가 없는 ‘좁은 길’(마7:13,14)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어떤 사상들보다 본질적으로 단순하며 직접적이라는 사실이다. 니고데모 같은 위대한 율법의 선생이나 세상의 지혜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이 복음은 한편으로는 어린아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 정도로 또한 단순하고도 직접적이다. 그래서 주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12:32)고 위로하셨던 것이다. 실로 기독교회사에 기독교인이 대다수가 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유의하시라. 외형적인 것은 점점 크고 비대해지며 목청도 높아지는데 속은 비어져가고 진리의 증언은 자취를 감춘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이 사실을 간결하게 들려준다: ‘외양의 크기로 성공을 과시, 내가 헌신한 자라면 많은 사람과 돈이 필연적으로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양의 크기와 영적 세력이 병행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정반대의 입장을 가르치신다(이것은 특히 예수님의 교훈에 나타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자리를 택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것을 가르치신다. 우리 인간은 큰 사업과 큰 자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데 이러한 강조는 육에 속한 일이다. 낡고 중생하지 못한 이기주의적이며 자아중심적인 나(我)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육에 속한 오락과 습관 이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그러나 실은 신(新, Neo-)복음주의의 대부(代父)격인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이 2천 여 명의 영국복음주의자들 모임에서 행한 천주교회와의 일치연설 (“…and evangelicals should join others in the Church of England in working toward full communion with the Roman Catholic Church”-the 2nd Nat’l Evangelical Anglican Congress, April. 1977)이나 빌 브라이트(Bill Bright) 박사의 로마교황청과의 협력으로 전 세계대학캠퍼스를 영적 간음터의 본거지로 오염시켜 대학 캠퍼스를 황폐화시킨 지도자의 무지 (“BB said… We believe God is doing a mighty work in it and will no doubt use millions of Roman Catholics to help evangelize the world” - The Post & Times Star, Cincinnati, OH. Aug. 30, 1969 / “Campus Crusade has had Roman Catholics on staff. In an Interview ‘Wittenburg Door’, June-July 1978, Richard Quebedeau noted, ‘In Ireland, Campus Crusade is registered as a religious order…And they work entirely within the Catholics Church there with Catholics because there is nobody else to work with’”)나 그리고 ECT(Evangelicals Catholics Together) 문서에 서명한 패커 (J.I. Packer) 박사의 구차한 변명(“Why I Signed It”- Christianity Today, 12 Dec. 1994)에다 로마교황 추종자 니키 검벨 (Nicky Gumbel)이 창안, 로마교황청이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배도의 과정인 ‘Alpha Course’까지 추천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였다. 참으로 피조물된 인간의 지식의 한계와 하나님의 긍휼을 떠나선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실감케 한다. (* 스토트 목사님의 마지막 책인 ‘제자도’는 일독을 권한다.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그 분처럼 단순하고 검소해야 한다고 믿는다. 참으로 신앙적인 삶은 항상 단순할 수 밖에 없으며, 단순함은 또한 하나님의 법이자 방식이기도 하다. 시사주간지가 스토트 목사님을 두고 “개신교의 교황”이라고 모독한 기사를 그의 책을 출판하는 한국의 출판사가 이 말이 무슨 명예인 것 같이 소개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무지가 아닐 수가 없다. 패커 목사님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권한다. 생선은 뼈를 잘 골라내고 드시라는 뜻이다.)

쉐퍼 (F.A. Schaeffer, 1912-84) 박사는 워싱턴 DC에서 있은 NAE (Nat’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컨벤션에서 행한 메시지에서 “복음주의가 숫자에 치우쳐 점점 거대해지나, 그 복음주의 (evangelicalism)라는 것이 더 이상 ‘복음적’(evangelical)이 아니면 무슨 짝에나 쓸 것인가?” (“The Watershed of the Evangelical World” at the 1976 - “What is the use of evangelical for seeming to get larger and larger in number if significant number of those under the name of ‘evangelical’ no longer hold to that which makes evangelicalism evangelical?”) 라고 묻는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찬 188 / 만세 반석 열리니 ①)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성경만 읽으라고 외칠것이 아니라...



지난주에 저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책들 중에서 수십 권을 골라내어 박스에 정리해 넣어 두었습니다. 한동안 베스트 셀러이기도 했던 이 책들을 읽으면서 은혜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석연찮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출판사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유행처럼 간증되어지고 주장되어진 글 들속에서 마음에 걸리는 비 성경적인 것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알려진 비 복음적인 주장들이 한결같이 한 배경을 공통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책들과 많은 사람들이 서로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에 떨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성도들과 신앙 상담을 할 때 가끔 놀랄 때가 있습니다. 신앙 연조와 경륜상 바른 믿음 위에 서 있어야할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진리인 것 같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난무하는 잘못된 비 성경적인 것들을 가르치는 서적들을 통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알게 모르게 받는 영향이 클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동안 체계화된 교리적인 설교 보다는 생활 설교에 익숙한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 신실한 사람도 성경을 읽고 가끔 엉뚱한 말을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성경만 읽으라고 외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에게 바른 교리를 가지고 가르쳐 주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리는 인간의 교훈이나 철학 사조를 바탕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말씀을 백프로 근본으로 합니다. 교리는 성경 전체의 말씀을 총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게 합니다. 이단사조들의 특징은 성경의 어느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크게 부각시킵니다. 그래서 그들도 나름대로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 부분으로 성경 전체를 뒤 엎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시도들입니다. 교리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총론적인 접근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줍니다. 그 결과 참된 신앙인들이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믿지 않을지 분명히 하게 만듭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지난 수세기 동안 교회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중요한 신앙고백들이 있었습니다. 영국교회의 39개조 신조와 도르트 신조 그리고 하이델 베르그 요리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같은 교리적 선포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신앙인들을 바른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세우고 건전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날의 현대 신앙인들은 구약 성경의 사사 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따라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근래 들어서 매우 우려스러운 것은 잘 알려진 선교단체들이나 교회들도 교리적 성찰 없이 잘못된 것들을 유행 삼아 받아들이면서 심각한 혼란을 가중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에 있어서 이제 의식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진지하게 성경 교리를 함께 고찰해 보는 일이 지금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로 했던 적이 있는가를 자각하고,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가 자신의 신앙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토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때입니다.

[라일주 목사 / 로고스교회 / 778-898-1558]
 
 
 

아브라함 이야기



문제에 대한 올바른 반응 - 순종과 눈물의 기도 창 21:8-21 (하)



하나님의 해결책 - 기도 응답 (12절)
하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사라가 일러준 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비록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며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도 응답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의 반응 - 순종 (14절)비록 하나님의 응답이 자신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더 이상 지체하지 않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기 위해 그는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갈을 불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알려주고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지어주고 떠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 이해되지 않아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답임을 아브라함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갈의 반응 - 순종 (14절)
아브라함의 말을 들은 하갈은 놀랍게도 아무런 불평이나 원망없이 묵묵히 아브라함의 명령대로 따릅니다. 하갈의 이러한 반응은 그녀가 아무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예의 신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전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창 16장에 보면, 하갈이 임신을 했을 때, 사라의 학대를 못이겨 도망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르 광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약속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창 16:10). 즉, 하갈은 보호해주시고 크게 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말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의 발생 (15절)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해서, 그 약속대로 순종을 했다고 해서 어려움을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14절 끝에 보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은 브엘세바 광야 즉,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가죽부대의 물이 다 떨어져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갈은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제까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어진 것을 보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 것입니다.

하갈의 반응- 눈물의 기도 (16절)
이럴 때 하갈이 선택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울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이스마엘이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녀는 활을 쏘아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인 약 300m 정도 떨어져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합니다. 하갈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원망하면서 울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노예 신세를 한탄하면서 울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이스마엘 또한 울면서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은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갈은 샘물을 발견하고 죽음의 위기를 넘깁니다 (19절). 그리고 이스마엘이 자라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보호해 주셔서 장성하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2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를 만났을 때 화를 내면서 다른 사람 탓을 하고 불평하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하갈처럼 히스기야처럼 눈물로, 통곡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응답을 주시든지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이 시간, 갖가지 문제로 답답하고 괴롭고 억울한 분들이 있다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말고 지금 당장 눈물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눈물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밤중 도심을 울리는 기적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시차를 극복하려면 잠을 자야만 할 시간이기에 눈을 감고 누웠어도, 불을 켜면 재빠르게 흩어지는 어두운 광 속의 쥐들처럼, 눈을 뜨는 순간 잠 기운이 혈관에서 싹 빠져 달아나 버리고 정신이 너무나 또렷또렷합니다. 기적이 남긴 처량한 여운이 물결로 번져가는 어두운 방안에서 허전하고 텅 빈 감흥에 일렁이며 누워있자니,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생이라는 무거운 짐가방을 끌고 안전한 거처를 찾아 헤매는, 동시대라는 기차에 실려가고 있는 여행객들로 여겨지고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아무리 잘나고 빠른 누구라도 단 일초도 앞서거나 평균에 못미치는 누구라고해서 단 일초도 물러설 수 없이, 동일한 속도로 굴러가는 세월이라는 기차에 실려, 건강이나 재정이나 나이나 직장이나 자녀나 주변 관계 등의 변수들에 흔들리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협속에 살아가는 불안한 인생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신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신과 뗄레야 뗄수가 없음을 인간의 역사가 남긴 돌무더기들이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크게 요동치는 세상사 속에 교묘하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죄와 유혹의 끈끈한 몸통과 씨름하면서, 사방을 위협하는 불행의 요소들에 잔뜩 겁먹은 채로, 어디에 집을 세우고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한계가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복을 빌고 안녕을 기원합니다. 나를 축복해 줄 존재, 나의 기도를 들어줄 존재, 나의 불확실한 미래를 모든 재앙으로 부터 지켜줄 존재, 아픈 사연을 다독여줄 존재, 억울함을 풀어주고 죄책감을 씻어주고 기적을 베풀어 줄 존재를 만들어 냅니다.
이번 여행 동안 숱하게 보았던 돌무더기들 속에서 인간 권력의 역사를 뒷받침 하고 있는 신화들을 통해 악한 사단이 얼마나 사람들을 미혹하고 인류의 역사를 음란과 포악으로 지배해왔는지를 확연하게 보았습니다.

온갖 신화의 발상지요, 인본주의의 근간을 놓은 그리스는 지금 절망의 먹구름이 짙게 내리 깔려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실제로 철문이 내려진 가게들과 온갖 낙서들이 덮고 있는 거리와 문을 닫은 은행들, 국가의 권력과 위엄의 상징이 될 국회의 건물마저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분수대가 녹이 슬어있고 계단이 부서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심각한 그 나라의 경제 상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국회 앞 광장에서는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성난 시위대가 군중을 선동하는 마이크 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는 모습에서 마치 나치의 망령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테네의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아레오 바고 언덕에 오르니, 당시 엄청나게 화려하고 번화했던 신전과 문화의 중심에서 거대한 신과 인간의 아성에 도전하여 담대히 복음을 외치며 철학자들과 논쟁을 했던 초라하고 남루한 행색을 한 사도 바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연합하는 영광스러운 삶을 몸으로 증거했던 사도 바울의 음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만 같은 그곳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잠시 들러 사진을 찍고 떠나는 관광 그룹들에게 이리저리 자리를 내어주며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이 땅에서 결코 헛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오늘 나를 이곳에 있게 한 그의 헌신에 감격하며 감사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향한 결연한 숨결이 느껴지는 그 언덕에 머물러 서서 쉽지 않은 주변의 삶 하나 하나를 떠올리며 중보했습니다. 그럴수만 있다면 예수님의 영과 함께 하는 이 영광스러운 죽음, 죄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기념품으로 가져다 쫘악 나눠 주고 싶습니다.
삶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는 고백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어려운 시험이나 감당하기 힘든 어떤 일들을 만났을 때 그런 얘기들을 하곤합니다.
“죽기 밖에 더하겠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는 죽을 각오로 덤벼야만 넘어갈 수 있는 도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삶의 시작은 죽음에 있음을 성경은 말합니다. 죽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16:25)

“그동안 살 길을 찾아다녔기에 두렵고 힘들고 염려가 많았습니다. 내가 그토록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의심하며 생각이 복잡했던 것은 나의 알량한 자존심과 입지를 세우기 위한 것이고 누군가의 평가와 눈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아프다고, 힘들다고, 상처 받았다고 핑계대지 않을 것입니다. 정과 욕심으로 얼룩진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죄악과 미움과 절망의 지저분한 삶에서 죽고 영광스러운 새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절대 멈추지 마소서.”

“죽으면 죽으리라” 는 강한 눈빛으로 내게 주어진 생의 도전들을 바라보니 불끈 용기가 솟아 오릅니다. 지금도 나를 누르고 무겁게 하는 생의 문제들이 흙도가니에 일곱 번 연단한 순은 처럼 나를 맑히시고 나의 생애를 순결한 진리의 반석위에 세우시기 위한 아름다운 섭리임이 믿어집니다.
한 알의 썩어진 밀알이 된 사도 바울의 죽음을 통해 2천년이 지나는 지금까지 엄청난 열매를 낳게 하신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가 앞으로의 내 인생을 온전히 주장하실 것을 소망하니 내가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뜻이 너무나 은혜롭게 느껴집니다.

나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한 자가 되었기에, 모두가 나를 떠나 혼자가 된다 해도 나는 절대 혼자가 될 수 없는 행복한 비밀을 품고 아쉽지만 그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재미있는 사도행전


욕심의 산에서 내려오라!




남부 인도에서 코코넛을 이용해 원숭이를 산 채로 잡는 내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코코넛 껍데기에 원숭이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서 속을 모두 긁어낸 다음, 그속에 쌀을 조금 집어 넣고 끈을 연결해 말뚝에 단단히 매둔다. 이 코코넛을 발견한 원숭이는 냉큼 다가와 구멍 속으로 손을 넣어 쌀을 한 웅큼 집는다. 그때 숨어 있던 사람이 다가가면 원숭이는 손을 빼고 달아나려 기를 쓴다. 하지만 쌀을 잔뜩 쥔 손을 빼내지 못해 결국 사람에게 잡히고 만다.

‘욕심’은 죄와 사망을 낳는 임산부다. 야고보서 1장 15절은 ‘욕심’의 실체를 정확히 고발해 주는 말씀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다. 욕심은 한 인간의 마음에 들어와 죄의 산을 넘고 넘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악의 존재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야고보서 1장 15절의 해설서와 같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마음에 욕심이 잉태하였다. 땅 판 돈의 일부에 욕심 생긴 것이다(행5:1-2). 이 욕심이 그들의 마음을 요동 시켰다. 땅을 판 돈 일부를 숨기게 만든 것이다(행5:3). 그들의 욕심은 사도들과 하나님을 속이게 만들고 결국 그들 부부를 비참한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든 것이다(행5:5-6, 9).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심은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욕심을 인간의 마음 속에 심고 자라게 하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다. 그는 바로 ‘사탄’이란 존재다. 베드로의 말을 들어보자!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행5:4)라고 꾸짖고 있다. 베드로는 욕심은 ‘사탄의 장난’이라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사탄이 인간의 마음에 욕심을 심는 목적은 하나님을 버리고, 욕심의 거짓된 신을 붙잡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욕심에 붙잡히면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된다. 생의 주인을 바꿔 버리고 거짓된 주인을 쫒아 살게 만든다. 마가복음4장 19절에 욕심이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차단된다고, 결국 삶의 어떤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인간의 욕심은 파도와 같다. 이 지구가 존재하는 한 욕심의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간다. 큰 결심과 결단으로 태평양을 건너온 우리에게는 더 많은 욕심의 산들이 독오른 독사의 혀처럼 우리를 향해 날름거리고 있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을 쫒아 행하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사도 바울의 외침을 들어보라! “너희의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했다(엡4:22). 지금 내가 벗어야 할 욕심의 투터운 외투는 무엇인가? 과감히 벗어 버려라! 이제 성령의 새 옷으로 갈아 입고, 하나님의 고귀한 일에 더 큰 욕심을 내는 인생으로 전환하라!

황보창완 목사 (글로리아 한인교회) / 778-708-5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