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3 >


 


0064. “내 백성을 가게하라”
마이어 대위의 죽음과 드레퓌스 사건은 헤르츨의 마음에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열망을 심었다. 『유대국가』(Der Judenstaat, 1896)라는 소책자를 저술한 후, 오지리 비엔나에서 모인 시온주의자들은 스위스 바젤(Basel)을 임시근거지로 삼고 첫 『세계 시온주의자 회합』(World Zionist Congress, 1897)을 개최하였다. 유대인들로부터 ‘새 모세’(New Moses)로 불려지기 시작한 헤르츨은 독일의 황제 빌헤름(Wilhelm), 터키의 술탄(Sultan), 영국의 챔블린(Chamberlain), 이탈리아 왕 빅토르 임마누엘 3세(Victor Emanuel Ⅲ)를, 그리고 1904년에는 마지막으로 로마교황 비오10세(Pius X) 를 만났다. 로마교황은 헤르츨에게 유대인들은 모두 카톨릭으로 개종할 것과 그렇지 않고 팔레스타인에 이주할 경우에는 그곳에 있는 천주교 사제들을 명하여 모든 유대인들을 강제로 천주교 영세를 베풀것임을 통보하였다. 과로한 헤르츨은 로마에서 비엔나의 집으로 돌아와 반년 후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 다시 44년 후인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 건국이 델 아비브(Tel Aviv)에서 선포되었다.


0065. 기독교와 교회교(敎會敎)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서3)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믿음의 도는 성도들(saints)에게 주어졌지 학자들(scholars)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복음의 본질을 파괴, 복음의 종교화 작업을 위해 사단은 학자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 교회지도자들은 사도에 걸맞는 칭호를 찾다가 옛 바벨론 종교의 제사장들이 사용한 아버지(Father)란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들은 제우스 신(神)이 아버지로 불려진 것도 알고 있었다. 교회의 박사들로 알려진 초대교부(Church Father)란 역시 ‘교회의 아버지’란 뜻이 된다. 그리하여 이 말은 후에 교황, 신부(神父), 대부(代父)등, 로마카톨릭교의 용어들의 씨가 되었다. 예수께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시고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23:9)고 경고하셨다. 인간의 명예욕은 이미 복음으로 선포된 것을 종교로 변질시키고 있었다. ‘종교’(‘religio’-Lat.)란 ‘로마의 종교의식을 지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시다. 구약의 그 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예고되어온 이름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다. 마귀를 쫓아낸 이름 또한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다(막9.38; 눅10.17; 행16.18). 교회의 이름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침)례를 받게 되었다(마28:19, 행8:16, 19:5).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업수히 여겼던 구약의 제사장들 처럼(말1:6),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영광을 토색질하고도 앞줄에 나와 토색질한 것이 없다고 기도했던 바리새인 처럼(눅18:11), 종교인들의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예수의 이름은 버리고 교회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조직은 주 예수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인간 주 주교(the Lord Bishop)를 앉혔다. 구속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거두어졌고, “예수”대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구호를 들고 나섰다.

사단은 구원의 초점을 예수로부터 교회로 돌리고 있었다. 학자들은 교회를 두고 성경에도 없는 여러가지 수식어들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레네우스(Irenaeus)의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의 ‘처녀 어머니’(Virgin Mother), 오리겐의 ‘국가들의 어머니’(Mother of the Nations), 키프리안(Cyprian)의 ‘어머니 교회’등의 표현들이 초대교회 교부들에 의해 로마교회 안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AD 3세기 경에는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가 없다’라는 해괴망측한 말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교회에 헌신, ‘모든 신자의 어머니’(Mother of the Faithful)가 되는 교회사랑이 곧 신앙(信仰)으로 간주되었다. 서머나의 폴리캅(Polycarp), 리용(Lyons)의 신자들은 교회를 ‘어머니’(Mother)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바벨론의 어미(계17:5)가 이미 로마제국의 영토 안의 교회에 뿌리를 내렸다. 예수의 이름은 제쳐지고 그 자리에 교회가 들어 섰다. 오리겐의 글에 자주 언급된 표현 - ‘교회의 규정’, ‘교회의 신앙’, ‘교회의 가르침’, ‘교회의 전통’- 들은 교회의 주교들이 가졌던 종교적 야심을 그대로 반영한 것들이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아이 예수”(행4:27, KJV)를 높이는 대신, 자신들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 자기들이 소속된 교회를 높이는데 혼신을 쏟았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ciam nulla salus)라는 말이 나오면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엡5:25)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천국복음”(막1:14)를 보게 하는 대신에, “그의 몸된 교회”(골1:18,24)를 강조,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인간중심의 종교, 교회교(敎會敎, Churchianity)로 향하게 하였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엡5:23-24)의 순서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위에 올라 앉은 꼴이 되어버렸다.” 기독교회사의 흐름을 바꾼 영향력을 행사한 이단들은 거의 모두가 학자들이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선생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교란케 할 것임을 미리 예언하였다(행20:19, 벧후2:1).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35-107)는 그리스도교회의 일치가 예수가 아닌 주교에 집중시켜, 주교감독 정치제도를 도입, 기독신앙의 일치의 가장 안전한 수호자를 주교(Bishop)에 두었다. 성령께서 가라사대 ‘주교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 주교가 없이는 성례전, 결혼식 거행 등을 불가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자리에 대리자로 자처한 이그나티우스에 대해 터툴리안(Tertullian)은 “교회는 주교들의 모임이 아니다”라고 항의 하였다. 리베리우스(Liberius, 352-366)는 대중을 향하여 감히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주교”(One God, One Christ, One Bishop)를 외침으로 삼위일체의 성령의 자리를 주교로 대치시켰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주교에 대항한 한 기병장교 대장을 죽여 거리에 끌고 다니게 함으로써 주교에 대한 불경죄의 본을 보여주었다. 주교들의 종교성은 복음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고는 복음을 사유(私有)화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의 복음보다도 종교에 몰두 하였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3위(三位)가 되신 성령을 통해 그의 사역을 펼칠 터전으로 삼기를 원했으나, 주교들은 성령의 자리를 점령, 교회의 주인행세를 하였으며 교회에 대한 저들의 세속적인 야심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게 만들었다. 빠스깔(B. Pascal, 1623-62)이 암시하였듯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철학자의 하나님, 신학자들의 하나님으로 채색질하였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지 종교나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의 하나는 영생(永生)이며, 우리의 구속주는 예수이며, 그 외에는 아무도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를 믿으라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KJV). 예수 외에 어느 누가 우리에게 영생을 책임져줄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복음의 본질보다 인간의 종교성을 밝히는 자들은 천국복음을 인간의 종교와 같은 범주에다 두고 다루는 죄악(罪惡)을 범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이 배타적이라고까지 말하나,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중대한 오해이다.

0066. 『가이사』의 교회로 탈바꿈한 그리스도의 교회 
콘스탄틴의 회심에는 군주적인 목적이 있었다. 교회와 국가를 자신의 통제하에 확고하게 둠으로써 백성들로부터 효율적이고도 전적인 지원을 필요로 했으며 정적(政敵)의 공격으로부터, 또 그가 힘들게 손에 쥔 제국을 안전하게 장악해야 할 계산을 가지고 있었다. 잔인하고 독재적인 성격에 마귀적인 영리함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는 종교의 정치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어떠한 대가를 무릅쓰고서라도 기독교회와 로마제국을 묶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콘스탄틴의 결정은 로마제국 내의 기독교회에 교리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제국종교로의 진전은 곧 배도 그 자체였다. 아직 국가종교는 안되었으나 제국종교가 된 배도의 황제의 교회는 이제는 제국의 한 상징으로 전락하였고, 로마제국의 종교를 가져보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기독교가 곧 국가종교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롬16:16)는 ‘가이사의 교회’로 둔갑하였고, 주교들은 ‘가이사의 성직자’(Caesarean Clergy)가 되어 사도적, 정통, 카톨릭을 표방하고 나섰다. 로마의 국가종교는 유유히 정치목적에 이용되었다. 콘스탄틴 이후로는 이교(異敎)에 기원을 둔 바실리카(Basilica)및 베스타(Vesta)성전이 건축, 헌당되었고, 애굽의 하늘황후 이시스(Isis, queen of heaven) 숭배신앙이 로마교회 안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로마교황에 의해 지정되는 천주교회의 바실리카는 특별히 왕족, 국가원수를 위한 미사집전의 장소로써 그 목적을 수행하고 있으며, 천주교의 수녀(修女)제도와 하늘황후 마리아(‘Mary, Queen of Heaven’)숭배는 모두 바벨론종교에 기원을 두고있는 베스타 처녀(‘Vestal Virgins’)와 이시스 숭배신앙의 연속이다. 이교(異敎)사회의 국가에서는 황제를 최고의 수장(Summus Pontifex)으로 하는 종교적 예식이 공개적으로 치러져 왔다. 로마제국 국가교회의 최고승원장(Pontifex Maximus)이 된 황제는 기독교 창설자로 군림, 국가의 조직기구에 교회를 편입시켜 국가의 보호아래 있는 국가교회(國家敎會, State Church)를 만들어 스스로 그 무덤을 파고 있었고, 저들이 취한 다른 복음(갈1장)은 로마제국의 멸망을 자초한 근본원인이 되었다. 12명의 가이사들이 통치하였던 로마제국은 어부들, 세리 등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로 변한 열 두 제자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적함으로써 스스로 제국의 종말을 고했다. 

0067. 교회와 국가의 일치사상
콘스탄틴 이후로 뿌리를 내려온 사단의 ‘교회와 국가의 일치사상’으로 인해 10세기 이후로는 로마교회가 오히려 국가를 흔들기에 이르렀다. 1440년, 로마카톨릭교회 안에서 태어난 합스부르크가(家)의 출범과 더불어 로마교황들은 옛 최고승원장(Pont. Max./PM)을 자유로이 취하였으며, 21세기의 현 교황에 이르기까지 역사상의 모든 교황들이 이 칭호를 탈취, 로마카톨릭교의 본질이 로마제국의 연장임을 스스로 노출하고있다. 교황권제도 자체가 하나의 스캔들임에도 불구, 세상은 이 세력이 종교의 얼굴을 가지고 오랜 세월을 두고 속에 품어온 거대한 정치조직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마22:15-22)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단순히 세금문제를 두고 언급하신 것 만은 아니었다. 다가올 세상에서의 성도들이 세상과 분리되고 성별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시사하셨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단호하게 언급하셨던 것이다. 사단에 볼모잡힌 로마카톨릭교회는 애초에 ‘그리스도냐? 가이사냐?’의 갈림길에서 저들이 선택한 가시아의 세력을 더욱 깊이 속에 품었다. 국가와의 경쟁 ‘시소’게임은 이제 판결이 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옛  로마황제의 칭호에다 ‘아비’(the Pope/PAPA = Pater Paterum/Father of Fathers 마23:9-10)를 추가, ‘우리 주 하나님 교황’(Our Lord God the Pope)이 되었다.


성령을 내 맘에 보내셔서
내 어둔 영의 눈 밝히시사
말씀에 감추인 참 진리를
깨달아 알도록 하옵소서
(찬송가 284 / 주예수 해변서④)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사망에서 생명으로 (1)



죄인에서 선교사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밴쿠버에 사시는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첫 인사를 전해 올립니다. 이렇게 지면을 통해 여러분과의 만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부족하고 자격 없는 저임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구하며 그분의 뜻을 잘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바입니다.

저는 올해 6월, 밴쿠버순복음교회에서 있었던 밴쿠버 코스타에 강사로 섬겼었던 오테레사 선교사입니다. 그래서 혹여 이 신문을 애독하시는 그리스도인분들 중에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이 계실 것임으로 간략한 저의 소개를 시작으로 앞으로 몇 번의 간증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저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또한 어떻게 제가 밴쿠버 크리스쳔신문에 글을 기고하게 되었는지, 이 신문에 나누게 될 글의 내용은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서도 단계적으로 나눌 예정입니다. 미리 핵심 부분을 말씀드린다면, 한민족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계획, 그리고 북한의 과거와 현 실상을 역사의 흐름을 따라 나누고 앞으로 맞이하게 될 통일을 대비하여 한민족공동체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그래서 한인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해야 할 몫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지금까지 사역해오면서 하나님께 배우고 깨달았던 부분들을 근거로 부족하나마 나누게 될 것 같습니다.

위의 나열한 엄청난 내용들을 제가 다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저와 저의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부분에 대해서만 나눌텐데요, 상당부분은 간증을 통해서 나누게 될 것 같습니다. 때문에 부족한 제가 하나님의 뜻과 마음, 우리 민족의 비전을 여과없이 하나님 주시는 그대로, 최대한 근접하여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죄인에서 선교사로 .....
저는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22년간을 한반도의 위쪽동네에서 살았던, 일명 한국에서 말하는 ‘탈북민’출신의 선교사이고 사역자입니다. 2011년 1월 남편(2009년 결혼)과 함께 한국에서 해마다 1~2월에 열리는 ‘통일비전캠프’(부흥한국의 주최로 열렸던 캠프 - 대표: 고형원 선교사)에서 1호 선교사로 오대원 목사님의 파송말씀과 함께 New Korea에 파송된 하늘나라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나라를 묻습니다. 나라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 선교사로 이 땅에 부름 받았습니다. 인천공항에 첫 발을 디뎠을 때에야 비로소 대한민국임을 실감하고 감격했었는데 그 추억이 벌써 10년전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돌아보니 온통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뿐입니다. 죽어도 신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던 제가 감리교신학대학교 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또 급히 부르시는 하나님의 이끌림으로 ‘예수전도단’이라는 선교단체에서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 훈련을 받으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게 되었고 이어 중보기도학교 훈련과정을 시작으로(2005년부터) 지금까지 중보기도사역자라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현재는 NKB(New Korea Builders : 대표)공동체를 섬기고 있으며 임박한 우리 한반도의 ‘통일’을 대비하여 중보기도를 해오던 과정에 다양한 영역에서 실제적으로 준비해야 할 일들의 면면을 보게 되었고 통일을 위해 열심히 뛰고 계시는 수많은 동역자들과 함께 ‘통일코리아’의 밝은 미래, 하나님께서 그려가시는 통일된 한민족의 사명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래야 알 수 없었던 흑암의 땅에서 죄인으로 살았어야 했던 저를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선교사로서의 자리까지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아브라함 이야기


 

아브라함의 섬김 / 창 18:1-8 (1)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그토록 염원하며 기다려오던 약속을 이루어주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 대신에 자신의 생각과 고집 속에 갇혀 완고해졌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믿음으로 견고해진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완고함이 아니라 믿음에 견고해졌을 때에 아브라함에게는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달려나가 엎드려 나그네들을 맞이한 아브라함
여호와께서 두 천사와 함께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들을 정말 귀하게 여기고 그들 앞에서 쩔쩔매면서 그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마자 영접하기 위하여 달려가서는 땅에 엎드렸습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개역개정에서는 아브라함이 달려가서 영접하고 땅에 엎드린 것으로 나와 있지만, 아브라함은 ‘(영접하기 위하여) 달려가서 엎드렸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나그네를 대접할 수 있는 수 많은 남녀 종들이 있었고, 더군다나 지금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입니다. 즉, 손님이 왔다고 해서 100세가 다 된 노인이 손님을 맞이 한다고 뛰어가서 엎드릴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섬기게 해 달라고 간청한 아브라함
맞이하기 위해 달려나가 땅에 엎드린 것도 모자라, 아브라함은 그들을 섬기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3-5절의 내용은, 그냥 지나가지 말고 제발 발을 씻고 쉬다가 음식 (떡)을 먹고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아쉬운 쪽은 주인인 아브라함이 아니라,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대개는 나그네들이 집주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거나 음식을 달라고 하지 이렇게 주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나그네들을 섬기겠다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식사 시중을 든 아브라함아브라함의 간청에 나그네들이 그렇게 하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마치 자신이 꿈꾸어 오던 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직접 사라에게 가서 고운 가루 세 스아 (Seah)로 빵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 스아란 약 22 리터 정도 되는 엄청난 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름지고 좋은 양을 잡아 요리하라고 하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리들을 가져다가 상을 차리고 그들이 나무 그늘 아래서 음식을 먹는 동안 서서 음식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 것입니다.

나그네들의 존재를 몰랐던 아브라함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들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는 단수이고, 또한 ‘주’란 말은 이미 창 15:2, 8절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여기서도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들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달려나가 엎드리고 섬기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주라고 불렀다기 보다는, 나그네들 가운데 리더에게 ‘주’라고 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아브라함은 그들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히 13:2에 보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바깥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방안이 깊은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겨울로 가는 이 계절의 짙고 두터운 어둠 속에 낮의 의욕과 활기까지 완전히 묻혀버려, 마음을 쓰며 바쁘게 움직여 다니는 것에 비해 삶의 내용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한 마음이 듭니다.

부스럭 부스럭 의식을 가다듬고 내려가 저녁을 준비하면서 어둠의 두께만큼 짙게 에워싸는 우울한 느낌을 밀어내며 계속 좋은 의미들을 주입합니다. 우주를 떠돌며 늘 큰 염려와 두려움을 지고 가는 생각에 비해서 실제의 삶은 얼마나 단순한지, 탐내고 갈망하는 욕망의 종류와 빛깔에 비해 삶은 이렇게 일어나 씻고 밥하고 먹고 자고의 반복으로 참으로 소탈하고 조촐합니다. 나이가 들어 남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허영이 줄고 이생의 자랑의 거품이 꺼지고 나니, 많고 화려한 음식들 보다 입 맛에 맞는 반찬 하나에서 더 만족을 느끼고, 크고 화려한 집보다 맘 편하게 몸을 누일 공간이 더 족하고, 옷도 내 몸에 잘 맞고 거동에 편한 것이 제일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는 것보다 마음을 깊이 나눌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더 갈망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의 나의 삶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너무나 완벽한 은총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티브이나 영화 등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이 우리의 의식 안에 형성해 놓은 잘못된 가치관으로 인해 인생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가 길바닥에 버려지고 있습니다. 폭력이나 음란을 정의나 아름다움으로 미화시켜 상식의 선을 침범해 들어오고, 시시한 잡담이 생에 대한 의미와 진리를 덮어 누르고 있는 지금의 영화와 노래, TV쇼와 잡지들을 보면, 앞으로 우리 자녀들을 성적인 문란함이나 폭력과 동물적인 충동에서 지켜 보호하며 인간다운 존귀와 양식과 분별을 가진 사람답게 키우는 일이 정말 쉽지 않은 과제로 여겨집니다.
늘 기계와 교감하며 권위나 어른들의 지혜에 무신경한 아이들이 짐승이 길들이는 대로 말하고 옷 입고 문신하고 화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때 저러다 말 것이라고 쉽게 넘어가 지질 않습니다.
물질 만능과 성과 폭력과 기호의 자유라는 잘못된 가치에 미혹되어 감각만 키우던 사람들이 욕망의 작은 그릇을 채우려다가 욕망에 중독되고, 결국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나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빠져, 가정을 깨뜨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다가 결국 자신의 인생이 회생 불능으로 황폐해진 이후에야 그 동안 자기가 학대하고 죽이고 미워한 것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인 것을 발견하는 비극으로 끝맺음 하는 예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겉 모양은 구원 받아 말과 행실은 조심하더라도 마음으로부터의 회개에 이른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랜 신앙 생활에도 여전히 잘못된 생각 때문에 아파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건강을 해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트럭 위에 앉아서도 보따리를 이고 있었다는 어느 촌노처럼, 구원의 놀라운 은혜에 올라 타 있으면서도 섭리하심에 맡기지 못하고, 고개가 휘도록 생각의 짐 보따리를 얹고 다니며, 조금 있으면 기억도 나지 않을 것들에 격렬해져 허상을 논하고, 허상을 탓하고, 허상에 분을 품고, 허상에 자만하고, 허상을 탐하고, 허상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진정한 구원은 마음의 출애굽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욕망을 추구하던 이전의 생각에서 돌이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자리에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운명을 낳는다는 사실을 배운 우리라면, 단지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습관을 바꾸려고 기를 쓸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과 멍에를 매고 그분이 생각하시고 이끄시는 대로 마음을 길들이며, 나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이신 말씀으로 인도함 받는 일을 훈련해야 합니다. TV나 컴퓨터 화면에 광고 하나만 올리는데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는데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음의 화면에 값싸게 아무 것이나 포스팅 하지 않는 철저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인물이나 사건들도 과연 시간을 들여 생각을 쏟을 가치가 있으며 입에 올릴만한 것인지 말씀의 필터에 걸러 꼼꼼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삶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나 사건들은 늘 있게 마련이지만, 이런 하찮은 일들이 외적인 상황은 흔들 수 있겠지만 마음까지 흔들지는 못하게 해야 합니다.

사방에서 두려움과 염려거리들이 덮쳐오는 이 마지막 때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말씀 앞에 복종시킴으로 생각의 방탕을 그치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끊임없이 기도로 올려드리는 것이 평강의 큰 비밀입니다.
생각은 문제로 이끌지만 기도는 답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주님께 복종시키는 일이 마음 안의 두려움과 불길한 암시들을 없애고 큰 평안을 주어, 생각이 많던 젊은 때는 예민하여 설치던 잠도 지금은 기력이 진할 때까지 놀다 잠든 어린애처럼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고 편안하게 잠듭니다.
말세를 당한 그리스도 안의 모든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회개에 이르러,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아름답게 이루어 가길 기도합니다.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2 >







0056. 『마이어』대위의 죽음
프랑스 혁명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법적 제재가 제거되자 프랑스는 유대인들이 거주하기에는 가장 안전한 나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로마카톨릭교회의 영향하에 있는 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불운을 유대인들에게 돌렸다. 『보불전쟁』(the Franco-Prussian War)에서 독일인에게 패한 프랑스는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며, 1880년대에는 상황이 유대인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885년, 언론인으로서는 『예수회』(Jesuit)회원인 『드루몽』(Edouard Drumont)은 『프랑스 유대인들』(La France Juive)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프랑스의 모든 불운을 유대인들에게 전가하기 시작한 그의 책이 호응을 얻어 몇 년 사이에 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자 그는 신문(La Livre Parole)까지 창간, 프랑스 군부 내의 유대계 장교들의 진출을 시기한 군수뇌부 내의 반(反)유대 카톨릭 세력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를 항의한 젊고 유능한 유대계 장교 『마이어』(Armand Mayer)대위가 죽임당한다. 그의 장례식과 행렬에는 5만여명이 군중이 운집하였고 『헝가리』계 유대인 법률가로서 프랑스에 특파원으로 파견된 언론인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도 그 행렬에 있었다.

0057. 『드레퓌스』사건 (L’Affaire Dreyfus, 1894-1906)1894년 가을, 프랑스 군부 내의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 대위가 군사기밀을 독일에 넘겼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무기형을 언도받고 무계급으로 강등되었다. 지휘관을 상징하는 그의 칼은 부러지고 계급장, 모든 장식과 단추까지 제거당한 후 더 이상 군복이 아닌 군복 차림으로 거대한 군연병장에 운집한 인파 앞을 돌게 하였다. “매국노!”, “유대인들을 죽여라!” 라는 군중들의 함성에 드레퓌스는 “나는 무죄하다!”라고 맞섰고, 신문기자단석 앞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는 무죄하다는 사실을 온 프랑스에 고하라!”라고 절규하였다. 그리고 그는 서아프리카의 프랑스령(領)인 『악마의 섬』(Devil’s Island)에 유배되었다. 이 사건을 보는 프랑스 지성들의 시각은 달랐다. 작가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가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글을 신문에 투고함으로써 양심의 포문을 열었다. 프랑스의 여론은 양분되기 시작하였으며, 군재판부가 『졸라』구속령까지 내리자 그는 영국으로 피신하였고, 군수뇌부 내의 음모자의 자결 등으로 드레퓌스는 유배 5년만에 『악마의 섬』에서 다시 『빠리』로 송치되어 재판은 재심에 들어갔으며, 결국은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사면된 후 『드레퓌스』대위는 다시 소령으로 복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무려 12년 동안 프랑스의 이성(理性)을 쪼개어 놓았으며, 온 유럽의 양심을 저울질하신 사건이었다.







0058. 변하지 않으려고 변하고 있다
오늘날 『로마』교회의 사제들은 루터의 칭의론을 강의한다. 우리는 “파괴하기 위해 침투하라”(join to destroy)는 『로마』교회의 정신을 경계해야한다. 오늘 날 『로마』교회의 사제들은 “거듭난다”, “구원경험”,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와의 만남”, 성령세례, “『그리스도』를 영접”, 은사경험, 『케리그마』등의 표현을 상투적으로 늘어놓는다. 사제나 수녀들은 복음적인 집회에 참석도 하며, 기독교의 찬송가도 배운다. 지역 기독교회의 모임, Y.M.C.A. 등의 모임에도 나타나며, 기독교회의 메시지와 신학용어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구원중심”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저들의 간교한 표현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속는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목사들과의 만남에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능란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천주교도들에게는 이와 상반된 거짓된 교리를 가르친다. “반대하기 위해 인정하라”(agree to disagree, we agree to differ)는 『로마』교회의 생리를 모르면 저들은 변하고 있다고 속단하게 된다.
기독교의 어느 신학자의 표현 - “과거 카톨릭과 현대의 카톨릭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며, 『제2바티칸』공회의 교황『요한 23세』, 『바오로 6세』의 선언이 밝힌 것과 같이 저들의 교리와 기본 가르침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뭐가 바뀌었던 말인가? 교황, 사제가 없어졌는가? 연옥의 불이 꺼졌는가? 『마리아』, 성자, 전통숭배가 해제되었단 말인가? 저들이 변하고 있는 것은 변치아니한 것을 숨기기 위해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사단의 세력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11:13-15),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4-28)고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0059. 로마카톨릭교의 기원
사도 『바울』에 의해 복음의 씨가 『로마』에도 뿌리를 내리고 예수의 이름은 초대교회의 박해 속에서 『네로』의 사자굴에 던져져도 더욱 뻗어져 갔다. 그러한 박해 중에서도 교회지도자들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교권암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로마』는 첫 교회지도자 『리누스』(Linus, A.D. 67-76)로부터 『실베스터』(A.D. 314-335)에 이르는 동안 31명의 지도자를 가졌었는데, 그 중 첫 18명은 아무도 침대에서 죽은 자가 없었으며 모두가 암살, 독살, 길에서 자객에 의해 쓰러졌다. 사단은 세상명예, 탐욕에 찬 이러한 교권지도자들을 다루는데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콘스탄틴』대제는 종교통합을 추구해왔고, 이때의 교회감독 『실베스터』는 ‘로마의 대로(大路)’, ‘로마의 군력’, ‘로마법(法)’, ‘로마의 권력을 이용’, ‘로마의 평화’(Pax Romana, 무력하의 평화)를 꿈꾸며 기독교 포교를 계획하였다: “로마와 손을 잡고 세력을 펼치리라. 로마의 지배를 따라 뻗어나가면 ‘예수의 세례’는 저절로 ‘로마의 길’을 타고 온 땅의 동서남북 끝에까지 흘러갈 것이며, 로마의 감독은 온 인류의 영적 아버지로서 인류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가!”

0060. “그리스도냐? 가이사냐?” 인간은 명예심과 탐욕심이 많은 동물이며, 기독교는 박해 속에서는 더욱 강한 폭발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사단은 전략전술을 바꾸어 『로마』황제 『콘스탄틴』을 자신의 수(首)제자로 택하고, 박해 대신 포용정책을 가지고 『로마』교회지도자 『실베스터』와 만나 협상하게 한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권력과 교권의 두 지도자는 흥정에 들어갔다. 거룩한(?) 허영심에 불탄 『실베스터』는 “그리스도냐? 가이사냐?”의 갈림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의 땅의 군주의 권력을 택하였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고 『유대』인들이 소리지르던 길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대로 처음부터 거짓에 속한 무리였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않음을 인함이니라”(요일 2:19-21).

0061. “슬프다! 그대 『콘스탄틴』이여!”
『바벨론』종교는 『로마』의 천하통일과 더불어 쉽게 고대 『로마』전역으로 퍼져갔고, 순교와 박해속에서 강해지고 부유해진 『로마』교회는, 당시 『로마』의 정치수반이요 『바벨론』종교의 대 제사장(최고승원장)의 직책을 겸하여 가졌던 『콘스탄틴』대제와 결합함으로써, 사단이 예수를 유혹할 때 던졌던 약속 -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6) - 을 사단으로부터 받고 천하영광을 꿈꾸는 기독교 모조품 종교가 태어난다. 종교통합을 통해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치하려고 시도해온 『콘스탄틴』대제가 받아들인 기독교라는 것은 『시몬』화(化)된 기독교였으며(행8:20), 이 배도의 신앙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온 『유럽』을 넘어다 보기 시작하였다.

사단은 기독교의 모조품 교회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정치권력과 종교와의 결합’은 그날 이후로 로마카톨릭교회를 특정지어 온 단어이다. 사단과의 영적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권력의 시녀로 타락한 이 결정의 순간을, ‘회칠당한’기독교회사는‘기독교의 승리’라고 기록해왔다. 복음의 진수를 알지도 못했던 『단테』조차도 그의 『신곡』(神曲)에서 “슬프다! 그대 『콘스탄틴』이여! 너를 통해 얼마나 많은 악(惡)이 세상에 들어왔던고!”라고 썼다.

A.D. 313년, 『밀라노』칙령이 공고된 후, 『바벨론』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로마』의 이교도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이교화 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었을 때 『로마』 종교는 ‘바벨론의 비밀’의 알을 품기 시작하였다(계17:5).


0062. 가이사와 그리스도
콘스탄틴 대제의 개종(改宗)에 대하여는 사가(史家)들 간에도 이견이 있어왔다. 스위스의 사가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는 그의 유명한 저서 ‘콘스탄틴의 생애’(Leben Konstantins)에서 콘스탄틴의 거짓된 개종에 대하여 엄격히 다루었으며, 이 책은 120여년 동안이나 계속 출판되었다. 그는 과장된 유세비우스(Eusebius, c.260-c.340)의 ‘콘스탄틴의 생애’(Vita Constantini)를 반박하였다. 콘스탄틴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아첨은 지나쳐 ‘신(神)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부르크하르트는 유세비우스를 두고 ‘황제찬미가 중에 가장 역겨운 자, 철저하게 불성실한 최초의 고대사가(古代史家)’로 언급하였다.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특히 장래의 황제들을 위한 이상적인 군주의 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리겐을 따랐던 유세비우스는 시편, 이사야(시72:7-8, 사2:4)등에 기록된 메시야에 적용된 구절을 대담하게 콘스탄틴에게 적용시켰다. 심지어 콘스탄틴을 두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로 간주하였다. 콘스탄틴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대변자’(Holy Speaker of God’s Word)였다. 시편 96:12을 인용, ‘새 노래로...’ 콘스탄틴을 찬양하였다. 아구스도의 평화의 때에 그리스도가 탄생(눅2:1), 구약선지자의 예언성취는 콘스탄틴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보고, ‘한 통치자, 한 제국, 한 하나님’(One Ruler, One Empire, One God)의 선전표어를 등장시켰다. 로마제국은 하나님의 선택된 제국, 그리스도는 로마시민으로 이 세상에 임하셨다고 믿었다.

0063. 2045년: 인간불멸의 해?
2045년이 되면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될 것이라는 시사주간지 타임(Time, Feb. 21, 2011)의 기사. 영국, 미국, 불어권 시사주간지들이 다투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신의 존재?’, ‘죽음 후의 천국’, ‘인간은 정녕 어디서 왔는가?’등의 기사들을 커버스토리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정치, 경제 등의 ‘시사성’기사들을 제쳐놓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무엇이 가장 ‘시사성’이 있는 기사인가를 다시 생각케 하신다(“아버지, 그렇군요!”). 이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인간들이 매일매일 죽음을 지나 ‘영생과 영벌’로 갈라지는 사실보다 더 시사성이 강한 사건이 없다고 하신다.



내 주여 진리의 말씀으로
사슬에 얽매인 날 풀으사
내 맘에 평화를 누리도록
영원한 생명을 주옵소서
(찬송가 284 / 주예수 해변서③)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목회가 있고 선교도 있다!?



선교지 정탐에서 돌아온 우리 부부는 카라칼팍스탄으로 사역지를 옮기기로 결정을 했다. 동역하던 이목사님 가정과 믿음교회는 전심으로 지방사역을 돕겠다면서 우리 가정을 격려했다.

사역지를 옮기고자 파송교회의 허락을 요청했다. 그러나 파송교회에서 온 반응은 전혀 생뚱맞은 것이었다. 담임목사님은 파송교회의 사정이 어려우니 다시 돌아와 부목사로 목회를 섬기라고 하는 것이다. 참 난감했다. 전화를 걸어 파송교회의 사정을 물었다. 부목사들이 동시에 사임을 하면서 목회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파송교회의 사정은 어렵지만 언어습득이 끝나가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철수하여 목회를 도우라는 지침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말은 “목회가 있고 선교도 있다”라는 말이었다. 나는 더욱 곤혹스러웠다. 나를 향한 담임목사님의 신뢰는 감사한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사명은 사명이고, 개인의 소명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정중하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미개척지로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나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일은 점점 꼬이고 있었다. 이른 새벽 전화벨 소리가 나를 깨웠다. 파송교회 선교담당전도사가 담임목사님을 바꿔 주었다. 느닷없이 “선교헌금을 교회로 전달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받아 써서야 어떻게 재정의 투명성을 보장하겠냐!”라고 하는 것이다. 영문을 몰라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한 권사님이 선교부담당 전도사에게 나의 개인통장번호를 물어 100만원을 헌금하시고는 다른 교회로 옮기셨다는 것이다. 국제전화도 제대로 되지 않은 지역에 있던 나로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알 수도 없었고, 누가 헌금했다는 것을 확인할 길도 없었다. 결론은 내게 정직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해명을 했으나 마지막 말이 내 맘에 비수와 같이 꽂혔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사역은 진행치를 않고 말만 배우고 있는 정선교사를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이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게 통화는 끝이 났다. 차마 내려 놓지 못하는 수화기에서 들리는 뚜뚜 소리는 마치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중형 선고 같았다. 정죄와 단절, 생명줄(?)이 끊어지는 것 같은 기막힌 현실에 이르고 만 것이다.

개척초기부터 온 삶을 드려 섬겼던 파송교회에 나라는 존재가 하루 아침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말이 온 성도들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제되지 않는 배신감에 몇 일을 뜬 눈으로 세우고 말았다.

선교후원과 선교사 후원이라는 말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만약 선교사가 주체가 되어 선교를 한다면 선교사의 개인적인 소명과 사명이 강조되는 말이어서 선교사후원이 된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당신이 선교사로 사명을 받아 선교하는 일에 우리가 후원하겠습니다” 라는 식이다. 이 말은 선교사가 개인적인 서원을 갚는 일이나 개인적 소명을 위해 교회와 관계들이 동원된다는 의미로 비춰질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선교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빚 아닌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과연 선교라는 것이 선교의 소명을 받은 선교사의 일을 돕는 것인가?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 교회가 선교사를 세워 그 사역을 위임했다면 교회가 주체가 되어 선교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사후원’이라는 말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선교사의 개인적인 서원을 갚는 일에, 개인적인 소명 때문에 선교를 지원한다면 선교사는 교회의 부담스러운 짐인 것이 분명하다. 얼마든지 이런 왜곡된 프레임에 갇혀 있을 수 있다.


나는 파송교회의 관리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분은 방송실에서 예배마다 녹화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집사님, 저희 가정을 파송하고 예배나 다른 모임에서 저희 가정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주저 끝에 나온 대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였다. 고민하며 소명받은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편지를 썼다. “현장에서 러시아말을 배우는 일에 게을렀다고 백 번 질책하셔도 저는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배우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신다면 저는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선교사를 교회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교회에 부담스러운 선교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그런 선교사라면 더 이상 선교비를 받을 수 가 없습니다. 다음 달부터 선교비를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철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 진다. 그러나 그 때는 내가 낼 수 있었던 만용이라면 만용, 용기라면 용기였다.

그 후 선교비는 오질 않았다. 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로서 예기치 않은 파국을 선교지에서 맞은 것이다. 그 해 봄은 참으로 시리고 서러웠다. 국제 미아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때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붙잡아야 했다. 파송교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사역지를 옮겨 개척사역을 시작하기로 했다.

새벽마다 일어나 무릎을 끓었지만 분노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번번이 소망의 하나님을 붙잡지 못한 채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곤 했다. 어느 날 새벽 주님은 하염없이 머리를 숙인 내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용서하여라.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나는 요나와 같이 대답했다. “주님,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습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터키 이야기



6. 신약 성경과 터키



4) 갑바도기아 (Cappadocia)

◎ 우르굽 (Ürgüp)고대 마을 우르귭은 네브쉐히르에서 카이세리로 가는 길가에 바위로 된 언덕 비탈에 세워져 있다. 이 언덕은 화산성 응회암으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 집들을 이와 같이 부드러운 바위를 파서 지었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들은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으며, 이 마을을 멀리서 보면 옅은 흙색을 지녔다. 오늘날에는 바위를 파서 만든 집을 가축우리나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이 새로운 관광지의 경치와 마을 어귀에 있는 박물관 건물들은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화려한 협곡의 가파른 언덕, 요정의 굴뚝, 천연적이면서도 사람이 만든 동굴들은 초자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요정의 굴뚝은 꼭대기에 커다란 바위를 얹어놓은 모습의 응회암 첨탑이다. 이 요정의 굴뚝은 지질활동과 풍화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

◎ 네브쉐히르 (Nevşehir) 예전에 닛사(Nissa)라고 불리웠으며, 커다란 화산성 응회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네브쉐히르는 갑바도기아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들 중의 하나이며, 인구가 150,000명인 이 지방의 도청 소재지이다. 이 도시는 신석기 시대 이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에 있는 이그델리 체쉬메 고분에서 신석기시대 주거지였음을 나타내주는 그릇들이 발견되었다. 네브쉐히르는 또한 크즐으르막 강과 가깝게 위치하고 있으며, 히타이트 족이 점거하고 있던 중요한 곳이었다. 그 후에는 이오니아, 앗시리아, 메데, 페르시아, 모라, 셀축으로 하여 마침내는 오스만이 점거하여 왔다. 언덕 정상에는 비잔틴 시대의 성채가 있으며, 오늘날에는 그 주변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 올타히사르 (Ortahisar)
올타히사르 중앙에 벌집 모양 바위의 독특한 모습은 갑바도기아에서 유일한 형태이다. 이 마을 중앙의 바위는 “Sivri Kaya”라고 불린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바위를 파서 집으로 사용하였으며, 오늘날에는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같은 바위를 벽돌로 만들어서 집을 짓고 있으며 옛날에 바위를 파서 지은 집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 우취히사르 (Uçhisar)
이곳은 괴레메에서 네브쉐히르로 향하여 3Km 정도 떨어져 있다. 우취히사르는 조그마한 주거지로서 100m 높이의 바위 정상에는 성채가 있다. 이 성채에 올라가면 주변의 협곡과 계곡들의 장대한 광경들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수많은 집들이 바위를 파서 지어졌는데, 초기에 지어진 집들의 담은 풍화되어 이제는 집안에서 하늘이 보이게 된 곳들도 있다.

◎ 데린쿠유 (Derinkuyu) 데린쿠유 마을 주변에 30여개의 지하도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린쿠유의 경우 깊이 55m, 면적이 2,500m2나 되는데, 지하도시의 사람들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침실을 따로 만들지 않고 거실 벽에 선반 모양의 굴을 파서 소위 ‘상자침대’에서 잠을 잤다.

또한 지하도시 입구에는 돌로 만든 높이 1-1.5m, 두께 30-50cm 규모의 맷돌 모양의 문이 있는데, 무게가 200-300Kg으로 안에서만 열고 닫을 수 있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으며, 문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서 바깥쪽을 감시하거나 이 구멍을 통하여 적에게 활이나 창으로 공격을 하였다.

지하도시 내의 방과 방 사이에는 직경 10-15cm의 구멍으로 연결하여 여기를 통하여 통화를 하였다. 따라서 의사전달을 위해서 긴 통로를 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며, 비상시 쉽고도 신속하게 연락이 가능하였다. 환기를 위해서는 56개의 통풍 통로, 80m의 우물 등이 있다. 지하 1층에는 신학교와 학생들의 공부방이 있다. 지하 2층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파서 주거지로 사용했고, 그 아래층들은 피난처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2층에는 부엌, 창고, 침실, 포도즙 틀, 화장실 등이 있다. 지하 3층은 주로 창고이며, 우물과 연결된 통로가 있는 곳도 있다.

지하 4층에는 출구와 연결되기도 하며, 주거공간이나 창고가 있기도 하다. 길고 좁으며 높은 연결 터널이 구불구불하게 지하 3층에서 5층까지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그 중간에 돌로 된 문이 있다. 지하 5층에는 환기 갱이 있어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하 5층과 6층 사이 통로 곁에는 거주를 위한 방들이 있다. 통로에는 구멍을 파서 촛불이나 기름등잔을 올려놓아 조명을 한다.

지하 7층에는 세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십자가 모양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폭이 10m, 길이가 25m이며, 높이는 3.5m에 이르며 교회로 사용되었다. 지하 8층에는 작은 방들과 환기 갱들이 있다.

한편, 지하 도시들을 연결하여 주는 터널이 있는데, 그 중에는 길이가 9Km에 달하는 것도 있으며, 서너 명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것도 있다. 데린쿠유 지하도시에서 발굴된 것은 약 4Km에 이른다.
<계속>




재미있는 사도행전




교회 스타일



상수 엄마를 서점에서 우연히 만났다. 큰 아이,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의 엄마였다. 목사로서 당연히 “예수님 믿으세요”를 가볍게 토스(toss)했다. 왠 횡제? “그러지 않아도 교회에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라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신이 나서 “어떻게 갑자기 교회 나오실 생각을 다하셨어요?” 라고 묻자, 상수 엄마 왈(曰) “제가 부동산 중개업을 새로 시작 했거던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수 엄마의 대답은 오늘 새벽, 인터넷에서 본 유치한 유머보다 더 웃겼다. 유머 내용은 이랬다. ‘며느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찬송은 무엇일까요?’ 답은,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시어미) 오나 겁없네’였다. 한참을 웃었다. 그러나 난 상수 엄마 이야기가 더 웃긴다.

아뭏든 상수 엄마가 내뱉은 말은 나에게 기가차고, 메가차고, 개도, 소도 웃을 최고급 개그였다.

상수 엄마는 교회를 부동산 중개업 나와바리(일본말 ‘구역’) 정도로 생각했다. 마치 사도행전 3장 서두에 나오는 세상에 태어나 걸어본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과 흡사했다. 그 사람은 매일 성전 문 앞에 나왔다. 목적은 단 하나, ‘구걸’하기 위해서였다(행3:2). 그에게 성전은 구걸을 위한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이외의 것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요즘 강남 스타일이 세계를 흔들고 있다. 그 여파로 외국인들이 강남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한다. 강남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 배우기 위해서다. 이제 강남은 한국의 강남에서 세계의 강남으로 발돋음 하고 있다. 강남 스타일이 뜬 이유가 무엇인가? 강남이 가진 독특한 이미지로 승부한 것이다.

교회도 교회 스타일이 있다. 교회가 교회 스타일을 버리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사교 집단 혹은 사업 확장을 위한 좋은 먹이감 정도로 생각하게 만든다. 교회 스타일 이란 무엇인가? 답은 아주 간단하다. 교회가 잡다한 세속적 방법을 버리고, 예수 이름 하나로, 세상과 당당히 승부하는 것이다. 예수 이름 그 자체에 생명이 있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를 보라! 돈 대신, 예수 이름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모습을(행3:6).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뼈아픈 경험을 했다. 세상의 지혜를 동원해 사람들을 설득 하려다 실패한 것이다. 이후 그는 아주 단호해 졌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고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스타일 이다.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아브라함 이야기




아브라함의 불신과 완고함 / 창 17:15-22 (하)



말씀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9절에 보면, 하나님은 불신과 완고함으로 반응하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불신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앞세우고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도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말씀을 앞세우셨던 것입니다. 또한 19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이 초기의 것보다 더 구체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 12:2에서는, 단지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큰 민족’이 이삭이라고 이름 지어질 아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너무도 세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똑같은 모양이 아닌, 우리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점점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더 깊이 깨달아질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심아브라함이 아직도 눈에 보이는 이스마엘을 약속의 씨로 여기자, 하나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20절에 보면,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신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21절에서 분명하게 못을 박으십니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은 이삭과 세우리라.” 즉, 하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하고, 주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면 아주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덮개, 영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불신의 덮개가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삼상 15:22-23에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점을 보거나 우상숭배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큰 죄로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점보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완고한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의 완고함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완고함을 잘라버리고 믿음에 견고하게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완고함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축복받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완고함이 아니라 믿음에 견고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3 장 사랑과 결혼


돕는 배필 vs. 바라는 배필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는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도우려고 보내신 자, 즉 하나님의 ‘천사’라는 말이다. 남자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 우리 삶에 참 많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는 일이다. 온 세상 남자가 다 달려들어도 할 수 없는 일을 여자는 가볍게 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르게 설계하시고 만드셨다는 말이다. 나아가서 이 말씀은 약간 확대해서 남편과 아내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제 모든 사람이 결혼한다는 전제 하에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자.

 돕는 배필의 의미를 깨닫고 돕는 배필이 되기를 결심한 사람
 바라는 배필 (내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사람) 을 구하고 기대하는 사람

이 사람의 결혼 생활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행한 삶이 되어간다. 이 사람에게 배우자란 나의 부족함과 필요를 채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부족함이 나타나면 당연히 그것은 그 사람의 약점일 뿐이고 나에겐 불만의 요인이 된다. 상대방이 실수하면 전적으로 상대방의 잘못이고 나는 그를 꾸짖을 ‘권리’가 있다는 자세로 살아간다. 이 사람은 항상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꾸짖으며 불안하게 만든다. 배우자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일을 처리해도 늘 트집을 잡는다.
자녀들도 나를 위해 존재한다. 나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나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자녀들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 욕구가 최우선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말이다. 온 가정이 병들어간다.

(잠 19:13)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결혼을 망가뜨리고 지연시키는 또 다른 이유들

이것 외에도 결혼을 망가뜨리는 요인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요인은 부모들의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이다. 부모의 결혼 생활이 행복해 보이면 자녀들이 결혼에 대해서 긍정적인 자세가 되고 부모의 결혼 생활이 불행해 보이면 자녀들도 결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자세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제 몇 가지 이유들을 나열해 본다. (추가 설명은 생략한다.)

- 남자에 대한 망가지고 찌그러진 인상들 - 아버지, (외)할아버지, 오빠
- 여자에 대한 망가지고 찌그러진 인상들 - 어머니, (외)할머니, 누나
- 나의 망가지고 찌그러진 자아상 / 낮은 자존감 / 열등감 / 수치심
- 배우자 선택의 세상적인 기준들
- 기타 여러 환경적인 원인들
 가난과 기타 경제적인 문제들
 무너진 도덕과 윤리의 기준들
 신체적인 약점들
 부모의 간섭과 반대
 결혼에 대한 두려움 /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
- 망가지고 깨어진 부모 사이,,,
- 깨어져가는 주변의 가정들을 보면서 ,,,
 과거 실패한 관계로 인한 두려움
 성폭행, 성희롱 및 기타 성적인 상처로 인한 후유증
 자녀 양육의 두려움과 불편함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필객의 붓




그 어디나 하늘 나라



가을비에 세상이 푹 적셔지고 있습니다. 장대처럼 시원하게 내리 꽂히는 가을 비로 인해 낙엽이 아름답게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자연은 혼돈조차 멋지고 기품이 있습니다. UBC에 말씀을 전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 나서, 아름다운 가을 풍경 속에 놓인 집과 거리와 바다를 맘껏 누렸습니다.
몇 년씩 걸러, 몇 번 와 본 거리지만 올 때마다 변하지 않은 모습이라 곳곳에서 그 때의 추억들이 반갑게 손을 흔드는 것 같습니다. 반가움으로 젖어 드는 눈가에 겅중겅중 가고 있는 세월의 길고 야윈 다리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너무나 아름다운 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천국의 주인을 늘 마음에 모시고 사는 기쁨은 매사에 너무나 큰 능력이고 행복입니다. 천국은 죽음 이후에 가는 곳 인줄 알았었는데 지금 이 땅에서 나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형적들이 제 아무리 화려하고 인기와 명예와 권력이 대단한 것 같아도, 나의 천국 앞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눈 요기 마술처럼 품에 안고 누릴 수 없는 허상임이 너무 잘 보입니다. 오늘의 나에 이르기 까지 너무나 큰 사랑이 함께 하셨습니다. 젊은 객기로 미련하게 설레고 다투며 살아가는 중에도 완전한 은혜로 구비된 하늘 나라가 함께 움직여 주어, 고되고 어려웠던 시간들이 나를 기도하게 했고, 힘들었던 시간들이 나를 둥글게 가다듬어 주었습니다.

욕망에 눈 멀어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을 때는 내려가는 것이 높아지는 길이고,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며, 고난을 받는 것이 영광을 향해 나가는 길이고, 겸손해지는 것이 존귀해지는 것이며, 나를 거부하는 것이 나를 수용하는 것이고 세상의 지혜에 미련해지는 것이 진정한 지혜를 얻는 길이라는 가르침에 ‘뭐가 그래?’ 하는 반발심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내 뜻과 기분에 합당한대로 살아 보았지만 욕심 낼 때 짜증과 불만은 더 커지고, 사랑 받고 싶어할 때 더 상처 받고 형편없이 외로워졌으며, 높아지고 싶어 자랑을 떠벌릴 때 부끄러움으로 처박혔고, 내 잔을 먼저 채우려 재빠르게 움직일 때 밀침을 당했고, 사람들에게 매달릴 때 사람을 잃었고. 인정받고 싶어 안달할 때 외면당하고 버림 당한 기분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겠습니다.
하나라도 더 갖고자 움키고, 작은 손해도 보지 않기 위해 안달을 하며, 작은 억울함도 못 참는 세상에서, 겉 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 옷까지 벗어주며, 오리를 가달라고 염치없이 보채는 사람에게 십 리를 동행해주고,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도 돌려대며 내면에 울분이나 억울함을 쌓지 않는 것이 참된 이김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랑은 욕심 낼 때가 아니라 포기할 때 얻어지는 것이며, 상대를 존중히 여겨줄 때 나도 함께 존귀해지고, 상대의 잔을 행복으로 채워줄 때 나의 잔이 먼저 채워지며 나를 부인할 때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나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알아갈수록, 그 속에서 살아갈수록 너무나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 이름으로 인해 고생을 하고 굶주리고 환난을 만나고 억울함을 당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와 축복이 바로 이 신분입니다.

전 세계에 비축된 곡식 창고가 비어가고 있어 앞으로 식량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신문에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농산물 가격이 오르고 미국 쌀에서 발암 물질인 비소가 검출되었고 불산 유출 사고로 인해 구미의 곡물들과 짐승과 가축들도 버려지고 있다고 하는 기사를 읽으면서 성경의 표현이 신문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의 걱정이 이젠 더 이상 가난한 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의 절망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무장해야 할 시기입니다.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들의 백합보다 더 귀한 존재들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는 존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문의 영향을 받으며 절망하고 낙담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아래 있음을 담대히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 때 우리의 노래는 세상처럼 허무와 우울과 무기력이 아니라 믿음이고 도전이고 사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위기는 신앙 안에서 큰 기회입니다. 바람을 탓하고 바람을 피하려고 애를 쓸 일이 아니라 바람이 가져다 준 변화를 믿음과 지혜로 슬기롭게 대처해서 아름다운 변화를 일구어 내며, 염치와 정절로 자신을 단장하여 삶에 그리스도인 다운 향기를 더하고 안으로 깊이 무르익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레26;5)” 는 말씀은 실제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흔드십니다. 위대한 꿈을 꾸라고, 이 마지막 때에 구원을 위한 역동적인 기도를 시작 하라시는 것 같습니다. 지구본을 어루만지며 온 세상 사람들, 흩어져 있는 주의 몸 된 교회들과 어려움과 싸우고 있는 사역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내 영혼에 맑고 평온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나의 앞으로의 세월에도 천국이 따를 것이기에, 아름다운 여행을 예약해 놓은 사람처럼 늘 천국을 그려보고 엿보고 미리 그 속에서 노닙니다. 아버지가 계신 완전한 행복의 처소를 향해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나의 모든 순간이 즐거운 기대와 소망, 큰 안식의 시간입니다.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