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종교성 강화되면 사회 나아질 것”



“종교성 강화되면 사회 나아질 것”, 미국인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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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대다수는 미국 사회에서 종교가 영향력을 잃고 있다고 느끼면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종교성이 강화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은 기독교 전통이 뿌리 깊은 나라여서 종교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가리킨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최근 미 전역의 성인 1535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77%가 “종교가 미국인의 삶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있다”고 응답했다고 30일 밝혔다.

종교의 영향력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1950년대 이래로 가장 부정적인 결과다. 종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응답은 20%에 그쳤다.

이 같은 인식은 교회에 자주 출석하는 사람이나 안 하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개인의 삶에서 종교가 아무리 중요해도 사회적 차원에서 느끼는 종교의 영향력은 약화되는 추세가 뚜렷한 것이다.

이런 추세에는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 동성애와 낙태 옹호론자들이 기세등등해진 세태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기독교적 가치관에 반하는 이슈들이 공공연히 용인되면서 자연히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것이다.

이전 조사를 보면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으로 반전여론이 치솟고 히피문화가 휩쓸던 1969년에도 종교의 영향력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75%로 매우 높았다. 반면 ‘종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응답이 최고치(71%)를 기록했을 때는 2001년 9·11 테러로 미국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던 시기였다. 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초반인 2005년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집권기인 1980년대 등 사회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했을 때 종교의 영향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우세했다.

이번 조사에선 “더 많은 미국인이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사회에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이란 대답이 75%를 차지했다. 종교의 잠재력에 대한 긍정적 견해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의미다. 조사 책임자인 프랭크 뉴포트는 “미국인 대다수가 종교의 영향력이 퇴색한 현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미국보다 긍정적인 편이다. 지난해 11월 불교사회연구소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50.2%가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가했다”고 답했으며, 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로 개신교(43.3%)를 꼽았다.

올해 초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종교생활·의식조사에서도 “개신교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응답은 43.8%를 차지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
 
 
 
 
 

교회음악 Plus


 

교회 안의 찬송은...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흔히 교회음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조건 교회 안에 있다고 교회음악은 아니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과 바른 목적에 맞지 않으면, 이는 교회음악이라 할 수 없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 무분별하게 음악들이 들어 오고 이들이 교회음악으로 자리잡으려고 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교회음악인들이(목회자, 지도자들도) 교회에 대해서 먼저 바로 알고 신앙을 바로 가지고 음악에 대한 선별과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회음악인들은 음악을 알기 전에 먼저 교회에 대하여 그리고 그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한다.
찬양(Praise) 안에는 감사, 감사(Thanks) 안에는 구원, 구원(Salvation) 안에는 십자가, 십자가(Cross) 안에는 보혈, 보혈(Blood of Christ)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Love)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할렐루야!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New Korea Season! (4)


오늘도 주의 나라를 세워가시는 밴쿠버의 모든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오늘도 호흡이 있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하고 여쭤보며 한민족의 통일을 위해 더욱 기도의 끈을 동이는 우리네 삶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주까지 저는 New Korea Season이라는 음성을 듣게 된 초창기 NK100일중보기도의 시간을 회상하면서, NK100일중보기도의 미션을 받았던 북한선교캠프(현재 통일비전캠프로 매해 진행되는 캠프)에서 첫 날 첫 예배 때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 은혜는 2006년 이스라엘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부르셔서 ‘거룩과 기름부으심’의 코드로 ‘한반도 부흥의 키는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고, 열방의 부흥의 키는 한반도가 통일되는 것’이라는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신 하나님의 예비된 은혜였음을 나눴습니다. 이 일이 먼저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NK100일중보기도를 하면서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3) 북한을 위한 100일기도를 시작하라!
  2008년 2월 북한선교캠프에 참석한 첫날 첫 예배에서 저는 지난 두 주에 거쳐 나누었던 감격을 아주 짧은 시간에 온 몸으로 전율하며 받았었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나에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라는 대목에서 2006년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간 것이죠.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찬양의 가사(사 61:1-3)처럼 내게 기름을 부으시는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 된 자에게 주님의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주님의 신원의 날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저는 울고 또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고 그래서 거룩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흐느껴 울며 감격하는 그 때에 또렷한 한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북한을 위한 100일기도를 시작하라!”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흐느껴 울다 말고 저는 바로 질문했습니다. “네? 북한을 위해서 100일기도를요?” 그리고 주님과의 주고받는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은 알겠지만 왜 하필 100일인지 저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예배 중에 계속 물었습니다. “왜 하필 100일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40일도, 21일도 아닌 왜 100일인지 알려주십시오.”
  그렇게 첫날 씨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한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008년 2월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경유했던 중국에서 저는 북한으로 오랫동안 다니시며 사랑으로 선교하시는 한 목사님을 뵙게 되었는데 그 분과 차안에서 주고받았던 아주 짧은 내용이었습니다. 캐나다로 강의가 있어 떠나시는 그 선교사님을 배웅해드리고자 함께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은 혼잣말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정말 큰일이야. 태양절 100주년이니 어쩌니 하면서 북에서는 강성대국 건설한다고 또 우리 힘없는 인민들을 닦달하고 있으니...” 북녘의 백성들을 향한 그 선교사님의 애절한 마음을 금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스쳐들었는데, 글쎄 왜 100일동안 기도해야 하는지 집요하게 묻는 저에게 성령님은 그 차안에서 들었던 내용을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순간 저는 ‘아! 태양절 100주년 때문이었구나!‘ 라고 눈치 챈 다음 대체 태양절 100주년이 언제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태양절 100주년은 아직 5년이나 더 있어야 하는 2012년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 또 따지듯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아니 주님, 태양절 100주년은 2012년이고 지금은 2008년인데 왜 벌써 말씀하십니까?” 그랬더니 주님은 “그들이 태양절 100주년이라고 저렇게 여전히 내 앞에서 목을 곧게 하고 ‘강성대국’(경제강국, 군사강국, 사상강국)을 세운다고 하는데 지금부터 기도해야 하지 않겠니? 내가 저 땅의 우상숭배의 뿌리를 뽑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설득력 있는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일단 100일이라는 기간과 기도를 시작해야 함에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20 장   유산의 공포를 체험한 사람들

 
“유산의 공포”라는 제목을 보면서 산모가 유산을 앞에 놓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말이 아니다. 이 공포는 뱃속에 있는 아이가 경험하는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다.
 
태아는 잉태가 되고 -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 아주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받아먹으면서 또 밖에서 들리는 수 많은 음성과 대화를 이해하면서 자라난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증명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 전에 그 비밀을 알고 태교를 강조한 것이다.
 
종전 칼럼에서도 자세히 설명했지만 「태교 신기」에 이런 말씀이 있다.
 
     임산부가 성낼까 두려우니 분한 일을 들려주지 말고
     임산부가 무서워할까 두려우니 흉한 일을 들려주지 말고
     임산부가 걱정할까 두려우니 어려운 일을 들려주지 말고
     임산부가 놀랄까 두려우니 화급한 일을 들려주지 마라
 
태중의 아기는 엄마의 말은 물론이고 그 생각과 마음까지도 다 이해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능력이다. 뱃속의 아기는 엄마의 유산에 대한 생각과 시도를 다 알고서 결사적으로 엄마를 붙잡고 살아남으려 투쟁을 벌인다. 실제로 인공 유산을 시키려고 기계를 자궁 속에 밀어 넣으면 태아가 최선을 다해서 그 기계를 피해다니는 모습을 과학자들이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엄마가 유산을 생각하고 구체적인 시도를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기에게는 충격 그 이상이다. 지금까지 아기는 엄마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왔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었고, 살 집을 주고, 모든 음식을 공급해 주던 사랑의 엄마가 이제 별안간 돌변해서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배신감은 말할 수도 없다. 피할 방도도 없다. 그냥 좁은 자궁 안에서 그 시련을 견디어 내어야만 한다. 살아나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가 잠시라도 그 아이의 처지가 되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된다. 사람에 대한 모든 신뢰가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그 아이는 계속해서 이렇게 독백을 할 것이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어. 나 혼자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거야.”  그러면서 깊은 우울에 빠져 들어간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대인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그 가까워짐을 받아들이기가 겁이 난다. 그 사람이 꼭 자기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가까워지기 전에 먼저 거부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화장실 숫자만 늘리다 죽은 인생 1.  

 

-  무엇이 되고 싶니? (누런 금메달)

 
 
우리 가정이 선교지로 출발할 때 둘째 아이는 생후 20개월쯤 되었었다. 아들이 자라자 언젠가 나는 다른 아버지들이 하는 것처럼 “너는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니?”라고 물었다. 그 때 5살쯤 된 아들은 스스럼없이 버스 운전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소방차나 대형버스 운전사도 아닌 ‘마슈르트까’.... 마슈르뜨까는 우리가 살던 지역에 12인승 마이크로 버스로 도시의 거점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이었다. 적잖게 실망한 나는 속내를 감추며 “왜 굳이 마슈르뜨까 운전사가 되고 싶니?”라고 물었다. “아빠, 마슈르뜨까 운전사는 돈을 많이 벌잖아요! “아니, 무슨 운전사가 돈을 많이 번다고 그래?” “아빠! 엄마랑 시장 갈 때마다 마슈르뜨까 타는데, 앞 사람이 바구니를 돌리면 차에 탄 모든 사람들이 돈을 담아 운전수에게 건네주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돈을 많이 벌겠어요!”

어쩌다가 목사, 선교사의 아들이 돈을 벌어보겠다고 운전사가 된다는 건지? 나는 그런 작은 꿈 말고 큰 꿈을 꾸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더 큰 꿈을 가지게 할까 생각하던 나는 바로 “얘, 운전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겠니, 아니면 그 버스를 수 십대, 수 백대를 운영하는 버스회사 사장이 돈을 많이 벌겠니?  “아빠, 버스회사도 있어요? 그러면 나는 버스회사 사장될래요. 그래서 돈을 많이 벌래요”

왜 돈타령인지? 이유는 금방 감이 잡혔다. 현지생활 수준에 맞게 생활하다 보니 아들 놈이 좋아하는 장난감 ‘레고’며, 노란 바나나를 사주질 않고 지내다 보니, 아들은 선교사의 가정은 늘 가난해서 그런 것을 부모님이 사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나는 막막하기만 했다.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이 한 창일 때 선교지에서도 응원열기가 대단했다. 아들은 머리에 띠를 띠고 “대한민국, 짜작짝 짝짝!’을 연발하며 드라마틱하게 4강에 올라가는 한국팀을 응원했다. 결국 브라질이 우승을 했다. 브라질 축구팀은 우승컵을 높이 들어 올리며,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아 언더 셔츠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등의 글귀를 새기고 나와 전세계에 하나님을 증거했다.
 
월드컵이 끝나자, 한국에서 선물로 붉은 악마들의 빨간 셔츠가 도착했다. 둘째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말자, 가방을 집어 던지고 붉은 옷을 갈아 입고서, 집 근처에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200미터 트랙을 30바퀴 돌고, 턱걸이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를 불러 축구 골대 앞을 가로 막고 서서는 패널티 킥을 차라는 것이었다. 왜 이러느냐고 묻자, 자기는 거미 손의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래! 브라질 선수들이 하는 것 봤지! 우승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을.” 나는 그래도 아들의 새로운 꿈이 운전사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흥분을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나를 당황케 했다. “아빠! 죄송해요. 전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금메달을 따고 싶어요!” “금메달, 좋지! 그래서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하는 거야?”  “예! 금메달이 얼마나 비싼 되요. 저도 금메달 따서 부자가 되고 싶어요!”.
나는 기가 막혀 “야! 이 녀석아! 브라질 선수들이 목에 건 금메달은 돈으로 따지자면 그 사람들이 받은 연봉에 비하면 껌 값이야!”라고 했지만 연봉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들은 변함없이 누런 금메달이 달러로 얼마나 되는지 집요하게 물었다.
 
안식년을 맞아 한국으로 온 아들은 매일 학교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국학교라곤 다녀 본적이 없어 받아쓰기는 늘 50점을 밑돌았지만, 반에서 골키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아들은 눈치를 살펴 내가 좀 자유롭다 싶으면 나를 놀이터 모래사장으로 불러내곤 했다. 여러 개의 테니스 공을 구석으로 던지면 날렵하게 다이빙을 해 막아내는 훈련을 수 없이 했다. 그래서 집안은 온통 모래투성이였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갈 때 제일 먼저 챙겨 간 것이 축구공과 그리고 모형 우승컵, 골키퍼용 손 장갑이었다. 선교지로 돌아온 후에도 운동장을 뛰는 것과 철봉연습은 매일 빠뜨리지 않는 아들의 일과였다. 그 때까지도 아들에게는 금메달은 인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누런 금송아지로 보였던 것이다.
 
그 해 겨울 방학을 맞아 나는 가족을 태우고 먼 사역지로 운전하여 가고 있었다. 새벽에 출발한 차는 20여 시간 운전을 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스텝지역과 사막을. 좁은 승용차에서 지루해 지기 시작하자 무료함과 졸음을 깨우기 나는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카세트를 꽂았다. ‘샘물 호스피스’ 원장인 원주희 목사의 강의 테이프였다. 틀자마자 거기엔 기막힌 이야기 하나가 소개되었다.
 
샘물 호스피스에 중년의 여성 말기암 환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원장은 이 여성에게 “이제는 마지막을 준비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자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악을 쓰면서 “나는 못 죽어요! 어떤 X 좋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악에 받친 대답에 놀란 원장이 차근차근 그 여인의 지난 삶을 캐물어 보았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필객의 붓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홈통을 타고 흐르는 빗물소리에 새벽을 맞는 동네가 물 위에 둥둥 떠있는 느낌입니다. 빗물에 번지는 포근한 불빛 앞으로 분사되는 투명한 빗방울을 보고 있으니 새벽 하늘이 흘린 눈부신 비늘이 땅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몇 일째 내리는 비에 부쩍 우거지고 푸르러진 풀과 나무들처럼, 지붕아래 깃든 인간들도 저 맑은 물에 씻겨 탁해진 영혼이 맑아지고 어두워진 총명이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나누며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각자의 담장에 갇혀 마음에 짓눌리고 힘들어하지 않고 살 수 있을텐데, 이웃의 얼굴도 잘 모르고 살 정도로 우리는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갑니다. 관계에서 단절되면서 사람들이 점점 이상 성격으로 변해가고 있고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허리가 휠 정도로 무거운 죄짐을 지고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도 없이는 정신을 가눌 수 없어 늘 기도를 갈망하면서도 막상 기도하려 앉으면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광야에 표류하여 어디로 방향을 잡고 발을 떼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무엇부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늘 난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할까를 물어 우리 주님께서 기도의 본을 남겨주셨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접했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친구를 따라 갔던 여름 성경학교에서 받은 책받침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 사진 옆에 쓰여진 주기도문을 통해서입니다. 그 이전에 단 한번도 교회에 가본 적 없는 나였지만 그 말들은 세상의 언어와는 다른 신성한 기운과 함부로 할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미신적인 분위기에서 삼재나 액땜이나 부적이란 말을 들으며 귀신을 무서워하며 살던 나에게는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말이 무척 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악이란 알아갈수록, 살아갈수록 더욱 악하고 잔인하고 몸서리쳐지도록 무서운 것임을 깨닫습니다.
 
죄를 심상히 여기며 웬만한 죄는 죄로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서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죄를 싸고 있는 포장이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워 아이들은 죄악의 형상을 흠모하면서 자라납니다.
남자 아이들이 귀를 여러개를 뚫고 화장을 하고 눈을 그리기까지 하는 것이 이제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여자들까지 문신을 하고 야한 옷과 음란한 몸놀림을 하는 것이 별 거부감 없이 먹혀들어가고 있고, 욕이 아니면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아이들의 언어가 망가져있습니다. 노골적인 폭력과 음란의 문화에 쩔어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반항으로 눈빛이 날카로우면서도 총명의 빛이 어두워져 게슴츠레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게임을 끊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말고 노래를 듣지 말라고 하면 ‘그럼 나보고 죽으란 말인가’ 하는 얼굴로 뜨악해합니다. 어른들마저 죄도 짓지 않고 심심하고 따분해서 어떻게 사는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재미가 없을 것이라 동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양식은 쾌락이나 재미가 아닌 진리와 거룩함입니다.
 
성경을 19금의 책으로 하는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서명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쓴, 성경을 폄하하고 비방하는 글을 읽으면서 정말 마지막 때의 징후 중 가장 뚜렷한 징후를 보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나쁜 쪽으로 부각시키며 일리(?)가 있게 써놓았는지,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합니다. 세상에 악이 충만하다는 성경의 표현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합니다. 도대체 세상이 어때서..?  이 편한 세상.. 이 아름다운 세상.. 이라는 긍정의 문구에 익숙하며 아직도 세상은 나쁜 사람들보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으며 갖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도 많은,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극단적이고 광신적이며 혐오스러운 표현이라고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과격한 표현들을 피하고 슬그머니 긍정의 언어들과 섞어 그 의미들을 누그러뜨렸습니다.
이 세상 신은 사람들을 욕망으로 충동질해서 악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들면 사람들은 그 어떤 지혜의 말이나 눈물의 호소로도 설득할 수 없을 정도로 미련해지고 앞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결국 죄는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키고 신의 성품을 썩음으로 오염시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음이 악이요 고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음이 바로 악인 것이고 고통입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제는 좀 됐나 싶으면 여지 없이 나의 허물과 죄가 나옵니다. 양파껍질 처럼 죄와 허물과 더러움과 부끄러움은 까도까도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내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죄악을 멈출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영이 내 생명의 주체가 되시기에 더이상 죄가 나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오늘도 예수님의 한없이 온유하고 평온한 음성이 나를 너무나 영광스러운 은혜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허무로 짙은 그림자 나라에서 시간에 허덕이며 사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이지만, 오늘도 예수님의 영이 나를 악에서 건져주시며 성령님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를 덮으시라는, 과감한 기도를 하늘로 쏘아 올립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건강 칼럼



 
 
 
 
 
 
 

養生 十六宜  (2)

 
5. 齒宜常叩 (치의상고)
이를 강하게 하고 잇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이를 자주 맞부딪힌다. 이를 가볍게 탁탁 부딪치면 이와 잇몸이 튼튼해진다. 위아래의 이를 서로 부딪쳐서 소리가 나도록 하는데, 먼저 어금니를 하고 다음 앞니를 한다. 각각 18번씩 한다. 아침 저녁으로 할 수 있다.

6. 舌宜舔顎 (설의첨악)
혀로 자주 입천장을 핧는다. 혀로 입천장 여기저기를 핧으면 혀 안에서 침이 생겨 입이나 혀가 마르지 않고, 아울러 소화도 잘 된다. 혀끝으로 입천장에 대고 전후좌우로 침이 고일 때가지 핧는다.

7. 津宜數咽 (진의삭인)

침을 자주 삼킨다. 침을 자주 삼키면 오장의 기능을 도와서 건강해진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핧은 뒤 입을 부풀려 침을 입안에서 양치질하듯이 머금었다 꿀꺽꿀꺽 소리를 내면서 삼키는데 마음속으로 배꼽 아래 단전으로 내려 보낸다고 생각한다.

8. 濁宜常呵 (탁의상가)

탁한 기운을 자주 내 뱉는다. 기를 원활하게 소통시킴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은 것을 없애준다. 입을 다물고 코로 깊게 숨을 들이쉬어 가슴과 배가 불룩하게 솟아 숨이 가득 들어차면 꾹 참고 멈추었다가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려 탁한 기를 단숨에 내뱉는다. 이처럼 맑은 기운을 들이마시고 탁한 기운을 내뱉는 것을 5~7번씩 반복한다.

9. 大小便宜緊口勿言 (대소변의긴구물언)

대소변을 볼 때 입을 꼭 다문다. 아래위가 마창나게 뚫린 상태로 두면 기가 빠져나가 허한 상태가 되기 쉽다.

10. 腹宜常摩 (복의상마)

배를 자주 쓰다듬는다. 소화기능을 돕고 배를 따뜻하게 하며, 기가 제대로 돌고 쌓인 것을 풀어줄 수 있다. 두 손을 비벼 뜨거워지면 손을 포개서 살에 직접 닿거나 속옷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의 한가운데를 배꼽에 댄 다음 시계방향으로 돌리면서 문지른다. 먼저 작은 원을 돌리다 점점 크게 돌린다.

11. 谷道宜常提 (곡도의상제)

항문을 자주 오므려 올린다. 기운을 끌어올리고 치질과 요실금을 예방할 수 있으며 젊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몸을 똑바로 세워 앉은 다음 정신을 몰두하고 숨을 돌이쉬면서 의도적으로 항문과 회음 부위를 오므리면서 올렸다 잠시 멈추고 숨을 내쉬면서 힘을 빼는데 수시로 하면 좋다.

12. 足心宜常擦 (족심의상찰)

발바닥을 자주 비빈다. 발바닥의 위쪽 1/3오목한 부분 한가운데는 용천혈이 있는 곳인데 항상 문지르면 신(腎)장을 튼튼하게 하고, 허리가 강해지며, 스트레스로 화(火)를 끌어내리고 정신을 맑게 한다. 저녁에 발을 씻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양쪽 발바닥을 천천히 문지르는데 뜨거워질 때까지 문지르고 50번 이상 문지른다.

13. 衣膚宜常乾浴 (의부의상건욕)

살갗을 자주 문지른다. 살갗을 맨손이나 부드러운 마른 수건으로 문지르면 기혈순환을 도와주고 살결이 윤기 있어지고 탄력이 좋아진다. 두 손바닥으로 온 몸의 살결을 닦듯이 문지른다. 외기로부터 외사를 방어하는 위기가 강하게 하면 감기와 피부병을 방지 할 수 있다.

14. 肢節宜常搖 (지절의상요)

등을 대고 누워서 팔다리를 들고 자주 흔들어 준다. 사지는 제양지본이고 이 운동을 자주함으로 손발의 붓기를 내리게 할 수 있다.

15. 背宜常暖 (배의상난)

등을 따뜻하게 한다. 오장육부의 배수혈을 포함하는 12경락 중 방광경 1,2라인이 있기 때문에 따뜻하게 함으로 기혈의 순환을 돕고 감기를 예방하기 위함이다.

16. 胸宜常護 (흉의상호)

가슴을 드러내지 않고 보호한다. 주요 장기인 폐장, 심장, 간장을 보호하고 외사로 한기로부터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클로버데일한인교회 담임 / 엘림한방클리닉 원장 R.Ac, TCM.P / 604-441-6934]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사회적 복음

얼마 전 한 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무엇입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흔히들 언급하는 대형 교회들의 재정 투명성의 문제점을 지적할까요? 아니면 목회자의 세습 문제를 이야기 할까요? 요즘 밴쿠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몇 몇 선교단체들의 자기만족의 함정에 빠져버린 잘못된 선교전략을 들 수도 있고, 지나치게 은사의 체험에만 집중하는 흐름을 우려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이라고 꼽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복음의 선포와 선교를 이야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며 왜 ‘사회적 복음’이 한국교회에 부족한 점이냐고 반론할 수 도 있겠습니다. 저 자신도 목사이지만 강단에서 선포되는 목회자의 메시지를 분류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비중으로 Social Gospel이 선포되고 있습니까? 혹시 선포되는 복음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개인 영혼의 구원에서 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안겨 주신 그 거룩한 복음의 선물을 반토막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성도 분들을 만나 대화하다 보면 생각 외로 많은 분들이 ‘사회적 복음’에 대해 낯설어 한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분께는 사회적 복음을 두고 ‘좌익이냐?’‘빨갱이 아니냐?’ 라는 말까지 들은 적도 있습니다. ‘사회적 복음’을 따로 특별하게 포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경계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뜻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이요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가 바로 사회적 복음입니다. 의미를 조금 좁혀보자면, ‘정의(Justice)’가 되겠고 공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중요성은 구약의 선지서를 통해서 얼마나 강조되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모스서 5장 21-23절에 이런 말씀이 선포됩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절기와 성회도 넓게 보아 예배를 뜻함이고, 번제나 소제도 예배를 말함입니다. 어떤 분은 화목제를 감사의 예물이니, 감사헌금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감사예배’라고 하고 싶습니다. 노랫소리와 비파소리는 당연히 찬양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찬양을 듣지 아니하시겠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어지는 24절의 당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우리가 사회적 정의를 지키지 않고 공의를 어기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도 듣지 않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뿐입니까? 5절에서 언급되는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의 예배 중심지였습니다. 주로 이스라엘의 부유한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명예로운 자들이 나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역시 곧이어 이유가 밝혀집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들에게 정의가 없고 공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회적 복음’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않으시겠다고 하실 때는,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해서, 찬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정의와 공의를 지키지 않아서 입니다.
사회적 복음에 부딪히는 간단한 예를 한 번 들어보자면, 우리 삶에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 중 ‘주일성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 밴쿠버에서 주일성수는 엄격한 주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주일성수 못하는 성도를 정죄해 본적은 없습니다만, 그것은 신앙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주일성수가 중요하지 않아서는 아닙니다. 그런데 소수의 몇몇 분들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는 열어서 직원들을 시켜서 운영하고 자신은 예배에 참석하여 주일성수 한다고 하는 것을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일성수 하는 것일까요?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예배드리지 않는 것보다는 예배드리는 것이 낫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 복음의 측면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이 주일을 온전히 지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될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돈을 주며 예배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이지, 죄를 줄이고 위선으로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를 의롭다 하신 것도 같은 원리 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실 때는 자신 만이 아니라, 가족과 일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머무는 손님까지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나만 혼자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구원 받았으니 다른 이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 이유인데, 그 동일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진 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저 사람을 내가 가진 것이 많다고, 힘이 조금 더 있다고 핍박하고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나만 홀로 구원받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구원받고 더불어 잘 살아 가는 것,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사회적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충성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용균 목사 / 밴쿠버한마음교회 / 778-554-9003]
 
 
 
 
 

아브라함 이야기



문제, 해결 그리고 신앙고백/ 창 24:2-9 (하)

맹세의 내용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과 족속에게로 가서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을 맹세하라고 하였습니다 (창 24:4). 아브라함의 원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란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겼기 때문에, 훗날 아브라함의 종은 갈대아 우르가 아닌 하란으로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시키는 대로 맹세를 한 후, 아브라함의 종은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일에 대비하여 질문을 합니다. 즉, 만약에 자신이 택한 신부감이 가나안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삭을 데리고 하란으로 가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는 아브라함과 종과의 대화를 통해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천지의 주재이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3절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여기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땅과 하늘을 지으신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는 종으로 하여금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게 맹세하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종에게만 그런 맹세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미 오래 전에 소돔 왕에게 똑같은 맹세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창14:22). 이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이 가식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능력은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과 거룩함에서 비롯됩니다.
2. 불러주시고 소명을 주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7절에 상반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종에게 고백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이것은 욕심과 고집대로 살아가던 나를 불러주셨을 뿐 아니라 살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고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바로 천지와 우주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진화론은 우연을 믿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필연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처럼, 오늘 우리가 신앙인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인으로 견고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3. 약속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7절 하반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는 것은 마지막 시험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창 22:16). 여기서 맹세란 반드시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을 불러주시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에,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다시 한 번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7절).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사자가 너를 인도하지 않아, 신부감으로 정한 여자가 가나안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삭을 데리고 가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나를 불러주셨고, 말씀하셨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부모 공경을 통한 장수의 약속과, 주일성수를 통한 평안의 약속과, 기도를 통한 응답의 약속과, 십일조를 통한 축복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믿고 고백하고 순종함으로 범사의 복을 누렸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고백,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범사가 잘 되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