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일 토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7 >









0083. 프랑스의 두 마을 이야기(1): 산골 마을 ‘샴봉’
제2차세계대전시 유대인 3,500여명을 숨겨 돌봐준 『위그노』마을
로마교황청이 프랑스의 왕권을 동원하여 거의 한 계절 동안 계속 된 성 바돌로메 대학살로 인해 남불(南佛)로 피신하여 살았던 위그노(Huguenot)와, 역시 로마교회의 끊임없는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피신하였던 보드와(Vaudois/Waldensian)들의 유적들을 찾아나섰다. 22년 전의 일로 아무에게도 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글로 쓰고 있다. 지역들이 너무 광범위하여 두 곳을 먼저 보기로 하고 프랑스의 남동부 지역의 세벤느(Cevennes) 산악지대에 위치한 구릉지대(les Plateau)에 가까운 인구 3천 여명의 마을 『샴봉』(Le Chambon-sur-Lignon)에 도착하였다. 상세한 프랑스 지도가 아니면 표기가 되어있지 않는 산골로써 주민 거의가 위그노들의 후손들로서 매년 9월 첫 주가 되면 전세계에서 위그노들의 후손들이 이곳 산골로 모여 천주교회의 박해를 피해 산 속에서 숨어 살면서 믿음의 주(主)를 찬송하였던 저들의 선진들의 믿음을 기리고 있었다. 산골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니 눈물 겨웠다. 워낙 먹지 못하고 쫓겨다닌 위그노들의 지도자 - 목사, 장로, 집사 - 들의 평균수명이 47세를 넘지 못한 때였다. 노예선으로 끌려가 바다에 수장된 성도들의 명단 수백 명이 색바랜 종이 위에 기록되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발발 하루를 앞두고, 이곳 교회로 부임한 프랑스 개혁교단 소속의 트로큼(A. Trocme)목사 부부. 그는 이곳 저곳 농경지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있었던 성도들의 구역성경공부 지도를 위해 13개의 구역과 지도자들을 세웠다. ‘히틀러의 교황’ 『비오』12세의 로마교황청을 통해 나치는 프랑스의 우방으로 선전되고 있었고 친 나치 포스터들이 온 프랑스에 나붙고, 일부 ‘레지스땅’들의 반격 외에는 나치는 총성 한 방 울리지 않고 빠리 개선문 아래로 진군하였다. 로마교황청의 ‘20세기 십자군 나치’를 통한 전유럽천주교화의 계획이었다. 나치의 진군으로 프랑스도 이제는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나라가 되지 못하였다. 스위스로, 미국으로, 남미로 멀리 떠난 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 나라안에서 ‘도피성’을 찾아야만 하였다. 천주교회에 의해 대량 학살당하고 『빠리』거주가 불법으로 선언되었던 위그노들. 유대인들은 저들과 같은 운명을 이미 경험하였던 위그노들의 산골마을로 한 두 명씩 찾아들기 시작하였고 『샴봉』의 산골사람들은 그들에게 은둔처를 제공하였다. 이 소문이 유대인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이제는 유대인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이 마을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전교생이 14명에 불과하였던 산골초등학교의 유대인들이 들어오면서 학생 수가 220명을 넘게 되어 증축이 불가피 하였다. 트로큼 목사의 지도 아래 동네사람들이 증축한 학교교실은 전시에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충당하여 여름캠프장 숙소같이 조그만 건물들이었다.

트로큼 목사는 깊은 번뇌 속에서 기도에 몰입하였다. ‘산상수훈’을 읽었고 ‘누가 네 이웃이냐?’라는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였다.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누구나 유대인들과 같은 운명을 각오해야만 하였다. ‘구약들’(舊約, Old Testament, 산골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구약들’로 불렀다)은 매일매일 『샴봉』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트로큼 목사의 마음은 확정되고 확정되었다.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저희들에게 보내주시는데 어떻게 저희들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13명의 성경공부 구역장들과의 연락망도 조직되었다. 스위스나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는 유대인들은 교인들이 비밀 루트를 통해 스위스나 스페인 국경까지 인도하였다. 그리고 단 한 푼의 금전도 요구하지 않았다. 로마카톨릭교회를 통해 조국 프랑스를 나치에 매도한 ‘빼땅’(Petain)정권의 새 수도 ‘비쉬’(Vichy)는 이 마을에서 불과 140키로 떨어진 서북편에 있었다. 비록 산골이기는 하였지만 나치의 비밀경찰(Gestapo) 주둔지역과 너무나 가까웠다. 예기치않은 나치의 순찰이 오기 전날에는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트로큼 목사에게 꼭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내일” 그리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전 유대인들은 깊은 숲속으로 피신하였고 비밀경찰이 철수하면 『샴봉』마을 성도들은 교회로 모여 하나님의 돌보심을, 온 감격으로 찬송하였다. 이 찬송소리를 신호로 숨었던 유대인들은 다시 숲을 빠져나왔다. 필자가 들어가본 숲은 나무는 크지 않았으나 대낮에도 햇빛이 차단될 정도로 빽빽한 숲이었다. 후에 트로큼 목사와 마을 지도자 2명 포함 모두 3명의 지도자들이 나치 비밀경찰에 구속되어 수용소에 갇혔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독일의 패전을 앞두고 죄수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재수용되기 일주일 전, 이들 3명은 수용소의 서류처리 미비로 기적적으로 석방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1940-44년 사이에 트로큼 목사의 지도 아래 이 마을에서 목숨을 건진 유대인들의 수는 무려 3,500명이 넘었다. 이 마을을 거쳐 이스라엘로 돌아간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자신들의 은인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게되었고 1979년에는 이 곳 마을 중심거리의 담벽에 기념헌판을 부착, 저들을 구해준 샴봉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시하였다. 시편 말씀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시편 112:6)는 히브리어와 프랑스어로 기록하였다.


이곳에서 태어난 유대인 ‘소바지’(Sauvade)씨는 영화제작자가 되어 이 마을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영화 ‘Weapons of the Spirit’을 제작함으로써 거의 반세기 만에 이 이야기가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이곳에 조사단을 보냈다. 그러나 주민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트로큼 목사 내외를 도와 구약백성들을 숨겨주었던 젊은 베텍스(Bettex)목사도 이제는 팔순(당시 78세)을 바라보고 있었고 『샴봉』부읍(邑)장 등 주민 40여명은 이스라엘 정부 초청으로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 유대인 대학살 추모기념관)에 새겨진 ‘『샴봉』마을 기념헌판식’에 참석하였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들 구출에 생명을 걸었던 이들에게 『의(義)의 메달』을 수여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정부는 “우리가 당신들의 선행을 폭력(?)으로 노출시키고자 한 행동을 정중히 사과합니다”라는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영화제작자로 성장한 ‘소바지’씨의 가족을 숨겨준 마리 브로뜨 할머니 집을 방문, 한나절 대화를 나누었다. 이 할머니의 친아들은 어린시절에 시도 때도 없이 어머니로부터 회초리를 맞았던 이야기를 필자에게 들려주었다. 혹시나 어린 아들이 ‘너희집에 유대인이 있지?’하고 누가 물으면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며, ‘있다’고 대답하면 이렇게 호되게 맞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실제로 어머니로부터 회초리를 여러 번 맞았다고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그는 장성하여 그 지역의 중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0084. ‘교리를 부패하게 만드는 유전들’
유전은 교리(敎理)를 부패케 한다. 인간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선에 올려 놓고 외경(外經)을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였던 가장 사단적인 『트렌트』공회(1545-63). 그 후 “미혹케하는 영과 마귀의 교리를 좇아”(딤전4:1) 로마카톨릭교회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리”(계2:14,15)들을 제정한 이 “사단의 회”(계2:9)가 어째서 거룩한(?) 기독공회란 말인가? 이러한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행2:42)을 벗어나 “지내쳐”(요이1:9),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벗어났다. 진정한 교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확정한 것들로서 우리에게 온전한 교리로 주어졌다. 사도들은 후에 올 공회들에 앞서서 교회의 생명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기록한 자들이었다. 딤후3:16,17 말씀은 우리를 “온전케”하시는 교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 어느 교단 할 것 없이 기독교 신학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아시아의 일곱교회를 심판하듯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아래 있다. 그러나 천주교 신학에서는 성경은 ‘교회의 책’이 된다. 즉, 로마교황 아래 예속된 책으로 교황의 권위 아래 종속된 책에 불과하다. ‘성경과 유전’을 언급할 때 성경은 늘 소문자(scripture)이고 유전은 대문자(Tradition)로 기록된다. 로마교황청의 ‘유럽 공동체’(EC)는 2006년 8월을 기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두 단어 기술을 그리스도는 ‘소문자’(christ)로 쓰기로 결정, 강제로 시행되고있으며 교회는 천주교의 전통대로 그대로 대문자(Church)를 고수하고 있다. 이제 세계종교통합을 주도, 모든 종교 안에 ‘메시아’(그리스도)의 존재를 인정할 채비를 마쳤다.


바람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기뻐하라 나라들 예수 구원하신다
구원하는 소리를 산과 들에 전하라
우리들의 승전가 예수 구원하신다
(찬송가 252 / 기쁜 소리 들리니 ④)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교회음악Plus











교회음악이란


음악이 교회 안에 있다고 다 교회음악은 아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교회에서 사용한다고 하나, 교회음악인 것처럼 위장하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음악들도 있다.

세상의 음악은 서양 음악, 동양음악, 전통음악, 클라식(고전음악), 째즈음악, 불루스, 탱코, 디스코, 락, 헤비메탈, 국악등으로 분류하거나, 시대적인 것, 민족적인 것, 요새는 대부분이 춤 없는 노래, 춤추며 노래하는 곡으로 나누인다. 사람에 따라, 자신이 선호 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기준으로 분류한다.

교회에도 음악이 여러 가지 있다. 합창찬양곡, 찬송곡, 복음성가, 복음송, 워쉽송, 크리스찬 락, 크리스찬 헤비 메탈, 토착화를 위한 민족음악(국악) 등으로 분류하고 나눈다. 교회에서의 음악도 세상의 음악과 별 다른 것이 없음이 현실이다.

그러나 교회음악은 구원 받은 자들이 부르는 노래, 음악이어야 한다. 세상적이면서 구원받은 사람처럼 행세하며 부르는 노래가 되어서는 안된다. 구원의 확신 속에서 부르는 노래, 음악이 교회음악이어야 한다.

교회음악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과 기능을 따라 예배음악(찬송, 찬양, 구원에 대한 감사 음악), 교육음악(성경의 내용을, 기독교인의 올바른 삶의 방법을 가르치는 음악), 전도/선교 음악(전도, 선교를 목적으로 구원으로 인도하는 음악), 친교음악(서로 교제하고 친교하는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음악)으로 기준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음악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의 기능과 목적에 맞게 선택되고 사용되어야 한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사망에서 생명으로 (6)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전 세계를 들썩하게 했던 50여개국에서의 정권교체와 새로운 대통령들의 취임식이 있어 그 어느 해보다도 주목되어지고 흥분되었던 2012년도 이제 한달을 남겨두고 있는데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한민국의 12월 19일 대선, 밴쿠버에 사시는 한인그리스도인 여러분들도 당연히 기도해주시고 응원해주실줄 믿습니다. 11월 마지막 주 칼럼으로 개인적인 저의 간증은 마무리하고 12월부터는 본격적인 ‘통일담론’에 대한 나눔들을 하려고 합니다.

지난 호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한국에 온지 3년쯤 되었을 때 DTS훈련과 중보기도학교 훈련을 마치면서 제게 새로운 인생이 열렸습니다. DTS 훈련 중에 저는 강원도라는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약 두달 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강원도 지역을 돌며 기도하고 예배하게 되었는데 2005년 1월 1일 정선이라는 지역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나님, 올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을 올려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과 함께 제 눈앞에 강원도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제단’이 보였고 그곳을 내려다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세상의 헛되고 헛된 신을 숭배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산을 밟고 예배하는데 왜 나를 위해서는 예배하는 사람이 이렇게 없느냐?” ‘천제단’은 단군을 우상화하여 숭배하는 곳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고 느껴지는 하나님의 외로움에 저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여름에 와서 하나님 만족하실 때까지, 하나님 마음 시원해지실 때까지 예배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고 하나님께 응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이 훗날 저의 인생을 ‘중보기도자’로서의 삶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있는 첫 사역일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 하나로 정말 혼자 올라가서 예배하려고 주님과 개인적으로 했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학교에서 구체화시켜주셨고 결국 ‘한반도의 회복, 부흥의 시작’이라는 기도회가 탄생되었고, 40일간 쉬지 않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첫 사역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부흥의 불씨’팀이 중보기도학교에서 결성되고 태백지역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40일동안 24시간 산에 텐트를 치고 서로 교대해가며 예배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한민국에서 한다하는 무당들이 와서 기를 받는 ‘천제단’안과 밖에서의 영적전쟁을 통해 저는 제대로 영적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대한민국의 8대 영역을 올려드리고 기도함으로 한국에 온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국의 모든 구석들을 들여다보면서 문제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 했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설립하게 되고 끊임없이 중보기도와 예배를 통해 한반도의 회복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통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눈을 뜨게 되었고, 태백산 기도회가 지난 3년 뒤인 2008년에는 통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NK100일 중보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을 위한 100일 기도를 2008년과 2009년에, 이후 3년간은 남한과 북한을 함께 올려드리며 New Korea, 통일코리아의 시즌을 맞이하고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들과 방향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북한을 바라보고 통일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NKB(New Korea Builders)라는 새로운 공동체로 통일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순종’이 첫 시작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북한과 통일이야기,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나누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5 장 점점 씩씩해져가는 여성들 (Tomboys), 작아져가는 남성들


운전대를 잡아야만 하는 누나
톰보이 강의를 들은 선교사 지망생 박 집사가 눈을 반짝이면서 말한다. “목사님, 오늘 강의 중에 우리 누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저희 누님이 바로 ‘왕 톰보이’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누님에 대한 의문 또 누님과 매형 사이의 여러 의문도 풀렸습니다. 저희 누님은 늘 운전대를 자신이 잡아야 합니다. 만일 어쩌다 매형이 운전을 하는 때는 너무나 차 안이 시끄럽지요. 누님이 말로 운전을 다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물었다. “집사님은 누님과 사이가 어땠습니까?” 씩 웃으며 대답한다. “예, 그냥 알아서 피해가면서 살아왔지요. 부딪치면 늘 대형 사고가 나니까요... 하하!!”

박 집사는 겉으로 보아도 아주 부드러운 성품의 사람이다. 자라면서 누나의 강한 성품 때문에 많이 치었다. 모든 일에서 피해나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박 집사도 톰보이 아내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약점을 보완해줄 씩씩한 성품의 아내를 만난 것이다. 그 아내도 함께 세미나에 참석했기에 나눔의 시간을 통해서 몇 가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집에서 무언가 망가지면 남편을 부르는 게 아니라 아내가 직접 연장을 들고 나온다. 전구가 끊어져도 아내가 전구를 찾아 들고 나온다. 초등학교 6학년 딸과 4학년 아들이 있는데 딸이 벌써 엄마를 그대로 닮아서 연장을 챙긴다. 세미나 중에 우리가 강의실 조명의 조절을 부탁했더니 부인이 사다리를 들고 나온다. “남편에게 부탁하시지 왜 이 무거운 사다리를 직접 가져왔어요?” 라고 물었다. “우리 남편에게 부탁해서 제때에 되는 일이 없으니까요” 강의실에 폭소가 터진다. 박 집사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아내 맘에 들게 하지 못합니까?” “저 사람은 제가 하는 일은 무엇 하나 만족하는 게 없답니다. 다 다시 한답니다.” 다시 폭소가 터진다.

자기가 해 주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면서 남편은 이제 아내의 부탁을 들어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결과가 이미 뻔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그 일을 아내가 다시 할 것이니까... 그래서 이제 아내도 그런 일은 남편에게 부탁조차 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아내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헌신한 이 착한 남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던 것이다. 세미나를 통해서 부부가 서로의 많은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내가 부드러운 남편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남편을 멋지게 사용하고 계신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신의 마음에는 너무나 부족하게만 보였던 남편인데... 그 가정에 아름다운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남편을 빼앗긴 톰보이딸만 넷인 집의 막내다. 할머니가 몹시 아들을 기다렸기에 이 딸도 뱃속에서부터 완전 톰보이가 되었다. 막내라고 부모님이 워낙 예뻐하고 언니들의 보호가 있었기에 자라면서 큰 아픔은 없었지만 이미 톰보이로 변한 성품은 그대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여자로서 공과 대학을 들어갔고 학교에서 아주 부드럽게 보이는 남학생을 만나서 (친구의 애인을 뺏어서) 뜨겁게 연애를 하고나서 친구들의 시샘 속에서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 남편에게 상처가 아주 많았다. 어려움 속에서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강한 아버지가 부드러운 아들이 마음에 들지 못한다고 말로, 또 정신적으로 아들에게 오랫동안 많은 상처를 준 것이다. 그렇게 상처 많은 두 젊은이가 정신적인 준비 없이 결혼을 한 것이다. 처음부터 삐그덕 거렸고 세월이 가면서 점점 어려움이 심해지면서 결국 남편이 이 강한 아내를 떠나버렸다. 자기를 무조건 섬겨주는 속셈있는 여자에게 끌려간 것이다.

내가 이 자매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아주 많이‘남자’였다. 그러면서 또한 매우 심각한 정신적인 혼란 속에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본인 속에서 끊임없이 부딪치고 있기에 남자들과도 여자들과도 대화가 제대로 되지를 않았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자유롭게 살던 남편이 이런 아내를 만나서 얼마나 어려웠고 또 눌리며 살았을까...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런 상황에서 부드러운 유혹의 손길이 닥쳐왔을 때 못 이기는 척하고 그 유혹을 받아들였을 상황이 상상이 된다. 처음에 이 자매와 대화를 할 때는 나도 매우 긴장이 되곤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나와 상담을 하면서도 “목사님, 참 못됐다...”는 식으로 말을 함부로 했다. 한국 여성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조차 안 되어 있던 것이다. 아들 하나를 데리고 유학생 엄마로 이국땅에 와 살면서 많이 울었다. 빈 집에 들어가면서 서러워서 울고, 안타까워서 울고, 외로워서 울었다. 도무지 마음을 추스르지를 못했다. 그런데 치유 학교에 다니면서 마음이 만져지기 시작했고 여태 몰랐던 ‘마음의 원리’를 깨달아가게 되었다. 자신이 상처 많은 톰보이인 것을 알게 되었고 남편도 아주 상처를 많이 입은 부드러운 어린아이인 것을 보게 되었다. 겸손하게 “치유의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하며 주님의 말씀을 붙잡기 시작했다. 아픔을 준 남편과 시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불쌍한 마음으로 용서하면서 생각과 삶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타를 열심히 치면서 늘 아들과 찬양을 불렀다. 그러다가 교회 주일 예배 찬양 팀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 년쯤 지나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나도 더 이상 긴장하지 않는 순한 양이 되었다. “너무 예뻐졌네...” 라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랑스러운 여인이 되어간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교리문답ㆍ구속사적 설교 회복 절실






강단의 변화가 교회 개혁의 시작


이단, 신비주의, 번영신학, 신앙과 삶의 분리, 윤리 문제 등 한국 교회는 올바른 신앙 정립의 부재로 발생하는 복합적인 문제들로 영적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한국설교학회(회장 정창균 교수 / 합신대)가 최근 개최한 제16차 정기학술대회에 발제자로 참석한 설교학자들은 교리문답 설교를 비롯해 구속사적 설교 등 강단의 변화에서부터 교회 개혁이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성환 교수(웨신대)는 잃어버린 신앙 유산인 교리문답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성도들이 각종 이단의 사설에 현혹되고, 예언이나 환상, 신비체험 등과 같은 신비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목회자들이 성경을 왜곡해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라며 “성도들이 이단과 신비주의에 맞서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우게 하려면 교리문답 설교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목회자들 가운데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교리 연구는 지적인 것을 추구할 뿐, 영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 신학 지식을 많이 습득할 수 있지만 신앙과 삶의 괴리 현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다양한 논쟁을 불러와 다투거나 자신이 속한 특정 교파만 옳다며 편파적인 성향을 갖는다는 것, 교리 연구가 때로는 말씀의 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교리 연구는 비록 지적인 면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신자가 살아가고자 하는 열심과 성숙을 보일 수 있다”며 지적 노력 없이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없다고 역설했다. 즉, 올바른 교리 연구를 통해 자신의 신학(신앙)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에 신학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신앙적 반성이 각자의 삶에 반영돼 보다 성경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교리문답 설교는 자칫 성도에게 지루함, 딱딱함, 심지어 교리의 주입과 강요함으로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교리문답 설교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야 한다. 박 교수는 어떤 교리문답이나 신경, 그리고 신앙고백서를 설교를 통해 가르치고자 할 때, 각각의 구조나 특성을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미 52주에 걸쳐 설교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그렇다고 52주에 맞춰 모두 가르칠 필요는 없다. 129개의 질문과 답으로도 구성돼 있어 129 주일에 나눠 가르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교리문답서들이나 신앙고백, 신조들도 마찬가지다.

박 교수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목회자가 판단할 수 있지만 단순하고, 쉽고, 빠른 것을 원하는 세대에 맞춘다면 몇 개의 항목을 엮어 가르치기보다는 한 주에 한 항목씩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속적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어렵다면 교회력에 따라 교리문답을 재배치해 설교할 수 있고, 교리문답서들의 내용 가운데 사회의 이슈들에 해답을 줄 수 있는 교리문답 항목을 엮어 시리즈 설교를 구성할 수도 있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 잃어버린 신앙유산인 교리문답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며 “교리문답 설교 운동이 일어날 때 한국 교회의 힘과 능력이 회복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조상현 목사(제자삼는교회)는 구속사적 설교를 통해 윤리 행위를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목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가는 구속의 역사라고 하는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특정 본문을 해석하는 구속사적 설교가 ‘여기와 지금’의 청중에게 소홀하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며 “하나님의 구속사는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이들로 구성되는 신앙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조 목사는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윤리 행위를 촉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구속사만 드러낸다면 구속의 사건을 경험했던 성경 인물들의 반응과 삶의 모습은 철저히 배제될 수 있고,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의 성도들이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속사는 하나님의 활동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속사 자체가 윤리적 행위를 촉구하는 설교의 정당성을 지지해준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구속사적 설교는 단순히 구속사를 드러내려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 내용이 청중의 삶과 구체적으로 관련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조 목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통해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일으키고자 하셨고, 또 요구하시며 기대하셨던 변화가 무엇인지 살펴서 오늘의 청중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구속사건이 재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구속사적 설교가 반드시 윤리적 행위를 촉구하는 설교이어야 함은 성경 자체가 입증해주고 있다”며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통해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셨다”고 덧붙였다. 결국 구속사적 설교는 성도 개인이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공동체적인 윤리 행위까지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 목사는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과 성도 개인의 만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속사를 실현해 가는 현장인 신앙 공동체를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교는 개인의 변화와 함께 신앙 공동체를 세워가도록 하는 이중적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구속사적 설교의 메시지는 단순히 성도 개개인의 구원과 윤리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차원을 넘어 신앙 공동체 전체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 공동체 전체의 윤리적 성숙과 헌신으로 이끌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교회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igoodnews.net]
 
 
 
 
 

재미있는 사도행전



시민권 있습니까?



세계 역사상 가장 높은 가치를 지녔던 시민권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로마 시민권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전, 전 유럽 사람들의 꿈은 ‘로마 시민권’을 손에 쥐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글과 함께 실린 사진이 당시 청동으로 만든 로마시민권이다.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로마시민권의 매력에 한번 빠져보자!

무료 식량 배급, 죽을죄를 지어도 재판 없이 처벌 불가(행22:25),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의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행22:29), 어디 이것뿐인가? 로마시 안에 살면 수세식 화장실, 초호화 목욕탕 이용, 콜로세움(라틴어:거대한 건축물)에서 벌어지는 검투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무료 관람 등의 권한이 주어졌다. 세상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는, 공휴일이 자그마치 135일이었다. 로마시민권을 가지면 일 년의 반을 먹고 놀수 있었다는 얘기다.

사도행전 22장22절을 보면 로마 시민권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천부장이 사도바울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시민권을 얻었노라”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 돈 장난까지 쳤다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이렇게 대단한 로마 시민권을 “나는 나면서부터라”.

바울이 의심스럽다. 그는 진짜 로마 시민권자 이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이 간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가서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자! “나는 매를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강도의 위험, 자지 못하고, 굶고, 추위에 떨었습니다.(고후11:23-27). 이것이 로마 시민권자의 삶인가? 그는 왜 이렇게 산 것인가?

바울은 말한다. 자신의 분명한 소속이 어딘가를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멋있다. 정말 멋있다. 자신을 두고 “나를 본받으라.(빌3:17)고 할만 하다. 그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멋진 삶을 산 것이다. 마치 다니엘이 “바벨론에 있으나, 바벨론에 속하지 않는” 길을 택했던 것 처럼(다니엘1:8).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의 ‘갈매기의 꿈’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단지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나는 다른 갈매기와 달랐다. 그에게는 남다른 꿈과 이상이 있었다. 조나단의 이런 행동이 그를 다른 갈매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결국 무리로부터 추방당하게 만든다. 우리의 수준을 높이자! 우리는 절대 땅을 향해 목 뼈가 굳어버린 돼지가 아니다. 우린 엄연히 차원 높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잊지말자! 확실히 붙들자! 이것 하나를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4인 4색 밴쿠버 목양일기

 
 
저는 서비스업(業)에 종사하는 목사입니다
밴쿠버에서 사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어떤 집사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공항 라이드를 부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이민목회는 섬기는 목회라고 배우고 들었던 바, 망설임 없이 한국을 방문하시는 집사님을 공항까지 라이드 해 드렸습니다. 이것도 나름 목회의 연장이라는 목사의 마음으로 기분 좋게 집사님을 내려드리려는 순간, 집사님이 제 손에 봉투를 건네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목사님! 공항라이드 하시는 분께 물었더니 보통 70불 정도 받는다고 하시네요. 70불 넣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렇게 우울하던지요.
흔히들 이민목회는 섬김의 목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성도를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는 일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사역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소위 ‘목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순 서비스맨이 되기는 싫은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개척교회 목사로 개척교회(소형교회)가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성도들과 밀접한 영적 관계 속에서 목양할 수 있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섬김과 헌신의 본을 실천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그런 환경이 개척교회 목회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목회를 해보니 성도들은 교회를 통해 여러가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각종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을 통한 다양한 교제, 그리고 체계화된 교회학교 시스템까지 개척교회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서비스들입니다. 물론,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삶의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그런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할 수 있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숙고해야 할 부분은 우리 모두 교회를 통해 서비스를 받는 일에만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조금 많이 나가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저는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친절한 목양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퀵 서비스맨이 되어야만 한다는 심각한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자각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회를 해야 하는데, 자꾸 사람들(성도들)을 경외하게 되는 목회로 방향성을 잡아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하는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배를 의미하는 영단어 중 하나가 서비스(service)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각종 서비스를 받고 누리는 곳이 아니라, 서비스를 행하고 드려야 하는 곳’이어야 맞지 않겠습니까? 목사나 성도 모두가 하나님께 서비스하는 예배자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목사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한 사람의 예배자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일에는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께 온전한 서비스를 드릴 수 있도록 양육하며, 훈계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서비스를 드리는 곳이지, 서비스를 받는 곳이 아닙니다.’ 때문에 저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목사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이왕 서비스맨이 될 바엔 하나님 앞에 가장 최고의, 그리고 가장 최선의 것으로 서비스하고 싶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제게 두둑히 건네주실 팁(상급)을 기대하며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찌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대상 16:29)
[문경돈 목사 / 나무십자가한인교회 / 778-772-4738]

아브라함 이야기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창 18:17-21 (하)



기도의 소명을 깨달은 아브라함
1아브라함은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도 복을 받아야 할 천하만민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담대하게 섰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12장에서 처음 부르심을 받은 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먼저 직접적으로 간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기도다운 기도를 할 수 있는 신앙으로 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기도할 수 있는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한 아브라함 (25절)
25절은 19절의 말씀을 근거로 한 기도입니다. 비록 19절이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은 아니지만 아브라함도 곁에 있었기 때문에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만 번 기도 응답을 받은 죠지 뭘러는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기 전에 성경을 먼저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에 부합되는 말씀을 찾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고 그 결과는 2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때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서 기도하기 쉽기 때문에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겸손하게 기도한 아브라함 (27절)아브라함은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티끌’이란 ‘아파르’ (ʿāp̱ār)와 ‘에페르’ (ʾēp̱er)의 복합어로서 ‘dust’와 ‘ash’를 의미합니다. 즉, 먼지에서 시작하여 재로 끝나는 자신의 실존을 파악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그를 겸손히 기도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시 10:17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라고 나옵니다. 눅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가 나오는데,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자기를 내세우는 기도를 하였지만, 13절에 보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14절). 세리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임을 알았기에 비록 구체적인 간구도 못하고 통회만하였지만 그의 간구는 상달되었고, 하나님은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한 아브라함 (32절)
아브라함은 24절에 오십 명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시겠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워낙 타락한 성이라 오십 명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28절에서는 45명으로, 29절에서는 40명으로, 30절에서는 30명으로, 31절에서는 20명으로 그리고 32절에서는 10명으로 줄여서 기도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기도하되 철저하게 기도했으며, 지속적으로 기도했으며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귀찮아 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적인 불신과 완고함, 그리고 고집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제거되어 영적으로 회복될 뿐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겸손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새벽 빛이 움트기 전, 짙은 어둠에 잠긴 도시를 울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인생이 너무 짧고 덧없다는 탄식처럼 쓸쓸하게 마음에 울립니다. 인생은 결국 혼자서 가는 여행이라고, 눈물겹도록 외롭고 허무한 여정이라 울부짖는 듯, 심난한 여운을 남기고 떠난 기적소리에 허물어지기 시작한 잠을 털고 일어나, 곁에 잠든 남편의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덮어 꼭꼭 여며줍니다. 자랑도 인기도 찬란한 이력도 어두운 허공에 차가운 망령처럼 떠있는 이 시간, 이런 작은 사랑의 동작이 내 마음에 온기를 지펴줍니다. 빛과 소리와 인파 속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또렷한 소리로 방안을 울리고 있는 시계의 초침소리가 본향을 향한 소망이 있는 우리에겐 생의 수명이 떠나가는 아쉬움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다가가는 설레임 임을 주지 시키며 헐거워진 생의 믿음을 하나하나 단추 채웁니다.

생계를 위해 성 매매를 하는 박카스 할머니들에 대한 기사 속의, 내 어머니의 뒷모습과 닮은 짤닥막한 노파의 사진 때문에 내내 마음이 저리고 아픕니다. 생에 대한 경륜이 짧고 눈 앞의 것 밖엔 생각할 줄 모르는 젊은 때는 미련하여 방탕하다가도, 늙어가면서 지난 날의 어리석음을 회한하며 삶을 맑게 정리하게 되는 순리마저 어지럽혀졌음이, 돈으로, 탐욕으로, 화려한 색으로, 선정적인 리듬으로 혼미한 가운데, 인간 정신이 망해가는 세대에 지혜를 주어야 할, 이생의 면류관 같은 존재들이 사회의 무관심의 사각지대에 버려져, 생계와 병든 육체를 치료할 약 값을 벌기 위해 들개처럼 떠돌고 있음에 마음에 애통이 일어납니다.
심판 날에 이 성보다 소돔과 고모라가 견디기 쉬울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탄식이 한국 땅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대의 신전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쇼핑몰을 걸을 때마다 실로 이곳이 매몬의 신전이 아닐까 생각이 들곤 합니다.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의 동상처럼 눈매가 관능적인 모델들의 화보아래서 사람들은 돈을 갈망하며 예배하고, 돈을 많이 벌길 소망하고, 물질을 우러러보며 돈의 가치를 절대화합니다. 돈을 경배하는 정신에 취해 매몬의 신전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동자에 만화의 그림처럼 달러의 표지가 씌운 듯 느껴집니다. 한국도 북미처럼, 전세가 월세로 넘어가고, 중산층이 사라지고, 은행 빚을 얻어 산 부동산의 이자를 갚느라 가계가 빈궁해지고, 높은 실업률과 어디나 불황이라는 흉흉한 소식에 눌린 사람들에게 재물은 점점 더 큰 위력을 과시하며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억압하고, 성경의 표현처럼 돈을 사랑하는 정신이 사회 안의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무섭게 번져가고 있습니다.

매몬의 금우상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음란문화가 성행하고 사람들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양심도 버리고 오래된 신의마저도 저버리며 인간 신체 안의 장기까지 내다 팝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생존 이상의 의미와 소명이 있습니다. 진실하고 바르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야 할 존귀가 깃들어 있는 존재로서 잘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귀는 거룩함에서 나오며 거룩함이 인간을 영화롭게 합니다.
인간이 본래 거룩한 존재라는 뉴에이지의 정신은 철저히 사단의 거짓말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죄에 물든 인간의 마음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피가 마음에 뿌려져 양심의 악을 깨닫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만 거룩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사를 위해 집을 보러 다니면서 잘 수리되어있고 잘 손질이 되어있는 집을 찾아 그만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이치를 생각하면서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인 나의 영혼을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하게 가꿔야만 하는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생에서 사람이 추구할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은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죄를 회개하고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을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말 한마디 생각 한 줄기가 성령께서 기뻐하시며, 성령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박카스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내 기도 노트에 스크랩하면서 오늘도 매몬의 사각지대에 버려진 많은 노인들과 병약한 사람들, 가난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죄악에 빠져들어가지 않도록 돕기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작은 희생을 바치고 있는 선한 사람들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물질과 권력과 교리의 싸움을 그치고 이 선한 사업에 앞장 설 수 있기를, 그리고 내 인생도 이 일을 위해 드려져 쓰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광란의 밤이 남긴 도시의 쓰레기를 쓸어내시던 이른 새벽 청소부 아저씨들의 건강한 비질처럼, 오늘 드린 나의 간절한 기도가 물질 만능주의와 이기심의 악취가 풍기는 세상의 모든 죄악과 몰염치를 싹싹 쓸어버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함에 이르는 회개를 담대히 전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함은 감미롭고 즐겁고 황홀할 정도로 평화롭고 고요한 본질을 가진 것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것은 영혼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결 밝음 평화 그리고 환희를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영혼을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들이나 정원처럼 만들었다. 그것에는 유쾌함, 괴롭지 않은 모든 즐거움, 달콤한 고요함에서 얻는 즐거움, 그리고 부드럽게 생기를 더해주는 태양빛이 있다…” -조나단 에즈워드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