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기 목사 (강원영월) 간증
“할렐루야”
강원도 산골짜기 작은 교회에서 38살 노처녀가 산비탈 땅을 일구며 그들의 영혼을 붙들고 기도하며 교회에 불을 끄지 않으려고 주님과 보낸 시간이 벌써 30년이 흘렀습니다. 이 산골에 와서 변변히 해 놓은 일은 없건만,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는 제 모습을 보면서 흘러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나를 돌아 볼 여유 없이 걸어온 이 시골 여 목회자를, 가끔은 길에 있던 아이들이 할머니라고 부르는 68세의 늙은 저를, 캐나다 초청을 위해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오니 부족함을 양해 바랍니다.
강원도 산골짜기 작은 교회에서 38살 노처녀가 산비탈 땅을 일구며 그들의 영혼을 붙들고 기도하며 교회에 불을 끄지 않으려고 주님과 보낸 시간이 벌써 30년이 흘렀습니다. 이 산골에 와서 변변히 해 놓은 일은 없건만,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는 제 모습을 보면서 흘러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나를 돌아 볼 여유 없이 걸어온 이 시골 여 목회자를, 가끔은 길에 있던 아이들이 할머니라고 부르는 68세의 늙은 저를, 캐나다 초청을 위해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오니 부족함을 양해 바랍니다.
저는 충남 논산에 있는 유교 집안의 엄한 환경에서 4째로 태어났습니다. 엄한 아버지의 핍박 때문에 숨어서 교회가고 거짓말하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현균 목사님의 부흥집회 때 은혜를 받게 되었고 목회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감리교 신학을 마치고 꿈에도 그리던 교계 어른들의 추천을 받아,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수동리 마을에 30대 후반의 노처녀가 결혼을 포기하고 예수님과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전국에 울리는 그런 외침에도 불구하고 거의 도시 문명과 거리가 먼 수동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시골 마지막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작은 다리 4개를 건너니, 이미 발이 부르트게 되었고 가슴에 불타오르던 복음의 열정은 짐승들이 길 삼아 다니는 길을 걸어오면서 육신이 먼저 지쳐 금방이라도 두 손 들고 “항복”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걸었던지 발바닥이 다 부풀고 발톱이 빠졌습니다. 겨우 도착한 교회 건물은 오래 전에 비워진 시골 곳간(상여를 보관하는 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쁘다는 소리를 듣던 이 초년병 조 전도사를 이 교회가 겨우 버티고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회도 사택도 다 부서지고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으니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습니다. 초가집 지붕은 풀이 자라고 부엌은 나무 판으로 겨우 바람을 막아 놓았기에 조금만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뒷산에서는 가끔 큰 돌이 굴러오고 온통 겁이 나고 두렵게 하는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로 몇 일을 보내며 정신을 가다듬고 십자가 붙들고 다시 힘을 내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교인들마저도 조금만 강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떠내려가 나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 여건을 다 감수하며 온 마을의 환경과 지리를 익히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저를 홀로두지 아니하시고 동행하시며 힘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걸었던지 발바닥이 다 부풀고 발톱이 빠졌습니다. 겨우 도착한 교회 건물은 오래 전에 비워진 시골 곳간(상여를 보관하는 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쁘다는 소리를 듣던 이 초년병 조 전도사를 이 교회가 겨우 버티고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회도 사택도 다 부서지고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으니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습니다. 초가집 지붕은 풀이 자라고 부엌은 나무 판으로 겨우 바람을 막아 놓았기에 조금만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뒷산에서는 가끔 큰 돌이 굴러오고 온통 겁이 나고 두렵게 하는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로 몇 일을 보내며 정신을 가다듬고 십자가 붙들고 다시 힘을 내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교인들마저도 조금만 강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떠내려가 나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 여건을 다 감수하며 온 마을의 환경과 지리를 익히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저를 홀로두지 아니하시고 동행하시며 힘을 주셨습니다.
우선 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새로 건축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나이 많으신 시골 권사님 내외분과 오직 믿음으로 함께 작정기도하기 시작 했습니다. 제가 가진 과부의 두렙돈 같은 물질을 앞에 놓고 기도를 시작하였고 지방 감리사님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비록 작고 작은 시골 교회이지만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기에 사탄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영적 전쟁을 치르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 한분이 대지를 하나님께 바쳤고 마을 돈을 빌리고 강에서 모래를 채취하여 벽돌을 찍고 지방교회가 조금 협조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체험해 보지 않으신 분들은 아마 아무도 그런 기쁨을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그 해 큰 태풍이 강원도를 강타하면서 눈물범벅으로 여 전도사가 벽돌을 찍으며 지은 교회의 지붕이 날아가고 종탑이 무너졌습니다. 옛날 오빠가 돌아가시고 울었지만 교회가 파손될 때 울부짖었던 그 울음은 말 그대로 통곡 그 자체였습니다. 성도들에게 성전건축이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인지 두고 보라며, 여러분이 받을 축복을 세어보라고 보증 수표 쓰듯이 말했던 저의 눈앞에 사용도 제대로 못해본 교회가 전부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허락하신 은혜를 얼마나 감격 했었는데, 서울에 그 어떤 성전보다도 제게는 더 귀하고 아름답던 그 성전이 태풍으로 초토화되니 온 성도들이 절규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강원도 여러 교회들의 도움으로 힘을 모아 다시 성전이 처음 모습으로 복구가 되었습니다. 힘들었던 성도님들에게 위로가 채워지고 흩어진 성도님들이 다시 돌아오고 안정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섬기는 영월 무릉교회에 교역자가 없고 비어 있는 곳이라며 교단의 권유로 파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두 번째 사역지를 주셨고 역시 그곳에서도 교회를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무릉교회 온지 1년이 되었을 때 다시 성도님들과 교회 건축을 계획하였으나 역시 여러 가지 만만치 않은 어려운 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건축이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으로서 “여자가 무슨 교회를 짓는단 말이냐”며 놀리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체, 우여 곡절을 겪으며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교회 내부에서 더 큰 도전이 밀려왔습니다. 그 당시 30만원 작정하시고 10만원 바치신 한 권사님이 건축에 대한 불만을 가지시고, 강단에 서있는 전도사를 향하여 삿대질을 해대며 내 돈 돌려 달라고 소리 지르시던 기억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게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지난 일이고 지금은 아마 천국에서 저를 보시며 사랑으로 격려 해 주시고 계실 것이라 믿으니 저도 그 권사님을 잊을 수 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 한분이 대지를 하나님께 바쳤고 마을 돈을 빌리고 강에서 모래를 채취하여 벽돌을 찍고 지방교회가 조금 협조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체험해 보지 않으신 분들은 아마 아무도 그런 기쁨을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그 해 큰 태풍이 강원도를 강타하면서 눈물범벅으로 여 전도사가 벽돌을 찍으며 지은 교회의 지붕이 날아가고 종탑이 무너졌습니다. 옛날 오빠가 돌아가시고 울었지만 교회가 파손될 때 울부짖었던 그 울음은 말 그대로 통곡 그 자체였습니다. 성도들에게 성전건축이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인지 두고 보라며, 여러분이 받을 축복을 세어보라고 보증 수표 쓰듯이 말했던 저의 눈앞에 사용도 제대로 못해본 교회가 전부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허락하신 은혜를 얼마나 감격 했었는데, 서울에 그 어떤 성전보다도 제게는 더 귀하고 아름답던 그 성전이 태풍으로 초토화되니 온 성도들이 절규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강원도 여러 교회들의 도움으로 힘을 모아 다시 성전이 처음 모습으로 복구가 되었습니다. 힘들었던 성도님들에게 위로가 채워지고 흩어진 성도님들이 다시 돌아오고 안정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섬기는 영월 무릉교회에 교역자가 없고 비어 있는 곳이라며 교단의 권유로 파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두 번째 사역지를 주셨고 역시 그곳에서도 교회를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무릉교회 온지 1년이 되었을 때 다시 성도님들과 교회 건축을 계획하였으나 역시 여러 가지 만만치 않은 어려운 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건축이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으로서 “여자가 무슨 교회를 짓는단 말이냐”며 놀리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체, 우여 곡절을 겪으며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교회 내부에서 더 큰 도전이 밀려왔습니다. 그 당시 30만원 작정하시고 10만원 바치신 한 권사님이 건축에 대한 불만을 가지시고, 강단에 서있는 전도사를 향하여 삿대질을 해대며 내 돈 돌려 달라고 소리 지르시던 기억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게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지난 일이고 지금은 아마 천국에서 저를 보시며 사랑으로 격려 해 주시고 계실 것이라 믿으니 저도 그 권사님을 잊을 수 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다 그렇듯이 사역도 한 굽이 지나면 또 다른 굽이가 기다리고, 그래서 돌고 돌아가는 가 봅니다. 그 후 지방회 목사님들과 노회를 다녀오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여 엄청나게 많이 다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겨우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려는 2010년 12월 22일 대장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혹이 있다하여 간단하게 치료 될 줄 알았는데 암으로 판정되어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병마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저는 그 사명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병마와 싸우며 혈혈단신 혼자서 산골 사람들을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문득 욥이 생각났습니다.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 하는구나”(욥30:17) 말씀을 보면서 내가 지금 욥이 아픈 만큼 아픈 것 같은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부끄러워지고, 또 나를 복종시키며 제 자리로 돌아서게 됩니다.
단종 유배지이며 우리나라 오궁 중 하나인 이곳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새벽마다 또 한국 교회에서 정한 공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유교 사상이 강한 이곳에 복음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느덧 2년 후면 정년을 맞이합니다. 아쉬움이 많은 지난 사역의 길을 돌아보고, 그런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캐나다에서 뜻밖에, 어쩌면 30년 시골 목회를 위로하는 선물로 비행기 표를 보내왔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오직 예수님 때문에, 또한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어서 이 지면을 통하여 감사를 전합니다. 숭실 교회, 크리스천 신문사, 그리고 밴쿠버 교민 여러분들께서 마음으로 저희 여 목회자들을 맞아주신다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강원도 영월에서 조향기 목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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