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0일 목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8 >



“어지러운 세상 중에…”



0037.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요한계시록 18:4 ‘거기서’가 아님)

전대미문의 로마의 잔인성으로 인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를 로마로 부르지 못하고 ‘바벨론’으로 불렀다. 요한계시록 14~18장에 집중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이 바벨론의 비밀에 대한 무지가 실은 엄청난 위력의 재앙을 교회와 국가로 불러들이고 있다. 종교의 탈을 쓰고 정치, 경제 세력 확장을 꾸준히 이루어온, 인류역사상 가장 스캔들 거리인 이 조직체에 대한 어두움이 온 세상을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독일의 튀빙겐대학의 로마카톨릭 신학부의 실천신학 교수 글라이나헤르(Gleinacher)가 마가복음 10:24~44을 인용,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 1991, #50)에 기고한 글에서 ‘로마카톨릭교회는 우리의 인간사회에 남아있는 최후의 전체주의 조직 중 하나이다’라고 언급한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배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초대교부들의 신약의 바벨론을 로마로 보았고 2)개혁자들이 또한 그러하였고 3)성경사전들이 그렇게 단정하고 있으며 4)로마교황이 공인한 천주교의 공인 성경으로서 현재 시중에서 구입이 가능한 The Official Catholic Bible (ISBN 0-529-06811-7)이나, Catholic Study Bible (Oxford Univ. Press)의 계시록 14~18장에 언급된 바벨론에 대한 각주해석이 모두 『로마』임을 저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
1986년 로마교황청은 성『프란시스』의 고향 이태리의 아씨씨에서 12개 종교의 대표들을 초청 ‘평화의 이름안에서’(단 8:25 참조) 첫 모임을, 1992년에 두 번째, 2002년 1월에 세 번째로 모였다(New York Times, Jan. 25, 2002). 살후 2장에 언급된 배도의 주역 저 “죄의 사람”(살후 2:3 kjv)은 뉴에이지 운동을 주도, 종교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UR)에서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UN 산하의 종교통합 기구인 우르(UR-United Religions)에서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고 계시며, 이 적그리스도의 체제는 ‘새 세계’질서(NWO)아래, 즉 ‘단일세계정부/단일경제’로 세상을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짐승 위에 탄 여자』- 로마카톨릭교회와 종말 - 요한계시록 17-18장에 나타난 이 여인은 도데체 누구인가? / Dave Hunt 저 정태윤 역 420pp / $40 / 품절된 책이나 역자에게 조금 남아있어 새생명말씀사 604-936-0691나 아래 빅토리아 주소에서 9월말까지 1차 주문 접수 중, 책은 미국에서 직송예정)

0038. 그리스도냐? 벨리알이냐?

‘한국복음주의협의회’사람들이나 무슨 ‘4인방’인가 하는 사람들이 실은 ‘신복음주의자’들이다. 배도의 지름길에 들어서서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지도 못하고 온갖 조무래기 이단들을 다 나열하면서도 ‘가장 거대한 이단’ 천주교는 늘 이단 목록에서 빼 놓음으로써 양(羊)들로 하여금 천주교를 정통으로 보게끔 오도하는 이적(利敵, ‘적을 이롭게 하는’)행위를 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 39개 종교강령에 1년에 네 차례 로마교황의 수장권(Supremacy)을 논박하는 설교를 하도록 규정한 교회법 제1조를 목회자들이 스스로 어김으로써 직무유기죄를 짓고 있으며, 향(向)로마 지도자들인 John Stott / J. I. Packer 같은 지도자들 아래서 1200여명의 성공회 사제들이 집단으로 천주교로 넘어가는 배도가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에큐메니즘』이란 깃발 아래 로마카톨릭교회라는 종교의 얼굴을 가지고 가이사의 정치세력을 구축해온 두 얼굴의 집단, ‘로마 교황청’이란 ‘초대형 이단’ 집단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객관적으로 인정된’ 유명한(?) 소경들이 많이 있다. 저들은 좁은 길, 고난의 길을 멸시하며, 낮아진 소수의 무리와 고독한 길을 비웃으면서, 넓은 길, ‘부흥이란 이름의 배도’의 가도를 달린다. 이‘가련한 잡종’같은‘나이브’한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5번이나 “어찌?”(고후6.14-16)로 경고하고 두 번이나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갈 1장).

0039.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고후 5:15)

시사주간지 타임이 이 세대를 두고 ‘하나님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바쁜 저주받은 세대’라고 평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자는 항상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기를 섬기며 자기를 위해 살기 위해 자가발전에 동력원이 되는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맘몬(돈)을 자신의 신으로 섬기게 된다. 누가15:11~32의 ‘두 탕자’처럼 자기애(自己愛)와 자기의(自己義)로 가득한 의지는 자기 이익을 주장하고 추구하는데 목숨을 건다. 이 얼마나 서글프고 역겨운 현실인가. ‘너는 누구를 기쁘게 하고 있는가?’고 주님 물으신다. 스펄젼 목사님이 “영국국교회에서 가장 고귀한 인물”로 평한 라일(J.C. Ryle, 1816~1900)주교의 권고는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신앙에서 열심이란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하려는 불타는 열망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도 자연적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신자들이 회심할 때 각 신자들의 마음에 불어넣으시는 열망이다. …… 그는 오직 한 가지 일만 보며, 한 가지 일만 신경쓰고, 한 가지 일을 위해 살고, 한 가지 일만 받아들인다.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사람들을 기쁘게 하든지 화나게 하든지,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되든지 어리석다고 생각되든지, 비난을 받든지 칭찬을 받든지, 영광을 얻든지 수치를 당하든지, 이 열심 있는 사람은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 일만을 위해 열심을 내는데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열심으로 인해 소진되어 버린다 할지라도 그는 괘념치 않고 만족한다. 그는 등잔과도 같이 자신이 타 버리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타다 소진된다 해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일을 수행할 뿐이라고 생각한다......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신앙의 ’열심’이다”

못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찬송가147/주 달려 죽은 십자가③)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33)



필름이 끊겼어!



우즈베키스탄 한인선교선교사 협의회에는 노란 머리의 백인 회원이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톰 다니엘선교사였다. 그 당시 그는 오십 중반이었다. 미국 남침례교단 선교사로 부산지역에서 14년 동안 제자훈련사역을 했다. 그리고 1991년 구쏘련의 문이 열리자 우즈베키스탄으로 사역지를 옮겨 고려인교회를 개척해서 사역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어 뿐 아니라 러시아말도 유창하게 했다. 그를 처음 만나는 한국사람들은 그가 러시아 말을 할 때면 서양외모와 유창한 러시아말로 인해 러시아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선교사 모임이 있던 날 톰 다니엘 선교사가 한국선교사들에게 제자훈련에 대해 특강을 했다. 그리고 관심이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6개월 동안 제자훈련을 진행한다는 광고를 했다. 현장에서 영적 갈증을 느끼던 나는 배움의 기회도 가질 겸,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신청을 했다. 9명으로 시작된 제자훈련 반은 사역에 바쁜 선교사들이 한 둘 씩 빠지더니 과제물이 쌓이자 중보포기자가 늘어 썰렁하리 만큼 자리가 비게되었다. 그러나 톰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마지막 남은 나와 다른 선교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자신의 경건생활을 나누어 주었다.

한 날 급하게 전달해야 내용이 있어 저녁 9시가 넘어 전화를 했다. 수화기로 들리는 톰의 목소리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그래서 한국말로 간략하게 요점만 설명하고 있는데 “정목사님, 제가 너무 피곤하니 가급적 9시 이후로는 전화를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한다. 이 말에 나는 썰렁해져서 설명을 하다 말고 일단 “예! 알겠습니다” 라고 전화를 끊었다. 조금 서운하고 황당하기 조차 했다....
몇 일 뒤 제자 훈련모임에 갔는데 톰이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정목사님 죄송해요. 몇 일전 전화하셨을 때 제가 실례했습니다. 제가 너무 피곤해서 그런 말을 했어요. 제가 하루에 영어와 한국어, 러시아어 그리고 고려말까지, 네 가지 말로 사역을 하다 보니 저녁 9시가 넘으면 제대로 되는 말이 하나도 없이 멍해질 때가 있어요.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하긴 집에서는 영어, 교회에서 운영하는 언어학교에서는 기초영어 I am a boy를 가르치고, 한국선교사들과는 한국어, 나이가 드신 고려인과는 고려말(함경도억양의 방언과 러시아말이 섞인)을 하고, 설교나 양육이 있는 날이면 러시아말을 해야 하는 톰 선교사. 정말 헷갈릴 만도 했다.

“톰목사님, 저는 목사님처럼 여러 말을 다 자유롭게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부럽기만 하네요. 제게는 언제 그런 날이 올까요?”
“정목사님도 머지 않아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몇 일 뒤에 모임에서 선교사수련회가 키르키즈스탄에서 개최되어 내가 신청서를 배부하고 있었다. 참가신청서를 수거하는데 톰이 참가 여부를 묻는 난에 ‘안간다.’ 라고 써 놓은 것이다. 뉘앙스가 묘했다. 무슨 불만이나 관계의 불편이 있어서 안간다는 것인지, 아니면 사정이 있어 못간다는 말인지 궁금해진 나는 톰에게 무슨 사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피치 못할 미팅이 있어 못간다고 설명을 했다. 나는 “목사님, 안간다라고 이렇게 크게 쓰셨어요”라며 보여 주었다. 톰은 웃으면서 “제가 한국말을 17년째 하고 있는데도 이 모양입니다.”라고 겸연쩍어 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금요일, 나는 새벽부터 러시아말과 고려말에, 짧디 짧은 카라칼팍말에, 농아교인들과는 제대로 되지 않는 수화까지 하다가 심야기도회를 러시아 말로 인도 하고 있었다. 설교 중반 쯤을 지날 때 갑자기 눈 앞이 하얗게 되더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강대상만 붙잡고 서 있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도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의 초점이 풀린 채로 서 있는 내 모양이 심상치 않았든지 앞에 앉아 있던 러시아 전도사가 일어나 강대상으로 올라와서 내 귀에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런 상태를 러시아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한국식 표현으로 “필름 아트레질(필름이 끊어졌어)!”라고 했다. 그러자 나를 붙들고 내려와 의자에 앉히고는 자기가 설교를 마루리 짓고 기도회 인도를 했다.

다음 날 아침에 교역자 모임에 지난 밤에 내게 있었던 일을 설명을 했다. 그리고는 콘스탄틴 전도사에게 내가 필름이 끊어졌다고 한 말은 원래 술 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아무 기억이 없는 상태를 묘사하는 말인데 어떻게 알아들었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러시아 말도 똑같이 필름이 끊어졌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필름 끊어졌다는 말도 같단 말인가? 인류가 한 조상에 난 것, 모든 말 한 언어에서 나왔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리고 톰이 말했던 “저녁 9시 이후로는 전화하지 마세요!”가 무슨 말인지 저절로 이해되었다.

그 후 톰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추방되어 다시 북인도로 사역지를 옮겨 힌디어를 하다가 은퇴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고향인 로키산맥 중턱에 기도집을 열어 열방을 위한 중보사역을 하고 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재미있는 사도행전



급한 일과 중요한 일



어린 조카가 죽었다. 그것도 여섯 살의 나이에, 사고사였다. 23년 전의 일이다. 그는 견딜 수 없는 큰 아픔을 남기고 떠났다. 유빈이는 나와 함께 6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놀이터에서 함께 놀았던 일, 교회에 함께 갔던 일, 이해하고 넘어 가도 될 일에 대해 매를 든 모든 일들이 화살촉이 되어 나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집을 나와, 자전거를 타고 조카와 자주 갔던 놀이터로 달려갔다.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나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유빈이를 미친 사람처럼 찾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하나님 왜 우리 조카가 죽어야만 했습니까? 왜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하고 원망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하나님의 음성이 내게 들려왔다. “너는 육신만 죽은 조카의 죽음은 그렇게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모르고 몸과 영혼 모두가 영원히 죽어가는 저들은 왜 불쌍히 여기지 않느냐?”고 반문하셨다.

나는 교회로 달려갔다. 주일학교 담당 전도사님을 만나, 주일학교 반 하나를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전도사님은 쾌히 승낙하셨다. 매 주 토요일 마다 그림 없는 책(주일학교 전도 책자)을 들고 골목, 골목을 누비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조카의 죽음에 대한 모든 아픔 또한 사라졌다. 그리고 생명 살리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도 했다.

마귀들은 항상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중요한 일을 놓고, 급한 일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이별을 눈앞에 두고도 급한 일에 집중되어져 있었다.

그들의 질문을 들어보라,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 로마의 긴 압제 속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은 그들에게 가장 급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향해 그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한 가지를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세상 가운데 살면서 먹고 사는 일이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증인’된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증인은 누구인가?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증인’(μάρτυς, 마르투스) 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례했다. 이는 증인은 순교적 자세를 가지고 보고 들은 것을 (요일1:1) 증거해야 함을 말한다.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매년 1억 3천만 명이 태어나고, 5천 4백만 명이 사망하여 매초마다 4.1명이 태어나고, 1.7명이 사망하고 있다. ‘윌리암 바클레이’가 말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업에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예수님의 마음 치유



감정을 주관하는 홀몬작용



“목사님, 요새는 너무 행복해요 ~~”
우리가 몇 년 전에 미국 대도시에서 치유 세미나를 하면서 이 강의를 했다. “남편이 알아듣게 신호를 바꾸십시오. 말로 하거나 글로 써서 전달하십시오.” 청중 속에 나이가 많은 한국 여성 교수님이 있었다. 남편은 미국인 변호사이고. 이 교수님도 함께 깔깔대며 손벽을 치며 즐겁게 반응하며 강의를 마쳤다. 3년쯤 후에 미국 LA 집회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 부부를 크게 반기면서 이렇게 인사를 한다.
“목사님 내외분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감사하고요.”
“권사님, 뭐가 그렇게 감사합니까?”
“두분 강의를 통해서 제 삶이 너~~무 편해졌어요”
“너무 감사하군요. 자세히 설명 좀 해보세요.”
“제 남편이 미국인이고 변호사이잖아요.. 저를 사랑하지만 작은 일로 많이 부딪쳐 왔답니다. 문화적인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제 남편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너무 몰랐던 것입니다.”
“두 분이 가르치신 대로 제가 남편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제 감정의 신호를 글로 적어 주기로 했습니다. 매일 아침 ‘오늘 할 일들 목록 (To Do List)’을 적어서 남편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을 해 주었습니다. ‘여보, 당신이 오늘 나를 위해서 여기 적힌 일을 해주면 나는 몹시 행복할 거예요.”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이요? (Are you sure?) 이것만 해주면 정말 당신 행복할거요?’ 제가 ‘물론이예요.’ 라고 대답했지요.”
“그날부터 남편은 그 리스트를 들고 다니면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 일들을 최우선으로 해내는 것이었답니다. 그리고는 자랑스럽게 내게 와서 ‘다 했습니다’ 하면서 칭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쁜지요. 칭찬해주고, 감사하고, 뽀뽀해주고... 신혼이 된 것 같아요. 호호호”
최고의 인테리 할머니 할아버지 가정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이다. 당신도 바로 시험해 보시기를 부탁한다.

한달에 한번씩...
그런데 이 남녀 간의 소통 불량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때가 한 달에 한 번씩 생긴다. 그것도 며칠씩 연속해서. 바로 여성의 생리기간이다. 이때는 여성의 감정의 폭은 아래로 위로 더욱 확장이 된다. 더 나아가서 자신도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이 되는가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예상치 못한 감정 신호가 마구 발신이 된다. 남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어제까지 잘 되는 것 같았던 대화 방식이 전혀 통하질 않는다. 아내가 자꾸 싸움을 거는 것처럼 느껴진다. 속이 답답해진다.

실제로 많은 부부들이 아내의 생리 기간 중에 다툰다. 나도 결혼 몇 년이 지나서야 아내의 생리 기간 중에 거의 매번 심한 말다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40, 50 넘은 부부도 마찬가지 상황인 것을 자주 발견한다. 이 상황은 남편이 자녀들과 함께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당사자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권면한다. “아내 여러분, 매달 안방 달력에 여러분의 생리 기간을 표시해 놓으십시오. 그리고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해 주십시오, ‘여보, 이 표시가 있는 날들은 당신이 무조건 나를 품어주시는 날이예요. 내 말을 따지지 말고 들어주시고요...”

나이가 들면 여성들은 갱년기에 접어든다. 이 때는 며칠이 아니라 심한 경우엔 몇 년씩 신체 변화 및 홀몬 분비 상황이 예측을 불허하게 된다. 믿음이 아주 좋은 장로님이 참으로 믿음이 출중한 아내 권사님에 대해서 우리 부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저희 아내가 갱년기를 한 10년 하는데 제가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이 기간은 아내가 환자인 것처럼 대하면서 살 수 밖에 없으리라. 결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홀몬 작용이기 때문이다. 결코 다투어선 안된다. 남편은 ‘아가페’ 사랑을 연습하며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기회로 받고 아내를 겸손하게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주님에게 눈을 고정하면서 말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필객의 붓




내가 네게 장가들어



몇 일 동안 쌓인 우편함 정리를 하는 동안 목덜미에 닿는 햇살이 뜨겁습니다. 눈을 들어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을 보니 생각에 취해 탁하던 정신이 맑게 깨어납니다. 티브이도 안보고 매일의 일기를 적으며 살아도 어느덧 의식의 뜰을 범람하는 생각들 속에서 환영처럼 휘적휘적 살고 있곤 합니다.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다고 한 모세의 고백처럼,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이 너무도 짧은 순간에 어린 시절에서 청년, 중년으로 바뀐 것만 같습니다. 아직도 기억 속에는 젊을 때의 감상들과 영상들이 어떤 것들은 냄새까지도 생생한데, 나의 겉모습은 세월을 따라 순식간에 여기에 이른 듯 합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마저 환영처럼 지나가 버리지 못하도록 오늘의 하늘을 깊게 올려보며 조금 전까지 가득 차 일렁이던 생각을 비워냅니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 투명한 나무의 실루엣을 보며 나무가 토해낸 향긋한 풀 숨을 들이쉬니 마음이 초록빛으로 진정이 됩니다.

세상은 온통 불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치도 불안하다, 경제도 불안하다, 인류의 내일도 불안하다 하는 중에 마케팅까지 불안 심리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보험을 들어라, 예금을 해라, 집을 사라, 투자를 해라, 살을 빼라, 운동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불안이 현실이 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사람들은 불안에 눌려 자리에 누워서도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몫을 빼앗기지 않을까. 내일은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느라 깊이 잠들지 못합니다. 쏟아지는 볼거리와 몰라도 될 뉴스를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신경쓰고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불안에 시달립니다. 사람들은 불안을 떨치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고 술을 마시고 운동을 하고 여행을 가고 친구에 집착하고 쉴새 없이 말을 하고 신경을 예민하게 세우면서 인격과 정신이 누더기처럼 헤어지고 있습니다.

불안이 충만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은혜이며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개척 교회 사모의 직분이 힘들지 않는가 내게 묻습니다. 가족들은 가끔씩 하는 통화에서 목사 사모로써 말 못할 고민 때문에 속을 끓이다 큰 병이라도 얻을까 걱정하여 위로하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사모 라는 직분이 나를 얼마나 죄로부터, 시시한 생각으로부터, 오만하고 경박한 말과 행동으로부터, 미움과 시기로부터 지켜주는지, 항상 선한 생각과 좋은 말들을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덧 내 본심도 선함으로 물들어 가고, 기분에 따라 제 멋대로 나불대던 혀도 길들여져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는 온유한 지혜를 익히고 있습니다. 너무나 값진 인생 대학에서 사람에 대해서 배웠고,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법도 배우고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인내하며 소망하는 법을 배웠고 등 뒤에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 법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늘 예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나의 직분이 범사에 얼마나 큰 유익을 주며 얼마나 나를 붙들어주며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백 만 번의 생애가 주어진다 해도 백 만 번 모두 사모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할 말 다하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하지만 바들바들 기분을 받들며 감정에 종 노릇하면서 결국 옹졸하고 경박한 심성으로 좁아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 생의 여러 도전들을 어떻게 헤쳐나가며 자신과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지 딱한 마음이 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다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정확하다고 믿고 있지만 자신의 인격만큼 보이고 인격만큼 느낄 수 있는 법이라 자신이 살아온 삶에 비추어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의 생각에 비추어 다른 사람의 생각도 그러할 것이라 단정할 따름입니다. 인격의 그릇을 거룩과 관용으로 넓혀 가는 일은 그래서 참 중요한 일입니다. 인격이 갖추어져 있으면 어디서든 그 그릇만큼 받으며 살 수 있지만 많이 갖고도 인격이 망가져 있으면 가진 것마저 길바닥에 쏟아버리고 맙니다.

이 생에서 얻은 가장 큰 영예는 내 땅이 결혼한 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는 불길한 징조를 두려워하고 흉한 소식에 지레 불안해 하는, 황무지나 버림 받은 자의 삶이 아닙니다. 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고 공의를 세워 감독을 삼는(사60:17) 은혜 안에서 세상의 관원들이 적대감으로 대립하고 있고 불공평하고 탈취하는 시스템이 감독이 되어 불안의 요소들이 점점 가중되고 있는 이 때에도, 나의 영혼은 깊은 평화와 쉼을 누립니다. 불안에 바칠 시간들을 창조적인 일에, 미워하고 험담하는 시간을 사랑하는 시간에 바치고 좀 더 참고 견디고 충성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아무 것이나 생각하지 않으며 정절과 인내로서 왕의 신부 된 품위와 인격을 다듬어 갈 것입니다.

그분은 오늘도 나를 영원을 향한 위대한 꿈과 소망으로 흔드십니다.
그분의 권세가 나를 지키고 그분의 부요가 나를 먹이고 그분의 힘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는 믿음 안에서, 그분의 인격, 그분의 생각, 그분의 성품, 그분의 취향으로 물들어 가는 영광, 내게 장가드시는 그 달콤한 사랑, 영원까지 책임지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내 삶에 임하는 때와 시기와 필연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든, 누구를 만나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갚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드센 바람을 맞고선 오늘의 나를 강하게 붙들어 줍니다.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

아브라함 이야기



19. 세워지고, 함께 하고, 계승되어야 할 언약 / 창 17:1-8



언약을 놓으신 하나님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걸으며 흠없이 살기 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창 17:2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이미 하나님께서는 12:2-3에서 아브람에게 약속을 주셨고, 15:4-5에서는 그 약속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5:6에서는 아브람이 이것을 믿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한 15:18에도 보면 언약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언약을 두셨다는 것은 이스마엘 사건을 통해서 무너진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세우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영어로는 15:18이나 17:2이 모두 make로 번역되었지만, 15:18의 ‘세운다’는 원래 ‘자른다’ (cut off)는 의미로 ‘체결했다’는 뜻이고, 17:2의 ‘둔다’는 것은 ‘세운다’ (set up, put)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상기시키신 하나님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있는데 아브람이 하나님과의 사이에 약속을 두지 않고 세상의 관습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과의 사이에 다시 하나님의 언약을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상기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반응
하나님께서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시자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17:3을 보면,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극을 보면, 아무리 관직이 높아도 임금의 명을 가지고 온 전령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임금의 명령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부복하는 자세, 엎드리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좋은 밭과도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30, 60, 100배의 결실함이 있게 됩니다.

함께 해야 할 언약
신앙인들은 누구나 “오늘보다 나은 모습으로 변화되길 소원”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변화를 사모하지만, 무엇이 나를 변화시키는지”에 관해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아브람의 이름을 변화시킨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지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17:4에 보면,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고 나와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결단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함께 할 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언약으로 말미암는 변화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은 우리와 함께 해야 할 언약입니다. 본문 5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언약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변화시킨 것”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이름의 변화는 “그 사람의 가치와 인격, 인생이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의 변화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도하신 사건”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계속해서 세워져야 할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시고, 언약과 함께 이름을 바꿔주신 하나님은 언약을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7절에 보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고 즉, 날마다 말씀에 붙잡혀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며, 우리와 함께 하는 언약이며, 후손들 사이에도 세워져야 할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통하여 축복을 주시고, 우리가 축복을 누리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약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에 내가 사로 잡혀야 합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에 의해 변화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반병섭 소설집 석양을 사는 사람들’ 출간됐다

 

 

반병섭 소설집 석양을 사는 사람들’ 출간됐다



시인 반병섭 원로목사(사진)가 작년 12월, 그를 소설가로 등단케한 “석양을 사는 사람들”의 소설집을 출판했다.

반목사는 2008년 심장 수술 이후 집필을 시작하여 약 3 년 여 만에 탈고, 출간하게되었다면서 “나의 소설은 허구라기 보다는 융합(fusion)으로, 나 자신의 인생 경험과 상상력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작품”이고 밝혔다.

소설집 ‘석양을 사는...’에는 ‘부러진 숟가락’ 등 열 한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의 자서전과 비슷하나 사이사이에 fiction이 끼어 있다.

수필가 한기철 원로목사는 ‘석양을 사는 사람들’의 서평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흘러간 옛 잡담이 되었는데 그에 손에 들어 가면아름다운 소설로 창작된다며 그의 글은 마치 메뉴에 없는 이 세상에 더는 똑 같이 만들 수 없는 단 하나뿐인 퓨전요리같다고 평했다. 다음은 한 목사의 서평 전문이다.

한편, 본 소설집은 본보를 통해 연재될 예정으로 있다.


“석양에 더 빛나는 삶”


‘시는 언어의 예술이지만 소설은 내용의 예술이다. 시에서 언어의 정제를 본다면 소설에서는 관심을 자극시키는 내용을 본다. 시는 머리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소설은 가슴으로 감동되어야한다. 시에서 언어의 은유를 본다면 소설에서는 내용의 단순화를 본다고 말하면서 늘샘은 그의 소설을 fiction에서 fusion한 것이라 했다.

그는 fusion 즉 융화라는 말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에는 그의 삶, 그의 신앙, 그의 고통과 기쁨이 함께 녹아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 그를 보는 것 같고 그를 보면 그의 삶을 보는 것 같아 누구라도 빨리 감동할 수 있다. 마치 메뉴에 없는 이 세상에 더는 똑 같이 만들 수 없는 단 하나뿐인 퓨전요리같다.

그에게는 작품의 소재가 많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야산에 버려진 바위덩어리를 보고 그 속에서 다윗을 깎아내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처럼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흘러간 옛 잡담이 되었는데 그에 손에 들어 가면아름다운 소설로 창작된다.

늘샘과 나는 어느 한 집사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약10분 동안 들려준 짧은 구담을 나는 간증처럼 들었다. 1994년 봄이었으니 그의 나이 70에 나와 함께 들었던 이야기를 10년을 마음속에 두었다가 그가 80에 들어 첫 작품으로 내어놓았다. 그것이“부러진 숟가락”이다. 10여 년 동안 마음속에 삭혀진 이야기를 컴퓨터 자판에 토해냈다.

강 목사는 나지만 이야기를 전해준 집사님과 오버렙되었고 한 목사는 늘샘 작가의 분신으로 자전적 체험소설로 쓰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는 오래전에 이미 잊어진 이야기가 그의 가슴속에서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사랑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한다. 늘샘이 부족한 사람을 들어 소설의 주인공으로 채용한 일은 내가 잊을 수 없고 또한 감사한 일이다. 늘샘의 주인공이 한준호 목사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냈다. 청년이 입고 있던 천 조각이 앙상한 뼈를 감싸고 있었다. “여보!” 갑자기 그녀가 목이 메어 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살아 있나 했더니, 왜 여기에 이렇게 누워 있는 거요? 만철이가 집에서 당신이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데, 왜 당신은 여기에 이렇게 누워있는 거요?” 그녀는 주저앉아 뼈만 남은 시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친척은 그녀를 부축하면서 진정하라고 달래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4년 동안 쌓이고 쌓였던 한을 통곡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이에요. 이것” 아저씨는 손잡이 부분이 반쯤 끊어져 있는 그 놋숟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 목사는 여기서 말을 멈추고, 벽난로 옆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작은 상자를 꺼내어 한 목사에게 보여 줬다. 손잡이 부분이 잘려져 있는 놋숟가락이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숟가락 때문에, 그것이 목사님의 아버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말인가요?” “예, 맞아요. 아버지가 피난을 떠날 때였어요. 어머니는 밥도 싸주고 쌀도 넣어 주었지만 그것으로 며칠을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어차피 거지처럼 밥을 빌어먹으며 도망 다녀야 할 거라고 믿었죠. 그래서 넣어준 것이 이 숟가락입니다. 숟가락이 있어야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도 주머니에 맞게 자른 부러진 숟가락이었습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를 가져야 한다고. 만일 부러진 숟가락이 없었더라면 영영 찾을 수 없는 사랑하는 남편의 유해를 그만이가지고 있는 유일한 징표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징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죽어 많은 시간이 흘러 간 후에도 그 징표만 보면 나라고 할 징표를 말이다. 이 소설이 주는 감동이다.

“석양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소설집을 손에 들고 나는 늘샘이 그토록 소원했던 일이 드디어 성취되었다는 기쁨이 충천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는 그간 시집, 수필집, 설교집, 찬송집, 상담집, 번역 등등 많은 책을 상정했지만 여기에 소설집을 첨가하니 문학의 장르를 통한 달인이 되었다.

나는 ‘타인의 창 2’출판기념회에서 이런 축사의 글을 올렸다.
“빌리 그레함목사의 최근 저서인 ‘Nearing Home’ 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평생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를 배웠지만, 아무도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야하느냐를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라고 썼다. 93살을 살면서 쓴 글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언제 부르실지 모르는 시간에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하느냐는 질문에 도전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질문을 나에게 해 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았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타인의 창 2’에서 그 해답을 찾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겠느냐 보다는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사느냐를 배우게 되었다. ‘타인의 창 2’의 출간을 축하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그의 작품이 어떤 것이던 그 속에서 절규하는 한 소리가 있다. 그것은 인생을 사랑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은 인간구원의 천착(穿鑿)이다. 그래서 그의 아픔과 고통이, 실망과 절규가, 배신과 위협이 아름답게 조각된 여인 같다.

세월은 추억의 창고라고 했다. 나는 그 창고에 세 방이 있다고 생각 한다. 첫째 방은 6.25라는 전쟁박물관, 둘째 방은 이민목회 방, 셋째 방은 석양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방, 이렇게 나누어본다. 부러진 숟가락, 총 없는 병사, 쌕쌕이와 사진, 역출애굽기는 6.25방에서, 엄마와 자전거, 플로리다의 산들바람, 낸시의 십년세월, 유진 엄마는 이민목회 방에서, 석양에 사는 사람들과 추억 나들이는 마지막 방에서 집필이 되었다.

“청년,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거요.”
“그럼 오래 갈 것이란 말씀입니까?”
“동족상쟁(同族相爭)인데....... 피 값을......” 스님은 말을 멈추고 먼 하늘만 바라봤다. 준호 또한 잠시 스님의 시선을 따라 아무 대답 없는 허공만을……. 스님과 서로는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축원을 나누고, 준호는 다시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준호는 길을 걸으며 되묻고 또 되물었다. 무슨 죄가 있어 나는 피난을 다니는가? 예수 믿는 것이 죄인가? 국회의원이 되려고 출마했던 것이 죄인가? 죄일 수 없다. 결코 죄일 수 없다. 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해야하는 것인가? 나를 잡아 고문하고 죽이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이념의 노예가 된 정치인들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무엇이고 민주주의는 무엇이냐? 전쟁은 죄악이다. 동족상쟁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준호는 이런 생각들을 십으며 되새기며 하염없이 걸었다. (역출애굽에서)

늘샘은 625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늘 그의 글은 여기서 시작했다. 전쟁은 죽이고 죽는 야수들의 만행이라 했다. 전쟁은 그의 기억의 창고 속에서 가장 강인하게 새겨진 추억이다. 그런데 그는 이 추억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이 아프고 쓰린 기억이 그의 작품의 시목(柴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민목회는 625방만큼이나 강하게 새겨진 추억이다. 그 자신이 당한 고통이라기보다 그가 목회를 하면서 만난 기구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늘샘은 교인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함께 견디고 함께 울었기 때문에 이민목회 방에는 아름다운 이야기 꽃들이 많다.

평론가 홍형성씨는 이렇게 썼다. “불륜이라는 죄를 범했지만 더럽거나 용서받지 못할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놀라운 능력, <엄마와 자전거>에서 늘샘은 그의 구원론을 피력한다. ‘약자의 죄는 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죄를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을 향한 큰 발걸음임을 설명한다.”

엄마와 자전거에서 뿌리 깊이 박힌 그의 신학을 말한다. 인간구원이란, 육적이며 영적인,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시간적이며 영원한 것, 즉 전인적(全人的)구원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누구나 다 죄인이다.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내리는 것처럼…….

그래도 유진 아버지가 그리할 줄은 몰랐다. 산이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산이 허물어져 자기를 덮는다. 에스터는 그 여인같이 투신하는 것만이 산이 옮겨지는 것이라고 곰곰이 <옮겨지는 산>을 반추해 본다. 밤을 새운 에스터는 그 강, 그 다리 위로 갔다. 투신할 수 있는 자리를 다시 확인해 두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유서를 쓰다가 우연치 않게 목사가 준 시집을 한두 장 넘기는데 물의 시 “他意”가 눈에 들어온다. 물은 어디 자기의 뜻한 바 있어 흐르기 시작했던가. 흐르다가 박힌 바위를 만나면 돌아서 가는 법도…….

에리오트 호텔에서 목사님이 하신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 “모든 것이 합동하여 유익하게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 시와 함께 가슴에 새겨지며 그 의미를 찾고 있었다. “에스터, 에스터 시민권이 나왔어요.” 그의 이야기는 늘 한 곳에 닫는다. 구원이다. 해방이다. 회복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마지막 방은 노란 색으로 칠해졌다. 붉은 해가 기울어지고, 낙엽이 휘날린다. 아주 따뜻한 분위기다. 가운데는 통나무로 만든 탁자가 놓여있고 로즈마리 허브차가 놓여있다. 로즈마리는 피부를 부드럽게 하고 근육 긴장을 완화시켜주며 그 향은 악몽을 막아주고 뇌가 약화 되는 것을 막아주고 뇌를 자극하여 기억력을 촉진 시켜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마지막 방은 아주 따뜻하다.

이 방에는 늘샘이 망구(望九)가 되어도 늘 옆에 있어준 친구들의 이야기가 가득 들어있다. 어떤 이는 이미 떠난 사람도 있지만 늘샘과 함께 있는 친지들이다. 나는 이런 친구들의 이야기를 모아 소설로 승화시켰다는 것에 놀란다. 헨리 포드(Henry Ford)가 주연한 Golden Pond라는 영화가 생각이 난다. 금빛 나는 호숫가에 앉아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이 한 때의 철새처럼 날아간다. 아름답고 행복한 상념에 잠겨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늘샘을 그려본다. 나는 늙음을 만끽하며 살고 있는 그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리고 감사한다. A장군, B장로, C사장, D목사, E권사, G박사의 이야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추억의 창고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나는 이 이야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를 소원한다.

<한기철>
원로목사, 수필가 / 행복보다 더 큰 축복(2009), 영원한 세계로의 긴 여행(2012) / 순수문학 176회 신인상(수필)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