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5. 프랑스의 두 마을 이야기(2): 바닷가 마을 『세뜨』
유대국가 건국사에 가장 영웅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유대인 4,515명을 태운 『엑소더스47』이 떠난 항구
유대국가 건국사에 가장 영웅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유대인 4,515명을 태운 『엑소더스47』이 떠난 항구
지금은 인구증가로 제법 큰 타운이 되었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인 70여년 전의 마을 이야기 - 필자가 가진
엑소더스 47에 대한 자료가 상세하지도 않고 또 그나마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도 않아 지지난 호 <16>에 사진만 게재하고 간단히
설명하였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계신 분이 이스라엘 독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간한 『약속의 땅의 여명』(Dawn of the
Promised Land, The Creation of Israel, 210pp.)이란 책을 보니 『엑소더스47』에 승선하셨던 분의 이야기도
기술되어 있어 반가웠다. 아버지께서 다시 정확하게 글을 쓰라고 하시는구나 생각하고 헌책을 구입하였다.
산골마을『샴봉』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남불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몽쁠리에’(Montpellier)에
도착하였으나 아무래도 대도시는 숙박비가 비쌀 것 같아 이름없는 시골에서 이틀정도 더 지내기로 하였다. 초행길이라 아무 계획이나 지도도 없이
기차가 처음 선 시골역에 내렸다. 조금 걸으니 바닷가 갯벌내음이 코에 와 닿는다.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필자에게는 가슴에 시원한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특징없어 보이는 시골 어항이었으나 골목길로 들어가 조그만 여인숙에 숙소를 정하고 오는 길에 보았던 바닷가에 늘어선 수수한
어촌식당에서 오랜만에 싱싱한 해산물 식사한끼 잘 먹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무엇을 먹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으나 싼값에 맛있게 잘
먹었다. 유럽을 떠나 북미에 온지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유대인 관계서적을 읽다가 이 작은 항구 세뜨(Sete)에서 ‘엑소더스47’배가
출항했다는 역사를 읽고 크게 놀랐다. 나는 몰랐으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셨고, 역사적 현장으로 인도하셨음을 알고 찬송하게 되었다.
1947년 7월 중순 ‘세뜨’항을 떠난 ‘엑소더스’호는 미국 ‘미시시피’강(江)을 오르내리던 증기선으로 120명의
부유한 고객들을 태우고 다녔던 유람선을 개조한 배였다. 유대인 난민 4,515명을 태우고 이스라엘로 일주간 항해예정으로 이 항구를 떠났다.
바다위에서 첫날밤에 두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좋은 징조라고 다들 기뻐하였다. 나흘 째 되는 날, 세 번째 아기가 태어났다. 그러나 죽음의
수용소를 벗어났던 산모는 조국 이스라엘로 가는 배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미 부모들을 독일의 수용소 가스실에서 잃은 고아들만 600명이 넘게
타고 있었던 이 배에 아기고아를 남기고 그녀는 이스라엘의 건국국기가 될 국기에 싸여 바다에 수장되었다. 모두가 다시 불안하고 슬퍼졌다. 온
세상이 박대하였던 세상의 고아 유대인들, 온 세기를 두고 괴롭힘을 당해왔던 세기의 고아 이스라엘. 그러나 저들을 택하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고아의
아버지가 되셨다. 삼사일이 지나자 영국구축함 두 대가 미행하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많은 난민들로 인해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발을 뻗고 잘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일주간의
항해로 모두가 지쳐있었고 극도의 긴장 속에 빠졌다.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태운 이 엑소더스(출애굽)호는 구약의 애굽으로부터의
‘출애굽’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출애굽’(‘출’전세계)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의 ‘하이파’(Haifa)항이 가까워지자 상륙거부령과 배는 하이파
항에서 압류되고 난민들은 다시 영국 구축함 3대에 분승되었다. 이 와중에 최루탄 발사등으로 3명이 죽고 30여명이 부상당한 불상사 속에서 선원
몇 명이 탈출, 이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게 된다. 유대인들은 떠나온 프랑스로 다시 옮겨졌다. 마르세유(Marseille)근처의 다른
소항구(Port-de-Bouc)였다. 프랑스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고집, 하선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단식투쟁 등으로 배는 다시 대서양으로 나가
북상, 바닷가 마을 세뜨 어항을 떠난지 근 2개월 후인 1947년 9월 8일, 패전독일의 영국관할 지역인 함부르크가 가까운
‘리벡’(Luebeck)항 근처인 포펜도르프(Poppendorf)라는 마을에 감금 수용되었다.
독일 땅에는 다시 발을 딛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하선시키느라 항구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 소식은
전파를 타고 온 세계로 퍼져나갔다. 유대인들이 도착하여 재수용된 수용소는 바로 나치가 유대인 감금에 사용하였던 수용소였다. 영국정부의 비 인도적
처사에 온세계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뉴욕, 미국의 수도 워싱턴과 프랑스 빠리의 영국대사관 앞에서의 대대적 시위로 영국정부는 크게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강제로 독일에 억류되었던 이들은 거의 대부분 1년 내로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옮겨졌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다시 전세계의
여론을 크게 흔드심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에 담대함과 용기를 심어주고 계셨다. “우리의 선조의 조국땅을 찾아가는 것이 불법이라니?”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대학살이 시작된 1938년부터 이스라엘의 건국 전 해인 1947년까지 10년 사이에 이미 600,000이 넘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도우셨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전후로 101,000명이, 그리고 1949년에는 239,000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子民)을 순산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 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 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사66:8-10)
지난 달에 캐나다 일간지에서 오려두었던 ‘기뻐하지 않는 자’의 뉴스 한 토막. 남부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법원은 “유대인 대학살”, “가스실” 등등이 사실이 아니라고 TV인터뷰를 통해 주장한 영국 카톨릭교의 주교
윌리암슨(Richard Williamson, 72세)의 발언을 범죄행위로 규정, 형벌을 결정하였다. 전후 독일에서는 “유대인 대학살” 부인,
‘친(親)나치’행위는 중대한 사상범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0088. “공회도, 신조도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
불의한 것은 진리를 산출할 수가 없다. 공회라는 것은 이단근절의 핑계로 하나님의 성도들을 말살하는데 앞장섰고,
교리제정 구실로 이단교리들을 만들어 놓고 거룩한(?) 공회로 가장하였던 저들은 세상을 흑암으로 몰아넣는 암흑시대를 몰고 왔다. 그러나
공회(公會)안에도, 신조(信條)안에도 없었던 생명은 바울이 그토록 강조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비로소 발견된다.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하는
것은 공회(councils)도, 신조(creeds)도 아닌 그리스도(Christ)이다. 진리는 인간들이 진리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도 이미
진리로서 부족함이 없이 존재해 왔으며,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손색없는 진리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공회의 결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미비한
복음이 아니다. 제자, 사도들은 공회가 제정한 신조없이도 예수의 이름 하나만 가지고도 세상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구주여 나와 함께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찬 531 /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①)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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