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9 >





0088. 이스라엘과 크리스챤의 택함의 비밀

하나님의 이정표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때를 알려주는 시계와 같다. 3000여 년 전 다윗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122:6)
이스라엘의 택함, 크리스챤의 택함의 비밀은 같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거울이 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시고 특권과 사명을 주신 것은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었고” 또 “목이 곧은 백성”들이었다(신7-9장/출32장). 이스라엘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의도적인 사랑에 기초한 택하심을 오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쌓아놓은 무슨 공로에 의거하여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원리이다. 우리의 미덕이나 적합성도 아닌 하나님의 순전한 긍휼과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더 악하고 강팍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출애굽의 구원은 넓은 의미에서 영적구원의 한 전형으로 묘사하고 있다(시74:2/107:2/사43:1/렘31:11). 창세기 3:15의 은혜로운 선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택하시고 이루시는 모든 자비로운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 고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 사명이 아니고 특권이라고만 믿는 것은 사단의 유혹이다.’ 자기사랑, 지독한 에고(ego), 이기심으로부터의 구출,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것들로부터의 ‘출애굽’이 요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죄, 자아(自我)속에 있는 세상, 자기의(自己義), 사망’으로부터의 출애굽을 도와서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0089. “그리스도 네 마음에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시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왜 교회가 무기력한가?”라는 주제가 제기되었다. 대답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단체로 죽을 프로그램들로 광분하고 있다. 아무도 구원 못 할 것들로 분주하다. 이미 교회가 아니다. 교회도 크고 사람도 많은데 복음 전하는 교회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강(江)과 바다가 오염되었다고 다들 걱정들 하지만 이 지구 상에서 제일 오염된 지역이 있다면 그 곳은 “십자가의 도(道)”가 전해지지 않는 교회강단보다 더 오염된 지역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듣고있던 젊은 목사님이 상심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지켜야할 율법의 총체로서 들려주신 사랑의 율법이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또는 내가 해야하는 무엇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 이루신 무엇이다. 그 무엇이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이루신 의(義)이다.” 나를 통해 하신 일, 내가 이루어 놓은 무엇 등등은 복음의 결과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이 아니다. 100세에 낳은 “독생자 이삭”(히11:17)을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산(山)에서 바치라고 하신다. 전 성경을 통틀어 아브라함만큼 하나님의 심적 번민 속에 들어간 자가 있을 것인가? 아브라함이 출발한 순간부터 아들은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 죽어 있었다. 사흘 길은 주님이 무덤에 계셨던 시간이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위해 이 복잡한 내 마음의 세상에, 흠없고 티 없으신 아기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하는 계절이다.

0090. 기독교 최초의 교회사 사도행전

우리의 기독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본 교회사라기 보다는 땅에 속한 세상권세 중심의 로마카톨릭종교사다. 천국복음의 본질에 기준을 두고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회사가 아니라 혼합된 ‘에큐메니즘’종교사다. ‘기독교인’이란 용어 또한 “위로부터”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적개념이 결여되어 있고, 땅에 속한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통해 생겨난 제도적 용어로 전락해 버렸다. 기독교회사에서 이 말보다 더 오해를 받아온 단어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신학자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가 가장 짧다”라고 썼다.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세상 지성인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권중심의 교회사를 보고 ‘기독교는 크게 나누어 로마카톨릭교, 동방정교, 프로테스탄트 등으로 나뉜다’는 식으로 썼다. 이는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무지한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어떠한 교단에 속하였든지 간에 기독교 안에는 기독교인만이 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이기 전에 우리는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의 시작은 예수의 복음에서 시작된다. 기독교 최초의 교회사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가 보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카톨릭교인’이나 ‘정통파’로 부름을 받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바울의 전도를 받은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라고 하였다.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벌써 1세기 때부터 사도들이 전해준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유브라데 강(江) 유역, 아르메니아 등의 소(小)아시아 지방에는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한 폴리시안(Paulicians)이란 별명이 붙은 무리들이 일어났다. 침례교회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몬타니스트(Montanists, AD 150년경)파는 소아시아 지방과 아프리카 지역에 퍼져있었던 무리들이었다. 로마카톨릭교의 사제 맥브린(R. McBrien)은 그의 저서 “로마카톨릭주의”에서 이 몬타니스트들을 로마교회보다 더 거룩하였던 집단으로 간주, “정결한 이단”(최상급 표현사용, Purist heresy)이라 썼다. 감리교의 요한 웨슬리를 위시하여 많은 교회사가들은 면밀한 검토를 통해 몬타니스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로 간주하고 있다. 이어서 터툴리안(Tertullians, 2-5세기경)파가 따른다. AD 251년 칼타고 공회에서 파문선고를 받은 당시 로마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었던 노바티안을 따랐던 노바티안(Novatians)파들은 소아시아 지방, 이태리, 북 아프리카 지역에 퍼져 5세기까지 계속 재침례파의 하나로 흡수된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으로부터 “흠을 찾을 수 없는 성도들”이란 별명을 얻은 도나티스트(Donatists)들은 북아프리카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무리들이었다.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이 천지만물 모두 변하나
변찮는 주여 함께하소서

(찬 531 /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②)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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