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가 있고 선교도 있다!?
선교지 정탐에서 돌아온 우리 부부는 카라칼팍스탄으로 사역지를 옮기기로 결정을 했다. 동역하던 이목사님 가정과
믿음교회는 전심으로 지방사역을 돕겠다면서 우리 가정을 격려했다.
사역지를 옮기고자 파송교회의 허락을 요청했다. 그러나 파송교회에서 온 반응은 전혀 생뚱맞은 것이었다. 담임목사님은
파송교회의 사정이 어려우니 다시 돌아와 부목사로 목회를 섬기라고 하는 것이다. 참 난감했다. 전화를 걸어 파송교회의 사정을 물었다. 부목사들이
동시에 사임을 하면서 목회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파송교회의 사정은 어렵지만 언어습득이 끝나가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철수하여 목회를 도우라는 지침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말은 “목회가 있고 선교도 있다”라는
말이었다. 나는 더욱 곤혹스러웠다. 나를 향한 담임목사님의 신뢰는 감사한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사명은 사명이고, 개인의 소명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정중하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미개척지로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나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일은 점점 꼬이고 있었다. 이른 새벽 전화벨 소리가 나를 깨웠다. 파송교회
선교담당전도사가 담임목사님을 바꿔 주었다. 느닷없이 “선교헌금을 교회로 전달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받아 써서야 어떻게 재정의 투명성을
보장하겠냐!”라고 하는 것이다. 영문을 몰라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한 권사님이 선교부담당 전도사에게 나의
개인통장번호를 물어 100만원을 헌금하시고는 다른 교회로 옮기셨다는 것이다. 국제전화도 제대로 되지 않은 지역에 있던 나로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알 수도 없었고, 누가 헌금했다는 것을 확인할 길도 없었다. 결론은 내게 정직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해명을
했으나 마지막 말이 내 맘에 비수와 같이 꽂혔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사역은 진행치를 않고 말만 배우고 있는 정선교사를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이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게 통화는 끝이 났다. 차마 내려 놓지 못하는 수화기에서 들리는 뚜뚜 소리는 마치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중형 선고 같았다. 정죄와 단절, 생명줄(?)이 끊어지는 것 같은 기막힌 현실에 이르고 만 것이다.
개척초기부터 온 삶을 드려 섬겼던 파송교회에 나라는 존재가 하루 아침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말이 온 성도들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제되지 않는 배신감에 몇 일을 뜬 눈으로 세우고 말았다.
선교후원과 선교사 후원이라는 말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만약 선교사가 주체가 되어 선교를 한다면 선교사의
개인적인 소명과 사명이 강조되는 말이어서 선교사후원이 된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당신이 선교사로 사명을 받아 선교하는 일에 우리가
후원하겠습니다” 라는 식이다. 이 말은 선교사가 개인적인 서원을 갚는 일이나 개인적 소명을 위해 교회와 관계들이 동원된다는 의미로 비춰질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선교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빚 아닌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과연 선교라는 것이 선교의 소명을 받은 선교사의 일을
돕는 것인가?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 교회가 선교사를 세워 그 사역을 위임했다면 교회가 주체가 되어 선교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사후원’이라는 말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선교사의 개인적인 서원을 갚는 일에, 개인적인 소명 때문에 선교를
지원한다면 선교사는 교회의 부담스러운 짐인 것이 분명하다. 얼마든지 이런 왜곡된 프레임에 갇혀 있을 수 있다.
나는 파송교회의 관리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분은 방송실에서 예배마다 녹화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집사님,
저희 가정을 파송하고 예배나 다른 모임에서 저희 가정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주저 끝에 나온 대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였다. 고민하며 소명받은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편지를 썼다. “현장에서 러시아말을 배우는 일에 게을렀다고 백 번
질책하셔도 저는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배우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신다면 저는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선교사를 교회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교회에 부담스러운 선교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그런 선교사라면 더 이상 선교비를 받을 수 가 없습니다. 다음
달부터 선교비를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철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 진다. 그러나 그 때는 내가 낼
수 있었던 만용이라면 만용, 용기라면 용기였다.
새벽마다 일어나 무릎을 끓었지만 분노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번번이 소망의 하나님을 붙잡지 못한 채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곤 했다. 어느 날 새벽 주님은 하염없이 머리를 숙인 내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용서하여라.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나는 요나와 같이 대답했다. “주님,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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