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줌과 같이
먼저 집에 돌아가 쉬겠다는 큰 아이에게 차 키를 건네받고 교회로 들어가다가 돌아보니 어느새 저만치 아이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 차 길을 건너 멀어져 가는 아이가 타인의 우주 속으로 사라져 오랫동안 못 만날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일을 하면서 아이의 뒷모습이 부쩍 어른스러워졌습니다. 연약한 날개로 거센 세파의 바람을 헤치느라 애를 쓰고 있는 아이에게 연민의 마음이 들어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며 아이의 인생 여정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아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아이의 머리 위로 끝없이 펼쳐진 하늘 위에서 긍휼과 사랑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 눈가가 젖어옵니다. 아직도 내 눈에는 곱고 어리게만 보이는 아이가 태어나고 이유식을 하고 걸음마를 하고 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를 지나고 건장한 청년이 되기까지의 모습들이 지금 내 눈 앞을 지나는 기억의 속도만큼이나 순식간에 지나간 것만 같습니다. 사춘기를 심하게 겪으면서 나와 갈등의 곬이 깊었던 아이,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덮어줄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남이었다면 영영 원수가 되었을 상처와 격한 말들을 딛고 우리는 서로를 용서했고 마음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용서하고 용서 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류 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피가 피를 뒤대인다는 호세아의 표현처럼 잔인한 보복과 피의 역사가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나라 간의 전쟁, 정치인들의 싸움, 종교 간의 갈등, 교회 안의 당쟁, 부부나 부모 자식 같의 불화, 개인들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욕망과 입장과 상황에 갇혀 서로를 오해하고 원한을 품고 앙갚음을 하고 원수를 맺고 당을 짓는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조금만 부담스럽고 마음에 안 맞으면 바로 서로를 버립니다.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 깊이가 없는 포스트 모던의 문화, 마음을 두고 깊이 뿌리 내리지 앉는 제 멋대로의 삶의 방식에 길들여진 탓인 것 같습니다. 이기심을 충동질하는 많은 지식과 정보에 닳고 닳은 사람들은 순박한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고 맑고 겸손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만과 편견과 아집으로 꼬여있습니다. 서로의 일손을 필요로 하는 일을 기계와 기술과 돈의 구매력에 의지해 살아가기에 오래 지속되는 관계가 없고 기계를 대하고 살면서 사람들은 아량의 폭이 점점 좁아들어 그 때 그 때의 이해 관계와 구미에 따라 징검다리처럼 관계를 합니다. 그러면서 깊이 외로워합니다.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될 때 알파벳과 문법과 발음에 관한 외적인 것 만이 아니라 언어의 근원이 되는 인간 심리까지 혼잡된 것이 분명합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소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가장 가깝고, 같은 상황이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가족들끼리도 조금만 자신의 관점에서 말하다 보면 너무나 쉽게 엇갈립니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을 찾고 객관화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지라 말이 격렬해질 때는 대화를 중단하고 각자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풀어갑니다.
용서가 없다면 진정한 관계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쾌락과 탐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심하게 절뚝이는 인격이기에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상처를 주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용서로 깊어짐이 없다면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만남일 뿐 사랑과 생명을 나누며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관계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상대가 아닌 나를 감옥에 가둡니다.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고 상대는 이미 다른 사안에 몰두하고 있을텐데 나는 그 사건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듭 생각하고 원한을 곱십으면서 인성이 거칠고 무례해져 결국 내 주변의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식탁이나 잠자리가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 용서 받아야 할 사람을 떠올리며 풀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이 생의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영혼을 얽매는 줄이 용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지막 때 일수록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허물을 덮어주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용서가 공동체를 세우는 힘이며 용서가 사랑을 낳습니다. 사랑은 인간적인 매력이나 끌림이 아니라 용납과 허물을 덮어주며 서로를 향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지하수가 무궁무진할지라도 한 컵의 마중물이 없으면 절대 끌어올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먼저 용서하는 작은 결단이 있을 때 풍성한 용서의 수원을 퍼올릴 수 있습니다. 용서의 분량이 커질수록 인격의 저력이 깊어지고 삶의 도전들을 감당하는 능력도 커집니다.
영원한 형벌이 작정된 우리가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용서가 있었기에 우리가 살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영원을 애써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용서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관계의 땅에 예수님의 용서의 씨를 뿌리고 심고 가꾸며 많은 생명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그 놀라운 용서를 전하는 사명을 오늘도 기도로 감당하겠습니다. 이 세상 모두를 품고 동정하는 듯 푸르고 맑고 투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빛으로 내 마음을 물들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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