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만난 동역자 2 - "볼료자, 너는 무엇을 위해 사니?"

구 쏘련 시절뿐 아니라 지금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 사이에는 농사짓는 사람을 ‘고분자’, 농사일을 ‘고분질’, 팀을 이루어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농업시스템을 ‘고분지’라고 한다. 이 말들은 비닐이 없던 시절에 추운 지방에서 일찍 싹을 띄우기 위해 기름 종이를 만들어 씌었는데 이것을 고봉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970년 초기부터 구 쏘련은 식량부족사태를 겪기 시작했다. 그래서 농산물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반인들에게 농사를 허락했다. 여러 농사에 밝았던 고려인들은 일반 직장을 휴직하고 멀리 곡창지대인 백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국영농장의 농지를 임차하고, 현지인 노동력을 사서 대규모 농사를 지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래서 구쏘련 시절 가장 유족한 생활을 한 것이 고려인이었다. 그러나 고분질은 이른 봄 이월 말부터 추수를 마치고 수확을 팔고 돌아오는 11월까지 긴 시간을 집을 떠나 움막에서 생활하며, 백러시아계 사람들에게 ‘니그로’로 불려지는 수모를 겪어야 하는 고달픈 일이었다. 이 고분질은 거의 도박과도 같았다. 일기에 따라 수확량과 값이 결정되는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몇 해 막대한 수익을 얼리다가도, 기후가 좋지 않거나 수확물의 값이 떨어지면 그야 말로 알거지가 되는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많은 고려인들은 그 한 방을 쫓아 서쪽으로 철새처럼 이동했다. 안나의 할머니의 둘째 아들도 그 한 방을 위해 돈을 빌려 우크라이나로 갔다가 낭패를 당하고 돌아오지도 못한 채 간간이 전화로 온 가족의 속을 태우고 있었다. 이런 삶의 형태와 소득구조는 거의 매년 가족이 생이별을 해야 하는 일이어서 가정마다 자녀교육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고, 숱한 가정 파탄을 낳기도 했다.
그 다음 날 아침식사를 마칠 즈음에 안나 할머니가 사택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삼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와, 어제 자신에게 아들에게 빌려 준 돈을 받으러 왔던 그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다. 김 뵬료자. 본명은 김흥문.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거실로 안내를 하는데 볼료자는 두려움과 흥분에 싸여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아침에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안나 할머니는 아침에 볼료자가 자신을 찾아와 어제 자기가 소개할려고 했던 그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소개하는 것 보다는 그 분에 대해 더 잘 소개할 수 있는 분이 한국에서 왔다며 나에게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내가 볼료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점포 두 개를 가지고 소매상을 하는데 아침에 가게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러 가기 위해 차에 타고 시동을 걸려는 순간 어디선가 “볼료자, 너는 무엇을 위해 사니?”라는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이다. 너무 이상해서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는데 그 음성은 너무 강력해서 자신의 지난 삶과 자신이 바라던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게만 보이고, 그러게 살아온 인생이 너무도 허무해 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왜 사는 지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그냥 살기 위해 치열하게 쫓아 다니는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신 분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볼료자의 아버지는 1947년 북한에서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북한에서 나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탈출하여 하바롭스크에서 정착을 했다. 그 곳에서 결혼하여 사 남매를 낳았으나 신분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갖은 고생을 다했다. 막내인 볼료자가 5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농사일이 유일한 삶의 기술이었던 아버지는 극동에서 열차를 타고 아랄남쪽까지 이동해서 고분질을 해서 돈을 벌어 돌아가는 일을 몆 년 동안 하다가 첫 째 누님을 일찍 시집 보내고 삼형제를 데리고 아예 아랄해 남쪽 누쿠스로 이사를 했다.
그 곳에서 아버지는 이른 봄에 고분질을 나가 늦은 가을에야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볼료자는 거의 거리의 아이로 자랐다. 농사일을 떠나면서 굶지 말라고 돈을 가득 쥐어 주고 떠났지만 자신은 그 돈을 관리할 만한 나이가 아니어서 아버지가 돌아 올 즈음이면 거의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는 거지 꼴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찍 세상 떠난 어머니의 정이 그립고, 온전한 가정이 너무 그리웠던 그는 자기 자식들만큼은 고생을 안 시키겠다며 최선을 다해 키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보니 자식들을 편한 집, 좋은 음식을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훈육을 하지 못한 체 밥만 먹이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는 간신히 야간대학을 나와 러시아어 선생님을 했고, 돈을 벌 욕심으로 식당을 차려 요식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놀음에 빠져 카프카즈의 전문도박단에게 걸려 막대한 돈을 날렸다고 한다. 그 돈이면 덤프트럭 10대를 구입할 만한 돈이라고 했다. 그래도 그는 그 때에 시내 중심과 역전에 가게도 운영하고 그 당시 드문 한국산 새 차를 몰 정도로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었다.
그 곳에서 아버지는 이른 봄에 고분질을 나가 늦은 가을에야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볼료자는 거의 거리의 아이로 자랐다. 농사일을 떠나면서 굶지 말라고 돈을 가득 쥐어 주고 떠났지만 자신은 그 돈을 관리할 만한 나이가 아니어서 아버지가 돌아 올 즈음이면 거의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는 거지 꼴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찍 세상 떠난 어머니의 정이 그립고, 온전한 가정이 너무 그리웠던 그는 자기 자식들만큼은 고생을 안 시키겠다며 최선을 다해 키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보니 자식들을 편한 집, 좋은 음식을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훈육을 하지 못한 체 밥만 먹이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는 간신히 야간대학을 나와 러시아어 선생님을 했고, 돈을 벌 욕심으로 식당을 차려 요식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놀음에 빠져 카프카즈의 전문도박단에게 걸려 막대한 돈을 날렸다고 한다. 그 돈이면 덤프트럭 10대를 구입할 만한 돈이라고 했다. 그래도 그는 그 때에 시내 중심과 역전에 가게도 운영하고 그 당시 드문 한국산 새 차를 몰 정도로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었다.
그는 진지하게 다시 나에게 물었다. 자신에게 “너는 무엇을 위해 사냐?”라고 물었던 그 분이 누구시냐고 물었다. 나는 어제 안나 할머니가 볼료자에게 누구를 소개하려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분이 찾아오셔서 볼료자를 지금 부르고 계신다고 대답했다.
복음을 들은 그는 큰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리고 몇 일 지나 주일엔 온 가족을 다 데리고 교회에 출석했다. 그리고 그는 교회 건축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더니 결국 헌당을 앞두고 신학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신학생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목회수업에만 전념했다. 그는 그 땅의 교회와 함께 안팎으로 숱한 풍파를 겪었으나 변함없는 나의 동역자요,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카라칼팍스탄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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