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6. 구세군 창설자『부스』대장의 예견
구세군 창설자 『부스』(William Booth 1829-1912)는 다섯 번의 “어찌?”(고후6:14-16)로
100년 후의 오늘의 교회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신 분이다.
“다가오는 세기의 가장 큰 위험은 :
1) 성령없는 신앙
2)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3) 회개없는 사죄함
4) 거듭남없는 구원
5) 지옥 없는 천국이 될 것이다”
“다가오는 세기의 가장 큰 위험은 :
1) 성령없는 신앙
2)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3) 회개없는 사죄함
4) 거듭남없는 구원
5) 지옥 없는 천국이 될 것이다”
0137. 주님과의 연합으로 나타나는 성품의 변화
‘인간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철인(哲人) 아리스토 텔레스의 말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믿는 것이
있다. 심지어 무신론도 사실은 하나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배제된 지식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는 종교이다.
자기의(自己義)에 빠지면 죄를 깨달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만(自慢)으로 발전하여 결국은 자기기만(自己欺瞞)에 이른다. 불신(不信)의
가치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기 고집으로 자기 운명(죄)에 밀착, 죄와 함께 멸망당할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위에서 임한 것이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살게 하시고 또 죽게 하셨다. 복음의 목적 또한 위로 향해야하는 이유는 복음은 위의 것에 관한 이야기로 하나님의 말씀은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고, 머리(그리스도)를 붙들라고 명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기원을 둔 어떠한 종교행위도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최초의 원수인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이기신 십자가 신앙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배운다. 영혼구원, 교회부흥도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위에서 임한 것이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살게 하시고 또 죽게 하셨다. 복음의 목적 또한 위로 향해야하는 이유는 복음은 위의 것에 관한 이야기로 하나님의 말씀은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고, 머리(그리스도)를 붙들라고 명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기원을 둔 어떠한 종교행위도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최초의 원수인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이기신 십자가 신앙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배운다. 영혼구원, 교회부흥도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은사를 체험하고 그 일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은사, 치유, 기적 등등을 통해 유혹, 멸망으로 이끌어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떠난 방언운동, 치유기적도 보았다. 주님께 영광돌리는 대신 자신을 드러내기위해 온몸으로 열중하며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 자체를
예배하는 것도 보았다. 기적은사 소유자로서, 또는 언제나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로서의 자신의 지위확립을 위해 영적권능을 오용하는 자들로서
성삼위 하나님을 자기들이 원하면 언제나 부릴 수 있는 무슨 (불)가시적인 힘으로 남용하기도 한다.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 스스로 자신에게
주인이 되고 기도도 자신에게 한다. 기독신앙에 있어서 은사가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주님과 연합, 하나가 됨으로써
나타나는 성품의 변화이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쇼(show)나 시위가 아니다.
우리 자신들의 이기적이고도 탐욕적인 필요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순종 중심의 기독신앙으로의 전환하지 않으면, 즉 위로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산만하고도 요란한 주위의 필요에 눌리게 될 것이다. 복음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주님의 삶은 주님 주변에서 밀어닥치는 그 많은 필요들에 끌려 다니면서 종이 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은사의 원천이신 예수님의 삶은 군중들의 요구에 의해 지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된 것이었다. 인간의 요구 혹은 요청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심으로 정해졌다.
우리 자신들의 이기적이고도 탐욕적인 필요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순종 중심의 기독신앙으로의 전환하지 않으면, 즉 위로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산만하고도 요란한 주위의 필요에 눌리게 될 것이다. 복음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주님의 삶은 주님 주변에서 밀어닥치는 그 많은 필요들에 끌려 다니면서 종이 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은사의 원천이신 예수님의 삶은 군중들의 요구에 의해 지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된 것이었다. 인간의 요구 혹은 요청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심으로 정해졌다.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보다 놀라운 말도 많지 않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 집중하여 이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보잘것없는 우리의 의(義)를 내세우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선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간과 인간의 개선에 대해 분주해지고, 죄로부터의 구원은 종교적이고도 도덕적인 개선을 통한 자아의 향상과
행복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내지 내(自我) 마음의 평화를 내세우며, 하나님앞에서의 의(義)와 거룩한
삶이 아니라 자아앞에서의 행복한 삶으로 하나님보다 인간에게 초점을 둠으로써 하나님의 거룩을 배제하고 우리의 행복이라는 미궁에서 길을 잃게
된다.
우리 스스로가 복음의 중심에 앉아 주인노릇을 하며 지나치게 분주한 노력과 또 우리 자신의 변화된 삶에 목을 맬 때,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셨던 위선은 이미 우리의 영혼에 은밀히 잠복해 들어와 그 위선으로부터도 구원받아야할 새롭게 추가된 영역은 더욱더 넓어진다.
우리 스스로가 복음의 중심에 앉아 주인노릇을 하며 지나치게 분주한 노력과 또 우리 자신의 변화된 삶에 목을 맬 때,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셨던 위선은 이미 우리의 영혼에 은밀히 잠복해 들어와 그 위선으로부터도 구원받아야할 새롭게 추가된 영역은 더욱더 넓어진다.
0138. “그는 흥하여야겠고” - 나의 원수는 바로 나 자신이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마9:14)등 인간의 유전에 중독된 자들의 물음은
온통 종교적인 것들로 차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종교적인 규율에 매이지 아니하셨고 이는 예루살렘 성의 ‘스캔들’거리가 되었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종교적 환경을 떠나 산 꼭대기 변화산상에서 변형된 자신을 보여주셨다. 종교안에서는 ‘나’(我)를 부르짖고 복음안에는 “그는
흥하여야겠고”(요3:30)라고 주님 제일주의가 된다. 종교는 전통자랑, 건물자랑, 이 생(生)의 자랑으로 꽉 차있으나 기독교에서는 예수 밖에
자랑할 것이 없어 바울은 예수 이외의 것을 모두 배설물로 보았던 것이다. 종교적 출세주의자들은 직분을 직위와 감투로 착각, 섬기려는 자세보다
군림하려 들며, 이들 때문에 신앙의 자유가 교회 안에서 방해를 받는다. 직분을 받은 자들이 종교 안에 머물 때, 그 옛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았을 때 토해낸 “화로다 나여…나를 떠나소서…”라는 두렵고 떨리는 고백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종교적인 야심은 늘 비본질적이고도 외적인 것에 대해 전문가가 된다. 의식과 예식을 수행한다거나 규칙을 준수할 때에도 예외를 두는 법이 없다. 세세한 것에 대해서는 그들을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전문가였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율법의 목적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율법의 철자하나에까지 까다롭게 굴었지만 정작 그 율법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에 대해서는 외인이었다. 저들은 자신이 처한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자신들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크게 당황하였고, 때로는 전전긍긍하였다. 타인에게 얼마나 존경받는가 하는 도덕적이고도 외적인 처신에 대해서는 세련된 자들이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죄인이 바로 설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왜 그러한가? 종교적인 야심은 늘 비본질적이고도 외적인 것에 대해 전문가가 된다. 의식과 예식을 수행한다거나 규칙을 준수할 때에도 예외를 두는 법이 없다. 세세한 것에 대해서는 그들을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전문가였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율법의 목적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율법의 철자하나에까지 까다롭게 굴었지만 정작 그 율법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에 대해서는 외인이었다. 저들은 자신이 처한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자신들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크게 당황하였고, 때로는 전전긍긍하였다. 타인에게 얼마나 존경받는가 하는 도덕적이고도 외적인 처신에 대해서는 세련된 자들이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죄인이 바로 설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종교인은 자기 편리대로 말씀을 써먹고, 기독교인은 말씀(그리스도)에 쓰임당한다. 예수께서는 세리도 용납하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창녀도 그 자리에서 사함을 주셨다. 그러나 천국복음을 가지고 종교놀이에 빠졌던 지도자들을 꾸짖는 곳에서는 가장 큰 분노의
음성을 발하셨다. 그는 종교인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3년 반이나 물고 늘어지셨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회칠한무덤…”(마23장). 그들은 6백가지가 넘는 율법을 지키는 데는 대단한 노력을 경주했으나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 한 가지도 못 지켰다(요13:34,35).
실로 그리스도는 종교의 사슬에 매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말씀으로 임하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나 인간영혼의 중심인 마음을 겨냥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여러 방면에서 옳다고 할지라도 영혼이라는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문제가 있어 잘못된 지점에 서있다면 타인에게는 빛처럼 보일지라도 실상 하나님앞에서는 끔찍한 어두움일 뿐이다. 자신의 겉모습으로 타인을 속일뿐 아니라 자기자신도 속임으로써 스스로 속아 살면서도 자신은 아니라는 무지함과 동거하는 것이다. 원수는 바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결국 온갖 종교적 외양을 갖추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의 종교지도자들은 지극히 높은 자에 대한 유일한 참예배자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과신한 나머지, 그 교만은 시기증오로 변해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세상이 조롱하는 예수, 그는 종교(예루살렘) 바깥으로 끌려나가 처형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실로 그리스도는 종교의 사슬에 매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말씀으로 임하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나 인간영혼의 중심인 마음을 겨냥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여러 방면에서 옳다고 할지라도 영혼이라는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문제가 있어 잘못된 지점에 서있다면 타인에게는 빛처럼 보일지라도 실상 하나님앞에서는 끔찍한 어두움일 뿐이다. 자신의 겉모습으로 타인을 속일뿐 아니라 자기자신도 속임으로써 스스로 속아 살면서도 자신은 아니라는 무지함과 동거하는 것이다. 원수는 바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결국 온갖 종교적 외양을 갖추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의 종교지도자들은 지극히 높은 자에 대한 유일한 참예배자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과신한 나머지, 그 교만은 시기증오로 변해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세상이 조롱하는 예수, 그는 종교(예루살렘) 바깥으로 끌려나가 처형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0139. 존 스토트 / 빌 브라이트 / J. I. 패커
종교는 부패한 인간 안에서 시작된 것이며, 복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중(心中)에서 떠나온 ‘복된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품고 계획하신 것으로 그 광대함은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것이다. 이 복음의 전제는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 최고의 범위마저도 초월하기 때문에 복음 그 자체를 완전무결하게 이해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길은 결코 넓은 길이 될 수가 없는 ‘좁은 길’(마7:13,14)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어떤 사상들보다 본질적으로 단순하며 직접적이라는
사실이다. 니고데모 같은 위대한 율법의 선생이나 세상의 지혜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이 복음은 한편으로는 어린아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 정도로 또한
단순하고도 직접적이다. 그래서 주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12:32)고 위로하셨던 것이다. 실로 기독교회사에 기독교인이 대다수가 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유의하시라. 외형적인 것은 점점 크고 비대해지며 목청도 높아지는데 속은 비어져가고 진리의 증언은 자취를 감춘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이 사실을 간결하게 들려준다: ‘외양의 크기로 성공을 과시, 내가 헌신한 자라면 많은 사람과 돈이 필연적으로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양의 크기와 영적 세력이 병행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정반대의 입장을
가르치신다(이것은 특히 예수님의 교훈에 나타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자리를 택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것을 가르치신다.
우리 인간은 큰 사업과 큰 자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데 이러한 강조는 육에 속한 일이다. 낡고 중생하지 못한 이기주의적이며 자아중심적인
나(我)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육에 속한 오락과 습관 이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그러나 실은 신(新, Neo-)복음주의의 대부(代父)격인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이 2천 여 명의 영국복음주의자들 모임에서 행한 천주교회와의 일치연설 (“…and evangelicals should join
others in the Church of England in working toward full communion with the Roman
Catholic Church”-the 2nd Nat’l Evangelical Anglican Congress, April. 1977)이나 빌
브라이트(Bill Bright) 박사의 로마교황청과의 협력으로 전 세계대학캠퍼스를 영적 간음터의 본거지로 오염시켜 대학 캠퍼스를 황폐화시킨
지도자의 무지 (“BB said… We believe God is doing a mighty work in it and will no doubt
use millions of Roman Catholics to help evangelize the world” - The Post &
Times Star, Cincinnati, OH. Aug. 30, 1969 / “Campus Crusade has had Roman
Catholics on staff. In an Interview ‘Wittenburg Door’, June-July 1978, Richard
Quebedeau noted, ‘In Ireland, Campus Crusade is registered as a religious
order…And they work entirely within the Catholics Church there with Catholics
because there is nobody else to work with’”)나 그리고 ECT(Evangelicals Catholics
Together) 문서에 서명한 패커 (J.I. Packer) 박사의 구차한 변명(“Why I Signed It”- Christianity
Today, 12 Dec. 1994)에다 로마교황 추종자 니키 검벨 (Nicky Gumbel)이 창안, 로마교황청이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배도의 과정인 ‘Alpha Course’까지 추천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였다. 참으로 피조물된 인간의 지식의 한계와 하나님의
긍휼을 떠나선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실감케 한다. (* 스토트 목사님의 마지막 책인 ‘제자도’는 일독을 권한다.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그 분처럼 단순하고 검소해야 한다고 믿는다. 참으로 신앙적인 삶은 항상 단순할 수 밖에 없으며, 단순함은 또한 하나님의 법이자 방식이기도
하다. 시사주간지가 스토트 목사님을 두고 “개신교의 교황”이라고 모독한 기사를 그의 책을 출판하는 한국의 출판사가 이 말이 무슨 명예인 것 같이
소개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무지가 아닐 수가 없다. 패커 목사님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권한다. 생선은 뼈를 잘 골라내고 드시라는
뜻이다.)
쉐퍼 (F.A. Schaeffer, 1912-84) 박사는 워싱턴 DC에서 있은 NAE (Nat’l
Association of Evangelic
als)컨벤션에서 행한 메시지에서 “복음주의가
숫자에 치우쳐 점점 거대해지나, 그 복음주의 (evangelicalism)라는 것이 더 이상 ‘복음적’(evangelical)이 아니면 무슨
짝에나 쓸 것인가?” (“The Watershed of the Evangelical World” at the 1976 - “What is the
use of evangelical for seeming to get larger and larger in number if significant
number of those under the name of ‘evangelical’ no longer hold to that which
makes evangelicalism evangelical?”) 라고 묻는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찬 188 / 만세 반석 열리니 ①)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찬 188 / 만세 반석 열리니 ①)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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