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7일 토요일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40)



내가 이제야 응답하노라



카라칼팍스탄에 도착한 나는 아파트를 임대하여 기거하며 교회개척을 시작했다. 옆집에는 새롭게 선교사로 부임한 연세가 지긋하신 김 선생님 가정이 살고 계셨다. 김 선생님은 미국에서 동원사역을 하시다가 현장으로 나오셔서 학원에서 비즈니스 영어를 가르치고 계셨다. 아침마다 사모님이 가족을 두고 온 나를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나는 늘 허기지듯 아침이 기다려졌다.

과부 6-7명과 아이들로 모여 시작된 가정교회는 고려인 문화센터 안에 있는 방 하나를 임대하여 예배처를 옮겼다. 한국에서 목사가 왔다는 소문과 함께 본격적인 전도가 시작되면서 가정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두고 와서 홀로 때론 외로움이 몰려 왔지만 갓 예수를 믿기 시작한 성도들을 양육하고 열심있는 몇 사람을 집중적으로 훈련하느라 변변찮은 러시아 말로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혼자 생활한지 3개월이 지난 11월 중순. 성도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왔다. 한국사람이 자기 집으로 전화를 해서 나를 찾았는데 다시 전화를 할 것이니 나를 불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택시를 잡아 타고 그 집으로 갔다 얼마 뒤 전화 벨이 울렸다. 놀랍게도 수영로교회 선교담당목사였다. 그 당시만 해도 그 곳으로 국제전화가 연결되질 않았다. 놀란 나는 어디서 전화를 하느냐고 물었다. 타슈켄트에 도착해서 파송선교사를 방문 중인데 내일 선교부장 장로님과 함께 나를 만나기 위해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 올 것이라며 비행기 도착시간을 알려주었다. 나는 갑자기 웬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기쁜 소식을 들고 갈 것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기쁜 소식? 설레는 마음으로 거의 잠을 설쳤다.

시골 한적한 공항에 내린 두 사람의 차림새가 튀어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왔다. 마중 나온 나를 연세 지긋한 장로님께서 꼭 껴안아 주시며 “목사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희 교회에서 목사가정을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리 연락을 취해도 제대로 연결이 되질 않아 직접 현장을 방문하고 목사님을 모시고 갈려고 왔습니다. 파송준비가 다 되었으니 한국으로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교회가 본 출신교역자가 아니면 파송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선교담당목사는 교회가 숙고 끝에 우리 가정의 파송하기 위해 규정을 고쳤다고 설명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기만 했다.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는 소식에 온 성도들이 모여 두 분을 환영했다. 장로님은 처음 예수를 믿는 고려인 할머니들의 간증을 듣고는 감격하셔서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다. 그렇게 몇 일을 지내고 나는 두 분을 따라 파송을 받기 위해 한국으로 갔다.

떨어져 생활하던 아내는 거의 회복이 되어 있었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파송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아내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부산으로 내려간 우리 가족은 교회에 도착하여 게스트 하우스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몇 일간 잠을 설쳐야 했다. 숙소는 골목 하나를 두고 본당 지하의 기도실과 불과 몇 미터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밤새 기도하는 소리로 숙면하기가 어려웠다. 몇 일이 지나자 기도실에서 부르짖는 기도의 내용들이 조각모임 하듯 내 마음에 그려졌다.
‘부산성시화,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
이삼 주가 지나고 파송예배를 드리는 날이 되었다. 예배 직전 나는 먼저 기도하기 위해 본당으로 들어갔다. 본당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앞자리로 걸어 나가는데 강대상과 붙여진 배너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9개월 기도할 때 꿈으로 보여주셨던 그 꿈 그대로 였다. 흰 강대상과 뒤에 걸려진 ‘카라칼팍종족입양 정성헌, 김은숙 선교사 파송예배’라고 쓰인 배너. 내 마음의 소원을 주시고 결국 이루어주신 그 주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했다.

파송예배가 시작되었다. 선교사 서약이 끝나고 안수를 하는데 많은 분들이 강대상으로 올라와 파송기도를 했다. 그 많은 기도 속에서 끓어 앉은 나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다. 내 귀엔 더 이상 어떤 사람을 기도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차단벽, 마치 방음벽이 쳐진 것 같았다. 주님은 일대일로 대면하시는 것처럼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야 10년 전 너의 기도를 응답하노라.” 순간 나는 주님, 제가 10년 전에 무슨 기도를 했지요라는 질문이 나갔다. 그러자 너무도 선명하게 사진처럼 한 장면이 크로즈업 되며 나타났다.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 9월말 올림픽선교컨퍼런스가 열렸던 서울광림교회 본당에서 내가 정필도 목사님의 와이셔츠 옷깃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주님 저는 서 발 장대를 휘둘러도 맞을 사람이 없는, 사돈에 팔촌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는 가정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를 위해 목회하신다는 이 분과 동역할 기회를 주십시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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