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24. 무엇이 중요한가? 행복이 아니라 구원이다. 기독교
실용주의는 복음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거나 행복을 약속한다는 류(類)의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자기요구, 자기불만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높은 지성, 지식, 교양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모든 덕을 갖춘 모범적인 사람이 완벽한 삶의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아도 여전히 그는 불행하다. 이 행복이라는 것은 기독신앙에서
주어(주체)가 될 수 없는 단어다.
인간들이 행복을 그렇게도 찾고 있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비극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선진국일수록
‘불행지수’가 높고 한 때 한국의 ‘행복 대사(大使)’로 알려진 분의 자살기사도 보았다. 현대인들은 죄(罪)보다 자신의 운명을 더 중요히
여긴다. 제2 바티칸공회(1962-65)가 끝나자 온 세상의 일간신문에 ‘오늘의 당신의 운명(사주팔자)’이라는 기사가 실리기 시작하였다.
천주교의 중세암흑시대가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죄가 바로 인간의 운명인데도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는 사단의 전략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끔 되어있다. 죄가 그 사람의 운명인 이유이다.
0125.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5) 누가복음 ②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구원하시는 구원이라…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리라”(눅1:67-79).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단의 반역으로 인간에게도 들어왔다. 죄가 만들어 놓은 그 장벽과 참혹한 결과와 엄격한 실체로서의 죄를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은 사단의 전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부정적인 (매사에 ‘긍정적’이라는 신복음주의 철학을 경계하시라) 정죄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이 세상의 삶이 정상적이 아니고 악하다는 것이다.
전 신약성경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죄의 심각성은 복음서의 전 장(章)에 도배되어 있으며 죄가 매우 심각한 함의를 갖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죄에 대한 사려깊은 고찰과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기독교는 바로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로 흘러들어가게 되어있다. 신복음주의는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마저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도 없고 거듭남이 없으니 구원의 감격이나 확신의 기쁨이 매말라 있는 것이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천국보다 지옥에 대해 더 많은 분량을 언급하고 계심을 보게된다. 죄의 실재성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까지 들어온 세상의 철학, 신정통(신복음)주의 영향으로 인하여 죄의 영원한 결과를 부인하기에 이르렀고 ‘사랑’이란 단어에 대한 현대인들의 천박한 개념은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오해하여 결국은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구원받는다는 현대적 개념에 기만당하고있다(『칼 바르트』부터『헨리 나우엔』등등에 이르기까지). 천국개념은 그대로 흠모하면서도 지옥개념은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영생과 영벌’의 ‘영원한’이란 헬라어는 같은 단어이다. 신복음주의 성경의 대표격인 NIV성경은 구약의 33곳에 언급되어있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100%, 신약에서는 48%를 제거하였다. 다른 ‘지옥’개념의 다른 역(譯)인 ‘하데스’(hades)는『무슬렘』,『뉴에이지』철학에서는 ‘극락, 낙원’을 뜻하는 단어이다. 뉴에이지 이단『죠엘 오스틴』(Joel Osteen)목사(?)는 자기는 “죄”(sin)라는 단어는 입밖에도 내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천명한다. 교회성장세미나 강사라는 자가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교회성장 비결의 하나로 절대로 교인들에게 회개를 강조하면 안 된다고 고매한(?) 방법론을 설파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목회(牧會)인지…? 다들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선한 체 하며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랑이 진리를 희생시킬 때 그 사랑은 이미 참사랑이 아니다. 기독교가 죄인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그럴듯한 사상에 불과한 것이며, 주님과의 확실한 인격적인 관계맺음이 없이 그의 가르침만 수용한다면 그 순종없는 지식은 오히려 우리를 크게 정죄할 뿐이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구원하시는 구원이라…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리라”(눅1:67-79).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단의 반역으로 인간에게도 들어왔다. 죄가 만들어 놓은 그 장벽과 참혹한 결과와 엄격한 실체로서의 죄를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은 사단의 전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부정적인 (매사에 ‘긍정적’이라는 신복음주의 철학을 경계하시라) 정죄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이 세상의 삶이 정상적이 아니고 악하다는 것이다.
전 신약성경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죄의 심각성은 복음서의 전 장(章)에 도배되어 있으며 죄가 매우 심각한 함의를 갖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죄에 대한 사려깊은 고찰과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기독교는 바로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로 흘러들어가게 되어있다. 신복음주의는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마저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도 없고 거듭남이 없으니 구원의 감격이나 확신의 기쁨이 매말라 있는 것이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천국보다 지옥에 대해 더 많은 분량을 언급하고 계심을 보게된다. 죄의 실재성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까지 들어온 세상의 철학, 신정통(신복음)주의 영향으로 인하여 죄의 영원한 결과를 부인하기에 이르렀고 ‘사랑’이란 단어에 대한 현대인들의 천박한 개념은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오해하여 결국은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구원받는다는 현대적 개념에 기만당하고있다(『칼 바르트』부터『헨리 나우엔』등등에 이르기까지). 천국개념은 그대로 흠모하면서도 지옥개념은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영생과 영벌’의 ‘영원한’이란 헬라어는 같은 단어이다. 신복음주의 성경의 대표격인 NIV성경은 구약의 33곳에 언급되어있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100%, 신약에서는 48%를 제거하였다. 다른 ‘지옥’개념의 다른 역(譯)인 ‘하데스’(hades)는『무슬렘』,『뉴에이지』철학에서는 ‘극락, 낙원’을 뜻하는 단어이다. 뉴에이지 이단『죠엘 오스틴』(Joel Osteen)목사(?)는 자기는 “죄”(sin)라는 단어는 입밖에도 내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천명한다. 교회성장세미나 강사라는 자가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교회성장 비결의 하나로 절대로 교인들에게 회개를 강조하면 안 된다고 고매한(?) 방법론을 설파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목회(牧會)인지…? 다들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선한 체 하며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랑이 진리를 희생시킬 때 그 사랑은 이미 참사랑이 아니다. 기독교가 죄인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그럴듯한 사상에 불과한 것이며, 주님과의 확실한 인격적인 관계맺음이 없이 그의 가르침만 수용한다면 그 순종없는 지식은 오히려 우리를 크게 정죄할 뿐이다.

0126. 카톨릭교도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종교적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Gospel)은 종교가 아니다. 이 복음을 종교의 하나로 전락시키려는 마귀의 궤계는 늘 하나님의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가라지로 심어졌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헤롯에게 고했으면서도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종교적 무리를 향하여 “너희가…성경을 상고 하거니와…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라고 책망하셨다.
1984년, 로마 교황의 벨기에 방문을 앞두고 로마카톨릭교회의 단넬스 추기경이 발표한 3.18선언 - “카톨릭교도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종교적이다” - 은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의 진실을 제공한다. 첫째, 로마카톨릭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별개의 종교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 중 어떤 이는 대단히 종교적이란 사실이다. 칼 마르크스 (Karl Marx, 1818-83)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염두에 두었으나 그는 기독교가 종교와 상관이 없는 ‘복음’인 것에 무지했다. 천주교신자였던 어느 자매가 기독교인 신랑을 만나 그 집안을 존중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보도한 기사를 보았다. 우리들이 은연중에 사용하는 개종(改宗)이란 단어의 의미를 독자는 음미하길 바란다(장로교에서 감리교로 ‘개종했다’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리스도 교회안에서도 아직도 방황하며 카톨릭처럼 종교성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려는 유혹이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규칙을 따라 사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율법적 순종과 복음적 순종이 주의깊게 구분이 되지 못할 경우 복음이 자유케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을 옥죄는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시대의 인간의 마음은 율법주의의 오류로 흐르는 그릇된 판단을 추종해왔다. 율법의 책임과 인간의 순종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하나의 율법주의의 계약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즉 언약을 계약으로, 하나님의 은혜나 성령의 은사를 인간의 순종함에 조건부로 주어진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준수는 결국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자비를 제쳐놓고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더 큰 강조점을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죄악된 인간의 심중에서 유래된 이성의 바탕 위에 복잡한 율법사상체계를 가진 구원관을 강조하고 체계화하여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자랑하고 옳은 삶을 통한 구원을 강조함으로 스스로 사단의 ‘종교성’이라는 올무에 걸려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뿌린 옷”(계19:13), 즉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義)로다 하더라”(계19:8, kjv, “the righteousness of saints” / “성도들의 의”를 대부분의 현대역 성경들은 1881년 로마교황추종자『웨스트코트/호르트』에 의해 천주교의 행위구원인 ‘옳은 행실’로 바꾸어져 있음에 주의하시라)를 거절하고 자기 의(義)에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 속이는 자로서의 마귀의 궤계는 다양하며 한 인간이 ‘여자, 술, 도박’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되면 사단은 반대로 경건의 모양을 무기로 낚아채는 것이다. 물론 이 경건이라는 것은 참이 아닌 ‘사악한’ 경건으로 바리새인들이 붙들었던 자기의(自己義)이었다.
0127. 악(惡)으로부터 벗어나려하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자비없이는 불가능하다
한 인간의 영혼에 큰 기적이 일어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탐색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인 믿음, 즉 “계시될 믿음”(갈3:23)이 주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믿음에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아래에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있는 것이다. 종교를 답습하며 율법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경쟁할 뿐 아니라 은혜를 대적하는 무기로 율법을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 이성, 영혼이 다 무너져 내리는 그 곳이 바로 십자가의 그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기독교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1:23 / 1:18 / 2:2 / 갈6:14참조).
복음의 기준은 때로는 세상에서 한없이 불리한 것이다. 복음의 목적을 이 세상에 맞추지 말라. 모든 것을 잃는다해도 영생에 이르는 구원에 두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모한 것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의 같은 이야기의 연속이다.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행한 설교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요구가 ‘회개에의 요구’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회개하여…구원을 받으라”(행2:38-40). 그리하여 “헛된 일을 버리고…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함이라”(행14:15). 자기중심적인 속박된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자유의 삶이라는 은혜의 선물을 받아 누리라는 초대이다. 회개는 하나님께 하게 되어있지 사람들에게 ‘드러내는’(『드러냄』, 치유와 회복)것이 아니다. 모든 혀가 하나님께 직고하게 되어있지 천주교의 고해성사가 아니다. 이 역시 웨스트코트/호르트에 의해 변개된 구절에 기인한다. “너희 허물(fault)을 서로 고하며…”(약5:16)의 ‘허물’을 “죄(罪)”로 변개, 고해성사를 합리화하였고 영국고교회(High Church of England)와『옥스포드』운동(Oxford Movement)과 천주교에서 이를 교리화하였다(1881년 7월에 발간된 아일랜드의 카톨릭계 신문 ‘Dublin Review’는 이제 천주교 신부들은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The Apostles have now power to ‘forgive’ sins, and not simply to ‘remit’ them. ‘Confess therefore your sins’ is the new reading of James 5.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복음의 중심에 둘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다른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에 관한 지식조차도 올바른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84년, 로마 교황의 벨기에 방문을 앞두고 로마카톨릭교회의 단넬스 추기경이 발표한 3.18선언 - “카톨릭교도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종교적이다” - 은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의 진실을 제공한다. 첫째, 로마카톨릭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별개의 종교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 중 어떤 이는 대단히 종교적이란 사실이다. 칼 마르크스 (Karl Marx, 1818-83)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염두에 두었으나 그는 기독교가 종교와 상관이 없는 ‘복음’인 것에 무지했다. 천주교신자였던 어느 자매가 기독교인 신랑을 만나 그 집안을 존중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보도한 기사를 보았다. 우리들이 은연중에 사용하는 개종(改宗)이란 단어의 의미를 독자는 음미하길 바란다(장로교에서 감리교로 ‘개종했다’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리스도 교회안에서도 아직도 방황하며 카톨릭처럼 종교성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려는 유혹이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규칙을 따라 사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율법적 순종과 복음적 순종이 주의깊게 구분이 되지 못할 경우 복음이 자유케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을 옥죄는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시대의 인간의 마음은 율법주의의 오류로 흐르는 그릇된 판단을 추종해왔다. 율법의 책임과 인간의 순종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하나의 율법주의의 계약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즉 언약을 계약으로, 하나님의 은혜나 성령의 은사를 인간의 순종함에 조건부로 주어진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준수는 결국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자비를 제쳐놓고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더 큰 강조점을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죄악된 인간의 심중에서 유래된 이성의 바탕 위에 복잡한 율법사상체계를 가진 구원관을 강조하고 체계화하여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자랑하고 옳은 삶을 통한 구원을 강조함으로 스스로 사단의 ‘종교성’이라는 올무에 걸려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뿌린 옷”(계19:13), 즉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義)로다 하더라”(계19:8, kjv, “the righteousness of saints” / “성도들의 의”를 대부분의 현대역 성경들은 1881년 로마교황추종자『웨스트코트/호르트』에 의해 천주교의 행위구원인 ‘옳은 행실’로 바꾸어져 있음에 주의하시라)를 거절하고 자기 의(義)에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 속이는 자로서의 마귀의 궤계는 다양하며 한 인간이 ‘여자, 술, 도박’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되면 사단은 반대로 경건의 모양을 무기로 낚아채는 것이다. 물론 이 경건이라는 것은 참이 아닌 ‘사악한’ 경건으로 바리새인들이 붙들었던 자기의(自己義)이었다.
0127. 악(惡)으로부터 벗어나려하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자비없이는 불가능하다
한 인간의 영혼에 큰 기적이 일어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탐색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인 믿음, 즉 “계시될 믿음”(갈3:23)이 주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믿음에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아래에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있는 것이다. 종교를 답습하며 율법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경쟁할 뿐 아니라 은혜를 대적하는 무기로 율법을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 이성, 영혼이 다 무너져 내리는 그 곳이 바로 십자가의 그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기독교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1:23 / 1:18 / 2:2 / 갈6:14참조).
복음의 기준은 때로는 세상에서 한없이 불리한 것이다. 복음의 목적을 이 세상에 맞추지 말라. 모든 것을 잃는다해도 영생에 이르는 구원에 두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모한 것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의 같은 이야기의 연속이다.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행한 설교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요구가 ‘회개에의 요구’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회개하여…구원을 받으라”(행2:38-40). 그리하여 “헛된 일을 버리고…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함이라”(행14:15). 자기중심적인 속박된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자유의 삶이라는 은혜의 선물을 받아 누리라는 초대이다. 회개는 하나님께 하게 되어있지 사람들에게 ‘드러내는’(『드러냄』, 치유와 회복)것이 아니다. 모든 혀가 하나님께 직고하게 되어있지 천주교의 고해성사가 아니다. 이 역시 웨스트코트/호르트에 의해 변개된 구절에 기인한다. “너희 허물(fault)을 서로 고하며…”(약5:16)의 ‘허물’을 “죄(罪)”로 변개, 고해성사를 합리화하였고 영국고교회(High Church of England)와『옥스포드』운동(Oxford Movement)과 천주교에서 이를 교리화하였다(1881년 7월에 발간된 아일랜드의 카톨릭계 신문 ‘Dublin Review’는 이제 천주교 신부들은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The Apostles have now power to ‘forgive’ sins, and not simply to ‘remit’ them. ‘Confess therefore your sins’ is the new reading of James 5.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복음의 중심에 둘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다른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에 관한 지식조차도 올바른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 512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②)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 512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②)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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