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일 금요일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손으로 말하는 사람들 ② 위대한 전도자들



전혀 예기치 않게 시작된 농아인들 모임은 급성장하게 되었다. 나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드려다 보기 시작했다. 우리 농아인들 대부분은 쥐꼬리 같은 국가장애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었다. 그 중에 깨인 사람들은 농아협회에서 지정해 준 시장 모퉁이에서 쇼핑백을 팔아 생활하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차별을 받는 천덕꾸러기였다. 필요할 때면 불러 허드레 일들을 시키지만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장애인들 중에서 자신의 장애를 가장 받아 들이기가 힘든 사람이 농아들이다. 겉으로는 장애가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통이 안 되는 불통으로 오는 깊은 분노의 응어리를 가지 있다. 말이 안 통하니 그 흔한 약 조차도 구입이 어렵고, 병원에 데려가도 진단과 처방 조차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경찰에 잡범으로 몰려도 통역을 할 수 없어 변호할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상황이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출산 때가 되면 임신부를 혼자 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흔한 전화 한 통이면 구급차가 오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옆에서 늘 지키고 있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전에 생각조차 못해 봤던 그들의 삶이 내겐 충격과 도전이 되었다. 이들을 섬기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수화통역자들을 키우는 일이었다. 수도의 신학교에서 방학을 맞아 교회로 내려온 ‘콘스탄틴’ 전도사가 농아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신학교로 돌아가자 방과 후 침례교신학교 수화 통역반과 농아신학교육프로그램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농아사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언제 신학교를 마치고 돌아온단 말인가? 아직도 2년이나 남아 있는데! 그래서 나는 교회 청년 중에 몇 사람을 모아 농아학교의 교사를 초청해 수화를 배우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교회는 수화를 배우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러던 한 날 전혀 예기치 않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교회에서 650키로 미터 떨어진 ‘부하라’시의 농아교회에서 보낸 형제들이었다. 우리 지역의 농아들이 교회로 모이고 있다는 소문이 그 곳까지 퍼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낸 교회와 사역비전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매주 우리교회를 방문하여 농아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2-3년 동안 돕고 싶다고 제안했다. 나는 주님께 감사했다. 너무도 적절한 때 준비된 사람들을 보내주신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생긴 첫 농아교회는 ‘부하라’라는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마약 중독으로 살아가던 한 우즈벡 농아가 주님을 영접하고 변화되어 개척된 교회였다. 이 형제가 유럽의 농아교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유럽의 농아교회가 이 교회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면서 40여명의 농아들의 모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크지 않은 농아교회는 대단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우즈베키스탄 12주 주도에 농아교회를 개척하고, 중앙아시아의 주요도시에 농아교회를 개척할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했다. 이미 2명으로 이루어진 주말 개척 팀을 6개 지역으로 파송하여 교회개척을 진행하고 있었다.

돕기로 한 전도자들은 금요일 저녁 ‘부하라’교회에 모여 기도한 후 밤새 버스를 타고 사막을 건너 토요일 새벽 5시경 이면 어김없이 교회의 초인종을 눌렀다. 지친 몸으로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잠시 눈을 붙인 후에는 온 종일 전도와 교육에 매달렸다. 한 사람은 글을 모르는 농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 사람은 글을 아는 농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오후 3시면 자신들의 교회로 돌아갔다. 이들은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선교사들보다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섬김은 농아들은 물론이고 온 교회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우리 가정이 추방 후 다시 입국하여 사역지에 거주할 수 없어 수도에 거주하면서 20여 시간을 운전해 잠입하여 교회들을 섬기고 있었다. 한 달에 몇 번을 집과 교회를 오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나를 괴롭게 한 것은 “목사님, 또 가세요?” 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몇 일 쉬고 다시 짐을 꾸리는 나에게 아내와 아이들이 내게 늘 하던 말도 “아빠 또 가요?”였다. 지쳐 돌아오던 사막 한 가운데 차를 세우고 “아버지, 언제까지 이 길을 오가야 합니까?”라며 한 없이 울기도 했다. 그러나 이 농아형제들의 헌신은 자주 자기연민에 빠지는 나를 사명자로 자리로 되돌리는 영적 각성제가 되었다.

우리 농아교회를 섬기기 위해 왔던 평신도 전도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성도들이었다. 주로 구두수선공, 목동, 시장에서 소매상, 그리고 간혹 자동차 판금을 하는 형제들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좀 도와 주려고 하면 그들은 자신들은 모든 것이 충분하다며 떠날 때 물 2 병과 빵 2개를 요청할 뿐이었다.

농아교회의 성장은 예기치 않던 다른 긴장을 불러왔다. 농아협회는 농아들을 자기들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하는데 점점 교회를 다니는 농아들의 의식이 깨면서 통제력이 줄어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경찰과 정부부서에 ‘불순한 단체’가 농아들에게 관여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공권력은 모슬렘 극렬 분자들이나 과격 종교집단이 그들을 세뇌시켜 테러를 위해 도구화할 까봐 지속적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했고 감찰을 강화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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