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5일 토요일

아브라함 이야기


 

하갈의 체험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 창 16:7-16



하나님의 약속이 지연되고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 대신 그럴듯해 보이는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하갈을 통해 후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처음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평화롭던 가정에 원망과 다툼이 생기더니 결국 임신한 하갈은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집트로 도망가는 하갈사래의 학대를 피해 사막 (광야)으로 도망친 하갈은 수르 (Shur)로 가는 길 옆에 있는 샘 (우물)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수르’ (Shur)는 시내 (Sinai)산 북서쪽에 있는 이집트 바로 옆 광야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지금 하갈이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가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즉, 하갈은 자신이 원래 나왔던 이집트로 도망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갈을 만난 하나님의 천사이집트로 가던 하갈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는 그녀에게 질문을 합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8절 상). 처음 보는 낯선 이가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자신의 여주인의 이름과 신분을 말할 때, 하갈은 크게 놀랬고 이 낯선 사람이 신적인 존재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하갈에게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봅니다. 이미 하갈의 이름은 물론 그녀의 신분까지 알고 있던 천사가 정말 몰라서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갈로 하여금 지금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던 가인 (창 4:9)과는 달리 그녀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8절 하). 그러자 그 천사는 하갈에게 명령을 합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9절). 이것은 하갈이 여전히 사래의 종이기 때문에 돌아가라는 냉혹하고 확고한 명령입니다. 특히 여기에 쓰인 ‘복종하라’는 말은 히브리어 동사 ‘아나’ (ʿānā)의 ‘히트파엘’ (Hitpael)형으로 그 뜻은 ‘시달리다’ 혹은 ‘비하하다’ 입니다. 이것은 하갈이 다시 사래에게로 돌아가 자신을 낮추고 사래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와 임신한 아이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갈에게 약속을 준 하나님의 천사
하갈에게 다시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 명령한 천사는 이번에는 그녀에게 약속을 줍니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0절). 이것은 아브람에게 하셨던 약속들 (창 12:2; 13:16; 15:5)과 똑같은 것으로 하갈의 자손이 아브람의 약속에 포함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그 천사는 하갈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이스마엘이라고 이름 지으라고 말합니다: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1절). 여기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직역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고통과 압제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당하는 하갈에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하갈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초점은 여전히 아브람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12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한 예언오늘 본문 16:10-11절의 말씀만을 보면, 이 구절들은 단순히 이스마엘에 대한 약속이요, 축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12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저주의 말씀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이것은 이스마엘의 거만하고 반항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말씀이지 축복의 말씀도 아니요 저주의 말씀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마엘의 미래에 대해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즉, 비록 인간적인 대안의 결과로 하갈을 통해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이 태어나지만,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육신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롬 9:8).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을 하갈에게 알려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이 모든 것이 하갈을 통해 아브람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듣고 다시 한 번 믿음에 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갈이 체험한 하나님
이집트로 도망가던 길에 자신을 만나 주시고 구해주신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3절). 즉, 하갈은 하나님을 ‘엘 로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보시는 하나님’ 혹은 ‘보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갈은 하나님을 만났던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부릅니다: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4절). ‘브에르 라헤이 로이’는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 (The well of the living who sees me) 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갈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보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구원의 하나님으로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하갈의 체험 역시 12절의 말씀과 같이 아브람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해답이 15절에 나옵니다.

이스마엘이라 이름 지은 아브함
도망갔던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사래에게로 돌아와 모든 굴욕을 참아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낳습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그런데 아브람은 그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천사가 알려준대로 ‘이스마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이것은 다시 돌아온 하갈이 그 동안 광야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아브람에게 이야기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브람은 이스마엘이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될 것이지만, 그는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육신의 자녀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갈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도 보고 계시며 보살피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인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대안을 택한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지연되자 급한 마음에 인간적인 대안을 택했고, 그로 인해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아브람은 이것을 단순한 여자들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갈의 체험을 통해서, 이스마엘에 대해서, 약속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깊이 깨닫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처럼 다른 사람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기울여, 깊은 깨달음과 각성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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