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2일 금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35 >


 
 
 
 
 
 
 
 
 
 
0163. 구원받고도 불안한 구원인가? (히6:4-6)   
4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위 구절을 안고 불안해 하던 때가 있었다.  또 시달림까지 당해왔다. 의외로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구원얻는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사역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다. 믿음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요6:65).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The just shall live by faith”- 합2:4/롬1:17/갈3:11/히10:38).
1)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게 임할 <장래의/shall> 믿음을 보았다.
2) 로마서는 <의인(義人)/the just>을 정의하고 있으며
3)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live>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4) 히브리서는 <믿음으로/by faith> 믿음을 설명한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힘써 노력해서 타내어야 할 상급이 아니라 거저 받아 누려야 할 과분한 선물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6:28). 예수님은 초점을 그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위)로 초점을 옮기신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인간의 특출한 지식이나 복음전도 방법도 설득도 이 믿음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외적인 도덕적 종교적 모범적 생활로도 믿음은 오지 않는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 안에, 살아있는 믿음을 불어넣으신다(고전2:1-5). 회심은 본질적으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에 압도당해 자기만족이라는 자아(自我)에서 발가벗김을 당하기 전에는 여전히 구원은 요원하다. 구원(택하심)은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나”(살전1:4-5).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선물은 확실한 것이지 희미한 것이 될 수가 없다.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경험적으로 우리에게 확실한 실제가 된다(슥12:10/히10:29). 히6:4-6에 대한 여러 글들 중 비교적 간결한『데머리스트』(Bruce Demarest)교수의 책(‘십자가와 구원’/부흥과 개혁사刊을 추천함)에서 발췌, 정리하여 소개한다:
 
히브리서의 몇몇 경고성 본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대목은 히6:4-6이다. 이 편지를 받는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유업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고 그 결과 영적으로 게을러졌다(히6:12/참조5:11). 이렇게 미성숙한 상태에서 핍박까지 받다보니 그들은 안전한 유대교의 울타리 안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를 받은 이들은 <네 개의 부정 과거 분사>로 묘사된다.
 
(1)그들은 “비췸”을 얻었다(4절). 이는 그들이 거듭날 때 영적 조명을 받았음을 의미한다(참조. 히10:32/고후4:6/엡1:18).
(2)그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4절). 여기서 맛보았다는 말은 비유적으로 믿음을 참되게 경험하고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시34:8/벧전2:3). 이런 표현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참조 엡3:7).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라는 말은…회개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분명히 경험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3)그들은 “성령에 참예한 바”되었다(4절). 여기서 명사 메토코스(metochos, ‘참여자’, 참조 히3:1,14/12:8)는 진정으로 거듭남의 보증인 성령에 참예하는 것을 가리킨다.
(4)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5절). 여기 등장하는 또다른 맛본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의 역사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또, “한번”(4절, 참조 9:26-28/10:2/12:26-27)이라는 표현은 이미 경험한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서신을 받는 이들은 아마도 참된(유대인)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따뜻하게 “(거룩한)형제들”(3:1,12/10:19/13:1,22)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6절)라고 말한다. 여기서 쓰인 ‘아뒤나톤’(adynaton)이란 말은 실제적인 불가능성을 뜻한다(참조. 6:18/10:4/11:6).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버린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어떤 치유책이나 회복할 수 있는 길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만일 동요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유대교를 위해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그들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모든 가능성을 상실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그들은 구원의 유일한 기초, 즉 능력있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문장의 주어를 1인칭(1, 3절)에서 3인칭(4, 6절)으로 바꾸고 “너희에게는”(9절)이란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아가페토이’(agapetoi, ‘사랑하는 자들’)의 배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확신을 나타낸다. 그들의 선행, 사랑 및 성도들에 대한 섬김(10절)은 그들의 견인을 확증해준다. 흔들리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전해진 이런 엄중한 경고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견인을 이루시기위해 쓰시는 중요한 방편을 보여준다. 이 본문은 보존과 견인의 관계에서 인간의 책임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글을 읽은 이들 중에 실제로 배도하는 이들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참조. 요일2:19).
 
히브리서 기자는 히10:26-31에서 믿음의 친구인 유대인 성도 중에 “어떤 사람들”(25절)이 그리스도와 언약과 성도의 회중을 업신여기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이들은 (1)“진리를 아는 지식”(26절/참조6:4)을 받았고, (2)언약의 피로 거룩하게 함을 받았으며(29절/참조 고전6:11), (3)빛을 받았다(32절/참조6:4).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거듭난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행위는 결국 그리스도를 경멸하며 거부하고, 그분의 희생을 모독하며, 은혜의 성령을 오만하게 거절하는 행동으로 귀결된다(29절). 죄에 대해 효력을 가진 유일한 희생제물을 버린 것에 대한 형벌은 하나님의 징계의 심판이다(27-31절). 거스리(Guthrie)는 이 두 번째 본문에 “죄가 또 다시 가정적인 방식으로 언급되었고, 실제로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히10:26-31은 6:4-6과 같은 의미, 즉 유대인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무익한 유대교로 돌아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엄중한 경고로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 본문에서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고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39절/참조6:9). 흔들리는 믿음의 벗들을 격려하기 위해 히브리서 기자는 수많은 시련에도 굳건히 믿음을 지켰던 옛 믿음의 영웅들을 길게 소개하고 있다(히11장).
 
벌카우어(Berkouwer)는 히브리서 6장(및 다른 경고성 본문들)이 “이 서신을 읽을 사람들을 더 안전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씌어진 권면”이라고 결론지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의 배도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 처한 교회를 진심으로 권면하고 교회에 믿음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기 쉬운 온갖 잘못된 생각을 피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0164. 그리스도의 완전성안에 숨겨진 그리스도인의 불완전함
『제2바티칸공회』에서는 구원을 실존적으로 재정의, 구원의 범위를 비기독신자와 무신론자까지 포함하도록 넓힘으로써 오늘날의 로마교황청 신학은 소위 ‘만인구원설’(universalism)의 견해를 취한다. 『칼 바르트』신학이 로마교황『요한』23세로부터 극찬(?)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2006년 80여 개국에서 3,000여 명이 참석한 서울에서 있은 ‘세계감리교대회’에서 로마교황청 대표와 마주앉았다는 사실 자체가『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91)에 대한 모독이며, ‘칭의론’문서 합의교환에 도달했다는 것은 ‘대(大)저주’에 속하는 어두움이다. 지도자들을 통한 “배도”(살후2장)는 예언을 지나 이미 현실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성숙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절대적 도덕성이나 영적 완전에는 아무도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며 자신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죄를 너무 가볍게 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무거운 우리들의 죄짐을 옮기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십자가 위에서 찢겨지고 피흘리신 십자가 신학의 본질에 무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거할 때에만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보혈로 덮으신 우리의 불완전을 완전으로 보시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의 ‘잘남’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로 우리의 ‘못남’, 또는 잘못해서 잃어버리는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태어난’자녀(육으로나, 성령으로나)는 언제나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분의 자녀임을 명심해야한다.
 
신령하신 주 성령
나의 맘에 계시사
망령된 일 고치고
홀로 주관합소서
(찬 176 / 영화로신 주 성령 ④)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34 >


 
 
 
 
 
 
 
 
 
0157. 공관복음 처음 장(章)들의 이야기(6) - 누가복음(3)  
“그 무렵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조세등록>>을 하라하였으니 (이 조세등록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에 처음 제도화한 것이라)” (눅2:1-2, kjv).
구텐베르크(Gutenberg, 1398-1468)의 인쇄술 발명과 함께 전유럽에 거의 동시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언어가 무슨 언어이든지 간에 말씀의 내용은 거의 같다. 『루터/쯔빙글리』의 독일어역, 『깔뱅』이 서문을 쓴『올리베땅』불어역, 또는 빠리, 제네바 등등의 수 많은 불어역, 이탈리아의『디오다티』(Diodati)역, 스페인의『레이나 발레라』(Reina Valera)판 … 등등. 필자가 흠정역(kjv)표시를 할 때, 이 표시는 흠정역 또는『틴데일』(W. Tyndale, 1494-1536)역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시대에 모든 언어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들이 거의 다 같다는 뜻이다. 접근이 무난한 외국어라『흠정역』(kjv)으로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0158.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스위스의 대중교통 카드로 남부 알프스 산의 긴 터널을 지나 북부 이탈리아의 첫 국경도시아오스타(Aosta)까지는 따로 교통비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어 이탈리아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알프스 산악지대라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하나님의 성도들이 피신한 지역의 길목에 있는 도시다. 눅 2:1에 가이사『아구스도』의 승전개선문이 이 곳에 세워져있는 것도 보게 되었다. 현대세금제도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로마의 조세징수원이 이 때에 새로 설립되었음이 로마사(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주님의 초림직전 로마세력이 천하를 호령하던 시대로 누구에게나 다 <조세등록>을 명(命)하였던 때였다. 이제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다시 천하가 로마시대가 되어 “짐승(666)의 표”(계13장)를 받으라는 명(命)이 모든 인류에게 곧 주어지게 될 것이다. 이 21세기에『로마』시대라니…? 전 세계적으로 천주교가 부상하는 것, 성경의 예언들을 종합검토 해볼 때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로마교황이 종교라는 경건의 탈을 쓰고 온 세계 정치경제를 희롱하며 다니는 것의 본질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바로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크나큰 재난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루터』,『깔뱅』…『웨슬리』등등,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미 우리들에게 확인시켜준 진리이다.
 
0159. 다니엘이 혼절하여 놀란 비밀 
하나님의 교회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엘리야 시대의 종교탄압에도 불구하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명을 숨겨두신 하나님(왕상19:10), 타락한 유대교 지도자들 속에 시므온, 안나 같은 성도들을 심어두신 하나님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진리의 약속에 충실한 적은 무리들을 돌보고 계셨다. 루터 이전에도 하나님의 교회는 여전히 좁은 길을 가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그루터기를 돌보고 계셨던 하나님은 로마카톨릭교회의 탄압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도들을 돌보고 계셨다. 루터의 개혁 시에 얻은『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기독교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사단은 기독교에 한 교파(루터교)의 명칭을 뒤집어 씌우고서는 마치 『로마』종교가 기독교의 근본인 양 가장하고 나섰다. ‘기독교인은 나의 이름이고, 나의 성(姓)은 카톨릭’이라고 그 뿌리를 스스로 밝힌 이『바벨론』의 비밀에 대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사가들의 무지 내지 무관심은 이 종교 속에 숨어서 세상권세를 키워온 제국을 눈여겨 보지 못하게 하였다. 오히려 일반 사가들 -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독일사가로 ‘16-17세기의 로마교황사’ 저술), 『기본』(Edward Gibbon, 1737-94, ‘로마제국흥망사’/전 5권 등 저술), 『레키』(William E. H. Lecky, 1838-1903,  ‘아일랜드’ 사가,『드블린』대학 MP) - 는, 기독교를 빙자, 세속적인 권력국가로서의 로마교황청이 경영하는『바티칸』의 비밀을 직시하였다.
로마카톨릭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려면 로마종교내의 모든 성직자 계급을 파괴하고, 교황은 교회적인 국가를 철폐하고, 군림하는 종교에서 신약의 섬기는 교회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외치는 화란 인 로마카톨릭교 사제『아돌프스』같은 이도 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 로마카톨릭교는 타락하여 잘못되어진 종교가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비밀의 큰『바벨론』’의 길을 걸어가야하는 종교의 얼굴을 가진 정치세력이다. 다니엘서에는 “끝, 마지막 때, 종말, 말일(末日)”이라는 단어가 12번이나 기록되어있다. “이는…여러날 후의 일임이니라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 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단8:26,27). 다니엘이 혼절하고 놀란 비밀이자 계시록의 사도 요한도 놀란 신비이다.
 
0160. 다시 일어나는 반(反)셈주의(Antisemiticism)
헝가리의 유대인 80만중 56만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오늘 날 헝가리에는 약 10만의 유대인들이 살고있다. 이들에 대한 제재(制裁)가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최근의 뉴스다 (Time, Apr. 01, 2013). 이스라엘을 노예의 땅 애굽에서 불러내기 위해 영도자 모세가 태어났을 때 바로는 이스라엘의 남아를 모두 죽이도록 명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 사단은 헤롯 왕을 충동질하여 아기들을 죽이도록 명하였다. 구약의 모세는 신약의 예수님의 예표이다. 모세는 예수님의 삼중직(왕/선지자/제사장)을 다 수행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부, 결국은 선지자(“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신18:15), 제사장의 임무만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의 마지막 책 계시록의 천상에서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계15:5)가 함께 불러진다.
 
0161. 창세기 9:27의 의도적인 오역에 대하여
주님의 재림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대역사를 앞두고 사단은 다시 『반(反)셈주의』라는 악(惡)을 유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임하였을 때 그는 유대인으로서『셈』족(族)계열을 통해 오실 분으로 이미 예언되신 분이었다:
25 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자기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지라(.)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실 것이나(,)
<<그는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 거하실 것이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실 것이라(.)”
(창9:25-27, kjv)
이스라엘의 영광에 대한 약속을 송두리째 빼앗고 유대인을 대적한 로마교황청의『반(反)셈주의』로 오도된 신학사조의 영향을 받은 서구신학중심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야벳의 축복을 과장하고 있다. 즉, 유대인 진멸을 위한 로마교황청 신학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정직한『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등 10여 명의 서구주석가들은 여전히 종교개혁자들의 번역(루터/깔뱅/kjv등등)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창세기 9:27 중반부에 대한 신약성경의 성취, 즉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셈』의 장막을 통해 이 세상에 임하셨음이 요한1:14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거하시매’라는 이 헬라어(‘스케노오’)단어는 전 신약성경을 통틀어 지상에서는 단 한 번만 사용된 단어로서 구약의 하나님의 “장막”(성막, ‘스케네’)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우리 가운데 그 분의 천막(장막)을 치셨다’라는 뜻이다. 구약의 ‘회막’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곳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곳이었다(출40:34-38). 그 영광이 성전을 떠난 후에(겔11:22이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저들을 찾아오실 거라는 약속을 받았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에 거할것임이니라”(슥2:10).
요한은 예수님의 강림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의 계시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본적이 없는 분의 영광의 나타나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아들이 그를>> 나타내셨느니라”(요1:18, kjv / 대부분의 현대역들은 ‘천주교  여호와의 증인’ 성경을 따르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헬라적 접근, 즉 인간철학의 지도는 전혀 불요(不要)하다. 하나님의 계시, 즉 히브리적 계시가 있기 전에는 철학의 올가미에 걸려 철학적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보면서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소경이 되는 것이다.
 
0162. 유리(流離)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구약)을 맡았음”(롬3:2)이었다. 유럽을 향한 유대인들의 흩어짐으로 오는 길목의 『베니스』왕국에 유대인『게토』가 설립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유럽으로 전해진다. 1215년 로마교황령에 의해 유대인들은 유대인 모자(Jewish Hat)를 착용해야했다. 1516년에는 로마교황칙령에 의해 베니스에 유대인을 위한 게토(ghetto / ‘getto’)가 지정되었다.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이 ‘게토’라는 용어는 독일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서 유대인 억압을 위해 로마교황청이 선정한 용어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함께 나폴레옹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그가 점령하는 나라마다 유대인 ‘게토’를 철폐시켰다. 『비잔틴』제국의 멸망으로 헬라어 학자들의 서유럽진출과 함께, 베니스 왕국에서는 헬라어 그룹이 형성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신약)을 라틴어가 아닌『헬라어』원어로 읽기를 원하였던『에라스무스』도 베니스에 거주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아오스타』를 지나 프랑스로 향하면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국경경계의 알프스 산악지대에서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해 성도들이 가장 극심한 핍박을 당하게 된다. 『보드와』(佛 Vaudois, 伊 Valdesi, 또는 Waldensian) 또는『삐에몽』(Piedmont) 계곡의 처절한 박해는 John Milton의 서사시로도 그 당시에 이미 세상에 알려졌다.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11:37,38).
 
화평하신 주 성령
슬픈 맘에 오셔서
온갖 괴롬 없애고
기쁜 맘을 줍소서
(찬 176 / 영화로신 주 성령 ③)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이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목사는 성직자(聖職者)라고 호칭을 합니다. 거룩한 직업이라서 세속적인 직업과는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다른 점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삽니다. 이론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론과 실제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작년 연말에 제가 부목사로 섬겼던 교회의 은퇴목사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써리에 있는 한 양로원에 가서 설교를 할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셨습니다. 목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에 비록 먼 거리였지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거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 달쯤 지나서 양로원이 꽤 많은 돈을 받고 운영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러면서 불만이 생겼습니다. 돈을 받고 운영하는 이익단체라면 당연히 수고비로 기름 값 정도는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기대를 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저는 개척교회 목사입니다. 솔직히 기름 값이 부담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양로원에 가서 예배만 드리면 신기하게 불만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어르신들이 내뿜어 주시는 은혜가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컸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30분 전부터 자발적으로 모여서 찬송을 부르시는 모습, 부족한 젊은 목사의 설교에 아멘을 해주시고, 예배가 끝난 후에도 그냥 가시지 않고 한 분 한 분 제 손을 잡아 주시면 감사하다고 하실 때, 오히려 제가 감사하고 힘이 생겼습니다. 잠시 불만 있었지만 이런 것들이 작은 것에 연연했던 마음을 회개케 하고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게 했습니다.
 
제 주변에 보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면서도 열심히 목회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노스 밴쿠버에서 목회하는 K목사님은 청년 목회를 합니다.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온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교회 재정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매달 교회가 유지되어 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당연히 목사로서 받아야할 수입이 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는 청년들을 위해서 새벽마다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사정이 생겨서 양로원 사역을 그만 두게 되었는데, 그 일을 사정을 알면서도 흔쾌히 맡아주신 랭리의 K목사님 또한 외진 지역에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묵묵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분들이 개인의 욕망을 위해 산다면, 이런 일들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목회를 성직으로 알고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는 분들에 의해 유지되고 확장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이런 마음으로 목회를 합니다. 그 중에 명예, 권력, 재물의 유혹에 빠진 분들도 있지만, 어느 곳에나 부패는 있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본질인지 알지 못하고 살다보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성도(聖道)라 불리 우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목회자를 판단하고 대접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없는 자에게 물 한잔 대접하는 것이 귀한 일이지, 배부른 자에게 산해진미를 대접한들 고마움을 어찌 알겠습니까!
 
저는 행복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일 할 때 최선을 다함으로 후회가 없어서 행복하고 싶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음으로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좋은 성도, 목회자들을 만나는 기쁨으로 행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아멘 하는 분들이 있었으면 행복하겠습니다.
 
[오세규 목사 / 밴쿠버오늘교회 / 778-887-8648]
 
 
 
 
 

아브라함 이야기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 / 창 22:11-19 (상)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의 마지막 클라이막스 장면입니다.
 
한결같이 순종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시험을 받을 때, 마지막까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는 그를 두 번이나 다급하게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진짜로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11절). 참이 아닌 것들은 어려운 고비의 순간이나 마지막 순간에 변합니다. 처음에는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변하고 맙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던 아브라함은 참된 믿음을 가졌기에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생각과 방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신앙
참된 믿음으로 끝까지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2절). 여기서 ‘안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야다아티’ (yaœd≈a{tˆî) 인데 이 단어는 단순히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 같은 ‘깊은 체험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초보 믿음으로 시작하여 많은 신앙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안다’고 인정을 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경외’란 ‘예레’ (y§reœ}) 인데 이것은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무서워하는’ 것이 아닌 ‘존경하면서 두려워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죄하거나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 자신은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끝까지 순종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신앙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14절에도 보면,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준비한다’는 말은 히
브리어로 ‘이르에’ (yir}eh) 인데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보신다’ 혹은 ‘보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단어가 창 12:1에서는 ‘보여 줄’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지만 하나님의 돌보심 (good care)와 지속적인 관심 (sustaining concern)을 나타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자신을 부르시고 자신에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계속해서 돌보고 계시며, 자신이 하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바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확고한 신앙입니다.
다음 주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알람 소리에 깨어 얼얼한 꿈의 잔상들을 환기시키려 일어나 브라인드를 엽니다. 새벽 어둠에 잠겨, 꿈의 세계만큼이나 희미한 실루엣을 이루고 있는 마을을 보며 이 생이 꿈보다 더 낫다고 할만한 무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지만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꿈만큼이나 아득하고 내용이 빈약합니다. “이 생에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다” 고 한 전도서의 말씀이, 아무리 기를 쓰고 달려도 뭔가 해결이 안된 것 같은 미진하고 석연치 않은 느낌과 절대 메꾸어지지 않는 공허의 부피속에 허우적거리는 인생이기에, 아침에 새롭게 눈 뜰때마다 노래처럼 입에 붙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야 이 공허가 너무나 당연한 느낌이라 쳐도, 왕으로써 모든 권력과 쾌락과 부와 명예와 지혜를 두루 누려본 솔로몬 왕이 이 같은 고백을 했음을 볼 때, 이 세상 모든 만물의 본질이 바로 이처럼 깊은 허무를 딛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어제 밤 잠들기 전,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로서 전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는 ‘목적이 이끄는 삶’ 의 저자 릭 워렌 목사의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읽고 충격을 받아 그런지 이 새벽 허무에 대한 감상이 더욱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징조로서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이란 말씀처럼 바다의 생물들과 하늘의 새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 중에 이란의 원전 가까운 곳에 지진이 나서 두 마을이 붕괴되었고 사상자들이 발생했다는 뉴스에 걱정이 되는 중에도 체르노빌이나 일본에서처럼 원전이 터져 방사능이 나왔다면 얼마나 큰 재앙이 되었을까, 이를 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늘의 영들 간의 전쟁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언론은 이란과 북한을 전면으로 내세워 핵전쟁의 위험을 설파하면서 국제 유가가 오르고 세계경제가 얼어붙을 수 밖에 없다는 절망 쪽으로 군중들의 의식을 몰아가고 있지만, 육체를 죽이는 것 보다 훨씬 더 위중하고 치열한 전쟁은 지금 공중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혼들을 놓고 벌이는 전쟁입니다.
 
저의 딸이 다니는 학교가 ‘삼성 스쿨’ 프로그램 시범학교로 선정되었다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교육환경, 교사가 학생들을 일대 일로 수업을 지도할 수 있는 기술 혁신이라는 희망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제 교실에서마저 아이들이 기계를 통해 교육을 받게 된 것을 보면서 조지오엘의 소설 ‘1984’를 통해 선포된 빅브라더의 세상이 이렇게 좁혀오나 싶어 긴장이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을 감시하고 일상을 통제할 수단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그 기계를 거부하기는 커녕, 아이들은 더 최신형의 기계를 갖고 싶어 안달을 하고 부모들은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사주지 않고는 못배깁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기계에 매여 손에서 놓지 못하고 스스로 이 기계 앞에 나와 혼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면 기계가 사람들의 주인이 되어 다스리는 것 같고, 이를 보고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기뻐 날뛰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북한의 핵 실험과 일촉즉발의 전쟁의 위기에 놓인 한반도의 긴장에 관한 뉴스가 이 곳 북미 뿐아니라 전세계의 뉴스를 연일 장식하고 있습니다. 20년 전 단기 선교로 해외를 나가면 한국이란 나라를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일 정도로 지구상에 보이지도 않고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작은 나라가 이제는 정치, 경제적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로서 언급되며 유가가 오르고  세계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핑계로서 이용되고 있는 것 같아 정말 기도가 됩니다. 선교 한국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일컬어지던 모국의 교회가 이제 음란과 물질주의의 썩고 부패한 것의 전형처럼 여겨지고 대형 교회를 이끌고 있는 목사님들이 이런 저런 안좋은 일들에 연루되어 세상 기사의 입질에 오르내리고 WCC 부산 유치 등으로 인해 아버지의 이름이 땅에 짓밟히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옳고 합당하게 여겨지던 교회안의 교리들의 실체가 속속들이 그 뿌리가 드러나고 이단이며 용공이라 몰아세우는 기사들을 읽노라면 내가 지금 진리라 믿고 있는 것들이 과연 옳은 것일까 두렵습니다. 양파껍질처럼 벗기고 벗겨내도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죄와 악은 끝이 없어 나의 의는 절대 의롭지 못하고 내가 말하는 정직과 정의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거짓과 모순 투성이 일 뿐임을 알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나를 통해, 이 낡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을 통해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이 일컬어지고 있음이 참으로 두려운 일인지라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제는 너무나 간절한 기도의 마음으로 드리게 됩니다. 입에 붙은 헛된 주문처럼 공중의 모임에서나 뜻없이 외우던 주기도문을 개인 기도에서 깊이 묵상하며 나를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르짖게 됩니다.
 
오늘도 우주처럼 깊고 광대한 허무 속에 내가 부르고 붙들고 설 이름이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구원을 얻을 이름, 이 누추하고 거짓된 입에 담기에 너무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내게 부여하신 소명이 있기에 내가 오늘 이 땅에 살아갈 이유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이 땅에서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영광된 부르심으로 인해 내 삶이 말할 수 없는 존귀를 입었습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