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0일 목요일

반병섭 소설집 석양을 사는 사람들’ 출간됐다

 

 

반병섭 소설집 석양을 사는 사람들’ 출간됐다



시인 반병섭 원로목사(사진)가 작년 12월, 그를 소설가로 등단케한 “석양을 사는 사람들”의 소설집을 출판했다.

반목사는 2008년 심장 수술 이후 집필을 시작하여 약 3 년 여 만에 탈고, 출간하게되었다면서 “나의 소설은 허구라기 보다는 융합(fusion)으로, 나 자신의 인생 경험과 상상력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작품”이고 밝혔다.

소설집 ‘석양을 사는...’에는 ‘부러진 숟가락’ 등 열 한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의 자서전과 비슷하나 사이사이에 fiction이 끼어 있다.

수필가 한기철 원로목사는 ‘석양을 사는 사람들’의 서평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흘러간 옛 잡담이 되었는데 그에 손에 들어 가면아름다운 소설로 창작된다며 그의 글은 마치 메뉴에 없는 이 세상에 더는 똑 같이 만들 수 없는 단 하나뿐인 퓨전요리같다고 평했다. 다음은 한 목사의 서평 전문이다.

한편, 본 소설집은 본보를 통해 연재될 예정으로 있다.


“석양에 더 빛나는 삶”


‘시는 언어의 예술이지만 소설은 내용의 예술이다. 시에서 언어의 정제를 본다면 소설에서는 관심을 자극시키는 내용을 본다. 시는 머리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소설은 가슴으로 감동되어야한다. 시에서 언어의 은유를 본다면 소설에서는 내용의 단순화를 본다고 말하면서 늘샘은 그의 소설을 fiction에서 fusion한 것이라 했다.

그는 fusion 즉 융화라는 말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에는 그의 삶, 그의 신앙, 그의 고통과 기쁨이 함께 녹아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 그를 보는 것 같고 그를 보면 그의 삶을 보는 것 같아 누구라도 빨리 감동할 수 있다. 마치 메뉴에 없는 이 세상에 더는 똑 같이 만들 수 없는 단 하나뿐인 퓨전요리같다.

그에게는 작품의 소재가 많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야산에 버려진 바위덩어리를 보고 그 속에서 다윗을 깎아내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처럼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흘러간 옛 잡담이 되었는데 그에 손에 들어 가면아름다운 소설로 창작된다.

늘샘과 나는 어느 한 집사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약10분 동안 들려준 짧은 구담을 나는 간증처럼 들었다. 1994년 봄이었으니 그의 나이 70에 나와 함께 들었던 이야기를 10년을 마음속에 두었다가 그가 80에 들어 첫 작품으로 내어놓았다. 그것이“부러진 숟가락”이다. 10여 년 동안 마음속에 삭혀진 이야기를 컴퓨터 자판에 토해냈다.

강 목사는 나지만 이야기를 전해준 집사님과 오버렙되었고 한 목사는 늘샘 작가의 분신으로 자전적 체험소설로 쓰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는 오래전에 이미 잊어진 이야기가 그의 가슴속에서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사랑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한다. 늘샘이 부족한 사람을 들어 소설의 주인공으로 채용한 일은 내가 잊을 수 없고 또한 감사한 일이다. 늘샘의 주인공이 한준호 목사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냈다. 청년이 입고 있던 천 조각이 앙상한 뼈를 감싸고 있었다. “여보!” 갑자기 그녀가 목이 메어 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살아 있나 했더니, 왜 여기에 이렇게 누워 있는 거요? 만철이가 집에서 당신이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데, 왜 당신은 여기에 이렇게 누워있는 거요?” 그녀는 주저앉아 뼈만 남은 시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친척은 그녀를 부축하면서 진정하라고 달래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4년 동안 쌓이고 쌓였던 한을 통곡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이에요. 이것” 아저씨는 손잡이 부분이 반쯤 끊어져 있는 그 놋숟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 목사는 여기서 말을 멈추고, 벽난로 옆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작은 상자를 꺼내어 한 목사에게 보여 줬다. 손잡이 부분이 잘려져 있는 놋숟가락이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숟가락 때문에, 그것이 목사님의 아버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말인가요?” “예, 맞아요. 아버지가 피난을 떠날 때였어요. 어머니는 밥도 싸주고 쌀도 넣어 주었지만 그것으로 며칠을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어차피 거지처럼 밥을 빌어먹으며 도망 다녀야 할 거라고 믿었죠. 그래서 넣어준 것이 이 숟가락입니다. 숟가락이 있어야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도 주머니에 맞게 자른 부러진 숟가락이었습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를 가져야 한다고. 만일 부러진 숟가락이 없었더라면 영영 찾을 수 없는 사랑하는 남편의 유해를 그만이가지고 있는 유일한 징표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징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죽어 많은 시간이 흘러 간 후에도 그 징표만 보면 나라고 할 징표를 말이다. 이 소설이 주는 감동이다.

“석양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소설집을 손에 들고 나는 늘샘이 그토록 소원했던 일이 드디어 성취되었다는 기쁨이 충천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는 그간 시집, 수필집, 설교집, 찬송집, 상담집, 번역 등등 많은 책을 상정했지만 여기에 소설집을 첨가하니 문학의 장르를 통한 달인이 되었다.

나는 ‘타인의 창 2’출판기념회에서 이런 축사의 글을 올렸다.
“빌리 그레함목사의 최근 저서인 ‘Nearing Home’ 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평생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를 배웠지만, 아무도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야하느냐를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라고 썼다. 93살을 살면서 쓴 글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언제 부르실지 모르는 시간에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하느냐는 질문에 도전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질문을 나에게 해 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았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타인의 창 2’에서 그 해답을 찾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겠느냐 보다는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사느냐를 배우게 되었다. ‘타인의 창 2’의 출간을 축하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그의 작품이 어떤 것이던 그 속에서 절규하는 한 소리가 있다. 그것은 인생을 사랑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은 인간구원의 천착(穿鑿)이다. 그래서 그의 아픔과 고통이, 실망과 절규가, 배신과 위협이 아름답게 조각된 여인 같다.

세월은 추억의 창고라고 했다. 나는 그 창고에 세 방이 있다고 생각 한다. 첫째 방은 6.25라는 전쟁박물관, 둘째 방은 이민목회 방, 셋째 방은 석양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방, 이렇게 나누어본다. 부러진 숟가락, 총 없는 병사, 쌕쌕이와 사진, 역출애굽기는 6.25방에서, 엄마와 자전거, 플로리다의 산들바람, 낸시의 십년세월, 유진 엄마는 이민목회 방에서, 석양에 사는 사람들과 추억 나들이는 마지막 방에서 집필이 되었다.

“청년,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거요.”
“그럼 오래 갈 것이란 말씀입니까?”
“동족상쟁(同族相爭)인데....... 피 값을......” 스님은 말을 멈추고 먼 하늘만 바라봤다. 준호 또한 잠시 스님의 시선을 따라 아무 대답 없는 허공만을……. 스님과 서로는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축원을 나누고, 준호는 다시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준호는 길을 걸으며 되묻고 또 되물었다. 무슨 죄가 있어 나는 피난을 다니는가? 예수 믿는 것이 죄인가? 국회의원이 되려고 출마했던 것이 죄인가? 죄일 수 없다. 결코 죄일 수 없다. 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해야하는 것인가? 나를 잡아 고문하고 죽이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이념의 노예가 된 정치인들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무엇이고 민주주의는 무엇이냐? 전쟁은 죄악이다. 동족상쟁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준호는 이런 생각들을 십으며 되새기며 하염없이 걸었다. (역출애굽에서)

늘샘은 625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늘 그의 글은 여기서 시작했다. 전쟁은 죽이고 죽는 야수들의 만행이라 했다. 전쟁은 그의 기억의 창고 속에서 가장 강인하게 새겨진 추억이다. 그런데 그는 이 추억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이 아프고 쓰린 기억이 그의 작품의 시목(柴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민목회는 625방만큼이나 강하게 새겨진 추억이다. 그 자신이 당한 고통이라기보다 그가 목회를 하면서 만난 기구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늘샘은 교인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함께 견디고 함께 울었기 때문에 이민목회 방에는 아름다운 이야기 꽃들이 많다.

평론가 홍형성씨는 이렇게 썼다. “불륜이라는 죄를 범했지만 더럽거나 용서받지 못할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놀라운 능력, <엄마와 자전거>에서 늘샘은 그의 구원론을 피력한다. ‘약자의 죄는 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죄를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을 향한 큰 발걸음임을 설명한다.”

엄마와 자전거에서 뿌리 깊이 박힌 그의 신학을 말한다. 인간구원이란, 육적이며 영적인,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시간적이며 영원한 것, 즉 전인적(全人的)구원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누구나 다 죄인이다.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내리는 것처럼…….

그래도 유진 아버지가 그리할 줄은 몰랐다. 산이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산이 허물어져 자기를 덮는다. 에스터는 그 여인같이 투신하는 것만이 산이 옮겨지는 것이라고 곰곰이 <옮겨지는 산>을 반추해 본다. 밤을 새운 에스터는 그 강, 그 다리 위로 갔다. 투신할 수 있는 자리를 다시 확인해 두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유서를 쓰다가 우연치 않게 목사가 준 시집을 한두 장 넘기는데 물의 시 “他意”가 눈에 들어온다. 물은 어디 자기의 뜻한 바 있어 흐르기 시작했던가. 흐르다가 박힌 바위를 만나면 돌아서 가는 법도…….

에리오트 호텔에서 목사님이 하신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 “모든 것이 합동하여 유익하게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 시와 함께 가슴에 새겨지며 그 의미를 찾고 있었다. “에스터, 에스터 시민권이 나왔어요.” 그의 이야기는 늘 한 곳에 닫는다. 구원이다. 해방이다. 회복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마지막 방은 노란 색으로 칠해졌다. 붉은 해가 기울어지고, 낙엽이 휘날린다. 아주 따뜻한 분위기다. 가운데는 통나무로 만든 탁자가 놓여있고 로즈마리 허브차가 놓여있다. 로즈마리는 피부를 부드럽게 하고 근육 긴장을 완화시켜주며 그 향은 악몽을 막아주고 뇌가 약화 되는 것을 막아주고 뇌를 자극하여 기억력을 촉진 시켜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마지막 방은 아주 따뜻하다.

이 방에는 늘샘이 망구(望九)가 되어도 늘 옆에 있어준 친구들의 이야기가 가득 들어있다. 어떤 이는 이미 떠난 사람도 있지만 늘샘과 함께 있는 친지들이다. 나는 이런 친구들의 이야기를 모아 소설로 승화시켰다는 것에 놀란다. 헨리 포드(Henry Ford)가 주연한 Golden Pond라는 영화가 생각이 난다. 금빛 나는 호숫가에 앉아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이 한 때의 철새처럼 날아간다. 아름답고 행복한 상념에 잠겨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늘샘을 그려본다. 나는 늙음을 만끽하며 살고 있는 그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리고 감사한다. A장군, B장로, C사장, D목사, E권사, G박사의 이야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추억의 창고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나는 이 이야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를 소원한다.

<한기철>
원로목사, 수필가 / 행복보다 더 큰 축복(2009), 영원한 세계로의 긴 여행(2012) / 순수문학 176회 신인상(수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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